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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김씨 역대 제왕 및 자료 소개

 

    1)내물마립간 소개

 

<내물왕릉>(2002.6. 4. 태서(익) 사진 자료 제공)

 

<내물왕 소개> (2002. 6. 4. 영환(문) 자료 조사 제공)

이름은 내물이니 각간(角干) 말구(末仇)의 아들이요 갈문왕 구도(仇道)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휴례부인김씨이고, 김씨로서는 제2대왕이다. 비는 보반(保反)부인 김씨이니, 일설에는 내례길포(內禮吉怖)로서 미추왕의 따님이라고도 한다. 홀해왕이 훙하고 아들이 없으매 내물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병진 원년 (진 영화 12년 서기 356년) 4월에 즉위하였다. 2년 봄에 사신을 보내어 환과고독(鰥寡呱獨)을 위문하고 각기 미곡 3곡(곡)을 내려주었으며 효성과 우애와 특이한 행실이 있는자는 벼슬 한 계급을 하사하였다.

 

3년 2월에 시조묘에 친히 제향을 올리니, 사당 위에 붉은 구름이 감돌고 묘정에는 신작(神雀)이 모여 들었다. 9년 4월에 왜병이 대거하여 쳐들어오거늘 풀로서 허수아비 수천개를 만들어 옷을 입히고 병기를 손에 들려 토함산 아래에 줄지워 세웠으며 용사 1천명을 매복시키었다가 왜병을 쳐서 몰살시켰다.

13년 봄에 백제에서 사신을 보내어 양마(良馬) 2필을 바쳤다. 17년에 흉년이 들어 창고를 열고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였다. 18년에 백제 독산성주가 3백인을 이끌고 투항해 오니, 임금께서 이를 받아들였다. 이해에 큰 풍년이 들었다.

 

42년 7월에 북쪽 변방 하슬라 (강능)에 한발이 심하고 황충(蝗蟲)이 일어나 백성이 굶주리거늘 죄수를 놓아주고 1년에 조(祖)와 조(調)<백성에게 조세를 부과하던 제도>를 면제해 주었다. 47년 2월에 임금이 훙하고 아들이 어리거늘 나라 사람들이 실성왕을 세워 왕위에 계승하게 했으니, 키가 칠척이요 총명하여 모든 일에 통달하고 식견이 심원하였다.

 

내물왕은 참성대 서남방 <지금 교촌이니 본전에서 동쪽으로 백무(百武)쯤 떨어져 있음>에 장사하였다. 내물마립간은 신라사의 분기점에 우뚝 서 있는 왕이다. 내물왕의 등장으로 신라는 진한의 강력한 소국에 불과하였던 좁은 틀에서 벗어나 한반도 동남쪽 전체를 아우르는 고대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신라는 내물왕 때부터 시작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구려는 태조대왕, 백제는 고이왕 때 부터 고대국가의 꼴을 형성했듯이 신라는 내물왕 때가 되어서야 진한 전체를 통합하여 국가로서의 꼴을 갖추었다.

 

신라가 내물왕 시대일 때 고구려는 고국원왕을 거쳐 광개토대왕, 백제는 근초고왕과 근수고왕이라는 가장 강력한 정복 군주들이 한반도 의 운명을 놓고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중국대륙세력에 밀려 남하정책을 시도하는 고구려와 고구려의 남하를 결사코 저지하려는 백제는 신라와 가야제국을 놓고도 치열하게 대립했다.백제 근초고왕은 왜와 연합하여 가야지역으로 팽창하려는 신라를 압박하는 한편, 북으로는 평양성까지 진출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킬 정도로 강력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고구려는 한때 백제의 북진정책에 밀려 주춤하기도 했으나 광개토대왕이 등장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여 백제와 왜의 연합세력을 제압하고 신라를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삼았다. 이런 정세 하에서 신라의 내물왕은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며 국가위기를 하나씩 극복해 나갔다.

 

내물왕 시기에 신라가 고대국가의 기본적 틀을 확립하게 된 구체적 계기는 백제 근초고왕의 낙동강 유역 진출이었다.당시 백제는 일본과 연합한 다음 그들의 군사를 끌어들여 364년 393년 등 수차례에 걸쳐 신라를 공격했다.

 

백제와 일본의 빈번한 공격에, 신라는 내부통합력을 높여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필요성이 절실해졌다.내물왕은 이 위기를 왕권강화와 체제정비의 기회로 삼았다.그러나 내물왕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일본과 연합한 백제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다.내물왕은 할 수 없이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고구려에 군사 보호를 요청했다. 고구려의 군사 보호의 대가로 나라가 멸망하는 위기를 넘겼지만 신라는 자주적인 발전을 상당한 기간동안 저지당해야 했다.

 

내물왕은 고구려로부터 지속적인 보호를 받기 위해 볼모를 보냈다. 따라서 내물왕 시기에 비록 고대국가체제를 정비했다고 하더라도, 대외적으로는 아직 강대국인 고구려에 의지하고 그들의 내정간섭을 받음으로써 완전한 자주국가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내물왕릉 소개>

 

시 대 - 서기 402년경.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교동 14.   지 정 일 - 1969년 8월 27일 지정.   면적 - 사적 제161호.

 

경주 반월성(半月城) 북서쪽 계림(鷄林)에 인접하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2m, 높이 5.3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 자연석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는데, 이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는 달리 호석에 자연석 받침돌을 받쳐 놓은 것으로 신라 횡혈식(橫穴式) 석실분(石室墳)의 호석(護石)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 고분의 봉분 규모도 적석목곽분보다는 횡혈식 석실분에 알맞은 것으로 평지고분(平地古墳)이지만 매장주체(埋葬主體)는 횡혈식 석실일 가능성이 많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는데 후대에 설치된 것이다. 한편 이 고분 주위로는 평면 장방형으로 이 고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이 고분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재위 356-402)은 성이 김(金)씨이고, 아버지는 말구각간(末仇角干)이며, 어머니는 휴례부인(休禮夫人) 김씨, 비(妃)는 김(金)씨로 미추왕(味鄒王)의 딸 보반부인(保反夫人)이다. 신라에서 김씨로서는 미추이사금에 이은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지만 이후의 신라왕들이 내물의후손으로 신라 김씨왕조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신라는 이 왕 때에 이르러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낙동강 동쪽을 아우르는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의 장지(葬地)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능(陵)이 점성대(占星臺, 즉 瞻星臺) 서남에 있다고 하여 현위치를 가리킨다. 그러나 내물왕은 후세의 큰 추앙을 받은 실질적인 김씨왕조의 창시자로서 그 능 규모 또한 컸을 것이고, 재위시기로 보아 적석목곽분이어야 할 것인데, 현재의 능은 규모가 작은 석실분(石室墳) 형식이어서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내물왕릉을 신라 최대의 적석목곽분인 대릉원(大陵苑)의 황남대총(皇南大塚)으로 비정하는 학계의 견해도 있으나, 《삼국유사》의 기록을 존중하면서 내물왕계 계승의식을 표방한 신라 하대 왕실의 수축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2)신라김씨 역대 왕릉 사진 소개

    (2002. 6. 17. 재원(문), 재익(도), 정중(도) 현지 답사 촬영 제공 )

 

  

 

<계림>

<계림숲>

 

<미추왕릉>

<내물왕릉>

                                                                              

<지증왕릉>(추정. 천마총)

<원성왕릉>

                                                         

<신무왕릉>

<문성왕릉>

                                                                               

3)경순대왕 김부(敬順大王 金傅)   (2002. 5. 주회(안렴) 자료 제공)

 

(1)경순대왕 소개 (<디지털 한국학> 내의 내용)

 

?∼979,  신라 제56대왕,  재위 927∼935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 문성왕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효종(혹은 효종이 할아버지라는 설도 있음.)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며, 할아버지는 의흥대왕(懿興大王)으로 추봉된 관○(官○)이다.

 

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들이 둘 있었다.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의 큰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하였다.

 

927년 포석정에서 놀고 있던 경애왕이 견훤의 습격을 받아 살해된 후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난폭한 견훤보다 오히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1년 왕건이 경순왕을 알현하여 수십일을 머물렀다. 왕건은 부하들에게 질서와 규율을 지키도록 하니, 수도의 아녀자들은 '전번 견훤이 왔을 때에는 늑대와 범을 만난 것 같았으나,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하였다고 한다.

 

935년 그는 고려에 신라를 넘겨 줄 것을 신하들과 논의하고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왕건에게 항복하는 국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때 마의태자는 고려에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범공은 머리를 깎고 화엄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그가 신하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쳤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했는데, 그 지위는 태자의 위였다. 왕건은 또 그에게 녹(祿) 1000석을 주고 그의 시종과 원장(員將)을 모두 등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고 그의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무덤은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포리 휴전선 내에 있으며 항상 참배가 허용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高麗史節要

 

(2) 신라경순왕릉(新羅敬順王陵).

 

 

<능 입구의 안내판>

 

<경순대왕릉>

 

 

<묘비>

 

<장명등>

 

<양마석>

 

 

<신무왕릉>

<문성왕릉>

 

(가)<문화재청> 내의 내용.

1)종목:사적 244호,  분류:능,  면적:3,967㎡,  지정일:1975.06.25.  소재지 : 경기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 산18-2. 관리자:연천군

 

신라 56대 마지막왕인 경순왕(재위 927∼935)의 무덤이다.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놀다 견훤의 습격을 받아 시해된 후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많은 피해를 입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935년 평화적으로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왕위를 물러난 신라 마지막 왕이다.

 

무덤의 높이는 약 3m, 지름 7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판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다.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담장인 곡장이 둘려져 있어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다.

 

2) 문화재명 : 신라경순왕릉(新羅敬順王陵)

신라(新羅) 제56대(第56代) 경순왕(敬順王)(재위(在位) 927-935)의 능(陵)이다.

경순왕(敬順王)의 성(姓)은 김(金), 휘(諱)는 부(傅), 문성왕(文聖王)의 6대손(代孫) 이창(伊滄) 효종(孝宗)의 자(子)이며, 모(母)는 헌강왕(憲康王)의 여(女) 계아태후(桂俄太后)이다. 927년(年)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사망(死亡)한 뒤 즉위(卽位)하였다.

 

경순왕의 재위시기(在位時期)는 나말(羅末) 전란시대(戰亂時代)로 영토(領土)는 왕건(王建)과 견훤(甄萱)에게 대부분 빼앗기고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하여 국력(國力)이 쇠퇴하였다. 후백제(後百濟)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으며 민심(民心)이 신흥(新興) 고려(高麗)로 기울자 마침내 군신회의(群臣會義)를 열고 무고(無辜)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고려태조(高麗太祖)에게 항복(降伏)할 뜻을 표하자 군신(群臣)들간에 찬반론(贊反論)이 있었으나 결국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왕(王)은 신하(新下)를 거느리고 서울(慶州)을 떠나 고려태조(高麗太祖)에게 귀부(歸附)하였다.

