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의 생애生涯와 거경궁리설居敬窮理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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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25-03-20 16:00 조회40회 댓글0건본문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의 생애生涯와 거경궁리설居敬窮理說
이 논문은 한국국학진흥원의 ‘천사 김종덕의 학문과 사상 학술대회’(2020.11.17.)에서 발표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
추제협
秋制協, 계명대학교 철학윤리학과 조교수
1. 머리말
2. 생애 ― 이상정의 만남과 성인지학의 길
3. 단서 ― 성리설과 심경강록간보의 특징
4. 입론 ― 거경공부 중시와 정좌구중설
5. 맺음말
본 논문은 천사 김종덕의 사상, 특히 공부론을 개괄적으로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그는 대산 이상정의 직전 제자임에도 생애를 비롯해 학문과 사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이에 우선 그의 삶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성학을 위한 위기지학, 특히 인간다움의 실현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음을 밝혔다.
특히 1759년 나이 36세 때 이상정의 문하에 나아간 것은 그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동안 힘쓴 과거지학을 버리고 성인지학을 목표로 산림에은거하며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며 살기를 결심하기 때문이다.
스승 이상정은 이를 흡족하기 여기며 죽기 전까지 강학과 서신을 통해 많은 학문적 교감이 이루 어졌고, 이는 문하에 있던 여러 동문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학문에서도 김종덕은 스승의 학설을 계승하면서도 자신의 학문적 특징을 조심스레 드러낸다.
그는 성인지학의 핵심이 심성함양에 있다고 판단하여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거경 중시의 공부론을 전개했다. 즉 감정이 일어나기 전 미발 단계에서 마음의 중을 얻기 위해 경을 통한 주정공부를 강조했다.
이는 감정이 일어난 후 이발 단계에서도 지속되지만 대학을 중심으로 한 경전공부를 겸하여 그 올바른 뜻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더불어 이러한 마음과 독서의 체인공부는 실천을 병행하 지 않는다면 온전해질 수 없음을 강조했다. 이는 스승의 설을 넘어 이황의 학문에 닿아 있으며, 이를 더욱 올곧게 계승한 면이 없지 않다.
주제어
: 김종덕, 이상정, 위기지학, 거경, 정좌구중
1. 머리말
우리에게 김종덕金宗德(川沙, 1724~1797)이란 이름은 낯설다. 한때 심경 부주心經附註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고, 이에 편승하여 심경강록간보心經講 錄刊補가 부각되면서1 이상정李象靖(大山, 1711~1781)에 이어 이를 마무리 한 인물로 간혹 언급되곤 했으나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그가 이렇게 잊혀진 이유는 무엇일까.
퇴계학파는 흔히 그의 직전 제자로 불리는 조목趙穆(月川, 1524~1606) 을 비롯해 김성일金誠一(鶴峯, 1538~1593), 류성룡柳成龍(西厓, 1542~1607), 정구鄭逑(寒岡, 1543~1620)에게서 확산된다. 이 중 김성일은 장흥효張興孝 (敬堂, 1564~1633)를 시작으로 외증손인 이현일李玄逸(葛庵, 1627~1704) 과 그의 아들인 이재李栽(密庵, 1657~1730), 그리고 외손인 이상정으로 이 어지면서 뚜렷한 학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이상정은 그 문하에 많은 학자들을 배출함으로써 이러한 학적 기반 을 더욱 견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남한조南漢朝(損齋, 1744~ 1809)를 거쳐 류치명柳致明(定齋, 1777~1861)으로 계승되고, 이는 다시 김 흥락金興洛(西山, 1827~1899), 김도화金道和(拓庵, 1825~1912) 등으로 연결되어 19세기 근대 전환기를 주도한 인물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김종덕은 바로 이러한 학맥의 중심에 있는 이상정의 직전 제자이다.
그는 1759년 이상정의 문하에 나아간 20여 년 동안 산림에 은거하면서 과거지학 을 버리고 성인지학을 목표로 오직 학문에만 몰두했다. 특히 사제 간의 강학 은물론이종수李宗洙(后山, 1722~1797), 정종로鄭宗魯(立齋, 1738~1816), 이만운李萬運(默軒, 1736~1820), 신체인申體仁(晦屛, 1731~1812) 등 동학들과 교유하며 이황에게서 이상정으로 이어진 사상적 전통을 온전히 계승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그를 고산급문록高山及門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 고 있다.
기묘년에 여러 아우들과 (대산)선생에게 배우러 갔다. 선생이 높이 예우하고 은연 중에 학문 전통을 전하려는 뜻이 있어 손자 병운秉運에게 명하여 (천사)공에게 배우게 했다. 선생이 퇴서절요退書節要를 편찬할 때 많은 편지를 왕복하며 도왔다. 사람들이 “문하에 누가 학문을 좋아합니까?”라고 물으면 선생은 첫째로 공의 독실함을 칭찬했다.2
1 홍원식 외, 조선시대 심경부주 주석서 해제(예문서원, 2007), 356~365쪽.
2 李象靖, 高山及門錄 金宗德 . “己卯, 與諸弟, 負笈諸益先生. 甚敬禮之, 隱然有傳鉢之託, 而明孫秉運, 贄學于公. 先生編退溪節要, 多有往復贊助. 人問門下, 孰爲好學, 先生首稱公之 篤實.”
김종덕의 학문적 독실함과 이에 대한 스승 이상정의 믿음이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학문적 독실함이란 이상정의 사상적 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다 는 뜻일 테다. 이는 이상정 사후 유문을 수습하여 문집을 간행하거나 이후 지속적으로 이어진 ‘진유眞儒’이자 이황의 적전嫡傳임을 공식화하기 위한 일련 의 일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데에서도 확인된다.3 그렇기에 문하에서 이종수 정종로와 함께 ‘호문삼종湖門三宗’ 또는 이종수 류장원柳長源(東巖, 1724~1796)과 함께 ‘호문삼로湖門三老’로 불릴 만큼 비중 있는 인물로 인식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의 기억 속에 묻혀 버렸다. 그 이유는 아마도 오늘날 학문 풍토, 즉 학맥 전승 중심의 경향으로, 이는 관환官宦을 배제하기 어렵다 는 점과 그 스스로 처사라 하고 평생 학문에만 몰두하며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일까. 김종덕에 대한 그동안 연구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1992년 종가에서 보관하던 그의 저술을 전집 7권으로 간행하고4 10년 뒤에 이를 기념하여 기획한 학술대회가 처음이었다. 그때 4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 데5, 생애를 비롯해 문학과 저술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에 그쳤다. 그 이후 후속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장 핵심 부분인 사상적 검토는 더욱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김종덕의 사상이 이상정에 뿌리를 두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이를 묵수하기보다 자신의 사상적 입론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자양분으로 삼았다. 더욱이 선행 연구에서 이상정의 사상이 퇴계학인들 에게서 흔히 예상되는 것과는 다른 사상적 결절을 보여주고 있음을 감안 할 때6, 이는 김종덕을 거치면서 변모와 강화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확인하기 위해 이 글은 김종덕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다만 그의 사상이 공부론에 집중되어 있는 만큼 이를 중심으로 전체적 인 맥락을 가늠해 보는 것으로 한정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우선 삶의 중요한 몇 국면을 따라 그의 학문적 목표가 무엇인지를 살핀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에 사상적으로 어떠한 방법적 선택을 했으며, 그 핵심적 특징은 무엇인지를 검토한다.
짐작하겠지만 이 연구는 김종덕의 사상에 대한 시론試論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계기로 그가 남긴 문헌을 대상으로 다양한 접근 방법을 통해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 결과 그의 사상적 특징이 온전히 규명된다면 이상정 문하에서 그가 어떠한 위상을 갖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7
3 추제협, 의성 천사 김종덕 종가(경북대 출판부, 2020), 69~70쪽.
4 1992년 계명한문학연구회에서 전집 7권으로 간행했다. 여기에는 川沙先生文集(1806년) 19권10책과 考證(1774년) 聖學正路(1782년) 聖學入門(1790년) 心經講錄刊補 (1795년) 草廬問答(1796년), 立本이 수록되어 있다.
5 동방한문학회 편, 천사 김종덕의 문학과 사상(2002). 수록된 4편의 논문은 다음과 같다. 이완재, 천사 김종덕 선생의 도학 ; 이동영, 천사 김종덕 선생 시의 심상 ; 김시황, 천사 김종덕 선생의 생애와 교육 ; 김홍영, 천사 김종덕의 학문과 저술 .
6 이에 대한 대표적인 논문은 다음과 같다.
안영상, 대산 이상정의 혼륜, 리발설의 착근에 있어서 여헌설의 영향과 그 의미 , 유교사상문화연구 27(한국유교학회, 2006);
전병욱, 대산 이상정의 사단칠정설에서 리활물의 의미 , 퇴계학논집 19(영남퇴계학연구원, 2016).
7 송찬식과 이완재는 학계에 통용되고 있는 이상정-남한조-류치명으로 이어지는 학맥에 의문을 제기한다. 병조참판을 지낸 류치명을 감안한, 이른바 관환 중심의 이해에서 비롯된 기존의 학맥을 비판하고 학적 전승을 고려할 때 이상정과 남한조 사이에 김종덕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찬식, 해제 , 한주전서1(아세아문화사, 1980), 28쪽; 이완재(2002), 12~13쪽. 그러나 김종덕의 학맥적 위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특히 남한조와 어떤 사상적 영향관계에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 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을 온전히 규명하는 노력이 선행되 어야 한다. 이 연구는 그 출발점에 해당한다.
2. 생애 — 이상정의 만남과 성인지학의 길
1. 사촌마을의 입향과 선대 인물들
경상북도 중앙부에 위치한 의성義城 ,그의로운 성에 아름다운 반촌인 사촌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 태백산맥에서 시작된 일월산맥을 주맥으로한 자하산과 기령산을 배산으로 ,남쪽에 금성산을 안산으로 하며,마을 앞에는 낙동강의 지류인 기천이 흐른다.
안동김씨 도평의공파가 이 사촌마을에 정착한 것은 김자첨金子瞻 (1369〜1454)에 의해서이다. 그는 고려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의 5세손이자 김구정의 아들로 24세 때인 1392년에 사촌마을로 옮겨 왔다.
원래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김씨는 신라 김알지로부터 경순왕의 후손인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여 두부류로 나뉜다 . 즉 김방경을 중시조로 하는 선안동김씨와 고려 대광 태사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후안동김씨이다.
특히 선안동김씨 는 김숙승에 이어 김일긍金日兢,김이청金利請,김의화金義和,김민성金 每城(?~1250),김효공金錄(?~1256)과 김효인鮮印(?니253),김방경으 로 이어지며,사촌마을의 입향조인 김자첨도 여기에 해당한다.
김방경은 김숙승의 6세손이며 자가 본연本然이고,시호는 충렬忠烈이다 . 안동 풍산 회곡리에서 태어났다 . 조부는 한림직사를지낸 김민성 이다 . 아버지는 병부상서와 한림학사를 지낸 김효인 이고,어머니는 원흥진부사낭장을 지낸 송기 宋耆의 따님인 김녕송씨金寧宋氏이다.
그는 1229년 음서로 산원겸 식목녹사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가 감찰어사를 거쳐 1248년에는 서북면병마판관에,1263년에는 지어사대사에 오른다 . 1270년에는 개경환도로 인해 삼별초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토벌할 임무를 맡았고,1274년과 1281년 에는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의 고려국 총사령관으로 일본정벌에 참가하여 분전했다. 급기야 1283년에 상락군上洛君 개국공開國公에 봉 해졌으며,1300년에 8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정1품 벼슬에 추증되었다.
2세인 김선金值(?〜?)은 김방경의 장남으로 고려 공신이다. 벼슬이 상장군에 이르렀고 수안군遂安郡에 봉해졌다. 족보에 의하면 순창군부인 순창설씨淳昌薛氏를 아내로 맞아 4남 2녀를 두었다고 한다.
3세인 김승택金承澤(?〜1358)은 김선의 셋째 아들이다. 호가 대암大菴이고 시호는 양간良簡으로,그 또한 고려 공신이다. 1342년 조적曹頓의 난 때 왕을 호종하여 이등공신에 봉해졌고,1352년에 이제현李齊賢,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그해 10월에는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며 중서평장사中書韓事로 벼슬에 서 물러났다고 한다. 배위는 낙랑군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이며 그 사이에 2남 3녀를 두었다.
4세인 김면金冕(?~?)은 김승택의 둘째 아들로 자가 사고師古이다 . 조카인 김구용의 『 척약재집 惕若齋集』 에 나오는시문에 강릉의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는 언급이있다 . 배위는 인비仁 庇를 지낸 박순朴淳의 따님인 음성박씨陰城朴氏이다. 그 사이에 1남 1녀 를 두었는데,그 아들이 바로 김구정이다.
김구정金九鼎(?~1389)은 초휘初默' 충忠이며,안동김씨 5세이자 도평의 공파의 분파조이다 . 아버지는 김면이고 어머니는 인비仁庇를 지낸 박씨朴氏의 따님이다. 배위는 전서典書를 지낸 장성미蔣成美의 따님인 아산장씨牙山蔣氏이며 그사이에 외아들 김자첨을 낳았다.
김구정은 고려 말에 도평의都評議의 지인知印을 지냈다. 말년에는 세거지인 안동회곡에서 자연에 은거하며 자족적인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당시현실은고려 멸망과 조선개국이라는 정치적변화가 연이어 이어지 는 혼란한상황이었다 . 그는 이러한암울한현실에서 후손들이 오랫동안편히 뿌리내릴수있는 새로운 세거지를 물색하고자 했다 .
