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래(金大來)  1564(명종19)∼1608(광해군즉위)--(익)

       

  초명은 대유(大猷), 자(字)는 희태(囍泰), 익원공(휘 사형) 후손으로 주(柱)의 아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1590년(선조23)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94년에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며 이듬해 성지(城池), 기계(器械)의 안찰어사(按察御史)로 평안도에 파견되었다.

 1597년에 장령(掌令)·헌납(獻納)을 역임하고 1602년 수찬이 된 뒤 집의·사간을 거쳐 1605년에 예빈시정(禮賓寺正)이 되었으며, 그뒤 보덕·필선·홍문관부응교·사인(舍人)을 거쳐 1608년에는 직제학을 역임하였다. 그 해 광해군이 즉위하여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大北派)가 세력을 잡게 되자 양사(兩司)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즉, “그는 유영경(柳永慶)의 심복으로서 온갖 도의에 어긋난 일을 모의하였는데, 일찍이 적자(嫡子)도 아니요 장자(長子)도 아니라는 말을 공공연히 떠들어대어 감히 왕의 존엄성을 범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마침내 종성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신원되었다.

 

1.<관련 자료 소개>

 

 가. <연려실 기술 내 기록 내용 종합> (2003. 11. 18. 윤만(문) 제공)

 

  1) ▣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성혼의 관작을 삭탈하고 신축년 정인홍이 권력을 잡다 임인년 ▣

 

○ 인홍이 취직하여 아뢰기를, “이성록 등이 황신을 처치할 때에 전하의 전일의 전교를 지적해 내어 임금으로 하여금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갖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임금을 잊고 악인에게 편당하였으니 이보다 심한 죄가 없을 것인데도 그 관직만을 삭탈하였으므로 여론이 더욱 분하게 여겨, 귀양보내는 것도 죄에 비해 경하니 감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호군 황신은 성혼의 문생으로 간흉의 당이 되어 사류가 남의 사주를 받았다고 하여서 전하의 귀를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이는 임금을 속이고 사당(私黨)을 옹호한 것이니 관직을 삭탈하기만 하는 것은 오히려 경한 벌인 것입니다. 예조 참의 정경세(鄭經世)는 소년명사로서 능히 예법을 지켜 몸을 신칙하지 못하고, 왜란이 일어나던 초기에 상주였는데도 관사에 출입하고 술을 마시다가 사람들의 언성을 면치 못하였으며, 또 전쟁하던 날에는 마땅히 서로 대하여 슬피 곡하기에 겨를도 없이 해야 할 것인데도 관동에 사신으로 나가서 공공연히 기생을 껴안아 남의 눈과 귀에 드러났으니, 파직시키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성록 등에 대해서는 그 말을 어찌 족히 계교하리요. 이미 삭직하였으니 귀양까지 보내는 것은 지나치다. 황신의 삭직도 지나치다. 정경세의 일은 의심할 것 없이 확실하면 그만이지만, 풍문이 만에 하나라도 실상이 아니면 그 사람은 애석하다.” 하였다. ‘경세의 부모형제가 왜적에게 죽었고, 경세도 난리 중에 병을 얻어서 목숨이 거의 끊어지려 하자 고산(高山) 현감 신경희(申景禧)가 육즙을 써서 살렸다. 따라서 그때 경세는 병이 중하여 실상을 알지 못하였다.’ 하니, 이 말은 양홍주의 소에서 나왔다.

 

○ 지평 강주가 연달아 아뢰어서 아울러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에 성록ㆍ조익ㆍ유경은 귀양가고, 황신은 관직이 삭탈되었으며, 경세는 파직되었다.

