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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2004년 제3회 안사연 여름캠프 보고

             (2004. 8. 5-8.10. 사진-발용(군), 글-윤식(문) 작성 제공)

 

대종회장님을 비롯한 문중 어르신들과 전국에 계신 일가분들의 크나큰 성원과 염려 덕분에 2004년도 제3회 여름캠프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말씀 올립니다.

이번 행사는 제1ㆍ2회 여름캠프와 달리 충북지역에서 처음 실시되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참여자 역시 해마다 증가세를 보여 여름캠프가 우리 문중의 주요 행사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특히 대종회장님과 사무총장께서 여름캠프 격려차 첫날 행사에 참석하셔서 자리를 더욱 빛내 주셨습니다. 거듭 감사 말씀 드립니다.

이번 행사를 위해 안사연에서는 지난 7월 4일 행사지역에 대한 사전점검 내용과 우리 홈페이지를 통해 주요 답사지역을 소개해 드린 바 있습니다.

이번 답사지역은 제학공파와 안렴사공파 선조님들의 주요 유적지를 망라하고 있고, 첫날 일정이 빠듯하여 현지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위주로 4회 정도로 나누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일시 : 2004년 8월 1일~8월 3일

■장소 : 충북 오창, 증평, 괴산 일대

■답사 지역

◆8월 1일(일)

  중부고속도로 증평IC 집결 → 오창 모정리 안렴사공 묘역 → 복현리 체경묘원 → 양지리 송천서원 → 남하리 죽헌공문중 경모재 → 율리 남봉공 묘역 → 청안읍 청안사마소 → 보광산 감사공 묘역 → 증평 홍명희 생가 → 비안공문중 세덕사 → 양덕공 묘소 → 사직공 묘역 → 세덕사 → 증평 동진천 → 사호정 및 괴산군청 → 세덕사

 

◆8월 2일(월)

  세덕사 → 소수면 수리 부자독립운동공적비 → 수리 참판공 후손 가족묘역 → 능촌리 五甲문중 유적지 → 충민사 → 구암공 묘역 → 쌍곡계곡

 

◆8월 3일(화)

  쌍곡계곡 → 김사달 박사 묵적비 → 김시약 장군 현충비

 

■참석자 : 무순, 존칭 생략, 괄호 안은 가족

◆대종회 및 현지 종친

☆대종회 - 대종회장(태인) 및 사무총장(관묵)

☆현지 종친 - 제학공파, 안렴사공파 일가분 합(合) 100여 명

 

◆여름캠프 참석자 : 총 22가족 42명

☆영환(문) - 3명(2남 홍묵, 장묵)

☆상석(제) - 3명(1녀 1남 슬빈, 선응)

☆옥회(제) - 1명

☆성회(안) - 1명(전 대종회 부회장)

☆영회(제) - 1명

☆윤만(문) - 3명(부인, 1남 태경)

☆은회(익) - 1명

☆주회(안) - 4명(부인, 1남 1녀 우식, 우정)

☆태우(군) - 2명(부인)

☆태서(제) - 1명

☆희준(도) - 2명(1남 수형)

☆항용(제) - 2명(부인)

☆정중(도) - 3명(부인, 1남 용균)

☆대식(안) - 1명(괴산문화원장)

☆용두(제) - 1명

☆용제(제) - 1명

☆용주(안) - 2명(부인)

☆용준(안) - 2명(1남 필교)

☆용환(안) - 2명(1녀 은영)

☆운기(제) - 1명

☆발용(군) - 3명(부인, 1남 형주)

☆윤식(문) - 2명(부인)

 

■가족 소개

☆영환 - 대종회 감사 및 문온공파 총무이사로 대종회 및 파종회 발전에 오랫동안 공헌하셨습니다. 해마다 8명의 대가족이 참여하셔서 다복한 가족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올해는 증조모님 기일과 겹쳤음에도 첫날 행사에 아드님들과 참석하셨습니다.

☆옥회 - 호(號)가 성암(聲庵)이시며, 서예와 한학에 정통하셨습니다. 교육계에서 정년 퇴임하신 뒤 후학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우리 홈페이지에 <마음을 다스리는 글>을 연재 중이십니다.

☆성회 - 전 대종회 부회장으로 대종회 및 안렴사공파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계십니다. ‘살아 있는 대동야승’으로 불릴 정도로 문중사와 국학에 정통하시며, 안사연 발전에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윤만 - 안사연을 비롯한 문중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계십니다. 그 동안 여름캠프에 아드님과 함께 참석해 오다 이번에는 부인을 대동하셨습니다.

☆은회 - 안사연 활동에 큰 역할을 맡고 계시며, 그 동안 사업상 여름캠프에 참석치 못하다가 어렵게 시간을 내서 참가하셨습니다.

☆주회 - 올해 서울로 파견근무를 나와 낯선 서울 생활 중이십니다. 현재 중국어에 열성이시라 훗날 중국의 선조님 유적답사에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태우 - 12대 종손으로 안사연과 군사공파 등 문중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 중이십니다.

☆태서 - 21세기전략연구소 소장으로 정치에 큰 뜻을 품고 계십니다.

☆정중 - 지난 해에는 큰아드님 용경 군에 이어 올해는 부인과 작은 아드님 용균 군을 대동하셨습니다. 안사연 활동은 물론 대구지역에서 막중한 역할을 맡고 계십니다.

☆대식 - 괴산문화원장으로 지역문화 진흥과 우리 문중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계십니다. 지난 7월 초 여름캠프 사전점검 당시 관내 안내를 맡아 주셨습니다.

☆용두, 용제 - 우리 문중의 주요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하시고 계신 분들로 전국의 일가분들께 널리 알려지신 분들이십니다. 두 분 모두 고령이신데도 여름캠프에 참석하셔서 이번 행사에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용주, 용준, 용환 - 화산군(휘 주) 후손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최근 화산군 영정을 모신 데 이어 비석을 개수하셨습니다. 화산군 현양사업으로 <우암유집> 국역을 성공리에 추진 중이십니다. 이번 여름캠프에 3형제분이 모두 참석하시고, 행사 기간 내내 묵묵히 행동으로 솔선수범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셔서 참가 가족들의 귀감이 되셨습니다.

☆운기 - 퇴계 학맥의 정통을 이은 손꼽히는 한학자이십니다. 지난 대종회 창홀연수에서 그 일면을 보여 주신 바 있습니다. 이번 행사에서도 구수한 이야기와 함께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상석, 영회, 발용, 희준, 항용, 윤식 - 지난 해와 큰 변화 없습니다.

 

■답사 내용

 

▣8월 1일(일)

 

◆새벽~08:30 증평IC

7월 31일 사전 준비를 마친 참가자들은 서울, 대구 등지에서 1차 집결지인 중부고속도로 증평IC를 향해 새벽녘에 출발하였습니다. 전날 저녁, 태풍이 일본열도를 거쳐 우리 나라 해상으로 북서진 중이라 전국에 폭우가 쏟아질 것으로 예보한 터라 내내 신경이 쓰였습니다.

여느 해보다 참가자들이 많아 차량 행렬이 길어질 것으로 예상돼 무엇보다도 이동 중 가족들의 안전이 가장 우려되었습니다. 다행히 선조님들의 보살핌 때문인지 어둠이 벗겨지면서 동이 트자 하늘이 맑게 개어 걱정거리를 말끔히 씻어 주었습니다.

이번 행사는 윤만 종친의 총괄 기획과 항용 종친께서 수차에 걸쳐 행사지역을 샅샅이 답사한 덕분에 차질없이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말씀 드립니다.

08:00분 약속시간에 1차 집결지에는 대종회 사무총장(관묵)과 대종회 감사(영환)를 비롯한 대부분의 참가 가족들이 도착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피서철이 절정인지라 영동고속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였습니다. 그 여파로 경부고속도로까지 막혀 08:30분경이 되어서야 1차 집결지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인원점검을 마친 다음 혹시나 조금 늦게 합류하실 분들을 고려해 조금 더 기다렸다가 08:45분 안렴사공(휘 사렴) 할아버지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증평IC에서 안렴사공 묘역까지는 우리 일행이 차량이 많아 점검시간보다 조금 더 정도 걸렸습니다. 이곳에서 묘역까지는 5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찾아가는 길은 지난 7월 4일 사전점검 보고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09:00 증평IC - 09:40 안렴사공 묘역

08:52, 안렴사공(휘 사렴) 묘역에 도착하니 안렴사공파 종친 50여 분이 기다리고 계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묘역 입구에는 안렴사공 신도비각과 재실인 영모재, 재직사가 있습니다. 영모재는 ㄷ자 형태의 한옥으로 대문에 <안동김씨 안렴사공파대종회 사무국>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담벽에는 오석에 음각한 안내판이 있습니다.

신도비각에서 묘역인 알령산(오근도산)을 바라볼 때, 오른쪽이 안렴사공 묘소이며, 왼쪽이 안렴사공의 할아버님이신 정간공(휘 영후), 아버님이신 영삼사공(휘 천) 단소입니다. 이 두분의 묘소는 개성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62년 정간공 후손인 안렴사공파, 익원공파, 서운관정공파 3파가 합력하여 단소를 조성하였습니다.

 

 

 

 

 

 

 

△충렬공 → 3子 문영공(휘 순) → 4子 정간공(휘 영후) → 1子 영삼사공(휘 천) → 1子 판사공(휘 사겸), 2子 안렴사공(휘 사렴), 3子 충강공(휘 사안), 4子 익원공(휘 사형) △충렬공 → 3子 문영공(휘 순) → 4子 정간공(휘 영후) → 2子 감찰사장령공(휘 장) → 子 서운관정공(휘 수)

 

나지막한 산기슭인데도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워 모두들 땀벅벅입니다. 묘역으로 올라가자 대종회장님을 비롯한 안렴사공파 회장님(재택), 제학공파 회장님(영묵) 및 50여 명의 종친들께서 반가이 맞아 주십니다. 나이 어린 종친들이 연신 땀을 닦아내며 묘역으로 올라오자 어르신들께서 기특하다며 연신 등을 두드려 주십니다. 그 정겨운 광경에 가슴이 벅찹니다.

곧이어 대종회장님과 안렴사공파종회장님의 인사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대종회장님께서는 이 삼복 더위를 무릅쓰고 조상님을 찾아뵙는 뜻깊은 행사에 만반의 준비를 해 주신 두 분 종회장님께 감사드리며, 자라나는 청소년ㆍ학생들이 부모를 따라 참여해 준 것을 치하하셨습니다. 특히 “숭조목족(崇祖睦族)은 가정의 근본이자 우리

문중 발전의 원동력”임을 강조하시면서 “그 취지를 길이 이어갈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재택 종회장님께서는 이번 여름캠프의 첫 답사지로 안렴사공 묘소를 찾아준 데 대해 감사드리며, 우리 문중의 번영을 기원하신 뒤 안렴사공 묘역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두 분의 인사 말씀에 이어 참석자들은 두 분 할아버님께 큰 절을 올린 뒤 안렴사공 묘소로 자리를 옮겨 성묘하였습니다.

 

 

 

 

 

 

 

 

 

 

 

 

 

▲정간공 묘소

헌관 : 태인(대종회장)

집례 : 용두

집사 : 항용

사준 : 용환

 

▲영삼사공 묘소 .

헌관 : 태인(대종회장)

집례 : 용두

집사 : 항용

사준 : 용환

 

안렴사공께서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여말 8청’ 중의 한 분으로서 고려조가 멸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거듭되는 조선 태조(이성계)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이곳 모정리로 낙향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덤이나 묘표를 비롯해 자신의 유택임을 알 수 있는 그 어느 것도 남기지 말 것이며, 고려조에 벼슬을 한 자손은 조선

조에서 벼슬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이처럼 묘소를 평총하여 안렴사공 이하 4대 할아버님의 묘소가 실전되었는데, 1678년 증손 양성공(휘 취) 묘소 자리를 마련하다가 안렴사공의 묘지석을 발견하였답니다. 이를 계기로 또다시 실전되지 않도록 작은 봉분과 묘갈을 세웠다가 광복 후에 다시 봉토하였다고 합니다. 재택 종회장님 말씀으로는 “종이 한 장도 남기지 말라.”고

하신 까닭에 유물 한 점 남지 않은 상태라고 합니다.

