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9) 제7회 모임

          --서운관정공파 및 개성윤공파 성지(姓地) 순례

 

  (1) 일시 : 2002. 9.1(일)

  (2) 장소 :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엄미리 일대

  (3) 참석인원 : 총 10명 --영환(문), 영윤(문), 윤만(문), 은회(익), 발용(군), 태서(익), 항용(제), 정중(도) 및 부인, 태영(문)

 

  (4) 행사 진행 과정

 

       서울 상일역 도착(09:00)--광주시 엄미리 도착(10:10)--남한산성 관광(10:40)--지월리 경수마을 서운관정공파 선조님 묘소 참배 --개성윤공 묘소 참배--엄미리 영윤씨(문) 댁(벽수장)--해산

 

  (5)세부 행사 내용 및 관련 사진 :글--태영씨(문),  사진--발용씨(군) 제공

 

<참가자(무순:존칭 생략)>

☆총 10명:영환(문), 영윤(문), 윤만(문), 은회(익), 발용(군),

태서(익), 항용(제), 정중(도) 및 부인, 태영(문)

☆주회(안):태풍 로사 경상도 남부로 상륙, 백두대간을 타고 영동지방을 지나갈 것으로 예상돼 거의 모든 공무원에게 비상발령. 만사를 제쳐놓고 행사에 참석하시는 주회 종친께서 부득이 참석하지 못하신다는 연락을 영환 종친께 해 오셨습니다.

☆태영(군):추석 앞두고 웃대 어른들 묘소 벌초로 참석하기 어려우나 형편이 허락하면 참석하시겠다는 전갈. 18대 종손이시라 벌초해야 할 묘소가 얼마나 많을지 충분히 짐작되는 일이었습니다.

☆은회:바쁜 직장 일로 밤을 새우시고 아침 나절에 퇴근하셨다가 오후 행사에 참석하신다는 전화를 답사 팀에 해 주셨습니다.

☆재원(문), 재이(군), 재익(도), 광렬(문):부득이한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하나 무사히 행사 마치기를 전해 오셨습니다.

☆영윤(문), 발용(군):이번 행사를 위해 참배 지역을 여러 차례 답사하는 수고를 하셨습니다. 큰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영환(문):여러 날 고생하신 끝에 소중한 답사자료 <서운관정공파 성지순례 자료집>을 준비하셨습니다. 큰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집결 상황>

◆08:05 상일역

태서 종친께서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너무 일찍 나서 아침 8시경 약속장소인 상일역에 도착, 다른 분들을 기다리셨습니다.

 

◆08:30 상일역

하남시에 살고 계신 발용 종친께서 9인승 카니발을 상일역에 대기시킨 가운데 속속 참가자들께서 도착하였습니다.

 

◆08:40분경 상일역과 지하철 5호선 안

참가자 대부분 상일역 집결, 태영(문) 종친과 정중(도) 종친 부부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상일역에 계신 종친께서 태영 종친에게 핸드폰으로 연락, 아직 상일역까지는 4개 역이 남은 상태였였습니다. 얼굴 화끈거리고 무지무지 죄송하였습니다.

 

◆09:50 상일역 → 10:10 엄미리 계곡 입구 도착, 남한산성 향

드디어 마지막 참가자 정중 종친과 태영 종친이 합류하였습니다. 멀리서 참석하신 정중 종친을 위해 남한산성을 둘러볼 기회를 마련했던 영윤 종친은 계획에 차질을 빚을까 노심초사하셨습니다.

 

엄미리 계곡 입구 공터에 발용 종친의 카니발을 주차해 놓고, 영윤 종친의 봉고로 갈아타고 남한산성으로 향했습니다. 묘하게도 꼬불꼬불 논틀산틀 지나 산모롱이 몇 개를 도니 바로 남한산성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엄미리 계곡이 고향이신 영윤 종친의 길안내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덕분에 편히 남한산성 수어장대로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까먹었던 시간을 대폭 만회할 수 있었습니다.