 

태조(太祖)는 궁동(宮東)의 갑제일구(甲第一區)를 주고 장녀(長女) 낙랑공주(樂浪公主)로서 그 아내를 삼게 하고 정승공(政丞公)을 봉하여 선일천석(線一千石)을 내리고 시종원장(侍從員將)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新羅)를 경주(慶州)라 고쳐 공(公)의 식읍(食邑)으로 하고 또 경주(慶州)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하였다.

 

공(公)이 고려(高麗) 경종(景宗) 3년(年)(978) 4월(月) 4일(日) 별세(別世)하자 시호(諡號)를 경순(敬順)이라 하고 왕(王)의 예(禮)로서 장례(葬禮)를 모시고 능(陵)을 조영(造營)하였으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조선(朝鮮) 영조(英祖)때에 찾게 되었는데 신라왕릉중(新羅王陵中) 경주지역(慶州地域)을 벗어나 경기도(京畿道)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新羅王陵)이다.

 

능(陵)의 시설은 봉분(封墳) 곡장(曲墻) 능비(陵碑) 장명등(長明登) 망주석(望柱石)이 있고 명문(銘文)으로는 능비명(陵碑鳴)이 「신라경순왕지릉(新羅敬順王之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나)<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내의 내용.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에 있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제56대 경순왕의 무덤. 사적 제244호. 지정면적 3,967㎡. 무덤봉분의 지름은 7m, 높이는 약 3m이다.

 

경순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부(傅)이다.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927년에 왕이 되어 935년 왕건(王建)에게 나라를 물려줄 때까지 9년간 재위하였으며 978년(경종 3)에 죽었다.

능은 오랫동안 잊혀져오다 조선시대에 찾게 되었다고 하며, 신라의 왕릉 가운데 경주지역을 벗어나 경기도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이다.

 

무덤의 외형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밑둘레에는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무덤보호를 위해 병풍처럼 돌렸고 능 주위로는 곡장(曲墻)이 돌려져 있다.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고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 있는 비문의 내용에 의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되었다. 능 앞에 있는 기타 석물로는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 2개가 마련되어 있다.

 

신라왕릉의 경우 곡장이 마련된 것이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왕릉에 비로소 곡장을 마련하고 있어 묘비에서와 같이 경순왕이 죽자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고도경주(경주시, 1982). 趙由典

 

(다) 문온공파 김영환 제공 자료. (2002. 04. 23.)

<전략>

그가 백료를 거느리고 고려에 귀의할 때 향차와 보마가 30여리에 뻗쳤다 하며, 항복 후 왕건에 의해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 받았으며 녹 1천석과 함께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사심관으로 임명되었고 왕건 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 하였다. 경순왕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지 43년 후인 고려 경종 4년에 돌아 갔으며 경순이란 시호를 받았다.

 

경순왕릉은 조선 건국 이후 오래도록 실전(분실) 되었던 것을 1748년(영조 24) 감사 김 성운과 첨정 김응호 등이 봉축하고 제사하였으나 6.25후 방치 되었다가 1975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지금의 형태로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분은 원형의 호석을 두른 높이 3m, 둘레 19.5m의 크기이고 곡장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봉분 전면에는 4각의 대좌위에 서 있는 표석(105 .857cm)과 상석(103?cm), 네면에 4각화창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160cm)이 직선상에 놓여져 있고 장명등 좌우에는 석양(105?cm), 망주석(150cm)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조선 후기의 양식이며 화강암 재질이다. 표석 전면은 「신라경순왕지릉」이라 되어있고 뒷면은 5행으로 경순왕의 간략한 생애를 기술한 87자의 음기로 이루어져 있다.

 

건립연대는 1749년(영조 25)이다. 또한 좌측에는 1986년에 새로 건립된 1칸 규모의 비각과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형지붕으로 된 재실이 있는데, 비각안에는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정되는 비가 있다.

 

이 비는 6.25 전까지 고랑포리 시가지에 있었으나 수복 전후 도로변에 계속 방치되어 오던 것을 원당리 고랑포 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보호해 오다 1986년 비각을 새로 건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보존하게 된 것이다.

 

대좌는 최근에 화강암으로 다시 마련하였고 비신은 높이 132cm, 폭 66cm, 두께 15cm 규모에 상단을 모죽임한 변성암재질로 되어 있다.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10자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기도 내에 있는 것으로 옛 고랑포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곳에 잘 정비되어 있다

 

(3) <敬順大王殿碑>(경순왕전비) (제학공파 김항용 자료 제공. 2002. 4. 23)

 

      가)소재지 : 경북 경주시 황남동

      나)시대 : 조선 순조 14년(1814)

      다)출전 : <한국금석문 대계> 원광대학교 출판국. 1979.

 

   <전면>                              <후면 碑陰記>

 

<부분 확대>

 

라) 경순왕전비 비문 및 번역문 (2007. 3. 6. 영환(문) 제공)

 

  

新羅敬順王殿碑」

新羅敬順王殿碑銘幷序」

東京之有 敬順殿古矣享祀以時儀文畢擧苐無撰刻可以壽傳傅 王之後孫再鳴持世次事蹟請銘于余余於慶州之金」雖籍派分而鼻祖則一也何可以短拙辭謹序而銘焉序曰」

王諱傳新羅人也其始祖曰閼智脫解王九年乙丑聞始林鷄鳴得小兒於金櫝王收而養之名以閼智賜姓金氏此得姓之」所由始也二世勢漢三世阿道四世首留五世郁甫六世仇道七世末仇卽味鄒之弟味鄒繼沾解王昔氏而立金氏於是乎」有國焉八世奈勿王九世卜好十世習寶竝追封葛文王葛文當時追尊之稱也十一世智證王元年庚辰卽齊東昏矦永元」二年定國號曰新羅始稱王頒喪制禁殉葬智證其諡號也十二世眞宗十三世欽運十四世摩次十五世法宣追崇玄聖王」十六世義寬追崇神英王十七世魏文追崇興平王十八世孝讓追崇明德王十九世元聖王始設讀書出身科二十世禮英」二十一世均貞追崇成德王二十二世神武王二十三世文聖王二十四世安二十五世敏恭二十六世實虹追崇懿興王二」十七世孝宗追崇神興王二十八世 敬順王是也 王繼景哀王朴氏而立是年丁亥卽後唐明宗天成二年越九年乙未」王知天命已改將讓國於高麗王子諫曰當與忠臣義士以死自守力盡而後已 王曰吾不忍使無辜生靈肝腦塗地遂」賫書讓于麗祖麗祖以賓禮待之拜以觀光順化封樂浪妻以長女神鸞公主宋太宗興國三年麗景宗戊寅 王薨諡敬順」陵在長湍府皐浪津聖居山癸坐之原屢經兵燹久失其處逮我 英廟朝戊辰有得其誌石以 聞特命改築賜祭置守卒」五人焉先是故都人士追思 王仁民之德立廟揭影幀以祭之天啓丁卯移廟于東泉村 仁祖朝因金時讓狀請易廟而」新之仍 命姓金者爲叅奉而劃賜廩米又置藏獲土田 顯廟朝又因筵臣言 賜廟號曰 敬順王殿置儒生守護軍殿」卒復戶一依崇仁崇義崇德殿例 先大王甲寅以殿後沙麓之患道臣陳啓 特賜移建工費移殿于府南數里所鳳凰臺」前卽味鄒王陵下而距鷄林百步而近也旣 賜祭以安之又新其影幀更 命春曹定式儒生殿卒各九十餘人守護軍一」百二十餘復戶五結叅奉則自吏曹下帖 列聖朝崇報之典至是而始大備矣盖甞論三韓之世國史不備文獻無徵 王之九年在」宥嘉謨善政雖不槪見而其答王子之一言丁寧惻怛德意藹溢視諸蜀主北地王事賢愚明闇果何如也彼有宋之吳越以蕞爾小邦」世修侯度而及夫諸鎭以次削平始乃頓首請命其後守臣猶歷敍其功德立石以銘之惟 王承久遠之緖居富强之業金湯足以恃險兵甲足以備禦直以不忍人之心棄千乘如弊屣然其賢於人遠矣後世尙論之士固宜有鋪張而讃美之者然全史稗乘未有焉豈」亦中間無作者而然乎抑有之而失其傳歟可慨也已 王之廟庭多士請竪以碑已於 先朝庚子特蒙 恩許而工役未備今始營」刻端由後孫報本之誠而 王之遺風餘韻藹然被於嶺海之間者從可以見矣於乎盛哉 王前妃朴氏生子男三人女一人後妃王氏生子男五人女二人太子次子永芬公子殷說錫鍵鐥錘長女爲麗景宗王妃次女適李金書次女適黃瓊 王之孫子其麗不億而以慶爲藉者有四曰永芬公子之後曰侍中侍郎公之後曰太師公之後曰版圖判事公之後云銘曰

 

鷄林之右

鳳臺之陽

有侐靈殿

丹雘煌煌

遺像凜然

袞衣繡裳

誰其享之

猗 敬順王

王於讓國

仁言孔彰

維其有德

厥後克昌

屹彼螭首

于廟之傍

作此銘詩

用昭無疆」

 

正憲大夫禮曹判書兼知 經筵春秋館事義禁府事弘文館提學江陵金啓洛謹撰」

嘉善大夫禮曹叅判兼同知 經筵成均舘事慶州金魯敬謹書」

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 經筵事五衛都摠莩摠管延安李肇源謹篆」

崇禎紀元後三甲戌五月 日立石」

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丘都護府使金魯應」

通政大夫守 慶州府尹慶州鎭管兵馬節制使洪履簡」

碑役都監生員金再鳴」

 

<역문>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

신라경순왕전비명(新羅敬順王殿碑銘). 서문을 아울러 기록함.

동경(東京 : 경주)에 경순전(敬順殿)이 있은 지 오래되어 때마다 제사를 지내고 의식을 다 거행하였으나 다만 비문을 새겨 오래도록 전하는일을 하지 못했었다. 왕의 후손 김재명(金再鳴)이 세계(世系)와 사적을 가지고 와 내게 명문(銘文)을 청했다.

 

나는 경주 김씨(慶州金氏)에 대해 분파에 속하긴 해도 비조는 똑같은 하나인데 어떻게 문장을 못한다고 하여 사양하겠는가? 삼가 서문을 쓰고 명을 지었다.