안렴사공 묘소는 어른 걸음으로 둘레 30보이며, 상석을 비롯해 망주석, 문인석, 동자석이 각각 1쌍씩 배치돼 있습니다. 평총을 하지 않았다면 안렴사공 유품은 물론 고려조 석물도 남아 있었을 터인데 내내 아쉽기만 합니다.

묘소 뒤에는 도래솔이 둘러서 있으며, 묘소 바로 아래에는 ‘고려충신 안렴사 김공사렴지묘’라 새긴 거대한 비석이 서 있습니다. 양성군종회장님(예묵)께서는 이 자리는 원래 다섯째 아드님(휘 약) 설단이었는데 안렴사공 묘지석 발견 후 체경묘원으로 옮겨 모시고, 양성공(휘 취) 묘소 역시 약간 오른쪽으로 옮겨 안렴사공 묘하로 모신 뒤 이 비석을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안렴사공 묘소

헌관 : 태인(대종회장)

집례 : 용두

집사 : 항용

사준 : 용주

 

양성현감을 지내신 양성공(휘 취) 묘비에는 <통훈대부 행양성현감 안공김공취(吹)지묘, 배 숙부인 이씨지묘>라 새겨져 있습니다. 이 할아버님 덕분에 실전되었던 안렴사공 묘소를 발견하였으니 참으로 뜻깊은 곳입니다.

호석으로 둘러싼 양성공 묘소는 묘표와 문인석 1쌍은 이끼가 내려앉아 있으나, 망주석은 근래에 세운 것입니다.

 

 

 

 

 

▲양성공 묘소

헌관 : 예묵(양성군종회장)

집례 : 용두

집사 : 항용

사준 : 용주

 

묘역 입구의 신도비각은 정면과 측면 각 1칸의 팔작지붕이며, 비신은 6자입니다. 이외에 안렴사공 묘역에 대해서는 주회 종친께서 우리 홈에 올리신 답사자료로 대신합니다.

 

 

 

 

 

 

 

◆09:40 안렴사공 묘역 - 09:50 체경묘원 着

안렴사공 종친들의 배웅을 뒤로 하고 묘역을 출발하자 답사 차량이 19대로 늘어났습니다. 체경묘원은 오창 읍내로 들어가 4거리에서 우회전해야 하는데 이정표도 없는 길을 처음 가 본 탓에 제대로 안내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체경묘원에는 안렴사공의 6남 1녀 중 아드님 3분(1子 휘 간, 3子 휘 위, 5子 휘 약)과 소윤공(휘 약)의 외아드님 지주사공(휘 우주)의 묘소가 있는 곳입니다.

오창 복현리 분토골의 체경묘원은 안렴사공의 손자이신 지주사공(휘 우주)의 묘소만 있던 곳이었는데, 안렴사공의 아드님 3분의 묘소가 본래 계셨던 자리가 공업단지로 조성되면서 지주사공 묘소 위쪽으로 옮겨 모시면서 명명한 것이라고 합니다. 체경묘원(棣慶墓苑)은 묘역 조성 당시 재화 종친께서 작명하신 것으로 도타운 형제간의 우애를 뜻한다고 합니다.

묘역 위쪽에 체경묘원유연비(棣慶墓苑由緣碑)가 서 있고, 그 옆에 안렴사공 아드님 3분의 묘와 설단이 있습니다. 묘소를 바라보고 왼쪽이 안렴사공(휘 간), 가운데가 소윤공(휘 약), 오른쪽이 정랑공(휘 위) 유택인데 소윤공만 실묘이며 두 분은 설단입니다.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은 큼직한 장대석으로 조성돼 있는데, 이 돌들이 바로 원래 묘역에서 호석으로 쓰던 것을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 장대석을 보니 본래 묘소가 얼마나 컸던가를 단번에 짐작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안렴사공께서는 6형제를 두셨으나, 둘째 아드님(휘 인간)께서는 승려로 출가하시고 다섯째 아드님(휘 약)과 여섯째 아드님(휘 식)만 후손을 두셨습니다.

 

 

 

 

 

 

 

 

 

 

▲체경묘원

헌관 : 영묵(제학공파종회장)

집례 : 용두

집사 : 용주

사준 : 윤만

 

◆10:20 체경묘원 - 10:27 송천서원 着

빠듯한 일정에 예정하지 않았던 체경묘원 참배가 추가되어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습니다. 다시 오창 읍내 4거리로 나와 목령산의 송천서원으로 향합니다. 송천서원에 관한 내용은 답사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라며, 주요 내용만 말씀드립니다.

이곳은 안렴사공파의 제2 성지(聖地)에 해당하는 곳으로 목령산을 중심으로 사방이 모두 안렴사공 후손들의 유택과 집성촌입니다.

좁은 농로를 따라 송천서원에 도착하니 모현문(慕賢門)이 우리 일행을 맞이합니다.

송천서원은 실전되었던 안렴사공의 묘소를 찾고 30년이 지난 1708년 이 지역 유림들이 세웠습니다.

주벽이신 안렴사공을 비롯해 모두 15분이 배향돼 있는데, 안렴사공 바로 왼쪽에 전주인 최유경 공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분은 상락군 휘 묘의 3째 사위로서 문온공(휘 구용)의 매부이자 안렴사공의 동생 관찰사공(휘 사안)의 손아래 동서이기도 합니다.

이외에도 배향되신 분들이 우리 문중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안렴사공의 4子 절제사공(휘 제)께서는 따님만 두 분 두셨는데, 전의인 이사혜 공과 이훈 공에게 출가하셨습니다. 이사혜 공의 아버지가 바로 송천서원에 배향된 이정간 공이십니다.

이처럼 절제사공께서는 아드님이 없이 두 분 따님 모두 전의이씨 문중으로 출가하신 까닭에 당시 예속에 따라 절제사공은 전의이씨 문중에 습승되어 전의이씨 문중에서 500년간 외손봉사를 모시고 있으니 양 문중의 아름다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또한 경주인 이대건 공은 이시발 공의 아버지로 안렴사공파 휘 도 할아버지의 사위이며, 역시 경주인 이인혁 공은 이시발 공의 손자입니다. 전주인 최석정 공은 최유경 공의 후손이며, 의령인 남구만 공은 안렴사공파 휘 상기 할아버지의 외현손으로서 안렴사공의 묘갈록과 신도비명을 찬하였습니다. 전의인 이효석 공은 안렴사공의 4

子 휘 제 할아버지의 사위 이사혜의 아들이니 안렴사공의 외손자입니다.

참석자들 모두 우리 문중과 각별한 경내의 송천사(松泉祠)로 들어가 큰절을 올립니다. 일반적으로 위패는 왼쪽부터, 소묘법으로는 가운데에서부터 모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오른쪽에 주벽이신 안렴사공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1871년 고종 8년 대원군의 사원훼철령으로 철폐된 송천서원을 1976년 복원하면서 옛 법을 따라 현재처럼 모시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축을 읽거나 향사를 모실 때 등 모든 제례와 행사에서는 항상 안렴사공부터 시작한다고 합니다.

 

 

 

 

 

 

 

 

 

◆10:40 송천서원 - 11:36 죽헌공종중 경모재 着

예정시간보다 1시간 가량 지체되어 우려했던 대로 일정이 더욱 빠듯해졌습니다. 삼보산 죽헌공종중 경모재에서는 이미 일가분들께서 모두 모이셔서 우리 일행이 도착하기만을 벌써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핸드폰 소리가 긴박감을 더합니다.

길을 되짚어 증평IC 쪽으로 향합니다. 안렴사공파 최대 집성촌 가운데 한 곳인 400년 세거지인 죽리 삼보산 중턱의 죽헌공종중 재실로 향하는 길입니다. 이 길을 그대로 쭉 따라가면 제학공파 남봉공(휘 치) 할아버지 묘역이기도 합니다.

11:24분 증평초ㆍ중ㆍ공고를 지나 청안 방향(도로표지판)으로 달리다가 흥천교 앞에서 우회전을 합니다. 우리 차량 행렬이 워낙 긴 탓에 결국 신호에 걸려 후미 차량이 우회전하는 선두차량을 놓치고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서둘러 선두차량으로 연락을 취해 길가에 정차한 채 후미차량을 기다리느라 상당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비록 예상하기도 했지만, 다음 행사에서는 더욱 철저하게 대비해야 할 점으로 지적되었습니다. 또한 사전점검 때와 다른 길을 선택한 탓에 후미차량에서 되돌아오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삼보산 죽헌공종중 경모재에 도착하니 어느새 11:36분입니다. 경모재 앞은 대식구를 맞이하기 위해 트랙터로 밭을 깨끗하게 밀어 주차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세세한 곳까지 배려해 주신 일가분들께 감사 말씀 올립니다.

삼보산 인근의 남하리, 죽리, 용강리 일원의 안렴사공파 종친들은 서령공(휘 자형)의 후손들의 세거지로서 1,600여 세대가 모여 사시던 곳입니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현재는 700여 세대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이곳 역시 자세한 설명은 우리 홈페이지에 올라온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라며 주요 내용만 말씀드립니다.

안렴사공의 6子 좌랑공(휘 식)께서는 자여, 자형, 자여 3형제분을 두셨는데, 서령공의 휘가 바로 자형이십니다. 서령공 역시 안렴사공의 유지를 받들어 과거 급제를 업으로 삼지 말 것과 유택을 평총으로 하도록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이 때문에 서령공의 묘소도 안타깝게도 실전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죽헌공은 바로 서령공의 아드님 규, 소, 욱 가운데 맏아드님이신 휘 규이십니다. 경모재는 죽헌공 휘 규 할아버지의 재실로서 예전에 이곳 죽헌공종중에서 서당으로 쓰던 건물이라 합니다. 현 경모당은 옛 자리에 2002년도에 다시 지은 건물입니다.

경모재 안으로 들어가니 시원한 냉커피를 준비해 두었다가 나누어 주십니다. 일가분 정성에 한여름 더위가 저만큼 물러갑니다.

죽헌공종중 회장님(재성)께서는 환영인사와 더불어 이곳에 우리 문중이 터를 잡게 된 내력을 일러 주십니다. 현재 삼보산 일대 5만여 평이 종중산이며, 서령공 후손들의 성금과 군비 지원금 등으로 묘역 일대와 진입로 등을 포장했다고 합니다.

 

 

▲죽헌공종중 재실

헌관 : 태인(대종회장)

집례 : 용두

집사 : 항용

 

‘삼보’는 3가지 보물을 뜻하는데 금, 산골, 인삼이 바로 그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일대는 죽헌공종중 소유라 금을 채굴하지 않고 있답니다.

오랜 세월 세거한 지역답게 이 일대는 죽헌공종중과 관련된 유적이 무수히 산재해 있습니다. 죽리 수호석, 원평마을 천제사, 안동김씨사, 김환극 부부 효비각, 한사정 등을 비롯한 유형ㆍ무형의 유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주회 종친께서 게시판에 올리신 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일정 탓에 대종회장님을 비롯한 일가분들이 경모재 앞으로 모여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무려 1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라 장관이었습니다. 아쉽게도 다음 약속 때문에 삼보산 일대의 할아버지 묘소를 성묘하지 못해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기념촬영을 마치고 대종회장님께서 서울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큰 사업을 이끄시느라 1분 1초도 쪼개 쓰시는 회장님께서 귀한 시간을 내주신 덕에 이번 행사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일정상 좀더 여유가 있다면 산들이 중첩되며 그려내는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경모재에서 일가분들과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겠건만....... 그러하지 못하는 일정이 안타깝고 송구하기만 합니다.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 한 채 이제 율리 남봉공 할아버지 묘역으로 향할 시간입니다.

서울로 올라가시는 대종회장님을 비롯한 문중 어르신들 무사히 상경하시기를 빕니다.

 

 

 

 

 

 

 

 

 

 

 

 

 

 

 

◆11:55 죽헌공종중 경모재 - 12:06 율리 남봉공 묘역 着

일가분 100여 명의 맑은 웃음소리를 삼보산에 남겨놓은 채 율리 남봉공(휘 치) 묘역으로 향합니다.