무엇보다 난세에는 너무넓지도 , 너무깊지도 않은 곳이라야 목숨을 보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 아버지의 유언때문이었을까 . 김자첨은 30대에 고려명신의 후손에 대한 예의로 함길도 감목관監牧官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 그대신 가족을 사촌마을로 옮긴뒤 이마을을 조성하는데 심려를 기울였다 . 특히 풍수상 이마을은 큰인물이 난다는 명당의 조건인 금반형기 金盤形氣의 형세를 띠고 있었으나 마을서쪽에있는 광활한 들판이 기의 흐름을 끊고 있었기에 이를 보호하며 건마산 쪽 절벽을 시각적으로 가리기 위해 서림西林,가로숲을 조성했다.
이후 7세인 효온 ,효항 두아들 가운데 효온은 극해를 , 효항은 영진을 두었다 . 8세인 극해에게서 광수 ,광복 형제로 이어지고 , 다시광수는 당으로 ,광복은 언걸로 그대를 이었다 . 당의 아들이자 11세인 세우는 사원,사형,사정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사촌마을에 후손들이 뿌리 내리게 되었다. 이중 대표 인물 몇 명만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9세 송은松隱 김광수(1468~1563)는,자가 국화國華이다. 아버지는 지례현감을 지낸 8세 김극해이고,어머니는 사용 지낸 강재姜載의 따님인 연안강씨延安姜氏이다. 선배위는 만호를 지 낸 남치南畤의 따님인 영양남씨英陽南氏로,그 사이에 아들 김당金塘 과 딸 하나를 낳았다. 후배위는 장홍張弘의 후예로 첨정僉正을 지 낸 장일신張日新의 따님인 순천장씨順天張氏인데,그 사이에 딸 다섯을 낳았다.
김광수는 천성이 온화하고 용모가 단정하며 어릴때부터 시에 능했다 . 1501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당시 함께 수학했던 인물로는 금원정琴元貞,이수정李守貞, 김안국金安國 등이 있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오래가지 못했다.
잘알려져 있다시피 이때는 사화가 연이어 일어나던 시기였다. 1498년에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金宗直의「조의제문 弔義帝文」이 빌미가 된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이어 1504년에는 연산군 의 모친인 폐비윤씨의 죽음에 연루된 이들을피의숙청에 내몰았던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김광수는 이러한 연산군의 폭정이 심상치 않음을 예견하여 벼슬에 뜻을접고 고향으로 돌아왔고 ,천만다행으로 죽음을 모면할수있게되었다 . 그런데 이런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가 어렸을때 늦은밤먹이를 쫓던 뱀이 배에 떨어져 죽을뻔했던 일 ,청년시절 지례현감으로 있던 아버지를 뵈러 가던길에 산적을 만나죽음을 모면했던 일이 있었다 .보통사람에게는 한번도 일어나지 않을 이러한 행운이 ,그에게는 세번이나 주어졌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래서 일까 .김광수는 세상에 대한 더이상의 미련을 버리고 북촌에 머물면서 학문에만 전념했다. 비록 집안이 가난하여 의식조차 제대로 잇기 힘들었으나 이를 불만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집안의 효성과 우애로 이를 극복했다.
가령 지례공知禮公이 일찍 돌아가시자 수십년 동안어머니를 모시면서 안색을 살피고 뜻을받드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안동에 살던 아우가 오기로 한 날이면 매번 문에 기대어 기다리다 반드시 같이 밥을 먹곤 했다고 한다.
그가 40대에 지었다는 「경심잠警心箴 십장十章」은 아마 이러한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은것이 아닌가한다 . 서문에서 그는 마음의 조사操捨와 선악善惡은 나에게 달려있으니 잠시라도 소홀히 할수없고 인간이 금수와 다른점은 예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요순시대의 순후한 풍속은 사라지고 사풍士風이 비루해진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자손에게 이잠언을 경계의의미로 남긴다고 했다.7〉
1. 사친事親: 어버이를 봉양하다
2. 보군輔君: 임금을 보필하다
3. 제묘祭廟: 제사를 받들다
4. 정가正家: 집안을 바르게 하다
5. 우애友愛: 우애 있게 지내다
6. 근형謹刑: 형벌을 삼가다
7. 폐참廢讒: 험한 말을 하지 않다
8. 신색愼色: 여색을 삼가다
9. 결우結友: 친구를 신중히 사귀다
10. 안빈安貧: 가난하면서 분수를 지키다
이러한 아버지의 가르침에 넷째따님이자 이황의 고제 류성룡의 모친인 김씨부인은 강직함이 남달랐다 . 전하는 이야기를 보면 ,사촌마을에 우물이있었는데 이를 팠을때 붉은 황토물이 나왔다 . 그물을 마시면 큰인물을 낳는다는 말에 김씨부인은 주저하지않고 마셨다고한다 또한 마을이 명당에 위치해 삼정승이 난다는 전설에 출산을 앞두고 그 기운을 받기 위해 왔다 .
부친이 이를 외손에 줄수 없다며 내치는 바람에 돌아가다가 로숲에서 아기를 낳았다고 한다 . 모두 류성룡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종손의 말에 따르면 ,이는 큰인물의 탄생에 얽힌 전설일뿐이며 실제로는 종가의 안방에서 아기를 낳았다고 한다.
김광수는 유유자적한 삶에 만족했다 . 마침 주변에 왜송矮松이 있었는데,그 푸르고 울창한 멋을 사랑해 자신을 ‘송은처사松隱處士 ’라 자처 하기도 했다 . 또한 앞산 미천변에 영귀정詠歸亭을 마련 하여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가하며 ,때때로 자연을 벗삼아시를 읊기도했다 . ‘ 영귀 ’ 란 이름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증점曾點의 말로 “ 기수에서 목욕하며 무우에서 바람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8) 9라는 글에서 취했다 . 그렇게 그는 평생옛성현의 아름다운말과 선행만을 흠모했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1674〜1756)은 이런 그를 중국의 도연명陶淵明과 고려의 길재吉再에 비유했고 9 외손인 류성룡은 '독행군자 篤行君子’라고 칭송했다.
7) 金光粹,『松隱先生文集』권2,「箴,警心箴j,"心之操捨善惡在吾一身,豈敢斯頃忽哉. 夫人之異乎禽獸者,有禮義也,人無禮義可謂人乎.唐虞邈矣,淳風日漓而士習士習鄙陋, 識者寧不寒心.是故作箴十章,以自警爲一家子孫之權戒云
8) 『論語』권11,「先進」,"… ‘點! 爾何如鼓瑟希,鏗爾,舎瑟而作. 對曰,‘異乎三子 者 之 撰 子 曰 , ‘ 何 傷 乎 . 亦 各 言 其 志 也 日 , ‘ 莫 春 者 , 春 服 旣 成 . 冠 者 五 六 人 , 童 子 六 七人,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夫子喟然歎日,‘吾與點也
9) 李光庭,『訥隱先生文集』권7,「序,松隱遺稿序」,“帶索而行歌,黔婁不戚戚於貧賤, 不汲汲於富貴,而陶靖節取以自贊,堯夫先生布被藜羹,….”
평생 입으로 재산을 경영하는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오직 옛사람의 아름다운말과 선행을 노래로써 읊고칭송했다 .그러므로 비복들도 익히듣고 전하기까지 했다 . 아 ! 공은독행군자篤行君子라 할만하다 . 비록옛날의 곤궁하면서도 고상한뜻을 기른선비라하더라도 어찌이보다 더하겠
는가.10
그러나 김광수는 1514년 ,나이 47세때에 하나뿐인 아들의 죽음을 겪게된다 .설상가상으로 출산을위해 친정에 가있던 며느리마저 충격에 쓰러지고 만다 . 다행히 뱃속의 아이는 세상에 태어났지만 산모의 목숨은 보전하지 못했다 . 그는 갖은노력으로 부모를 잃은손자를 키워냈다 . 그손자가 바로 김세우金世佑(1514〜1580) 이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이 즐겨쉬던 왜송의 이름을 만년송萬年松으로 달리 불렀다 . 문중을 이을 유일한혈육과 그자손들이 이나무처럼 오랫동안 청청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때 지은 시 「만년송정운萬年松亭韻」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靑苔一逕隔紅塵,
幽興相尋日轉新.
車馬縱然嫌地僻,
이끼 낀 오솔길이 홍진에 막히니,
그윽한 흥을 찾아 날로 새롭네.
후미져 외진 곳 차마 어이 오랴마는,
집이 가난하다 앵화櫻花야 싫어하랴.
산을 보고 앉았으니 어깨는 서늘하고,
베개 돋워 잠이 드니 푸른빛이 낯을 덮네.
만년송 그늘 아래 한가로운 이 몸이라,
아름다운 사시풍경 나 홀로 기뻐하리.
그런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져 김세우는 이후 삼형제를 낳았는데,만취당 김사원,독수헌獨秀軒 김사형金士亨(1541~?),후송재 後松齋 김사정金士貞(1552~1620)이 그들이다. 15세손인 김양좌金良佐는 「송은부군만년송운松隱府君萬年松韻」이란 제목으로 이 만년송에 얽힌 바람이 이루어졌음을 이렇게 읊었다.
소나무 그림자 일찍이 조상 자취 더하고,
푸른 수염과 붉은 껍질은 오래될수록 새롭네.
가지에 걸린 바람과 달빛은 시상을 더하고,
줄기는 향기를 풍겨 흥취가 적지 않네.
늠름한 자태 대하니 그리운 마음 생기고,
읊은 시마다 상자에 가득 쌓이네.
그대 심어진 날 묻지 않아도,
이미 손자로 이어져 육세나 된다네.
松影會經杖屨鹿,
蒼髯赤甲古猶新.
枝籠風月詩仍富,
榦帶芳香興不貧.
長對糾姿存感慕,
毎吟遺什閱箱巾.
憑君莫問裁培曰,
已是孫今六世人.12)
1563년 김광수는 죽음을 예감한다. 목욕재계하고 궤几에 기대어 손가락을 꼽으며 “ 족足하다 . ” 13 라고 말한뒤 숨을 거두었는데 ,피부가 살았을때와 같았다 .이후 1685년에 사림에 의해 장대서원藏彳寺書院에 배향되었다.
다음으로 12세 만취당晚翠堂 김사원金士元(1539~1601)은,자가 경인景仁이다 . 김광수의 증손으로,아버지는 통례원 인의를 지낸 김세우이고,어머니는 김만겸金萬謙의 따님인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선배위는 전적을 지낸 남송南松의 따님인 영양남씨英陽南氏로, 그 사이에 1남인 김준金濾과 4녀를 두었고,후배위는 안동권씨安 東權氏로,그 사이에 1녀를 두었다.
김사원은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였고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을 지녔다 .전하는 이야기하나 .하루는 얼어죽은사람을 보고 측은한마음에 옷을벗어덮어두었다가 집안어른에게 고하여 묻어준일이 있었다 . 이일로 보아 부모와 친척들에게는 어떻게 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는 어릴때부터 증조부 김광수 에게서 배웠다 . 1560년 류운룡柳雲龍과 함께 이황의 문하에 나아갔는데 ,이때 이황은 주희朱熹의 시 「무이관선재武夷觀善齋」를 써주며 “그대는 나의 이 뜻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14〉시의 내용은 이렇다.
책상을 젊어지고 어디서 왔는지,
오늘 아침 이 자리에 함께 앉았네.
날마다 힘써 남김없이 하여,
서로 살피며 함께 노력하네.
이후 그는 과거지학科擧之學을 접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어 학문에 전념했다 .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독서와 문답을 통해 심법心法을 체득하고 음양오행의 근원이나 사람의타고난심성등에 심취했다. 금난수琴蘭秀,이덕홍李德弘,조진趙振 등 동학과 교유하며 ,스승을 모시고 청량산의연대사 ,만월암 ,월란암 등에 머물면서 강학에 힘쓰기도 했다.
하루는 산사에 있으면서 부실한식사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깊이빠진 나머지 병을 앓은적이있었다 .이황이 직접증상을 살피고 처방을 내리며 “공은 기가 몹시부실하여 추위나 더위로 인한 환우를 벗어나기어렵다 . 고인들도 학문하는것을 고생스러운일이라고 말하기는했지만 ,어찌 병이들어 부모를 근심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는가.”15라고 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1570년 김사원은 스승이황의 죽음을 목도하게된다 . 이를 슬퍼한나머지 3년동안 잔치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후 집안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은채 그는 “선비가 세상에 살면서 의롭지않은일로 봉록을 구해서는 안되며 오직 본분에 힘쓰면서 허물이 없기를 바라야 한다. 하물며 언행을 신중히하고 독서를 부지런히 하며 농상農桑에 힘쓰는것 ,이세가지는 우리스승의 가르침이니 감히 힘쓰지않을수 있겠는가 ? ” 16 라고 하며 평생분수를 지키면서 허물없는 삶을 살았다.
또한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면서도 이웃의 어려운이들을 돕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가령 ‘김씨의창金氏義倉’이라는 사창을 열어쓰고 남은것을 보관한뒤 흉년이 들면 어려운 이웃들에게 빌려 주곤 했다 .더불어 여씨향약을 바탕으로 ‘사촌리약沙村里約 ’을 만들어 마을의 동규로 삼아시행함으로써 지역사회의 질서를 안정화하는데 에도 공헌했다.
김사원은 1576년에 종택 60여 칸을,1584년에는 만취당을 건립 했다. 특히 만취당은 송은공이 심은 향나무,즉 만년송萬年松 아래에 지은것이다 .이곳은 변함없는절조인 ‘세한歳寒 ’의 뜻을 실어 학문을 닦고 후학을 양성하기위한 공간이었다 .이후1727년 , 1764년 증축에 이어 1789년에 중수가 이루어졌다. 이때 중수기는 김종덕이 썼다 .내용인즉 ,이곳이 사촌안동김씨문중의 강학과 집회장소로 활용되었을뿐만아니라 이상정의 강론이 수차례 이루어졌고 류성룡,장현광,신열도,유원지 등 여러 학자들이 방문하여 시를 읊었을 정도로 의미 있는 공간임을 기록했다.