왕의 이름은 부(傅)이고 신라 사람이며, 시조는 김알지(金閼智)이다. 석탈해왕 9년 을축년에 시림(始林 : 계림의 옛 이름)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금궤 안에서 아이가 나오자 왕이 거두어 기르면서 알지라고 이름을 짓고 김씨라는 성을 주었다. 이것이 성을 갖게 된 이유이다.

 

2세는 세한(勢漢)이고, 3세는 아도(阿道), 4세는 수유(首留), 5세는 욱보(郁甫), 6세는 구도(仇道)이며, 7세는 말구(末仇)로 미추(味鄒)의동생이다. 미추는 석씨인 첨해왕(沾解王)의 뒤를 이었는데, 김씨가 이때부터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8세 내물왕(奈勿王), 9세 복호(卜好),10세 습보(習寶)는 모두 갈문왕(葛文王)에 추봉(追封)되었다. 갈문왕은 당시 추존한 왕을 칭한 말이다. 11세 지증왕(智證王)이 왕위에 오른 경진년(500년)은 바로 제(齊) 나라 동혼후(東昏侯) 영원(永元) 2년에 해당한다.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왕이라 칭했으며 상제(喪制)를 반포하고 순장(殉葬)을 금지했다. 지증은 시호이다. 12세는 진종(眞宗)이고 13세는 흠운(欽運), 14세는 마차(摩次)이다.

 

15세 법선(法宣)은 현성왕(玄聖王)으로 추숭되었고, 16세 의관(義寬)은 신영왕(神英王)으로, 17세 왜문(魏文)은 흥평왕(興平王)으로, 18세 효양(孝讓)은 명덕왕(明德王)으로 추숭되었다. 19세 원성왕(元聖王)은 처음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치했다.

 

20세는 예영(禮英)이고, 21세 균정(均貞)은 성덕왕(成德王)으로 추숭되었다. 22세는 신무왕(神武王)이고 23세는 문성왕(文聖王), 24세는 안(安), 25세는 민공(敏恭)이며, 26세 실홍(實虹)은 의흥왕(懿興王)으로 추숭되었고, 27세 효종(孝宗)은 신흥왕(神興王)에 추숭되었으며 28세는 바로 경순왕이다. 왕은 박씨인 경애왕(景哀王)의 뒤를 이었다. 그 해는 정해년(927년)으로 후당(後唐) 명종(明宗) 천성(天成) 2년이었다. 9년이 지난 을미년(935년)에 왕은 천명이 바뀌었음을 알고 고려에 나라를 양도하려고 하자 왕자가 말했다.

 

“당연히 충신·의사와 함께 죽기로 맹세하여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 그만두어야 합니다.” 왕은 “나는 차마 무고한 생령들을 죽게 만들 수없다.”고 말하고 마침내 고려 태조에게 나라를 양도하는 편지를 보냈다. 고려 태조는 손님을 맞는 예로 대접하였으며, 관광순화(觀光順化)에 제배하고 낙랑(樂浪)에 봉한 뒤 장녀인 신난공주(神鸞公主)를 아내로 주었다. 송(宋) 태종(太宗) 흥국(興國) 3년, 고려 경종(景宗) 무인년(978년)에 왕은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경순(敬順)이고 능은 장단부 고랑진 성거산(長湍府杲浪津聖居山)의 남서향 언덕에 있다.

 

 여러 번 병난을 당해 묘터를 잃어버렸는데 영조 무진년(영조 24, 1748년)에 지석(誌石)을 찾아 왕에게 보고하니 특명으로 개축하고 제사를 지내준 뒤 수호할 군졸 5인을 두었다. 이에 앞서 경주의 선비들이 왕이 백성을 사랑한 덕을 추모하여 묘우(廟宇)를 세우고 영정을 걸어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천계 정묘년(인조 5, 1627년)에 묘우를 동천촌(東泉村)으로 옮겼다. 인조에게 김시양(金時讓)이 장계로 청하여 묘우를 새로 지은 것이다.

 

그리고 김씨(金氏) 성을 가진 사람을 참봉으로 삼고 봉급을 주었으며, 또 노비와 전답을 두었다. 또 현종 때는 경연을 담당하던 신하의 말로 인해 경순왕전(敬順王殿)이라는 묘호(廟號)를 내려 주고 유생과 수호군을 두었으며, 전졸(殿卒)과 복호(復戶 : 요역 등의 면제)는 숭인전(崇仁殿)·숭의전(崇義殿)·숭덕전(崇德殿)과 똑같이 하였다. 선대왕 갑인년(甲寅年)에 경순전의 뒤에 모래 언덕이 있어 염려된다는 도신(道臣)의 장계로 인해 특별히 옮겨지을 비용을 하사하여 부(府)에서 남쪽으로 몇 리 떨어진 봉황대(鳳凰臺)로 옮겼는데, 바로 미추왕능 아래이며 계림과는 100보 거리이다. 건물을 완성하고 제사를 지내주어 편안히 모셨으며, 영정도 새로 만들었다. 또 예조에 명하여 규정을 정하게 하였는데, 유생과 전졸은 각 90여명, 수호군은 120여 명 두고, 복호(復戶)는 5결로 했으며, 참봉은 이조에서 체(帖 : 임명장)를 내리도록 하였다. 열성조의 존숭하고 보답하는 의식이 이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대체로 삼한(三韓) 때는 국사(國史)가 갖추어지지 않아 문헌으로 고증할 수 없다고 하듯이, 왕이 재위한 9년 동안의 훌륭한 계책과 선정을 개괄해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왕자에게 대답한 한마디 말은 정녕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덕의(德意)가 가득했으니 촉(蜀)나라 왕 북지왕(北地王)의 일과 비교해 보면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과연 어떨까? 저들에게는 송(宋)나라가 있었고, 오(吳)·월(越)은 아주 작은 나라로 대대로 제후의 제도를 닦았는데, 제진(諸鎭)이 차례로 평정되자 비로소 머리를 조아리고 청명(請命)하였다. 그 뒤 나라를 지키던 신하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 공덕을 서술하여 비를 세우고 비문을 지었다. 오로지 경순왕은 장구한 계통을 이어받고 부강한 사업을 차지하여 금성탕지(金城湯池)와 같이 믿을 만한 성이 있었으니 군사로 충분히 방어할 수 있었음에도 곧바로 차마할 수 없는 마음으로 천승(千乘)의 나라를 헤진 신발처럼 버렸으니 어진 마음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것이다. 마땅히 후세의 상론(尙論 : 옛 사람의 일을 평론함)하는 선비 중에는 수식하여 찬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역사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은, 중간에 기록한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면 전해오던 것을 잃어버려서일까? 개탄스러울 뿐이다. 경순왕전의 많은 선비들이 정조 경자년 (정조 4, 1780년)에 비를 세울 것을 청하여 특별히 윤허를 받았는데, 공사가 미비하여 이제야 비로소 비를 세우고 글을 새기게 되었다.

 

실마리는 후손들이 근본에 보답하는 정성으로부터 나왔지만, 왕의 유풍과 여운이 가득하여 영남지방에 끼치고 있다는 것을 이로부터 알 수 있으니 아아, 훌륭하구나.

왕의 전비 박씨는 3남 1녀를 낳았고 후비 왕씨는 5남 2녀를 낳았다. 태자와 둘째아들 영분공자(永芬公子), 김은열(金殷說)·김석건(金錫鍵)·김선추(金鐥錘)가 아들들의 이름이다. 큰딸은 고려 경종의 왕비가 되었고, 둘째딸은 이금서(李金書)에게 출가하였으며 셋째 딸은 황경(黃瓊)에게 출가하였다. 왕의 후손은 수가 매우 많은데, 경주(慶州)에 적을 둔 사람들은 4갈래로 영분공자의 후손, 시중시랑공(侍中待郎公)의 후손, 태사공(太師公)의 후손, 판도판사공(版圖判事公)의 후손이 있다. 명(銘)하기를,

계림의 오른 쪽

봉황대의 남쪽

고요한 영전 있는데

단청은 휘황하고

영정이 의젓하며

곤룡포와 수놓은 옷

누구를 흠향하는가?

아, 경순왕이로다.

왕은 나라를 양도하여

인자한 말씀 드러났다.

오직 덕이 있음에

후손이 번성하여

높은 저 머릿돌

묘의 곁에 세움에

이렇게 명을 써서

영원히 밝히노라.

 

정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正憲大夫禮曹判書兼知經筵春秋舘事義禁府事弘文舘提學)

 

강릉(江陵) 김계락(金啓洛) 지음.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성균관사(嘉善大夫禮曹叅判兼同知經筵成均舘事) 경주(慶州) 김노경(金魯敬) 글씨.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사 오위도총부도총관(正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事五衛都摠莩摠管) 연안(延安) 이조원(李肇源) 전서(篆書).

 

 

숭정기원후 세 번째 갑술년(순조 14, 1814년) 5월 일 세움.

통정대부 수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 대구도호부사(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丘都護府使) 김노응(金魯應)

통정대부 수경주부윤 경주진관병마절제사(通政大夫守慶州府尹慶州鎭管兵馬節制使) 홍리간(洪履簡).

비역도감(碑役都監) : 생원 김재명(金再鳴).

유사(有司) : 유학 김수걸(金守杰), 참봉 김명호(金鳴鎬).

 

(4) <경순대왕 릉비>

 

    가) 위치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나) 건립연대 : 영조23년(1747년) 4월4일 .

 

 

<전면>                                               <후면>

 

다) 신라경순왕지릉 (新羅慶順王之陵) 비문 역문 내용.

  경순왕은 신라 56대왕으로 후당(後唐) 천성(天成) 2년 무자(戊子=928년)년에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셨고 청태(淸泰) 을미(乙未=935년)년에 고려에 양위하셨고 송나라 태평흥국 무인(戊寅)년(서기978년) 고려 경종3년 4월 4일에 흉사하시었거늘 시호를 경순(敬順)이라하고 왕례로서 장단 고부 남8리에 계좌(癸坐)之原에 장사하였다.

    지극하신 행실이요 순진하신 덕이리라

    영명(英明)하신 모법(模法)이 굳세고 빛나리라.

    성상(聖上;영조) 23년 정묘(1747년) 4월4일 개립(改立)하다.

 

<경순왕릉>(전면)

 

<경순왕릉>(후면)

 

(5) 경순대왕신(敬順大王神)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속에서 신으로 받들게 되는 왕신의 하나.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으로, 나라를 고려에 넘겨준 왕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시운이 다한 나라를 전쟁의 참화에서 피하게 하여 백성을 보호한 점에서, 백성들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유적지 곳곳에 사당이 세워지고 여러 전설이 생겨났으며, 신령으로 모셔졌다. 그리하여 시호를 올리기 이전의 그의 칭호에 따라 김부대왕(金傅大王)이라는 이름으로 한국무(韓國巫)의 신령이 되었다.

