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金誠童). 1452년(문종2)∼1495년(연산1)--(익)

       

  자(字)는 명보(明甫). 익원공(휘 사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좌의정 질(石質)로 4남이고. 어머니는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딸이다. 1492년(성종 23) 적성현령을 지내던 중 그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부평부사에 임명되어 직무를 잘 처리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려 칭송받았다. 부평부사(富平府使)로 취임한 지 2년이 되기도 전에 선정이 조정에 보고되어 가선대부로 승진하였다. 공무에 성실하고 인품이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모두 재상감이라는 기대를 모았으나 곧 몰하였다. 박처륜(朴處綸)과 함께 성종대에 가장 유능하고 성실한 관리로 지칭되었다. 44세에 타계하니 대사헌(大司憲)에 추증(追贈)되었다. 묘는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350-4에 있고 시제는 음력 10월 1일이며 이곳에 신도비와 재실이 있다.

 

    참고문헌 :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國朝榜目, 용齋叢話. 〈李迎春〉

 

  <묘소 및 재실 사진 소개> (  1차)2002. 12. 27.  2차) 2003. 10. 25. 태서(익) 제공)

 

 

 

 

 

 

 

 

 

 <대사헌공 묘역 사진 소개> (2004. 9. 30. 발용(군) 제공)

 

<대사헌공 휘 誠童 묘소>

 

<대사헌공 휘 誠童  묘비 및 문인석>

 

<부호군공 휘 려(濾) 묘소>

 

<부호군공 휘 려(濾) 묘소 및 문인석>

 

 <상-부호군공 휘 려(濾) 묘소 및 문인석>

 

<휘 이경. 휘 료 묘소>

 

<휘 이경 묘비>

 

<강희맹 선생 신도비 및 묘역>

 

 <위쪽  휘 언(삼水변+焉) 묘소. 아래 휘 백령 묘소.>

 

<휘 언(삼水변+焉) 묘소>

 

<휘 언(삼水변+焉) 묘소 묘비>

 

<휘 백령 묘소>

 

<휘 백령 묘소>

 

<휘 백령 묘소>

 

<좌-대사헌 묘소,            우-강희맹 묘소>

 

<각종 역사 자료>

 

1. 호군(護軍) 김성동(金誠童)의 졸기(卒記)  (2003. 10. 9. 윤만(문) 제공)

 

--행 호군(行護軍) 김성동(金誠童)이 죽었다.

--성동은 일찍이 부평 부사(富平府使)이었을 적에 명성과 공적이 있어 특별히 가선(嘉善)에 승진하였다.

--김질(金石質)의 아들이다

 

2. 대사헌공( 휘 성동) 집터에 관해서 --=남지 터 (남대문 앞)  (2003. 8. 19. 주회(안) 제공)

▲남지터 서울시 중구 봉래동1가 7 (우남빌딩앞 보도)

 

---김성동(金誠童)은 상낙부원군(上洛府院君)의 아들이다. 집이 남대문 밖 연지(蓮池) 곁에 있었는데, 키가 아홉 자요 성품이 침착하고 신중한데다가 말이 없고 손님이나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항상 방안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과 얘기하지 않고 종일토록 책만 읽었다.

---집의(執義)윤수언(尹粹彦)은 내 친구 윤자방(尹子芳)의 아들인데, 집이 김성동의 집과 이웃해 있었다. (용재총화), <대동야승>

---(南池) :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으며, 연지(蓮池)라고 한다. 민간에서 김안로(金安老)의 집터라고 말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남대문과 도로를 사이에 둔 서남쪽(남대문로5가 1번지) 자리에 있은 못이다.

---성종 13년에 한명회(韓明澮)가 계(啓)한 바에 의하면 서울의 주산(主山)은 화산(火山)이기 때문에 정도시(定都時)에 모화관(慕華館) 앞과 숭례문 밖에 못을 파서 이를 진(鎭)하였다는 것이다.

---《약현(藥峴)과 남지(南池) 약현에서 멀지 않은 바로 도성 남문 밖에는 또 연지가 있어 연꽃 구경으로 유명하였다. 지금 남대문로 4가 · 5가와 봉래동 1가에 걸쳐 연지동 즉 '연못골'로 불리우던 마을이 있었는데 이것은 남대문 앞 지금 남대문로 5가 1번지 부근에 연지가 있던데서 얻어진 이름이었다.

---또한 도성 바로 밑인 이 남지의 연꽃 구경은 다른 어느 곳에서의 구경보다도 성사(盛事)로 생각하여 그 청흥을 많이 시로 옮기기도 하였는데 그 중 선조조의 명신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이 남지 정자 아래서 달 그림자를 밟으며 연꽃을 구경하다가 성상에서 맑게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듣고 이 정경을 이렇게 읊었다.

