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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제 48회 산행(경복궁, 종묘, 창경궁)

            

일시 : 2007. 12. 9(일)   (글-상석, 발용.  사진-발용)

장소 : 경복궁, 종묘, 창경궁

해설(우리궁궐지킴이 전문해설사) : 고문준 선생, 진정임 선생

참석 : 19명(무순, 경창생략)

          권호순, 영윤, 은호, 재만(부부, 처제), 상석(외 1분), 발용(부부), 진회, 태우, 태영, 항용, 정중, 용주(부부), 준용, 윤식

 

 ▲경복궁흥례문(慶福宮興禮門)-태조4년(1395년)창건되었다.원래 이름은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흥례문(弘禮門)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중건하면서 청(淸)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歷)에서 홍(弘)자를 피하기 위해 흥례문으로 고쳤다고 한다

 

 ▲ 근정문앞의 영제교. 궁궐로 들어 갈 때에는 반드시 돌다리를 건너게 되어 있다. 조선 궁궐제도의 특징이다. 왕 앞에 나아갈 때에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가 있다.  영제교 좌우 어구 양 옆에는 돌짐승 4마리 보이는데, 이들 돌짐승들은 도랑으로 흐르는 물길을 타고 나쁜 기운이 궁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금방이라도 뛰어내려 사악한 기운을 먹어치우기라도 할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 근정전 전경 - 근정전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 경복궁 월대에 조각되어 있는 해태상. 암수 한 쌍이 새끼를 품고 있는 형상이다.  전설에 의하면 해태는 불을 먹고 사는 짐승으라 하여 화제를 막기위해 조각해 놓은 것이라한다.  

 

 ▲ 근정전 내부의 어좌 - 뒷 편의 '일월오봉병' 병풍은 임금의 권위를 상징한다.

 

▲ 근정전 내부의 단청이 화려하여 눈부시다.

 

 ▲ 답도(踏道) - 답도는 '밟고 올라간다' 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답도 사이의 봉황은 이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암시한다.

 

▲ 근정전 드므 - 화로같이 생긴 것은 "드므"라는 것으로 '독'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다. 목조 건물에서 가장 경계시하는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방화수통이다.

 ▲ 사정문과 사정전 - 사정전(思政殿)은 왕이 일상 업무를 보는 편전이다. 태조 4년(1395)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고종 4년(1867)년에 중건되었다. 사정이라는 이름은 모든 이치는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잃는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왕이 정사를 보고 문신들과 함께 경전을 강론하고 종친 대신들과 주연을 함께 하기도 하고, 왕이 친히 참석하여 문무 과거를 보이기도 하는 곳이다.

 

▲ 사정전 입구의 해시계(앙부일구) - 천문관측에 정통하며 과학 지식이 해박했던 세종때 과학자 김돈(金墩 - 군사공파조 諱 七陽의 子)의 주도로 제작되었다.

 

 ▲ 사정전은 왕이 정사를 보거나 신하들과 경전을 강론하던 곳이다. 근정전에서 보이지 않던 운룡도가 어좌위에 걸려있다.

 

▲ 사정전 주위의 창고(宙字庫).- 사정전 주위에는  천자고(天字庫) 지자고(地字庫) 현자고... 등의 창고가 있다. 우리 옛 조상들은 101호 102호 보다는 황자고(黃字庫) 우자고(宇字庫)등이 편했던 것 같다.

 

▲ 천추전(千秋殿) - 천추전은 왕의 편전(便殿)으로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다.

 

▲수정전(修政殿) - 경회루 연지 남쪽에 위치한 수정전은 세종 때 집현전이 있던 자리이다. 고종 초기에는 침전으로 사용되고, 편전의 역할을 하였다. 갑오개혁 당시에는 군국기무처 및 내각으로 사용되었다.

 

▲경회루(慶會樓) - 경회루는 침전영역 서쪽에 위치한 연못 안에 조성된 누각이다. 외국사신의 접대나 임금과 신하 사이에 벌어지는 연회장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국보 제224호이다.

