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8. <척약재 학음집> 소개

 

  1) 사진 자료 소개

   (1)초간집

 

   

    (2) <재간본>

<재간본>(조선 고종21년. 서기 1884년. 포천 종손가에서 재간)

 

     (3) <3간본>

 

     (4) <4간본>

 

  <4간본>(1997년. 울산대학교 출판부에서 한글번역본 출간)

 

    (5)<정신문화원 본>

  

  <척약재 학음집. 표지 및 내부 사진>(2003. 5. 20. 태서(익) 제공. 출전:한국정신문화 연구원)

 

    (6)  <석판 미농지본 소개> (2006. 3. 28. 항용(제) 제공)

    * 입수일 : 2006. 1. 23.    *입수처 : 대구 고서점.  *입수자 : 김항용

    *내용 : 석판본, 미농지 인쇄. 1884년 이후 전라도에서 출판한 것으로 추정

    

 

 

 

 

 

 

 

 2) <척약재학음집> (2003. 6. 11. 김주회(안) 제공)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영인본으로 발간하고 있는 <한국문집총간>은 2001.12월 현재 280권이 발간되고 있습니다. <한국문집총간 색인>은 1993년 1권을 시작으로 1997년 현재 5권까지 발간되어 총간 32집까지 색인되어 있고, <한국문집총간 해제>도 2001.12월 현재 5권까지 발간되고 있습니다.

 

해제 1권에 <척약재학음집>이 소개되어 있어 타이핑해 보았습니다.

 

■ 한국문집총간 해제 1권

p74

26. 척약재학음집

본집 : 척약재선생학음집. 목판본. 1400년刊. 12행17자. 18.8×14.1(cm). 상하하향흑어미. 조성목씨 소장본 (보물 1004호)

외집 : 척약재유고외집(척약재집유고외집). 활자본. 1884년刊. 10행20자. 20.6×14.8(cm). 국립중앙도서관장본(한45-가-206)

 

⊙ 저자

김구용 : 1338년(고려 충숙왕복위7)-1384년(우왕10). 초명은 齊閔(제민). 자는 敬之(경지). 호는  若齋(척약재). 본관은 안동. 정몽주,이숭인,이색 등과 교유

 

⊙ 가계

承澤(승택, 중서평장사)---昴(묘, 상락군 +여흥민씨, 찬성사 思平의 녀)---九容(구용, +남양홍씨, 예의정랑 義元의 녀)---明善(판결사), 明理(부사), 明允(승지) <世系行事要略(김명리撰) 및 만성대동보에 의함>

 

⊙ 행력

1세(충숙왕복위7, 1338, 무인, 지원4) ---12월 7일 태어나다

16세(공민왕2, 1353, 계사, 지정13)--- 외가에서 자라며 외조부 閔思平에게 수학하다. 宋天奉이 감시한 진사시에 합격하다. 친시에 장원하여 산원직에 제수되다.

18세(공민왕4, 1355, 을미, 지정15)---과거에 합격하다. 덕령부주부가 되다.

25세(공민왕11, 1362, 임인, 지정22)---2월 안동부사를 수행하여 영호루에 오르다.

26세(공민왕12, 1363, 계묘, 지정23)---정언을 거쳐 헌납이 되다.

30세(공민왕16, 1367, 정미, 지정27)---국학이 중건되자 정몽주,박상충 등과 함께 뽑혀 학관을 겸하다.

31세(공민왕17, 1368, 무신, 홍무1)--- 전교부령이 되다. 弟 제안이 신돈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죽임을 당하다.

33세(공민왕19, 1370, 경술, 홍무3)---외조부 閔思平의 문집을 편찬 간행하다.

34세(공민왕20, 1371, 신해, 홍무4)---민부의랑 겸성균직강이 되다. 齋號를  若(척약)이라 짓고, 諸家에게 說 등을 받다. 9월, 李삼수변빼고澹과 함께 삼일포를 유람하며 사선정 柱上에 제하다.

35세(공민왕21, 1372, 이자, 홍무5)---총부의랑이 되다. 8월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가다. 겨울 전교령에 제수되다.

36세(공민왕22, 1373, 계축, 홍무6)---7월 귀국하다.

38세(우왕1, 1375, 을묘, 홍무8)---삼사좌윤이 되다. 7월 북원의 사신을 물리칠 것을 주장하여 이인임에 의해 배척, 죽주에 유배되다. 고향 여흥에 이배되다.. 7년간 한거하면서 여강어우 라 자호하고 당호를 육우 라 짓다.

44세(우왕7, 1381, 신유, 홍무14)---나라에서 그 풍의를 숭상하여 좌사의대부를 제수하다.

45세(우왕8, 1382, 임술, 홍무15)---봄 성균대사성이 되다. 이어 판전교시사가 되다.

47세(우왕10, 1384, 갑자, 홍무17)---1월 15일 행례사로서 요동에 파견되었으나 私交를 했다는 죄목으로 대리위(운남)에 유배되다. 7월 11일 유배도중 사천 노주의 객사에서 병으로 졸하다.

(정종2, 1400, 경진, 건문2)---아들 明理가 문집을 간행하다.

(고종21, 1884, 갑신, 광서10)---17세손 相元이 문집을 개간하다.

(1964, 갑신)---영천에서 문집이 개간되다.

 

<世系行事要略(김명리 찬) 등에 의함>

 

⊙ 편찬 및 간행

저자의 시문은 아들 ★明理가 편차하여 1400년 진양목사로 나갔을 때 관찰사 趙,王+業의 협조를 얻어 간행하였다.

 

<초간본>. 초간본은 2권2책의 목판본으로서 저자의 유고를 모은 본집과 저자와 교유한 諸人들의 시문을 모은 외집으로 편차되어 있으며, 序,계 및 世系,行籍은 본집 권수에 수록되어 있다.

이 본은 현재 상주 ★조성목씨 소장본(보물 1004호)이 전하는데, 이는 후쇄본으로서 본집 卷首尾와 외집이 낙장되어 있고, 자획이 많이 완결되어 있다.

그후 17세손 ★相元이 1884년경 그의 종숙 ★秉湜 등과 함께 문진을 개간하였다.

 

<중간본>이 중간본은 초간본을 저본으로 한 2권2책의 활자본으로서 ★정환요 및 17세손 ★相元이 쓴 序와 ★허전이 쓴 跋이 권수에 추가되었고, <여지승람> 등의 문헌과 對校한 小註가 붙어 있다. 이 본은 현재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데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64년에는 영천 약은정에서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여 문집을 개간하였다.