「푸른 연줄기의 향그러운 바람 땅에 가득 불어 오는데

층층한 성벽엔 나무 그림자 어울렸네.

노랫소리 나는 저 위 여인의 모습 옥같은 것이

물 건너 서 있는 남자 밤 깊은 줄도 모르누나.

서울육백년사

---그러나 다른 문의 현판은 모두 횡액인데 숭례문 현판만은 종액으로 한 것은 남대문 앞 화산(火山)인 관악산이 마주 서 있기 때문에 남방의 화기(火氣)를 진압하기 위해 종액으로 했듯이 남지를 만든 것도 화기를 진압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보여진다. 《 남지지(南池址) 》

 

3. 집터에 대하여 (2003. 5. 15. 태영(군) 제공)

 

  1)<용재총화>(대동야승) 에서

 

 중추 김성동(金誠童)은 상낙부원군(上洛府院君)의 아들이다. 집이 남대문 밖 연지(蓮池) 곁에 있었는데, 키가 아홉 자요 성품이 침착하고 신중한데다가 말이 없고 손님이나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항상 방안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과 얘기하지 않고 종일토록 책만 읽었다. 적성 현감(縣監)을 지낸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드디어 갑과(甲科)에서 3등으로 뽑혀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부평(富平)에서 수령으로 있을 때 공무를 당하여서는 청렴하고 신중하였고 일은 시원스럽게 처리하였으며 조세를 독촉하는 일이 없어, 백성이 편안하게 살며 부모처럼 섬기었다. 그때 감사가 임금에게 선정(善政)을 아뢰어 특별히 중추원(中樞院)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가 공무(公務)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을까 골몰하면서도 집안일은 조금도 경영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원대함을 보고 기대하기를, “참으로 재상감이다.”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부부가 모두 죽었다. 집의(執義)윤수언(尹粹彦)은 내 친구 윤자방(尹子芳)의 아들인데, 집이 김성동의 집과 이웃해 있었다. 사람됨이 문무(文武)에 뛰어나서 소년으로 등제(等第)하여 사인(舍人)으로부터 나아가 집의(執義)가 되고, 아침저녁으로 은대(銀臺)에 오르기를 지척(咫尺)에 있는 것 같이 여기었다. 평안도에 사신으로 갈 때에 윤자방이 황해 감사라, 집의가 해주(海州)로 아버지를 뵈러 가다가 돌연 병으로 인하여 죽었다. 중추의 관이 발인한 지 며칠이 못되어 집의의 관이 들어와 사림(士林)의 똑똑한 사람들이 한번에 죽으니, 인근 지척의 사이에 흉사(凶事)가 연달아 일어나 사림에서 비통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2)신증동국여지승람 에서

남지(南池) : 숭례문(崇禮門) 밖에 있는데 연꽃을 심었으며, 연지(蓮池)라고 한다. 민간에서 김안로(金安老)의 집터라고 말한다.

 

 

지금 남대문과 도로를 사이에 둔 서남쪽(남대문로5가 1번지) 자리에 있은 못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간단히 '남지는 숭례문 밖에 있어 연지(蓮池)라 부른다'라고만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6책에 의하면 남지는 기우(祈雨)의 장소였다고 하며 성종 13년에 한명회(韓明澮)가 계(啓)한 바에 의하면 서울의 주산(主山)은 화산(火山)이기 때문에 정도시(定都時)에 모화관(慕華館) 앞과 숭례문 밖에 못을 파서 이를 진(鎭)하였다는 것이다.

 

 2)<서울육백년사> 에서

 

《약현(藥峴)과 남지(南池)

약현에서 멀지 않은 바로 도성 남문 밖에는 또 연지가 있어 연꽃 구경으로 유명하였다. 지금 남대문로 4가 · 5가와 봉래동 1가에 걸쳐 연지동 즉 '연못골'로 불리우던 마을이 있었는데 이것은 남대문 앞 지금 남대문로 5가 1번지 부근에 연지가 있던데서 얻어진 이름이었다.

실록 중에는 남대문밖에 연지를 팠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동국여지승람』(권3) 중에 남지가 숭례문밖에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그 유래가 이미 오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 남대문밖에 있다고 하여 못 이름을 '남지'라고도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국여지비고』(권2)나 『한경지략』(권2)에서 모두 이 남지를 중종조의 간신(奸臣) 김안로(金安老)가 중종 32년(1537)에 사사된 다음 그 집터에 못을 팠다고 하였는데 그것의 사실 여부를 확언할 수는 없지만 이 무렵부터 남지가 있었던 것만은 사실로 보여진다.

