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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제 47회 정기산행(제3차 왕릉 답사)

            (2007. 10. 24. 글-윤만, 사진-발용 제공)

 

1. 태릉 (사적 제201호)

  제47회 안사연 정기산행은 제1차 헌·인릉 및 선·정릉 제2차 동구릉에 이어 제3차 태·강릉, 정릉, 연산군 묘를 답사하기로 하였습니다.

 

  2007년 10월 14일(일요일)  09:30시 약속장소인 태릉 매표소 앞에는 영환(문) 대부님 내외분·발용(군)·상석(제)·상용(안)·영식(안)·은회(익)·준용(안)·태영(군)·태우(군)·항용(제)·윤만(문)·안동인 권호순 시간의 물레 사장이 시간에 맞춰 모였고, 지난번 동구릉 답사 때 명 해설로 우리의 역사적 안목과 인식을 한껏 높여 주었던 진정임 해설사 님과 반가운 인사를 나눴습니다.

 

  답사가 시작되기 전 진정임 해설사께서 이번에도 자비(自費)로 만든 태·강릉과 정릉관련 조선왕조실록 발췌문을 나눠주시고 임진왜란 때 왜적이 태릉을 파헤쳤다는 역사적 사실 등을 실감있게 설명해 주셨는데 오늘 우리의 답사일정을 듣고 일정이 너무 빡빡하고 점심 장소 등은 이동상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하여 태·강릉→중식(불암산 선공회관)→육군박물관→연산군 묘→정릉 순으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답사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쯤해서 영식 등반대장은 사업상의 일로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지고 태릉 답사를 마칠무렵 상석님이 합류하여 답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답사하고자 하는 태릉은 조선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황후 윤씨의 능이고, 강릉은 문정왕후의 아드님인 제13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며,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입니다.

 

  왕비와 함께 묻히지 못한 조선 왕릉은 (1)태조의 건원릉 (2)단종의 장릉 (3)중종의 정릉이라고 정리하여 설명하고, 원래 중종의 능은 서삼릉 구역 내에 있는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와 함께 희릉에 묻혔으나 문정왕후 자신이 함께 묻히려고 봉은사 주지 보우대사와 의논하여 현재의 정릉 자리로 옮긴 것이나 정릉 일대의 지대가 너무 낮아 장마철이면 제물을 배로 실어날을 정도여서 뜻을 접게 되었다고 합니다. 문정왕후는 보우대사를 신임하여 승과를 신설하는 등 불교중흥에 국고를 많이 사용하였다고도 하지요.

 

  문정왕후는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오른 아드님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임금이 되신 아드님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릴 정도로 지나치게 엄격하여 명종께서는 어머니이신 문정왕후의 목소리만 들어서 벌벌 떨 정도였더랍니다.

 

  이렇게 우리는 문정왕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기행을 계속하였습니다. 사초에 실린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발생한 연산군 때 무오사화와 폐비 윤씨사건의 전말이 밝혀져 발생된 갑자사화, 중종 때 위훈삭제사건으로 발생한 기묘사화 그리고 명종 즉위년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친정 오빠 대윤 윤임과 제2계비 문정황후의 친정 동생 소윤 윤원형의 외척간 세력다툼으로 인하여 발생한 을사사화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끊일 줄 몰랐습니다. 그러는 사이 태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너머로 문정왕후의 능침이 눈에 들어옵니다.

 

  진정임 해설사님은 태릉안내판 앞에 서서 문정왕후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고 홍살문 대석 앞에 서서 홍살문 기둥을 타고 내려온 물이 잘 빠지게 구멍이 뚫려 있다는 것과 물이 다 빠지지 않게 약간의 물이 고일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는 그야말로 전문가의 해설없이는 간과하기 쉬운 내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박석이 깔린 참도는 약간 높은 신도와 약간 낮은 어도로 되어 있는데 원래는 양옆에 박석이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어도를 따라 정자각 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우측에 수복방이 있고, 정자각 옆에 비각이 있는데 그 비각 옆에는 또 다른 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대석 군이 있었고 이러한 지대석 군은 강릉에도 있다고 합니다.

