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대안군(大安君 諱 殷說) 소개

 

 

<대안군 영단>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포리의 경순대왕릉 가는 길 입구 우측에 대안군 은열공 영단이 있다. '령단봉안 기념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보국대안군은 관조시며 명현조시고 태사공은 파조 1세시며 명현이신데 奉祀(봉사)함에 있어 고려조에는 봉사했었는지 모르나 조선조이래 于今(우금)까지 봉사한 사적이 없다. 시원조께 숭경지성이 희박하여 근본을 망각한 得罪罔極(득죄망극)함을 覺醒(각성)하여 령단 봉안하자는 발의에 후손들의 열성으로 웅대한 령단이 謹竪(근수)되고 辛巳(신사) 10월 20일에 역사적인 初有(초유)의 奉安祭(봉안제)를 봉행하였고 금후 매년 음 3월 4일에 享祀(향사)할 것이다. 此(차)를 기념하기 위하여 입석을 하고 (玄玄 : 자)에 헌성금을 협조한 후손들의 명단을 刻記(각기)하여 후세에 계승하고자 하는 바이다.

 

 서기 2002년 임오 3월 일

경주김씨 태사공파종회 건립

 

그리고 영단지 상단 중앙에는 「高麗輔國大安君侍中侍郞 平章事慶州金公諱殷說國大夫人慶州崔氏 之靈壇(고려보국대안군시중시랑 평장사경주김공휘은열 비국대부인경주최씨 지령단)」과「高麗國文純公檢校太師 慶州金公諱仁琯 配小國夫人利川徐氏 之靈壇(고려국문순공검교태사 경주김공휘인관 배소국부인이천서씨 지령단)」비갈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영단 비갈 좌우측에는 龜趺部(귀부부)에 용의 이수를 한 「高麗輔國大安君侍中侍郞 平章事慶州金公諱殷說 之靈壇碑(고려보국대안군시중시랑 평장사경주김공휘은열 지령단비)」와「高麗國文純公檢校 太師慶州金公諱仁琯 之靈壇碑(고려국문순공검교 태사경주김공휘인관 지령단비)」비석이 석양과 망주석 장명등과 함께 곡장에 둘러 쌓여 조성되어 있다.

 

<영단>

 

1)대안군 묘지명 탁본 (2002. 2. 26. 항용(제). 제공. 규장각 소장)

 

<대안군 묘지명 탁본>

 

*이 탁본은 대안군(휘 은열)의 묘지명 탁본으로 규장각(규장각 도서번호-奎 28013)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묘지명은 1784년(정조 8)에 幽誌를 발견하고 改封하였으며, 1849년(헌종 15) 후손인 金鼎集이 開城留守로 부임하여 墓碑를 세웠다고 한다. 2매의 拓本은 공히 92.3 x 31.5 cm.(大小不同)의 크기이다. 제1매는 [高麗平章事輔國大安君金公殷說墓]라는 題號를 탁본한 것이고  제2매는 본문을 탁본한 것이다.

 

2) <대안군 김은열 묘지명> 소개

1. 소재 : 개성에서 북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종암 밑 오룡산 남쪽 기슭 임좌- 조선 정조 8년 (1784, 갑진)에 발견, 다시 묻음

2. 연대 : 광종19년 (무진, 968) ※추정

3.<참고문헌>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김연옥 고려시대 경주김씨의 가계 (숙대사론 11,12합 1982)

-경주김씨세적보 (함흥경주김씨파보소 1925)

-경주김씨족보(경기 고양 1985)

 

4. 묘지명과 관련한 각 참고자료 기술 내용

 

1)고려묘지명집성 (1993, 김용선, 한림대)

김은열 묘지명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아들 시중시랑이며 고려때 평장사이신 휘 은열로서 무진년 3월 초 4일(기축일)에 세상을 떠나시어 성 북쪽 10리 바깥 종암아래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임좌언덕에 안장하였으며 형님은 일과 황과 명종이요 아우는 중석과 건과 선과 종이며 아들은 강릉군 태화이다.