어떻든 지금은 교통혼잡이 심한 남대문밖에 큰 연못이 있고 거기에 연화가 만개하여 성중사민(城中士民)들의 상화청흥(賞花淸興)을 돋우었다는 것은 금석지감(今昔之感)을 자아내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도성 바로 밑인 이 남지의 연꽃 구경은 다른 어느 곳에서의 구경보다도 성사(盛事)로 생각하여 그 청흥을 많이 시로 옮기기도 하였는데 그 중 선조조의 명신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이 남지 정자 아래서 달 그림자를 밟으며 연꽃을 구경하다가 성상에서 맑게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듣고 이 정경을 이렇게 읊었다.

 

「푸른 연줄기의 향그러운 바람 땅에 가득 불어 오는데

   층층한 성벽엔 나무 그림자 어울렸네.

   노랫소리 나는 저 위 여인의 모습 옥같은 것이

   물 건너 서 있는 남자 밤 깊은 줄도 모르누나.

 

연못에 가득 푸른 줄기 붉은 꽃에서 풍겨오는 향풍이 달밤의 연지가 정자 아래를 거니는 선비의 마음을 흔드는데 다시 성첩(城堞) 위에서 옥같은 미인이 노래를 그치고 바라다보는 그 정경은 그야말로 한 폭 그림같은 명승지의 가경 청흥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 남지지(南池址) 》

중구 남대문로 5가 1번지 부근에 있던 연못(蓮池)터로서, 서울 남쪽에 있었으므로 ‘남편(南便) 연못’이라고도 하고 ‘남지’라고도 하였다. 원래 이 곳은 중종 때 희락당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집터였다고 한다.

이 연못은 당시 서대문 밖의 서지와 같이 남대문 밖에 있으므로 하여 남지로 불렀으며 또 연을 심어 무성하였기 때문에 일명 연지(蓮池)라고도 불렀다.

정조 연간(年間, 1776∼1800)에는 남지가 폐기되고 물이 말라 터만 남아 있었는데 순조 23년(1823)에 숭례문 밖에 사는 사람들이 돈을 모으고 쌀을 거두어 마른 못을 처내고 저수하여 옛날 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다.

전해 오는 말로는 남인의 영수인 미수(眉馬) 허목(許穆, 1595∼1682)이 고관이 되었을 때 이 못을 처내었다고 하며 그 뒤에 또 못을 처내었는데 이상한 것은 공교롭게도 못을 처내는 그 날에 남인 채제공(蔡濟恭)이 복직되었을 뿐 아니라 남인으로서 급제한 사람이 네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남지의 연꽃이 무성하면 남인이 흥왕해 진다는 말이 나온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당시에 남지를 남인에 비하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반면 서편 연못의 연꽃이 무성하면 서인이 흥왕해진다는 말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남지의 인몰(湮沒)은 당론의 영향을 입어 없어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다른 문의 현판은 모두 횡액인데 숭례문 현판만은 종액으로 한 것은 남대문 앞 화산(火山)인 관악산이 마주 서 있기 때문에 남방의 화기(火氣)를 진압하기 위해 종액으로 했듯이 남지를 만든 것도 화기를 진압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보여진다.

 

 

4. 김성동(金誠童)에 대해서 (2003. 5. 15. 태영(군) 제공)

   출전 : (용재총화), <대동야승>

 

중추 김성동(金誠童)은 상낙부원군(上洛府院君)의 아들이다. 집이 남대문 밖 연지(連池) 곁에 있었는데, 키가 아홉 자요 성품이 침착하고 신중한데다가 말이 없고 손님이나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항상 방안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과 얘기하지 않고 종일토록 책만 읽었다. 적성 현감(縣監)을 지낸 뒤에 과거에 급제하여 드디어 갑과(甲科)에서 3등으로 뽑혀 당상관(堂上官)이 되었다. 부평(富平)에서 수령으로 있을 때 공무를 당하여서는 청렴하고 신중하였고 일은 시원스럽게 처리하였으며 조세를 독촉하는 일이 없어, 백성이 편안하게 살며 부모처럼 섬기었다. 그때 감사가 임금에게 선정(善政)을 아뢰어 특별히 중추원(中樞院)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가 공무(公務)에 있어서는 부족함이 있을까 골몰하면서도 집안일은 조금도 경영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그 원대함을 보고 기대하기를, “참으로 재상감이다.”하였는데, 얼마 있지 아니하여 부부가 모두 죽었다. 집의(執義)윤수언(尹粹彦)은 내 친구 윤자방(尹子芳)의 아들인데, 집이 김성동의 집과 이웃해 있었다. 사람됨이 문무(文武)에 뛰어나서 소년으로 등제(等第)하여 사인(舍人)으로부터 나아가 집의(執義)가 되고, 아침저녁으로 은대(銀臺)에 오르기를 지척(咫尺)에 있는 것 같이 여기었다. 평안도에 사신으로 갈 때에 윤자방이 황해 감사라, 집의가 해주(海州)로 아버지를 뵈러 가다가 돌연 병으로 인하여 죽었다. 중추의 관이 발인한 지 며칠이 못되어 집의의 관이 들어와 사림(士林)의 똑똑한 사람들이 한번에 죽으니, 인근 지척의 사이에 흉사(凶事)가 연달아 일어나 사림에서 비통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용재총화 黛齋叢話활자본. 3권 3책. 1525년(중종 20)에 경주에서 간행. 그 뒤 1909년 조선고서간행회에서 간행한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책록되어 널리 알려졌다. 내용은 문담(文談) ·시화(詩話) ·서화(書畵)에 대한 이야기와 인물평(人物評) ·사화(史話) ·실력담(實歷談) 등을 모아 엮은 것으로, 문장이 아름다운 조선시대 수필문학의 백미편(白眉篇)이다.