 

  정자각에는 혼령이 다니는 신계와 능제 참례자가 오르는 동계가 있는데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 먼저 오르고 왼발 갖다 붙이고 오른발 오르고 왼발 붙이고 이렇게 오르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각자 그렇게 한 번 하면서 오르라고 주문합니다. 우리 모두는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초등학생이 선생님 말씀을 따르듯이 그렇게 하면서 정자각에 올랐습니다.

 

  진정임 해설사님은 장례를 치를 때는 달을 넘겨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초하룻날 돌아가신 분은 장례일까지 기간이 너무 길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고, 그러다보니 예법을 따르지 않고 돌아가신 달에 장례를 치루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환장’이라고 한다며, 오늘날 ‘미치고 환장하겠다’고할 때 ‘환장’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명과 남녀가 결혼을 할 때는 육례(혼담·납채·납기·납례·대례·우귀)를 갖추어 혼인을 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육례를 갖추지 않고 치루는 혼인을 ‘야합’이라고 하며,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야합’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새로운 지식 습득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문정왕후 비각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 다른 왕릉과는 달리 비각의 안내판을 비각 문 앞에 고정시켜 놓아 능비를 한 눈에 볼 수가 없었습니다. 비문 전면을 살펴보니 ‘조선국 문정왕후 태릉’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즉 어느 때 ‘조선국’이라고 쓰고 어느 경우에 ‘유명 조선국’이라고 쓰느냐는 질문이 그것이었습니다. “유명 조선국은 명나라에서 시호를 받았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다” “그게 아니다” 하는 양설이 있다는 것이지요. 아무튼 뚜렷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작년이었던가요. 충북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에는 문충공 양촌 권근·문경공 지재 권제·익평공 소한당 권람의 3대묘를 답사한 적이 있었는데 려말선초에 걸쳐 관직에 나아가신 권양촌 묘갈에는 ‘조선국’으로 그의 아들과 손자의 묘갈에는 ‘유명 조선국’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는 그 시대의 자주성 여부의 표현이 아닌가하는 생각들을 하였는데 이곳에서 ‘조선국’으로 시작하는 능비를 보니 그 또한 그렇지 않다는 의아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산신석과 정자각 바로 뒤에 있는 신교(神橋)와 신로(神路)의 설명을 들으면서 예감을 거쳐 사초지를 올랐습니다. 능원은 장대석으로 3단 구분이 되어 있고 상단에는 능침이 곡장 안에 망주석과 석양과 석호의 호위를 받으며 병풍석 및 난간석에 둘려 쌓여 있습니다. 그 앞에는 혼유석과 장명등이 자리잡고 있고, 중·하단에는 문인석과 석마, 무인석과 석마가 각각 1쌍씩 서있습니다. 그런데 이곳 석양·석마도 배와 다리 부분이 메워져 있는데 이것은 미숙련 석공이 조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며, 숙련된 석공은 배와 전·후·좌·우 다리사이를 모두 파내어 조각한다고 합니다. 능침의 병풍석은 인석·만석·면석·우석·지대석·초지대석(땅속에 묻힘)으로 되어 있는데 인석은 통상 6자이나 4자짜리도 있다고 하며, 문양은 규화(葵花 해바라기)입니다. 인석의 문양은 규화 외에 연꽃과 모란이 있다고 합니다. 면석과 좌우 우석의 문양은 구름모양(운채)이며, 면석 중앙에는 방위가 표시된 통천관을 쓴 십이지신이 새겨져 있는데 태릉의 방향은 임좌입니다. 태조의 건원릉과 태종의 헌릉에는 영저(靈杵)와 영탁(靈鐸)의 문양이, 성종의 선릉 이후에는 운채(雲彩) 문양인데 인조의 장릉에는 모란 문양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혼유석 위 바닥의 일부가 훼손이 되었는데 돌을 다루는 전문가에 따르면 이러한 현상은 징으로 돌을 쪼게 되면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서 그 표면이 들뜨게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망주석에는 세호가 붙어있는데 통상 우주상행(右柱上行), 좌주하행(左柱下行)의 규칙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의 망주석에는 우주·좌주 모두 상행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병풍석과 난간석 사이의 박석이 밀려나와 동자석주까지 밀리게 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설명이 이어지기를 통상적으로 왕의 즉위는 선왕의 승하하신 직후 상중에 보위에 오르기 때문에 상복을 입은 채로 즉위식을 거행하였으나 중종의 경우는 반정으로 본인이 보위에 오를 줄 모르는 상태에서 보위에 올랐기 때문에 곤룡포와 익선관을 쓰고 즉위하였고 합니다. 인조의 경우는 반정 전에 본인이 왕위에 추대되었음을 알고 있어서 중종과는 달랐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또한 명종의 외아들 순회세자가 명종 18년(1563) 1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2년 뒤 모후이신 문정왕후 마저 승하하였으며, 또 그 2년 후 명종 자신이 승하하였습니다. 명종은 외아들과 어머니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부왕의 능을 천장한 후 어느 것 하나 되는 일이 없다”고 한탄하면서 말하였다고 합니다. 순회세자의 무덤은 순창원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 30-1 사적 제198호로 서오릉 구내에 있습니다.