 

○ 인홍이 경세에 대하여 발론하자, 한 대간이 인홍에게 말하기를, “영감이 경세를 공격하는 것은 혐의스러운 데에 관계될 듯합니다.” 하였으나, 인홍이 듣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서 또 죄를 더하고, 사판(仕版)에서 삭제하는 일로 동료에게 간통(簡通)하여, “만약 따르지 않으면 마땅히 홀로 아뢸 것이다. 결단코 서로 용서하지 않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갈 것이다.” 하고, 동료들이 미처 답하기도 전에 인홍이 먼저 스스로 기초하여 경세를 사판에서 삭제하게 하니, 집의 김대래(金大來) 이하가 피혐하면서, “인홍이 답통(答通)을 기다리지 않고 동료를 협박하였다.……” 하여, 이로써 인홍이 갈렸다.

 

 2) ▣ 연려실기술 제18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하원군(河原君) 집의 일 ▣

 

○ 양사에 답하기를, “이 일을 영제(寧堤)를 불러 물으니, 정원군집 종과 하원군집에 붙여 사는 포수가 서로 힐난하고 있을 즈음에 부인이 계집종의 말을 듣고 중문(中門) 밖까지 나왔다 한다. 대개는 친히 나가면 싸움이 끝날 것으로 생각 했던 것인데, 정원군의 종이 포수를 새문골〔塞門洞〕집으로 잡아 가자 부인이 또 계집종을 거느리고 따라가니, 어떤 사람이 영제에게 달려가 고하기를, ‘부인이 구금당했다.’하였다. 영제가 곧장 달려가 보니, 바깥문이 잠겨 있는데 자물쇠가 주인집에 있다 하므로 달려가 정원군에게 고했다고 한다. 정원이 말을 달려거서 종을 꾸짖고 문을 열어보니, 부인과 계집종이 대문 안에 서 있는지라. 정원군이 크게 놀라 영제 등과 더불어 즉시 부인을 본가로 돌려 보냈는데, 그때는 밤이 이미 사경이 되었다 한다. 양사의 계사 중에 말한 사실과 같은 것이 조금도 없다. 정원군이 만약 그와 같이 했다면 내가 마땅히 먼저 다스리겠다. 종들의 소행이 과연 놀라우니, 유사(有司)에 명하여 죄를 다스리는 것으로 족하다.”하였다.

 

○ 사간 김대래(金大來)가 아뢰기를, “궁노들이 하원 부인을 구박하여 새 궁에 가두고 실컷 곤욕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원군이 온 뒤에도 오히려 괘념하지 않고 즉시 열어 내주지 않은 상황을 어떤 사대부가 직접 보고서 여러 사람이 모인 가운데에서 말하는 것을 신도 또한 참여하며 듣고 대사간 송순(宋諄) 등과 더불어 논계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운운하니, 답하기를, “아침에 영제의 말을 들으니, 그날 밤에 임학령(任鶴齡)학령은 뒤에 석령(碩齡)으로 개명 하였는데, 인조 때 벼슬이 감사에 이르렀다. 도 갔는데, 학령은 부인의 조카인지라 필시 학령이 부인의 행동을 두둔하려고 이런 말을 지어내어 모함을 꾸미려는 것이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번 이 두 집 종들의 서로 싸운 일로 처음에는 안에서는 하나도 관계되지 않은 일에 불과하였는데, 부인이 종들의 권고 때문에 직접 계집종을 인솔하고 밤중에 걸어서 네거리를 지나 남의 집까지 들어가 구류당했다.《예기(禮記)》에‘부인은 밤에 마루를 내려가지 않는다.’하였고, ‘남편이 죽으면 미망인(未亡人)이라 칭한다.’하였거늘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다만 생각건대, 집에 신주가 있는데 한밤중에 버려둔 채 달려 나갔으니, 이때 신령이 어디에 의지하며 어둡고 어두운 가운데에서 놀라고 슬퍼함이 없었겠는가.”하였다. 또 이르기를, “병조 좌랑임학령이 교묘한 혀를 희롱하여 현란하게 떠벌여 왕자를 얽어 모함하기를 한결같이 극한에 이르렀으니, 누구와 더불어 음모와 비계(秘計)를 꾸며 천고에 없던 흉참(凶慘)한 술수를 쓰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마음 씀을 캐어본다면 막야(鏌鎁) 오 나라의 명검도 못 따라가니 진실로 간인이다. 파직하라.”하니, 승정원이 아뢰기를, “당초에 정원군이 비록 그 일을 몰랐지만 부인이 구금을 면치 못한 것은 실로 대단한 변괴로서 궁노들의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음이 심합니다. 이는 일조 일석에 된 것이 아니요, 오랫동안 길러온 기습이 점차로 오늘의 변을 이루게 된 것이니, 정원군은 실로 종을 풀어놓아 나쁜 짓을 하게 한 허물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하원 부인이 비록 예법을 몰라 이러한 망녕된 행동이 있었지만 정원군의 궁노가 만약 절연(截然)히 항상 엄하게 여기고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필시 감히 부인의 집에서 행패를 부리지 못했을 것이요, 부인이 문에 들어 왔을 때 놀라고 황송해서 흩어져 달아나기에 겨를이 없었 을 것이거늘, 어찌 감히 문을 잠글 생각을 했겠습니까. 가만히 전하께서도 정원군에게 전연 잘못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임학령을 파직시키라는 말씀에도 온당하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운운.”하니, 전교하기를, “알겠다.”하였다. 이상은 모두 《임진일기》이다.

