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작(金 碏) (1425년 세종 7년∼1498년 연산 4년)

     

 자(字)는 위경(衛卿), 호는 상곡(相谷)으로 좌의정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이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종숙(金宗淑)의 아들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29년(1447) 생원(生員)이 되고, 단종 2년(1454)에 문음(門蔭)으로 선공감 녹사(繕工監錄事)에 이어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이 되었다. 그 후 춘천부사(春川府使)·군기감정(軍器監正)을 역임했다.

 

  세조 4년(1458) 통례원 봉례랑(通禮院奉禮郞)이 되고, 세조 8년(1462)에 종부시 소윤(宗簿寺少尹)이 되었다. 1464년에는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경기도 여러 읍의 옥사(獄事) 관리실태를 조사 보고하는데 공헌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

성종 8년(1477)에는 첨정(僉正)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뒤 도승지 ·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성종 13년(1482)에는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경기도 관찰사가 되고 1484년에는 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성종 18년(1487)에는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시호는 효소(孝昭)이다.

 

<각종 자료>

 

1. 형조 판서(刑曹判書) 김작(金작)의 졸기(卒記) (2003. 1. 3. 태서(익), 2006. 1. 30. 영환(문) 제공)

 

≪성종실록 215권 성종19년 4월28일(신유)≫

 

형조 판서(刑曹判書) 김작(金碏)이 졸(卒)하니 철조(輟朝)19630) 하고 부의와 제사를 내리기를 예(例)와 같이 하였다. 김작은 자(字)가 위경(衛卿)이며, 안동인(安東人)으로, 정승(政丞) 김사형(金士衡)의 증손(曾孫)이다.

 

정통(正統) 정묘년19631) 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경태(景泰) 갑술년19632) 에 문음(門蔭)으로 선공 녹사(繕工錄事)에 제배(除拜)되었다가 전농 직장(典農直長)으로 옮겼다. 천순(天順) 무인년19633) 에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에 승직(陞職)되고, 얼마 안되어 감찰(監察)에 옮겼다가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전직(轉職)되었다. 임오년19634) 에는 종부 소윤(宗簿少尹)으로 승직(陞職)되었다가 사헌 장령(司憲掌令)으로 전직(轉職)되었다. 성화(成化) 을유년19635) 에는 대호군(大護軍)으로 옮겼다가 춘천 부사(春川府使)가 되어 나갔으며, 무자년19636) 에 군기감 정(軍器監正)에 제배(除拜)되었다.

 

정유년19637) 에 문과(文科)에 합격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 병조 참지(兵曹參知)에 승직되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옮겼으며, 여러 번 옮겨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무술년19638) 에는 일로써 파직(罷職)되었다가, 경자년19639) 에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었으며, 이조 참의(吏曹參議)·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역임(歷任)하다가, 임인년19640) 에 가선 대부(嘉善大夫)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승직되었다. 계묘년19641) 에는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어 나갔다가, 갑진년19642) 에 가정 대부(嘉靖大夫)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승직되었는데, 얼마 안되어 수지중추부사(守知中樞府事)로 옮겼다. 정미년19643) 에 어미의 병으로 사직(辭職)하였는데, 특별히 자헌 대부(資憲大夫)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승직되었으며,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 62세이다.

 

효소(孝昭)라고 시호(諡號)하니, 자혜(慈惠)로우며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을 효(孝)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순(恭順)하고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한다. 김작은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友愛)하여 어미가 있는 포천(抱川)의 쌍곡촌(雙谷村)은 경성(京城)과의 거리가 가히 70리(里)나 되는데도 공무(公務)의 여가에 문득 가서 정성(定省)19644) 하였다. 가신(佳辰)19645) 과 영절(令節)19646) 에는 매양 형제(兄弟)들과 더불어 술잔을 받들어 축수(祝壽)하였다.

 

[註 19630]철조(輟朝) : 조회(朝會)를 폐함.

[註 19631]정묘년 : 1447 세종 29년.

[註 19632]갑술년 : 1454 단종 2년.

[註 19633]무인년 : 1458 세조 4년.

[註 19634]임오년 : 1462 세조 8년.

[註 19635]을유년 : 1465 세조 11년.

[註 19636]무자년 : 1468 세조 14년.

[註 19637]정유년 : 1477 성종 8년.

[註 19638]무술년 : 1478 성종 9년.

[註 19639]경자년 : 1480 성종 11년.

[註 19640]임인년 : 1482 성종 13년.

[註 19641]계묘년 : 1483 성종 14년.

[註 19642]갑진년 : 1484 성종 15년.

[註 19643]정미년 : 1487 성종 18년.

[註 19644]정성(定省) : 혼정 신성(昏定晨省). 곧 조석(朝夕)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서 살핌.