또한 그는 1592년 임진왜란때 의병을 규합했고 ,의성정제장整齊將에 추대되자 군량미 조달에 공을세워 이후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에 봉해 졌다 . 1601년 운명한뒤 1759년 사림의 뜻에 따라 후산정사後山精舎에 배향되었다. 이상정은 행장에서 그의 삶을 이렇게 정리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고 매우후덕했다 . 어려서부터 사람과 사물을 사랑하는 뜻을 지녔고 ,성장해서는 학문의 힘을 빌려 이러한자질을 이루었다 .그렇기에 존심과 덕행이 모두 천리와 인륜을 근본으로 삼았으며 억지로 노력하여 성과를 이루고자 하는 사사로움에서 나오지 않았다 . 가슴에 품은 덕량을 펼치지 못하고 초야에 묻히고만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공은 심오한뜻을 펼치지는 못했으나 굶주리고 궁핍한자들을 구휼하여 타인에게 사랑을 베풀며 ,향약을 조직하고 규약을마련하여 교화가 다른이에게 미쳤다 .이러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았으니 공효가 얼마나 드러났는가는 단지 만난때가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본분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17)
김사원의 저술은『대학질의大學質疑』와『어록해語錄解』등이 있 었으나 유실되었고,현재는『만취당실기晚翠堂實記』2권 1책이 전 한다. 이 책은 6세손 김종덕이 필사한 초고가 전해 오다 1910년에 11세손 김회종金會鍾이 목판본으로,1988년에는 11세손 김 면호金冕鎬가 필사로 다시 간행했다.
10) 柳成龍,『西厓先生文集』권19,「碑碣,外祖進士金府君碣鉻」,"平生口不道營産事, 惟 古人嘉言善行,詠哥娇再道之不輟.故婢僕亦習聞而能傳之.嗚呼!公可謂篤行君子矣.雖 古之處約養高之士,何以加此.”
11) 金光粹,『松隱先生文集』권1,「詩0七言,萬年松亭韻」.
12) 金良佐,『沙洲遺稿』권상,「七言律詩,松隱府君萬年松韻」.
13) 李光庭,『訥隱先生文集』권15,「行狀,松隱先生金公行)tt, “沐浴更衣,隱几屈指自 語曰,足矣,有頃倐然而逝
14) 李象靖,『大山先生文集』권49,「晚翠堂金公行狀j,“庚申,謁文純李先生于陶山,請留 受業.先生書贈武夷觀善齋詩日,君能喩吾此意否.公拜受服鷹,自是絶擧子業,專意爲 己之學 ” 번역은 권경열 외 역,『대산집』,한국고전번역원,2009〜2012를 참고하되
16) 李象靖,『大山先生文集』권49,「晚翠堂金公行)tt,“士子處世,不可非義干祿,惟盡力 於本分,爲庶幾寡過.况愼言行,勤讀書,務農桑三事,我師敎之所存,敢不勉乎
7) 李象靖,『大山先生文集』권49,「晚翠堂金公行)tt,“公天資粹美, 德量深厚. 自其幼少 已有愛人及物之志,旣長而濟以問學之力.則其存心制行,皆本諸天理民彝,而非出於強 勉有爲之私也.惜其抱德不售,埋沒於草澤之中.不得展布其所蘊,然鯛飢恤乏,仁愛有 以施於物,設約立規,敎化得以推於人.旣有是心以爲之本,則其功效之近遠廣狹,特在 夫遇不遇如何耳.有何加損於本分哉
2. 천사 김종덕의 가계
김종덕은 도평의공파의 지파가운데 양진당파養眞堂派에 속한다 . 양진당파는 김상린을 파조로하며 ,그아들인 양좌,성좌,현좌세형제에게서 비롯된다 .이중주손은 양좌에게서 이규 두응 종익으로 그대를 이었다 .이하 성좌는 이극 ,종응 ,종석으로,현좌는 이모,남음,종덕으로 이어진다.
양진당養眞堂 김상린金尙璘(1616~1675)은,자가 계옥季玉이다. 김준金濾의 아들이며 김상원金尙瑗의 동생이다 .그는어릴때부터 형 상원에게 학문을 배워 가학을 전승했다 .1673년 현령의 천거로 서령署令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세 아들인 양좌良佐,성좌聖佐,현좌賢佐 중 양좌와 성좌가 소과,대과에 각각 합격하여 향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만년에는 양진당을 짓고 후학양성에 힘썼다 .사후에 통훈대부 사복시정에 추증되었으며,모계某溪 김흥락金鴻洛(1868~1933)은 「묘갈명」에 다음 과 같이 썼다.
아름답다 선생이여
천성이 빼어나고 인품도 뛰어났네.
마음은 상쾌하고 깨끗하며 뜻은 항상 맑고 높네.
산림에서 본성을 길러 마음은 한결같고 참되네.
오로지 시와 예를 공부하여 사람의 도리 독실하게 행했네.
자질을 감추어 등용되지 못했으니 세상에 그 책임이 있네.
이미 북돋우고 복토하였으니 남은 은혜 후손에 흡족하네.
선조로부터 광채를 끼쳤으니 어찌 후손에게 증표가 없겠는가.
지금에 그 자취 나타나니 감히 부끄러운 말 없을 것이네.18)
김흥락은 김상린이 심성을 함양하고 학문에 힘써그이름이 세상에 알려졌음에도 등용되지 못한안타까움을 토로했다 . 그러나 후손에게 모범이 될부끄럽지않은 삶을 살았기에 그또한 중요한 가르침임을 강조했다.
15세 김현좌金賢佐(1642〜1692)는 자가 진경進卿이다. 배위는 김 장金碩의 따님으로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그 사이에 4남 2녀를 두 었다. 족보에는 그가 통덕랑을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16세 김이모金履模(1669~1745)는 자가 자경子慶이다. 선배위는 도이백都爾伯의 따님으로 팔거도씨八莒都氏이고,후배위는 이수강李壽 崗의 따님으로 진성이씨眞城李氏이다. 그들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 다. 2남은 남응,동응이며,2녀는 각각 김응화金應和,조승규趙承圭 와 혼인했다. 족보에는 그가 통덕랑을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17세 김남응金南應(1702~1762)은 자가 중여重余이다. 배위는 김 주의金冑疑의 따님인 순천김씨順天金氏이며,그 사이에 4남 4녀를두었다. 4남은 종덕宗德,종경宗敬,종발宗發,종섭宗燮이다. 4녀 중 막 내 는 요 절했으며 그 외의 따님들은 각각 류태춘柳泰春,홍시정 洪始挺,정수鄭梭와 혼인했다.
김남응은 천성이 후덕하고 효심이 깊었다 .아버지의 병으로 때가아닌 은어를 구해구완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릴때 아버지로 부터 가학을 전승했다 . 또한 이상정과 교유했는데 주고 받은 편지가 『대산선생문집大山先生文集』에 전한다.
이러한 그는 아들사형제를 두었는데 ,배위인 순천김씨가 지당에서 여의주네개를 얻는 태몽을 꾼뒤에 낳았다고 한다 .자녀교육을 철저히 한만큼 이들모두 학행이 높았다 . 유림에서는 네 형제를 '사체 선생四棣先生’이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김종덕의 아우들에 대해 살펴보면,우선 구재苟齋 김종경金宗敬 (1732〜2785)은,자가 직보直甫이다. 선배위는 최구석崔龜錫의 따님인 경주최씨慶州崔氏이고,후배위는 이극혐李克鎌의 따님인 진성이씨眞城 李氏이다. 그들 사이에 2남 4녀를 두었다.
그는 용모가 맑고순수했다 .형종덕이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두동생을 고운사로 보내 학문에 힘쓰도록 했다 .고운사는 이상정이 50대 에 즐겨 이용하던 강학처였다 . 여기서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읽는데 익숙히 할수 있었다 .20세 때인 1751년 에는 이상정의문하에 나아갔다 . 스승을 비롯해 동학들과 치열한 학문적 강론을 하는가 하며 ,1767년 스승이 고산정사를 건립할때 이종수와 함께 그일을 주관 했다 .이렇게 소호리에서 보낸10년의 기간은 그에게 자신의학문과 심성을 성숙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상정은 이런 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지상志尙이 참으로 좋으니 앞날의 행보가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19 20 21)
한편 김종경은 1774년 증광별시에 합격하여 가주서假主書로 관직에 나아간뒤 공직자로서 모범적인 생활을 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曰記』에 몇 가지 기록이 보인다. 1781년 6월 24일에 함인정에서 왕과신하들이 모여 경서를 강독할때 영의정이었던 서명선徐命善이 그와 동생 김종발의 인품을 칭찬했다.
또한 1783 년 6월 9일에는 영남어사 심기태沈基泰가 지역 민정을 살피기 위해 암행한 결과많은관리들이 벌을받은가운데 정조가 “성현찰방김종경은 치적뿐만 아니라 품행이 특이하고 빼어난자질이있으니 품계를 올려주라 . ”는 전교를 내렸다 .21 그이후 충의위부사과 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귀향했다.
김종경은 고향에 돌아와서 어머니를 봉양하며 그동안 미뤄두었던 학문에 전념했다. 그런 그에게 이상정은『심경강록간보』의 교정을 맡긴다 .여기서 말한 『심경강록간보』는 『심경강록 』의 교정본이다 .후술하겠지만 원래 이덕홍과 이함형이 『심경』 중에 어려운부분을 이황의 학설을 참고하여 주석한 『심경강록』 을 완성했으나 이를교정하지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이에 이상정은 그에게 이일을 맡겨 완성하도록 했던 것이다 .안타깝게 그또한 이를 마무리하지 못한채 생을마감한다 .이후 동생 김종섭이 이어받았으나 유명을 달리했고 ,급기야 형 김종덕이 이를 맡아 완성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정이 김종경에게 이일을 맡긴것은 그의학문과 무관하지 않다 .즉 심학에 특출한데가 있었다 . 『대산선생문집』에 수록된 서신을 보면 ,이상정은 늘 “대개 입지立志를 우선으로 하되 거경居敬과 궁리窮理를 길로 삼으며,계속 독실篤實하고 간절懇切하게 행하면서 외물에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을 따라가면 크게 성취할수 있을것 입니다 .이는 오직힘쓰기에 달려있습니다.22 라고 당부했다 . 그 또한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거경궁리에 대한 공부에 집중했던것으로 보인다 .서신의 문목에 대한 내용이 주로마음과 성정등에 치중해있는것에서 이를 짐작할수있다 . 이상정은 이러한 물음에 존양성찰에서 경 공부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
보내온편지의 내용은 억지스럽고 급박한 뜻이있는 듯 합니다 .부디 이것을 내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일상에서 책을 보고 몸을 단속하는 공부에 힘을 써서 저절로 발전이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의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여러생각이 서로 이어지는것은 또한 통찰력이 있는 사람도 있는 병폐입니다. 만약 억지로 버리려 하면 더욱 어지럽게 일어납니다.
‘경敬’ 한글자를 지니는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되는 처방입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 행하지 못하면 또한 조장助長의 병폐가 쉽게 생겨납니다 .모름지기 보고 듣는 ,용모와 말투에서 존양存養과 성찰省察의 공부를 더하여 깊이 젖어들면서도 나태함에는 이르지않게하고 ,치밀하게 단속하면서도 절박함에는 도달하지않도록하십시오 .오직 뜻을 두는것도 아니며 뜻을 두지않는것도 아닌 사이에서 돌보며 잊지말아야합니다 .이같이 오래하면 저절로의리가 두루 미치고 심지가 굳어져 생각이 어지러워지는 근심이 점차사라질 것입니다.23)
김종경의 저술로는『견문록 과『구재선생문집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다만 임필대任必大의 강와선생문집 剛窩先生文集에 그가 지은 만사栽詞가,후손인 김항회가 편찬한 『영남선유묵적』에 1784년 9월에 쓴 수신자를 알 수 없는 간찰이 실려 있다.
다음으로 용연容淵 김종발金宗發(1740〜1812)은,자가 경온景蘊이다. 배위는 이헌주李憲周의 따님인 여주이씨驪州李氏이다. 그는 어려 서부터 재능과 지혜가 출중했다. 20세 때인 1759년에 동생 종섭 과 함께 이상정 문하에 나아갔다. 주로 사서四書를 중심으로 한 성리학에 관심을 두었던 듯하며 이상정은 형들과 마찬가지로 그 에게도 조존操存 등의 마음공부에 근거한 학문방법을 제시하고 있다.24〉
학문에 경계의 다만 대한 열의가 지나쳐 때론 말을 듣기도 했다. 한 예로 그가 지행知行의 분별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었 다. 이에 대해 이상정은 지나친 분별을 걱정하며 그 분별에 치중하기보다 차분히 이 둘에 집중하다 보면 자연스레 합일되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너무 조급한 마음을 갖지 말라고 당부한다.