경모재 입구 돌표석에서 우회전하여 농로를 따라가면 죽리초등학교입니다. 이곳에서 2차선 도로로 들어서서 우회전, 계속 길을 따라가면 남차3거리(12:01)에 이어 도로 한가운데 고목 대여섯 그루가 모여 있는 곳이 나옵니다.

아름다운 길입니다. 이 길이 백곡(휘 득신) 할아버지의 호를 딴 백곡로입니다. 조선 최고의 시인 중 한 분이신 백곡 할아버지를 알리는 도로 표지판 하나 없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남차교를 지나 오른쪽으로 저수지를 낀 채 고개를 구비 도니 율리 입구입니다.

 

 

연로하신 규복 종친께서 마을 입구에 나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을유래비(율리유래비) 인근에 질서정연하게 주차한 다음 규복 종친을 따라 묘역으로 오릅니다.

돌담길 군데군데 접시꽃이 환하게 피었습니다. 소나기 한 줄금 머금은 도라지꽃도 한창입니다. 낯선 인기척에 놀란 동네 개들이 짖습니다.

 

 

12:13분 묘역에 도착, 맨 위 남봉공(휘 치) 할아버지께 큰절을 올립니다. 남봉공께서는 구암공(휘 충갑)의 큰아드님이신 부평공(휘 시회)의 5남 4녀 중 4째 아들로 태어나 작은아버님이신 충무공(휘 시민)께 입양되신 분입니다.

 

△충렬공 → 3子 문영공(휘 순) → 1子 문숙공(휘 영돈) → 子 상락백(휘 진) → 子 제학공(휘 익달) → 子 사령공(휘 고) → 1子 감찰공(휘 명렴) → 1子 주부공(휘 철균) → 1子 승지공(휘 수형) → 2子 참판공(휘 언묵) → 子 영상공(휘 석) → 1子 구암공(휘 충갑), 2子 현감공(휘 효갑), 3子 참봉공(휘 우갑), 4子 문숙공(휘 제갑), 5子 비안공(휘 인갑)

 

△구암공(휘 충갑) → 3子 충무공(휘 시민) → 子 남봉공(휘 치) → 1子 백곡공(휘 득신) → 1子 화은군(휘 천주)

 

▲ 율리 남봉공 묘소

헌관 : 규복(백곡공 12대손)

집례 : 용두

집사 : 항용

사준 : 윤만

 

남봉공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홈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므로 자세한 소개는 생략합니다.(제3회 여름캠프 답사자료 및 안동김씨 홈페이지 ‘안동김씨 소개’ 중 ‘역사적 주요인물’ 참조) 남봉공의 휘자가 ‘치’인 관계로 제학공파 남봉공문중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짠지’, ‘침채’ 등으로 피휘하고 있습니다.

묘소에는 묘비와 문인석, 망주석, 동자석이 각각 1쌍이며, 근래에 새로 조성한 상석 등의 석물이 배치돼 있습니다. 묘비와 커다란 문인석이 웅장합니다.

중국의 자미두서보다 더 뛰어난 <심곡비결> 등을 남기실 정도로 역술에 밝은 분이시기도 합니다. 남봉공의 12대 손이신 규복 종친께서 남봉공 묘소가 이곳 율리에 자리잡게 된 내력을 들려주십니다.

“이곳 분티고개가 본래 경상도로 넘어가는 고개요. 남봉공 할아버지께서 경상도 관찰사로 계실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는 각 관아에서 운구를 책임졌다고 합디다. 남봉공 할아버지 시신을 모시고 저 분티고개를 넘었는데, 갑자기 명정 공포가 바람에 날리더니 지금 이 자리로 날아와서는 계좌(癸坐)로 쪽 깔린겨. 그때만 해도 여긴 사람 하나 살지 않는 첩첩산골이라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고 합디다. 이곳 청안현 현감이 백성들을 동원해 나무를 베어내고 길을 내서 이곳에 모시게 되었답디다. 옛날부터 어른들께 들은 이야기 전부여. 저기 저 고개가 경상도로 넘어가는 분티고갭니다.”

다정하게 웃으며 조용조용 옛 일을 들려 주시는 규복 종친의 얼굴에서 남봉공 할아버지 얼굴을 그려 봅니다.

 

 

 

 

 

 

 

남봉공 묘역 바로 밑 첫 번째 집이 백곡 할아버지께서 시묘살이를 하시던 묘막 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농촌 가옥이 들어서 있습니다.         

 

 

한여름 땡볕을 받으며 규복 종친 댁 앞으로 내려오니 어느 틈에 영회 종친께서 차가운 물을 준비했다가 내놓으십니다. 월례 등산모임이나 여름캠프 때면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격려해 주신 덕에 매번 송구하기만 합니다. 냉수 한 그릇에 더위가 저만큼 물러갑니다.

 

남봉공 묘소 밑에는 백곡공(휘 득신) 할아버지와 배위 정부인 경주김씨 쌍분이 모셔져 있습니다. 동자석 1쌍을 제외하곤 묘비와 망주석 등은 모두 근래에 새로 세운 것입니다. 묘비에는 가선대부 안풍군 김득신지묘라 새겨져 있습니다.         

 

 

 

 

 

 

 

 

백곡 할아버지는 당대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뛰어난 시인이신지라 이곳 율리 묘역을 찾는 문학도들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답니다. 묘역 관리와 관 할 관청의 안내판 설치 등이 필요한 곳입니다.         

백곡 할아버지는 올해 탄신 400주년을 맞이한 까닭에 우리 후손들이 미리 준비했다면 널리 현양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죄스럽기만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주회 종친께서 우리 홈 게시판 올리신 글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백곡 할아버지 출생지는 진천군인지 증평군인지 아직 확연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만 고증된다면 관할 관청에서도 좀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규복 종친과 항용 종친께서는 이곳 고개 너머 지명이 ‘백곡’이고, 묘소 앞의 개울이 ‘심곡’인 점으로 보아 출생지가 이곳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정하기도 합니다.

                  

▲ 백곡공 묘소         

헌관 : 태서         

집례 : 용두         

집사 : 항용         

사준 : 윤만         

 

 

 

 

                  

◆12:45 율리 - 13:02 청안사마소 着         

율리에서 길을 되돌아 나와서 길 복판에 고목들이 서 있는 곳을 지나면 남차3거리입니다. 이곳에서 우회전(청안 방향)하면 자그마한 남차2교입니다. 그 길을 따라 조천리까지 가서 도로표지판을 보고 금신4거리에서 좌회전(12:59분 - 괴산ㆍ사리 방향) 청안면 시가지입니다. 청안사마소는 시가지 뒤쪽인데 주민들에게 물어보시면 쉽게 찾으실 수 있습니다.

청안사마소 전교께서 우리 일행이 온다는 기별을 받고 1시간 넘도록 기다리시다 우리 일정이 늦어져 송구스럽게도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해 죄송한 말씀을 전합니다.

사마소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집으로 두리기둥에 겹처마, 익공집입니다. 청안사마소는 바로 옆의 향교와 함께 최근에 복원공사가 끝나 우리 일행이 첫 손님으로 방문한 셈이 되었습니다.

사마소는 전국적으로 매우 희귀해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남에 2개소, 이북에 1개소만 있었다고 합니다. 인근 사리면 도화동에 살고 계시는 용두 종친께서 이곳 청안사마소 장의를 맡고 계십니다.

청안사마소에는 총 168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우리 문중에서는 제학공파의 백곡 할아버지를 비롯해 죽리와 남하리 출신인 안렴사공파 7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향사는 매년 음력 9월 27일입니다.

지난 7월 4일 사전점검 때만 해도 현장에서 내부수리가 완료되지 않을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우리 일행의 방문 소식 때문인지 8분 할아버지 위패가 모두 모셔져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배려해 주신 청안사마소 관계자들께 감사 말씀 올립니다.

 

 

 

 

 

 

 

 

▲청안사마소         

김명룡(金命龍 생원), 김호철(金好哲 진사), 김기필(金基弼 진사), 김흥보(金興輔 진사), 김보(金寶 생원), 김구석(金龜錫 생원), 김득신(金得臣 진사), 김주(金日+舟 생원)         

                  

청안사마소를 나와 예약해 둔 식당에서 점심을 들고 14:19분 보광산 휘 소ㆍ휘 구만 할아버지 묘역으로 향합니다.         

                  

◆14:19 청안사마소 - 15:00 보광사 着         

도로표지판의 괴산 방향을 달려 모래재(14:32)를 지나 보광사 입구에 도착하니 14:53분입니다. 보광산은 근동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 대부분 알고 있는 산입니다. 보광산 중턱에 우리 일가분이신 태국 종친이 주지로 계신 보광사가 있습니다.         

 

 

보광사에서 그 위쪽으로 난 오솔길이 감사공(휘 소)과 승지공(휘 구만) 묘소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보광사까지는 길이 좁기는 하나 승용차로 충분히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영상공(휘 석) → 5子 비안공(휘 인갑) → 4子 양덕공(휘 시열) → 子 감사공(휘 소) → 子 승지공(휘 구만)                           

감사공 묘소 앞에는 고려시대의 5층 석탑(괴산 봉학사지 5층석탑)이 서 있습니다. 통일신라기의 석가탑 계열 양식에 백제 계열의 목탑 양식이 약간 습합된 형태이나 체감 비율이 적절하지 않은 석탑입니다. 그러나 비교적 웅장한 맛을 줍니다.         

 

 

이곳은 탑명이 말하듯 봉학사가 있던 자리로 황계포란형 또는 금계포란형에 해당하는 혈자리라고 합니다. 감사공의 묘소는 본래 보광산 아래 사담리에 유택을 정했는데 이곳이 워낙 명당자리인지라 출가하신 따님이 장례 전날 바가지로 물을 퍼 넣어서 물 나오는 자리인 줄 알고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봉학사는 조선조의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거의 폐사 직전까지 쇠락했는데, 이곳에 감사공 할아버지 묘소를 쓰게 되면서 완전히 폐철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그 절 출신 승려가 천문지리를 익힌 다음 술수를 써서 혈자리를 손상하게 만들었답니다. 건너편 산에 물 흐르는 자리를 가린 것과 알둥지에 해당하는 묘소 뒤쪽에 바람막이용 언덕을 높이 쌓은 것이 바로 그것이랍니다. 이로 인해 뒤에 자손이 이어지지 못하고 양자를 들이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옵니다.

상석 역시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전 점검 당시 항용 종친께서 소개한 내용입니다.

장례 당시 상석을 크게 준비하려고 했더니 석수장이 말이 “이 상석은 점점 커지는 돌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자연법칙으로야 돌이 어찌 커지고 줄어지고 하겠습니까? 그 말은 곧 자손이 줄고 재물이 줄어서 상석에 올릴 제물이 줄어드니 빈자리가 점점 크게 드러난다는 이야기랍니다. 어찌 되었든 그 후 3대에 걸쳐 양자를 들이게 된답니다. 그리고 항용 종친의 이야기로는 풍수지리상 화와 복은 10대에 그치고 새로운 기운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항용 종친께서는 할아버지께서 양자 오셨는데 바로 그 화에서 벗어나는 대수라 그런지 아드님을 여러 분 두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사전점검 당시는 바람이 몹시 불었습니다. 좌우의 커다란 나무들이 이리저리 쏠리며 울어대는 소리에 귀가 멍멍할 정도였는데, 유독 묘소 부근만 바람 한 점 없었습니다. 아마도 와류가 생기면서 이 자리만은 바람이 들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눈이 와도 이곳이 가장 먼저 녹는다고 합니다.         

감사공 묘역 좌우에는 간격을 멀리 두고 커다란 문인석 1쌍이 묘역을 지키고 있습니다. 수풀에 가려 유심히 보지 않고는 1쌍이란 걸 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묘소 앞에는 각각 동자석 1쌍과 상석이 놓여 있습니다. 감사공 묘소 상석에는 감사공 휘자와 배위 정부인 광주김씨, 승지공 묘소 상석에는 승지공 휘자와 배위 정부인 의령남씨가 음각돼 있습니다. 묘 둘레는 각각 40보씩으로 대단한 규모입니다.         