 

5. 신도비 관련 문화유적총람 기록 내용 (2003. 1. 13. 태서(익) 제공)

 

  

【유적명칭】대사헌 제계 ★김선생 신도비(大司憲蹄溪金先生神道碑)

【관리번호】676-810-180-174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신도비

【소 재 지】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까막섬

【시 대】근대

【관 리 자】

【유적내용】

제계(蹄溪) ★김성동[金誠董(1452-1495)]은 ★김질(1422-1478)의 아들이고 강희맹[姜希孟(1424-1483)]의 사위로 성종조에 유림면 국계리에 은거했다.

<<군지>>에 묘소가 국계리에 있다고 했으나 이 비문에는 경기도 안산시 직관리(職串里)에 있다고 했으니 이장한 듯하다.

1942년에 유진찬(兪鎭贊)이 비문을 짓고 12대손 ★김정원(金正源)이 글씨를 써서 세웠다.

【참고문헌】함양군, 1996, <<문화재도록>>

 

 

 

6. 묘비 개수 관련 대종회보 기록 내용 (2002. 12. 27. 주회(안) 제공)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68호 (2000년 4월)>

▣ 부평도호부사 휘誠童 묘비개수 준공

지난 3월 16일 익원공 6세손 가선대부 행부평도호부사 휘誠童 묘비개수 준공고유

가선대부 증대사헌 행부평도호부사 안동★김공 휘誠童

배 정부인 진주강씨 지묘

 

공의 휘는 誠童이시고, 자는 明甫(명보), 호는 蹄溪(제계)이시니, 성은 ★김씨요, 안동인이라

계출은 신라 경순왕 후손으로 서기 1452년 문종 壬申에 시 익원공 휘士衡의 5세손이며 시 문정공 휘 의 제4자로 탄생하시었다.

우리나라의 씨족중 족보에 드러난 가문은 얼마 안 되는데 세대가 오래되고 번창한 가문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보다 더 낳은 가문은 없도다.

중시조이신 시 충렬공 휘方慶 께서는 고려조에서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 봉상락군개국공으로 이름난 명상이자 명장으로 청사에 찬란한 빛을 내어 명성을 드높이셨고

조선조에서 공(=誠童)의 고조이신 시 익원공 휘士衡께서 순충분의 좌명동덕개국 1등 정사3훈 추충협찬 정난정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정승 봉 상락백 부원군 이셨으며 증조는 밀직사공 휘陞(승)께서 동지밀직사사 겸 도평의사사 증 의정부 좌찬성이셨고 조는 동추공 휘宗淑께서 정헌대부 이정부 좌찬성 겸 대광보국 숭록대부 이정부 영의정 상락부원군이셨고, 조비 정경부인 경주이씨에서 4남 1녀로 문정공  (질), 효소공  (작), 목사공  (적), 풍양군  (무), 사위 홍의달을 두시니 고위는 시 문정공 휘 (질)이시며, 자는 可安, 호는 雙谷으로 세종조에 문과 좌익좌리 양훈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봉 상락부원군이시고 비위는 정경부인 동래정씨로 영의정 昌孫의 따님이며 5남 2녀를 두시니 장남 휘義童은 여주목사 길안군이고 차남 휘禮童은 경력공이며

3남 휘智童은 영흥부사이고 4남 휘誠童은 공이시고 5남 휘利童은 통정목사고 사위는 부림군 이식과 생원 신? 이다.

 

공(=誠童)은 어려서부터 天稟(천품)이 중후하며 言笑(언소)를 삼갓는가 하면 또한 산업을 일삼지 않고 문벌에 의지함이 없이 학문을 독실히 하여 동료들 중에 뛰어 나시었으며 포부가 위대하니 나라의 큰 그릇이 되어 유능한 관리로서 장차 재상감으로 세인의 기대를 모았다.