[註 19645]가신(佳辰) : 경사스러운 날. 가일(佳日).

[註 19646]영절(令節) : 좋은 명절. 가절(佳節).

 

 【원전】 11 집 331 면

 

2. 청주시지 (충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7) 기록내용 (2003. 7. 14. 주회(안) 제공)

 

     궁현리-고락리-내판리 익원공파 세거지

 김작(金작. 1427∼1488)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위경(衛卿). 등가(登可), 본관은 안동, 개국공신이며 좌의정(註 : 좌정승이 바른 것임) 사형(士衡)의 증손이며, 종숙(宗淑)의 아들이다.

1477년(세종 29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1454년(단종 2년) 음보(蔭補)로 선공감에 녹사(錄事)되고, 춘천부사. 군기감(軍器監) 정(正)을 역임했다. 1477년(성종 8년)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 등을 거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성효(誠孝)가 출천(出天)하여 사형제가 한집에 기거하며 구경당(俱慶堂)이라 (편액)偏額하고 정성(定省)을 어기지 않았으며 부모의 병환이 급함에 단지(斷指) 주혈(注血)하였다. 여막(廬幕) 삼년을 지내니 왕이 효례를 듣고 예로써 우대하였으며 특히 미찬(美饌)을 하사하였다. 시호는 효소(孝昭)이다.

(문헌 : 성종실록, 청주지)

※정성(定省) : 혼정신성(昏定晨省), 조석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 살피는 일)

 

 3. 성종의 비 명빈 김씨(明嬪金氏) 소개

 

     2008. 3. 30. 좌회(익), 영윤(문), 영환(문) 제공 자료 종합

 

   1) 김좌회님 소개 자료

     가)명빈 묘소 소개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乾坐巽向

     나)명빈 소개 : 명빈은  성종(1457-1494. 비빈-12명, 자녀-16남 12녀)의 후궁으로 처음에 숙의에 책봉되었다가 중종 말기에 빈으로 승격되었다. 소생으로는 무산군이 있다.

 

    *<서 11남> 무산군 종(茂山君悰)[1490 ∼ 1525] - 명빈 김씨 소생

 

자는 낙지(樂之). 어려서는 학업에 정진하여 학문은 물론 서예에도 뛰어나 당세의 명필로 알려졌다. 또한 왕자로서 효행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에도 우애와 청렴으로 수신하였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 · 갑자사화로 사림파가 대량으로 숙청당하고 음요학정(淫謠虐政)으로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지는 것을 종친들과 탄식하며 대책을 논의하던 중 어머니 안동김씨가 신변의 위험함을 듣고 친정인 안동 춘양으로 피신하도록 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중종반정에 의해 폐정개혁을 일으켜 새로운 기풍의 시대에 장동 옛집(현 서대문 로터리)으로 환가하였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다.

 

  2)김영윤님 소개 자료

   가)대동보 기록 자료

    己未 大同譜 8권 익원공파 13편

 

 士衡(翼元公)---2子 陞(승)---4子 宗淑(종숙)---2자 孝昭公(諱 石+昔(작)---孟 言+咸(맹함)

                                                                                                  ---仲  言+咸(중함)

                                                                                                  ---季 言+咸(계함)

                                                                                                 --- 第 言+咸(제함)

                                                                                                 ---1女 申反(?)灝(平山人 奉事 子 ?府使)

                                                                                                 ---2女 淑儀(成宗後宮 子 茂山君 悰)

 

   나)靑莊館全書卷之二十六 完山李德懋懋官著男光葵奉杲編輯德水李畹秀蕙隣校訂

紀年兒覽[下]

 

【修】本朝世年紀 附故實。功臣。配享。相臣。 257_450a

 

十二男茂山君悰。淑儀金氏出。○娶平山申氏。別坐贈贊成銖女。生六男二女

 

  3) 김영환님 자료- 성종의 김씨 후궁에 대하여

 

 실록이나 선원계보기략을 검토했을때, 사실 성종의 후궁중 제일 애매한 사람들이 김씨성을 가진 후궁들입니다. 명빈김씨, 소의김씨, 숙의김씨, 숙용김씨, 숙원김씨, 궁인김씨등이 등장하나, 종합하면 김씨성씨를 가진 후궁이 몇명인지조차 불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연산군 원년에 쓰여진 성종 묘지문에 등장하는 유일한 김씨 후궁인 숙원김씨를 명빈김씨로 보지만, 이 또한 애매한 것이, 묘지문에는 숙원김씨가 3남3녀를 낳았으며, 그 딸들의 이름으로 휘숙, 경숙옹주가 기록되어 있으나, 숙종조에 쓰여진 선원계보기략에는 명빈김씨 1남 무산군, 숙의김씨 3녀 휘숙, 경숙, 휘정옹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중종조엔 무산군의 어머니를 '종3품 숙용김씨'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명빈이란 작호는 숙종조에 쓰여진 선원계보기략에서 갑자기 등장한 이름이고, 실록상에는 성종의 후궁으로는 어디에도 명빈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시기가 정확하진 않으나, 후대 왕이 그녀의 작호를 올렸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불완전하나마 이를 통해 대략, 명빈의 작위가 종4품 숙원 -> 종3품 숙용 -> 정1품 빈으로 승격했었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록이 저러하니, 언제 후궁이 되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휘숙옹주를 명빈의 자녀로 본다면 윤씨가 쫓겨나가던 성종 10년에는 이미 후궁이었으나, 자녀가 무산군뿐이라면, 최소 성종 21년 즈음에 후궁이 되었겠죠.

