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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유연재공, 동고공 묘비 탁본대회

            

   1. 일시 : 2003. 5. 4. 10:00--19:00

   2. 장소 :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 산81번지 광곡산(안양 백운저수지 입구) 서운관정공파 묘역

   3. 참석자 : 규면(서), 영환(문), 윤만(문), 발용(군), 태영(군), 항용(제)

   4. 탁본 묘비 : 유연재공(휘 희수), 동고공(휘 노)

   5. 관련 사진

 

     

<장령공(휘 장)과 서운관정공(휘 綏) 단소>                    <묘비 닦기>

 

    

<유연재공 묘비 뒷면>(솔 두드리기,떡매로 치기>

 

    

<유연재공 묘비 전면 탁본>

 

    

 

  

<광곡재실>                                           <재실 안내문>

 

    

<재실 현판-솟을대문, 재실>(파종회장 재준님 서)

 

    

<재실 내 위패(장령공(휘 장)과 서운관정공(휘 綏))           <재실 내 상량문>

 

    

<동추공(同樞公 諱 自行) 之墓 >                        <주부공(主簿公 諱 季演) 之墓 >

 

 

<서견(徐甄)의 묘소>(집의공(執義公 휘 질)의 장인. 서운관정공파에서 외손 봉사하고 있음)

 

     

<품평회>(재실 내)                                        <유연재공 탁본>

 

<서운관정공파 유연재공 및 동고공 묘비 탁본 작업 후기>

 

 지난 5. 4일, 작년 12월 22일 묘소 참배시 논의됐던 안양 서운관정공파 유연재공과 동고공의 탁본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이날 아침 06:00시에 일어났습니다. 전날 새벽 2시까지 탁본 떡매(?)를 준비하느라 못 잔 잠으로 몸은 약간 무거우나 오늘 있을 일들에 신이 나서 기분이 좋습니다.

 

 여러 준비물을 챙기는데 07:00시 경 청주 주회님으로부터 어린이날 집의 아이들을 돌봐야하는 사정으로 참석키 어렵다는 전화가 옵니다. 아이들과의 전쟁에서 졌답니다. 잘하셨습니다. 님의 마음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몇 군데 전화하여 확인하지 못한 안사연 여러분의 참석 여부를 묻습니다. 이번 행사는 소박하게 진행될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어두웠습니다. 그런데 불참할 것 같던 영환 대부께서 멀리 포천 외가댁에서 새벽에 모든 일을 마치고 이 행사에 참석키 위해 오시고 있다는 반가운 전화가 옵니다. 날씨는 너무도 좋습니다, 탁본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입니다.

 09:00시에 발용님과 영환대부가 타신 차가 저의 집에 약속대로 도착했습니다. 탁본을 위한 여러 도구를 싣고 안양으로 갑니다. 10시 15분 전에 도착해 보니 아직 아무도 없습니다. 우선 짐부터 묘소로 올려 놓았습니다. 산 밑에서 두 양동이에 물을 길어 낑낑 올라갑니다. 조금 있으니 서운관정공파의 규면님과 문온공파 윤만님께서 오셨습니다. 모두 5명이 되었습니다.

 맨 위 장령공(휘 장)과 서운관정공(휘 綏) 단소에서부터 동고공까지의 묘소에 우선 잔을 올리고 참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유연재공(휘 希壽)과 동고공(휘 魯)의 옛 묘비를 살피고 정성으로 닦았습니다. 비석이 많이 부식돼 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경희대학교 등에서 몇 번의 탁본 작업이 있었으나 서운관정공파나 기타 우리 문중에서는 단 한 번도 탁본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 문중의 가장 명필가의 유필로 반드시 탁본돼 있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이 작업이 얼마나 중요하고 뜻깊은 일인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왔습니다.

 우선 간단히 탁본 작업과정을 설명하고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 작업은 대상물의 부식정도, 온도, 습도, 한지의 종류, 먹물의 종류, 떡매의 종류, 솔 두드리기, 물먹은 한지에 떡매 치는 건조시기, 떡매의 반복횟수, 한지 떼는 시기, 뗄 때의 정성 등이 모두 고려사항입니다.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한 장 한 장 작업해 갔습니다. 우선 동고공의 친필인 유연재공의 묘비 먼저 작업했습니다. 처음에는 1시간에 겨우 1장 정도 탁본했습니다. 2번 째부터는 속도가 좀 났습니다. 점점 빨라집니다.