 

▲ 고문준 선생으로부터 경회루(慶會樓)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일행

 

 ▲  흠경각(欽敬閣) -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천문학자인 김돈이 지은 흠경각기(欽敬閣記)를 보면 세종 20년 정월에 흠경각(欽敬閣)을 완성하여 그 안에 물시계를 설치하였다고 적고 있다.

 

 ▲  강령전(康寧殿) - 강령전은 왕의 침전으로 정도전이 이름을 지었다.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용은 곧 임금을 뜻하는데 임금이 거처하는 곳에 두마리의 용이 있을 수 없다하여 용마루를 없앴다고 한다.

 

 ▲  강령전의 창살무늬 - 경복궁 전각의 창살의 대부분이 '세살무늬' 인데 반해 강령전의 창살은 '아자고임살무늬'를 채택하였다.

 

 ▲ 강령전 추녀마루의 잡상 - '잡상'은 궁궐지붕의 추녀마루 위에 줄 지어 놓여져있는 장식 기와이다. 삼장법사, 손오공, 사오정등 『서유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나 동물의 모습을 줄 지어 놓았다.

 

▲ 교태전(交泰殿) -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평소 좌측방에서 취침하나 왕과 합궁 시에는 우측방에서 취침하였다. 역시 지붕 위에 용마루가 없다.

 

▲ 아미산 정원 - 경복궁의 중전 교태전 뒤에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정원. 이름은 아미산이다. 이것은 경회루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을 옮겨 쌓은 인공산이다. 조그만 둔덕이다.

 

▲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굴뚝(보물 제 810호) - 담의 한편을 한 단 앞으로 나오게 하여 전벽돌로 굴뚝을 만들었으며 굴뚝 벽면 중앙에 십장생 무늬를 조형전으로 만들어 배치하고 그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꽃담의 조형미도 살려 조선시대 궁궐 굴뚝 중 가장 아름답다.

 

 ▲ 향원정(香遠亭) -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 건청궁(乾淸宮) -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거처이다. 궁궐의 건축양식에서 따르지 않고  사대부가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최근에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 곤령합(坤寧閤) - 왜놈들에 의해 명성왕후가 살해된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명성황후는 건청궁 구역 안에 자리잡은 장안당(長安堂)과 곤령합(坤寧閤) 사이 뜰로 끌려 나와 시해됐으며 그 시신은 곤령합 동쪽 건물인 옥호루(玉壺樓) 방 안에 안치됐다가 건청궁 동쪽의 인공산인 녹산(鹿山) 남쪽에서 불태워진 것으로 되어 있다.

 

▲ 종묘 하마비(宗廟 下馬碑) - 종묘는 역대 왕들의 신주를 모신 곳이므로, 종묘 하마비 앞에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야 한다. 임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 종묘 외대문(정문) -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에서는 조선 왕조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종묘의 건축물들은 600여년 간 제례행사를 지내 온 가치가 인정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종묘제례(중요무형문화제 제56호)와 제사를 지낼 때에 춤과 함께 연주되는 음악인 종묘제례악(중요 무형문화제 제1호)은 2001년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록되었다. 종묘제례는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어가행렬과 함께 전주 이씨 종친에 의한 제사로 거행된다.

종묘는 사직단과 함께 조상에 대한 예절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조선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 종묘건축은 고도로 절제되고 생략된 기법으로 일관되어 있다. 꼭 필요한 장식만 존재하고 단청(丹靑)도 색채와 문양 사용을 극히 절제하였다. 묘정(廟庭)을 구성하는 건축요소들 역시 극히 간략하고 단촐하다. 신로(神路), 월대, 기단, 담 등 꼭 있어야 할 것만 있다. 이러한 구성, 장식, 색채의 간결함과 단순함은 종묘 공간을 더욱 존엄하게 한다.