가는 도중 영환 종친께서 <서운관정공파 성지순례 자료집>을 한 부씩 나누어 주시며, 설명해 주셨습니다. 답사 지역과 관련 내용이 훤히 머릿속에 들어옵니다.

 

<남한산성>

◆10:40 남한산성 도착, 수어장대 향

간간이 성긴 비꽃이 피더니 이슬비가 뿌리는 산길을 걷는 맛이 남달랐습니다. 붉은 빛깔의 아름드리 소나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뒤돌아보니 멀리 서울시 남단인 강남과 한강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습니다.

서쪽으로는 분당, 동쪽으로는 광주 지역이 손금 들여다보는 듯합니다. 그야말로 천혜의 요소입니다. 이 산성에 들어와 몽고군에 항전한 까닭을 실감합니다.

 

비에 젖은 산길을 따라 걸으며 휘 자점 할아버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날의 비장했던 선조들의 결의를 되새기며 잠시 숙연해집니다.

수어장대에 오르니 매바위가 새롭습니다.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장수의 전설이 전해 옵니다.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올라온 길을 되짚어 내려갑니다. 참배 길이 편하도록 선조님들께서 비를 멈추게 하시고, 따가운 햇볕 가려 주시느라 맑게 개지도 않게 하신다고 답사팀 종친들이 덕담을 나누는 소리가 정겹습니다.

 

<남한산성 수어장대에서>

 

◆10:40 경수마을 향

산길을 거의 다 내려올 즈음 어머니 생신을 맞아 고향 충북 괴산에 내려가셨던 항용 종친이 약속 장소에 거의 다 와 간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11:05경 항용 종친이 답사팀에 합류, 서운관정공파 휘 홍도 할아버지 묘소로 향했습니다.

 

<경수마을 선조 묘역 참배>

◆11:30∼13:20 경수마을 서운관정공파 경수마을 선조 묘역 참배

경수마을에 도착하니 서운관정공파 종회 이사장이신 재준(在峻) 종친을 비롯한 종친들께서 벌초를 하면서 답사팀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목례로 인사를 나누고 따뜻한 손길로 서로 맞잡습니다. 뜨거운 혈육의 정이 전해옵니다.

 

이곳은 경수산(鏡水山) 기슭으로 휘 홍도 할아버지를 비롯해 경수마을 선조님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묘역은 3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묘역 전체를 정갈한 담장으로 둘렀습니다.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다 하행선일 경우 오른쪽 산 중턱에 웅장하면서도 위엄 있는 묘역이 바로 이곳입니다. 인근에서 눈에 잘 띄는 곳이라 아마 보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본래 묘역은 현재 위치에서 200m 아래 산모롱이 부근인데, 중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느라 1985년에 6개월간 공사를 한 다음 이장하였답니다.

이곳은 <계족정형(鷄足鼎形)>으로서 닭의 세 발가락 형태라는 명당이랍니다. 앞에 시루봉이 중부고속도로를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산 아래 마을이 경수마을로 서운관정공파 집성촌 중 한 곳입니다.

 

◇상단 왼쪽 휘 홍도 할아버지, 오른쪽 휘 첨 할아버지

◇중단 왼쪽 휘 성립 할아버지, 오른쪽 휘 정립 할아버지

◇하단 왼쪽 난설헌 할머니의 어린 자녀, 가운데 난설헌 할머니, 오른쪽 난설헌 시비

◇입구 안동김씨 송덕비

 

서운관정공파는 6대에 걸쳐 연속으로 과거(대과)에 급제한 명문입니다.

◇휘 희수 → 로 → 홍도 → 첨 → 수 → 성립 → 진

이 기록은 합해정씨(9대 연속), 달성서씨(7대 연속)에 이은 역대 3위 기록입니다. 서운관정공파뿐만 아니라 우리 선김 전체의 영광입니다.