마침 충북대 연구원 1명이 괴산군 유적지 조사를 하기 위해 이곳으로 올라오는 중이라 우리 일행과 합류하였습니다.         

 

 

 

 

 

 

 

 

 

 

                  

▲ 감사공 묘소         

헌관 : 옥회(성암)         

집례 : 용두         

집사 : 항용         

사준 : 윤만         

                  

▲ 승지공 묘소          

헌관 : 항용         

집례 : 용두         

집사 : 용주         

사준 : 윤만         

                  

보광사로 내려와 잠시 땀을 식힙니다. 마침 태국 종친께서는 출타 중이라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보광사 본전에는 옛 봉학사에 모셔져 있던 본존불을 되찾아 이곳에 봉안해 놓고 있다고 합니다.   

보광사 샘물 뒤쪽 암벽이 예전에는 볼 만한 곳이었는지 사람 이름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샘물 바로 옆 건물 뒤로 돌아가 보니 ‘鳳鶴’이라 새긴 커다란 글자가 선명합니다.         

 

 

샘물 옆은 옥회 종친의 웃대 할아버지 묘소라고 합니다. 이곳을 처음 찾은 옥회 종친께서는 만감이 교차하시는 듯합니다.         

보광산을 내려오면서 펼쳐지는 풍치 또한 장관입니다. 큰길로 들어서니 16:03분입니다. 이제 홍명희 생가로 향합니다.         

                 

◆16:03 보광사 입구 - 16:36 홍명희 생가 着         

30여 분을 달려 증평 읍내로 들어서서 괴산교육청이 나옵니다. 증평 읍내 중앙서림이 대식 종친(괴산문화원장)께서 운영하시는 사업체입니다. 규모가 증평읍 일대에서는 가장 큰 서점이랍니다.

홍명희 생가는 증평 읍내에서 동진천 다리를 건너자마자 있습니다. 거의 다 쓰러질 정도로 퇴락했는데 홍명희의 전력 때문에 생가 복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홍명희 생가는 그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 홍범식의 생가로 복원 결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홍범식은 1900년대에 홍성군수로 재직 중 한일합방에 의해 주권을 잃게 되자 이에 격분하여 자결한 분입니다.

다리 위에 주차할 만한 공간이 있으나 교통위반으로 자주 단속하는 장소이므로 가급적 홍명희 생가에 있는 공터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홍명희 생가를 둘러보고 나오자마자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곧 멎겠지 했는데 점점 더 굵어집니다. 느린 속도로 선두 항용 종친 차량을 따라 세덕사로 향합니다.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라 이내 세덕사에 도착했습니다.  

                 

◆18:10 세덕사 - 18:15 양덕공 묘소 着         

세덕사는 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종중회 간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비안공은 바로 5甲 형제분 중 막내이신 휘 인갑 할아버지이십니다. 세덕사 앞 공터에 도착하니 언제 그랬냐 싶게 빗줄기가 가늘어졌습니다.

세덕사는 항용 종친의 부친께서 사재를 털어 세운 것으로 현재 비안공 후손 할아버지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세덕사 옆은 숭모재(崇慕齋)로 항용 종친의 부모님께서 거주하고 계십니다.         

항용 종친의 부모님과 누님 등 가족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세덕사로 들어가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 일행을 위해 항용 종친께서는 미리 비안공문중에서 전해지는 각종 교지, 서적, 백패, 홍패 등을 잘 정리해 전시해 놓았습니다. 귀한 보물들을 대하는 감격과 부러움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세덕사 앞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남자들만 양덕공(휘 시열) 묘소로 향합니다. 거리는 대략 10분 이내입니다. 이곳은 안렴사공파 종중산인데 양덕공 묘소 위쪽으로 안렴사공파 사직공(휘 공걸) 묘역입니다.

양덕공은 평안도 양덕현감을 지내셨는데 충무공(휘 시민)과 충숙공(휘 제갑) 할아버지 음덕으로 52세에 무과 급제 교지를 받고 출사하셨습니다. 이곳 지명이 수진리(水津里)로서 일제 때 지명이고 원이름은 괴산 나루터였다고 합니다.

예전에 한강을 따라 이곳까지 소금배가 들어왔던 까닭에 수진리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합니다.

양덕공 묘소에는 동자석과 망주석 각 1쌍과, 상석이 배치돼 있습니다. 원래 새기다 만 장군석 1쌍이 있었는데, 웃대 어른들께서 새기다 만 까닭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 그 상태 그대로 땅에 묻었다고 합니다.

 

 

 

▲ 양덕공 묘소         

헌관 : 상석         

집례 : 용주         

집사 : 항용         

사준 : 용준         

                 

◆18:20 양덕공 묘소 - 18:25 사직공 묘소 着         

양덕공 묘소에 참배한 다음 그 위쪽으로 조금 떨어진 사직공 묘소로 올라갔습니다. 사직공 묘역에는 사직공(휘 공걸)을 비롯해 부사공(휘 계안), 부사공(휘 원길) 및 통훈대부 김공의 묘소가 있습니다.

                 

△안렴사공 → 5子 소윤공(휘 약) → 子 지주사공(휘 우주) → 1子 판교공(휘 환) → 子 참의공(휘 종손) → 2子 현감공(휘 지) → 1子 사직공(휘 공걸) → 1子 부사공(휘 계안) → 1子 부사공(휘 원길)

                 

맨 위가 부사공(휘 원길) 묘소로 그 아래에 사직공 묘소가 있으니 역장으로 모신 겁니다. 사직공 묘소(합봉)로 올라가 큰절을 올립니다.         

                 

▲ 사직공 묘소         

헌관 : 용주         

집례 : 용준         

집사 : 용환         

                  

사직공 묘소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각각 1쌍입니다. 상석은 근래에 새로 만들었습니다. 묘표에는 충무위사직 안동김공 휘공걸지묘, 배 숙부인 순흥안씨해좌라 적혀 있습니다. 주위에 보라색 도라지꽃이 한창입니다. 

 

 

 

 

 

 

뒤쪽 부사공(휘 계안) 묘표에는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안동김공 휘계안지묘, 배 숙부인 의성김씨 묘부 해좌라 적혀 있습니다. 봉분은 쌍분입니다.         

 

 

                  

▲ 부사공 묘소         

헌관 : 주회         

집례 : 용준         

집사 : 용환         

                  

안렴사공 후손이신 용주, 용준, 용환 3형제분이 부사공 묘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3형제분이 함께 하신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그 형제애가 정말 부럽기만 합니다.

 

부사공 묘소(휘 원길) 묘소로 내려와 참배를 올립니다. 묘표에는 통훈대부 행영해도호부 김공지묘, 숙인 의령남씨지묘라 적혀 있습니다. 쌍분으로 문인석 1쌍이 지키고 있습니다.         

 

 

 

                  

▲ 부사공 묘소         

헌관 : 항용         

집례 : 용준         

집사 : 주회         

                  

그런데 곤혹스런 일이 생겼습니다. 그 아래쪽에 묘소가 있는데 묘표에는 통훈대부 김양○이라 적혀 있습니다. 맨 끝자가 명확하지 않아 守자 같기도 하고, 宇자 같기도 합니다. 또 어찌 보면 中자인 듯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3글자 모두 아니기도 합니다.

문인석 1쌍만 서 있을 뿐 별다른 표석이 없어 어느 분이신지 도저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항용 종친 말씀으로는 인근 종친들도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어찌 되었든 묘역 형편으로 보아 웃대 할아버지일 가능성이 높아 각자 재배를 올립니다.         

이 문제는 우리 일행의 숙제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곳을 잘 아시는 분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조금씩 산그늘이 짙어지는 걸 보니 조금 지치기도 합니다. 숨가쁘게 달려온 하루 일정입니다. 느린 걸음으로 정담을 나누며 세덕사로 향합니다.         

세덕사에 도착하니 영환 종친을 비롯해 옥회 종친 및 현지 종친 몇 분께서 귀가하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 일가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 올립니다.         

                  

◆19:30 이후         

저녁시간이 되자 세덕사 마당은 말 그대로 잔치마당이 되었습니다. 곱게 자란 잔디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푸짐한 저녁을 듭니다.         

항용 종친의 자당어른과 누님들, 그리고 답사팀에 참여한 안동김씨 며느님들께서 연신 음식을 내오십니다. 마당 한쪽에서 남자 종친들이 돼지고기를 굽습니다. 그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이 자리에서 항용 종친의 아버님께서는 환영 인사와 함께 세덕사의 유래를 들려 주십니다. 아울러 안동김문의 일원으로 그에 따른 몸가짐을 바르게 하여 죽어서도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줄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배부르게 저녁을 들고는 우리 일행 모두 동친천으로 산책을 나섰습니다. ‘동진 천 맨밭숲길’이라는 이름으로 공원이 조성돼 있습니다. 신발을 벗고 뾰족뾰족한 길을 걸으니 저절로 발에 지압이 됩니다. 맨발숲길 맨 끝에 둘러앉아 발을 물에 담근 채 캔맥주 한 잔씩을 나눕니다. 갈증이 다 달아납니다.

 

 

 

 

한참을 쉰 뒤 느린 걸음으로 다리를 건너 사호정으로 향합니다. 마침 국가대표상비군 2진 선수들이 이곳 활터에 전지훈련을 나와 있었습니다. 밤이 늦어 훈련장면을 볼 수 없었지만 이곳을 관리하는 사호정 총무 윤회진 씨를 만났습니다.         

윤두수 공의 후손으로 괴산지역의 우리 일가분들과 친교가 깊은 분이십니다.         

이분을 통해 도의원을 지내신 김서응(휘 우갑 후손) 공의 이야기와 김서응 공의 국궁 장면 사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호정은 본래 군자정인데 중심정(中心亭)을 거쳐 사호정(射虎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김사달 박사께서 쓰신 ‘射虎亭’ 휘호가 걸려 있었습니다. 이 글자를 모각한 것이 바로 이곳에 복원된 정자 射虎亭 현판입니다.         

 

 

 

세덕사로 돌아오는 길에 역시 김사달 박사께서 쓰신 괴산군청 현판을 살펴봅니다. 한글 휘호로 반듯한 성품이 전해집니다.         

 

 

▲괴산군수권공공덕비-김사달 書

 

남자분들은 세덕사 인근 향교로, 여자분들은 세덕사로 들어가 단잠을 청합니다. 그 날, 향교에서는 코고는 소리와 이 가는 소리, 그리고 핸드폰 알람 소리때문에 단잠을 설쳤다는 후일담이 전해집니다.         

 

 

▲괴산향교

 

◆08:05 세덕사 - 08:15 수리2구(숫골) 着         

                

수리(壽里)는 일명 ‘숫골’로 불리는데 부자독립운동공적비(父子獨立運動功 績碑)가 있는 곳입니다.         

                 

숫골로 가는 길은 증평 읍내에서 금왕ㆍ음성 방향으로 달리다가 소수3거리(08:12)에서 우회전해서 수리교(08:13)를 건너시면 됩니다. 숫골은 한때 100여 호에 달하는 큰 마을이었는데 90여 호가 모두 우리 일가분이셨다고합니다. 이 때문에 근동에서는 이곳에 사시는 일가분들을 가리켜 숫골김씨라고 할 정도였답니다.

                 

부자독립운동공적비가 서 있는 곳은 형식 옹의 고택 뒤편입니다. 형식 종친을 비롯해 참판공(휘 기) 후손들과 마을이장 안렴사공파 한식 종친께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느티나무 고목이 눈길을 끄는 부자독립운동공적비로 향합니다.

                 

부자독립운동공적비는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김용응, 김태규 선생 부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형식 종친이 바로 독립운동가 김용응선생의 손자이십니다. 형식 종친에 대해서는 항용 종친께서 우리 홈에 자세히 소개한 바 있습니다.         

 

 

                 

김용응 선생은 장릉 참봉을 지내시다가 독립운동에 가담,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조달에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셨습니다. 이 일로 왜경에 체포돼 광주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습니다.