 

그를 숭배하는 지역은 경상북도의 경주·포항·영풍·월성 등을 비롯하여, 강원도 원주와 충청북도의 제천·청풍, 경기도의 안산과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 이른다.

 

경주에서 포항에 이르는 지역의 주민들은 경순왕을 인근의 형산(兄山) 옥련사(玉連寺)에 신으로 모시고 기원을 드린다.

 

전설에 의하면, 형산과 강 건너의 제산(弟山)은 원래 연결되어 있어, 비만 오면 물이 빠지지 않아 안강(安康)벌까지 수해를 입었다. 그런데 하루는 경순왕신이 용으로 변해서 그 꼬리로 두 산을 끊어 놓아, 물이 그 사이로 해서 바다로 빠지게 하였다 한다. 이 전설은 경순왕이 죽어서도 백성을 보살펴주는 신령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형산 옥련사의 경순신>

 

경상북도 영풍시 영주면 영주리에는 목조기와로 된 자인전(慈仁殿)이 있는데, 그 곳에 경순왕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충청북도 청풍의 덕주사(德柱寺) 뒤편에도 김부대왕사라는 사당이 있었던 것과 강원도 인제에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 있었던 사실, 그리고 충주·제천 등지에도 경순왕의 여러 유적과 전설이 있었음을 ≪오주연문장전산고 五州衍文長箋散稿≫는 전한다.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의 군자봉 꼭대기에는 서낭당터가 있는데, 그곳에서도 경순왕이 모셔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리고 김부대왕은 오늘날 무당들이 그리 명확하게 신앙하지는 않지만, 조선말과 일제시대에는 영험이 높은 신령으로 받들어졌다.

≪참고문헌≫ 五州衍文長箋散稿, 文化遺蹟總覽 上·中(文化財管理局, 1977), 韓國民俗大觀 3-民間信仰·宗敎篇-(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2), 朝鮮巫俗考(李能和, 啓明 19, 啓明俱樂部, 1927).

趙興胤

 

*<형산의 경순대왕 신과 관련한 안.사.연 영남 모임 답사 보고>(2002. 6. 17. 현지 답사. 6. 20. 재원(문). 자료 제공)

 

형산사의 김부대왕과 김충태자의 전설(포항 1 대학 배용일교수 자료제공)

 

형재산(兄弟山)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의 영일군(현,포항)과 월성군(현,경주)의 지경에(경계)에 위치하여 있다. 형산강 어구의 남쪽 북형산성(北兄山城)이 있고 금부대왕(金傅大王, 敬順王)의 사당이 있는 산을 형산(兄山) 이라 하고, 그북쪽의 맞은 편의 산을 제산(弟山)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산을 가리켜 형제산이라고 하고, 이 양 산 사이를 흘러 영일만에 들어가는 강을 형산강(兄山江)이라 한다.

 

본시 경주의 북쪽으로 연하여 남천 북천 기계천 등으로부터 흘러, 형제산이 단맥(산이잘려짐)되기 전에는 그물이 지금의 안강에 모여 호수를 형성하였고 범람하면 지금의 청하방면 으로흘렀다고도 하고 신광을 거쳐 흥해방면으로도 흘렀다고 도 한다. 안강호수가 범람하면 신라수도 경주가 홍수의 피해를 입으므로 안강 호수의 치수(治水) 문제는 신라 건국 이래 암적인 어려운 문제였다고 한다.

 

옛부터 부로상전(父老相傳)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신라말엽 경순왕(김부)이 임금이 되기 이전부터 철원(鐵原)에 도적떼가 일어나 태봉국이라는 나라를 세워 자칭(自稱) 임금이라 하고 남쪽에는 부여에 도적떼가 일어나 후백제왕이라고 자칭(自稱)하는 등 사방에 도적떼가 일어나 치안을 극도로 문란케 하니, 신라의 장래가 심히 걱정되었다고 한다.   경순왕,김부가 임금이 된 후 나라안에는 물론 나라 밖에도 물정이 소란하니 사관으로 하여금 신라수도 주변의 지리와 산천을 보아 신라의 장래를 점을 쳐 보게 하였다. 수일 후, 임금을 배알한 사관은 장차 신라를 정복하고 왕위를 찬탈할 역적은 북쪽의 궁예도 아니고 남쪽 의 후백제왕도 아니고 동쪽 임정현(臨汀縣)으로부터 역적이 일어나 신라수도인 경주를 침범할 것이라고 사뢰었다.

 

임금은 그러한 환난을 미연에 방지할 방법은 없는가 하고 물으니 사관은 형제산(지금의 형산강 어구)의 형산포의 산을 끊어 안강호수를 지금의 영일군땅 어룡사(魚龍沙) 영일만으로 결류시키면 임정현 땅의 지정왕기(地精王氣)가 제압되어 감히 신라 수도를 침범할 불의의 야심을 품은 역적이 출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상주하였다. 당시, 신라의 서울 경주는 안강이 범람하면 수해(水害)의 환란이 다대하여 각별한 치수의 방책이 없이는 신라 왕도의 안녕과 질서를 보존하기 매우 곤란하였으므로 경순왕은 태자(太子) 김충(金忠)과 상약(相約)하여 금후 백일간에 형제산 산맥을 단절하고 안강호수의 물을 동해바다로 흐르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경순왕은 하늘에 올라가 목침(木枕)으로 삼층계의 집을 건축하여 하늘에 옥황상제와 천지신명과 신라 왕실의 조종(祖宗)들에게 신라 국운의 안녕과 연장을 기원할 것을 임금과 태자사 생명을 걸고 서로 약속하였던 것이다. 일편단심(一片丹心) 신라의 안전을 염려한 태자 김충은 용으로 화신(化身)하여 형제산맥을 펴서 이를 단절하고자 천지신명에게 기도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는 제일보로 큰 뱀(大蛇)으로 화하여 사람으로부터 용왕이란 존칭이 없이는 용으로 화할 수 없으므로 안강 가두의 길가에 뱀이 되어 누워 지나가는 사람으로부터 용왕(龍王)이라는 존칭으로 불러주는 사람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이라도 용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없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큰 뱀 한 마리가 누워 있다고 두려워하여 달아나기만 하였다. 경순왕과 태자의 서로 약속한 기일이 백일인데, 기한은 용서없이 지나가서 불과 하루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상금(尙今) 용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없었다. 용으로 화신하지 못하여 태자는 마음 속으로 초조하게 느끼면서, 용이라고 불러주는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일각천추(一刻天秋)의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한 노파가 어린 손자를 업고 그 길가를 지나가다가 태자(큰 뱀)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저런 큰 뱀도 이 세상에 있는가" 하고 지나가려고 할 때, 그 노파에게 업혀있던 5∼6세 되어보이는 손자가 그 할머니를 나무라면서 "할머니는 왜 경솔한 말을 하나요. 저것은 뱀이 아니고 용왕입니다." 했다. 이 말이 떨어지자 홀연히 맑은 하늘에 검은 구름이 뒤덮고 일진광풍(一陳狂風)이 일어나더니 태자인 큰 뱀은 용으로 화하여 하늘에 올라가 바람과 비를 부르고 자유자재의 조화로 형제산맥의 단맥을 펴서 안강호수를 영일땅으로 결류시키고 오늘의 영일만에 흐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라왕도 경주를 안강호수의 수해로부터 구출하여 나라의 기초를 튼튼하게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고 한다. 이 때, 그 부친인 김부 대왕은 차일피일 결단성없이 우유부단하다가 하늘에 올라가서 삼층계의 집을 짓지 못하여 부자간의 약속대로 아들 태자에게 맡기게 되었다. 태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부친 경순왕에게 칼을 뽑아 차마 아비를 죽일 수 없어 형식적으로 베어버리는 양 그 얼굴에 조그마한 상처를 입히고 부왕이 약속을 위반한 죄를 용서하였다고 한다. 안강 가두에 뱀으로 화신하여 누워있던 태자를 용이라고 존칭하여준 어린 아이의 덕을 흠모하여 안강호수가 결류된 후에 드러나는 하상(河床)과 그 일대의 풍요한 들(野)을 이 소년에게 하사하였는데 지금에도 그 들을 유금(有琴) 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아이의 이름이 유금이었기 때문이다. 형산 산정에 형산사라는 조그만한 암자가 하나 있어 김부 대왕과 김충 태자의 목상(木像)을 세워 제항을 지내고 그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김부대왕의 얼굴에 조그마한 상처가 있는 유적은 부자약속을 위반한 형벌의 행적이라고 전한다.

 

경순대왕의 후손으로써 경순대왕과 태자의 전설로 믿고  싶었으나 왕룡사원의 주인의 이야기로 전하여지는 것은 무렬왕과 김유신의 전설로 둔갑하여버렸다.안타까운 전설이다

 

<본  홈 게시판 내용>(2002. 6. 18. 재원(문) 현지 답사. 자료 제공>

왕룡사는 행정구역으로는 경북 포항에 위치하여 있고 해발 약600m가 안되는 형산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절을 가기 위해서는 경주쪽에서 형산 정상으로 오르는 비포장 길을 따라 자동차를 몰고 가거나 포항쪽에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야 한다.

 

포항 시가지에서 바라보면 바로 왕룡사가 보이고 왕룡사에서 내려다 보면 포항 시가지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바로아래 형산강과 동해의 푸른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여 절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이 절의 현재의 절이름은 왕룡사원이고 그 전에는 왕룡사 또 그 전에는 옥련사 더 과거 신라시대에는 형산사였는데 상당히 오랜 역사가 있는 절이고 과거에는 종교재단에 등록이된 절 같았지만 현제에는 개인 한사람의 절로서 종파도 약20 여년 전까지는 태고종이었으나 현재는 종파도 없는 초라한 절이고  주지승 또한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은 수도승이아닌 머리를 길르고 사복을 입은 주지승이 아닌 원장으로 호칭 하였다. 원장이라고 하는것은 왕룡사원이니까 원장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 절은 신라 시대 부터 절이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주지승이 수없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고 불교의 종파또한 본인 마음대로 개칭 하였을 것이다. 현재의 원장은 본인의 조부때부터 이 절을 지켰다고 하니 약 60 여년 이절을 지킨 것이 된다.

 

이 절에 얽힌 경순대왕과 김충태자의 전설은 이 지방의 향토사를 연구하는 학자는 김부대왕과 김충태자의 전설로써 확실한 이야기를 하지만 왕룡사원의 원장은 이야기가 다르다. 원장 왈 "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태자또한 산으로 가버렸는데 어떻게 용에 대한 전설이 있겠소, 여기는 그런 전설이 아니올시다. 여기 모셔저 있는 목상은 바로 신라의 삼국통일을한 무열왕과 김유신이 올시다" .