 

2) 김용선, [신자료 고려묘지명 17점] (역사학보27 1988)

이 묘지는 조선정조8년 (1784, 갑진)에 발견되었다. 그런데 명문은 매우 간략하며, 고려시대의 다른 묘지명의 일반적인 서술형태와도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것이 실제로 주인공인 김은열이 사망한 직후, 즉 고려초기에 제작된 것인가 하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묘지와 함께 의종4년 (1150)에 제작된 김경보(*경주김씨)의 묘지명도 함께 발견되었으므로, 이것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단정할 만한 특별한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에 따라 명문에 나오는 김은열의 졸년, 즉 술진년을 고려 초기에서 찾아보면 광종19년 (968)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 묘지명이 작성된 연대도 일단 광종19년으로 추정해 두기로 한다.

 

명문에서 보듯이 김은열은 신라 경순왕의 8자중 제4자이며, 한편으로 고려태조 왕건의 외손자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전혀 나오지 않으며, 그의 자로 소개된 강릉군 김태화도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그의 자손들은 이후 번창해 갔는데 특히 무인정권 당시 활약하던 김봉모, 최이의 사위 김약선, 충선왕대의 재산 김혼 등을 유명한 인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김은열의 묘소에서 정북서 5보 되는 곳에서 또 하나의 묘지가 출토되었는데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생 략> 이 명문은 경순왕의 제2자인 김황의 묘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김황의 생몰년대나 묘지명 작성연대를 밝혀주는 기록이 전혀 없고, 명문의 내용 또한 일반적인 묘지의 기술형식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묘지도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정도로 소개를 해두고자 한다.

  

3)안동김씨 익원공파보

대안군 휘은열 :은열공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이시며 벼슬은 공부시랑 평장사를 지내셨고 대안군에 봉해졌다. 고려 현종 19년 서기 1028년 3월 4일 己丑에 졸하니 묘는 개성에서 북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종암 밑 오룡산 남쪽 기슭 임좌에 모셨으나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이조 영조 8년 서기 1784년 갑진에 황가 사람의 투장으로 인하여 誌石이 노출되고 많은 부장품이 현출되어 다시 치분하고  헌종 15년 기유 서기 1849년에 후손인 유수 金鼎集이 비문을 지어 비를 세우고 안동김씨와 경주김씨 두 종중에서 매년 기일에 제사를 지냈으나 지금은 국토가 분단되어 성묘의 길이 없고 수백만의 후손들이 오직 마음으로 추모할 따름이다.

 

자는 태화, 계령, 숙승, 렴, 갈이다.

 

4)규장각 소장 金殷說墓碑銘

- 奎 28013

- 金鼎集 撰, 1849년(헌종 15).

- 2매, 拓本, 92.3 x 31.5 cm.(大小不同)

고려초기의 인물인 金殷說의 墓碑銘을 탁본한 것.

제1매는 [高麗平章事輔國大安君金公殷說墓]라는 題號를 탁본한 것이고

제2매는 본문을 탁본한 것이다.

 

본문의 내용에 따르면 1784년(정조 8)에 幽誌를 발견하고 改封하였으며, 1849년(헌종 15) 후손인 鼎集이 開城留守로 부임하여 墓碑를 세웠다고 함(윤경진)

 

5)경주김씨 홈페이지

고려평장사 보국대안군 김공은열묘지명(高麗平章事 輔國大安君 金公殷說墓誌銘)

정조임금 8년(갑진년)에 시중공(=김은열)의 지석과 평장사공(=김황) 소보공(=김경보) 두 분의 지석을 우연히 발견하였으니 대개 남의 산을 차지하려는 사람들이 지석을 파묻어 숨겼더니 지금에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으므로 여러 일가들이 모여서 그 지석의 글을 읽어보고 서로 의혹이 풀렸다고 하며 말하기를 "이 지석 때문에 족보의 미비했던 계통을 참고 할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하니 이것은 조상의 혼령의 도움으로서 자손의 다행인 것이 아니겠는가

나(=김사목)의 증고부 효간공께서 족보의 일을 시작하던 것을 부친께서 계속 물려주셨으니 내가 어찌 두려워만 하여서 사양하겠는가.

그 지석 한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아들 시중시랑이며 고려때 평장사이신 휘은열로서 무진년 3월 초 4일(기축일)에 세상을 떠나시어 성 북쪽 10리 바깥 종암아래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임좌언덕에 안장하였으며 형님은 일과 황과 명종이요 아우는 중석과 건과 선과 종이며 아들은 강릉군 태화"

라고 하였다.