 

<삼간본> 이 본은 3권1책의 石印本으로서 현재 성균관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400년刊 초간본으로서 ★조성목씨 소장본인데, 낙장된 卷首의 序, 世系行事要略, 券上의 제1∼22板 및 외집은 중간본인 국립중앙도서관본(한45-가206)으로 대치하였다. 券下의 제37∼41板은행수의 차이로 중간본에서 補寫하여 대치하였다.

<세계행사요략(★金明理 찬), 서(★정환요,17세손 ★相元 찬)등에 의함>

 

⊙ 저본의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본집 상하 2권과 외집 합 2책으로 되어 있으며, 본집은 모두 저자의 詩이고 외집은 부록이다.

권수에는 1399년 ★하륜이 지은 序, 1386년 ★정도전이 지은 序, ★이색이 지은 跋과 아들 ★明理가 지은 세계행사요략이 실려 있다.

본집은 모두 詩로서, 고시, 근체시가 두루 섞여 있으며 주로 창작시기를 중심으로 편차되어 있다. 상권에는 총 207題가 실려 있는데, 1371년 강릉도 안렴사 재임시 지은 시와 그 이듬해 서장관으로 중국에 갔을 때 지은 시들이 실려 있다. 하권에는 모두 205題가 실려 있는데, 주로 후반기 작품들로 보이며, 특히 1384년 중국에 갔다가 유배도중 卒하기까지 지은 시가 포함되어 있다.

외집에는 저자와 교유한 諸人의 작품이 실려 있다. 齋號인 척약재에 대해 ★백문보 등이 지어준 說,贊,箴,銘과 강릉도 안렴사로 나갔을 때 제인이 지어준 送詩 그리고 ★이색이 지은 送序가 실려 있다. 送詩는 많은 부분이 마모되어 있으며, ★이색의 序에는 <목은집>과 對校한 小註가 붙어 있다.

 

 3) <척약재 학음집> 소장처인 조정 종손가에 대하여 (2004. 12. 4. 윤만(문) 제공)

 

조정종손가소장문적(趙靖宗孫家所藏文籍)

○ 종  목 : 보물   1004호

○ 수  량 : 일괄(10종62점)

○ 지정일 : 1989.05.23

○ 소재지 : 경북 상주시

○ 소유자 : 조용중

○ 관리자 : 조용중

 

 

 <척약재학음집>

 

  본 문화재(本 文化財)는 조선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학자(學者)이며 문신(文臣)이었던 검간(黔澗) 조정(趙靖)(1555∼1636)의 종손가(宗孫家)에 소장(所藏)된 고문서(古文書)와 전적(典籍)이다. 조씨택(趙氏宅)에는 500년간(年間) 전래(傳來)한 고문서(古文書)와 전적(典籍)이 상당수(相當數)가 있었으나, 고문서(古文書)는 명종(明宗) 9년(1554)에서 현종(顯宗) 11년(1670) 사이에 작성(作成)된 분재문서(分財文書) 7건, 선조(宣祖) 34년(1601)에 조정(趙靖)에게 발급(發給)된 교지(敎旨) 등 교지류(敎旨類) 47건, 인조(仁祖) 6년(1628)에 조기원(趙基遠)에게 발급(發給)된 차정첩(差定帖) 1건 등 3종 55점을, 전적(典籍)은 조선초기간본(朝鮮初期刊本)인「척약재선생학음집(척若齋先生學吟集)」을 비롯하여「필원잡기(筆苑雜記)」,「한서(漢書)」등 주로 조선전기간본(朝鮮前期刊本) 7종 7책만을 선별조사(選別調査)하였다.

 

  고문서(古文書)로서 명종(明宗)∼현종년간(顯宗年間)의 분재문서(分財文書)는 당시 사회(社會) ·경제사(經濟史) 연구(硏究)에, 선조(宣祖)∼인조년간(仁祖年間)에 발급(發給)된 교지류(敎旨類)는 인사행정제도(人事行政制度)의 연구(硏究)에 각각 중요한 자료(資料)이며, 전적(典籍)은 낙질(落帙)이 많기는 하나, 조선 전기간본(前期刊本)으로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의 자료(資料)임은 물론(勿論), 교육문화사(敎育文化史) 연구(硏究)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척약재선생학음집(척若齋先生學吟集)은 희귀본(稀貴本)이고 전산성법(田算成法)은 유일본(唯一本)으로 그 가치가 더욱 높이 평가된다.

 

  분재기(分財記)의 기록중 가정삼십삼년갑인(嘉靖參拾參年甲寅)(1554)십일월이십칠일손물단개역중별급문기(拾壹月貳拾柒日孫勿丹介亦中別給文記)는 명종(明宗) 9년(1554) 11월 27일에 재주(財主)인 고(故) 찰방(察訪) 홍윤최(洪胤崔)의 처(妻) 홍씨(洪氏)가 가옹(家翁) 전래(傳來)의 노비(奴婢)와 답(畓) 일부(一部)를 외손자 물단개(勿丹介)에게 별급(別給)하는 문서(文書)이다. 물단개(勿丹介)는 후손(後孫)의 말에 의하면, 검간(黔澗) 조정(趙靖)의 아명(兒名)이라 하나, 검간(黔澗)의 출생년대(出生年代)는 이 문서(文書)가 작성 (作成)된 그 다음해인 명종(明宗) 10년 을묘(乙卯)(1555)이니, 자손(子孫)의 전문(傳聞)이 오류인지 재고(再考)가 필요하다. 배면(背面)에 ‘외조모주노비답별급(外祖母主奴婢畓別給) ’이라 적혀 있고 ‘한글 ’3행(行)이 쓰여져 있다.