                 

아들 김태규 선생은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하다가 1919년 10월 상해에 파견되기도 하였습니다. 상해임시정부로 부터 충북 괴산군 조사원으로 임명돼 1919년 11월 국내에 들어왔다가 1년간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공적비 주위에는 형식 종친께서 만년에 그리고 계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형식 종친께서는 이 작품 중에서 ‘채꾼’이라는 작품을 대표작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밝은 달밤에 채꾼(소몰이꾼)들이 신작로로 소를 몰고 가는 유화입니다. 어딘가 슬픈 자국이 남아 있는 그림입니다.         

 

                 

실제로 20년 전만 하더라도 채꾼들이 이곳을 수없이 지나다녔다고 합니다.        

그들이 잠시 쉬었다 가던 ‘마구간’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         

                 

부자독립운동공적비 옆에 서 있는 오래 된 비석은 김상일 공의 공적비입니다. 오랜 세월에 몇 글자가 마멸되었습니다. 김상일 공은 김규년 공의 손자로 울진, 용궁, 예천, 함평, 청풍 등지 군수를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그 선정비가 이곳에 세워진 것입니다.         

 

                 

이분은 고종 황제와 사주(四柱)가 일치하기도 합니다. 그 인연으로 특별히 몽은(蒙恩 : 은혜나 은덕을 입음)한 것을 기려 1933년에 사감정(四感亭)을 세우게 됩니다. 그 정자가 공적비 건너편에 보이는 야트막한 산에 있었다고합니다.         

                 

공적비 설명을 마친 형식 종친께서는 “이제 우리는 통일을 생각해야 할 때” 임을 힘주어 강조하십니다. 그 목소리에서 오랜 세월 이념의 최전선을 넘나 들던 진심과 안타까움을 듣습니다.

 

◆08:45 공적비 - 08:53 참판공 후손 가족묘원 着         

                 

참판공(휘 기) 후손 가족묘원은 공적비 뒤편으로 바라보이는 산 중턱에 있습니다. 차량으로 불과 5분 내외 거리입니다.

참판공은 5甲 형제분 중 3째분이신 참봉공(휘 우갑)의 손자이십니다.         

 

△참봉공(휘 우갑) → 3子 판관공(휘 時亮) → 3子 참판공(휘 紀)         

  

참판공의 후손이 방금 전에 말씀드린 부자 독립운동가 김용응 공과 그 아드님 김태규 공입니다. 이외에도 김태동 전 교통부장관, 김학응 충남ㆍ충북지사, 김태길 박사 등이 널리 알려지신 분입니다. 묘역에 도착하니 참판공의 13대 종손 한식 종친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식 종친께서는 괴산군수를 역임하신 바 있습니다.

  

이곳은 본래 참판공의 유택으로 납골묘원으로 조성한 곳입니다. 묘원에는 영모전(永慕殿)이라 새기고, 주위를 화강암 장대석으로 쌓은 다음 봉분에 잔디를 심었습니다.         

 

 

묘원 아래쪽에는 무인석 1쌍을 배치하고, 봉분 옆에는 예전 묘비석과 묘표를 배치했습니다. 이외에 문인석과 동자석, 망주석 각 1쌍이 예전 그대로이 며, 상석과 혼유석, 향로석, 화병 등은 새로 배치한 것입니다.

 

                 

옛 비석에는 ‘정사공신병조참판 안동김공 기(紀)지묘, 배 정부인 영일정씨부’라 적혀 있습니다. 옛 봉분이 합봉이었던 모양입니다.         

 

                 

그 옆 비석에는 ‘가선대부 행 용양위부호군 안동김공 정신(鼎臣)지묘, 배 정부인 고령신씨 부우(祔右), 배 정부인 양성이씨 부우(祔右), 배 정부인 한양조씨 부좌(祔左)’라 적혀 있습니다. 부호군공(휘 정신)은 참판공의 4남 1녀 중 맏아드님이십니다.         

 

                 

내부는 ㄷ자 형태로 납골함을 모실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한식 종친 말씀으로는 앞으로 약 300년간 후손들 묘원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09:35 가족묘원 - 10:40 능촌리 마을회관 着         

                 

09:35분 수리를 출발한 우리 일행은 괴산 시내로 들어가 연료를 채우고 충민사로 향합니다. 그러느라 근 1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충민사 건너편 주차장에 답사팀 여자분들과 아이들을 남겨두고 남자 종친들만 능촌리로 향합니다.

                 

10:40분 능촌리 마을회관에는 문영공파종회장 학응 종친을 비롯해 제학공파종회 총무 태옥 종친, 문숙공 후손이신 영수, 성수 형제분 등 일가분들이 나와 계십니다. 본래 지명은 방아재인데 영상공 묘소로 인해 능말이라고도한답니다.         

                 

이곳은 제학공파 영상공(휘 석) 후손들의 500년 세거지로서 제학공파 성지이자 최대 집성촌입니다. 좀더 좁혀 보면 5甲 형제분 중 휘 충갑, 휘 제갑 할아버지 후손들이 모여 사시는 곳입니다. 5甲 형제분은 충갑(忠甲), 효갑(孝甲), 우갑(友甲), 제갑(懠甲), 인갑(仁甲)이신데, 둘째 분(휘 효갑)께서는 자손이 없으십니다. 셋째 분(휘 우갑) 후손들은 숫골에, 막내 분(휘 인갑) 후손이 증평 등지에 거주하십니다.         

                 

영상공은 충렬공 7세 손으로 조정암(조광조)을 추종하던 당대의 선비로서 한양 주자동(현 충무로 극동빌딩 앞)에 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조정암 선생이 사화로 인해 그 후학들이 핍박을 받게 되자 영상공께서 이곳으로 낙향하시게 되면서 5갑 형제를 양육하시게 된 것입니다.

                 

특히 큰아드님 충갑께서는 퇴계 선생과 친분이 두터워 넷째 동생 제갑을 자신이 직접 말에 태워 도산서원에 가서 학업을 닦게 하신 바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맏형이 어린 동생을 사랑하는 그 마음에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휘 제갑께서는 임진왜란 당시 원주목사로서 원주산성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시다가 장렬하게 순국하신 문숙공이십니다. 원주산성 문숙공 유적지는 안사연에서 답사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임진왜란 3대첩 중 으뜸인 진주대첩을 이끌어 내신 충무공(휘 시민)이 바로 구암공(휘 충갑)의 둘째 아드님이시니 문숙공(휘 제갑)의 조카이십니다. 말 그대로 능골은 충절의 본향입니다.         

   

◇참판공 재실과 연천공 영정각         

                

우리 일행은 마을 종친들의 안내로 참판공(휘 언묵) 재실로 들어가 큰절을 올립니다. 이곳에는 참판공을 비롯한 14분의 할아버지와 배위 총 29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 참판공 재실         

헌관 : 상석         

집례 : 태옥         

집사 : 항용         

사준 : 윤만         

                 

                 

그런 다음 바로 옆의 연천공 영정각으로 들어갔습니다. 연천공(휘 가행)께 서는 경기도 연천군수로 재직하실 당시 연천 백성들이 생사당을 지을 정도로 선정을 베푸신 분이십니다. 연정각은 연천공께서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신 6년 뒤에 후손들이 연천에서 이곳 괴산으로 봉환하였다고 합니다.         

                 

영정은 생전에 그려 모신 것으로 진본은 모처에 보관 중이며, 영정각 내의 영정은 모사본입니다. 그러나 모사본 역시 생전의 연천공을 그대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합니다.         

 

 

◇능말 미륵불         

                 

영정각 옆 고개에는 미륵불이 서 있습니다. 이 미륵불은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거대한 암석의 윗부분만 조각하고, 그 외에는 몸체에 박힌 석영 띠를 있는 그대로 살려 옷깃과 염주를 표현한 조각 기법이 매우 뛰어납니다. 그 아름다움을 탐낸 모씨가 이미륵불을 몰래 가져간 것을 우연히 제보를 입수해 되찾게 되었답니다. 그 이후 다시 도난당하지 않도록 마을에서 가까운 지금 자리로 옮겼다고 합니다.         

                 

◇하담공(휘 時讓) 신도비         

                 

미륵불을 뒤로 하고 고개를 넘어가면 거대한 하담공(휘 시양) 신도비가 있습니다. 이 신도비도 마을 앞을 흐르는 괴강 가(백곡 할아버지 유적지 취묵당으로 가는 강가)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한성부 우윤 이정영 공이 쓰고(書幷篆), 익원공파 눌암(휘 찬) 할아버지 사위이신 조경 공께서 비문을 지었습니다.         

◇영상공 묘역         

                 

신도비 옆 오솔길로 올라서면 영상공(휘 석)을 비롯한 웃대 할아버지 묘역입니다. 맨 위가 참판공(휘 언묵)의 배위이신 정부인 의성김씨 묘소입니다.        

참판공 묘소는 경기도 소래산에 있습니다. 이곳 역시 항용 종친의 안내로 안사연에서 참배한 바 있습니다.         

                 

그 아래가 능말 입향조이신 영상공(휘 석) 묘소입니다. 문인석, 동자석, 석양(石羊)이 각각 1쌍이며, 장명등과 상석 및 부속 석물이 배치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동자석만 오래 된 석물이며, 그 외에는 30년 전에 새로 세운 것입니다. 묘표에는 성균진사 김공지묘, 배 행주기씨 지묘, 묘비에는 증 의정부 영의정 행세자사 김공지묘, 증 정경부인 행주기씨지묘라 새겨져 있습니다.          

 

                 

▲ 영상공 묘소         

헌관 : 상석        

집사 : 항용        

사준 : 용환         

                 

                 

영상공 아래가 비안공(휘 인갑) 묘소입니다. 동자석과 망주석이 각각 1쌍이며, 상석이 큰 편입니다. 비문은 하담공(휘 시양)께서 지으셨습니다.

 

비문에는 조산대부 행비안현감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의금부사 김공지 묘, 증 정부인 남양홍씨지묘가 음각돼 있으나 좌찬성에 증직되신 분이십니다.

 

▲ 비안공 묘소         

헌관 : 희준         

집사 : 항용         

사준 : 용환         

          

일정 때문에 하담공 신도비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습니다.        

성수 종친께서는 이 비문의 글씨체와 내용 때문에 대학원생들이 종종 찾아와 탁본을 떠 간다고 들려 주십니다.

 

◇하담공 묘소         

                 

신도비 오른쪽 묵밭을 헤치고 산으로 오르니 하담 할아버지 묘소입니다. 봉분이 어른 걸음으로 34보로 매우 크며, 시야가 탁 트여 시원합니다.

                 

석물은 문인석, 망주석 각 1쌍과 상석 및 부속 석물들입니다. 혼유석이 큰편인데 혹시 예전 상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상석에는 ‘숭록대부판중추부사 선청백리 시 충익 안동김공 휘 시양, 배 정경부인 경주이씨지묘 자좌’라 적혀 있습니다.         

                 

이곳에 동자석이 1쌍 있었는데 몇 해 전에 몹쓸 손을 타서 분실되었다고 합니다. 하담공에 대해서는 우리 홈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으므로 상세 내용은 생략합니다. 하담공 묘하에는 마부 무덤으로 알려져 있는 작은 무덤이 있어 눈길을 끕니다.         

▲ 하담공 묘소         

헌관 : 항용         

집례 : 상석         

집사 : 용주         

사준 : 용환         

◇문숙공(휘 제갑) 재실         

                 

하담공 묘소를 둘러보고 다시 고개를 넘어 문숙공 재실로 향합니다.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는 뙤약볕에 고추가 빨갛게 물들어 갑니다. 어느덧 12시를 조금 지났습니다.         

                 

성수 종친께서 보관 중이신 충효열 3정려 판각을 살펴보고 문숙공 재실로 들어가 참배를 올립니다. 재실 안에는 문숙공을 비롯한 후손 12분과 배위 14분 총 26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 문숙공 재실         

헌관 : 윤만         

집례 : 영수         

집사 : 항용         

사준 : 상석          

 

맨 오른쪽에 모셔진 문숙공 위패에는 ‘증 대광보국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행 통정대부 수 충청도관찰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겸 원주목사 증 시(諡) 문숙공’, ‘배 정경부인 파평 윤씨’, ‘배 정경부인 완산이씨’라 쓰여 있습니다.         