처음에 가문의 음덕으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시고 사옹원주부 사헌부감찰 적성현령 사첨시주부 의성현령 성종 壬子에 문과 3등으로 급제 첨지중추부사 부평부사 가선대부에 이르시고 배위는 정부인 진주강씨로 좌찬성 希孟의 따님이며 일찍부터 부덕과 예도를 지켜 가문을 중흥시키고 3남 5녀를 두시니 장남 淘(도)는 어모장군 증 이조참판이시고 배위는 정부인 영천이씨요 2남 3녀를 두시니 장남 彦淇(언기)는 어모장군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차남 彦潾(언린)은 증 좌승지며 사위는 양선 강여두 정내길이고 공(=誠童)의 차남 濾(려)는 부호군 증 병조참판이시며 배위는 정부인 단양우씨요 5남을 두시니 장남 彦泌(언필) 차남 彦溥(언부)는 군자감정 3남 彦沈(언침)은 문과 형조참의 증 영의정 4남 彦涵(언함)  5남 彦湘(언상)은 부호군이요 공(=誠童)의 3남  (언)은 문과 내한수찬 수원군수 장예원 판결사 증 이조참판이시고 배위는 정부인 경주이씨에서  장남 별제 得齡과 또 정부인 연안이씨에서 3남 1녀를 두시니 차남 億齡은 문과 관찰사 증 이조판서 대제학

3남 百齡은 증 좌승지 4남은 九齡이며 사위는 이간이다.

공(=誠童)의 사위는 직장 이여회 사포 ★김석린 현감 류수천 군수 최수준 사과 한계상이다. 공께서 애석하게도 서기 1495년 연산 乙卯 음 10월 30일에 향년 44세로 일찍 하세하시니 아 슬프도다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

부인은 공보다 석달 전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직?리 산5번지 신좌원 쌍분으로 안장되시다.

공의 3남  (언)이 입석한 묘비가 현존하나 장구한 세월의 풍상으로 자획이 마모되어 기록을 분갈할 길이 없어 근심하여 오던 중 대사헌공 宗會 僉位(첨위)께서 정성을 모아 이에 새로이 개수하노니 살아있는 자에게는 때를 주지 않았고 현명한 자에게는 壽를 주지 않았으며 무거운 짐을 지고 또 어려움을 만나 그 고생스러움이 끝이 없으나 뛰어난 재능을 이어받아 명성을 드날리게 되니 공의 성품과 행적은 길이 찬양되어 후손은 물론 세인의 귀감이 될 것이요 거룩하신 공적으로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시니 그 찬란한 업적 천추에 전하여 무한히 빛나고 그 후광이 자손들에게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서기 2000년 3월 일 개수

안동★김씨 익원공파 대사헌공종회 회원일동

 

7. 낙포세적 (2002, 안동김씨 익원공파종회) 내의 기록 내용 (2003. 10. 22. 태서(익) 제공)

p14

대사헌공  김성동 (1452년 문종2년 ∼ 1495년 연산1년)

공은 문정공 김질의 4남. 적성현령때인 1492년(성종23년)에 식년시에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부평부사에 임명되었다. 부임한지 2년만에 가선대부로 승진되었다. 44세로 타계하니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직곳리 : 대사헌공 김성동 지묘, 신도비, 재실

 

8. 문화유적총람 (2003. 10. 22. 태서(익) 제공)

【유적명칭】대사헌 제계 ★김선생 신도비(大司憲蹄溪金先生神道碑)

【관리번호】676-810-180-174    【지정사항】<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신도비

【소 재 지】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까막섬   【시 대】근대   【관 리 자】

【유적내용】제계(蹄溪) ★김성동[金誠董(1452-1495)]은 사육신 참화를 일으킨 ★김질(1422-1478)의 아들이고 강희맹[姜希孟(1424-1483)]의 사위로 성종조에 유림면 국계리에 은거했다.

<<군지>>에 묘소가 국계리에 있다고 했으나 이 비문에는 경기도 안산시 직관리(職串里)에 있다고 했으니 이장한 듯하다.

1942년에 유진찬(兪鎭贊)이 비문을 짓고 12대손 ★김정원(金正源)이 글씨를 써서 세웠다.

【참고문헌】함양군, 1996, <<문화재도록>>

 

 묘비개수 (2000년 3월)

 

9.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68호 (2000년 4월) (2003. 10. 22. 태서(익) 제공)

부평도호부사 휘誠童 묘비개수 준공

지난 3월 16일 익원공 6세손 가선대부 행부평도호부사 휘誠童 묘비개수 준공고유

가선대부 증대사헌 행부평도호부사 안동★김공 휘誠童

배 정부인 진주강씨 지묘

 

공의 휘는 誠童이시고, 자는 明甫(명보), 호는 蹄溪(제계)이시니, 성은 ★김씨요, 안동인이라  계출은 신라 경순왕 후손으로 서기 1452년 문종 壬申에 시 익원공 휘士衡의 5세손이며 시 문정공 휘의 제4자로 탄생하시었다.