 

  조광헌처홍씨자매금급문기(趙光憲妻洪氏姉妹衿給文記)는 재주(財主) 고(故) 유곡찰방홍윤최처홍씨(幽谷察訪洪胤崔妻洪氏)가 여(女) 김우굉처(金宇宏妻), 이안인처(李安仁妻), 조광헌처(趙光憲妻) 3자매(姉妹)에게 노비전답(奴婢田畓)을 분급(分給)하는 문기(文記)이다. 전부(前部)가 탈락(脫落)하여 발급년대(發給年代)는 미상(未詳)이나, 배면(背面)에 “만력육년(萬曆六年)(1578)…… 재주(財主) 김우굉(金宇宏)……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명종말(明宗末)∼선조초(宣祖初)로 추정(推定)된다. 조광헌(趙光憲)은 검간(黔澗)의 부(父)이다. 만력21년계사(1593)2월초3일이녀역중금급문기(萬曆二十一年癸巳二月初三日二女亦中衿給文記)는 선조(宣祖) 26년(1593) 2월에 재주(財主) 목사(牧使) 약봉김극일처(藥峰金克一妻) 이씨(李氏)가 가옹(家翁) 및 조상전래전답(祖上傳來田畓)을 제이녀(第二女) 조정처(趙靖妻)에게 금급(衿給)하는 분재문서(分財文書)이다.

 

  천계원년신유문삼월십오일동복화회성문(天啓元年辛酉(1621)三月十五日同腹和會成文)은 광해(光海) 13년(1621) 3월에 조정(趙靖) 6남매(男妹)가 조선전래(祖先傳來)의 유루(遺漏)된 노비(奴婢)를 화회(和會)(합의(合議))하여 분집(分執)하는 문서(文書)이다. 이 문서(文書)는 조청도택(趙淸道宅) 즉 조정(趙靖)이 금득(衿得)하여 전지(傳持)한 것이다.

 

  천계원년신유4월15일문중화회성문(四月十五日門中和會成文天啓元年辛酉) 광해(光海) 13년(1621) 4월에 고찰방(故察訪) 홍윤최(洪胤崔)의 친외손(親外孫) 조정(趙靖) ·김달가(金達可) ·홍수경(洪秀慶) 등 13인(人)이 홍찰방(洪察訪) 묘소(墓所)에서 제회(齊會)하여 조선전래(祖先傳來)의 유루노비(遺漏奴婢) 및 기타 전토(田土)를 화회(和會)하여 분집(分執)하고 성문(成文)하는 분재문서(分財文書)이다. 조정(趙靖)은 찰방(察訪) 홍윤최(洪胤崔)의 외손자(外孫子)이며 조광헌(趙光憲)의 장자(長子)이다. 그의 아우 익(翊) ·굉 ·준(竣)도 분금(分衿)에 보인다. 당시 작고(作故)한 사람은 부인(夫人)이나 자(子) 또는 손(孫)의 명의(名義)로 분금문서(分衿文書)에 서명(署名) 또는 날인(捺印)하고 있다. 홍윤최(洪胤崔)는 여(女) 3인(人)을 두었는데 일서(一壻)는 진사(進士) 김우굉(金宇宏), 이서(二壻)는 이안인(李安仁), 삼서(三壻)는 조광헌(趙光憲)이다.

 

  숭정5년경진2월29일칠자녀역중성문(崇禎五年庚辰二月二十九日七子女亦中成文)은 인조(仁祖) 14년(1636)에 재주(財主) 조정처(趙靖妻) 김씨(金氏)가 가옹(家翁) 및 자기(自己) 소유(所有)의 노비전답(奴婢田畓) 등을 자녀(子女) 칠남매(七男妹)에게 금급(衿給)하는 문서(文書)이다. 앞에 주사조(主祀條)가 있고 뒤에는 팔여처자제위조(八女處子祭位條)도 있다.

 

  강희9년경술2월14일동생오남매화회문기(康熙九年庚戌二月十四日同生五男妹和會文記)는 현종(顯宗) 11년경술(年庚戌)(1670) 2월에 조예처(趙藝妻) 홍씨(洪氏) 오남매(五男妹)가 부모전래(父母傳來)의 전답(田畓)·노비(奴婢)를 화회(和會)하여 평균분집(平均分執)하는 문기(文記)이다. 생존(生存)하지 않은 자녀(子女)는 부인(夫人) 또는 자(子)가 대신(代身) 서명(署名)하고 있다. 분금후미(分衿後尾)의 지기(識記)에 의하면, 이 문권(文券)은 춘초(春初) 즉 경술(庚戌)(1670)이월(二月)에 기초(起草)하고 미처 정서(正書)하지 못했는데 수개월(數個月) 사이에 조택(趙宅)(조예처(趙藝妻))과 일서(一壻) 황유찬(黃有纘)이 사망(死亡)하게 되었다 하며, 부득이(不得已) 기초(起草)한 당시(當時) 월일(月日)대로 정서(正書)하고 각기 명함(名啣)아래에 대신 자(子)가 서명(署名)하여 후일 빙고(憑考)의 자료로 삼는다고 적고 있다.

 

  교지는 47건으로 조정의 아들 기원(基遠)의 것으로 명종 9년(1554)∼인조 20년(1628)에 해당된다. 전적(典籍)의 삼봉선생집(三峰先生集)은 조선 개국공신(開國功臣)이며 학자(學者)였던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98 태조 7)의 시문집(詩文集)이다. 삼봉집(三峰集)은 태조 6년(1397)에 정도전(鄭道傳)의 아들 진(津)에 의해 편집되어 원주목(原州牧)에서 간행(刊行)된 바가 있었고, 그 뒤 세조(世祖) 11년(1485)에 증손(曾孫) 경상감사(慶尙監司) 정문형(鄭文炯)이 증보(增補)하여 안동부(安東府)에서 7권(卷)으로 간행(刊行)하였다. 본서(本書)는 성종(成宗) 18년(1487) 3월에 안동(安東)에서 간행(刊行)한 것이다.

 

  「삼봉선생집(三峰先生集) 권제칠(卷第七)」이란 권수제(卷首題) 이하 ‘삼봉집권제칠(三峰集卷第七) ’로 끝나는 원집(原集)의 판각(板刻)과 다음의 진법(陣法) 이하의 판각(板刻)은 판식(板式), 자체(字體) 등이 아주 다르다. 예컨대 삼봉선생집(三峰先生集)은 판심(版心)에 흑구(黑口) ·어미(魚尾) 등이 전혀 없고, 진법(陣法)은 대흑구(大黑口) ·내향흑어미(內向黑魚尾) 등이 갖추어져 있다. 이 진법(陣法)은 아예 정문형(鄭文炯)이 당시 추각(追刻)한 것으로 여겨진다. 간기(刊記)에 수록(收錄)된 간행제원(刊行諸員)의 좌목(座目)은 세조(世祖) 11년(1465) 간행(刊行) 때에 참여한 인물(人物)이다.