            

문숙공께서 원주산성에서 장렬히 순국하시자 정경부인 완산이씨께서 순절하시고, 아드님 휘 시백께서는 아버님 시신을 부여안고 왜적의 칼날을 피하지 않으시니 한날한시에 충ㆍ효ㆍ열 3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문숙공의 순절 기록은 일전에 안사연 답사팀이 원주산성에 관한 보고를 드린 바 있으므로 생략합니다. 문숙공 후손이신 영수 종친께서는 당시 문숙공의 시신을 완전한 형태로 찾지 못해 늘 죄스러운 마음이라고 합니다.

           

◇사휴재공(휘 徽) 묘소         

                 

문숙공 재실을 나와 그 뒤편에 있는 사휴재공의 묘소로 향합니다. 사휴재공께서는 하담공의 아들로 바른 소리를 잘 하신 분이십니다. 1646년 인조 24년 회빈 민씨가 억울하게 사약을 받자 정언(正言)으로서 사사(賜死)하게 된 배후를 규명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되기도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림을 잘 그려 조선시대의 뛰어난 화가로 손꼽히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이조판서, 예조판서, 개경유수 등을 역임하기도 하셨습니다.

         

◇문숙공 묘소         

                 

문숙공 시신은 공의 넷째 아들 직장공(휘 시걸)께서 밤에 몰래 성으로 들어가 모시고 나와 달래강 가에 임시로 모셨다가 배편으로 왜군을 피해 이곳까지 모시고 왔다고 합니다.         

                 

성수 종친의 안내로 문숙공 묘소로 올라갑니다.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이 각각 1쌍씩 배치돼 있으나, 영의정으로 추증되신 분의 묘소로는 검소하기만 합니다. 묘소는 쌍분인데 비문에는 문숙공 안동인 김의제,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 증 정경부인 완산이씨지묘라 적혀 있습니다.         

 

 ▲ 문숙공 묘소         

헌관 : 용환         

집사 : 항용         

사준 : 상석         

          

그 오른쪽에 21세의 나이로 아버님을 따라 돌아가신 휘 시백 할아버지 설단입니다. 휘 시백 할아버지께서는 후에 호조참의로 증직되셨습니다. 비문에는 참의공 김시백지단, 숙부인 죽산박씨지묘라 적혀 있습니다.

 

▲ 참의공 단소         

헌관 : 용준         

집사 : 항용         

사준 : 용환          

 

◆13:05 세덕사 - 13:20 충민사 着         

                

일정에 쫓겨 아쉽게도 괴강을 굽어보는 취묵당에 들르지 못하고 다시 충민사로 향합니다. 충민사에는 쉬는 날인데도 태옥 종친의 부탁으로 충민사 자원봉사 해설사(이만숙 씨)께서 벌써 두어 시간째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강 건너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충민사 전경이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송구스런 마음으로 충무교를 건너 충민사에 도착하자 이 해설사는 환한 웃음으로 맞아 주십니다. 5분 정도 자세한 해설을 듣고 충민사로 들어갑니다.

                 

충민사에는 충무공(휘 시민) 영정과 교지 원본, 진주성 촉석루 그림이 모셔져 있습니다. 장우성 화백이 그린 영정은 충무공 생시의 모습 그대로를 연상케 합니다. 충민사 아래에는 충무공과 문숙공의 웅장한 신도비가 각각 1기씩 서 있습니다. 충무공 신도비는 안동인 권영직 씨가 비문을 짓고, 우리 종친이신 김사달 박사가 썼습니다. 문숙공 신도비문은 권영직 씨, 글씨는 12대 방손 상형 종친께서 썼습니다. 그 맞은편에 김시민 장군 유적정 화 기념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충민사 뒤가 충무공 묘소인데 원래 중원군 살미면 신당리 무릉동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순국하신 충무공 시신을 모셔 오던 중 무릉동을 지나던 상여가 움직이지 않아 그곳에 모셨습니다. 그런데 충주호 건설로 1979년에 이곳으로 옮겨 모시게 되었답니다.         

 

충민사 준공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 때마침 10ㆍ26사태가발생했는데, 충민사 건너편 주차장 자리가 헬기 이착륙장으로 쓰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구암공(휘 충갑) 묘역         

                 

충민사 옆으로 옛 사당이 있고, 산 쪽으로 난 길을 따라 50m쯤 가면 충무공의 아버님이신 구암공(휘 충갑)과 구암공의 맏손자 송화공(휘 緯) 묘역입니다.         

             

△구암공(휘 충갑) → 1子 부평공(휘 시회) → 1子 송화공(휘 위)         

                 

△구암공(휘 충갑) → 2子 생원공(휘 시각), 3子 충무공(휘 시민), 4子 감정공(휘 시신), 5子 교관공(휘 시진), 6子 창성공(휘 시약)         

             

이 두 분의 묘소는 충무공 묘소를 천봉할 때 같이 옮겨 모셨습니다. 이때 송화공 묘소에서 미이라 상태의 시신과 함께 의복이 여러 점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의복은 중요 민속자료 118호로 현재 충북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주회 종친께서 우리 홈에 올리신 답사자료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암공 묘소에는 신도비와 묘표, 문인석, 망주석 각 1쌍, 장명등, 상석 및 부속석물이 배치돼 있습니다. 묘표에는 사헌부지평 겸 춘추관기주궁 김공지묘, 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상락군 행 중훈대부라 적혀 있습니다. 송화공 묘소에는 문인석, 망주석, 상석 및 부속석물이 배치돼 있습니다.         

                 

▲ 구암공 묘소         

헌관 : 태우         

집사 : 항용         

사준 : 윤만         

                 

▲ 송화공 묘소         

헌관 : 발용         

집사 : 항용         

사준 : 윤만          

 

◆14:20 충민사 - 괴산관광농원 14:25 着         

                

사전 접촉을 통해 괴산군수님과 충민사에서 대화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군수님과 우리 일행의 일정상 시간이 맞지 않아 소중한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늦은 점심을 들기 위해 괴산관광 농원으로 향합니다.         

 

                

◆16:00 이후(쌍곡계곡의 밤)         

                

시장이 반찬이라더니 다들 맛있게 점심을 들고 15:52분 제일민박에 도착했습니다. 쌍곡계곡으로 들어가는 길은 소금강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산과 물이 아름다운 곳입니다. 곳곳마다 차량들이 늘어서서 발붙일 곳이 한 곳도 없을 지경입니다.         

                

다행히 예약한 제일민박은 골짜기 안쪽 깊숙한 곳이라 사람들이 그리많지 않아 아이들이 물놀이하기에 넉넉했습니다. 한여름철 이만한 곳 고르기도 쉽지 않습니다. 숙박업소 정하느라 여러 모로 애쓰신 항용 종친과 총괄 기획을 담당하신 윤만 종친의 노고가 새삼스럽습니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 나니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늦은 오후, 저녁 식사 준비를 하러 나가니 쌍곡계곡 입구에 차들이 늘어서서 꼼짝도 않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괴산 읍내로 들어가 장을 보는데, 답사본부에서 걸려오는 전화가 빗발칩니다. 아이구! 아이들 배고플 걸 생각하니 자꾸만 조급해집니다.

                

이렇게 저렇게 장을 보고 괴산관광농원에 들러 찌갯거리를 찾아서 돌아오니 우리 식구들 안쓰럽게도 라면으로 아이들 요기를 하는 중입니다. 무더운 날 부모 따라 잘 참아준 어린 종친들에게 미안하기만 합니다.

부랴부랴 튀김 닭을 꺼내 놓으니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졌습니다.  

                

저녁거리를 보자 용준, 용환 종친을 비롯해 은회 종친 등 남자분들께서 서둘러 저녁을 짓습니다. 저녁을 먹고나자 깜깜 어둠입니다. 아이들 폭죽 터뜨리는 소리와 화려한 불꽃이 깊은 산속 밤하늘에 추억거리를 새깁니다.

                

급한 일로 태우 종친 가족이 작별인사를 청합니다. 아쉬운 발길이 떨어지지 않으시는 듯 태우 종친께서는 연신 차창 너머로 손을 흔드십니다.        

태우 종친을 보내고 한두 사람씩 숙소로 들어가 피로를 풉니다.

             

◆8월 3일(화)         

                

◆06:00 - 15:00 쌍곡계곡         

                

안 떠지는 눈을 부비고 겨우 일어났더니 용주, 용준, 용환 3형제분께서 마당을 말끔히 청소해 놓으셨습니다.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시는  분들입니다.         

                

아침을 먹고 백일장과 퀴즈대회 시간을 가졌습니다. 백일장 장원은 희준 종친의 자제 수형 군(고1)이, 차상은 상석 종친의 자제 선응 군(초3)이 각각 차지했습니다.         

                

◇백일장 시제 - 백곡억만재         

                

◇장원 - 도평의공파 김수형         

백 - 백색 물보라 일으키며         

곡 - 곡류 따라 흐르는 저 물은         

억 - 억만 년 동안 이 땅을 흘러왔을 텐데         

만 - 만 년 역사도 안 된 우리가         

재 - 재들을 우리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듯 손을 댈 자격이 있는가         

                

※재 : 고개         

           

◇차상 - 제학공파 김선응         

백 - 백 장의 책에         

곡 - 곡식들이 껴 있고         

억 - 억원이 든 것 같았고, 엄마가 돈이 생긴 것 같아         

만 - 만세를 불렀다.         

재 - 재수가 있는 것 같았다.         

                

※ 상석 종친님, 비상금은 이제 책갈피에서 딴 곳으로…….         

            

퀴즈대회는 사전 공고와 어린 종친들 나름대로의 준비로 참가 인원 전원이 100점 만점을 맞았습니다. 퀴즈문제는 우리 문중과 선조님들 에 관한 기초내용과 답사지역에 관련된 내용이었습니다.

애쓰신 어린 종친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어 보물찾기에 들어갔습니다. 일찍 찾은 학생들은 기분 좋아 어쩔줄 모르고, 끝내 못 찾은 어린 종친들은 입이 삐죽 나옵니다. 웃음이 절로 나오고 귀엽기 그지없습니다.

 

      

대학생인 용균 군(정중 종친 자제)은 물놀이 가서도 어린 동생들 살피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고, 답사 기간 동안 인기 ‘짱’이었습니다. 그덕에 어른들 손 덜 가고, 큰 걱정 덜었습니다. 용균 군, 감사합니다.

      

점심 직전인 11:00~12:00 사이에 판서공파 대 문영공파 족구시합이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판서공파의 분전으로 따라붙었습니다만, 문영공파가 세트 스코어 3:2로 승리했습니다. 한여름 땀 뻘뻘 흘리며 땅바닥에서 신나게 뒹굴었더니 연속 헛발질하면서도 즐거운 한때였습니다.

 

◆15:10 쌍곡계곡 - 16:00 서봉 김사달 박사 묵적비 着         

                

점심식사 후 대종회장님을 대리해 수상자들에 대한 상장 및 부상을 수여하고, 다음 답사준비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김사달 박사 묵적비와 김시약 장군 유적지가 남아 있습니다.        

민박집 주인께 인사를 마치고 15:10분 청천면 무릉리의 묵적비로 향 합니다.

                

쌍곡계곡 반대편 산등성이를 향해 올라갔다 내려가니 살짝 경상북도 경계로 들어가나 봅니다. 경상북도 문경 표지판이 나타납니다. 경치 또한 일품입니다. 장쾌한 속리산 능선을 따라 내려가니 충북에서도 손꼽히는 드라이브 코스가 이어집니다.         

                

인산인해를 이룬 무릉계곡을 거쳐 16:00시경 묵적비에 도착했습니다.        

야트막한 계단을 올라서니 길섶에 가려진 묵적비 전면이 드러납니다.         

                

당대 최고 서예가 중의 한 분인 일중 김충현 선생이 ‘서봉 김사달 묵적비’라고 쓴 글이 눈에 익습니다. 뒷면은 서봉 박사님의 초서체로 쓴 후적벽부가 새겨져 있습니다. 옆면(좌)에는 적벽부 행서, 또 다른 측면 (우)에는 우리말 풀이가 각각 적혀 있습니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와 중앙일보사 서봉 묵적비 건립위원회가 공동으로 건립한 묵적비의 우리말 풀이만 옮깁니다.         