 

다음에 그 자손들이 자세하게 참고 할 뜻이 있어 다시 묘소 위로부터 바로 북쪽 다섯걸음 거리에서 지석을 캐어내니 그 한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고려평장사 김황을 아우 시중시랑 김은열의 묘소에 이어서 안장하였으며 경순왕의 둘째아들과 넷째아들이 고려태조의 외손이며 공신으로서 특별한 장지를 성 북쪽 10리 오룡산 남쪽기슭 30리 주위를 주었다."

고 하였다.

 

그 한쪽면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7세손 검교 태자 소보 김경보로서 부친은 공부시랑 휘한공이요, 조부는 추봉공부상서 휘계삼이요, 외조부는 예부원외랑 김태기이며,

공(=김경보)의 나이 82세로 대금나라 황룡 10년(경오년) 4월 17일(계해일)에 본댁에서 세상을 떠나시어 7월 17일(을유일)로써 오룡산에 안장하였으며 아들은 유림랑 감찰어사 비어대 휘작문이요, 맏사위는 정주사 시전중 내금사 윤유연이요, 둘째 사위는 전옥서승 유면이다."

라고 하였다.

 

또는 시중공(=김은열) 바로 북쪽 다섯걸음 거리에서 지석 1개를 캐내니, 그 지문에 기록되어 있기를

"신라 경순왕 김부의 넷째아들 평장사 보국대안군 은열의 묘이니 성 북쪽 10리 바깥 오룡산 남쪽기슭 쌍룡합곡 금계포란형(금닭이 알을 안은 형국)임좌병향이다."

라고 하였으니 앞의 지석 두면의 뒤에 얻은 지석 1개로써 증거한다면 시중시랑(=김은열)이 경순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으며 그 형제 차례와 그 아들의 벼슬과 이름도 밝혀졌으며 ,

 

다음 한쪽으로 본다면 공부상서공(=김계삼)의 위와 강릉군(=김태화)의 아래에 다시 2대수가 의당 있어야 하겠는데 상서공의 휘자도 족보와는 같지 아니하며 또는 모든 지석에 작호가 족보와는 서로 어긋나니 대개 족보의 미비한 것은 의심할 수 있으되 지석의 문자는 실로 믿을 만한 일이므로 이제 바로 족보의 기록을 고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상서공 위 2대수가 증거할 문헌이 없고 경순왕과 평장사공 휘(인위)의 연대가 너무 가까운 것이 더욱 의심나는 것은 역시 모두 고칠 수 없으니 차라리 따로이 기록을 하여서 후대를 기다려야 하겠으니 여기에서는 감히 경순왕 이하 세대차례를 가로로 쓰고 아울러 그 자손을 기록하여 한가지 예규를 만들어 미비한 족보 옛날기록 아래에 붙인 다음에야 지석과 족보가 서로 증거되어 신중성이 있을 것이니 의심과 신빈성이 각각 전해지면서 중복되는 혐의가 없을 것이니 여러 일가의 중론을 따른 것이로되 다만 옛날 기록이나 또는 어떤 족보에는 시중시랑(=김은열) 성과 이름위에 삼녀라는 글자가 있고 또는 공부상서(=김계삼) 휘자 위에 자를 썼으니 이것은 옳지 않으나 아직 옛 것대로 보존하였다.

 

지금에 지석을 씻어서 그 내용을 모두 드러낸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후손 사목은 삼가 기록함.

 

시중공(=김은열) 묘소 오른쪽에 또 큼직한 하나의 무덤이 있으니 그 둘러 쌓은 담의 남아있는 흔적을 보건데 뚜렷하게 특이한 무덤으로서 한 구역내에 똑같은 형체로써 그 무덤에서 출토된 기물은 모두 부녀자의 화장기구이므로 그의 부인인 것 같으나 지석이 없으므로 확정할 수 없어서 아직 부록으로 뒤에 증거할 자료로 하였다.