 

  권칠(卷七) 권수제(卷首第) 아래와 후미(後尾)에 검간(黔澗) 조정(趙靖)의 자(子) 조기원(趙基遠)(1574∼1652)의 소장인(所藏印)이 있다. 가곡(柯谷)은 조기원(趙基遠)의 호이다. 낙질(落帙)이기는 하나 삼봉집(三峰集) 간행(刊行) 연기(緣起)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척약재선생학음집(척若齋先生學吟集)은 고려말(高麗末)의 학자(學者) 척약재(척若齋) 김구용(金九容)(충숙왕복위, 1338∼우왕 10, 1384)의 시집(詩集)으로 저자(著者)의 아들 김명리(金明理)가 편집 간행(刊行)한 것이다. 서(序) ·발(跋)이나 간기(刊記) 등이 없어 간년(刊年)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판심(版心) 및 지질(紙質) ·상태(狀態) 등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초기의 판본(板本)으로 추정(推定)된다.

 

  이 책은 판심제(版心題)와 항수(頁數)가 초서(草書)로 쓰여졌다는 것이 특이하며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판본(板本)으로 추정(推定)된다.

 

  이 책은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한문학연구(漢文學硏究)의 자료(資料)이기도 하다.

 

  필원잡기(筆苑雜記)는 조선조 초기의 학자(學者)이며 문신(文臣)인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수필문학집(隨筆文學集). 예로부터 전해오는 일어(逸語) ·기문(奇文)을 가려 모은 것.

 

  초간본(初刊本)은 성종(成宗) 18년(1487)에 당시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 있던 전계 유호인(兪好仁)에 의해 의성현(義城縣)에서 개판(開板)되었고, 인조(仁祖) 19년(1741)에 청풍부(淸風府)에서 중간(重刊)되었다.

 

  소장인(所藏印)의 조기원(趙基遠)은(1574∼1652) 검간(黔澗) 조정(趙靖)의 장자(長子)이며 가곡(柯谷)은 조기원(趙基遠)의 호(號)이다. 초간본(初刊本)은 흔치 않다.

 

  논어언해(論語諺解)는 낙질(落帙)이고 후미일부(後尾一部)가 탈락되기는 하였으나 전존(傳存)이 극히 희소(稀少)한 경서체자본(經書體字本)「논어언해(論語諺解)」란 점에서 서지학연구(書誌學硏究)에 도움이 되는 자료다.

 

  전한서(前漢書)는 전한(前漢)의 고조(高祖)에서 왕망까지 229년간(年間)의 역사서(歷史書). 후한(後漢)의 반표(班彪)가 시작한 것을 그의 아들 반고(班固)가 대성(大成)하고 고(固)의 누이동생 소(昭)가 보완(補完)한 것. 기전체(紀傳體)로 12제기(帝紀), 8표(表), 10지(志), 70열전(列傳)으로 편성(編成)되었다. 「한서(漢書)」라고도 한다.

 

  권(卷)52 권수제면(卷首題面)에 조기원(趙基遠)(1574∼1652)의 소장인(所藏印)이 찍혀 있다.

 

  송조명현오백가파방대전문수(宋朝名賢五百家播芳大全文粹)는 송(宋) 위제현(魏齊賢) ·엽분이 공편(共編)한 것으로 송대(宋代)의 오백이십가(五百二十家)의 문장(文章)을 수록(收錄)하였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서는「오백가파방대전문수(五百家播芳大全文粹)」란 서명(書名)으로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세종(世宗) 6년(1424)에 경자자본(庚子字本)으로 인출(印出)하여 문신(文臣)에게 반사(頒賜)한 바가 있고, 문종(文宗) 1년(1451)에는 부명사신(赴明使臣)에게 명(命)하여 구래(購來)케 한 바도 있다. 그 뒤 을해자본(乙亥字本)으로 간행(刊行)하였는데, 일본(一本)에는「성송명현오백가파방대전문수(聖宋名賢五百家播芳大全文粹)」란 권수제(卷首題)가 있다. 김두종(金斗鍾) 소저(所著)의「한국고인쇄기술사(韓國古印刷技術史)」와 기타(其他) 서목(書目)에는 본서(本書)의 간년(刊年)을 중종(中宗) 37년(1542)으로 기록(記錄)하고 있다.

 

  권수(卷首)와 권미(卷尾)에「진성이씨(眞城李氏)」「경호(景浩)」 등 오개(五個)의 낙관(落款)이 있는데, 경호(景浩)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연산 7, 1501∼선조 3, 1570)의 자(字)이다. 이 책은 퇴계(退溪)의 수택본(手澤本)으로서 명종(明宗) 이전에 간행(刊行)된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전산성법(田算成法)은 제목록(諸目錄)에 보이지 않는 희구본으로, 상권(上卷)이 결본(缺本)이고 서발(序跋) 등이 없어 간행(刊行)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선조(宣祖) 7년(1574)에서 효종(孝宗) 3년(1652)까지 생존(生存)한 조기원(趙基遠)의 소장인(所藏印)이 찍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임란전후(壬亂前後)에 간행(刊行)된 것으로 추정된다.

 

  7단(段)으로 나뉘어졌는데 1단(段)에는 광(廣)의 척수(尺數)를 적고, 그 아래 6단(段)은 일(一)∼육(六)으로 등을 표시한 다음, 소자(小字)로 복수(卜數)를 적고 있다. 이는 전지(田地)의 결세(結稅) 과표(課標)로서 세제연구(稅制硏究)의 자료가 된다.

 

  그 밖에 선조(宣祖) 년간(年間)에 작성된 교지(敎旨)는 시권(試券)에 의해 그 합격(合格)을 증명(證明)하기 위해 발급(發給)된 것이므로 조선시대 과거제도연구(科擧制度硏究)의 학술자료(學術資料)이며 시험답안작성자(試驗答案作成者) 조정(趙靖)의 능숙한 시문(詩文) 및 필적(筆跡) 또한 문화재적 가치를 더해 준다.

 

  조정문과병과제이십일인급제교지(趙靖文科丙科第二十一人及第敎旨)는 선조(宣祖) 38년(1605) 4월 3일에 국왕(國王)이 조정(趙靖)에게 발급(發給)한 문서(文書)로서 당시 호조좌랑(戶曹佐郞) 조정(趙靖)이 문과병과제이십일인(文科丙科第二十一人)(21등)으로 급제(及第)하였음을 증명(證明)하는 교지이다.

