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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보(己未譜)

 

 

 

 (가)발간년 : 1739년(조선 영조 15년) (경진보 발간 159년후)

 

 (나)책수 : 9책

권1-首卷,  권2-군사공파,  권3-대사성공파<문온공파> 권4,5-안렴사공파,  권6,7-익원공파,  권8-서운관정공파

 

 (다)서문 (2007. 2. 21. 태영(군) 제공)

기미보 서문(己未譜 序文)

우리 김씨(金氏)는 신라 경순왕(新羅敬順王)으로부터 나와서 고려 상락 충렬공(高麗 上洛忠烈公)에 이르러 비로소 안동(安東)으로 분적(分籍)되었다. 전대(前代)에는 시림(始林=경주)에서 八.九백년 동안에 왕자(王者)의 포상(誧裳)이 상승상계(相承相繼)하였고 후대(後代)에는 고려(高麗)때부터 이조(李朝)에 이르기까지 문장(文章)과 훈업(勳業)의 인사(人士)들이 줄을 이어 내려온지 이제 또 수천년이 되었으니 그 근원(根源)이 멀고 흐름이 길며 줄기가 무성(茂盛)하고 가지가 번창(繁昌)하여 후손들이 경향각지(京鄕各地)에 총총(蔥蔥)히 산재(散在)하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세보(世譜)는 오직 만력 경진(萬曆庚辰=서기1580년)에 휘(諱) 오(鋘)가 강화부사(江華府使)로 있을때에 발간한 한 책 뿐이다. 그것이 매우 소략(疎略)함은 알지만 지금으로부터 만력 경진년은 이미 백여년이 경과(經過)되였으니 후생(後生)들이 족보(族譜)에 빠져서 보이지 않는것도 또한 어찌 다 헤아릴수 있으리오? 이에 우리 선친(先親)께서 이를 개탄(慨嘆)하시어 수보(修補)를 자기의 책임으로 생각하사 사방으로 순회(巡回)하시면서 자료(資料)를 수집하여 상자(箱子)에 넣어 잠겨둔것이 모두 七편이었다. 재향일파(在鄕一派)는 거리끼는 일이 있어 완성(完成)을 보지못하고 버려두었고 여러 제형(弟兄)과 불초배(不肖輩)는 분주하게 경향각지(京鄕各地)로 돌아다니며 사방의 유환(遊宦)이 빈번히 질천(秩遷)함이 많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책(成冊)하지 못하고 어언간(於焉間) 우금(于今) 수十년이 흘렀다. 지나간 신해(辛亥)년에 종인(宗人)들이 비로소 발의(發議)하여 구보(舊譜)를 완성(完成)코저 각파(各派)의 수단(收單)을 다시 해오게 하여 간사(幹事) 五.六명으로 하여금 원고(原稿)를 협력(協力) 수정(修正)케 하는데 도정공(都正公) 성유(聖游)와 지평공(持平公) 권(權)이 그 일을 주관(主管)하였다. 그런데 지평공(持平公)이 돌연(突然) 별세(別世)하고 三년이 지난 을묘(乙卯)년에 책이 비로소 인쇄에 들어가자 도정공(都正公)께서 또 이어 돌아가시니 일은 마침내 중단(中斷)되고 다시 거론(擧論)하는 사람도 없더니 금년 봄에 와서 통문(通文)온 것을 보니 전 첨추(前僉樞) 우태(遇兌)가 또 가옥(家屋)을 팔아 그 돈을 희사(喜捨)하여 공사를 계속했다 하였다. 또 들으니 첨추(僉樞)는 무신역란(戊申逆亂)에 척수(隻手)로써 적괴(賊魁) 十三명을 참수(斬首)하고 물러나와도 자기의 공(功)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마음속으로 스스로 치하해 말하되 “이제부터는 우리 족보가 꼭 성취(成就)될 줄 안다 대절(大節)이 있는 자는 반듯이 대사(大事)를 이룬다는 것은 고인(古人)의 말이 아닌가!”하고서 드디어 우리 근족(近族)들에게 상의하여 각기(各其) 힘에 따라 출재(出財)하여 출판비(出版費)에 보조(補助)하여 책을 발간하니 모두 九권으로 되었다. 상락공(上洛公)으로 중시조(中始祖)를 삼은 것은 안동(安東)으로 관적(貫籍)을 하였기 때문에 상락공(上洛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외파(外派)는 손자(孫子)까지만 제한(制限)한 것은 내외(內外)의 경중(輕重)을 분별(分別)하기 때문이며 방계(傍系)와 지파(支派)를 별보(別譜)로 부친것은 선계(先系)가 혹(或) 난상(難詳)한데가 있기 때문이다. 친제(親弟)인 직장(直長) 식(湜)이 또한 일찍부터 이 일에 참여하여서 끝까지 수고(手苦)하였고 필역(筆役)에 수고하기는 종인(宗人) 한장(漢章)과 진사(進士) 집(潗)이다. 아! 기쁘도다!! 한번 책을 펼쳐만 보면 어느 파(派)는 어느대(代)에서 갈려 나간 것과 누구는 우리와 몇촌간이 되며 누가 멀고 누구는 가까움을 알게되니 그 처음에는 모두 한사람의 근본에서 태어난 것이라 각자 조상을 추모(追慕)하고 종족(宗族)과 화목(和睦)한 의(誼)를 다해야 하니 이것이 예전에 성인이 인도(人道)를 세워서 민덕(民德)을 후이 할려는 뜻이다. 무릇 천지만파(千枝萬派)가 면면무궁(綿綿無窮)하여 명신(名臣)과 거공(鉅公)이 대대로 끈어지지 않았으니 누가 우리 조상의 유덕(遺德)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나의 선친(先親)께서 三十여년간을 심력(心力)을 소비하사 도정공(都正公) 이외(以外) 여러분을 거쳐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일조에 완벽하게 만드셨으니 구천(九泉)에 계신 영혼(靈魂)들도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며 불초(不肖)들의 감행(感幸)이 더욱 어떠하다고 할까?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효(孝 )는 충(忠)의 근본(根本)이라>하였으니 그 추에서 바로 효를 알 수 있음은 곧 첨추(僉樞) 이분이라 하겠다. 또 재력(財力)도 넉넉하지 못하면서 막중한 대사(大事)를 성취하였으니 어찌 충효(忠孝)에서 우러난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또한 종인(宗人)들도 본받을 일이므로 아울러 말해두노라.

숭정기원후 一 百二년 기미(己未) 추(秋)

상락공 十五대손 가선대부 행 사간원 대사간 유(濰) 근서(謹序)

 

김유(金濰) 1685(숙종11) ~ 1748(영조24)(副)

숙종(肅宗) 36년 (경인, 1710년), 증광시(增廣試) 병과29(丙科29)  

*인적사항: 생년(生年) 을축(乙丑1685). 자(字) 여즙(汝楫).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가족사항: 부(父) 김중우(金重禹), 조부(祖父) 김세귀(金世龜), 증조부(曾祖父) 김익련(金益鍊), 외조부(外祖父) 이강(李綱), 처부(妻父) 정형익(鄭亨益), 제(弟) 김호(金浩), 숙(叔) 김중희(金重熙),

배위:정부인 東萊鄭氏

*이력: 소과(小科) 1702(임오) 생원시, 전력(前歷) 통덕랑(通德郞),

관직(官職): 정언(正言), 장령(掌令), 헌납(獻納), 사간(司諫), 승지(承旨), 우윤(右尹), 대사간(大司諫)

<참고자료 : 철원금석문대관 2004,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