 

 3) ▣ 연려실기술 제18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동서남북론(東西南北論)의 분열 ▣

 

○ 심의겸(沈義謙)ㆍ김효원(金孝元) 때에는 다만 동서만 있었는데, 박순(朴淳)ㆍ이이(李珥)가 죽자 서인이 항상 동인의 공격과 모욕을 받아오다가 기축년 정여립의 역변(逆變)에 동인이 많이 죽고 임진란에는 곤란을 당했던 서인들이 모두 절의(節義)에 죽었는데 고경명(고경命)ㆍ조헌(趙憲)ㆍ김천일(金千鎰)ㆍ송상현(宋象賢) 등은 특히 드러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동인의 세력은 더욱 치성하여 드디어 서로 스스로 나뉘어 공격하다가 남북으로 나누어지자 ‘동인'이라는 호칭이 마침내 끊어지고 말았다. 그 뒤에 북인이 점차 성하더니 또 사사로이 당파을 나누어 이이첨ㆍ정인홍ㆍ이경전ㆍ김대래(金大來)ㆍ기자헌(奇自獻)ㆍ허균(許均)ㆍ홍여순 등은 대북(大北)이 되고, 유영경ㆍ남이공ㆍ김신국ㆍ유희분(柳希奮)ㆍ박승종(朴承宗)등은 소북(小北)이 되었다.

 

  선조가 말년에 조정의 신하들이 권력을 탐하는 것을 미워하여 각파의 사람들을 번갈아 썼다가 쫓다가 하여 명예와 이익으로 싸움을 붙였는데, 소인들이 뜻을 얻은 것은 신축년과 임인년 사이에 시작되었다. 기자헌ㆍ정인홍 등이 체직되고 유영경이 집권하니, 해가 전보다 심했다. 광해군(光海君)초에 이르러 영경이 살륙되고 인홍과 이첨이 정권을 잡았으나 희분이 외척(광해의 처남)으로서 권력을 제멋대로 휘둘렀기 때문에 소북이 쇠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북이 가장 강했기 때문에 또 자기네끼리 각기 당파를 세웠으니, 정창연(鄭昌衍)ㆍ이명(李溟)등은 정온(鄭溫)을 구해주므로 중북(中北)이 되고, 또 청북(淸北)ㆍ탁북(濁北)ㆍ골북(骨北)ㆍ육북(肉北) 따위의 명칭이 있었다. 결국 대비를 폐하고 임금도 또한 따라서 망하자 대북 사람들이 모두 형벌로 죽거나 귀양가서 남은 자들이 없었다. 중북 이하의 여러 당파는 혹은 소북에 붙기도 하고 혹은 서인으로 들어가기도 하였기 때문에 세상에 대북이란 칭호가 없어지고 지금 남은 것은 삼색(三色 서, 남, 소북)뿐이다. 《일월록》