 

 ▲ 종묘의 박석 - 외대문을 지나 종묘 안으로 들어서면 널찍한 박석(薄石)이 깔린 길이 중앙과 좌, 우로 구분되어 뻗어있다. 이 길을 삼도(三道)라 한다.  가운데 높은 길은 신(神)을 위한 길이라 하여 신향로(神香路)라고 부르며, 우측의 길은 임금님을 위한 어로(御路), 좌측의 길은 세자로(世子路)이다.

 

 ▲ 궁궐지킴이 고문준 선생. 어린이를 위한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뿌리 종묘"를 출간한 종묘 전문가이다.

 

 ▲ 종묘 연지 - 네모난 연못에 가운데 둥근 섬이 잇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고 생각해서 이다. 섬가운데에 정자가 없고 향나무가 심어져있는데 향나무는 제례 때 사용하는 향을 의미한다. 종묘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즐기기 위한 곳이 아니라 제사 영역이므로 연못에 물고기와 연꽃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 망료루(望廟樓). 향대청 남쪽에 위치하는 망묘루는 제향(祭享)때 임금이 머물면서 사당을 바라보며 선왕(先王)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부쳐진 이름이다. 망묘루는 건물 중 한 칸이 누마루로 되어 있으며 누마루쪽만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 공민왕 사당 - 종묘에 고려의 왕인 공민왕의 사당이있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태조 이성계 가 조선을 세우고 종묘를 처음 짓게 되었는데 종묘 공사가 한창이던 어느날 난데 없이 바람이 불더니 족자가 한 점 떨어졌다.공사하는 이들이 다가가 주워 살펴보니 고려 공민왕의 영정이었다. 이를 이상히 여긴 태조는 종묘 한 쪽에 터를 내어 조그만 신당을 짓고 그곳에 공민왕의 영정과 공민왕이 그렸다는 준마도를 모시고 때에 따라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전설일 뿐. 군사 구데타로 집권을 한 태조가 고려의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한 궁여지책 이 아니었을까.

 

▲ 사당 안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모셔져있다.

▲ 진정임 고문준 선생. 두 분이 입고 있는 옷이 궁궐지킴이의 겨울 유니폼이다.

 

 ▲ 종묘 어숙실은 왕이 목욕하고 재계하며 의복을 정재하여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으로, 재궁, 어재실이라고도 한다. 담정과 정문, 동서 협문으로 싸인 어숙실 일곽은 뜰을 중심으로 북쪽, 동쪽, 서쪽에 건물이 있다. 가운데 건물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어제실로 왕이 머물던 곳이며, 오른쪽 건물이 세자가 머물렀던 곳으로 세자재실, 왼쪽 건물은 어목욕청으로 제사 전 목욕하는 곳이다

 

 ▲ 어숙실에서 정전으로 나가는 서협문. 문틀의 무늬 당초문양(唐草)이다.

 

▲ 제정 - 제례 때 사용하는 명수와 전사청에서 제수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물을 긷던 우물이다.

 

 ▲ 제정 우물은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웬일인지 이날은 물이 말라 있었다.

 

 ▲ 뒤에 보이는 건물이 전사청이며 앞의 돌이 덮힌 곳이 천막단이다. 전사청에서 준비한 제례 음식을 정전에 올리기 전에 천막단에 올려놓고 검사를 하였다.

 

 ▲ 정전남문. 혼백이 출입하는 문이다.

 

 ▲ 정전(正殿) - 국보 제227호, 정전은 종묘의 중심건물로서 19실에 태조를 비롯하여 공덕이 있는 왕의 신주 19위, 왕비의 신주 30위, 총 49위가 모셔져 있다.  우리나라 단일 목조 건물로는 가장 긴 건물(총101m)이며, 전면에 길게 다듬은 돌을 쌓아 넓은 월대를 조성하여 사묘(祠廟)건축으로서의 품위와 장중함을 나타내고 있다.