 

가보를 살펴본다면 경순왕과 평장사공(=김황) 사이에 누락된 대수가 있다고 종중의 전해오는 말이 있으나 그 사이에 몇대인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지금에 청주족보에는 공부시랑 은열이 경순왕의 셋째아들로서 5대를 전하여 휘영고에 이르러서 직접 평장사로 전해 이은 차례를 삼았으니 어떤 근거에서 인지는 알 수 없으며 경순왕 이전 세대가 벌써 사기와 서로 부합되니 이 5대라는 것이 착오될 이치가 없는데  다만 의심할 곳은 경순왕이 본래에 고려태조와 같은 세대에서 경종임금 3년(무인년)에 상사났으며 평장사공(=김황)이 현종 15년(갑자년)에 벼슬을 그만 두었더니 지금의 평장사공이 벼슬 그만둔 것이 비록 70년대인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대개 벼슬 그만둔 것이 늙은 다음의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갑자년으로부터 70년을 거슬러 올라 간다면 광종 67년 을묘년 병진년 간에 출생하였을 것이며 경종은 광종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경순왕의 상사난 해에 평장사공의 나이 벌써 이십사오세가 되었을 것이니 비록 소목(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맨 위 첫째 중앙에 시조를 모시고 왼쪽은 소=2,4,6,8, 오른쪽 목=3,5,9])을 따져서 부자지간이거나 혹은 조손간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세대에 혹 나이 8~90세 45대 손자를 보게도 되나  여기에서 그렇지 않은 것은 족보에서 벌써 낙랑공주가 낳은 은열의 출생이 그 다음해인 정유, 무술년간 이라면 이때로부터 평장사공의 출생년도(을묘,병진년)가 불과 18,9년이니 그간에 어찌 45대가 될 수 있겠느냐

또는 족보 중에서 여러 일가의 본관의 갈리는 데에서 안산김씨에서는 이르기를 경순왕 12세손 계림군 김균의 후손으로서 비로소 안산김씨로 본을 삼았다는 것이 벌써 고려때에 있었으니 우리 김씨는 본래에 경주로 본관을 하였으면 이 안산김씨가 김균의 후손이라 한 것은 사실 증거가 없으며 12세라고 이른 것은 반드시 증거가 있은 다음에 썼을 것이니 경순왕과 평장사공 사이에 벌써 이 5세대가 있었다면 어찌 17세라고 아니하고 12세라고 하였겠느냐. 지금에 계림군 김균으로부터 평장사공에 이르까지 바로 만 12대수라고 한 것은 앞에 말한 소목과 조손이라는 말이 이에 가깝지 않느냐.

 

지금 평장사공에서 경순왕까지의 연대가 이렇게 가까운 것을 알만한데 후손들이 알지 못하고 연대가 멀다고 하며 대수가 탈락되었다는 전해 내려오는 말이 이와 같으니 문서에 증거할 것이 없어서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또는 고려가 열전을 참고하건데 명종 때에 영고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등성 김인경의 부친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연대가 어긋나므로 혹시 두사람의 이름이 같은 것이라고 의심할 만하다.

 

족보계통은 중대한 일이므로 애초에 신중하여야 하겠으되 족보에 기록된 것이 이렇게 모순되는 것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으며 나중에 족질 휘여의 가승(한 집안의 기록)을 보건데 휘순웅이 실로 평장사공의 부친이라고 하였고 그 주석에 이르기를 순웅의 아들 인위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여러 일가가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우리집에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석과 아울러 기록해 놓으니 평장사공 위에 이런 장군공의 1대수가 있다면 여기로부터 경순왕년대에 소급해보면 더욱 가까운 것이니 여기에 5대수라는 것은 아직 부록으로 하여서 후일에 다시 참고할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평장사공 23세손 덕운은 삼가 기록함.

 

임진년 족보를 살피건대 경순왕 이하 족보 탈락한 것은 다만 여러 기록에 어긋나는 말을 증거로 의문점 그대로 남겨 두었는데 정조임금 갑진년에 시중공(=김은열) 소보공(=김경보)의 지석을 발견하여 비로소 선대계통을 알았으므로 지금에 구족보의 기록을 수정하였으며 경헌공은 추가로 기록하며 구족보에서 일가 덕운이 기록한 것을 작은 글씨 두 줄로 아래에 써서 참고케 하였다.

 

3) 대안군 묘소 실제 위치 (2003. 10. 7. 윤만(문) 제공)

자료 출처 : 김녕김씨선원세계표(금녕군직계)

--大安君(대안군) 戊辰(무진) 3월 4일.

--고려 태조의 제일공주인 낙랑공주 소생 첫째 아드님으로 대안군의 봉군과 내사시랑 평장사를 지냈다.

--墓(묘)는 개성군 영남면 용흥리 화곡 오룡산 남쪽기슭인데 1784년에 공의 지석이 발견되어 공의 친족 관계가 분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