보내온 편지에서 지知과 행行이 두 가지로 구분된다는 의문을 제기했는데, 이렇게까지 살펴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대는 나이가 아 직 어리고 학문도 깊지 않으니,어찌 이러한 수준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 까. 오직 고개를 숙이고 마음을 낮추고서 착실히 노력하며 오랫동안 지속 하여 점차 젖어들어 매우 익숙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저절로 하나로 융합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공효를 헤아려 미리 근심과 의구심을 자아낼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공자가 말한 한계를 긋는 것이며 맹자가 말한 조장 助長의 병폐이니,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25
이어 1777년에 증광별시에 급제하여 가주서로 관직에 나아갔 다. 1779년 장릉별검을,1782년에 종부시주부 등을 역임했다. 1797년에 사헌부지평과 이어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대신 이듬해 1월에 사직 상소를 올리며 다음의 내용을 진언한다.『일성록日省錄』에 의하면,원자元子의 올바른 교육을 위한 기구를 청원하거나 동궁東宮 관료들의 올바른 근무를 위 한 대책을 올린다. 이렇게 벼슬과 무관하게 현실에 대한 적절 한 관심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26〉
김종발은 형과 마찬가지로 고향에 돌아와 류장원,이우李瑀,이치준李樨春 ,황학중黃澤中등 동학들과 함께 스승의 학설에 근 거하여 자신의 학문을 세우는 데 매진했다. 또한 세 형제가 죽자 집안의 자제들에게 그들의 유집 초고를 보존할 것을 당부하여 가학을 전승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그 나마 이 정도의 자료라도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저술로는 『유가요람儒家要覽』3권과 『예서禮書』 2권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용연선생일고容淵先生逸稿』4권 2책이 있어 그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1941년에 6세손인 김기호金基鎬 등이 간행했다.
마지막으로 제암濟庵이 김종섭金宗燮(1743〜1791)은,자가 홍보弘輔이다. 배위는 류형柳灃의 따님인 풍산류씨豐山柳氏이다. 그는 어릴때 부터 조용하고 침착하며 총명하여 재능과 지혜가 뛰어났 다. 특히 시문에 능통해 13세인 1755년에 매화梅花를 감상하며 맏형 김종덕이 낸 운자에 시를 지을 정도였다. 그 시를 소개하 면 다음과 같다.
춘삼월 봄소식이 찬 매화에 이르니,
이미 동풍이 이 땅에 옮을 안다네.
머리 돌려 함께 공부한 친구들 생각하니,
누가 조갱調羹의 재주 있는지 알 수 없네.
三春消息到寒梅,
已覺麵也上回.
回首歷論同學子,
未知誰是調羹才.27
김종섭은 1759년 셋째 형과 함께 이상정 문하에 나아가 배웠다. 사서를 중요한 교재로 삼았으며,주로 심성과 관련된 내용 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28〉더불어 일상의 실천에 힘쓰고자 『소학小學』에 따른 가르침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승 이상정은 그 실천 또한 의리의 깊음을 함께
수반해야 올바른 실천에 이를 수 있다고 충고했다.
보내온 편지에서 병통을 설명한 것이 매우 상세하고 약을 쓴 것이 매우 타당하니,이대로 나아간다면 이후에는 다행히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자는 일찍이 “불행히 때를 지나쳐 배우는 사람은 큰 것을 공부하되 작은 것을 겸하여 보충하는 것도 무방하다.”라고 말했으니,경敬이라는 한 글자가 바로 겸하여 보충하는 방도입니다.
진실로 곳에 따라 수습하고 때에 따라 진작하여 일상의 행동하고 말하는 사이에서 항상 종사함이 있는 것 처럼 하십시오. 그리고 의리를 밝힌 글을 가슴에 쏟아 북돋아서 오랫동안 차춤차춤 쌓으면 자신도 모르게 저절로 성취를 이룰 것입니다. 지금 오로지『소학』을 절도節度로 삼고『논어』,『맹자』등의 책을 곁들이기만 한다 면,아마도 의리가 길러지는 성과가 깊지 못하고 한갓 메마르고 낄끄러워 지는 근심만 있게 될 것입니다.29)
그는 1768년 생원시에 합격했다. 이어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인 1775년(영조 있년) 5월에는 전강殿講 대상자로 뽑혀 임금이 참석한 집경당集慶堂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교육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김종섭은 벼슬길에 더 이상 뜻을 두지 않았고 오히려 형들처럼 고향에 돌아와 위기지학을 학문의 목표로 심성수양에 전념했다. 스승 이상정을 비롯해 이종수,류장원,정종로,김굉, 류범휴,이완,이만운,류성휴,조우원 등을 직접 만나 강론하거나 서신을 통해 의문을 해소하는 등 자신의 학문적 성숙을 이 루는 데 힘썼다. 그러나 형 김종경이 남긴 미완의 작업인 『심경강록간보』를 편찬하던 중 49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저술로는 『제암집濟庵集』8권 4책과 『대산서절요大山書節要』 5권이 현재 전한다. 이 외에도 이상정과 문답서신을 모은 『사문기문록師門記聞錄』을 비롯해 이상정의 임종을 앞둔 50일간의 기록을 정리한 『대산선생고종록大山先生考終錄』,향촌사회의 무속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사촌동신문沙村洞神文』등을 남겼다.
18) 金鴻洛,『某溪先生文集』권6,「墓碣銘,贈司僕寺正養真堂先生金公墓碣銘」,“猗歟! 先生.天挺人豪.胸次灑落,志常淸高.林泉頤養,一心是眞.工專詩禮,行篤彝倫.鰛 櫝不售,世任其責.旣杯旣墣,以洽遺澤.匪貽自先,曷證于昆.玆著實蹟,罔敢愧言
19) 李象靖,『大山先生文集』권9,「書,答崔汝浩」,"金直甫,志尙儘好,未知前頭地步何 如耳.”
20) 『承政院日記』,1781년(정조 5년) 6월 24일자,“命善日, 義城文官金宗敬,乃是嶺南 士族,分館時誤付國子,故不肯從仕,殆近十年,嶺人莫不稱屈.且其弟宗發,登科後卽 隸槐院,方爲別檢,兄弟間分館之各異,亦非綜核之政.…"
21) 『承政院日記』,1783년(정조 7년) 6월 9일자,“仍命書傳敎日,省峴察訪金宗敬,治績 之外,行誼特異,宜有獎拔之擧,又聞是嶺人,令該曹,出六調用."
22) 李象靖,『大山先生文集』권29,「書,與金直甫[壬申]」,“蓋以立志爲先,而以居敬窮理 爲門路,繼以篤實懇切,而不爲外物所遷奪.則循此以往,大有事在.惟勉之而已
23) 李象靖,『大山先生文集』권30,「答金直甫」,“來諭似有扭捏急迫之意. 幸須放下,低 頭用力於日用看書檢身之功,自當有進步處也.一事未已,諸念相續,亦通人之病.若強 加排遣,愈見紛拏.所拈一敬字,是直指單方.然不善用功,亦易生助長之病.須就視聽 容貌辭氣上,加存養省察之功,優游漸漬而不至於怠惰,密切緊束而母底於迫切.惟非著 意非不著意之間,照管勿忘.如是久之,自然義理浹洽,心志凝定,思慮紛擾之患,漸減 分數.”
24) 金宗發,『容淵先生逸稿』권1,「上大山李先生別紙[論語問目附先生答]」;「上大山先生 別紙[中庸問目附先生答]」.
25) 李象靖,『大山先生文集』권34,「答金景蘊[癸未]」,“來書知行判二之疑,不易點此.然年紀尙少,涉學尙淺,安得免此境界.惟低頭下心,著實用力,積久漸漬,到得純 熟,自然打成一片,正不須計較功效,預生憂疑.此先聖所謂獲,孟氏所謂助長之病,切 須戒此也
26)『日省錄』1798년(정조 22년) 1월 18일자; 金宗發,『容淵先生逸稿』권1,「疏,辤 掌令疏」,“…伏願殿下,詢訪耆舊,延聘丘園,使端潔博雅之士,儼恪謹厚之倫,羅列於 前後左右,迭次於晝夜朝夕,幽僻奇誕之書,不習於聰明,戲慢俚俗之態,不設於身體. 則所見皆正事,所聞皆正言,所行皆正道,而習與智長,化與心成,將見日就善,而不自 覺矣.三代所以能長久者,以輔翼太子,有此具也
27) 金宗燮,『濟庵集』권1,「詩,梅花j.
28) 金宗燮,『濟庵集』권3,「上大山先生[癸酉]別紙[大學O附先生答]」;「上大山先生[辛卯] 別紙[論語]」;「上大山先生[壬辰]別紙[孟子]」.
29) 李象靖,『大山先生文集』권35,「答金弘輔」,"來書, 說病甚詳,下藥甚當,循是以往, 庶有後廖之幸.然朱先生嘗說不幸過時而學者,進乎大而不害兼補乎其小,蓋敬之一字, 卽其帶補之方.荀能隨處收拾,隨時提掇,日用動息語默之間,常若有所事焉,以義理文 字,灌漑培殖,積累浸漸之久,不覺自底於有成.今專以小學爲節度,而旁及於語孟等書, 則竊恐義理滋養之功未深,而徒有枯燥硬澀之患矣
한 인물의 일생을 간명하게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거기에는 많은 곡절이 있기 때문이다. 김종덕의 생애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일생을 편의상 나눈다면 아마 이상정의 만남 전후와 그 부재의 시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김종덕은 7세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스스로 배우기를 즐겨했다. 15세 때에 조부로부터 독서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 이후 이에 힘입은 바 크다고 했다. 16세 때에는 퇴계집退溪集을 얻어 밤낮을 잊을 정도로 심취했다. 이후 근사록近思錄를 비롯해 성리대전性理大全 대학大學 주자서朱子書 등 주로 성리서性理書를 연이어 탐독했다. 이렇게 그는 가학을 계승하면서 자득自得을 통한 학문적 성취 또한 나날이 깊어지고 있었다.
한편 김종덕은 과거지학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29세 때인 1752 년에 향해鄕解 양시兩試에, 이듬해 생원生員 회시會試에 합격했다. 몇 년의 공백 후 36세 때는 별과別科 향시鄕試에도 합격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였다. 그 사이 과거지학에 대한 회의로 심적 갈등이 없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기에는 이상정 문하에 먼저 나아간 동생 종경宗敬 등의 영향과 이런 인연으로 선생을 직접 모시고 고무동鈷鉧洞, 묵계서원黙溪書院 등을 유람하며 퇴계학맥 의 사상적 전통을 깊이 체감한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알다시피 이상정은 김성일에게서 비롯된 호학湖學을 정립한 퇴계학맥의 적통이다. 그는 이재의 외손으로 14세 때부터 외조부에게서 가르침을 받 았다. 1735년 과거에 급제하여 가주서에, 1739년에는 연원찰방에 임명 되었다. 그러나 이내 사직하고 그해 9월에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大山 書堂을 짓고 학문 탐구에만 몰두하고자 했다.
이런 모습에 사람들은 그를 ‘소퇴계小退溪’로 칭송하며, 이황 이후 학문의 적전을 얻은 인물로 널리 알려 졌다. 이러한 다짐과 기대는 1753년 부득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면서 좌절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내 고향으로 돌아와 오직 학문 탐구와 제자 양성에만 전념했다.
이들의 만남은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김종덕은 “입신출세를 위한 과거 공부는 사람의 본심을 무너뜨린다.”8라는 생각에 다시는 과거에 응하 지 않기로 마음먹게 된다. 자신의 학문 목표를 성학聖學, 즉 성인됨을 위한 학문에 뜻을 두고 심성함양을 중요한 공부처로 삼아 전념하고자 다짐했 다. 이러한 결심은 벼슬길에 나아갈 기회를 뒤로 한 채 급기야 1759년 이상정의 문하에 나아가기에 이른다.
그의 삶을 바꾼 중요한 순간이자 운명적인 결단이었다. 입문한 이듬해 에 스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관직에 나아가는 꿈을 버리니 근심은 사라지고 기쁨이 가득하여 마음이 후련하다고 그동안의 맘고생을 토로했 다. 이어 이 길을 택한 것은 개발처開發處를 얻기 위한 것이니, 때 늦음을 만회하기 위해 어린아이처럼 열심히 배우겠다고 공언했다.9
그래서일까. 그는 문하에 있으면서 오직 학문에만 열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제 간의 강학은 물론 주고받은 서신에서뿐만 아니라 이종수 류장원 류도원 정종로 이만운 남한조 채제공 조술도趙述道 등 여러 동학들과 빈 번히 교유하며 학문적 토론을 벌이는 모습들이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
이는 산수 유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769년 청송靑松(지금의 盈德) 에 있는 옥계玉溪를 유람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함께 했던 스승 이상정의 가르침, 즉 자연 경관에 심취하여 시를 주고받는 데 그치지 않고 도를 찾는 방법을 터득하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는 모습은 배움의 연장선상 이었다.10
이렇듯 김종덕은 늦은 입문 이후에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자신의 학문을 성숙 및 완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드러나지 않을 수 없는 법. 이상정은 병운秉運 병진秉進 병원秉遠 세 손자의 교육을 그에게 의탁 했고, 이어 병세가 위독한 상황에서도 학문에 더욱 매진하여 우리 사문을 밝혀주기를 부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동문인 정종로와 제자인 정필규 鄭必奎(魯庵, 1760~1831)는 이때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이 선생이 공을 공경하여 예로써 대함이 매우 지극했는데 그 손자 병운을 보내 서 제자의 예를 드리고 배우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병환이 위독하실 때 정신이 혼미하여 능히 일어나 앉아서 손님을 볼 수 없었으나 공이 들어오면 반드시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았고, 학자들을 불러서 말씀하실 때도 반드시 공을 기다려 서 했으니, 공 같은 이는 어찌 이 선생의 진결眞訣을 얻은 이가 아니겠는가?11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이 선생이 저고리를 입고 띠를 매시며 선생을 불러 “평일에 강론하는 것은 단지 착실히 공부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말한 것이 단지 일상적인 평범한 일에 불과하지만 심상한 가운데 오묘함 이 있다.”라고 가르치셨다. 이에 선생이 일어나 절하고 “제가 비록 영민하지 못하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라고 말했으니 부탁하여 전수하 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12
8 鄭宗魯, 立齋先生文集 권40, 碣銘, 川沙金公墓碣銘 . “守道山樊, 絶意名利, 常歎科擧之學, 壞人心志.”