 

  조정년사십육세시시권(趙靖年四十六歲時試券)은 선조(宣祖) 34년(1601) 2월 당시 광흥창부봉사(廣興倉副奉事)였던 조정(趙靖)이 46세 때에 치른 시지(試紙)이다. 앞부분 거자(擧子)(응시자(應試者)) 조정(趙靖)의 신분(身分) 등을 적은 곳에 ‘연사십육세(年四十六歲) ’라 적혀 있고, 다음 ‘신축이월근봉(辛丑二月謹封) ’이라 적혀 있는데 이 신축(辛丑)은 선조(宣祖)34년(1601)에 해당한다. 조정(趙靖)의 연보(年譜)에는, 신축년(辛丑年)이 조정(趙靖)의 나이 47세이고 경자년(庚子年)이 46세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시권(試券)은 무슨 시험(試驗)에 응시한 답안지(答案紙)인지 미상(未詳)하나 ‘차중(次中) ’,‘삼지십육(三之十六)(병과(丙科) 16등(等)) ’의 성적으로 입격(入格)하였다. 단(但) 응시자(應試者)가 제출(提出)한 답안지(答案紙)를 분류정리(分類整理)하는 관원(官員)인 지동관(枝同官)의 ‘지동(枝同) ’이란 확인기록(確認記錄)이 없으며, 신분(身分) 등을 쓴 부분도 자르지 않았다.

 

  조정문과병과제이십일인급제시권(趙靖文科丙科第二十一人及第試券)은 선조(宣祖) 38년(1605) 3월에 조정(趙靖)이 치른 증광문과전시(增廣文科殿試)의 시지(試紙)로서 조정(趙靖)은 병과제이십일인(丙科第二十一人)(병과(丙科)21등)으로 급제(及第)(합격(合格))하였다.

 

  이 시권(試券)은 과거시험답안지(科擧試驗答案紙) 작성(作成)에서부터 등제(等第)(채점성적(採點成績))에 이르기까지 제반형식(諸般形式)이 갖추어진 문서(文書)로서 조선선조시(朝鮮宣祖時) 과거제도연구(科擧制度硏究)의 학술자료(學術資料)이다. 이 과시(科試)의 합격(合格)을 증명(證明)하는 문과급제교지(文科及第敎旨)도 함께 보관(保管)되어 있다.

 

<출전 : 문화재청홈페이지/문화재찾기>

 

 4)학음집 목차 (2003. 8. 21. 영환(문) 제공)

 

惕若齋學吟集

金九容

惕若齋學吟集序 (河崙)

3

惕若齋學吟集序 (鄭道傳)

4

世係行事要略 (金明理)

5

題惕若齋詩吟後 (李穡)1

7

 

 

 

 

 

 

 

 