 

우리나라의 씨족중 족보에 드러난 가문은 얼마 안 되는데 세대가 오래되고 번창한 가문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보다 더 낳은 가문은 없도다.중시조이신 시 충렬공 휘方慶 께서는 고려조에서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도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 봉상락군개국공으로 이름난 명상이자 명장으로 청사에 찬란한 빛을 내어 명성을 드높이셨고 조선조에서 공(=誠童)의 고조이신 시 익원공 휘士衡께서 순충분의 좌명동덕개국 1등 정사3훈 추충협찬 정난정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정승 봉 상락백 부원군 이셨으며 증조는 밀직사공 휘陞(승)께서 동지밀직사사 겸 도평의사사 증 의정부 좌찬성이셨고 조는 동추공 휘宗淑께서 정헌대부 이정부 좌찬성 겸 대광보국 숭록대부 이정부 영의정 상락부원군이셨고, 조비 정경부인 경주이씨에서 4남 1녀로 문정공  (질), 효소공  (작), 목사공  (적), 풍양군  (무), 사위 홍의달을 두시니 고위는 시 문정공 휘 (질)이시며, 자는 可安, 호는 雙谷으로 세종조에 문과 좌익좌리 양훈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봉 상락부원군이시고 비위는 정경부인 동래정씨로 영의정 昌孫의 따님이며 5남 2녀를 두시니 장남 휘義童은 여주목사 길안군이고 차남 휘禮童은 경력공이며 3남 휘智童은 영흥부사이고 4남 휘誠童은 공이시고 5남 휘利童은 통정목사고 사위는 부림군 이식과 생원 신? 이다.

 

공(=誠童)은 어려서부터 天稟(천품)이 중후하며 言笑(언소)를 삼갓는가 하면 또한 산업을 일삼지 않고 문벌에 의지함이 없이 학문을 독실히 하여 동료들 중에 뛰어 나시었으며 포부가 위대하니 나라의 큰 그릇이 되어 유능한 관리로서 장차 재상감으로 세인의 기대를 모았다.

 

처음에 가문의 음덕으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시고 사옹원주부 사헌부감찰 적성현령 사첨시주부 의성현령 성종 壬子에 문과 3등으로 급제 첨지중추부사 부평부사 가선대부에 이르시고 배위는 정부인 진주강씨로 좌찬성 希孟의 따님이며 일찍부터 부덕과 예도를 지켜 가문을 중흥시키고 3남 5녀를 두시니 장남 淘(도)는 어모장군 증 이조참판이시고 배위는 정부인 영천이씨요 2남 3녀를 두시니 장남 彦淇(언기)는 어모장군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차남 彦潾(언린)은 증 좌승지며 사위는 양선 강여두 정내길이고 공(=誠童)의 차남 濾(려)는 부호군 증 병조참판이시며 배위는 정부인 단양우씨요 5남을 두시니 장남 彦泌(언필) 차남 彦溥(언부)는 군자감정 3남 彦沈(언침)은 문과 형조참의 증 영의정 4남 彦涵(언함)  5남 彦湘(언상)은 부호군이요 공(=誠童)의 3남  (언)은 문과 내한수찬 수원군수 장예원 판결사 증 이조참판이시고 배위는 정부인 경주이씨에서  장남 별제 得齡과  또 정부인 연안이씨에서 3남 1녀를 두시니 차남 億齡은 문과 관찰사 증 이조판서 대제학

3남 百齡은 증 좌승지 4남은 九齡이며 사위는 이간이다.

 

공(=誠童)의 사위는 직장 이여회 사포 ★김석린 현감 류수천 군수 최수준 사과 한계상이다.

 

공께서 애석하게도 서기 1495년 연산 乙卯 음 10월 30일에 향년 44세로 일찍 하세하시니 아 슬프도다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느냐  부인은 공보다 석달 전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직?리 산5번지 신좌원 쌍분으로 안장되시다.

 

공의 3남  (언)이 입석한 묘비가 현존하나 장구한 세월의 풍상으로 자획이 마모되어 기록을 분갈할 길이 없어 근심하여 오던 중 대사헌공 宗會 僉位(첨위)께서 정성을 모아 이에 새로이 개수하노니 살아있는 자에게는 때를 주지 않았고 현명한 자에게는 壽를 주지 않았으며 무거운 짐을 지고 또 어려움을 만나 그 고생스러움이 끝이 없으나 뛰어난 재능을 이어받아 명성을 드날리게 되니 공의 성품과 행적은 길이 찬양되어 후손은 물론 세인의 귀감이 될 것이요 거룩하신 공적으로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시니 그 찬란한 업적 천추에 전하여 무한히 빛나고 그 후광이 자손들에게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서기 2000년 3월 일 개수

안동★김씨 익원공파 대사헌공종회 회원일동

 

10. 문과방목, 사마방목 (2003. 10. 22. 태서(익) 제공)

성명 / 자 / 호 입격자와의 관계

★김성동(金誠童) 성종23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성동(金誠童)의 성명(姓名)