 

  여기까지 태릉 답사를 마치고 최고의 기대치를 갖고 비공개 능인 강릉을 답사하게 되었습니다. 강릉은 비공개 능이기 때문에 태·강릉관리사무소에서 관리인 한 분을 따라 붙여서 답사를 하게 되었는데 예정시간을 넘겨 강릉으로 향하다보니 기다리다 못한 그 분을 되돌아오게 하는 수고로움을 끼쳐 드려 참으로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었습니다.

 

  강릉은 태릉에서 직 코스의 샛길이 있는데 그래도 1.7km나 떨어져 있고 산등성이에는 휴식처(제2관망대)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태릉선수촌의 국가대표 선수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뛰어서 불암산 정상까지 오른다고 하는데 이곳이 그 Closs 코스로 제2관망대-제1관망대-불암산 정상이라고 합니다.

 

[제가 최근 바쁘다보니 후기가 늦어져 죄송합니다. 그리고 두서없이 적다보니 잘 못 듣거나 이해한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정정해야 할 부분을 지적해 주시면 즉시 정정하겠습니다.]

 

2. 강릉, 육사, 연산군묘(사적 제201호)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산223-19

 

  우리는 그 1.7km의 길을 걸으며 휴식처에서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신도비의 귀두는 목을 길게 빼서 목 위로 돌려 뒤를 바라보고 있다는 이야기, 연흥부원군 부인의 90일간의 장례일기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 연안김씨 집안과 관련된 ‘조강지처’의 어원에 대한 이야기, 명종은 현대판 ’마마보이‘이라 할 수 있으나 서원의 사액화가 공적이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삼육대학교 위에 위치한 강릉 위쪽에 도착했습니다.

 

  명종(1534~1567, 재위 : 1545~1567)은 중종의 둘째 아들로 중종 29년(1534)에 문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545년에 이복형 인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하였는데 즉위 후 8년간은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여 외척을 견제하고자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하였고 1567년에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인순왕후(1532~1575)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551년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으며, 명종이 승하하여 중종의 7번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인 하성군(선조)이 즉위하자 잠시 수렴청정하였다가 선조 8년(1575)에 창경궁 통명전에서 승하하였습니다.

 

  능원은 장대석으로 3단 구분이 되어 있고 동원쌍봉릉(쌍릉)인데 능침을 병풍석과 난간석으로 이어서 연결하였습니다. 그런데 왕과 왕비의 능사이가 아주 좁게 조성되어 인석과 인석이 부딪칠 정도로 가깝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병풍석의 문양은 태릉과 동일해 보였고, 곡장으로 둘려진 능침 주위에는 석양, 석호 등이 호위를 하고 있고, 능침 앞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장명등, 문·무인석, 석마 등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의 석양·석마도 배와 다리 부분이 메워진 조각을 하였습니다.