 

 ▲ 종묘의 정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공신당은 태조를 비롯하여 정전에 모셔져 있는 역대왕들의 공신 중 83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 정전 전면 첫 번째 기둥열은 모두 묘정 쪽으로 틔어있고, 두 번째 기둥열은 각 칸마다 판문이 달려있다. 이 판문을 통하여 신위가 모셔진 건물 내부로 출입할 수 있다.  판문은 각 칸마다 두 짝씩 달렸는데, 그 맞춤이 정연하지 않고 문짝이 약간 뒤틀려 있다. 마치 혼백(魂魄)이 드나들게 하기 위한 듯 하다. 판문 외부에는 발을 칠 수 있게 되어있다.

 

 ▲ 정전 건물 후면 일곽은 석축단을 쌓은 북계(北階)와 둘레담으로 조성되어있다. 북계에는 일반 건출물 뒤에 설치하는 화계(花階)처럼 꽃나무를 심지 않았다. 경견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함이다. 북계 뒷편에는 담을 둘렀는데 정전의 위패를 모신 신실 길이만큼 높게 조성하였다. 신실의 길이 만큼 담의 높고 낮음의 차이를 둔 것이다.  또한 정전 전면은 묘정을 향해 틔여 있지만, 후면과 측면은 전벽돌로 막아 놓았다.

 

 ▲ 영녕전(永寧殿) - 영녕전은 정전에서 옮겨진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잇는 별묘(別廟)이다. 세종3년(1421) 5묘제의 관습에 따라 정전에서 나와야하는 선조들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건립되었다. 16실에 왕의 신주 16위, 왕비의 신주 18위, 총 34위가 모셔져 있다.

 

 ▲ 영녕전(永寧殿) 후면. 정전의 후면가 다른점은 칸마다 기둥이 드러나게 마감처리 했다는 것이다. 구석에 축문을 태우던 망료위가 보인다.

 

▲ 악공청 - 종묘 제례시에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대기하던 곳으로 정전과 영녕전에 인접해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연예인 대기실이라 할까.

 

▲ 악공청에서 바라본 영녕전 전경. 영녕전을 가장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장소라는 고문준 선생의 설명

 

창경궁              

 

 종묘제례 시 악공들의 대기실이었던 악공청 위로 올라가 치적이 있는 조선조 임금들의 신주를 모신 정전과 두 단을 더 내려와 뜰아래엔 조선조에 마련한 고려 숭의전의 배신청에 해당하는 조선의 공신 83위를 모셔놓은 <공신당>의 담장에 나란한 참도를 따라 시선을 끌고 올라와 영녕전을 굽어본다.

 

 초겨울의 서늘한 햇살이 용마루에 부딪쳐 기왓고랑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비운 자리를 국운을 다 한 조선의 마지막 비운의 황태자 이은(李垠) 내외가 군왕은 아니었지만 영녕전의 마지막 남은 한 칸 묘실의 주인공이 되어 묘실은 가득 차 있었고 어긋난 문틈 사이로 열성조의 신음이 흘러넘쳐 와글거리다가 기왓장에서 떨어진 햇살에 부서지며 섬돌을 넘지 못하고 돌 틈으로 스며들어 잦아들었다.

 

 오후가 되자 갑자기 날씨가 사나워진다. 언 손을 비비시며 구석구석을 해설 해 주신 고문준님을 따라 일제강점기 종묘와 동궐을 끊어 길을 낸 그 자리 위에 놓여진 다리를 건넌다. 1982년 봄, 밤 벚꽃놀이를 왔을 때 철망 안에서 울대를 요란하게 떨어대며 처절하게 울던 칠면조의 울음이 끼르륵-까루룩거리며 환청으로 들리다가 잠잠해진다.