★김성동(金誠童) 중종16년 별시에 입격한 ★김언(金<언0x69F8>)의 부(父)

★김성동(金誠童) 중종35년 식년시에 입격한 유잠(柳潛)의 외조부(外祖父)

★김성동(金誠童) 중종36년 별시에 입격한 유혼(柳渾)의 외조부(外祖父)

★김성동(金誠童) 명종3년 별시에 입격한 ★김언심(金彦沈)의 조부(祖父)

★김성동(金誠童) 명종7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억령(金億齡)의 조부(祖父)

★김성동(金誠童) 명종10년 식년시에 입격한 한복(韓輹)의 외조부(外祖父)

★김성동(金誠童) 선조1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찬(金瓚)의 증조부(曾祖父)

 

11. 대사헌공(휘 성동) 시제일  

 

   1)일시 : 음 10월 1일(양10월 25일)  

   2)장소;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350 - 4

 

12. 안사연 대사헌공 묘소 참배 및 참배기 (2003. 12. 15. 윤식(문), 발용(군) 제공)

 

◇일 시:2003년 12월 14일(일요일)

◇장 소 : 경기도 시흥·안산 일대

◇참석자:11명(무순, 존칭 생략, ☆ 표시는 부부 동반)-윤만, 발용, 주회☆, 태우, 태영, 태서, 항용, 정중, 윤식☆

 

 2003년 송년회 행사 후 안사연에서는 경기도 시흥과 안산 일대의 선조님 묘역을 참배하는 행사를 가졌습니다. 이 날 행사는 대종회의 '경진보' 제2차 영인본 발간을 계기로 관찰사공(휘 억령) 할아버지 묘소와 인근에 계신 할아버지 묘소를 답사해 선조님들의 높은 뜻을 되새기기 위해 계획되었습니다.

 

잘 알고 계신 것처럼 경진보(庚辰譜)는 우리 문중 최초의 족보로서 조선조 선조 13년인 1580년 여름(孟夏)에 간행되었습니다. 경진보 발행에는 관찰사공(휘 억령) 할아버지께서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셨습니다.

경진보는 단권(單券)으로서 본문이 44장(張:88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판형은 A3 크기와 비슷합니다.

그 후 1982년 4월 10일자로 제1차 영인본이 간행되었으나, 워낙 소량인 데에다 경진보 소장을 원하는 종친들의 요청으로 제2차 영인본이 2003년도에 간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경진보 수단 당시의 기록은 매우 희귀하여 어떤 과정을 거쳐 경진보를 모시게 되었는지 자세히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다행히 이에 대한 기초자료 중 하나로 태영 종친께서 우리 홈페이지에 '홍의재 영건기(弘毅齋營建記)'를 올려 주셔서 그 일면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게시판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경진보 내용은 발용 종친께서 '경진보' 전체를 정성들여 촬영, 우리 홈페이지에 공개한 사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오전 10시 집결장소인 서울시 삼성동을 출발한 일행은 10시 30분경 서운관정공파 광곡재실 인근의 순환도로 위에 도착하였습니다.

잠시 길섶에 차를 세우고 장령공[掌令公 휘 장(풀草머리 밑에 長)]과 서운관정공[書雲觀正公 휘 수(綏)]의 영단, 유연재공[휘 희수(希壽)] 묘소, 동고공[휘 노(魯)] 묘소를 바라봅니다.

길 아래로 내려서면 바로 묘역에 이릅니다. 이곳에 관련된 자료는 우리 게시판에 윤만 종친을 비롯한 여러 종친들의 답사기와 안사연의 참배 보고가 올라가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관련 사진 역시 발용 종친께서 소개드린 것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멀리 대구에서 오신 정중 종친이 발용 종친의 안내로 눈 덮인 산길을 내려가 참배를 합니다.

 

잠시 서운관정공파 할아버지 묘역을 둘러본 일행은 다시 길을 달려 11시 25분경 시흥시에 있는 대사헌공종회 재실에 도착하였습니다.

대사헌공 재실은 시흥시 연성동에 있는 시흥시등기소를 바라보고 오른쪽 언덕을 넘어서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으며, 2층 양옥집 형태입니다. (시흥 지도 참조하세요)  

 

태서 종친의 안내로 대사헌공재실로 들어서니 며칠 전에 대종회 사무총장의 연락을 받으신 태집(대사헌공종회 총무) 종친께서 반가이 맞아주십니다. 재실 관리는 영수 종친께서 맡고 계십니다.

태집 종친께서는 안사연의 답사행사를 맞이하기 위해 일부러 서울에서 내려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 말씀드립니다.