9 金宗德(이하 생략), 川沙先生文集 권2, 書, 上大山先生[庚辰] . “辭退屬耳, 歲律已改, 伏惟憂虞去, 而吉慶至矣. 偶得崔士敎過顧, 請以所聞者告語, 渠雖辭避不當, 而猶不無因而 開發處, 可喜. 但四十歲光陰已失其時, 而有若小兒挾冊隨學, 蘄有得焉, 不亦難矣乎.”
10 川沙先生文集 권17, 記, 玉溪遊山錄[己丑] . “先生曰, 今行詩令, 只得日課而已, 不敢 過也. 朱夫子遊山之令, 常以過節爲戒, 然弛張之間不覺至百餘篇, 風致之發, 有不能禁者. 道 間買取生魚烹於是, 鮮如新得者然, 可知其海門之邇也.( ).”
11 鄭宗魯, 立齋先生文集 권40, 碣銘, 川沙金公墓碣銘 . “李先生敬禮公甚至, 至遣其孫秉 運執贄受學. 疾革時奄奄不能起坐見賓客, 公入必扶起而坐, 其招語學者, 亦待公爲之, 若公 豈非得李先生眞訣者哉.”
12 鄭必奎, 魯庵先生文集 권7, 行狀, 先師川沙金先生言行錄 . “考終前二日, 李先生加上衣拖帶引先生敎曰, 平日所講論只欲著實用工. 又曰, 所言只家常茶飯, 然尋常中自有妙處. 先生起拜曰, 某雖不敏, 請事斯語矣.”
이를 보면 그가 이상정의 문인 중 ‘호문삼종’, 또는 ‘호문삼로’로 칭송될 만큼 이른바 호학의 정맥을 계승한 인물임을 표명한 것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지금의 평가는 이와 달리 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고, 학파 내의 위상 또한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나이 58세 때인 1781년, 김종덕은 스승 이상정의 죽음에 직면한다. 그 해에 앞서 지은 매류설梅榴說 에서 때 늦은 매화와 석류꽃에 뒤늦게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있는 자신을 비유했던 그가 아니었던가.13
13 川沙先生文集 권16, 雜著, 梅榴說 . “余種一梅, 花發與杏花只爭三五日. 得盆榴, 大暑花 始發, 顧主人事事不早而晩, 故凡所從者皆晩, 甚可笑也. 然彼二物者, 雖晩而終有成. 余之學 晩矣, 尙未之有得, 又可戒也.”
이러한 자신의 학문에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스승의 부재는 그 무엇으로도 표현하 기 힘든 정신적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마음을 담아 그는 만사輓詞 에서, 스승의 인연을 갑자기 끊어진 사다리에 비유하여 가려진 길에 멈춰선 자신을 그리며, 우러러보면 미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가시 지 않고, 하늘을 보면 아득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눌 수 없다고 표현했다.
[…略]
鳳凰于飛
渺渺雲際
循梯遽絶
尋路旋翳
人疑高遠
殆不可求
平常之中
欲從末由
遺編燦然
表裏朱退
來世之遠
無有乎爾
瞻望靡及
視天茫茫
曷慰羹牆
或監薦觴
[…전략]
봉황새가 날아
아득히 구름 가로 가버리니
오르던 사다리 갑자기 끊어져
찾던 길이 더욱 가려지네
사람들은 높고 멀어
구할 수 없다 의심하고
평상의 중도中道를
따르고자 하나 길이 없네
남기신 편질이 찬란하여
안과 밖이 주자와 퇴계이니
다음 세상이 멀지만
앞으로도 없으리라
우러러보니 미치지 못할 듯하고
하늘을 보매 아득하니
어떻게 사모의 마음 위로되랴
부디 올리는 술 흠향하소서14
14 李象靖, 大山先生實紀 권9, 輓詞[金宗德] .
이때 그는 두 가지 일에 전념했다.
첫째, 이상정의 학문적 업적과 연보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이에 여러 동학들의 의견을 모아 흩어진 글을 수습하 여 정리하고 이를 교정하는 데 집중했다. 여기에 스승의 아우였던 이광정 李光靖(小山, 1714~1789)과 이종수 등이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이상정을 ‘진유’이자 이황의 적전임을 명확히 하는 일이었다. 1783 년 유문의 정리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부터 시작해 1794년에는 자신이 직접 상소를 지어 올렸다. 이는 1811년 연이은 강회를 열어 분위기를 조성 하는 등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어져, 급기야 1857년에 비로소 뜻하던 바를 이룰 수 있었다.
김종덕은 64세 때인 1787년 고향 사촌마을에 ‘유자정孺子亭’을 건립했다. 여기서 만년을 보내며 강론과 저술에 힘쓰고자 결심했다. 이는 스승 사후 동료와 후학들의 요청에 1784년부터 후산정사後山精舍에서 정기적인 강회 講會를 열었던 사실이 인연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자의 이름인 ‘유자’는 후한 때 남주南州의 고사高士인 서치徐穉의 자이다. 서치는 자신이 선한 줄도 모르고 선한 행동을 할 만큼 자신의 마음을 다잡아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었음에도 향촌사회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전한다. 그는 바로 이러한 서치의 삶을 흠모하여 그처럼 말년을 보내고자 했던 것이다.15
이러한 소식에 주변의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스승 문하의 동학들 까지 강론과 배움을 위해 빈번한 출입이 이어졌다. 현재 전하는 유자정급 문록孺子亭及門錄에 따르면, 이곳에서 배출한 대표 인물로는 정박 정필규 이병운 이병원 이야순李野淳 권득인權得仁 서활徐活 류숭조柳崧祚 조우각趙 友慤 황학黃㶅 등 13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16
한편 평생 벼슬과는 거리가 멀었던 김종덕은 1789년 66세 때 학행學行 으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자신을 천거해 준 경상감사 이병모李秉模에게 고마움을 표하면서도 분수에 따라 살고자 하는 자신의 신념인 ‘세수청백世守淸白’에 관직은 과분하며 병 또한 깊음을 이유로 사양했다.17 그럼에도 그는 1794년 71세에 수직壽職으로 다시 한 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김종덕은 이러한 삶을 뒤로 한 채 1797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15 川沙先生文集 권17, 記, 孺子亭記 . “惟孺子不知其有善, 而善善不倦者也. ( ) 門族 二三人爲余作亭於沙村之小谷, 請名于余, 余以平日之所尙慕者命, 衆皆悅之. 悅之者悅其同 高士之居也.( )”; 鄭璞, 南屛集 권3, 記跋, 孺子亭記 . “嗚呼, 士之知, 已或在曠世, 曲江之 碑, 東湖之懷. 吾未知其所知, 孰深孰淺. 而今日川沙公乃復神逞心契, 寤寐太息殆欲, 往從南 昌之山與之耦耕, 而不可得焉, 則其旨豈不質. 而近俚微婉, 而無迹, 未嘗無事於食力之內, 而亦未嘗有事乎食力之外. 若使川沙公之徒, 知所以善學, 則孺子之道, 求諸其師可知推是.”
16 金宗德, 孺子亭及門錄(김향회 소장본). 유자정급문록에는 기록 연대를 알 수 없는 필사본과 문중에서 제공한 활자본이 존재한다. 필사본에는 130명의 문인에 대한 본관, 관계를, 활자본에는 119명의 문인에 대한 본관, 거주지를 기록했다. 둘 사이에는 남한조 등 문인 차이가 있다.
17 川沙先生文集 권4, 書, 答李方伯[秉模] . “閤下承朝家寄屬之, 重體聖明採詢之意要, 令草野賤品共覩, 淸筵盛謨. 顧宗德亦化中一物爾, 宂陋淟劣猶有一分螻蟻之誠, 因此一事 得以近日月之餘光, 誠迷昧之未圖而悃衷之至願也, 豈敢以寡識醜狀猥爲辭遜也.( )”
정종로는 묘갈명 에서 그의 학문이 ‘경敬’을 종지로 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보다 총명했고 자질과 성품이 도에 가까웠다. 이어 소호리 蘇湖里에 가서 배우면서 전일한 마음으로 섬겼다. 학문을 닦는 단계를 한결같이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강구하고 체험하기를 잠시도 쉬지 않았다
대개 그 입지立志가 원대하고 공부가 엄밀하여 넓게 하되 범범하게 하지 않고 간략하되 비루한 데 빠질까 두려워했다. 실오라기나 털끝만 한 것까지 분석함이 절실한 이치가 아님이 없었고 돌이켜 살펴 스스로 경계함이 모두 정성스럽고 바르게 하는 공부였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주경主敬하여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진 까닭에 이 선생이 자주 그 독실함이 훌륭하다고 칭찬하셨다. 그 학문이 더욱 밝고 덕이 더욱 높은 데 이르러서는 얼굴에 환한 기상이 나타나고 등 뒤로 후한 덕용德容이 넘쳤다. 말은 엄정하고 뜻은 확고했으며, 몸가짐과 행동하는 사이에는 법도가 엄하고 사물을 맞이하는 때에는 덕성이 가득했다. 이를 보는 사람들이 도道가 있는 군자라고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18
이렇게 보면, 김종덕의 삶에 스승 이상정의 영향은 지대했다. 과거에 뜻을 두었으나 이내 자신이 바라는 길이 아님을 깨닫고 이상정을 따라 오직 성인지학을 목표로 평생 심성함양공부에 전념했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의는 이상정의 부재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말년에 지은 정자의 이름을 ‘유자’라 정한 데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즉 학문 탐구와 제자 양성을 통한 학맥 전승은 물론 서치와 같은 삶을 살다 조용히 생을 마감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18 鄭宗魯, 立齋先生文集 권40, 碣銘, 川沙金公墓碣銘 . “公自幼聰穎過人, 資稟近道. 旣負 笈湖上, 專心服事. 進修階級, 一遵師敎, 講究體驗, 無時間斷. 盖其立志遠大, 着工嚴密, 博而 不務於泛, 約而恐失於陋. 縷析毫分, 無非切實之理, 反省自警, 皆是誠正之工. 而終始主敬, 日新又新, 故李先生亟稱其篤實可尙. 及其學益明而德益崇, 則面睟背盎. 言厲旨確, 動容周 旋之間, 矩度森然, 應事接物之際, 德性藹然. 見之者莫不以爲有道君子也.”
3. 단서 — 성리설과 심경강록간보의 특징
앞서 언급한 대로 김종덕은 학문의 목표를 성학, 즉 성인됨을 위한 학문 에 두었다. 그리고 이에 이르는 길은 수기修己를 바탕으로 한 위기지학爲己 之學에 있으며, 자신은 여기에 힘쓸 뿐이라고 하면서 하학下學을 출발점으 로 삼았다.
이는 이황의 사상을 온축한 성학십도聖學十圖가 성학을 위한 수기의 설계와 방법을 제시했고, 김굉필金宏弼(寒暄堂, 1454~1504) 이후 도학의 전승에서 퇴계학인들에게 하학지사는 필수적으로 요청되었음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주자학들의 일반적인 생각이기에 너무도 자연스러 운 것이다.
성인의 체용은 천지와 합하여 생각할 것도 없이 저절로 나타나 원근과 상하가 모두 하나같이 지극하니 어찌 사람들이 헤아려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볼 수 있는 것은 평상을 넘어선 유현한 것이 아니고 다만 공양恭讓하고 친목親睦 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이 어찌 꼭 성인이어야만 가능한 것이겠는가.
성인에 게는 신의를 체득하고 순리를 통달하며 몸에 배어 자연스럽고 신비로운 변화 인 것이고, 중인에게는 삼가 지켜야 할 윤리이며 가정을 다스리는 근본인 것이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을 배우려는 사람이 그저 성인과 하늘이 구별이 없다는 것만 알아서 아득하고 고원한 데에서 구하며 처음부터 지극한 경계만을 생각하고 오늘 당장에 쓰일 공양과 친목은 알지 못하니 이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19
19 川沙先生全集 권7, 聖學入門. “聖人體用與天地, 沕合不待作意, 而自然發現, 遠近 上下一齊至極, 豈人之可測, 而形容所及哉. 然其可見者, 亦非幽深玄測超絶平常也, 只不 過恭讓與親睦. 此豈必聖人而後能哉. 在聖人爲體信達順通神光海之化, 而在衆人爲循規 謹節篤倫齊家之本, 誠人人之可行也. 學聖人者, 但知聖天無間求之於廣漠高遠之域, 而先 從安安光變上想像, 不知恭讓與親睦爲今日受用之地, 於己分何益哉.”
성인의 경지는 고원한 무엇이 아닌 일상에 행하는 ‘공양’과 ‘친목’에 지나 지 않는다고 했다. 공손하고 겸양하며 친밀한 마음과 태도, 이는 논어論語 학이學而 편에 나오는 다섯 가지 미덕 중 일부로 모두 인간관계에 필요한 기본적 덕목이다.20
성인지학이란 바로 이러한 실천 덕목을 일상생활에 힘쓰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제자들에게도 학문의 도를 언급할 때 늘 용모容貌와 일용日用에 힘쓰는 것을 중요하게 강조했다.21 다만 그는 이러한 학문이 중요한 궁극적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사람이 “천하에 많은 일이 있는데 하필 학문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인가?” 라고 물으니 (내가) “천하 사람이 모두 선해서 천하 사람들이 모두 평안할 수 있다면 학문은 할 필요가 없다. 만세의 군주가 모두 요순과 같고 만세의 신하가 모두 고은皐誾이나 기夔와 같다면 학문은 없어도 좋을 것이다. 학자는 모든 임금이 요순을 본받게 하고 모든 신하가 고은과 기를 본받게 하여 사람들이 모두 선하게 되어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하고자 한다.”라고 대답했다.22
김종덕은 학문이 중요한 이유를 인간다움의 실현에서 찾았다. 즉 모든 사람들이 도덕적 인격을 이루는 데에 있다고 했다. 그럼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인용문 이후 언급을 보면, 이러한 주장은 하상대夏商代에 처음 제기되었으나 그 뜻을 잃었다가 송대宋代에 이르러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고 했으니, 바로 유학의 전통을 이은 주자학朱子學을 염두에 둔 것일 테다. 결국 인간의 도덕적 실현은 주자학의 적극적인 실천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는 것이다.