卷上

8

8

朴判書菊澗

8

僑居病中

8

重午日 劉近仁見寄 同南谷先生次韻答之

8

金剛院使出家 朝士詩之 予作十韻

8

送竹溪全少尹□簡

8

寄崔卜河咸承慶兩同年雜言

8

丁巳八月庚午 自蘆灘放舟 順流而下 泊于神勒寺 有無及頭陀者煮茗之餘 出示伽佗

二軸 乃江南禪子相贈之作也 無及 懶翁尚和高弟 弟子早蒙印可 遂遠遊吳楚閩越之間

遍禮諸名師 尋探蘊奧斂而東歸 去年夏 懶翁示寂于此 無及與其徒燒之 拾舍利頭骨

安于北岡 造石鍾壓之 因以居焉 無及可謂不背其道而無負其師者矣予甚嘉之 題詩

卷末 以塞其請云爾

8

送江陵廉使叔

9

送尹都官之任谷州

9

觀物齋梅花 得裏字

9

圃隱相公求硯 歌以贈之

9

送金漢寶生員歸江陵

10

贈僧

10

送郭九疇檢校永錫

10

金郊驛重送

10

暮秋夜 期達可鄭夢周不至

10

寄李存吾

10

送韓紏正赴任忠州

10

過忠州 韓判官不在 留一絕爲戲

10

西掖夜直

10

寄達可翰林從軍韓政堂幕

10

己亥年紅賊二首

11

辛丑年紅賊二首

11

送別

11

松京曉望

11

送永明長老惠全

11

夜坐

11

送鄭廉使

11

有一郎官奉使元朝 爲宮人所惑 戲贈唐律

11

夏日 同達可宿靈通寺

11

山居

11

送族僧入山

11

送海上人

12

送李判官之任西都

12

寄李判官

12

寄甫州崔摠郎

12

送趙廉使

12

街上有感

12

酬閔子復

12

柳侍中宅梅花次韻

12

贈達可

12

呈權右尹

12

權右尹宅 次朱文公詩韻贈金剛山僧

12

上柳合浦

12

康安殿藏經法席 聞樂有感

12

戊申年新及第

13

赴官上行宮有作

13

醉題

13

留別安東故舊

13

寄法興寺長老

13

驪江樓上 寄高達眞上人

13

寄朴潛之

13

有感

13

送蓊卿

13

寄呈思菴柳淑

13

送摠郎淑之川寧別業

13

秋興

13

題利川安興寺

13

賀李存吾御史除左正言

14

偶題

14

送金廉使

14

殿春帖子二首

14

己酉年八關大會

14

酬鄭宗之次韻

14

送李百支生員

14

送蘭上人

14

俗離寺禪堂

14

送康子野登第南歸

14

贈潛之

14

酬文海御史

14

送朴在中

14

初夜

14

寄西海廉使

15

寄宋廉使

15

宴日本使有作

15

送日本使

15

送浩然鄭先生

15

浩院宴呈達可丈

15

野寺

15

壬寅二月 陪安東府使登映湖樓

15

九月 喜見李同年

15

送同年李祭酒寶林之任京山次韻

15

送楊同年之任古阜次韻

15

開天山中辛丑年

15

臘日有感

15

贈開天景長老

16

夜雨 醉題

16

寄仲賢

16

漫成

16

驪江樓 送李長興

16

香林蘭若

16

題伽倻山法水寺

16

眞觀僧統樂眞臺次韻

16

亂后扈駕還京 次韻

16

寄崔使君伯清

16

漫成

16

至正二十六年三月十七日 金直長君弼 恒上人偶同來訪 鼎坐論詩 得其佳處 輒相諷詠

喜樂之至 遂與所坐牀俱墜于地 二君救之不及 相與拍手 於是援筆題詩 以爲他日之笑

16

丙辰年九月九日 與朴少尹飲酒

17

次眞齋先生詩韻

17

借讀書油

17

送李存吾正言

17

宮詞

17

江陵途中

17

九月旣望 與通州李使君泛舟遊於三日浦 時方雨晴 山色葱籠 湖光瀲灧 顧非人世也

酒酣 題四仙亭桂上

17

大康亭次韻

17

明波亭次韻

17

宜州東亭李元帥韻

17

寄田子秀 居平海

18

四仙亭次韻

18

和寧府喜雨樓次韻

18

醉題三陟客舍東上房壁

18

九月十日 襄州逢咸州張使君政成而還 南歸仁同 詩以送之

18

壬子九月 蘇州城下有感

18

夜泊楊子江

18

上汪丞相二首

18

上禮部陶尚書

18

賜宴口號

19

大倉病中 寄達可司成

19

贈譚友德秀才

19

同達可送鄉僧悟上人歸金陵

19

金陵街上

19

癸丑四月 自大倉召至京師 賜宴光祿寺 奉天門下面聽宣喻 復用前韻二首

19

潤州甘露寺多景樓次韻二首

19

金山寺

19

龍江關有懷 用達可韻

19

高郵州次達可韻

19

過沂州 贈施伯起判官

19

龍潭縣 示蘇至善

20

途中

20

定遼衛 送伴行王奏羌儀還金陵

20

蓋牟城 寄大倉朱秀才 曾以玉燈爲贈

20

原州河公政成上京 道境鑑上人思慕之餘 以詩見寄 河公分韻其詩 爲贈搢紳諸公皆賦

予與達可方回自江南 河公請賦得南字作小詩二首

20

權近待制家紅桃 用壽朋韻

20

送羅判官使日本

20

奉送權判書出尹雞林

20

病中

20

有寄

20

送宋都官按廉慶尚道

20

送僧入山

20

送洪直門下按廉江陵

21

送江陵廉使韓中書

21

寄忠州韓判官

21

延昌秋夜

21

酬林同年次韻

21

寄許野堂

21

寄樞齋李先生二首

21

寄通菴李奉翊

21

酬子安李崇仁見寄次韻

21

燕灘上 寄達可

21

上權樞相

21

寄葵軒先生權鑄

21

呈金元帥先致

21

寄朴中書

22

樓上次韻 奉呈□菊軒相國

22

上柳門下

22

賀洪政堂知貢舉仲宣

22

三陟沈中書以詩見寄 次韻奉呈

22

偶題

22

寄江陵盧廉使

22

寄江陵李府使

22

答全少尹驪江樓詩韻

22

示張及先輩

22

賀安大夫宗源

22

約子安李崇仁不至

22

題子安觀物齋

23

呈丹嵒

23

寄呈太子山一寧

23

贈李敏道

23

松溪下院

23

忠州 贈崔中顯元儒

23

丙辰七月 隨例赴京 題漢江亭

23

九日 與朴宜中司藝飲酒

23

將向嶺南 奉答柏亭相國贈別之什

23

戲寄元興住持

23

寄達可

23

寄徐吏部鈞衡將以朴苞爲壻

24

次韻清州判官覲省全州詩卷

24

次忠州諸君酬唱詩韻

24

 

呈清州倅

24

 

呈丹陽守

24

 

呈崔全州

24

 

呈黃靈光

24

 

呈清州判官

24

送海上人

24

上崔判三司事

24

偰監丞夫人挽詞

24

送合浦金元帥

25

奉答柏亭相國

25

賀安密直

25

奉呈李樞相次韻

25

次韻季淘

25

送崔中顯如京

25

上李元帥

25

寄朴諫議

25

寄西原崔州判爲戲

25

呈希顏丈二絕

25

寄李丹陽

25

寄原州牧使

26

忠州金生寺 遇江陵燈明寺僧 因寄其廉使卓正郎

26

戲寄江陵李使君

26

寄崔卜河 咸承慶兩同年雜言

26

呈漁隱先生東亭相公廉興邦

26

酬全少尹

26

奉和東亭相公枕流亭四絕 足成八首次韻

26

 

附枕流亭四絕 (東亭)

27

題无及卷子

27

江陵李使君政成還家 先以詩爲寄

27

題圓通蘭若

27

 

 

 

 

 

 

 

 