 

그 절에서 수양을 왔는지 아니면 불공을 드리러 왔는지 인근마을의 노인 한분의 말씀은 본인도 또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과거에는 현재의 목상이 아니고 동으로 만든 신을 모셨는데 형산아래의 유씨들의 문중에서 문중사람들이 내려와서 자기네 조상을 모셔놓은 사당위에 산위에 신을 모셔 놓았다 하여 (경순왕인지, 무열왕인지는모르지만) 동으로 만든 신상을 산아래 형산강으로 굴러서 던저 버렸다.

 

그래서 그 이후에 목상을 만들어 세웠다 하더라. 지금 있는 목상은 지금 원장의 조부 바로 그 전에 세웠다고 하니 아직 햇수로는 그저 100년 정도도 못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절간을 내려 오면서 혼자 생각을 해 보았다. 먼 옛날 과거에는 분명히 경순대왕과 태자의 전설이 분명하였지만 어느 때인가 주지승이 여러번 바뀌면서 경순대왕의 전설보다는 신라의 유명한 김유신과 무렬왕, 용의 이야기가나오는 무열왕의 아들 문무왕의 전설로 만드는 것이 더 신도들로 부터 인정을 받지 않을까 생각되어 마음대로 전설을 자기식대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생각이 나의 머리를 스쳐간다. 분명히 나는 경순대왕과 태자의 전설로 믿고싶다. 향토사를연구하는 학자들은 과거의 조상때부터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와 먼저 향토사를 연구하고 책을써놓은 선배 향토사학자들의 글을 근거로 하여 연구하고 발표를 하니까 그 쪽으로 더 신빙성이있다고 생각된다. 내가 왕룡사에 갔을 때 미리 아무도 없을 때 사진을 찍기로 잘했다. 원장의 성격으로 보아 원장이 사진찍는것을 알았으면 목상 사진 촬영 하는 것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올해 원장님의 나이는 56세이며 젊은 시절 해인사에서 수도하였고 속명은 윤시연이라 하신다. 목신을 모셔놓은 방의 이름은 "왕장군 용왕전(王將君龍王殿)이고 목신의 크기는 높이가 약1m 20 정도이고 몸통의 크기 지름이 약 60여cm정도이고 목신을모셔놓은 건물은 지붕이 기와로 된 대웅전처럼 크고 화려하게 지어 놓았는데 불상을 모셔놓은 대웅전 건물은 낡고 허술하고 적은 건물이었다.

 

나는 왕룡사를 향할 때는 큰 기대를 가지고 갔으나 왕룡사를 내려 올때는 마음이 허탈하였다. 경순 대왕과 김충 태자의 전설이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대구의 종친님들과의 직계조 왕릉 참배및 사적지 답사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하여 경주로 향한다.

 

<형산 황룡사 및 내부 神象 모습 >

 

<신상의 확대 모습>

 

(6) 경순왕 影幀 소개

        

1976년 10월 대종회에서 발간한 <寶鑒 第二輯>에 수록된 사진 (2002. 12. 14. 태영(문) 제공)

 

1) 자인전(慈仁殿) :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99

자인전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창건년대는 알 수 없다.

 

2) 원주 황산사지(原州黃山寺址) :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산 25-2

황산사의 초창(初創)은 신라 경애왕대(924-926)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경순왕의 공주가 이 절에 와서 부왕의 존상을 산정 석벽에 조각케 하였고, 그후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존상을 보고 환경한 후부터 산명을 대왕산(大王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귀한 분이 왔다 하여 동리 이름을 귀래(貴來)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3) 숭혜전(崇惠殿) :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216

숭혜전(崇惠殿)은 신라 미추(味鄒)·문무(文武)·경순왕(敬順王)의 어진 정치를 회모(懷慕)하여 영당(影堂)을 건립하고 춘추(春秋)로 후손들이 모여 제사하는 곳이다.

효종(孝宗)연간에는 영천(永川) 은해사(銀海寺)의 영본(影本)을 묘사하여 묘(廟)에 봉안하였다.

 

4) 형산 왕룡사 (익원공파 김태서 자료 제공. 2002/04/20)

형제산은 포항시와 경주시의 경제에 위치해 있다. 형산강 어구의 남쪽에 북형산성이 있고, 김부대왕 즉 경순왕을 모신 용왕사가 잇는 산을 북형산 (고려때부터는 '형산' 이라부름) 이라고 한다.  형산 산정의 왕룡사라는 절에는 김부 대왕과 김충 태자의 목상을 세워 재항을 하고 그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자료 : 영일군사)

 

5) 경천묘 (익원공파 김태서 자료 제공. 2002/04/25)

*지정번호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소재지 : 청암면 평촌리 산107-1번지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영정 봉안소로서 고종 39년(1902)에 건립하였다. 경순왕은 용화산 학수사로 가서 여생을 마쳤다. 그 뒤 사람들이 왕을 추모해 학수사에 사당을 세워 모셨으나 후세 사람들이 청암면 중이리 검남산 밑으로 옮겼다. 지금있는 건물은 1988년 하동댐 건설로 다시 옮긴 것이다.

 

6) 시흥 군자봉 (문온공파 김영환 자료 제공. 2002/04/27)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라 56대 경순왕(敬順王)이 신라의 천년사직이 다하자 경주를 떠나서 충북 제원군을 거쳐서 강원도 원성군 고자암에 미륵불상을 조성한 후 현 시흥시 군자동 구준물 마을에 이르러 안씨 부인과 생활하며 아들 덕지(德摯)를 낳았다. 그 후 경순왕이 죽자 안씨 부인이 마을 뒷산인 군자봉에 올라가서 매일 치성을 드렸다.

 

얼마 후 내의시랑 서희(徐熙)가 송나라 사신으로 출행하게 되었는데 그 때 안씨 부인의 영혼이 나타나 사행(使行)길을 도와주어 그 은공으로 군자봉 정상에 당을 마련하고 경순왕의 영정과, 안씨 부인의 소원당(所願堂)을 지어 주자 인근의 주민들이 해마다 음력 2월에 성황신인 경순왕과 안씨 부인, 장모 홍씨의 영정을 모시고 마을로 내려와서 제를 지낸 후 유가(遊街)를 돌다가 삼월 삼짇날이 되면 다시 모셔 올렸으며,

소원당에 불을 놓기 전에 소원당에 모셔 놓았던 경순왕과 안씨부인의 영정의 복사본을 만들어 숨겨 두는 등 군자봉성황굿을 지켜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가 일경들에게 수 차례의 곤욕을 치루었다.

소원당이 불에 타버리자 곽명월은 자신의 집에 영정을 모시고(현 김순덕의 당이 당시 조모 곽명월이 영정을 모시고 당을 지키던 자리이다) 군자봉 성황제를 지켜왔다.

 

7) 도라산 전망대 (문온공파 김영환 자료 제공. 2002/04/29)

그러한 가운데 낙랑공주는 비운을 맞게 된 경순왕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저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머물게 하였는데 영원히 이곳을 지키겠다는 뜻에서 영수암(永守菴)이라고 이름지었으며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었다 하여 도라산(都羅山)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도라산 원경>(2003. 1. 5. 항용(제) 제공)

 

이곳에서 고려경종 3년(978)에 경순왕이 돌아가시니 고랑포 뒷산 아늑한 골짜기 남향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안장되었으며 낙랑공주는 영수암이 훼손함에 따라 아담하게 새로 절을 건립하여 경순왕의 화상을 모시고 명복을 기원하는 한편 영원히 번창하라는 뜻에서 창화사(昌化寺)라 호칭하였다고 하며 조선조 말까지 임갑진 스님이 수호 관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8) 경순왕 영정 사실기 (김영환 2002/04/25)

경순왕의 영정은 본전(숭혜전)에 봉안한 것이 도합 4본이다. 원본은 은해사(銀海寺)로 부터 옮겨왔고, 정조18년 갑인년에 2본을 다시 본떠서, 1본은 본전의 감실에 보관하고, 1본은 임금님이 보신후 다시 본전에 보내어 구본과 함께 궤안에 봉안하였다. 고종40년 계묘년에 다시 1본을 본떠서 본전 감실에 봉안하고 구본은 궤안에 봉안하였다.   순천 송광사에 또 경순왕 영정이 1본 있으니 이는 후손 한장(漢章)이 기증한 것이다. 원주 용화사 고자암에 또 1본이 있으니 후손 사목(思穆)이 기증한 것이며,  또 하동 쌍계사에 일찌기 1본이 있었은데 연전에 본전으로 옮겼다가 하동 경천묘에 봉안하였다.

 

(7) 경순대왕 배위

가)경순왕과 왕건 사이의 여인들  (안렴사공파. 김주회 자료 제공. 2001/09/01)

경순왕은 왕위 재직시에 죽방부인(소원왕후 죽주박씨) 이 있었고, 935년 나라를 왕건에게 넘겨주면서 낙랑공주 (왕건의 셋째부인인 충주호족 유긍달의 딸 소생)를 둘째부인으로 맞이하였고, 이 사이에 낳은 딸은 5대경종의 첫 번째 부인 헌숙왕후 김씨이다.

그리고 왕건으로부터 또 한분 왕씨 (왕건의 후비인 평주 호족 박수경의 딸 소생)를 셋째부인으로 맞이하였다.

 

한편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 (신성왕태후)을 왕건에게 시집보내 왕건의 5번째 부인이 되어 이 사이에 안종을 낳았고, 안종은 8대임금 현종의 아버지이니 김억렴의 딸은 8대 현종의 할머니가 된다.

참고로 경순왕, 고려의 1대에서 5대까지와 8대왕의 재위기간과 소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56대 경순왕 김부 ?-978, 재위 927-935, 부인 3명, 자녀 9남3녀

--1대 태조 왕건 877-943, 재위 918.6-943.5 (25년) 부인 29명 자녀 25남9녀

--2대 혜종 왕무 912-945, 재위 943.5-945.9 (2년4월) 부인 4명, 자녀 2남3녀

--3대 정종 왕요 923-949, 재위 945.9-949.3 (3년6월) 부인 3명, 자녀 1남1녀

--4대 광종 왕소 925-975 재위 949.3-975.5 (26년2월) 부인 2명, 자녀 2남3녀

--5대 경종 왕주 975-981, 재위 975.5-981.7, (6년2월) 부인 5명, 자녀 1남

--(현종 아버지) 안종 왕욱 (? - 997)

--8대 현종 왕순 992-1031, 재위 1009.2-1031.2 (22년3월) 부인 13명, 자녀 5남8녀

 

1) 죽방부인  : 경순왕의 첫째부인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2001년 6월, 박영규>에서

죽방부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남아있지 않고, 왕건이 931년에 경주를 방문하고 돌아가면서 그녀에게 물품을 선물했다는 기록만 있다. 당시 신라 왕실의 관례로 봐서 그녀는 신라 왕족 출신일 것이다.