 

  4) ▣ 연려실기술 제19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가장 먼저 유영경(柳永慶)을 죽이다. ▣

 

○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도승지 유몽인(柳夢寅)은 사람됨이 용렬하여 일을 처리함에 있어 두서가 없습니다. 국상(國喪)을 당하여 일이 많은 시기에 승정원의 장(長)의 임무는 결코 그가 감당하지 못하니 체직하소서. 그리고 대행대왕(大行大王)께서 병환이 나신 지 한 해가 넘도록 약효를 보지 못하자 신자의 절박한 심정으로 그 지극한 정성을 쓰지 아니하는 곳이 없으니, 송석경(宋錫慶) 등이 수의(首醫)에게 죄주기를 청한 것은 실상 전하를 사랑하는 성심에서 나온 것이지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김대래(金大來)는 당론(黨論)에 부동하여 마음 으로 군부를 무시하고 감히 변설을 놀려서 송석경 등의 죄를 허구 날조하여 흉악하고 참혹함을 방자히 하더니 마침내 그들을 공격하여 내쫓고야 말았습니다. 그 마음 쓰는 것이 극히 졸렬한데도 아직도 높은 벼슬을 차지하여 조정 논의를 주도하고 있으니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문 밖으로 내쫓으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윤허한다. 김대래는 파직하고 서용(敍用)하지 말라” 하였다.

 

○ 이때 양사에서 합계한 정언이사경(李士慶)ㆍ헌납이호신(李好信)ㆍ사간 박이서(朴彛敍)ㆍ정언임장(任章)ㆍ집의목장흠(睦長欽)ㆍ장령윤양(尹讓) 대략에, “영의정 유영경은 본래 음험한 사람으로서, 외람되게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여 안으로는 궁중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사당(私黨)을 만들어서 제 마음대로 권력을 농간하고 임금의 이목을 가리워 치솟는 불꽃이 하늘까지 닿듯 하였으며, 흉악한 마음을 품어서 마음 속에는 임금이 없고 국가를 저버린 죄는 천지간에 용납되지 못할 것으로 아오니 유영경의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문 밖으로 내쫓기를 청하옵니다. 원흉이 악한짓을 하는데는 또한 반드시 간특한 무리들이 우익이 되는 것인데 김대래(金大來)ㆍ이유홍(李惟弘)ㆍ이효원(李效元)ㆍ성준구(成俊耇) 등이, 심복이 되고 혹은 부하가 되어 귀역(鬼蜮)과 같이 주야로 모이고 홍식(洪湜)ㆍ송 전이 또한 그의 사주를 받고 조정을 어지럽히고 하였으니 아울러 관직을 삭탈하고 문 밖으로 내쫓기를 명하시어 간악한 당과들의 징계가 되도록 하소서.” 하였다. 답하기를, “영상에 관한 것은 윤허하지 아니한다. 이효원 등을 파직하라” 하였다.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서 유영경에 대한 일은 쾌하게 공론을 좇기를 청하였다. 《정무록》

 

○ 8월 10일에 양사에서 유영경의 일 때문에 합계가 다시 나왔는데, 유영경ㆍ김대래는 율에 의거하여 처단하고, 이홍로(李弘老)는 잡아서 국문하여 죄를 정할 것이며, 기자헌은 먼 곳으로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다. 《정무록》

 