 

 사초지 아래에는 부속건물인 정자각,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예감, 산신석, 비각, 홍살문 등이 있습니다.

 

  강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참도의 박석 사이사이에 핀 이끼였습니다. 녹색과 붉은 색깔이 어우러져 하나의 미술작품을 보는 듯 하였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다울수가 있습니까? 그동안 비공개릉으로 인간의 발길이 끊어진 곳 그곳에는 자연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예술작품이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인간의 발길이 닿는 곳 그곳엔 자연의 훼손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 태·강릉 답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동행하였던 상용님과 종형제간인 준용님으로부터 71사단 관할 불암산 입구 선승회관에서 오리고기 바비큐로 점심을 대접받았습니다. 우리 일행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불암산을 바라보며 선승회관에 도착하였는데 선승회관은 군부대에서 직영하는 회관이었습니다. 이곳의 음식은 역시 전국에서 내놓아라하는 요리사들이 만든 음식인지라 음식이 입에서 살살 녹을 정도로 부드럽고 맛이 좋았습니다. 오리 바비큐를 안주로 소주를 반주삼아 밥 한 공기 금새 비우고 추가 밥까지 청하여 정말 맛있게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 중에 상용님의 제안이 모처럼 태릉에 왔는데 육군사관학교를 안내해 주겠다고 제안하십니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 우리가 평생 언제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쌍수를 들어 대환영이었지요. 정릉은 후일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과 묶어서 답사하기로 하고 육군사관학교로 향했습니다.

 

<육군사관학교>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에 들어서니 웅장한 모습의 전망대와 육군박물관 그리고 졸업식 때 열병과 분열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화랑연병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맹호부대 파월훈련 도중 부하 장병이 떨어뜨린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수많은 부하장병의 목숨을 구하고 산화한 강재구 소령의 동상이 서있는 육군박물관을 먼저 방문하였습니다. 육군박물관에는 군 박물관답게 각종 무기류와 전쟁과 관련된 유물과 서적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진품 전시물로 보물 제391호 ‘부산진 순절도’·보물 제392호 ‘동래부 순절도’·보물 제861호 ‘불랑기자포’를 관심있게 관람하였습니다. 육군참모총장 집무실 또한 우리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박물관 밖에는 고 박정희 대통령의 전용차와 맹호부대가 월남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기념한 '안테패스 전승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습니다.

 

  이어서 육사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육사기념관 위에는 육사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64m로 건축한 육사교훈탑이 우뚝 서있고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습니다. 에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니 오늘 날씨가 그런대로 쾌청하여 북한산·도봉산·불암산과 그 품안에 깃들어 있는 태릉을 멀리서 조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예정시간을 넘기면서 육사의 이모저모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화랑연병장으로 이동 단체 기념 촬영을 하였습니다. 점심 대접과 함께 육군사관학교를 안내해 주신 상용(안)님에게 우리 일행의 마음을 담아 이 홈페이지를 통해 다시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연산군묘(燕山君墓, 제10대 연산군, 거창신씨)>

사적 제362호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이곳은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燕山君, 1476~1506)과 왕비인 거창군부인 신씨(1472~1537) 등이 안장된 묘역입니다.

 

  방학동 신동아아파트에서 그린파크로 넘어가는 고개 직전 좌측 110m 지점에 거대한 은행나무와 함께 위치하고 있는데 묘역 뒤편으로는 버스가 다니는 2차선의 도로가 뚫려 도봉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기맥이 끊긴 형국이었습니다. 이러한 위치의 묘역 상단에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가 쌍분으로 되어있고, 가운데는 의정궁주 조씨의 묘, 하단에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과 딸의 묘가 쌍분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연산군은 성종의 큰아들로 태어나 19세에 임금이 되었지요. 젊은 임금이었지만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사화(무오·갑자)를 일으켜 조정을 어지럽히자 1506년 신하들은 왕위를 박탈하여 연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강화도로 추방 하였으며, 중종 임금을 새로 추대하였습니다. 그 해 연산군은 (화)병이 들어 강화도에서 31세로 일생을 마쳤는데 7년 후인 1513년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묘의 시설은 왕자의 묘제에 따라 담장이 둘러져 있고 장대석으로 상단과 하단을 구분하였으며, 봉분이 있는 상단에는 묘갈 각 1기(연산군·거창군부인 신씨), 상석 각 1기, 망주석 각 1기씩 배치되어 있고, 하단에는 가운데 향로석, 장명등이 각 1기, 좌우에 문인석 2쌍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왕릉보다는 간소하나 조선시대 전기 능묘 석물의 조형이 잘 남아 있다고 합니다.