 

 무산군은 성종의 서12남으로, 1490년 출생으로 성종 21년입니다. 권력 가까이 가기엔 너무 늦게 아들을 낳은 셈이 되었죠. 성종은 1494년 죽었습니다.

 

  4) 명빈 묘소 답사기 (2008. 4. 6. 발용(군) 제공)

 

좌회님과 영윤대부님께서 소개해 주셨던 성종의 후궁 명빈김씨의 묘를 다녀왔습니다.

  

명빈김씨(明嬪金氏). 무산군(茂山君) 묘역

 

 ▲ 무산군 사당 효정사(孝貞祠)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은 무산군의 후손인 이경인(李敬仁 : 1575 ~ 16420)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탄천변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한운야학(閑雲野鶴)으로 소일하였는데 , 그 후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정자동이 되었다고 한다.  이 효정사는 본래 정자동에 있었는데 1989년 분당 신도시 사업으로 인하여 철거됨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는데, 정자동 사당 주위에 있었던 백송(栢松)을 주재목으로 하여 복원하였다 한다.

 ▲ 명빈김씨. 무산군 묘역 전경

 

▲ 무산군 묘소

 

무산군(茂山君) - 휘는 종(悰), 자는 낙지(樂之), 시호는 효정(孝貞). 어머니는 명빈 안동김씨로 1남 3녀를 두었다. 배위 군부인 평산신씨는 증 좌찬성 수(銖)의 딸이다. 8남 2녀를 두었다.

 공은 어려서는 학업에 정진하여 학문은 물론 서예에도 뛰어나 당세의 명필로 알려졌다. 또한 왕자로서 효행이 지극하였고 형제간에도 우애와 청렴으로 수신하였다. 공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 · 갑자사화로 사림파가 대량으로 숙청당하고 음요학정(淫謠虐政)으로 국사가 날로 어지러워지는 것을 종친들과 탄식하며 대책을 논의하던 중 어머니 안동김씨가 신변의 위험함을 듣고 친정인 안동 춘양으로 피신하도록 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 후 중종반정에 의해 폐정개혁을 일으켜 새로운 기풍의 시대에 장동 옛집(현 서대문 로터리)으로 환가하였다. 그 후 학문과 서예에 전념하던 중 1525년(중종 20)에 36세로 한창 학예를 펴려고 할 때 애석하게 별세하였다. 묘소는 북한산이 시작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로, 어머니 명빈 김씨 묘하 술좌에 쌍폄장으로 모셔졌다.

 공의 12대손 예조판서 응진(應辰) 때에 이르러 `애친경형왈효(愛親敬兄曰孝), 청백자수왈정(淸白自守曰貞)'하였던 기풍을 기리고자 홍문제학 김세균(金世均)이 시장(諡狀)을 찬하였고, 응진이 행장을 찬하여 효정(孝貞)의 시호를 받았다.

 

 ▲ 무산군 묘표 . 茂山君之墓

 

▲ 무산군 묘소 후경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소 전경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비 - 숙의(淑儀) 증명빈김씨(贈明嬪金氏) 계림김씨(鷄林金氏) 지묘(之墓)

 

명빈김씨(明嬪金氏) - 익원공 휘 사형의 증손인 효소공 휘 작(碏)의 따님으로 성종의 후궁에 간택되어 성종의 12번째 왕자인 무산군(茂山君)과 휘숙옹주, 경숙옹주, 휘정옹주를 낳았다.

성종의 묘지문에 의하면 성종의 승하 당시(1494년) 품계는 정4품 소원(昭媛)이었다. 그 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중종 10년(1515년) 정3품 숙용(淑容)의 기록이 보인다. 가정12년(중종 28년 1533년) 양주군 울대리에 조성 된  묘표  "淑儀 鷄林金氏 之墓" 의 음기를 보면 중종 28년 이전에 종2품 숙의(淑儀)에 봉해 졌음을 알 수 있다. 명빈의 품계를 증직 받은 사실이 왕조실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숙종조에 편찬된 선원계보도에 명빈김씨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숙종 이전에 빈으로 증직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 건립한 묘비문에 의하면 무산군의 후손인 태안군(泰安君), 부안군(扶安君), 춘계군(春溪君)의 공(功)이 있어 성종조의 후궁중에 유일하게 빈(嬪)에 봉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선조조(임진왜란 종전 후) 명빈에 봉해진 것으로 보인다.