 

중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경수마을 문중이 소유하고 있던 땅이 2만여 평 포함되었는데, 국가발전을 위해 기꺼이 유서 깊은 묘역을 옮겼습니다. 이에 보답하는 뜻으로 도로공사와 건설공사들 맡았던 건설회사에서 자발적으로 송덕비를 세웠습니다.

 

답사팀은 먼저 휘 홍도 할아버지 묘소에 포를 올리고 잔을 바쳤습니다. 태풍 로사 때문에 밤새 비가 내려 묘전이 흠뻑 비에 젖어 있었습니다. 빗물이 고인 곳은 잘박잘박합니다.

어느새 발용 종친께서 방수가 되는 돗자리 2개를 깔아놓습니다. 발용 종친의 치밀함이 새삼스럽습니다. 그런가 싶었는데 발용 종친께서 어느새 다시 산등성이로 올라갑니다. 답사팀이 휘 홍도 할아버지께 재배를 올리는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서였습니다. 참 날래기도 합니다.

 

◆휘 홍도(弘度) 할아버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셨다는 기록이 많이 전합니다. 조선조 풍속화가로 유명한 단원 김홍도(金弘道:김해김씨)와 한글 음이 같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전하는 작품이 없습니다. 만일 할아버지 작품이 전한다면 그에 못지 않는 화가였음이 밝혀질 텐데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이곳은 1·4 후퇴 당시 중공군이 산 전체를 뒤덮다시피 할 정도로 대거 주둔해 있었답니다. 그래서 아군의 폭격이 심했고, 그 과정에서 집성촌인 경수마을의 집들이 대부분 불에 타고 말았답니다. 애석하게도 그래서 할아버지 유작이 전하지 않는답니다. 땅을 칠 일입니다.

 

 

◆휘 첨(瞻) 할아버지

퇴계 문인으로 <퇴계선생 제자록>에 수록돼 있습니다. 휘 첨 할아버지는 이장 당시 돌아가실 때와 거의 변함이 없는 상태이셨다고 합니다. 복부에 탄력이 남아 있었고, 눈 부분도 함몰되지 않은 상태였답니다. 말 그대로 눈을 감고 편히 주무시는 모습 같았답니다.

이때 부장품으로 의복과 관복, 만장(만사) 등이 대거 출토되었답니다. 출토품 가운데 의복은 중부고속도로에 있는 중부휴게소의 출토유물 전시관에 소중히 보관돼 있습니다. 당시 관복이 나왔으나, 수습 과정에서 훼손되었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출토품만으로도 염하는 방법에서부터 하관에 이르기까지 조선조의 장례 습속을 정확히 고증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받고 있답니다.

당시 관중에는 만장이 겹겹이 쌓여 있었고, 그 맨 위에 명정이 놓여 있는 완벽한 상태였답니다. 재준 종친께서 그 내용을 보려고 명정을 건드리니까 부서질 정도로 풍화돼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 아래의 만장을 손댈 수 없었답니다.

 

     

               <묘 소>                                                        <묘비석>

 

◆휘 성립(誠立) 할아버지

유명한 허난설헌 할머니가 배위이십니다. 그래서 휘 성립 할아버지의 진면목이 세상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도 합니다. 흥미 위주의 세속인들인지라 할머니 명성으로 인해 할아버지의 위업이 상당히 많이 가려져 있는 거죠.

휘 성립 할아버지께서 홍문관 저작 벼슬을 하고 계셨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휘 성립 할아버지께서는 선정릉(현재의 서울시 선릉역 인근에 있는 정종, 중종의 능)을 수호하시기 위해 의병을 모아 왜병과 싸우다 순절하셨습니다.