 

우리 일행은 재실로 들어가 반가운 인사와 따끈한 커피를 한 잔 마신 뒤 대사헌공 할아버지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재실에서 나와 언덕 아래쪽으로 뻗은 사거리에 '강희맹 묘소'를 알리는 도로 표지판이 있습니다. 그 사거리 바로 옆 산기슭에 잘 단장된 묘역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연성중학교 앞에 자리한 이 묘역은 대사헌공 셋째 아드님이신 판결사공[判決事公 휘 언(삼水변+焉)]과 그 후손 묘역입니다.

이곳에서 길을 따라 200여 미터쯤 더 들어가면 강희맹 공 묘역이 나타납니다. 강희맹 공 묘소 입구에는 금호아파트 연꽃마을이 있어서 찾기 쉽습니다.

강희맹 공 묘역 바로 왼쪽 산록이 대사헌공(휘 誠童) 할아버지와 그 후손들의 묘역입니다. 대사헌공의 배위는 진주강씨 할머니이시며, 그 부친이 바로 강희맹 공이십니다. 즉, 대사헌공께서는 강희맹 공의 사위가 되십니다. 이런 연고로 대사헌공께서 이 지역에 자리를 잡으신 듯합니다.

대사헌공종회에서 소유한 임야는 대사헌공 묘역을 비롯해 총 15만 평에 달하는데, 본래는 사패지지(賜牌之地)로서 물왕리저수지까지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사헌공 묘역이 있는 연성동은 강희맹 공께서 사신으로 중국 남경을 다녀오면서 붉은 연꽃 씨앗을 가져와 이곳에서 처음 재배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합니다. 바로 앞의 아파트 이름에 연꽃이 붙은 것도 그런 사연 때문이겠지요.

 

연꽃마을 아파트 바로 앞에 '궁전떡방앗간, 금호사진관' 등이 있는 작은 상가건물이 있습니다. 그 오른쪽 산길로 올라서서 포도밭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면 맨 위에 대사헌공 할아버지 묘소가 있습니다.

대사헌공 묘소는 쌍분으로 묘비 2기(신·구 각 1기), 문인석 2쌍(신·구 각 1쌍), 장명등, 상석 등의 석물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묘비와 문인석 각 1쌍은 2000년도에 비문을 개수하면서 새로 세운 것입니다.

 

대사헌공 할아버지께 인사를 올린 일행은 대사헌공의 둘째 아드님이신 부호군공[휘 려(濾)] 묘소로 자리를 옮겨 참배를 하였습니다.

부호군공 묘소 역시 묘비 2기(신·구 각 1기), 문인석 2쌍(신·구 각 1쌍), 상석(신)가 있습니다. 그런데 묘소 왼쪽에 좌대와 비슷하게 생긴 보기 드문 석물이 눈길을 끕니다. 이 석물은 아직 정확히 고증되지 않아 대사헌공종회에서 연구 중에 있다고 합니다.

 

참배를 마치고 그 옆의 묘역으로 이동하려는 순간 태서 종친께서 묘역 맨 아래에 계신 묘소로 다가갑니다. 태서 종친의 14대조(휘 료)와 13대조(휘 이경)의 묘소라고 하십니다. 우리 일행은 다 함께 재배로 인사를 드립니다.

다시 길가로 내려온 일행은 앞에서 말씀드린 판결사공 묘역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마침 태집 종친께서 묘하에 살고 계신 향묵 종친을 소개해 주십니다.

 

맨 위쪽에 자리한 판결사공 묘소는 3분상으로 판결사공 할아버지와 배위 2분의 묘소입니다. 판결사공 묘소에는 오래 된 묘갈과 문인석 1쌍, 상석 등이 있습니다.

판결사공께서는 득령, 억령, 백령, 구령 등 4형제를 두셨는데, 묘하에 승지공(휘 백령) 할아버지 묘소가 모셔져 있습니다.

승지공께서는 성균 생원이셨는데 아깝게도 29세의 젊디젊은 연세에 알 수 없는 돌림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안타까운 사연이 비석에 새겨져 있어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림에서는 대사헌공을 일러 "장차 영의정이 되시고도 남을 분"이라 하였는데 안타까운 연세에 돌아가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휘 백령 할아버지는 그보다 더 젊은 연세에 돌아가셔서 더욱 절통합니다.

대사헌공과 그 후손들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태서 종친을 비롯한 여러 종친들께서 우리 홈페이지에 수차례 소개하신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익원공 이하 대사헌공 및 그 후손들에 관한 계보도는 우리 홈페이지 <각파 문중회 소개>에서 <익원공파> 중의 <2. 익원공 파계도>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대사헌공 묘역과 판결사공 묘역 참배 후 우리 일행은 태집 종친의 안내로 인근 음식점에 들어가 따뜻한 음식으로 언 몸을 녹였습니다. 맛나게 점심을 들고 난 일행은 대사헌공 재실 입구에서 태집 종친 등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관찰사공[휘 억령(億齡)] 할아버지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후략-이후는 관찰사공(휘 억령) 묘소 참배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