卷下

28

28

宿興法寺 寄河廉使

28

酬金君弼先生

28

寄蔡判事

28

寄金仲溫兩代言

28

上謙谷李相公

28

上陽軒府院君

28

長峯惠鵝 詩以謝

28

大雪 同靜亭權鎬謁東亭相公廉興邦

28

上靜亭權公

28

詰朝 廉使送酒肉禦寒 兼有小詩 次韻爲謝

28

馬上吟得二詩 奉呈河廉使

28

朴諫議以傳柑見惠 且有獻高堂之語 感謝之餘 寄此發笑

28

金副令寓居中原 修撰文書 相憶未見 先寄以詩 次韻奉答

28

奉答東亭相公次韻

29

足菴上人南行 寄全羅鄭廉使 全州李牧使

29

忠州千林寺 與李察訪飲酒大醉因睡 覺而此作

29

彌勒院路上相別 宿崇善寺 奉寄牧伯相公

29

留襄陽寄安東府使安仲溫

29

卞廉使 李察訪相會忠州 作數日之歡 邀予參赴 因事未果 奉呈兩君子 兼簡座上諸公

29

題美人簇子

29

次[東亭]韻

29

明日 與法泉僧回 委轡醉睡 馬自近江 覺而迷路 相與大噱 因有一絕奉獻東亭

29

題窄山卷子

29

寄呈葵軒

30

送子具國博

30

寄人

30

寄雲谷先生朴□□

30

驪江清心樓上 送李子安赴官上京

30

病中聞裴廉使與交州宋廉使同登樓 以詩爲寄

30

送裴廉使乘舟下廣州

30

驪江五絕 寄遁村李浩然

30

遁村寄詩累篇 次韻錄呈

30

哭楊知申事以時

31

淨土蘭若夜吟

31

自淨土尋遁村寓居

31

題日菴卷子

31

送人從軍

31

寄遁村

31

上禹宰相

31

送廉使裴佐郎歸京

31

重送

31

伯玉翰林自京還鄉 邂逅驪江樓上 出示餞行詩卷 予題此

32

用前韻寄金正言

32

寄伯玉

32

奉酬雲谷先生雪後見寄之什

32

洪武十一年冬十月 五宰相公覲省而來 一日進謁 左右賓客滿門 大人年至八十有五

尚無恙而強康 出入起居 公親敬扶持凡飲食亦必先嘗 略不以貴顯自居 蓋世所未有

心竊敬歎 旣退 樂與人言 不能自已 及其回京 枉駕弊止 存問吾親 再辱以雉 不勝惶

悚感激之至 謹課小詩二首 薰沐錄呈 奉發一粲林堅味

32

遣興 寄達可 子安

32

投安東府使安判書仲溫

32

席上見老妓有感

33

奉酬慎村相公

33

甫州 寄廉使

33

安東答三峯約會甫州未果 有此作

33

寄甫州使君

33

安東客舍北樓 次高祖上洛公詩韻

33

寄張樞密

33

感薄命見 寄朴代言

33

宿甕泉驛 次[伯玉]韻寄贈

33

三月十二日踰竹嶺 果清明也 因題樓壁

33

次[仲賢]韻

34

春日對雨有感

34

寓朴秘監大陽本宅 以詩寄呈

34

醉中

34

宋岡摠郎挽章

34

柳之隰判書挽章

34

秋興亭詩

34

送砧上人歸金生寺

34

次同年李典像韻 賀同年李遁村之子之直登第 小詩二首

35

同年李遁村長子之直舉進士第二名 仲子之剛應監試第六名眞希世之盛事也 今日率

之歸家 復用前韻以爲贐行

35

呈葵軒丈

35

天磨山

35

六月十五日 國俗處處飲酒 謂之流頭會 其意沐於東流水也 朴開城設酒 喚歌妓未及 密陽朴中美先生有詩 次韻以戲之

35

醉中朴公折竹枝采雜花作勸花 曲盡其妙 又賦

35

答李遁村

35

謝水晶蒲萄

35

葵軒送黑蒲萄 以詩爲謝

35

寄民望大卿廉廷秀

35

送慶尚廉使全掌令五倫

36

奉送都元帥李相公今太上王出征倭寇

36

鄭判書 柳判書從都元帥幕 詩以爲贈

36

尹樞相以韓山君 清城君兩先生宴集詩示予 欲和其韻 予亦賦焉

36

昌山君挽詞

36

孫樞密挽詞

36

題勝上人嬴庵

36

送勝上人游方

36

呈朴判書乞馬

36

敬步韓山高韻 拜呈都元帥凱旋之次

36

壽父先生園中四詠

36

上李政堂 聊申賀臆 兼以自負

36

寄無說長老子埜先生

37

送鄭當寺丞之任忠州

37

朴掌令家醉中走筆

37

清州李左尹赴官上京 陪鄭副樞迎于其兄判閣家 次杜工部詩韻

37

歎花

37

呈葵軒

37

寄江陵廉使叔謝石硯文魚

37

四月十日 入直省廬

37

寄呈同舍諸公

38

驪江勝山有感

38

會神孝寺 宴鄭三峯

38

醉後子安令我起書壁間 口占二十八字 旣畢 用其韻因書其後

38

會賢聖寺避暑

38

牧隱先生遊紫霞洞未赴 仰賡高韻

38

奉酬康子埜相賀之什次韻

38

送江陵張廉使

38

送揚廣廉使安諫議

38

釋房寓宿

38

入直省廬十月甲子

38

駕幸甘露寺觀獵 凡兩宿 史官扈從 而無直者 邀予直宿 十月二十七日入直 次禁內諸

君詩韻

39

二十八日入直 次金獻納詩韻

39

又題唐律有感

39

集唐人詩句 呈崔諫議

39

席上醉題

39

郎舍等封事 得俞允之命 不勝喜賀 入直有題二首

39

成宰相元揆挽章

39

送永州李使君

39

送金城縣令

39

送柏庭上人

39

送□上人歸覲

39

送李樞相出鎮合浦

40

送韓有文

40

古道卷子

40

黃二相挽章

40

賀朴代言仲容

40

寄忠州李使君

40

寄趙判書

40

送呂摠郎出按慶尚道

40

文化君夫人挽章

40

遊幸安寺

40

過月溪坂

40

送李□生員

40

送柳廉使

41

野雲軒

41

送英上人

41

送雪嶽雲上人

41

具承制母大夫人挽章

41

漢陽有作 呈禹宰相玄寶

41

疎齋先生崔虎留成均寄詩 次韻答之

41

寄鄭三峯道傳

41

金開城宅 次何內相詩韻

41

雪梅

41

奉題上書贏庵二大字卷子

41

寄康子野先生

41

寄鄭判書宇

41

呈柳簽書

42

送江陵徐廉使九思

42

林右使成味挽章

42

座主李文忠公遂夫人金氏挽章

42

秋日晚晴

42

崇善寺 送聰上人歸金生寺

42

寄節齋先生

42

因寄江陵海隱先生

42

寄咸同年 兼簡崔同年桑慶

42

戲呈方秘書

43

爲親乞魚肉詩 一呈海州牧 一呈李堂後

43

寄林先生孝先

43

醉呈座主諸公

43

送全紏正五倫赴任晉陽

43

送徐九思還江陵

43

送萬里同年倅安東

43

鄭宗之歸三峯 同至普賢院次韻送別

43

送驪興柳明府罷任歸嶺南

43

朴秘監宅賞花 戲呈觀物齋

43

海隱先生夢遺華牋 須臾而紙變爲白絹裙八事 心以爲予畜二裙 六裙分與三男足矣 覺

而翻思 且喜且怪 足成絕句六首 寄呈海隱先生

43

畫梅

44

寄子野先生康好文

44

將赴雲南 泝江而上 寓懷錄呈給事中兩鎮撫三位官人

44

采石

44

觀音崛

44

黃州

44

武昌

44

岳陽樓

44

感懷

45

悼亡

45

新月五月初三日

45

贈石首縣尹

45

端午

45

荊州

45

曳船

45

江水

45

贈李仲正

45

潘家溪驛二首

45

46

帆急

46

46

十二壁

46

峽州

46

野草

46

遣興

46

河伯

46

入峽

46

黃陵廟

47

大峽灘

47

遣興

47

馬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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峽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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望歸州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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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人作畫堂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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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人作卜算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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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人作長相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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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李直門下出按西海巫山一段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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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節廉使鷓鴣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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驪江少年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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驪江朝中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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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令公杖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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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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惕若齋說 (白文寶)