족보에는 이때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의복만으로 장례를 모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장하기 위해 파묘한 결과, 무릎 부근 두 다리가 없는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조선조 사대부들은 시신의

형태가 온전하지 않은 것을 몹시 꺼려했답니다. 주자학의 영향입니다. 사극 같은 데서 임금이 참수형(목을 베는 형벌) 대신 사약을 내리는 장면이 많이 보셨죠. 사대부일 경우, 중죄인이라도 그 시신을 온전하게 수습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뜻에서 사약을 내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 이런 사대부들의 사생관(死生觀) 때문에 혹시 족보에 그렇게 기록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봅니다.

휘 성립 할아버지께서는 15살 때 난설헌 할머니(당시 16살)와 혼례를 올렸는데, 난설헌 할머니께서는 27살의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바로 그 해(1589년)에 휘 성립 할아버지께서는 대과에 급제하셨고, 3년 뒤인 1592년에 의병장으로 순절하시니 오, 애재라 그때가 31살이셨습니다.

휘 성립 할아버지께서는 둘째 정실부인 남양홍씨와 합장돼 있는 반면, 첫 정실부인 허난설헌 할머니는 아랫단에 따로 모셔져 있습니다. 원래 그렇게 돼 있었다고 합니다. 즉, 난설헌 할머니께서 먼저 돌아가셨으므로 먼저 모셨을 것이고, 뒤에 휘 성립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합장하지 않고 별도로 모신 다음 둘째 부인 남양홍씨께서 돌아가실 때 합장한 것입니다. 웃대 어른들의 그 뜻을 받들어 이장하면서 합장하지 않고 옛 형태 그대로 옮겨 모셨답니다.

 

  

 

◆휘 정립(正立) 할아버지

아버지이신 휘 첨(瞻)께서 돌아가시자 휘 정립 할아버지는 그 어려운 시묘살이를 하셨으며, 경수마을 입향조이시랍니다. 마을 인근에 <노은소> 또는 <논소>라는 소(沼)가 있는데, 이는 할아버지의 호 노은(老隱)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형님이신 휘 성립 할아버지의 혈손이 없어 휘 정립 할아버지의 장자 휘 진(振)을 양자로 보내 대를 이었습니다. 답사팀을 맞이하신 서운관정공파 재준 회장은 그 11대 손이며, 휘 성립·휘 정립 할아버지의 자손들은 모두 정립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것입니다.

 

  

 

◆난설헌 할머니와 어린 자녀 묘

맨 아랫단 가운데 난설헌 할머니의 묘소가 있는데, 그 왼쪽에 자그마한 묘 2기가 있습니다. 어려서 잃은 아들 희윤(喜胤)과 딸의 묘입니다. 어린 자식을 둘이나 앞세우셨으니, 난설헌 할머니는 어린 아들과 딸을 가슴에 묻고 얼마나 괴로워하셨겠는지 조금은 알 듯합니다.

이 묘는 실묘(實墓)라고 전해져 왔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았답니다. 그런데 이장할 당시 어린아이 키만한 까만 자국이 확인되었답니다. 바로 널(관)을 놓았던 자리입니다. 하지만 딸의 묘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답니다. 아마 너무 어려 그런 자국조차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묘 앞의 묘석(墓石)에는 외삼촌의 애틋한 정이 뭉클뭉클 묻어나는 글이 적혀 있어 눈물짓게 합니다.

 

  

 

  

 

  

 

--- <희윤의 묘비> 허봉 지음 ---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

희윤의 아버지 성립(誠立)은 나의 매부요

할아버지 첨(瞻)이 나의 벗이로다

눈물을 흘리면서 쓰는 비문,

맑고 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치노라

 

그래서 난설헌 시비 앞면에 할머니 심경이 적혀 있습니다.

 

--- <아들딸 여의고서> ---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놀 테지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며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속으로 흐르는 그 피눈물을 난설헌 할머니께서는 얼마나 삼키셨을까요!