20 論語, 學而 . “子貢曰, ‘夫子溫, 良, 恭, 儉, 讓以得之. 夫子之求之也, 其諸異乎人之求之與.’”
21 徐活, 邁埜文集 권4, 草廬見聞錄 . “大抵爲學之道, 必從容貌日用上用工夫而已.”
22 川沙先生全集 권4, 草廬問答 권1. “問者曰, 天下之事衆矣, 而必以學爲重者何也. 答 者曰, 天下之人皆善, 而天下之民皆安, 則無用學爲也. 萬世之君皆如堯舜, 而萬世之佐皆皐 夔, 則無學可也. 學者要以君法堯舜, 臣效皐夔, 使斯人皆善而不困也.”
그럼 주자학의 어떤 점이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것일까. 여기서 잠시 주자학의 요령要領을 떠올려 보자. 흔히 주자학은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구도 아래 천天, 즉 자연 세계의 질서에서 인간의 위상과 책임을 묻는다.23
이는 도덕형이상학의 기치 아래 학문의 목표가 인간의 도덕적 완성과 그 확장 에 있음을 나타낸다. 그렇기에 인간은 이러한 질서를 성선의 당위적 근거로 삼아 이를 보존 및 확충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는다. 다만 현실적 장애인 기질에 따른 사사로운 욕망이 늘 일어나 이를 가리곤 하기에 공부를 통한 끊임없는 회복의 과정이 요구된다.
이러한 주자학의 체계에서 윤리적 문제는 결국 기질의 장애를 극복하 여 내 마음의 리가 만물의 리와 다르지 않음을 드러내는 데 있는 만큼, 김종덕은 심성문제와 그 공부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우음 偶吟 이란 시이다.
天地萬物同一理
腔子內外更無他
雖然大本主在我
試看惻隱心如何
천지만물은 동일한 하나의 리理이니
마음의 안과 밖에 다시 다른 것은 없네
비록 그러하나 대본大本의 주됨은 나에게 있으니
한번 측은지심 보는 것이 어떨까 하네24
그는 리일분수理一分殊의 관점에서 만물의 동일성을 전제한 뒤 만물의 주체인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맹자의 성선에 바탕을 둔 심성론을 전개할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그러면 그는 주자학의 전통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일까. 평소 자득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였기에 이에 대한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3 한형조, 퇴계의 성학십도, 주자학의 설계도 , 조선 유학의 거장들(문학동네, 2008), 85쪽.
24 川沙先生文集 권1, 詩, 偶吟 .
우선 맹자의 성선설에 대해 논한 성선설性善說 을 살펴보자. 여기서 김종덕은 맹자가 말한 성선이 실질적인 공효를 얻기 위해서는 이를 실천 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에게 선한 본성은 늘 불안한 요소이다. 기질에 의한 사사로운 욕망이 언제 가릴지 모르기 때문 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성선을 추상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인다면 이름뿐인 헛된 것이 될 뿐 실질적인 이익은 없다고 했다.
이에 절박하게 하나씩 실천 하는 데 힘쓰되 성선에 순응하고 어긋나는 것을 경계하여 내외內外, 정조精粗, 대소大小에 이르러 조금이라도 방만하거나 지나침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25 즉 성이 선하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실천을 통해서만이 그 본원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성선의 근원을 짐작하게 하는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을 이해하는 데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는 태극도설설太極圖說說 에서 태극의 핵심은 ‘중정인의中正仁義’에 있으니 태극공부의 핵심 또한 이를 실현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이는 ‘주정主靜’을 통해 길한 것을 추구하되 흉한 것을 억제하는 데에 힘씀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보다 궁극적으 로 오성五性이 감동感動할 때가 선악의 갈림길로 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지점이라고 강조했다.26 여기서 선악의 기미를 파악하는 것은 결국 공부 방법을 요청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러한 심성에 대한 주장은 주자학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주정에 대한 언급은 이황의 생각에 연동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바, 마음의 문제, 특히 악의 근원적 제어를 위한 미발 상태의 공부를 지적한 것은 눈여 겨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이와 더불어 그의 심성에 대한 논의에는 다소 이질적인 면도 보여준다.
선악개천리설善惡皆天理說 을 보자. 김종덕은 인간의 선악이 본래 천리이나 그 구분은 본연의 유무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마음이 성을 함의 하고 있으니 천리의 본연을 간직하고 있다고 전제한다.
선과 악은 인간에 게 비롯된 것이니 그 천리의 마음이 합당한 여부에 따라 선과 악이 구별된 다면서, 선이 때에 합당하여 천리의 본연을 간직한 것이라면 악은 이를 잃은 것이라고 했다. 이를 불로 예로 들면 이것이 음식을 할 때는 합당함 을 얻었기에 선이지만 사람을 해칠 때는 합당함을 잃었기에 악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27
이는 일찍이 정호程顥의 주장을 바탕으로 정개청鄭介淸(困齋, 1529~1590) 이 제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호는 천지에 나눔이 없듯이 선과 악이 본래 천리로 이미 함께 존재한다고 했다. 다만 악은 혹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할 때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주희朱熹에게도 가감 없이 이어진다. 물에 맑은 것과 탁한 것이 있지만 물이라는 점에서는 같듯이 선과 악은 천리에 근원하나 악의 리는 없기에 악의 변화는 인간의 책임에 귀결되는 데에 동의했던 것이다.28
정개청은 이를 기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먼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을 구분한다. 즉 본연지성에서 보면 인간과 동물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인간에게 부여된 성은 본연지성이 아닌 기질지성이기에 선과 악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리는 기의 조리일 뿐이며 인간에게 기의 작용은 매우 중요하 기에, 이러한 작용에 따른 차이가 없지 않으니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과불급 이 악을 발생하게 한다고 했다.
김종덕은 바로 이러한 정개청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이 주장에 대한 논란이 없지 않은 만큼 악을 이미 상정한다는 것은 맹자의 성선을 따르는 주자학자들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를 개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기의 관점을 수용하지는 않았지만 선과 악의 근원 이 다르지 않음을 인정한 점에서, 이는 결국 현실의 악을 부정하지 않으므 로, 인간의 윤리적 문제, 즉 이러한 악을 어떻게 선으로 바꿀 수 있는가에 좀 더 집중하고자 한 의도가 아닐까 한다. 그런 점에서 천리의 본연을 잃어 악이 되지 않도록 중절中節의 마땅함을 찾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절실하 게 부각되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심경강록간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책을 완성 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방법에 대해 어느 정도 구체화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심경강록간보는 김종덕이 72세 때인 1795년에 심경강록心經講錄을 보완하기 위해 간행한 것이다. 심경강록은 이황의 강의를 이덕홍李德弘(艮 齋, 1541~1596)과 이함형李咸亨(天山齋, 1550~1586)이 기록한 것이다. 그 런데 이황의 확인을 받지 못해 그 정확성에 의문이 많았던 터였다.
이에 이상정은 김종덕의 아우인 김종경金宗敬(苟齋, 1732~1785)에게 경 의장 이후를 보완하도록 부탁했다. 김종경은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의 범례에 따르되 퇴계집과 조호익曺好益(芝山, 1545~1609)의 심경질의고 오心經質疑考誤를 참고하여 잘못된 부분을 삭제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 했으나 미처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를 다시 아우 종섭金宗燮(濟庵, 1743~1791)이 잇고자 했으나 그 또한 일찍 유명을 달리 했다. 김종덕은 이를 안타까워하다 마침내 이종수 정종로 등 여러 동학들 의 의견을 참고하여 완성하게 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관련된 구절에 대해 의심나는 부분을 퇴계집에 서 직접 확인하여 정리해 놓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황이 제자들과 심경 을 토론한 내용을 번다할 정도로 자세히 기록한 부분이 눈에 띈다. 이는 김종덕이 주희와 이황의 편지글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항목별로 정리해 둔 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29
그렇게 보면, 책의 주된 내용은 심법心法이다. 당연히 이황의 중요한 견해가 망라되어 있다. 이어 12권 말미에는 ‘안案’이란 항목을 설정하여 이상정 의 견해를 덧붙이고 있는데, 이는 김종덕을 비롯한 그의 문인들 사이에 공유된 견해로 보인다. 이를 통해 이황과 이상정의 동이同異를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중기 퇴계학인들이 이황의 사상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체로 이황의 견해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특히 마음을 리와 기의 합으로 보아 마음에서 도덕적 근거를 확보한다는 점과 존덕성 중시적 경향을 보인다는 점 등이 이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30 물론 다소 이질적인 것도 없지 않은데,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25 川沙先生全集 권16, 雜著, 性善說 . “必求復得此性之善, 而其間自有許多節拍階 級, 一一實踐而力行之. 知其如是, 而方順乎性善而必循之, 知其不如是, 而有違乎性善而必 戒之. 至於內外遠近精粗大小, 無一毫放過, 然後方實得其性之善. 知性之知, 盡性之盡, 誠爲 性善之實用也.”
26 위의 책, 雜著, 太極圖說說 . “愚故曰, 太極工夫準的, 是定之以中正仁義, 而主靜一句, 用力處, 是脩吉悖凶一句. 學者最要關頭, 是五性感動一句.”
27 위의 책, 雜著, 善惡皆天理說 . “愛與惡是天理之所由出, 而乃與天理 相反. 比如同一 火也, 而炊飯則善, 殺人則惡也. 雖世間大罪惡, 皆從反理而得, 而初亦不可不謂之天理, 但不當時便不是天理之本然也.”
28 김철호, 악은 선으로부터 시작된다 정호의 선악개천리에 대한 주희의 해석 , 동양 철학연구 100(동양철학연구회, 2019), 336~341쪽.
29 川沙先生全集 권5, 考證, 序 . “夫得孔門傳授之統者晦庵也. 得朱門嫡宗之旨者 退陶也. 兩夫子片言隻字, 孰非妙道精義之發, 而其使人感發而興起, 若親承誨諭於几席之 間, 切於受用變化之功, 則惟書札爲最耳. 況其尤關而甚緊者, 悉皆表章著見於節要之篇條 序, 易尋段落易定. 苟使低首虛心俯讀仰思十年二十年反復, 講習習之不已, 熟之又熟, 則文 句義理不待較考比勘, 而瞭然於心目之間庶幾, 融會貫一原原畢照所謂嚴心法大規模自然有 得於己矣.”
30 김기주, 퇴계심학의 특징과 그 전승 심경강록간보를 중심으로 , 범한철학 37(범 한철학회, 2005), 226~231쪽.
우선, 심을 리와 기의 합으로 보는 점에서 유사하다. 주자학에서는 심을 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황은 이를 리와 기의 합으로 이해했다. 물론 성이 심 안에 있으니 당연한 것처럼 생각될지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심의 체용體用, 즉 감정이 일어나기 전과 후로 나누어 생각해 보면 마음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함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상정 또한 기본적으로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더욱이 ‘심무출입心無出入’ 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함으로써 생각과 감정, 행동을 표현하는 주 체로서 마음의 특징을 더욱 확고히 하는 데 힘썼다.31
반면 성리설에 대해서는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가령 주자학에서 사단칠정은 포함관계로, 인심도심을 대립관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음은 그 근원이 다르지만 감정은 근원이 성으로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황은 이 둘의 관계가 다르지 않다고 하며 사단을 도심에, 칠정을 인심에 배속시켰다. 이유 또한 그 근원이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만 이상정은 심은 물론 성과 정을 원칙적으로 하나로 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사단을 정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칠정을 정이라고 하는데 사람에 게는 두 가지 정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정이 발하는 것은 리를 위주로 하기도 하고 기를 위주로 하기도 합니다. 기를 위주로 하는 것이 칠정이고, 리를 위주로 하는 것이 사단인데, 어떻게 두 가지가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또 “리는 본래 형체가 없는데, 만약 기가 없다면 어떻게 홀로 발하는 리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세상에는 리 없는 기가 없고, 기 없는 리도 없습니다. 사단은 리가 발하되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되 리가 타는 것입니다. 리가 발하는데 기가 그것을 따르지 않으면 발하더라도 이루어 지는 것이 없고, 기가 발하되 리가 그것을 타지 않으면 이욕에 빠져 금수가 될 뿐입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정해진 이치입니다.”라고 답했다.32
공부론에 대해서도 이러한 점은 비슷하다. 주희의 만년정론에 대한 논란에 대해 이황은 존덕성尊德性의 마음공부와 도문학道問學의 경전공부에 대한 병행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존덕성 중시적 태도는 말년에 도문학의 말폐에 따른 일시적인 강조라고 했다. 그러나 이상정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황돈이 주자가 존덕성의 강조를 통해 그 학문의 폐단을 고치려 했다는 말은 그리 나쁘지 않다. 그러나 황돈이 주자가 말년에 도문학을 거의 폐하고 오로지 존덕성만을 강조한 것을 만년정론이라고 말한 것은 옳지 않다.