                

그대도 또한 저 물과 달을 아는가         

감히 이와 같다 하지만         

그러나 일찍이 가는 것만이 아닌 것을         

차고 비고 함이 저와 같으나         

마침내 소장할 수 없음이라         

대저 그 변하는 자 스스로가 볼진대         

곧 천지도 일찍이 한순간이나마 머물지 못하는 것을         

그 변하지 않는 자 스스로가 볼진대         

곧 물건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음이라         

그런데 또 무엇을 부러워할 것인가         

또한 저 천지의 사이에 물건이 각각 주인이 있으니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닐진대         

비록 털 끝 하나라도 취하지 말 것이라         

오직 강상의 청풍과 산간의 명월로 더불어         

귀는 이를 얻어 소리를 삼고         

눈은 이를 만나 빛을 이룰 것이니         

이를 써도 금할 자 없으며         

써도 다하지 않으니         

이는 조물주의 섭리일러라         

그리고 그것은 나와 그대가         

다 같이 즐겨하는 바라         

                

- 적벽부에서 뽑아 쓰다         

갑자년 가을 서봉 김사달 쓰다         

                

                

묵적비를 답사하고 내려오니 대구에서 참가하신 희준 종친 가족과 정중 종친 가족이 떠날 시간이 되었습니다. 멀리서 끝없는 애정과 관심을 베풀어 주시는 두 분과 가족 여러분께 감사 말씀 올립니다. 먼 길 무사히 귀가하시기를 빌면서 답사팀은 김시약 장군 현충비로 향합니다.

            

◆16:20 묵적비 - 16:40 김시약 장군 현충비         

                

두 분 가족이 떠나시고 나니 차량이 5대로 줄어들었습니다. 마음 한켠에 빈 자리도 그만큼 늘었습니다.

                

증평 읍내로 가는 길로 들어선 다음 새로 건설 중인 도로로 올라섭니다. 일부 구간만 개통된 곳이라 그런지 오가는 차량이 거의 없습니다.        

시원하게 내달려 청천면 덕평리의 김시약 장군 충효삼문에 도착했습니다.         

                

묘소는 조금 떨어진 곳이라 일정상 참배를 하지 못하고 현충비에서 대신 헌작합니다. 김시약 장군은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동생으로 우리 문중의 자랑스런 무장이십니다.

                

장군께서는 일찍이 충무공을 도와 진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우셨으며, 괴산에 돌아와서는 창의병을 일으켜 각지에서 도적의 무리인 왜적을 격파했습니다.         

                

그 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대군의 호병을 맞아 분전하시다가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포로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장군께서는 결코 항복하시지 않고 장렬한 최후를 맞으셨습니다. 항복을 요구하며 긍ㆍ규 두 아드님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의 악랄한 협박에 의연히 대처하시다가 차마 입으로 옮기지 못할 형태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구암공(휘 충갑) → 3子 충무공(휘 시민), 6子 충숙공(휘 시약)         

                

△충숙공(휘 시약) → 1子 첨정공(휘 긍), 2子 첨정공(휘 규)         

             

장군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해 덕평리 가지산에 초혼묘를 설단하였으며, 후에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셨습니다. 두 아드님 역시 정문(旌門)과 함께 첨정으로 증직되셨습니다. 현 충효삼문과 현충비는 괴산ㆍ증평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의 노력으로 2001년 11월 묘역 정비에 이어 2003년 5월에 세워졌습니다.

          

▲ 현충비 헌작         

                

헌관 : 윤만         

집사 : 항용         

            

현충비 앞에서의 묵념이 어느 때보다 깊은 침묵 속으로 잠깁니다.        

그 침묵 속에서 크고 강하게 울리는 우리 문중 선조님들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 헤어질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2004년도 제3회 여름캠프 수상자 명단 - 청소년부>

                

백일장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16번 - 장원 : 김수형(도)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17번 - 차상 : 김선응(제)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18번 - 우수상 : 김은영(안)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19번 - 우수상 : 김우정(안)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20번 - 우수상 : 김필교(안)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21번 - 우수상 : 김우식(안)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22번 - 우수상 : 김형주(군)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23번 - 우수상 : 김용균(도)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24번 - 우수상 : 김슬빈(제)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25번 - 우수상 : 김태경(문)

                

퀴즈대회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26번 - 우수상 : 김우정(안)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27번 - 우수상 : 김우식(안)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28번 - 우수상 : 김용균(도)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29번 - 우수상 : 김형주(군)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30번 - 우수상 : 김은영(제)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31번 - 우수상 : 김태경(문)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32번 - 우수상 : 김선응(제)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33번 - 우수상 : 김필교(안)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34번 - 우수상 : 김수형(도)

▣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235번 - 우수상 : 김슬빈(제)

 

<2004년도 제3회 여름캠프 오행시 백일장 - 청소년부>

                

1. 일시 : 2004. 8. 2   

2. 시제 : 백곡억만재   

3. 작성방법   

  ① 당일 규정시간에 작성 제출   

  ② 1행당 3자 이상 15자 이내로 작성   

  ③ 산문시보다는 가능한 한 운율을 최대한 살릴 것   

  ④ 우수작 시상 및 대종회보 게재   

  ⑤ 수상 등위 : 장원(1), 차상(1), 차하(2), 장려 약간 명   

4. 응모작 : 10명(10작품)   

  ※ 수상작은 현지 사정을 고려해 청소년부에 한해 장원과 차상 및 우수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 평가 주안점은 어린 종친들의 독창성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   

  ※대종회 상장 수여번호 순서로 적습니다. 장원ㆍ차상 이외의 우수상은 같은 순위이니 어린 종친들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 상장 수여번호 216번 - 장원 : 김수형(도)   

백 : 백색 물보라 일으키며   

곡 : 곡류 따라 흐르는 저 물은    

억 : 억만 년 동안 이 땅을 흘러왔을 텐데   

만 : 만 년 역사도 안 된 우리가   

재 : 재들을 우리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듯 손을 댈 자격이 있는가   

                

▣ 상장 수여번호 217번 - 차상 : 김선응(제)   

백 : 백 장의 책에   

곡 : 곡식들이 껴 있고,   

억 : 억원이 든 것 같았고 엄마가 돈이 생긴 것 같아   

만 : 만세를 불렀다.   

재 : 재수가 있는 것 같았다.   

                

▣ 상장 수여번호 218번 - 우수상 : 김은영(안)   

백 : 백성들이 모여   

곡 : 곡을 하는구나   

억 : 억수로 눈물을 흘리며   

만 : 만민의 슬픔을 달래며   

재 : 재를 넘는구나   

                

▣ 상장 수여번호 219번 - 우수상 : 김우정(안)   

백 : 백곡에서   

곡 : 곡강까지   

억 : 억만 번 백이전을   

만 : 만만 번 외우다가 어느새   

재 : 재를 넘어가네   

                

▣ 상장 수여번호 220번 - 우수상 : 김필교(안)   

백 : 백곡 조상님의 분상을 찾아서   

곡 : 곡 및 참배하고   

억 : 억만큼 생각이 교차되며   

만 : 만인의 생각은 어떠할까 하며   

재 : 재를 넘어 귀향하였다   

                

▣ 상장 수여번호 221번 - 우수상 : 김우식(안)   

백 : 백만원 생겼다.   

곡 : 곡식을 많이 먹는다.   

억 : 억수같이 비가 옵니다.   

만 : 만세를 산에서 부릅니다.   

재 : 재미있게 게임한다.   

                

▣ 상장 수여번호 222번 - 우수상 : 김형주(군)   

백 : 백만원이 생긴다면 노래방 가서 노래 한   

곡 : 곡 부르고   

억 : 억이 생긴다면, 3천   

만 : 만의 북한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다 나눠 줄 것이다.   

재 : 재산 다 털리겠다.   

                

▣ 상장 수여번호 223번 - 우수상 : 김용균(도)   

백 : 백색 쌀   

곡 : 고기   

억 : 억수로   

만 : 맛있게   

재 : 잡수셨다.   

                

▣ 상장 수여번호 224번 - 우수상 : 김슬빈(제)   

백 : 백만장자 납셨네   

곡 : 곡식을 사서 밥도 맘껏 먹고   

억 : 억원이나 되는 돈을 금고에 저장했다네. 사람들은 그가 재수없었다.   

     쯧쯧…… 사람들이 목청껏 외쳤다.   

만 : 만세~ 만세~ 통쾌도 하다!   

     참~으로   

재 : 재수도 없지. 돈이……그 많던 돈들이 도둑에게 당했다는 것이다.   

     사람들 그 人에게 보내는 시선이 다양하다.   

     불쌍, 통쾌……   

                

▣ 상장 수여번호 225번 - 우수상 : 김태경(문)   

백 : 만원 있으면   

곡 : 식사서 배터지게 먹고 가족 용돈 주고   

억 : 억원이 있으면   

만 : 만원씩 불쌍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우리 나라   

재 : 재정을 바로잡아 주겠다.   

 

<2004년도 제3회 여름캠프 오행시 백일장 - 성인부>

                

                

1. 일시 : 2004. 8. 2

2. 시제 : 백곡억만재

3. 작성방법

   ① 당일 규정시간에 작성 제출

   ② 1행당 3자 이상 15자 이내로 작성

   ③ 산문시보다는 가능한 한 운율을 최대한 살릴 것

   ④ 우수작 시상 및 대종회보 게재

   ⑤ 수상 등위 : 장원(1), 차상(1), 차하(2), 장려 약간 명

   ※  수상작은 현지 사정을 고려해 청소년부에 한해 장원과 차상 및 우수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 김상석(제)

                

백 : 백곡 선조님의 독서철학과 인간경영,

곡 : 곡을 하시며 지내시던 묘막의 흔적은

억 : 억수로 퍼붓던 소낙비마저도 지우지 못해

만 : 만세로 남아 예 남았으니

재 : 재 넘고 강 건너 찾아드는 후학들이 어젯밤에도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를 쓰누나!

         

▣ 김윤만(문)

                

백 : 백설공주와 피노키오가

곡 : 곡예하듯 외나무다리에서 마주쳤다.

억 : 억척스럽게도 둘은 길을 비켜주지 않다가  

만 : 만길 다리 밑으로 함께 떨어졌다.

재 : 재미있는 뒷이야기는 너무 길어서 생략한다.

            

▣ 김주회(안)

                

백 : 백곡 선조 찾아 율리 가는 길

곡 : 곡강 쪽 왼편으로는 청안길, 오른편으로는 삼보산 하 남하리, 죽리

억 : 억수로 쏟아지던 소낙비를 피해 찾아든 세덕사

만 : 만찬 준비로 분주하신 주인장 내외분과 따님, 며느리

재 : 재실 안팎 가득한 崇祖睦族!!! 家藏 유물 전시회

              

▣ 김항용(제)

                

백 : 백곡로 따라가는 사백년 역사길

곡 : 곡하던 묘막터엔 그 눈물 남았도다

억 : 억만재 백이숙제는 풍경소리에 울리는데

만 : 만년 또 만년이 가고 온대도

재 : 재송하고 실행하리라 구실하는 남아야

          

▣ 김정중(도)

                

백 : 백일장 하라는

곡 : 곡절을 알 수 없어

억 : 억지로 글 쓰려니

만 : 만고의 충절 가문, 당대 제일 시인

재 : 재주 떨친 백곡선생 더욱 그립네  

 

< 2004년 제3회 여름캠프 퀴즈 및 정답>

                

1. 신라 마지막 임금님은 경순대왕이십니다. 이분의 넷째 아드님의 휘자는 은자 열자(殷說)이십니다. 이분의 둘째 아드님이 우리 가문의 시조 할아버지이십니다. 이분의 휘자는 무슨 자를 쓰시는지요?

                

◈정답 : ①번

                

     ①휘 숙승(叔承)     ②휘 일긍(日兢)     ③휘 이청(利請)

     ④휘 의화(義和)     ⑤휘 민성(敏成)     ⑥휘 효인(孝印)

                

2. 상서공(휘 효인) 할아버지께서는 아드님 3분을 두셨습니다. 이 3분 중 첫째 할아버지가 바로 우리 가문의 중시조이신 상락군 개국공이십니다. 이분의 휘자는?