이 시비 뒷면에는 돌아가시기 직전에 쓰신 시가 적혀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환 종친께서 자료실에 올리신 이번 답사 자료집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비는 문중에서 세운 것이 아니라 난설헌 할머니의 뛰어난 문학적 업적을 평가해 학계의 거두 이숭녕 선생을 비롯해 학계와 예술계 및 전 국무총리 등이 대거 참여해 세운 것입니다. 비신(碑身) 위의 자연석 앞면 글씨는 재준 종친의 필적이며, 비문은 이숭녕 박사가 찬(撰)한 것입니다.

당시 재준 종친은 서예를 익히기 전이라 글씨가 서툴렀다고 겸손해하셨는데 고졸한 멋이 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재준 종친을 서예를 익혀 그 뒤에 경기도 서예전에서 2번 입선하셨다고 합니다.

기념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눈 다음 개성윤공파조 단소로 향했습니다.

 

<개성윤공파조 휘 칠림 할아버지 단소 참배>

◆13:27 개성윤공파조 단소 향

좁은 산길을 달려 고개를 넘으니 다리가 하나 나옵니다.(다리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불찰을 용서하십시오.)

물이 많이 불었습니다. 평소에는 맑은 물이 흘러 다음에는 이곳에서 도시락을 먹기로 했습니다. 다리에서 하류 쪽으로 산과 산 사이에 빠꼼하게 아파트가 뚜렷합니다. 그곳이 도평리라고 합니다. 이곳도 광주 지역에 거주하는 우리 선김의 집성촌 중 한 곳이랍니다.

 

◆13:33 단소 입구 도착

입구를 찾기가 어려운 편입니다. 마을이 제법 큰데, <중앙석유상사>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집 왼쪽으로 좁은 도로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골목으로 올라가지 말고, 오른쪽을 보면 산기슭에 <인산 김현윤(仁山 金賢潤) 선생 송덕비>가 보입니다.

인산 선생은 우리 선김의 일가입니다. 송덕비에는 인산 선생이 평안도에서 내려와 지월리에 개성윤공파조 할아버지의 단소를 조성하고 족보를 편찬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발용 종친께서 고생고생하시며 여러 차례 답사하지 않았으면, 참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과정은 발용 종친께서 게시판에 올리신 글(개성윤공파 七霖 先祖님 壇墓를 찿아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3:45 개성윤공파조 단소 도착

개성윤공파조 할아버지 단소 주위는 밤나무가 둘러싸고 있습니다. 날은 더워도 절기는 속일 수 없는 것인지, 간밤에 불어닥친 강풍에 밤송이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두어 송이 까 보았더니, 밤알이 굵직굵직 여물었습니다.

산 위로 20여m 올라가자 파조 할아버지 단소가 나타났습니다. 비록 단소가 크지는 않지만 정갈하고 단아했습니다.

비문에는 <고려 봉익대부 개성윤 안동공 휘 칠림지단(高麗 奉翊大夫 開城尹 安東公 諱 七霖之壇)>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포와 잔을 올리고 재배를 마치니 하루속히 통일이 되어 실묘에 참배를 하고픈 마음이 간절합니다. 기념사진을 찍고 후일을 기약하며 엄미리 계곡의 벽수장으로 향했습니다.

 

<개성윤공 참배후 영단 앞에서>

 

<벽수장 친교 시간 및 행사 뒷풀이>

◆14:02∼19:00 벽수장 친교시간

벽수장(碧水莊), 그 이름에 걸맞게 입구에 들어서자 푸른 물 흐르는 소리가 먼저 답사팀을 맞이합니다. 벽수장 입구에 다다르자 은회 종친께서 그 큰 몸짓으로 휘적휘적 걸어가고 계십니다.

영윤 종친의 부인께서 답사팀을 반갑게 맞이하십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답사팀을 맞이하시는 모습이 각별합니다.

벽수장은 영윤 종친께서 운영하시는 음식점입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집채가 영윤 종친의 생가랍니다. 이번 행사는 여름에 너무 바빠 날이 차가워지면 행사를 마련하시겠다고 영윤 종친께서 벼르던 일이었습니다. 함박 웃는 얼굴이 지금도 선합니다.