 한참 작업하던 중 윤만님께서 그만 가셔야 한답니다. 오늘 1일 3역의 일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 바쁜 중에도 이곳으로 오신 님의 정신과 열정에 모두 감복했습니다. 해는 점점 뜨거워져 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작업은 점점 더 신이 납니다.

 1시쯤이 되니 아래 재실 쪽에 계시던 규면님께서 내려 오라고 소리하십니다. 잠시 중단하고 내려가니 푸짐한 점심식사를 배달시켜 오셨습니다. 서운관정공파 재준 회장님께서 마련해 주셨다고 하십니다. 뜻하지 않은 환대에 그저 감사하기만 했습니다.

 시원하고 널찍한 재실안에서의 식사는 맛있기만 했습니다. 이 때 규면님으로부터 이곳 묘역에 대한 그동안의 과정 말씀을 들었습니다. 원래 이곳 묘소들은 서울시 시흥대로 변의 현 성남고등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1938년 경 도시계획 사업으로 인해 토지를 수용 당해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수용비로 이곳에 약 32정보의 임야를 사게 되었답니다. 그 과정에서 몽촌공(휘 수)의 묘소는 그 직계 후손들의 요구로 인해 별도로 지금의 부천으로 이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1996년 경) 현 서울 외곽 고속도로가 나게 되자 일부(약 5정보)가 도로에 수용되게 되었고, 그 비용으로 현 재실과 묘역을 정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약 3억 2천만원 비용). 재실의 <광곡재실>이란 현판은 재준회장님의 글씨라고 합니다.  

 그리고 서운관정공의 아드님인 집의공(執義公 휘 질)과 동추공(同樞公 휘 自行)의 묘소도 현 묘역 옆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원래 집의공의 배위이신 이천서씨 할머니의 묘소는 시흥에 함께 있었고 집의공 할아버지의 묘소는 찾지 못하고 있다가 이장 후 안성에서 묘 지석이 발견되어 이곳에 안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의공의 장인이신 서견(徐甄)의 묘소를 옛부터 외손봉사해 왔으며 함께 이곳에 안장했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식사 도중에 분당의 태영님(군)께서 오신다고 전화를 하신 뒤 불과 10분만에 도착하셨습니다. 반갑게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식사후 소화도 시킬 겸 묘역 좌측의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서견, 김자행, 김계연(季演) 묘소를 참배하고 다시 내려와 작업에 들어 갔습니다. 이제 탁본에 숙달되자 옆에 있는 문관석의 가슴 문양과 망주석 상단부의 문양도 탁본하기 시작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5시가 넘어 갑니다 그런데 아직 5개 밖에 못했습니다. 속도를 냈습니다. 해가 서쪽 산을 넘어가자 한지 마르는 시간도 늦어지고 작업 속도도 느려집니다. 마음은 급해 옵니다. 이젠 유연재공과 동고공 양 쪽으로 나누어 탁본 작업을 했습니다. 근 7시가 되어서야 작업을 끝냈습니다. 유연재공 묘비 7점, 동고공 묘비 2점, 망주석 및 문관석 문양 각 2점씩이 만들어 졌습니다.

 재실로 내려와 모든 작품을 순서대로 놓고 품평회를 합니다. 제일 먼저 뜬 것이 가장 훌륭합니다. 이것과 동고공의 제1 작품은 이곳 재실 안에 표구하여 게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작품들은 하나씩 나누어 갖기로 했습니다. 준비해 왔던 탁본 떡매는 기념으로 모든 분들께 한 쌍 씩 드렸습니다.

 재실을 나오니 어둡습니다. 규면님을 안양 인덕원 사거리에 모셔 드리고 우리 일행은 판교의 정신문화 연구원 앞에 있는 유명한 순두부 집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앉으면 일어날 줄 모르고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9시가 넘어서야 헤어져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날 얼마나 가슴 부듯하고 보람 있었는지 모릅니다. 이로 하여 유연재공과 동고공의 후손들과 우리 전 문중인들이 덜 부끄럽게 되었다는 자부심 때문이겠지요. 달게 잠을 청했습니다. 함께 고생하신 영환대부님, 윤만 대부님, 발용대부님, 태영아저씨, 그리고 규면 아저씨---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경순대왕 춘향대제에 참배하느라 오지 못하면서도 틈틈이 전화를 해 주신 윤식 아우님 모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