○ 광해가 이미 세자로 정하여진 뒤에 김대래가, 적자(嫡子)가 아니며 장자(長子)도 아니라는 말을 주장하였던 까닭에 양사에서 합계하기를, “대래의 마음은 뱀ㆍ개ㆍ돼지가 합쳐서 된 것으로, 같은 악인에게 부화뇌동하여 도와서 부도를 꾀하였으며, 영경을 위하여 용기를 뽐내어 남보다 먼저 전하를 모욕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 9월에 유영경ㆍ김대래ㆍ이홍로 등을 귀양가 있던 곳에서 죽였는데, 대신이 2품 이상의 조신(朝臣)을 거느리고 아뢰어 청한 것이었다. 일월록에는 7월로 되어 있으나 조야기문ㆍ조야첨재에는 9월에 자살하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5) ▣ 연려실기술 제19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김직재(金直哉)의 옥사 관중 잡록에는 신해년 가을 조에 들었는데 일월록에서 그대로 하였음은 그릇된 것이다 ▣

 

○ 4월 28일에 영천(榮川)사람인 유학(幼學)이평(李坪)이 소를 올려서 유영경(柳永慶)에게 추형(追刑)하기를 청하였다.

 

○ 5월 7일에 양사에서 합계하여 영경의 열 가지 죄목(罪目)을 수죄(數罪)하고 추형하기를 청하였다. 6월 7일에 윤허되었고, 21일에 유영경ㆍ김대래(金大來)ㆍ이홍로(李弘老)를 네 거리에서 추형하였다. 위 광해가 즉위한 처음에 유영경을 죽였다는 대목에 자세하다. ○《응천일기》

 

○ 전교하기를, “유영경의 사위들은 기축년 정적(鄭賊 여립(汝立))의 예에 근거하여 거행하고, 이홍노ㆍ김대래의 사위는 아울러 관작을 삭탈하고 도성문 밖으로 내쫓아 금고하는 것으로 일체 시행하여라” 하고 또, “법률을 적용하는 것은 나로서도 늘이거나 줄이지 못하지만, 유정량(柳廷亮)만은 부마(駙馬)이니 절도에 위리 안치하는 것은 차마 하지 못하겠으니 중도에서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 부처하는 것이 가하다” 하여 고부(古阜)에 정배(定配)하였다. 《응천일기》

 

○ 삭출(削黜)당한 자는 유항(柳恒)ㆍ신경진(辛慶晋)신희업의 아비ㆍ홍서봉황혁의 사위ㆍ유수증(兪守曾)ㆍ이현(李袨)유영경의 사위ㆍ송유조(宋裕祚)이홍로의 사위ㆍ이응협(李應莢)김대래의 사위이다.

 

 6) ▣ 연려실기술 제19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무신년 당적(黨籍)임자년에 율을 추가한 것. 붙임 ▣

 

  유영경 (경흥 慶興) 안치ㆍ김대래 (종성 鍾城) 안치ㆍ이홍로 (대정 大靜) 안치 모두 사사(賜死)하였다. 이효원 (거제 巨濟)ㆍ이유홍 (강계 江界)ㆍ성준구 (남해 南海) 모두 위리안치시켰다. 구혜(具惠) (창성 昌城)ㆍ유성(柳惺)삼수(三水)ㆍ뒤에 곤장쳐서 죽였다.ㆍ홍식(洪湜) (강진 康津)ㆍ송전 (이산 理山) 모두 멀리 귀양보냈다. 이정(李瀞)ㆍ이경기ㆍ신광립(申光立)ㆍ허욱뒤에 원주(原州)에 부처(付處)하였다.ㆍ유영근(柳永謹)ㆍ유영순(柳永詢)ㆍ이덕온(李德溫)ㆍ성영(成泳)ㆍ최천건(崔天健)ㆍ신요(申撓)ㆍ송응순(宋應詢)ㆍ유업뒤에 죽임을 당하다. 모두 관직을 삭탈하ꃠ 도성문 밖으로 내쫓았다. 황근중(黃謹中)ㆍ조명욱(曺明勗)ㆍ송언신(宋言愼)ㆍ박승종(朴承宗)얼마 뒤에 서용(敍用)되다. 모두 파직시켰다. 성이문(成以文)ㆍ김신국(金藎國)ㆍ민경기(閔慶基)ㆍ박안현(朴顔賢)ㆍ송일(宋馹) 모두 벼슬을 갈았다. 뒤에 관직을 삭탈하였다.송준(宋駿)ㆍ황섬(黃暹)은 논박(論駁)하여 벼슬을 갈았다. 생원 황유첨(黃有詹)섬(暹)의 아들ㆍ진사 구인지(具仁至)혜의 아들 는 사적(仕籍)에서 삭제하고 금고(禁錮)시켰다. 인홍과 이첨에게 붙었던 까닭이다.임자년(1612) 2월,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영경의 아들인 선의 이름이 적의 초사(招辭)에 나왔으므로, 선의 형인 제를 아울러 가두도록 명하였고, 24일에는 열(悅)ㆍ업ㆍ항(恒) 등을 모두 잡아다가 국문하였다. 4월 28일에 영천(榮川) 사람인 유학(幼學)이평(李坪)이 소를 올려서, 유영경에게 역적의 죄로 추형하기를 청하였다.