    <힌트> 충렬공

                

◈정답 : ③번

                

      ①휘 현경(玄慶)     ②휘 지경(之慶)     ③휘 방경(方慶)

                

3. 중시조 충렬공의 현손(손자의 손자)은 모두 21분이십니다. 이분들 중 15분이 현재 우리 가문의 파조할아버지들이십니다.

그러면 우리 가문은 모두 몇 개 파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정답 : ②번

                

     ①21개 파     ②15개 파     ③13개 파     ④11개 파

                

4. 이번 여름캠프 답사지는 15분의 파조 할아버지 중 두 분의 후손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다음 중 두 분 파조 할아버님의 휘자를 올바로 짝지은 것은?

                

◈정답 : ①번

                

     ①휘 사렴 / 휘 익달     ②휘 칠우 / 휘 칠림     ③휘 칠양 / 휘 성목

     ④휘 천순 / 휘 구용     ⑤휘 구덕 / 휘 구정     ⑥휘 유   / 휘 장

     ⑦휘 사형 / 휘 수       ⑧휘 철   / 휘 달

                

5. 임진왜란 3대 대첩은 임진왜란 당시 우리 나라에 쳐들어온 왜적을 크게 무찌른 일을 가리킵니다. 다음 중 임진왜란 3대 대첩에 속하지 않는 것은?

                

◈정답 : ④번

                

     ①진주대첩     ②한산대첩     ③행주대첩     ④연기대첩

                

6. 진주성 싸움에서 대첩을 거두신 할아버지의 휘자와 시호를 올바로 연결한 것은?

                

◈정답 : ①번

                

     ①충무공 - 김시민     ②충무공 - 이순신     ③충장공 - 권율

     ④상락군 - 김흔       ⑤충무공 - 김응하

                

7. 충무공은 무인 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시호입니다. 여러분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 가문에는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으신 분이 또 한 분 계십니다.

이 할아버지의 휘자는?

                

◈정답 : ③번

                

     ①휘 응해(應海)     ②휘 치(緻)     ③휘 응하(應河)     ④휘 득신(得臣)

                

8. 이 할아버지께서는 고려의 충신으로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임금님께 바른 소리를 잘 하셨던 분이십니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태조(이성계)가 수차례 높은 벼슬로 기용하고자 했으나 고려의 충신으로서 조선의 새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청주로 물러나 숨어 사셨습니다.

이 할아버지의 휘자는?

                

◈정답 : ②번

                

     ①판사공   - 휘 사겸     ②안렴사공 - 휘 사렴

     ③관찰사공 - 휘 사안     ④익원공   - 휘 사형

                

9. 제학공 할아버지께서는 고려 우왕 때인 1380년 문과에 급제하신 뒤 보문각 직제학을 역임하셨습니다. 이 할아버지께서는 휘 익달 외에 또 다른 휘자를 쓰셨습니다. 다음 중 올바른 것은?

                

◈정답 : ④번

                

     ①문숙공 - 휘 영돈(永暾)     ②상락백 - 휘 진(縝)

     ③제학공 - 휘 익달(益達)     ④제학공 - 휘 익위(益偉)

                

10. 안렴사공(휘 사렴)께서는 여말선초 이성계의 역성혁명기에 오창 도산(현재의 모정리)에 은거하여 고려에의 충절을 지키셨습니다. 자손들도 공의 충절의 유훈을 받들어 많은 묘소가 실전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음은 안렴사공의 충절의 유훈을 이어간 자손들을 나열하였습니다. 아닌 분은 누구일까요?

                

◈정답 : ①번

                

     ①휘 사안     ②휘 약       ③휘 식

     ④휘 우주     ⑤휘 자려     ⑥휘 자형

          

2004년 제3회 여름캠프 퀴즈 힌트   

                 

3번과 4번   

                 

충렬공 현손   

                 

◆휘 칠우(七祐) - 밀직사사공파      

◆휘 칠림(七霖) - 개성윤공파     

◆휘 칠양(七陽) - 군사공파         

◆휘 성목(成牧) - 전서공파         

◆휘 천순(天順) - 부사공파         

◆휘 구용(九容) - 문온공파         

◆휘 제안(齊顔) - 사천김씨         

◆휘 구덕(九德) - 안정공파         

◆휘 구정(九鼎) - 도평의공파       

◆휘 윤(潤)       - 청주김씨         

◆휘 유(儒)       - 대호군공파       

◆휘 익달(益達) - 제학공파         

◆휘 장(塲)       - 판삼사공파       

◆휘 사겸(士謙) - 무후               

◆휘 사렴(士廉) - 안렴사공파       

◆휘 사안(士安) - 무후               

◆휘 사형(士衡) - 익원공파          

◆휘 수(綏)       - 서운관정공파   

◆휘 길(吉)       - 무후                

◆휘 철(哲)       - 정의공파         

◆휘 달(達)       - 대구김씨         

             

5번   

                 

◆진주대첩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졌던 두 차례의 큰 싸움.   

제1차 진주싸움은 1592년(선조 25) 10월 5일,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가 지휘하는 왜군 약 2만 명이 진주성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이끄는 3800명의 조선군이 역공을 펼쳐 6일간의 대접전 끝에 왜군을 패주시켰다.   

이 싸움에서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의 응원이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지역을 보존하였을 뿐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엿보지 못하게 하였다.   

제1차 진주싸움은 임진왜란 3대첩(大捷)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제2차 진주싸움은 제1차 진주싸움의 참패로 위신이 손상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명령을 내리면서 비롯되었다. 19일 3만 7,000여 명의 병력이 진주성 공격을 시작, 22일부터 본격적인 싸움이 전개되었다. 치열한 격전 끝에 의병장 김준민(金俊民) 등이 전사하였고, 29일 성이 함락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등은 남강(南江)에 투신하였으며 민·관·군은 모두 학살당하였고 가축도 도살되었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 최대의 격전으로서 우리 민족의 애국정신을 발휘한 싸움이었다. 정평구(鄭平九)가 만들었다는 비거(飛車)를 사용한 것과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죽음으로 유명하다.   

              

◆연기대첩   

                 

연기대첩은 고려 충렬왕때의 원나라의 반란군이었던 합단적이 고려로 쳐들어와 온 강토를 유린하다가 1291년(충렬왕 17년) 5월 1일 이곳 연기 정화산에 침입한 것을 격퇴시킨 연기지역에는 역사상 그 유례가 없었던 대승첩이었다. 적의 침입에 고려와 원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5월 2일 동이 틀 무렵 정화산을 공격하였으나 적이 너무 강력하게 저항하여 우리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에 김흔 장군은 "후퇴하는 자는 엄히 참하리라" 하고 앞장 서 적의 예봉을 꺾고 진격하여 적을 크게 격퇴시켰다.   

정화산 전투에서 패주한 합단적은 남북으로 도주하였다가 5월 8일 전열을 재정비하여 연주산으로 다시 침략해 왔다. 연주산 전투에서는 한희유 장군이 앞장 서 적을 공격하여 격퇴함으로써 전후 2년여에 걸친 합단의 침입이 종식을 고하였다.   

이처럼 연기대첩은 합단적의 유린을 종식시킨 결정적 승전이었음에도 후대에 이 대첩을 기념할 어떤 유적도 남겨 놓지 못하였음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연기대첩에 참여했던 김흔 장군은 안동김문의 중시조인 충렬공 김방경의 둘째 아들로 비록 장군의 직계 후손들이 연기지역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연기대첩지의 역사성을 기리고 아울러 방계의 조상을 기리는 깊은 뜻으로 이 비를 새겨 멀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 1997년 5월 안동김씨 연기종친회   

             

◆합단(哈丹)의 침입   

                 

1290년(충렬왕 16) 원나라의 합단(哈丹)이 고려를 침입한 사건.   

원나라의 반군(叛軍) 내안(乃顔)의 부장이었던 그는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나라 장수 내만대(乃蠻帶)에게 패하자 방향을 바꾸어 고려의 동북변을 침입하였다.   

고려는 중군만호(中軍萬戶) 정수기(鄭守琪), 좌군만호 박지량(朴之亮), 우군만호 김흔(金忻)으로 하여금 각각 금기산동(禁忌山洞)ㆍ이천현계(伊川縣界)ㆍ권가현계(拳縣界)를 지키도록 하는 한편, 원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합단의 무리는 원나라의 쌍성(雙城)을 점령하고 고려의 등주(登州:안변)를 함락하였으며, 이듬해 철령(鐵嶺)을 넘어 교주도(交州道)의 양근(楊根)을 점령하였다.   

이에 왕은 강화로 피란하는 한편으로 원주별초(原州別抄) 소속의 원충갑(元沖甲)이 원주에 들어온 적을 물리쳤다. 원나라도 1만의 군사를 보내 고려를 도왔다.   

원주에서 패한 합단의 무리들은 계속 남하하여, 주력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들은 다시 연기에 집결하였다가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의 급습으로 대패하였다.   

그들의 기병부대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으나 한희유(韓希愈)의 추격으로 합단과 아들 노적(老的)은 2,000여 기를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이로써 1년 6개월 동안 합단의 침입은 끝나고 9월 왕은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7번   

                 

◆김응하(金應河)1580(선조13)∼1619(광해군11)   

                 

자는 경의(景義), 철원군 어운면 갈원동 하갈리에서 안동김씨인 아버지 김지사(金地四)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나, 14세에 전염병으로 양친을 잃고 동생 응해(鷹海)와 함께 자라면서 사냥을 즐겨 맨손과 단검으로 범과 돼지를 잡았다고 한다.   

키가 8척에 힘이 세어 장사로 알려졌다. 1604년(선조37) 25세에 무과(武科)에 급제, 말직에서 전전하다가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의 추천으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가 1608년 박승종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자 그의 비장(裨將)으로 기용되었다. 31세 때 선천 군수를 하면서 청렴하게 백성을 다스렸다. 1610년 다시 선전관, 이어 경원판관(慶源判官)ㆍ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ㆍ삼수군수(三水郡守)ㆍ북우후(北虞候)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 10년(1618)에 만주에서 누루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명나라를 침범하자 명에서는 건주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군을 청하였다. 김응하는 이때 명나라 원군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 휘하에 들어갔다.   

이듬해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3월 명나라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명나라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부차령(富 車嶺)에서 패전하여 자결하자 조선군(朝鮮軍)은 6만의 적군과 대전케 되었다.   

그런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우영장 이일원(李一元)은 달아났고, 김응하는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군분투 끝에 전사하고, 휘하 군사는 괴멸했다.   

1620년(광해군12) 명나라 신종(神宗)에 의해 요동백(遼東伯)으로 추봉(追封)됨과 동시에 처자에게는 은(銀)이 하사되었고 조선에서는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8번   

                 

◆안렴사공(휘 사렴)   

                 

고려의 충신. 명장 충렬공(휘 방경)의 현손(玄孫).   

문장에 능하며 공민왕 초엽 문과(文科)에 급제, 정몽주(鄭夢周)ㆍ이색(李穡)과 함께 직간(直諫)으로 이름을 떨쳤다. 1365년(공민왕 14) 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ㆍ집현전 대학사(壁上三韓三重大匡集 賢殿大學士)를 더하고 공신호를 내리자 신돈이 위험 인물임을 상소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청주(淸州)에 은퇴, 태조에 의해 수차에 걸쳐 좌사간(左司諫)에 기용되었으나 거절한 후 도산(陶山)에 가서 살았다.   

                 

◆충렬공(휘 방경) → 3子 문영공(휘 순) → 4子 정간공(휘 영후) → 1子 상락군(휘 천) → 1子 판사공(휘 사겸), 2子 안렴사공(휘 사렴), 3子 충강공(휘 사안), 4子 익원공(휘 사형)   

              

9번   

                 

◆제학공(提學公)   

                 

1380년(고려 우왕 6년. 41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순대부 밀직사좌부대언(正順大夫密直司左副代言)을 거쳐 보문각 직제학ㆍ지공조사사(寶文閣直提學知工曹司事)에 오름.   

묘는 실전(失傳)이며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도정사에 설단(設壇)함.   

                 

◆충렬공(휘 방경) → 3子 문영공(휘 순) → 1子 문숙공(휘 영돈) → 子 상락백(휘 진) → 子 제학공(휘 익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