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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제58회 안사연 정기산행-참의공(휘彦沉) 묘역,

            효헌공(휘 瓚) 묘 성묘 및  수원 화성 답사

             글-상석(제),    사진 - 항용(제)

 

*일시 : 2009. 11. 9(일).  10:00시--18:00시

*장소 : 수원시 참의공 묘역 및 수원화성 일대

*참석자(존칭생략) - 16명

 

관묵(전대종회 사무총장), 재호(문), 재용(전익원공파 회장), 재영, 재욱, 재만, 윤만, 은회, 태문 내외분, 태철, 항용, 춘식, 상석 가족

 

 일요일 아침 열 시 수원역 5번 출구에서 익원공 7세손이신 참의공(휘彦沉) 후손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멀리 대구에서 출발하여 경기대학교 후문에 도착해서 기다리시던 재욱(익), 재만(문)님과 합류하여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일대의 참의공(휘彦沉) 후손 집성촌에 도착하니 산골짜기마다에는 최근 신도시 개발로 가옥과 시설물들은 이미 철거되어 옛 흔적을 지우고 집터와 들길만 남아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참의공(휘彦沉) 묘소에 참배합니다.

 

초헌-관묵, 아헌-항용, 종헌-재욱 집례-재영, 좌집사-태철, 우집사-춘식

 

 재영 종친께서는 음복 후 묘역에서, 준비해 오신 <광교신도시 속의 소외된 문화유산 유적>의 자료를 나누어 주시고 참의공 이하 선조님들의 행장과 함께 경기도 문화재자료 지정에 따른 묘역수호 방법, 보존절차 등을 설명해 주십니다.

 

    참의공묘소 좌측의 방부. 용도가 미상이다.

 

 이어 증손 묘소와 그 아래로 능선을 따라 영면해 계신 현감공(휘瑾)과 판결사공(휘孝建) 묘소에 참배를 하고 내려옵니다. 판결사공 선조님은 사촌형인 교위공(휘慶建)과 함께 안동 충렬공 묘소 수호와 관련한 <계암일록(溪巖日錄)-김령 저>의 기사에도 많이 등장하십니다.

 

 효헌공(휘瓚) 묘소는 주봉을 같이하는 다른 능선에 있는데 최근 도시계획에 따라 묘하의 길목에 세워져 있던 신도비는 묘소 옆 하단에 옮겨 놓았고 상석,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은 온전하며 봉분의 호석과 장명등, 비신은 근대에 새로 세운 것이라 합니다.

 

 또한 참의공 묘소와 같이 석질과 형태, 문양이 같은 직사각형의 석물이 놓여 있는데 문중에서는 이를 방부(方趺)라 칭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참의공 묘소의 방부는 이보다 조금 작고 지대석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반면에 효헌공 묘소의 방부는 약간 크며 지대석 아래에 세로로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헌-은회, 아헌-재호, 종헌-재만, 첨작-상석, 윤만, 집례-재영, 좌집사-태철, 우집사-춘식

 

 <방부>는 옆면에 안상(眼象-참의공 묘소의 것은 후면 생략)을 조각, 윗면에는 사방에 정교한 연화문양을 새기고 중앙은 직사각형 자리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기에 아마도 양위의 묘역 조영 당시 개석이 없는 묘갈이나 묘표의 좌대로 쓰려다 자연 용도가 없어진 것은 아닐까요? 실제 묘비석의 좌대는 무문(無紋)의 민짜(민패)로 방부보다 약 두 배가량의 높이로 비신과 개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또한 현 좌대와 개석의 석질이 같기 때문에 충분한 가능성이 있기도 합니다.

 

 효헌공의 묘비명은 사위인 한양인 조경(趙絅)이 찬하였는데 조경은 훗날 충익공(휘時讓)의 신도비문을 찬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머지않아 후손들의 세거지였던 이 일대는 아파트 숲을 이룰 것입니다. 선조님들의 묘역이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계속해서 도심에서도 묘역을 수호할 수 있다하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원 참의공문중에서 <창룡문-화성동문> 근처 식당에서 제공해주신 달고 맛있는 수원갈비를 점심으로 들며 왕릉근처에 갈비요리가 발달한 것은 제수로 소를 잡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글을 빌어 참의공문중회에 감사의 말씀 전해 올립니다.

 

 현 청계천의 모델이 된 수원천 위 화홍문을 지나 용연을 굽어보는 <방화수류정>에 올라 성(城)으로는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수원 화성>의 답사 코스를 잡아 장안문을 향해 산성길을 걸으며 담소를 나눕니다.

 

 <북동적대>부터는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북문인 <장안문>을 지나 거의 완벽하게 원형으로 보존되어 전하는 <화서문-서문>을 통과하여 서장대까지 성 밖의 억새와 성 안의 가을에 시선을 주며 걸었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묘를 1798년(정조 13) 10월 화산(華山, 융릉)으로 이장한 후 수원에 유수(留守)를 두고 천도 계획하여 축성한 조선시대 축성기술이 총집결된 대표적인 성으로 한양 성곽의 3분의 1정도 길이가 됩니다.

 

 성곽 축조 후 정조는 축조기록의 명을 내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간행합니다. 화성성역의궤는 축성법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했으며 축성에 사용한 각종 기계의 그림과 설명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건축기술과 과학의 수준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산 정조의 동상 앞에서 정조가 꿈꾸었을 화성시대를 가늠하며 화성행궁에 드니 희미한 불빛에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쓰다가 뒤주가 뚜껑이 열린 채 처마 밑에서 달그락거리자 붓끝을 흐렸다.

 

행궁을 나와 남문(팔달문)에서 대구로 가시는 재욱님과 재만님을 배웅하고 수원 화성을 빠져나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끝으로, 지난 광교산행에 이어 따스한 손길로 선조님 묘역과 화성을 안내해 주신 <참의공문중회>의 재용, 재영, 태철, 태문, 춘식 종친의 후의에 깊이 감사드리며 후일 다시 뵐 날을 기약하며 글을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