 

▲ 동궐도(東闕圖) - 국보 제249호. 동궐도는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궁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그린 그림으로 현재 2점(고려대학교박물관 및 동아대학교박물관 수장)이 남아 있다. 도화서(圖畵署)화원이 그렸을 것으로 추측되면 비단에 채색하였고, 1826년 에서 1830년 사이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책의 화첩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가로 576cm, 세로 273cm이다. 입체감이 나도록 조감도식으로 그려 자연의 구릉과 능선, 계류와 원림, 궁담, 전각, 재실, 정자 등이 생생하며, 집과 물체마다 먹으로 이름이 쓰여 있다. 궁궐 안의 모습뿐만 아니라 조경과 궁궐 외곽의 경관까지 정밀하게 그렸다. 문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거나 기록되어 있지만 설명이 불충분한 사례들이 동궐도의 그림에 의하여 파악되고 있다는 점에서 동궐도는 『궁궐지(宮闕志)』,『동궐도형(東闕圖形)』과 함께 궁궐 연구와 고증에 중요한 사료이다. 창경궁을 볼 때 동궐도(東闕圖)를 참조해 보면 당시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궁궐이란? 궁궐이란 궁(宮)과 궐(闕)을 합친 말이다. '궁'은 커다란 방을 뜻하며, 임금과 신하가 함께 정무를 보고 거처하는 곳을, '궐'은 그 궁을 지키는 궁성과 성루와 성문을 가리키는 말이다.

 

 창경원은 복원되어 창경궁으로 새롭게 눈앞에 나타났다.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에서 고문준 해설사님과 작별을 하고 진정임 해설사님의 의견에 따라 궁 연못이었던 동남쪽의 춘당지(春塘池)에서부터 견학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 종묘에서 넘어오며 바라본 창경궁.  양복에 짚신을 신은 형국이다.

 

▲ 관천대(觀天臺) - 보물 제851호. 관천대는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던 곳으로, 「書雲觀志」에 보면 숙종 14년(1688)에 조성된 것이다. 원래 창덕궁 금마문 밖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창경궁으로 옮겨 왔다.

높이는 2.2미터, 넓이는 2.4*2.3미터이며, 주위에는 돌난간을 돌렸다. 대의 중앙에는 높이 99센티미터의 관측기를 설치하는 작은 대가 있고, 그 위에 넓이 73.4*52.6센티미터, 두께 24.5센티미터의 또하나의 판석이 있다. 여기에 남북방향으로 관측기를 고정했던 5개의 구멍이 파여 있다.

 

 ▲ 창경궁에서 고문준 선생과 헤어지고...

 

 <성종태실비>로 가는 길엔 오백년 궁궐의 역사에서 치열하게 암투를 벌이던 궁중여인들의 웃음과 희열, 눈물과 한숨으로 숨바꼭질 하던 후궁과 나인 무수리들의 애환과 구질구질한 역사를 지켜보며 속이 탔는지 늙은 느티나무는 표피만 겨우 살아남아 잔가지를 달고 있었고 썩어가는 기둥은 자양분이 되어 그 끝에 엄나무가 기생하여 자라고 있었다.

 

 ▲ 춘당지(春塘池) - 춘당지란 이름은 옛날 이곳에서 활을 쏘고 과거를 보기도 하였던 춘당대 앞의 연못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최근 SBS드라마 <왕과나>의 시대적 배경이 되고 있는 성종 때 연산을 낳은 폐비윤씨(구혜선분)가 어우동(어을우동,김사랑분)의 출현으로 가슴앓이를 하며 이 길을 걸었을 것이고 숙종조에는 장희빈이 갖은 교태를 부리며 나인들에게 어깃장을 놓았을 터이다.

 

 야트막한 계단을 넘자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던 성종의 태실 석물을 경안에서 옮겨 와 태실비(胎室碑)와 함께 전시를 해놓았다.

 

 ▲ 성종태실(成宗胎室) - 성종태실은 성종의 태를 모시고 잇는 것으로 원래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 1930년 5월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는 임금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이전하면서 성종태실만 현재의 위치로 옮겨놓았다.