 

2)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 충주호족 유긍달의 딸, 왕건의 셋째부인, 낙랑공주 정종 광종의 어머니 <디지털한국학>에서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3비. 충주유씨(忠州劉氏). 태사 내사령(太師內史令)에 추증된 긍달(兢達)의 딸이다. 태조가 고려를 창건한 직후에 왕비로 맞아들였다. 비의 고향인 충주는 후백제 및 신라와 연결되는 교통상의 요충일 뿐만 아니라, 신라 5소경(小京)의 하나인 중원경(中原京)지역으로 신라 귀족이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였다. 태조는 이러한 지역의 호족가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임으로써 주변의 호족세력을 포섭하는 데 좀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태조와의 사이에 태자 태(泰)와 정종·광종·문원대왕 정(文元大王貞)·증통국사(證通國師)의 다섯 왕자와 낙랑(樂浪)·흥방(興芳) 두 공주를 두었다. 그 중 정종은 고려 제3대 왕이 되었고, 광종은 제4대 왕이 되었다.

그리고 장녀 낙랑공주는 귀순해온 신라의 경순왕에게 출가하였다. 사후에 신명순성왕태후로 추봉되었다. 광종은 즉위 2년(951)에 모후의 원당(願堂)으로 불일사(佛日寺)를 세웠고, 954년에는 숭선사(崇善寺)를 세워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惠宗朝 王位繼承亂의 新解釋(姜喜雄, 韓國學報 7, 1977). 〈鄭容淑〉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박영규>에서

신명순성왕후 유씨는 충주 사람으로 내사령 유긍달의 딸이다. 그녀는 태자 태, 정종, 광종, 문원대왕 정, 증통국사 등의 여섯 아들과 낙랑과 흥방 두 공주를 낳았다.

유씨는 다른 어떤 왕후보다도 많은 자식을 낳았고, 그녀 소생 중에 두 명이 왕이 되었으나 [고려사]는 그녀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고 있다. 또 유씨 소생 낙랑공주는 신라의 마지막 왕 김부 (제56대 경순왕) 와 혼인하여 왕건이 신라 세력을 포용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한다.

왕건이 유씨와 결혼한 시기는 920년 이전으로 추측된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태자 태의 출생연대가 정종과 광종이 두 살 터울임을 감안할 때 920년 경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씨는 900년을 전후해서 태어났을 것으로 짐작되며, 왕건이 왕이 된 이후에 처음 맞이한 왕비였던 만큼 당시의 세력 판도와 관련된 정략결혼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왕건의 후비 중에 충주 출신은 그녀 하나뿐이었는데, 이것은 곧 그녀의 아버지 유긍달이 충주를 대표하는 유력한 호족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녀의 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녀 소생 광종이 965년 봄에 숭선사를 창건하여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3) 낙랑공주(樂浪公主) : 태조왕건과 신명순성왕태후(유긍달의 녀)사이의 딸, 경순왕의 두 번째 부인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2001년 6월, 박영규>에서 낙랑공주는 고려 태조 왕건의 맏딸이며, 셋째 왕비 신명순성왕후 소생이다. 신명순성왕후는 충주의 호족 유긍달의 딸이다. 그녀 소생 왕자 중에 제3대 정종, 제4대 광종 등 두 명의 왕이 나왔다. 낙랑은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로 불리었으며, 혼인한 뒤로 낙랑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 신란궁 부인으로도 불리었다.

 

<디지털한국학>에서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맏딸. 본관은 개성(開城). 신라 경순왕의 처이다. 일명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라고도 하며, 혼인 전에는 안정숙의공주(安貞淑義公主)라 불렸다. 어머니는 충주지방의 호족 긍달(兢達)의 딸인 신명태후 유씨(神明太后劉氏)이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의하면 935년(태조 18) 11월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金傅)가 백관을 이끌고 고려에 항복하자, 태조는 자신의 맏딸인 낙랑공주를 경순왕의 아내로 삼게 했다고 한다.

태조에게는 9인의 공주가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낙랑공주와 성무부인 박씨(聖茂夫人朴氏) 소생의 공주를 김부와 혼인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종실과 혼인시켰다.

 

고려왕실에서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공주가 타성(他姓)과 혼인한 예는 극히 드물었는데, 김부에게만은 낙랑공주 등 2인의 공주를 혼인시켰다.

이는 신라를 들어 귀부(歸附)한 김부에 대한 감사의 뜻과 태조 자신이 신라왕실에서 신성태후(神成太后)를 맞아들임으로써, 이중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고려왕실의 신분을 신라왕실과 대등하게 상승시켜 통일된 한반도를 용이하게 지배할 수 있는 권위를 보장받기 위한 의도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高麗史, 高麗初期의 王室婚姻에 對하여(河炫綱, 梨大史苑 7, 1968)

高麗前期婚姻政策의 추이와 族內婚의 성립(鄭容淑, 韓國學報 37, 1984). 〈權悳永〉

 

4) 헌숙왕후 김씨  :경순왕과 낙랑공주 사이의 딸, 5대경종의 첫 번째 부인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박영규>에서

헌숙왕후 김씨는 신라 경순왕 김부의 딸이다. 935년 태조가 자신의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낸 바 있는데, 헌숙왕후는 이들 사이에서 출생한 듯하다.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975년 10월에 경순왕 김부의 관작을 높이고 공신 칭호를 준다. 또한 식읍은 종래의 것과 합쳐서 1만호로 늘려준다. 이것은 아주 특별한 배려인데, 이때에 헌숙왕후를 왕비로 받아들인 때문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비록 헌숙왕후가 경종의 제1비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와 가장 먼저 혼인한 부인은 아니다. 다만 늦게 혼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제1비로 삼은 것은 신라왕족과 고모인 낙랑공주에 대한 특별한 배려로 보인다.

신라왕족에게 이같은 특별한 배려를 한 것은 아마 정치적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신라왕족을 비롯한 경상도쪽 호족들은 광종의 공포정치에 희생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종 즉위 이후에 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했고, 경종은 이러한 신라계 호족들의 힘을 이용하여 충주 및 평산 호족들을 견제하려 했다.

그녀는 언제 죽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죽은 후 경종의 영릉에 합장되었다.

 

5) 셋째 부인 왕씨 (박수경의 딸)

태조왕건과 성무부인 박씨 (박수경의 딸) 사이의 딸, 경순왕의 세째 부인

<한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2001년 6월, 박영규>에서

경순왕의 셋째 부인 왕씨는 왕건의 후비 성무부인 박씨 소생이다. 성무부인은 평주의 호족 박수경의 딸이다. 박수경은 딸 셋을 왕건에게 시집 보냈는데 성무부인은 둘째 딸이다. 성무부인은 아들 넷과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딸이 바로 경순왕의 세 번째 부인이다. 그녀의 시호는 기록되지 않아 알 수 없다.

 

6)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경순왕 큰아버지 김억렴의 딸, 태조왕건의 5번째 부인, 8대현종의 할머니

<디지털한국학>에서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의 제5비. 경주김씨(慶州金氏). 잡간(#잡01干)이었던 억렴(億廉)의 딸이다.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하자, 태조는 이를 환영하면서 한편으로 신라왕실과의 결혼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의 경순왕은 큰아버지 억렴의 딸이 인품과 용모가 뛰어나 태조의 배필됨에 부족함이 없다고 추천하니 왕비로 삼았다.

 

태조는 이러한 결혼을 통하여 양 왕실이 결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신분혈통적 고귀성을 보장받고, 또 한편으로는 친신라계 호족을 포섭하는 데 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성왕후에 대하여는 신라왕족이 아니고 합주(陜州:지금의 합천)의 이씨(李氏)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태조와의 사이에 안종(安宗) 욱(郁)을 낳았고, 안종은 경종의 비 헌정왕후(獻貞王后)와 사통하여 현종을 낳았다.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 신성왕태후로 추봉하였으며, 능은 정릉(貞陵)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前期의 王室婚姻에 對하여(河炫綱, 梨大史苑 7, 1968). 〈鄭容淑〉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박영규>에서

신성왕후 김씨는 신라 왕족이며 경순왕의 큰 아버지 김억렴의 딸이다. 김씨가 왕건의 제5비가 된 것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935년 직후이므로 936년 초가 될 것이다.

935년 11월 신라 56대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뜻을 표시하자 왕건은 이에 대한 답례로 사신을 보냈다. 고려 사신은 경순왕에게 왕건이 신라 종실과의 혼사를 원한다는 사실을 전했고, 이에 경순왕은 자신의 사촌누이 김씨를 고려로 시집보낸다.

 

김씨 소생으로는 안종이 있는데, 그는 제5대왕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와 결혼하여 제8대왕 현종을 낳았다. 그녀의 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7) 낙랑공주에 대한 기록 (문온공파 김윤만 자료 제공. 2002.05. 02)

경순대왕 춘향대제에 즈음하여 경순대왕비이시고 우리 선안동김문의 친할머니이신 안정숙의 공주이며 신란궁부인이기도 하신 낙랑공주에 대한 사서의 기록.

 

가) 삼국사기 권 제11(신라본기 제11) 경순왕.

--태조는 (특히) 교외에 출영하여 라왕을 위로하고 (그에게) 宮東(궁동)의 甲第 (갑제 ; 으뜸가는 집) 一區(일구)를 내리고 장녀 낙랑공주로써 그의 아내를 삼았다.

--12월에 그(라왕 김부)를 봉하여 正承(政丞 = 정승)공을 삼으니 그 위는 태자위의 위에 있게 되고, 녹 일천석을 주고 (기타) 侍從(시종). 員將(원장)도 다 채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치어 경주라 하여 공(김부)의 식읍(봉읍)을 삼았다.

--처음 신라가 귀부할 때에 태조는 매우 기뻐하여 이미 厚禮(후례)로 대우하고 사람을 시켜 (라왕에게) 말하되 "지금 왕이 나라를 나에게 주니 그 주고 받음이 대단히 크다. 바라건대 우리 종실과 혼인을 맺어 舅甥(구생 ; 장인과 사위)의 의를 길이 하고 싶다"고 하였다.

 

나) 삼국유사 권 제1 낙랑국.