 

《응천일기》

 

○ 6월 7일에 양사에서 합계하기를, “유영경을 정여립(鄭汝立)의 예에 의거하여 시체를 저자에 벌여 놓고 백관이 둘러 선 가운데 명백히 처형하고 김대래ㆍ이홍로도 동시에 처형하소서” 하였다. 21일에 유영경ㆍ김대래ㆍ이홍로를 네거리에서 추형하였다. ≪응천일기≫ ○《하담록》에는, “관을 쪼개고 시체를 베었다” 고 되어 있다.

 

  7) ▣ 연려실기술 제18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광해군이 왕위를 이어받다. ▣

 

○ 이때에 영의정 유영경이 내의원 제조가 되고 양평군(陽平君)허준(許浚)이 수의(首醫)가 되어 밤낮으로 걱정하여 속을 태우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간 송석경(宋錫慶)과 장령 유경종(柳慶宗) 등이 약을 맞게 쓰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의를 나국(拿鞫)하자는 의논을 준절히 꺼내 차례로 도제조한테까지 미치게 하려고 하였다. 이는 오로지 영경을 모해하여 죄에 빠뜨리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그 마음씀이 바르지 못하였다. 헌납 송전(宋●), 정언 구혜(具惠), 대사간 김대래(金大來), 대사헌 홍식(洪湜), 장령 남복규(南復圭)가 각기 다른 의견을 내세우며 따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성상께서 조용히 조섭하는 중에 어의를 죄 주자고 청하는 것은 소요스러울 듯하니, 옥체가 쾌복되는 대로 약청(藥廳)을 파한 후에 서서히 그 죄를 논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또 이때에 수의를 죄 주고나소 뜻밖에 약을 쓰게 되면 누가 담당하겠는가.”하였다. 석경이 피혐(避嫌)하면서 동료를 배격하니, 여러 대간들이 모두 피혐하였다. 《정무록》

 

○ 전한 김대래(金大來)가 단독으로 아뢰는데, 그 대략에 “간특한 자들이 이런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고 초야에 있는 사람의 손을 빌려 은밀히 귀역(鬼蜮)의 모해를 행하니, 유영경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족히 말할 것도 없고 양궁(兩宮)의 말씀까지 거론하여 우리 성상의 골육간을 이간시키려고 하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습니까. 대개 이번 상소는 다만 영경 한 사람만을 모함하려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일망타진하여 나라를 텅 비게 한 후에야 그만둘 것이니, 너무나 간사하고 교묘합니다.” 하였다.