단지 그 학문의 폐단을 고치려 한 것이라면 어떻게 다른 한쪽에 편중될 수 있겠는가? 여기에 모아 놓은 열두 단락의 말은 모두 주자의 만년정론이라고 하지만 석자중과 정윤부 등의 글은 40세 이전에 이미 저술한 것이고, 만년에 학문의 폐단을 고치 려 한 의도로 쓴 것은 아니다.33
이상정이 보기에 주희는 분명 존덕성공부에 기운 면이 있다는 것이다. 학문의 폐단을 고칠 의도였다면 원론을 재차 강조하는 편이 낫고, 더욱이 그 근거로 언급한 글들은 모두 40대 이전에 쓴 글이라는 점에서 말년이라 기보다 그 변화의 시기가 아마 이때였을 것으로 짐작했다.
31 전병철, 晩修錄 에 드러난 대산 이상정의 학문 토대 , 퇴계학논집 9(영남퇴계학연 구원, 2011), 58~60쪽.
32 川沙先生全集 권7, 心經講錄刊補, 第二篇 . “問, ‘或以四端爲情, 或以七情爲情, 人 之情有二致歟.’ 答曰, ‘情之發, 或主於理, 或主於氣. 氣之發七情是也, 理之發四端是也. 安有 二致.’ 問, ‘理本無形, 若無是氣, 則奚有獨發之理乎?’ 曰, ‘天下無無理之氣, 亦無無氣之理. 四端 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 理而無氣之隨, 則做出來不成, 氣而無理之乘, 則陷利慾, 而爲禽獸. 此不易之定理者.’”
33 위의 책, 같은 곳, 第四篇 . “黃墩論朱子以尊德性救末學之弊, 亦自好. 但黃墩意謂 朱子末年廢却道問學, 一邊專就德性上用功而曰定論也. 此大不然直是救弊而已, 何有偏重 耶? 此所摭十二條皆謂晩年之論, 而答石子重程允夫等書, 在四十歲前, 不待晩年救弊之 意自如此.”
이렇게 보면 이황 또한 병행을 기본적으로 말하고 있긴 하지만 주정을 통한 존덕성공부를 강조하는 면도 없지 않은 점이 묘하게 겹친다. 그가 심경에 심취하던 때에 주희의 스승이었던 이동李侗(延平, 1093~1163)에 대한 흠모와 정좌구중설靜坐求中說에 대한 관심은 이에 더욱 확신을 갖게 한다.
김종덕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마음공부에 좀 더 천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공부에 본원本原과 지엽枝葉의 구별이 있으니, 본원에 우선 힘을 쓰면 지엽은 이에 순응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본원은 마음이 며, 지엽은 말과 행동, 일상에 허다한 명색名色에서 볼 수 있는 것”34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마음을 광명하고 통철하게 하여 모든 것을 주재하고 포섭 함으로써 사물 현상에 따라 부합하도록 힘쓰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는 무엇보다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명확히 한 말로 이해된다.
34 川沙先生全集 권4, 草廬問答 권1. “問, ‘工夫有本原枝葉之別. 先從本原上着力, 則大 者先立枝葉自順矣. 曰子之所謂本原者何也, 枝葉者何也, 如何而謂之着力也.’ 曰, ‘本原者心也, 枝葉者見於言動日用許多名色也.’”
4. 입론 — 거경공부 중시와 정좌구중설
주자학에서는 두 가지 공부법을 제시한다. 격물궁리格物窮理와 거경함양 居敬涵養이 그것이다. 전자를 흔히 경전공부라고 한다면, 후자를 마음공부라 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하나에 편중되거나 폐할 수 없다고 했다.
김종덕 또한 이러한 전제를 부정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스승 이상정의 영향 또한 없지 않다. 그가 학문의 방법과 자세에 대해 물으니 이상정은 경전 공부와 존심 공부를 병행하기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제 생각에는 이런 급박하고 계교하는 생각을 모두 버리고 대학 논어 맹 자 등의 책을 반복해서 연구해야 합니다. 성현의 기상과 도리의 체면體面을 보아서 깊이 잠심하고 충분히 몸에 배게 하여 그 의미가 기뻐할 만하다는 것을 실제로 본다면 각박하게 억제하지 않더라도 병통이 자연히 없어질 것입 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보면 마음이 일정하게 보존되고 조금씩 점검하여 반드시 마음을 보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에서 늘 잊지 않고 또 억지 로 조장하지 않는다면 자기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홀연히 진전됨이 있을 것입니다.35
우선 사서四書 등 경전 공부를 통해 성현의 기상과 도리를 알게 되고 이를 체득하면 억지로 하지 않더라도 병통이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또한 평소에는 존심 공부를 통해 순선한 본성을 보존하는 것을 천천히 하다 보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진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공부를 통해 내 안의 본성과 만물의 천리가 하나가 되는 ‘심여리일心與理一’ 을 깨닫고 이러한 앎을 실천하여 실질적인 공효를 얻는 ‘지행일치知行一致’에 도 이를 수 있다고 했다.36
이렇게 경전공부에서 보면, 김종덕은 사서를 중심에 두되37 주자서朱子書 퇴계서退溪書 등 경전 탐구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대학은 학문 의 규모와 단계를 알 수 있는 것으로, 궁리와 존심에 중요한 지침이 된다고 강조한다.38
이러한 경문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면 선현들의 견해를 일일이 확인하고 비교하면서 판단 근거를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여 스승이나 동학에게 자문을 구하며, 그 결과 바람직한 의견이 도출되지 않으면 여기에 이를 때까지 끝없는 토론을 이어 갔다. 이상정과 이종수 류장원 등에게 보낸 서신들이 모두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여러 말을 듣고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다면 끝내 학문에 들어갈 길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미 학문에 들어갈 길을 알지 못한다면 비록 아무리 많은 책을 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데 그칠 것이니 실제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39
다만 그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마음공부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경전공부는 올바른 행동의 지침이나 선악 판단의 근거로 작용할 뿐40, 이에 근거하여 끊임없이 실천하는 것은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35 李象靖, 大山先生文集 권24, 書, 答金道彦 . “愚意且一切放下此等急切計較意思, 取 大學語孟等書, 反復玩索. 見得聖賢氣象, 道理體面, 涵泳浸漬, 有以實見其意味之可悅, 則不 待刻切沮抑而病痛自然消除矣. 見諸日用之間, 則又平平存在, 略略檢點, 必有事焉而勿忘助, 不自覺知而忽有進焉.”
36 李象靖, 大山先生文集 권17, 書, 答柳叔文叔遠[己丑] . “今且當以大學語孟爲先, 虛心 遊意, 反復浸灌, 使其意味浹洽. 路脈平實, 漸次進步, 脚踏實地. 及其積累純熟之久, 則理與 心一, 習與身安, 所謂深造自得居安資深之妙, 當不離於此而得之.”
37 徐活, 邁埜文集 권4, 草廬見聞錄 . “又曰, ‘欲讀何書?’, 活對曰, ‘欲受大學.’, 先生曰, ‘大學一書工夫, 階梯盡在其中, 苟能於此有得焉, 一生受用不盡, 豈可以篇袞之少而忽 之也.’”
38 川沙先生全集 권4, 草廬問答 권1. “問, 學問之規模階級, 大學一書詳矣, ( ) 曰, 此意亦善.( )”
39 川沙先生全集 권7, 聖學入門. “看得此等數段, 不能怡然契合於心, 則終無以知所從入. 旣不知所從入, 則雖看許多說, 只是資口耳, 何益於事哉.”
40 李象靖, 大山先生文集 권6, 書, 答申子長[甲午] . “大抵知而不踐言而浮行, 凡人之通 患, 然世間果有眞知實諸, 而不得力於行者乎. 此所以各據地頭, 隨盡已功. 旣不可以行之不 力, 而歸咎於知, 又不可以恃所知之已明, 待其行之自裕也. 蓋嘗思之, 行之不能資於知者, 是其致知竆理之工多在於幽妙虛遠, 而不切於身心彝倫.”
이와 연관된 이야기로, 그는 독서를 통해 심心과 신身의 합일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던 모양이다. “산속으로 들어와 들은 바를 생각해 보니 사람들이 학문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구이지학口耳之學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성현의 절실한 말을 종일 읽는다 하더라도 문구의 어렵고 쉬운 것이나 자의字義의 같고 다름 정도만을 따질 뿐이다.”41라고 하면서 강론에 만 치중한 결과를 비판하며, 성인의 절실한 말은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방법 으로 터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경전의 말을 마음으로 음미하고 몸으로 체득함으로써 마음과 몸이 합일에 이르러야 하며, 이는 마음공부를 전제한 독서가 행동의 지침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래서 그는 성현의 심법인 정일집중精一執中, 마음을 닦는 조존성찰操存省察, 이동과 이황이 강조한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유도하는 주정법主靜法 등을 필요로 했다. 이를 통해 자겸설自慊說 에서 말한 자겸自慊, 즉 선을 가까이하 고 악을 멀리하는 마음의 상태로부터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무자기毋自欺의 상태를 거쳐 성의誠意, 정심正心에 이르고자 노력했다.42
이러한 점에서 김종덕은 증자의 ‘삼귀三貴’와 ‘삼성三省’, 안자의 ‘사물四勿’, 번지의 ‘인仁’ 등이 마음공부의 요체임을 강조한다. 즉 ‘삼귀’는 논어의 태백 편에 나오는 도에 중요한 세 가지를, ‘삼성’은 논어의 학이 편에 나오는 세 가지 성찰을 말한다. ‘사물’은 안연이 인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 한 것으로 예가 아닌 것에 대한 경계를, ‘인’은 번지가 인의 의미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한 상황에 따른 공손과 경건 등 경계의 말들이다.
41 川沙先生文集 권2, 書, 答大山先生 . “歸巢尋山之後, 試以所聞者思之, 夫人之不能有 成者, 皆由於徒尙口耳也. 終日所讀雖是聖賢切實之言, 而其所以辨之者, 只是文句之難易字 義之同異爾.
42 川沙先生全集 권16, 雜著, 自慊說 . “有若設爲問答而言曰, 如何而謂之誠其意? 曰, 毋有自欺也. 如何而謂之毋自欺? 曰, 用意之盡底裏快足者, 是毋自欺也. 如何方可盡底裏快 足? 曰, 好善如好好色, 惡惡如惡惡臭, 此之謂盡底裏快足.”
모두 일상생활에서 외적 공부를 언급한 것으로, 내외가 다르지 않으니 외적 공부를 통해 내적 공부인 마음을 간직하는 방법을 말했다. 이는 이황 이 경공부에서 늘 정제엄숙整齊嚴肅을 우선으로 행해야 할 것으로 제시한 점을 연상시키며43 마음공부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김흥락金興洛(西山, 1827~1899)은 이를 읽어 장구 말단에만 빠진 허물을 반성하고 진정한 수신 공부에 부합하는 학문을 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던 것이다.
[헌종 10년 갑진, 1844년 선생 18세] 3월에 계상溪上으로 가서 성학정로聖學正路 에 대해 강론하다. 밤에 독서하다가 문득 놀라 두려워하면서 “배움이 진보 하는 공부는 궁리하고 수신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내가 요사이 공부하는 것은 모두 유명무실하고 장구의 말단에 급급해서 자신을 검속하고 조심하는 방안이 없으니 얻을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 이로부터 향상하는 데 뜻을 오로지하고 감히 한 시각도 허술히 보내지 않았다.44
그런데 김종덕은 이러한 마음공부에 대해 미발未發 때의 공부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주정’의 방법은 바로 이때의 공부를 말하는데, 그는 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즉 주정은 공부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정靜은 본本이고 동은 말末이니 정할 때에 계구戒懼 가 있어야 본체를 보존할 수 있고 동動할 때 깊이 성찰해야 정을 잃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의미라고 했다.45
그렇기에 주정은 ‘경정敬靜’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46 그런 점에서 이는 이황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 을 수 없다.
이황은 1554년 연평답문延平答問의 발문跋文을 쓴다. 그는 이동을 안회 顔回에 비견되는 인물이라 평하고 주희가 이동을 만나면서 심법의 오묘함 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즉 정좌는 이정二程에게서 비롯되어 이동과 주희 에게서 심학의 본원이 되었고, “연평의 ‘묵묵히 앉아서 마음을 맑게 하여 천리를 체인한다.’는 설은 학자가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47라고 하여 이러한 마음공부가 경전공부의 전제가 됨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48
사실 이상정은 이황의 리우위적 측면을 견지하고 있지만 지나친 편중 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있다. 그럼에도 앞서 언급한 대로 마음을 리와 기의 합으로 본다는 점, 정좌를 학문에 가장 먼저 해야 할 공부라고 하며, 경공부 에서 정제엄숙을 우선시하여 외면을 제재하여 내면을 기르는, ‘제외양중制 外養中’의 방법을 강조한 점49 등은 분명 이황의 견해를 계승하고 있는 측면 이 강하다.
43 李滉, 退溪先生文集 권35, 書, 答李宏仲 . “滉竊謂四先生言敬之中, 程子整齊嚴肅 一段, 卽朱子此書之意所從出, 始學之所當先, 莫切於此.”; 전병철(2011), 61쪽.
44 金興洛, 西山先生文集附錄 권1, 年譜. “憲宗十年 甲辰, 三月往溪上, 講聖學正路 夜 讀書, 忽警惕而歎, 曰, ‘進學之工, 莫善於窮理修身. 余近來所工, 都是有名 而無實, 矻矻於章 句之末, 而無檢身操心之方, 所得果何事也.’ 自是專意向上, 不敢一刻放過.”
45 川沙先生文集 권7, 書, 答李穉春 . “靜者爲本, 而動者爲末, 其動也, 必本乎靜.”; 書, 答李穉春[丁巳] . “亦如一學者之工, 知得靜爲之主靜有戒懼, 而要存其體, 動必審察而 要不失其靜, 主靜之義, 恐或近是也.”