--또한 백제 온조왕의 말에는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옛날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소속되었던 현일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역시 이곳을 낙랑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고려에서도 또한 여기에 따라 낙랑군부인이라고 불렀다. 또 태조가 그 딸을 김부에게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라고 불렀다.

 

다) 삼국유사 권 제2 김부대왕.

--태조는 신라의 국서를 받자 太相(태상) 왕철을 보내서 맞게 했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로 돌아가니 香車寶馬(향차보마)가 삼십여리에 뻗치고 길은 사람으로 꽉 막히고, 구경꾼들이 담과 같이 늘어 섰다.

--태조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대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의 정승원)을 주고, 장녀 낙랑공주를 그의 아내로 삼았다. 왕이 자기 나라를 작별하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살았다 해서 이를 鸞鳥(난조)에 비유하여 공주의 칭호를 神鸞公主(신란공주)라고 고쳤으며, 諡號(시호)를 孝穆(효목)이라 했다.

 

라) 고려사 권 제2 「세가」 제2 09가6.(을미 18년, 935년)

--11월 갑오일에 신라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를 출발하였는데 인민들이 모두 그를 따라 나섰다.

--이 때에 향나무로 꾸민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리에 뻗쳐 길이 메었고 구경꾼들이 담벽처럼 늘어 섰으며 연도 주. 현들에서의 供饋(공궤)가 매우 성대하였다. 왕이 사절을 파견하여 그 일행을 위로하였다.

--계묘일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왔다. 왕이 의장병을 갖추고 교외로 나가서 그를 영접하였으며 태자에게 명하여 여러 대신들과 함께 그들을 호위하여 柳花宮(유화궁)으로 들어와서 사관을 정하게 했다.

--계축일에 왕이 정전에 나와서 백관을 모아놓고 의례를 갖추어 왕의 맏 딸

낙랑공주를 신라왕의 아내로 삼았다.

 

마) 고려사 권 제88 「열전」 제1 03나6.(신명순성왕태후 유씨)

--충주 사람이니 증태사 내사령 유긍달의 딸이다. 태자 왕태. 정종. 광종. 문원대왕. 정증통국사와 낙랑. 흥방 두 공주를 낳았다. 죽으니 시호를 신명순성태후라고 하였다.

 

바) 고려사 권 제91 「열전」 제4 19나7.(공주)

--태조. 딸이 아홉명이었다.

--(안정숙의공주) 신명왕태후 유씨의 소생이니 신라왕 김부가 고려조에 투항

(북역본, 원문은 入朝)했으므로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고 낙랑공주라 불렀으며, 또 신란궁부인이라고도 불렀다.

 

사) 고려사절요 제1권 태조신성대왕.(을미 18년)

--겨울 10월 임술에 신라왕 김부가 시랑 김봉휴를 보내어 들어와서 조회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섭시중. 왕철과 시랑 한헌옹 등을 보내어 회보하였다.

--11월 갑오에 신라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를 출발하니, 사대부와 서민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와 보마가 30여리에 뻗혔고, 길은 사람으로 꽉차서 막혔으며, 구경꾼들이 쭉 둘러서 있었다. 길가에 있는 주. 현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대하였고, 왕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계묘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으로 들어오니, 왕이 의장을 갖추어 교외에 나가서 맞이하여 위로하고, 둥궁과 여러 재신에게 명하여 그를 호위하고 들어와서 柳花宮(유화궁)에 머무르게 하였다.

--계축에 왕이 정전에 나아가 문무백관을 모으고 례를 갖추어 맏딸 낙랑공주를 신라왕에게 시집보내었다.(2002. 5. 1)

 

(8) 경순왕 자녀 (안렴사공파 김주회 자료제공. 2001. 09. 02)

 

(가) 자료1(문온공파 김윤만 자료 제공)

첫째 왕비는 죽방부인 죽주박씨로 슬하에 마의태자, 그리고 경주김씨 관조 영분공을 바롯한 3남1녀가 있었고 후비는 태조 왕건의 따님이시고 충주태사 유긍달 외손녀이신 낙랑공주 개성왕씨로 슬하에 5남2녀를 두었으며, 그리고 또 한분 육비께서는 1남을 두었다.

 

 (나) 자료2 (<김씨의 뿌리>)

  昭元王后 박씨 소생으로 -- 1남 김일,  2남 김굉(범공),  3남 김명종

  왕씨(낙랑공주) 소생으로 -- 4남 김은열,  5남 김석,  6남 김건,  7남 김선,  8남 김추

  순흥안씨 소생으로 -- 9남 김덕지 라고 정리되어 있고.

 

경순왕에게는 아홉 아들 이외에 세딸이 있었는데,

첫째딸은 제5대 경종의 왕비 獻肅夫人이 되었고,

둘째딸은 長水人 黃瓊(황경)의 부인이 되었으며,

셋째딸은 신라 시중 李今書의 부인이 되었다. 라고 되어 있다.

 

(다) 경순왕의 딸

월악산 국립공원내 미륵사지와 덕주사, 덕주산성, 덕주골 등지에는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과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산재해 있고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산 25-2에 있는 원주황산사지(原州黃山寺址) --- 전설에 의하면 경순왕의 공주가 이 절에 와서 부왕의 존상을 산정 석벽에 조각케 하였고, 그후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존상을 보고 환경한 후부터 산명을 대왕산(大王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귀한 분이 왔다 하여 동리 이름을 귀래(貴來)라고 하였다

 

그러나 관련 기록에는 경순왕의 딸 중에 덕주공주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덕주공주가 경순왕의 딸이 맞다면 윤만 종친의 의견대로 첫째부인 죽방부인의 3남 1녀중 1녀일 것이다. 덕주공주는 신라가 망하기 전의 신라공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순왕에게는 딸이 셋이 있었다고 하는데 덕주공주가 첫째부인 죽방부인 소생이라면 딸 셋 (경종왕비, 황경, 이금서)중 낙랑공주는 2녀(경종왕비,황경)를 낳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딸 하나 (이금서)는 어느 소생인지 불분명해지게 되고, 전체적으로 경순왕의 딸은 넷(덕주공주, 경종왕비, 황경, 이금서)이 된다.

 

경순왕의 아홉 아들이 어떻게 퍼져 나갔는가를 [김씨의뿌리] 책자에 나와있는데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라) 경순왕의 9아들

◈ 1남 김일

첫째아들 金鎰(김일)은 昭元王后 박씨 소생으로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자 이를 통분히 여겨 금강산에 들어가서 움막을 짓고 산 마의태자를 가리키는데, 기록에 보면 그에게는 입산 전에 낳은 金較(김교)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마의태자 김일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 부령(부안)김씨, 부여김씨, 통천김씨

 

마의태자와 관련해서는 KBS1TV 역사스페셜 홈페이지중 [2000.4.15 신라최후의 미스테리, 마의태자]를 보면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고, 인제군청 홈페이지를 보면 김부대왕각 동제, 김부리와 군량리(軍糧里), 김부리의 옥새바위, 마의태자 유적지비, 김부 대왕각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 2남 김굉

장남 김일과 함께 소원왕후 박씨 소생인 차남 金 (김굉)은 마의태자가 금강산에 들어가자 자기도 머리를 깍고 화엄종에 들어가 중이 되었는데, 법명은 梵空(범공)이었으며 나중에 해인사에 있었다.

<삼국유사>에는 이 범공이란 중이 마의태자의 막내아들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己未譜 같은 족보에 보면 범공은 둘째아들 김굉이었던 것으로 되어 있고, 사가에 전하는 족보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작가는 이 설을 택했다.

김굉은 중이 되기 전에 낳은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남의 이름은 金雲發(김운발)이고, 차남의 이름은 金雨發(김우발)이었다.

김굉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교하김씨, 울산김씨, 나주김씨, 안로김씨, 해주김씨

 

*(2남 김굉의 후손에서 울산김씨가 분관되었다는 것은 2005. 1. 21. 울산김씨 김강씨의 주장과 요청에 의하여 일단 삽입하였으나 사실 여부는 계속하여 조사 연구 중에 있음)

 

 

◈ 3남 김명종

3남 金鳴鍾(김명종) 또한 소원왕후 박씨 소생이다. 각간을 역임했으며 시호은 永芬公(영분공)인데 뒤에 경주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경주김씨의 시조는 3남 김명종과 4남 김은열 두 명인데, 이처럼 경주김씨의 시조를 두명으로 한 것은 김명종이 소원왕후 박씨 소생인 데 반해, 김은열은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 소생이었기 때문이다.

3남 김명종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강화김씨, 경주김씨, 계림김씨, 낙안김씨, ... <생략>

 

◈ 4남 김은열

4남 金殷說(김은열)은 왕씨 소생이다. 왕씨란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를 가리킨다. 大安君에 봉해졌으며, 김명종과 함께 경주김씨의 시조로서 가장 많은 후손을 남긴 사람이다.

김은열에게는 김태화, 김숙승, 김염(→김품언, 김심언) 세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서 나오는 손자들이 또 분파를 해나갔기 때문에 많은 성씨가 나오게 된다.

첫째아들 김태화는 김은열의 경주김씨를 이어받으나, 둘째아들 김숙승은 안동김씨(구안동)의 시조가 되며, 셋째아들 김염은 김해김씨(후김)의 시조가 되었다.

김염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아들 김품언은 수원김씨의 시조가 되고, 둘째아들 김심언은 영광김씨의 시조가 괴었다.

그런데 안동김씨에서 대구김씨, 사천김씨가 갈라져 나가게 되며, 수원김씨에서는 용담김씨, 용성김씨, 인동김씨, 한남김씨가 갈라져 나가게 된다.

김은열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를 가나다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너무 많아 생략>

 

◈ 5남 김석

5남 金錫(김석)은 왕씨 소생이다. 김석은 金重錫이라고도 불리며 의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의성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석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개성김씨, 고령김씨, 광주김씨, 설성김씨, 의성김씨, 적성김씨

 

◈ 6남 김건

6남 金鍵(김건) 역시 왕씨 소생이다. 강릉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강릉김씨에는 두 파가 있는데, 하나는 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을 시조로 하는 강릉김씨고, 다른 하나는 김건을 시조로 하는 강릉김씨다. 이 두파를 구분하기 위해 김건의 강릉김씨를 후강릉김씨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김건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강릉(후)김씨, 강서김씨, 청주김씨, 홍주김씨

 

◈ 7남 김선

7남 金繕(김선) 역시 왕씨 소생이다. 언양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언양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선이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담양김씨, 언양김씨, 예천김씨

 

◈ 8남 김추

8남 金錘(김추) 역시 왕씨 소생이다. 삼척군(三陟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삼척김씨의 선조가 되었다.