 

○ 좌의정 허욱, 우의정 한응인이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정인홍의 상소에 유영경이 동궁을 동요시킨다 하고, 신들이 이를 부추킨다고 공격하면서 또 우익(羽翼)으로 지목하였습니다. 영경이 이미 이로써 죄명을 얻은 만큼 우익이 된 자도 그 죄가 같을 것이니, 척파(斥罷)하라고 명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인홍의 말은 실성한 사람 같으니, 그 소행이 너무나 마음 아프다. 다만 영상을 무함한 것일 뿐만 아니라 일시의 대간과 시종들을 모두 그의 일당으로 지목하였으니, 이는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으로 그 마음의 끔찍하고 지독함이 이와 같다. 경들은 마음을 편히 갖을 뿐이다.” 하였다. 《회산잡기(桧山雑記)》. 《정무록》

 

○ 이때에 동인이 대북ㆍ소북 양당으로 분열되었으니, 이른바 대북은 이산해 ㆍ경전 부자와 정인홍ㆍ이이첨ㆍ박건(朴楗 광해의 외척)이요, 이른바 소북은 유영경이 7년동안 정승으로 있으면서 끌어들인 허욱ㆍ최천건(崔天健)ㆍ성영(成泳)ㆍ송언신(宋言愼)ㆍ홍식(洪湜)ㆍ성준구(成俊耈ㆍ이효원(李效元)ㆍ이유홍(李惟弘)ㆍ김대래(金大來)ㆍ송응순(宋應洵)ㆍ송전(宋●)ㆍ이덕온(李德溫)ㆍ송준(宋駿)ㆍ송일(宋馹)ㆍ남복규(南復圭)ㆍ유성(柳惺)ㆍ유업(柳업)ㆍ박승종(朴承宗)ㆍ이정(李瀞)ㆍ유영근(柳永謹)ㆍ유영순(柳永詢)ㆍ이경기(李慶禥)ㆍ박이장(朴而章)ㆍ황섬(黃暹)ㆍ 황하(黃昰)ㆍ황근중(黃謹中)ㆍ조명욱(曺明勗)ㆍ성이문(成以文)ㆍ김신국(金藎國)ㆍ민경기(閔慶基)ㆍ박안현(朴顔賢)ㆍ신광립(申光立)ㆍ신요(申橈)등 제인을 유당(柳黨)이라 이르고, 남이공(南以恭)이 유당으로 들어가지 않고 먼저 일종의 논의를 창도(倡道)하였는데 김시국(金蓍國)ㆍ남이신(南以信)ㆍ박이서(朴彛叙)ㆍ임연(任兗)ㆍ임장(任章) 등이 들어가 붙었으니 세상에서 이른바 남당(南黨)이다. 인홍과 이첨의 무리들이 사설(邪說)을 주장하기를, “영경이 수상이 되어 손자 전창위(全昌尉)와 손부인 옹주(翁主)로써 임금의 의중을 탐지하고, 은밀히 내시 민희건(閔希謇)과 결탁하여 임금의 동정을 엿보게 하고, 다시 밖으로 국구(國舅)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과 결탁하여, 오로지 영창을 위하여 세자를 바꿔 세우려는 계략이 있다.”고 하니, 광해의 의혹과 두려움이 더욱 깊어졌다. 정미년에 전위하여 섭정하라는 하교를 영경이 방계(防啓)하니 이첨과 경전의 무리들이 산해의 집에 모여 의논하기를, “이것으로 보면 영경이 세자를 바꾸려하는 음모가 명백히 드러나 가릴 수 없다.” 하였다. 이에 문객(門客)을 합천(陜川)에 보내 정인홍에게 권하여 상소하게하니, 사간원 이효원과 구혜가 인홍과 이첨 무리를 귀양보낼 것을 청하였고, 김대래와 이유홍(李惟弘) 등은 인홍등을 대궐 뜰에서 국문하고자 아뢰려는 차에 임금이 승하하고 광해가 즉위하니 이른바 유당이 참혹하게 큰 화를 당하였다. 그러나 유독 서인 한 떼만은 수수방관하며 웃으면서 끝내 대북과 소북의 싸움에 참견하지 않았다. 만약 광해로 하여금 즉위한 뒤에 영창을 죽이지 않고 대비에게 효도를 다하게 하고 인홍의 무리가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광해는 한 어진 임금이 되고, 인홍은 한 명신(名臣)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경도 또한 광해에게 죄인임을 면하기는 어렵다. 《정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