46 川沙先生文集 권9, 書, 答李健之 . “近者主靜之義, 一講再解, 轉承親切, 兩幅所喩無 非至論. ( ) 許多名目, 只此便是敬靜爲一處, 謹當置諸案上出入服膺耳.”
47 李滉, 退溪先生言行錄 권1, 類編, 讀書 . “先生曰, 延平默坐澄心體認天理之說, 最關 於學者, 讀書窮理之法.”
48 추제협, 이황의 사단칠정론과 마음공부 , 안동학 13(한국국학진흥원, 2014), 149~152쪽. 49 李象靖, 大山先生文集 권39, 雜著, 晩修錄 . “靜坐, 是學問最初下工夫處.” “人心無 形, 出入不定, 越把捉越不定. 須就視聽言語動作應接上做工夫, 令無毫髮放過, 此心方住 得在這裏. 蓋身心內外, 本無二體, 制於外所以養其中, 此是日用切緊工夫.”
김종덕 또한 이러한 이상정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이황의 견해에 보다 근접한 생각을 보여준다. 바로 이동의 정좌구중설인데, 이는 미발의 공부법 이다. 이때 미발은 현실에서 만나는 어떤 사태의 고착, 즉 갈등과 막힘을 풀어내기 위해 공부하는 때를 말하며, 정좌구중은 이를 쇄락灑落의 마음 상태로 이행하기 위해 고요히 앉아 중中을 구하는 방법이다.
그러니 미발과 이발의 구분이 따로 있지 않다.50 이는 분명 주희의 미발에 대한 이해와 다르며 정좌에 대한 선학禪學의 혐의 또한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를 취한 것은 전적으로 이황의 말에 의지하여 이해했기 때문이다.51 다만 그는 이러한 이황의 견해와 달리 정좌를 미발 때의 공부로 한정하 고, 이발 때에 경전공부가 병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때의 미발은 감정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를 말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내 생각에 중中이라는 것은 성性의 덕德과 도道의 체體를 형상화한 것으로 미발未發 전에는 서로 섞여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는 중中의 상태가 된다. 비록 범인凡人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경지는 없을 수 없다. […중략] 아무리 몸을 정좌靜坐 하여 마음을 발휘하려고 해도, […중략] 집중하여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의지 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없으니, 이른바 존양공부存養工夫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옛날에는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더욱 심해진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 분수 외의 다른 방법을 구하지 않은 채, 다만 그것이 움직이는 곳을 정밀하게 살피는 일을 반복하니 본연本然의 천天에 위배 되지 않고도 오래된 습숙이 자연히 사라져 마음은 안정되고 기氣가 제자리를 잡는, 미발의 중을 하루아침에 자신에게서 직접 보게 되었다.52
50 백민정, 쇄락의 수양론과 그 철학적 함축 , 성광동 외, 스승 이통과의 만남과 대화 (이학사, 2006), 95~105쪽.
51 川沙先生全集 권4, 草廬問答 권2. “延平朱子門戶規範一而已矣. 獨未發時求中之說, 差異於朱子意思. 然退陶先生延平答問跋文曰,( ).”
52 川沙先生文集 권2, 書, 上大山先生[壬午] . “嘗竊伏而思之中者, 所以狀性之德而形 道之體也, 未發之前渾然在中, 無偏倚是之謂中. 則雖以凡人之心亦不能不有此箇境界. ( ) 身雖靜坐而心常發揚, ( ) 見一到不偏不倚之地, 所謂存養之工無可著手處矣. 昔未必不然而今覺尤有甚焉. 欲救此病恐無分外別法, 只就其動處精察裁之, 節之不使有違於本然之天, 則久久習熟, 則自然有以心安氣貼分定位素一朝身親見, 夫所謂未發之中耶.”
김종덕은 미발이라고 해서 감정의 싹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감정이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 감정이 일어날 수 있는 싹이 이미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황의 미발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미발의 강조로 인해 이발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마음에서 감정이 일어나기 전에 계신공구戒愼恐懼를 해야지 감정이 일어날 때를 기다려 성취하는 것은 이미 늦은 것이라고 했다.
만약 이 마음이 적연寂然하여 처음부터 희노喜怒의 싹이 없다면 단지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알 수 있는 것도 없게 되어 듣거나 보는 것도 없게 된다. […중략] 다만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발하기 전에 배우고자 하는 이들은 먼저 계구戒懼를 해야지 발한 후를 기다려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53
미발未發일 때 곧은 자세로 주재하여 모든 것을 살피며 관장하게 된다면 일용 日用의 근본과 서로 접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용이 근거할 곳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다음 고요한 상태에서 올바르고 알맞은 공부를 하게 되면 행동하는 데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는데, 행동 또한 고요함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54
53 위의 책, 書, 上大山先生[甲申] . “若此心寂然初無喜怒之萌, 則非但人之不知己亦無 有, 可知便是無可聞無可見也. ( ) 只言喜怒哀樂未發之時, 而欲學者先於此時已先戒懼, 不 待其已發之後也.”
54 위의 책, 書, 上大山先生[丁亥] . “未發之時, 固宜卓立主宰照管總攝, 有以爲酬應日用 之本, 而日用可據之地, 正好著工靜固資益於動, 而動亦不爲無助於靜也.”
인용문을 보면 그는 견문처見聞處를 이발에만 두고 미발에 두지 않는다면 정미함을 얻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자사子思나 주희가 말한 ‘부도불문不覩不聞’, 즉 자신을 보지 못하고 진리를 듣지 못하는 것도 바로 희노애 락喜怒哀樂의 미발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 전에 계구 戒懼하라는 요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대비하는 것처럼 마음공부 또한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가 된 다음에 경전공부를 하여 그 옳은 뜻을 얻으면 이는 행동을 할 때에도 올바름을 얻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김종덕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즉 마음은 모든 변화의 근본이자 일신의 주재이기에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전제하고 이에 따르면 어긋남이 없지만 이 마음을 잃어버리면 절도를 잃어 버려 모든 욕망이 일어나게 된다고 했다.
마음을 놓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일은 절도節度를 얻는다. 그러나 공부工夫도 본말本末의 순서가 있기에 그 법칙을 따르는 자는 또한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자의 말에 “함양하는 데에는 경敬에 힘써야 하고, 진학進學하는 데에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달려 있다.”라고 했다. 경은 의관을 바르게 하고 남을 존중하는 자세를 갖추고 일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지는 실천의 실질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후략]55
마음은 감정의 영역이기에 이성적으로 제어되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순선한 마음을 놓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에 가장 절실한 방법이 경공부敬工夫라고 했다. 즉 정제엄숙整齊嚴肅을 우선으로 하여 주일무 적主一無適으로 일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이러한 주장이 이론과 논쟁에 그치기보다는 현실에 밀착된 결과물을 도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독서를 할 때면 늘 체인體認과 행처行處를 병행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개 도道란 하늘에 근원하여 사물에 이르기까지 널리 응하고 일일이 합당하여 좋은 결과에 이르는 데 있는 것으로, 이는 처음과 끝이 일관됨을 아는 것과 같다. 독서를 할 때에는 체인體認과 함께 행처行處를 병행해야 한다. 이는 마치 물이 나무 가운데를 흐를 때 어떤 것에 막히거나 통하지 않으면 그것을 없애 유유히 흐르게 하는 것과 같다.56
여기서 도란 리일분수의 실현이다. 천명에 의해 만물에 부여된 리의 보편적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에 경전공부는 중요한 공부법이다. 다만 이것이 단순히 지식 습득에만 머무른다면 온전할 수 없다고 한다. 반드시 마음으로 성찰하여 깨닫는 과정이 전제되고 이를 일상에서 실천하 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할 때 마치 막힌 물길을 뚫어 다시 흐르게 하듯이 배운 것을 재확인하여 참된 앎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김종덕은 성인됨을 위한 학문을 목표로 하여 위기지학에 전심했다. 여기에는 심성수양이 핵심을 이룬다고 보아 격물궁 리와 거경함양의 병행을 전제로 하면서도 거경을 중시하는 공부법을 부정 하지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정좌구중을 통한 경공부를 우선시하고 더불어 사서, 그 중 대학을 중시하는 경전공부에 매진했다. 이는 스승의 설을 넘어 퇴계 이황의 학문에 닿아 있으며, 이를 더욱 올곧게 계승한 면이 없지 않다.
55 川沙先生文集 권3, 書, 上大山先生[辛丑] . “庶幾心不放失而事中其節矣. 然工夫有 本末之序, 所謂循其則者亦非可以意智而能之. 程子之言曰,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 敬 者, 卽正衣冠尊瞻視當事致一之謂也. 知者, 卽因其踐履之實以致之也.”
56 川沙先生文集 권2, 書, 上大山先生 . “蓋自道也者, 原於天, 以下至汎應曲當之妙果, 若知其從頭至尾只是一也. 而及讀讀書, 體認爲一項行處爲一項工夫, 則如灌水之木中, 有一 物隔而不通, 祛此卽流散一坪.”
5.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김종덕은 이상정의 직전 제자로 학문 전수에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인물 이다. 그럼에도 생애는 물론 학문과 사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이에 이 글은 그의 사상, 특히 공부론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우선 김종덕의 삶은 그가 흠모했던 서치와 같은 고사의 일생이었다. 여기에 학문은 중요한 매개체였는데, 그는 성학을 위한 위기지학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1759년 나이 36세 때 이상정의 문하에 나아간 것은 그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어릴 때 가학과 자학을 통해 학문을 시작한 이래 힘쓴 과거지학을 포기하고 성인지학을 목표로 산림에 은거하며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고자 결심하기 때문이다. 스승 이상정은 이러한 그의 다짐과 학문적 성취를 흡족히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 에 죽기 전까지 강학과 서신을 통해 많은 학문적 교감이 이루어졌고, 이는 문하에 있던 여러 동문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사상에서도 김종덕은 스승의 학설을 계승하면서도 자신의 학문적 특징을 조심스레 개진하고 있다. 그는 성인지학의 핵심이 심성함양에 있다고 판단 하여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거경 중시의 공부론을 전개했다.
주자학의 두 공부인 격물궁리와 거경함양은 주로 병행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그는 성리에 대한 공부와 심경강록간보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경전공부보다 마음공부를 우선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즉 성현 의 말씀도 마음의 바름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온전히 체득될 수 없다고 했다.
물론 마음공부에서는 경을 통한 정제엄숙의 과정으로 외적인 가지런 함을 통해 내적인 마음의 각성 상태를 유지하도록 해야 하며, 이는 감정이 일어나기 전 미발 단계에서 마음의 중을 얻기 위해 경을 통한 주정공부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여기에는 이황이 이동의 정좌구중설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다만 그는 이러한 미발 상태의 마음공부가 감정이 일어난 후인 이발 상태에서도 지속되지만 대학을 중심으로 한 경전공부를 겸하여 그 올바 른 뜻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더불어 이러한 마음과 독서의 체인공 부는 실천을 병행하지 않는다면 온전해질 수 없음을 강조했다.
이러한 점에서 김종덕은 스승의 설을 넘어 퇴계 이황의 학문에 닿아 있으 며, 이를 더욱 올곧게 계승한 면이 없지 않다. 물론 이러한 결론이 그의 사상적 특징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금 연구는 그의 사상 중 두드러진 면이라고 판단되는 공부론에 주목하여 개괄적으로 논한 일부 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좀 더 온전한 주장으로 동의되려면 여기에 다양한 논의들이 추가 되어야 한다. 즉 성리설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와 이것이 공부론과 어떻게 연동되는지를 좀 더 포괄적으로 살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사제 간의 서신 을 통해 학문적 수수관계와 동학들 간의 학문적 교유 양상은 물론 문하의 제자들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진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여 대산 학파 내의 사상적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에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랬 을 때 김종덕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보다 온전한 이해에 이르렀다고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논의에서 이러한 점들이 보완되기를 기대 한다.
∙ 2020. 10. 23 : 논문투고
∙ 2020. 10. 29 ~ 11. 18 : 심사
∙ 2020. 11. 19 : 편집위원회에서 게재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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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n Cheonsa Kim Jong-deok’s Life and The theory of ‘Keeping self awareness’ and
‘Investigation of Principle’
Choo, Je-hyeop
Keimyung University Department of Philosophy Assistant Professor
This paper aims to outline Cheonsa Kim Jong-deok’s ideas, espe- cially self-cultivation. Although he was a student who learned directly from Daesan Yi, Sang-jeong, he is not known in detail about his stud- ies and ideas, including his life. First of all, he outlined his life and revealed that he had set a goal of learning for self-implementation to become a Sage. Especially, at the age of 36 in 1759, Yi Sang-jeong’s move to the ministry became a very important turning point in his life. This is because he decides to abandon his studies for the hard-working past and live in seclusion in the forest with the aim of becoming a Sage. Yi, Sang-jeong, her teacher, was satisfied with this, and until her death, there was a lot of academic communication through her lectures and letters, which had a significant impact on many of her alumni. In his studies, Kim Jong-deok inherits his teacher’s theory while showing his own academic characteristics. He judged that the core of his studies to be a Sage was in “mind-cultivation,” and developed the story of self-cultivation, which values Reserve Experience, in that specific way. In other words, in order to gain the middle of the mind in the pre-emotional stage, he emphasized animing at quietness through Ching. This continues even after the emotion has occurred, but it is also important to get the right meaning in addition to the study of the study centered on The Great Learning. In addition, he stressed that such a mind and ‘realizing the state’ study of reading cannot be intact unless it is practiced at the same time. Beyond his teacher’s theory, he has reached out to Yi Hwang’s studies, which he inherited more uprightly.
Key words
: Kim Jong-deok, Yi, Sang-jeong, Learning for Self-improvement, Keeping self awareness, Centrality-Seeking and Quiet-sitting
[출처]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의 생애生涯와 거경궁리설居敬窮理說|작성자류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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