 

  연산군 묘갈은 ‘연산군지묘’ 부인의 묘갈은 글자를 판독할 수 없을 만큼 마모가 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연산군 상석은 어찌된 영문인지 상석 중앙부분이 반 토막으로 깨어져 있어 보기가 좀 민망하였습니다.

 

  그 다음 묘는 진정임 해설사님에 설명에 의하면 태종의 후궁 또는 세종의 후궁으로 추정된다는 의정궁주 조씨의 묘입니다.

 

  - 태종이 총애하던 명빈 김씨가 돌아가시자 후궁을 얻었는데 미모가 부족하여 궁주로 두었다하여 태종의 후궁이라는 설.

 

  - 세종에 대한 기록에 의정궁주라는 후궁이 있으므로 세종의 후궁이라는 설.

 

  - 연산군은 거창신씨와의 사이에 2남1녀, 후궁 조씨와의 사이에 2남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네 아들 모두 유배지에서 사사되었습니다. 바로 이 후궁 조씨의 묘가 연산군 묘역에 있다는 설. 그러나 ‘의정궁주 조씨지묘’라는 묘표의 '궁주'라는 용어가 성종조 이전에 사용되었던 용어이므로 연산군의 후궁이라는 설은 틀린 것이 아닌가 한다는 것이고, 이에 대해서는 현재 문화재청에서 확인작업과 함께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영환 대부님의 의견은 명빈 김씨는 우리 안동김씨  안정공파 파조이신 김구덕의 따님으로 태종의 후궁으로서 태종 사후에도 장수를 하셔서 성종조까지 사셨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명빈 사후 태종의 후궁 설을 바르지 않다는 의견을 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종의 후궁에 의정궁주가 있다면 세종의 후궁이 맞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의정궁주 조씨의 묘는 거의 방형에 가깝고 전면과 좌·우 양면은 돌로 호석을 둘렀습니다. 그리고 장대석으로 상·하단을 구분하였으며 상단에 봉분·묘갈·상석이 있고 하단에 문인석 1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묘역 맨 아래쪽에는 연산군의 사위 구문경과 딸의 묘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땅은 능성구씨 문중의 소유로 연산군은 사위 집안의 땅에 묻힌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묘역은 장대석으로 상·하단 구분을 하였고 상단에는 쌍분·묘갈 1쌍·상석 1쌍이 있고, 하단에는 가운데 향로석과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 1쌍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묘갈에는 ‘능성구공지묘’ ‘전주이씨지묘’가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 진정임님은 한 눈이 아니라 반눈으로도 연산군 묘역을 바라볼 수 있다고 하며 우리를 연산군 묘역 앞에 있는 신동아3단지아파트 옥상으로 안내하였습니다. 옥상에 올라서니 연산군 묘역이 정말 한 눈에 보일뿐 아니라 멀리 북한산·도봉산·수락까지 휘둘러 보이는 것이 그야말로 장관이었으며, 인근에 있는 세종대왕의 공주이신 정의공주 의 묘역과 재실까지 들어옵니다.

 

  이제 오늘 하루도 날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바쁜 일정을 강행군하다보니 아직 김밥 한 박스가 남아 있어서 인근 가게에 들려 막걸리를 조달하여 김밥을 안주 삼아 오늘 하루를 feedback하여 봅니다. 즐겁고 유익한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