별도로 호젓한 곳에 마련된 음식상이 푸짐합니다. 보신탕과 수육, 백숙, 오리고기가 나오더니 곧이어 특별한 손님이기에 처음 들여온 대나무통에 담은 술을 내오십니다. 그 이름이 없으니 임시로 죽통주, 대나무통술로 명명하였으나, <벽수주>로 특화시켜도 될 것 같습니다(좋은 이름 지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맛은 부드럽고 몸에 크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죽통주의 특징이었습니다.

친교시간은 지난 여름 제1회 안사연 여름캠프의 뒤풀이 같았습니다. 그 날의 이야기를 되새겨 보며, 끝없이 끝없이 푸른 물 흐르듯 정담이 이어집니다.

아울러 안사연이 앞으로 해 나가야 할 일, 우리 선김은 충렬공의 자랑스런 후손으로서 하나로 뭉쳐야 하는 일, 대종회와 안사연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파를 뛰어넘어 협심해야 할 일 들을 토론합니다.

어느덧 시간은 꿈같이 흘러 계곡에 이내가 깔립니다. 아쉽게도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발용 종친은 언제 마련하셨는지 정성이 깃든 선물을 하나씩 들려 주십니다.

태풍에 심한데 대구까지 가셔야 할 정중 종친 내외분 귀가길이 걱정스럽습니다. 귀한 자리 마련해 주신 영윤 종친 부인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행선지에 맞추어 두 팀으로 나뉘어 아쉬운 발걸음을 뗍니다.

 

◆19:00 아쉬운 작별, 귀가

상일역 방면으로 한 팀이 떠나고, 뒤이어 정중 종친 내외분을 비롯한 서울 강남방면 종친들께서 귀가길에 오릅니다. 서로들 무사히 귀가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상일역 방면 2차 뒤풀이

윤만, 은회, 발용, 태영:상일역 인근에서 너무 아쉬워 2차 뒤풀이를 가졌습니다. 태서 종친께서는 오늘이 생일이시라 어쩔 수 없이 먼저 들어가셨습니다. 아버님께서 병환이신 데에다 생일인데 시간을 내서 행사에 참여하셨네요. 정말 감사드리며, 뒤늦게나마 생일 축하드립니다.

발용 종친 부인께서 참석하셨습니다. 발용 종친 대신 운전하시기 위해서랍니다. 그런데 2차 뒤풀이까지 계산하셨네요. 감사합니다. 조심해 들어가세요.

 

◆12:00 이후 - 집에 막 들어오니 때마침 정중 종친께서 대구에 도착하셨다는 전화를 주셨습니다. 걱정이 놓입니다. 귀한 행사를 준비하시고 격려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행사 후담으로 이어진 사이버상의 삼행시 모음>(무순)

 

  *제목(운자) : 벽수장

  1. 김은회

      벽-벽수장에 오르니.

         수-수신도 하였거늘 .

      장-장하다 그대들은 충렬공의 후손이라.

 

  2, 김태서

       벽-벽수장 계곡에 앉아 대통주 기울이니

      수-수심도 잊고 신선된 마음이네

      장-장대비도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셨다네

 

   3. 김정중

       벽-벽을 허물고

      수-수많은 계획과 실천의 안사연 활동!

      장-장하다 우리 회원님들

 

   4. 김항용

       벽-碧水계곡 물소리는 아름다운 음악이요.

      수-수시로 깨어보니 神仙圖 속에 우리 있네.

      장-장구 세월 흐른대도 변치 않을 한마음들이여!

 

sp;    벽-벽을 허물고

        수-수많은 계획과 실천의 안사연 활동!

       장-장하다 우리 회원님들

 

   4. 김항용

       벽-碧水계곡 물소리는 아름다운 음악이요.

       수-수시로 깨어보니 神仙圖 속에 우리 있네.

      장-장구 세월 흐른대도 변치 않을 한마음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