49

惕若齋贊 (韓復)

49

惕若齋箴 (李達衷)

49

惕若齋銘 (李穡)

49

惕若齋銘 (鄭道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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惕若齋銘 (鄭夢周)

50

送江陵道按廉使金先生詩序 (李穡)

50

送江陵道按廉使金先生詩 (白文寶)

50

送江陵道按廉使金先生詩 (京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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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江陵道按廉使金先生詩 (田祿生)

51

送江陵道按廉使金先生詩 (嬾齋)

51

送江陵道按廉使金先生詩 (□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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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江陵道按廉使金先生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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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한국문집총간에 실린 페이지를 나타냄

 

 5) 척약재집 서문(하륜)  (2008. 1. 3. 태영(군) 제공)

 

    유림학당 김국회(익) 번역본

 

予少也遊於牧隱先生之門。坐客有若圃隱鄭先生,惕若齋金先生,陶隱李先生者。視其容儀。聽其談論。▓其爲一代之人物也。

 

내 어렸을 적에 목은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자리한 손님 중에는 포은 정(몽주)선생, 척약재 김(구용)선생, 도은 이(숭인)선생 같은 이가 있었다. 그 용모를 보고 그 말씀을 들으니 당대의 인물이 될만하였다.

 

自是心竊景慕焉。與之遊從者二十餘年。相許之分誠不淺矣。金先生將奉使遼東。予勸以一言。先生重違朝命。不敢請而去。卒有大理之行。不克復命。嗚呼惜哉。

 

이때부터 마음속으로 우러러 함께 왕래한지가 20여년이니, 서로 나눈 정분이 참으로 얕지 않다. 김(구용)선생이 요동에 사신으로 가고자할 때 내가 한 마디 권하였으나, 선생이 거듭 조정의 명을 어김에 감히 청하지 못하고 떠나 보냈다. 마침내 형관의 처형으로 돌아오지 못하였으니 아! 슬프다.

 

厥後十餘年間。圃隱,陶隱相繼淪沒。而牧隱先生亦已乘化矣。每念平生之好。不能不涕泗交頤也。今予謁告來鄕。拜掃先塋。留止旬日。府判君乃惕若齋之仲子。以予爲父。執待以厚。

 

그 뒤 10여년사이 포은, 도은이 연이어 돌아가고 목은선생 역시 벌써 돌아가셨다. 매양 평소의 우정을 생각함에 눈물이 턱을 적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내가 고향으로 낙향하기를 고하여 선영을 돌보며 머문 지 열흘인데, 부판군 곧 척약재의 둘째아들이 나를 아버지로 여겨 대접하기를 후하게 하였다.

 

一日。奉其遺稿來示之曰。吾先子所著詩與文不爲不多。然以不滿其意。隨作而棄。幸此若干篇僅存。竊欲鋟梓而傳後。知吾先子者莫如子。請子幸題一言于卷端。

 

하루는 아비의 유고를 가져와 보이며 말하였다. “아버지께서 지으신 시와 문 많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뜻에 차지 못하여 짓는 대로 버리셨습니다. 다행히 약간의 작품이 겨우 보존되었으니, 그윽이 책자로 내어 후손에게 전승하고자 합니다. 아버지께 선생님만한 분이 없는 줄을 알기에, 선생님께 책머리에 한 말씀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予感其言。受而讀之。恍然若聆音聲而接辭氣矣。

 

내가 그 말에 감격하여 받아 읽음에, 황홀하여 (김구용선생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접하는 듯 하였다.

 

嗚呼。詩之道亦難矣哉。魏晉而上。作者去古未遠。然其不違於三百篇之意者鮮矣。詩止於唐。而唐人之音亦有始正變之異。其入於正音者亦不爲多矣。

 

아! 시의 도리가 어렵구나. 위진 이전에는 시인들이 옛날과 멀지 않았음에도 시경의 뜻을 어기지 않는 이가 적었다. 시는 당에서 정점에 올랐음에도 당인들의 음률 또한 좋고 나쁜 차이가 있으니, 그 바른 소리에 들어간 이가 역시 많지 않다.

 

況吾東方。地與中國相遠。風氣不同。言語亦異。苟非天之賦與高出於衆人者。安能變其固滯而近於正音哉。牧隱先生學於中國。卓爾有高明之見。其於東人之詩。少有許可者。獨於先生之作。有所嘆賞曰。平澹精深。絶類及菴 。詩而至於平澹精深。亦豈易哉。

 

더욱이 우리나라는 땅이 중국과 멀어 풍토와 기운이 다르고 말 또한 다르니, 진실로 천부적으로 무리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면, 어찌 딱딱하게 막힌 것을 변화시켜 바른 소리에 근접할 수 있겠는가? 목은선생은 중국에서 공부하셔서 탁월하게 고명한 견해가 있으셨으니, 그 우리 나라 시인 중에 좋다고 인정하신 것이 적은데, 유독 선생의 작품에는 찬탄하고 칭찬하여, “평탄하고 고요하며 정밀하고 깊어, 무리보다 뛰어난 경지에 올랐다.”고 하셨으니, 시로서 그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又於衆作之中。嘗擧先生一句曰。可謂頂門上一針。信乎先生之詩格高出於一時。非他作者所能髣髴也。則此若干篇宜亟刊行。使夫學者有所矜式也。故不以文拙辭。

 

또한 어러 작품 가운데, 선생의 한 구절을 감상하여 말씀하기를, “정문 일침이라 할 만하다.”고 하셨으니, 선생의 시격이 당대에 우뚝 솟아서, 다른 작자들이 미칠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있으니, 이 약간의 작품이나마 마땅히 빨리 간행하여 배우는 이들이 모범으로 삼게하여야겠기에 내 조잡한 솜씨로 서문을 사양하지 못하노라.

 

建文元年九月旣望。奮忠仗義定社功臣,資憲大夫,政堂文學兼判都評議使司事,修文殿大學士,提點書雲觀事,晉山君浩亭河崙。序

 

건문 원년 9월 16일. 분충장의정사공신, 자헌대부, 정당문학겸판도평의사사사, 수문전태학사, 제점서운관사, 진산군 호정 하륜이 쓰다.

 

<출전> 유림학당(김국회) 홈페이지 번역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