 

 ▲ 풍기대(風旗臺) - 보물 제848호. 이 풍기대는 영조 8년(1732)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대 위의 구멍에 깃대를 꽂고 그 깃대에 기를 달아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재던 것으로, 방향은 24방향으로 측정하였다.

 

 수강궁을 수리하여 창경궁을 만든 장본인이 성종이었고 이때부터 창경궁이 세조비인 정희왕후 이하 대비나 중전, 후궁들의 처소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장서각이 있었던 터를 지나 양화당(養化堂)으로 자리를 옮긴다. 해설사님으로 부터 양화당과 관련한 숱한 궁중비화를 들을 수 있었다.

 

 ▲ 양화당(養和堂) -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던 인조가 환궁하면서 이곳에 거처한 일이 있으며, 고종 15년(1878) 철종비 철인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 전각의 유래 및 궁중비화에 대하여 설명중인  진정임 선생

 

 통명전(通明殿)의 전각은 용마루가 없다는 게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무량각으로 월대를 갖춘 중궁전 으뜸 건물이며 이런 양식은 중국에는 많다는 것과 함께 서쪽에 있는 열천의 물맛이 차고 맵다는 설명이다. 장희빈이 마시던 물이 아직 마르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 통명전(通明殿) - 보물 제818호. 통명전은 창경궁의 연조 공간으로 명정전 서북쪽에 있으며, 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의 중심 건물이다. 창경궁 창건 때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재건이 되고, 다시 이괄의 난과 정조 때 화재를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순조 34년에 중건된 것이다. 남향한 전면에는 월대를 두고 양모서리에는 청동제 드므를 놓고 그 북쪽에 외벌대 기단 한 단을 두어 건물을 세웠다.

 

 경춘전(景春殿) 동쪽의 환경전(歡慶殿)에서 소현세자가 죽었다 한다. 병자호란 후 볼모로 아우인 봉림대군(효종)과 함께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 볼모생활 8년을 끝내고 돌아와 두 달 후에 원인모를 죽음을 맞이한 그는 조선조 최초의 왕실 의문사로 기록되고 만다. 세자빈 강씨 또한 죽음을 규명하려다가 다음 해에 죽었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의 인가 없이 의문사의 진상을 규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에 인조와 관련설, 독살설 등이 아직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음이다.

 

 ▲ 경춘전(景春殿) - 이 전각은 창경궁의 내전으로 성종 14년에 건립되었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8년에 재건하였으나, 순조 30년에 불탄 것을 그 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이 경춘전은 정조와 헌종이 탄생한 곳이며,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 환경전(歡慶殿) - 이 건물은 성종 1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광해군 8년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순조 30년(1830)의 큰 불로 소실되었던 것을 그 34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곳은 창경궁의 한 내전으로 왕이 늘 거동하던 곳이며, 중종이 이곳에서 승하했고, 익종이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미 청국이 무력으로 입국한 병자호란 중 인조는 삼전도 치욕을 치루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보냈으면서도 오히려 명청교체기 양다리외교를 펼친 광해의 처신보다도 못한 반청 정서로 국정을 펼친 결과라 하겠다.

 

 필자의 10대조이신 안주공(휘 繁)께서는 선전관으로 볼모의 몸이 된 소현세자를 8년 간 모시고 환국하시었는데 결국은 제천으로 떠나시고 만다 - 돌아오시어 안주판관을 제수 받으셨으나 부임치 아니하시자 제천으로 귀양을 가셨다.

 

 소현세자가 심양에서의 볼모생활을 편년체로 기술한 그의 저서 <심양일기-1980년 중판, 대양서적간, 청주의 주회님께서 필자에게 주심>에 할아버님과 형님이신 참판공(휘 素)께서 세자관에 들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할아버님의 처사는 아마도 적장자인 ‘소현세자의 죽음에 따른 대의명분의 실추’와 ‘암살로 국정운영’을 한 것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 해 본다.