 

김작(金碏) 1427(세종 9)∼1488(성종 1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위경(衛卿), 호는 상곡(相谷)으로 좌의정 김사형(金士衡)의 증손이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종숙(金宗淑)의 아들이다.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 29년(1447) 생원(生員)이 되고, 단종 2년(1454)에 문음(門蔭)으로 선공감 녹사(繕工監錄事)에 이어 전농시 직장(典農寺直長)이 되었다. 세조 4년(1458) 통례원 봉례랑(通禮院奉禮郞)이 되고, 세조 8년(1462)에 종부시 소윤(宗簿寺少尹)이 되었다. 1464년에는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경기도 여러 읍의 옥사(獄事) 관리실태를 조사 보고하는데 공헌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이 되었다.성종 8년(1477)에는 첨정(僉正)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뒤 도승지 · 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성종 13년(1482)에는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경기도 관찰사가 되고 1484년에는 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으며, 성종 18년(1487)에는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시호는 효소(孝昭)이다.

 

태안군(泰安君) 1520∼1592

 휘는 팽수(彭壽). 무산군의 5남이다. 오위도총부 부총관직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상주에서 이일(李鎰) 순찰사의 패전과 충주에서 신립(申砬) 도순변사의 패전으로 난의 위급함을 직감하고,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호종임무를 맡아 젊은 종친을 지휘하여 선조의 몽진을 임진강까지 호종하던 중 극심한 폭우속에서 호가를 앞세워 도강을 독려하고 순사하였다. 이로 인해 정의대부 태안군에 봉해지고 승헌대부 오위도총관에 추증되었다.

 

부안군(扶安君) 1524∼1598

휘는 석수(碩壽), 무산군의 6남이다. 처음엔 품계를 부안정을 받고 1554년 중종 승하 시 혼전(魂殿) 입직(入直)의 공으로 부안도정으로 품계가 올랐다가 후에 부안군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젊은 종친들을 지휘하여 선조의 몽진에 호가한 공으로 용만록선무종훈이 되었다. 1593년 10월 선조대왕이 의주 몽진에서 서울로 환도하니 선릉 · 정릉 두 능에 변이 있어 공은 아우 영원군(永原君)과 성혼(成渾)과 더불어 두 능에 봉심(奉審)하였는데 그 때 기록은 <승정원일기>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춘계군(春溪君) 1557∼1620

휘는 원. 시호는 정헌(靖憲). 무산군의 8남인 영원군의 차남이다. 처음 품계가 춘계부령에서 춘계도정, 명선대부에 오르고 임진왜란 때 선조의 몽진을 호가하여 <호가용만록(扈駕龍灣錄)>에 원종공신으로 기록되고 그의 공을 높이 여겨 승헌대부 춘계군으로 증직되었다.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표 - 淑儀 鷄林金氏 之墓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표 - 전면 淑儀 鷄林金氏 之墓,  후면 嘉精 12年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비 후면 기록 - 안동김씨 효소공 휘 작의 따님이며 祖는 증 의정부영의정 휘 종숙(宗淑)  증조는 증 의정부좌찬성 휘 승(陞)의 기록이 보이며, 태안군. 부안군. 춘계군의 공이있어 명빈에 증직되었으며 성종조의 후궁중에 유일하게 빈에 증직되었다는 기록이다.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소 좌.우 문인석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소 장명등

 

▲ 명빈김씨(明嬪金氏) 묘소 후경. 사패산 정상과 우측에 북한산 오봉이 보인다.

 

 ▲ 답사를 마치고 명빈김씨(明嬪金氏) 묘소에서....

 

왜 묘비에 안동김씨를 계림김씨라 했을까?

1533년(중종 28년)에 세운 구비(舊碑)에도 계림김씨라 음기(陰記)되어 있습니다. 전주이씨 무산군파 종중의 이달우님에 의하면 이미 명빈김씨가 안동김씨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 사항이며 처음 묘비를 세울 당시 김알지의 후손인 신라김씨라는 의미로 계림김씨라 했다고 전언(前言)이라 합니다.

 

▲ 묘소 주변 봄의 전령사들.

 

  <풍수지리협회 탐방 사진> (2008. 9. 29. 죄회(익) 제공)

  석중혈(石中穴) : 조안산 훌륭하고 기 운집, 대형 인물 나올 터. 특별관리 요망

  *풍수지리적 관점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