김추나 그 후손을 시조로 하는 김씨는 다음과 같다.---진주(晋州), 영월(寧越), 경산(慶山 ), 남원(南原), 길안(吉安), 옹진(甕津), 진위(振威), 춘양김씨(春陽金氏) 등 8개 분파(分派)가 있다.

 

◈ 9남 김덕지

9남 金德摯(김덕지)는 순흥안씨 소생이다. 학성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뒤에 울산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학성은 울산의 옛이름이다.

김덕지 계열은 울산김씨 하나밖에 없다. (이 내용은 사실 여부를 연구중에 있음)

 

  (*현재 상기 내용 중 2남인 김굉의 후손에서 울산김씨시조로 분관되었다는 울산김씨 김강씨의 주장(2005. 1. 21)에 의해 사실 여부를 조사 연구중에 있음)

 

(9) 경순대왕릉 발견 과정 소개 (2006. 5. 9. 발용(군) 제공)

 

지난 일요일, 홈페이지 게시판에 대종회에서 공시한바와 같이 敬順大王 春季陵享大祭가 연천군 장단면 고량포의 경순대왕릉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합니다.

저는 전날 선산에서 제초작업을 하다가 약간의 농약중독증세가 있어서 부듯이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올해는 꼭 참여하려했었는데 내년을 기약하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경순대왕 춘향대제에 참석했던 재구님과 용주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으니 그 아쉬움이 더합니다. 어제는 날씨가 너무 청명했었거든요...

 

이번 능제에서도 敬順大王陵誌를 설명하며, “실전되었던 경순대왕릉을 발견한 것은 후손인 안동인 김굉(金硡)이다.”라는 언급이 있었던가봅니다.

 

이번기회에 안동인(安東人) 김굉(金硡)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2002년 경순대왕 춘계능향대제 주최 측에서 배부한 敬順大王 陵誌를 보면

 

敬順大王 陵誌

 

신라 제56대 경순대왕의 능은 경기도 장단면 남8리 (현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리) 聖居山 줄기의 花藏山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화장산(花藏山)은 동쪽에는 연천강과 월봉산(月峰山이) 있고, 서쪽에는 성거산(聖居山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임진강이 흐르고, 북쪽에는 金陵坡(금릉파)가 있는 지역으로 성거산의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 흘러내린 곳에 자리 잡고 있다.

 

地師들의 말에 의하면 일명 花藏龍(화장룡)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八百蓮花格(팔백연화격)이요 金鷄抱卵形局(금계포란형국)으로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고려경종3년 (서기 978) 음력 4월4일에 대왕께서 승하하시자, 이곳에 大王禮로서 因山하여 陵을 조성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실전되었던 것을 조선조 영조3년 (서기 1727) 에 후손(안동인) 金硡(김굉)이 [敬順大王藏之] 라는 6자가 각자된 誌石을 발견하고 영조 23년 (서기 1747)에 영역을 찾아내어 영조대왕께 修治疏(수치소)를 올렸다.

 

영조대왕께서는 金聖運(강원,충청감사), 金應豪(僉正) 등으로 하여금 陵墓(능묘)를 봉축하게 하고, 장단부사 沈鳳徵(심봉징)으로 하여금 致祭(치제)하게 하였으며, 그로부터 장단부에서는 매년 3월1일과 10월1일에 춘추享祀(향사)를 올리고, 官軍으로 하여금 수호하도록 하였다.

 

위 기록을 근거로 조선왕조실록을 영조조를 검색하면 金硡(김굉)이란 인물이 십여 곳에서 검색이 됩니다. 그런데 영조실록에 나오는 金硡(김굉)은 慶州人으로 영조(英祖) 11년 (을묘, 1735년), 증광시(增廣試) 병과32(丙科32)에 합격하신 분입니다. * 아래 항용님께서 올려주신 자료 <동방급제자(40)-김가경(제), 김광국(군)>의 김굉(金硡) 참조.

 

그밖에 경순왕으로 검색한 왕조실록 영조때의 기록을 보면

영조 64권 22년 10월 14일 (병자) 004 / 동지 김응호가 신라 경순왕의 지석과 석물이 장단에서 나와 이를 정비하는 일로 아뢰다

 

동지(同知) 김응호(金應豪) 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들의 선조인 신라 경순왕의 능묘를 오래 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지금 장단(長湍)에서 그 지석(誌石) 및 신도비(神道碑)가 나왔으나, 왕묘에 대한 일은 사삿집의 무덤과는 그 사례가 달라서 벌목을 금지하는 절차와 석물을 세우고 수호자를 두는 일은 조정의 지시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혹시라도 조정에서 사정을 참작하여 규정을 허락하여 준다면, 위로는 전대(前代)를 추념하는 성주(聖主)의 뜻을 드러낼 수 있고, 아래로는 추원 보본(追遠報本)하려는 신들의 정성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마땅히 대신들에게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원전】 43 집 226 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역사-전사(前史) / *가족(家族) / *풍속-예속(禮俗)

 

영조 65권 23년 4월 20일 (기묘) 003 / 신라 경순왕의 묘를 수치하도록 명하다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묘(墓)를 수치(修治)하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김일호(金一豪) 등의 비지(碑誌) 인본(印本)을 보건대, 그것이 경순왕의 묘임을 의심할 것이 없다. 1천 년 가까이 된 후 오늘날에 찾게 되었으니 기이하다고 말할 만하다. 전대의 다른 능(陵)과 비교하여 사면(事面)이 더욱 중대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관심을 가지고 수치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미 치제(致祭)하였으니 비석(碑石)을 세울 때에 역군(役軍) 또한 돌보아 돕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보다 앞서 그의 자손이 진소하였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원전】 43 집 245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정론-정론(政論) / *재정-역(役) / *역사-전사(前史)

 

영조 90권 33년 7월 21일 (신해) 003 / 승지를 보내 신라 경순왕의 묘에 치제케 하다

승지를 보내어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묘에 치제(致祭)하였다. 묘의 소재를 몰랐었는데, 후예(後裔) 김효대(金孝大) 등이 장단(長湍)에서 찾아 개봉(改封)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듣고 이런 명령이 있었다.

 

【원전】 43 집 657 면

【분류】 *역사-전사(前史) / *풍속-예속(禮俗)

 

다음, 2002년 능제당시 주회님께서 수안김씨 대종회장 김수선씨로부터 전해들었다는 "김굉(金硡)은 좌정승 김사형의 8대손이며 영의정 김수동의 4대손이다." 라는 기록을 바탕으로 족보의 기록을 찾아보았습니다.   

 

족보기록

士衡(사형)-陞(승)-宗淑(종숙)-碔(무)-義錫(의석)-淪(윤)-應天(응천)-孝祥(효상)-硡(굉)

 

硡(굉)

忌十二月十七日 墓長湍郡津東面哨里城村酉坐

敬順王陵失傳久遠始尋塋域修治守護自公以始

 

족보기록으로 보면

김굉(金硡)은 익원공 휘 사형의 8대손이며 동추공(同樞公) 휘 종숙의 5대손입니다.

장단군 진동면 초리에 묘가 있으며, 경순왕릉이 실전 된지 오래 되었는데 무덤을 찾고 수치, 수호한 것이 공으로부터이다.

 

위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1727년 영조 3년 후손 안동인 김굉이 실전된 경순왕의 지석을 발견하다.

-1746년 영조 22년 동지(同知) 김응호(金應豪)가 신도비를 발견하다.

-1747년 영조 23년 왕이 경순왕(敬順王)의 묘(墓)를 수치(修治)하도록 명하다.

-1757년 영조 33년 왕이 경순왕의 묘에 제물과 제문을 내리다.

 

김굉(金硡)

 

생몰년미상(조선중기. 영조대). 본관 안동. 조선개국공신 익원공 김사형의 8대손이다. 실전 된지 오래된 경순왕릉의 지석을 발견하여 왕릉을 찾는데 단초를 제공하였다. 경순왕릉과 인접한 장단군 진동면에 묘가 있다.

 

<경순대왕 생전 유언문> (2008. 4. 29. 항용(제) 제공)

 

 *경순대왕 생존 유언문이 들어 있는 곳

 

1. 金石記 : 1)新羅 敬順王表(경기도 장단 고랑포리)

                 2)新羅敬順王妃 朴氏表(강원도 금화 三甲山)

2. 문헌 : <新羅三姓淵源譜> (국립중앙도서관. 古 202-8. 44쪽)

 

  <삼성 연원보 내의 글>

 

 

 

<번역문> (김항용 역)

 경순왕이 이르기를,

 “내가 죽으면 용이 되어 兄山의 허리를 잘라 경주 백성들이 안심하고 복을 누리게 하겠다”

 라고 하였다. 그 말씀대로 그의 몸은 과연 용이 되었다.

 한편 兄山의 물가에서 한 달이나 머물러 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용을 볼 수가 없었다. 이에 한 과부의 아들이 거문고(주1)를 켜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는데 그 아이가

  “그곳(형산 물가)에 가보겠습니다”

라고 하자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고 하니 아들은 다시,

  “가서 보고 돌아 오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어머니는 아이를 꾸짖으면서,

  “세상에 보기 드문 그 큰 뱀을 무엇 때문에 가보려 하느냐”

고 하자 아들은 다시,

  “어머니, 염려하지 마세요, 곧 돌아 오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곧 (물가에) 가서 용이 무슨 뱀으로 보이는지 돌아보고 나서는 발을 구르며 돌아왔다. 이 때 용의 소리가 세 번 울리며 風雲이 일어나더니 그 뱀이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면서 兄山의 허리를 자르고 동해 입구 형산의 한 바위에 ‘허리를 자른 자는 金傅’라고 써 놓았다. 또 그 왼쪽에는 ‘거문고를 잘 켠 功이 있어 땅 물려줌을 허락하노라’라고 새겼다. (이는 용이) 東海 十二島에 날아드는 강도(주2)를 소탕하고 큰 바위 속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上帝께서 용에게 이르기를,

 

 “朝鮮은 東海의 입구이므로 치지 말고 속히 물러가서 하늘의 안개를 없앨 것이며, 옛 것은 가고 새것이 오도록 하라. 兄山의 은혜를 감사하게 여겨 형산 위쪽에 한 칸의 제당(祭堂)을 짓고 매년 五月 端午日에 모든 백성들이 가뭄과 장마의 재앙이 (오지 않도록) 봉축하게 하라. (그러면) 경순왕이 存位時에 날씨의 快晴과 가뭄의 祈雨祭를 매년 축원한 것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

 라고 하였다.  

 

출전 :  <新羅三姓淵源譜> 44쪽.

 

주1. 거문고 : 왕은 거문고를 즐겨 치심

주2. 東海 十二島에 날아드는 강도 : 동해 12섬에 왜구가 자주 침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