 

 해설사 진정임님에 따르면 숙종조에는 궁녀만 6~700명에 달했다고 하니 비좁은 전각에서 중전과 후궁은 물론 상궁나인 무수리에 이르기 까지 구중궁궐에서 실권을 놓고 벌였을 권력투쟁, 시기와 질투 등으로 무풍지대에 흙먼지가 일고 시구문이 어수선 하였을 것이다.

 

 ▲ 함인정(涵仁亭) - 이곳에는 원래 성종 15년에 지은 인양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인조 11년(1633)에 인경궁의 함인당을 이건하여 함인정이라 한 것이다. 이곳은 특히 영조가 문무과거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 숭문당(崇文堂) - 이 건물은 조선 경종 때 건립되었으며, 순조 30년에 큰 불로 소실된 것을 그해 가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崇文堂'의 현판과 '日監在玆'라 쓴 게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태학생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酒宴)를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피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이산>에서 주인공 정조의 아비인 사도세자는 영조조에 전당 앞마당에서 죽어갔다. 세자의 흐느낌으로 며칠간 뒤주가 간헐적으로 들썩거렸으나 궐 담장을 넘지 못해 민초들은 알지 못했고 곡학아세하는 자들이 잠시 숨을 죽이고 권력의 향방을 지켜 볼 뿐이었다.

 

 본전인 명정전(明政殿)은 동향으로 품계석과 삼도가 조정마당을 가로지르며 서있는데 답도와 드므를 갖추고 있는 신하들의 조하를 받던 창경궁의 주정전이다.

 

 ▲ 명정전(明政殿) - 국보 제226호. 창경궁의 두 번째 문인 명정문을 지나면 궁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법전인 명정전이다. 이곳에서는 왕의 즉위식과 신하들의 하례등이 거행되엇다. 명정전은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된 것으로 현존하는 궁궐의 법전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다른 궁궐과는 달리 동향이다.

 

 ▲ 명전전 내부의 어좌 - 변함없이 일월오봉병 병풍이 보인다.

 

 드므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큰 물동이인데 목조건물과 함께 화재 시 후폭풍으로 인해 주변건물로 튀는 특성이 있는 지붕 소재가 기와이기 때문에 화재예방 차원에서 설치 된 시설물이다. 또한 큰 장식물로 인해 위엄과 함께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기도 한다.

 

 ▲ 명정전 '드므' - 건물 앞에 '드므'를 설치하여 물을 가득 채워 놓으면 침입해 오던 화마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달아난다고 한다.

 

 품계석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명정문을 나오니 옥천교 아래로 명당수가 흐르고 있었다. 짧은 해는 떨어지고 이내 어둠이 궁궐지붕에 내려앉는다. 잡상들이 추녀 끝을 부여잡고 울다가 고스란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 옥천교(玉川橋) - 보물 제386호. 옥천교는 명당수가 흐르는 어구(御溝) 위에 설치한 다리다. 조선 왕궁은 모두 명당수 위의 석교를 건너서 정전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졌다. 중앙에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잡귀를 쫓고 있다.  이 다리는 성종14년(1483)에 조성되었다.

 

 일행들은 정문인 홍화문에서 해설사님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며 공식적인 창경궁 견학을 모두 마치고 나옵니다.

 

 ▲ 홍화문(弘化門) - 보물 제384호. 창경궁의 정문으로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동향하였다. 조선 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광해군 8년에 재건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담벼락을 넘어 멀고 먼 여행에서 끝 모를 실마리를 안고 멀리 대구에서 오신 종친님들을 먼저 배웅하고 남은 분들은 서울대병원 언덕을 걸어서 넘기로 하고 가까운 역을 찾아 갑니다.

 

 끝으로 최근 안사연 정기산행 중 특히 왕릉과 궁궐나들이에 성심을 다하여 주신 고문준님과 진정임 해설사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 전해올리며 후일을 기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