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언(金 琂) 1588(선조21)∼1637(인조15)--(안)

        

  자(字)는 여윤(汝潤), 안렴사공(휘 사렴)의 후손으로 진사(進士) 낙서(洛瑞)의 아들. 청주(淸州)출신. 이이(李 珥)의 문인. 1609년(광해군1) 진사(進士)가 되고, 1615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 科)로 급제하였다.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뒤 폐모론(廢母論)에 가담하지 않아 6,7년 뒤에 겨우 봉상시 주부(奉嘗時主簿)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병조의 낭관(郎官)이 되고, 부안현감·예조정랑·병조정랑·성균관사예·예빈시정·장악원정 등을 역임하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성천부사(成川府使)로서 흩어진 관병(官兵)을 이끌어 관찰사 홍명구(洪命耉)에게 예속시켰다. 한편 의병을 모집했고, 적의 대군을 만나 항복하라는 위협을 물리치고 계속 항거하다가 살해되었다.  

 

 그 뒤 홍명구의 아들 중보(重普)의 주선으로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정려문을 세웠다. 그러나 현종 때 허적(許積)이 성천부사를 지낼 때 그의 행적이 모호하다고 하여 정표(旌表)를 환수하였다. 1680년(숙종 6)에 허적이 처형된 뒤 아들 세보(世輔) 등 삼형제의 상소로 다시 정표문제가 제기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민숙(愍肅)이다.

 

<주요 역사 자료 소개> (2004. 5. 19. 윤식(문) 제공)

 

1. 국역 국조인물고_김언(金琂)

 

▲출전 : 국역 국조인물고 제5집 39쪽~44쪽

 

묘갈명(墓碣銘).  송시열(宋時烈) 지음

 

숭정(崇禎 명 의종의 연호) 9년인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오랑캐 군사(청나라 군사)가 가득하게 퍼져 들어왔는데, 이때 성천 부사(成川府使) 김언(金琂) 여윤[汝潤 김언의 자(字)] 공이 즉시 관병(官兵)을 단속하여 이끌고 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달려가서 전부 감사(監司) 홍명구(洪命耈) 공에게 예속시킨 다음 돌아와서 곧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적(敵)의 침범하는 자들을 죽이려고 하였다.

 

당시에 호란(胡亂)이 갑작스레 일어나서 인심이 흐트러져 수습할 길이 없자, 공이 눈물을 뿌리며 군중들에게 맹세하여 ‘군장(軍長)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격동시켰는데, 얼마 안 되어 적병이 크게 닥치므로, 공이 또 군중들에게 유시하기를, “적이 찾는 것은 <부사(府使)인> 나이니, 나는 의리에 있어 당연히 죽을 힘을 다하다가 목숨을 바치겠지만, 너희들은 모두 돌아들 가도록 하라. 헛되이 죽어 아무런 이익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니, 군중이 모두 공을 위해 감읍(感泣)하였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공을 업고 달아나겠다고 청하였으나 공은 굳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적이 과연 공을 찾아서 칼을 들이대며 공에게 항복하라고 위협하기에 이르렀는데, 공은 적을 크게 꾸짖고 끝내 굴복하지 않다가 드디어 살해를 당하였으니, 때는 숭정 10년인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년) 정월 초5일이었다.

 

처음에 공이 가속(家屬)들에게 병란을 피하도록 지시해 보낼 때 여러 아들이 모두 어렸는데, 사위인 지금 광남(光南 김익훈의 호)군 김익훈(金益勳)이 막 장가가서 있던 터라 공에게 이르기를, “적봉(敵鋒)을 당할 수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가속들과 더불어 산곡(山谷)에 들어가 많은 집안 식구들을 보호할 계획을 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 죽기를 스스로 맹세하였으니, 온전한 몸으로 처자(妻子)를 보호할 수 없다.” 하였다. 일이 급하게 되자, 광남이 또 공을 당기어 억지로 일으켰지만 공은 굳게 앉아서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그 당시에 감사 홍명구 공이 공의 죽음을 듣고서 비장(裨將) 및 의복(衣服)을 보내어 시체를 염습(殮襲)하게 한 다음, 그대로 김화현(金化縣)에 이르렀다가 군사가 패하여 순절(殉節)하였다.

 

이때에 본도(本道 평안도)에서 사실을 조정에 올려 알리는 관장(官長)이 없었으므로, 홍명구 공의 아들인 의정(議政) 홍중보(洪重普) 공이 매양 그 당시의 일에 대해 오랫동안 매몰될 것을 한탄하다가, 김공의 여러 아들이 장성하게 되자 나라에 상언(上言)하여 그때의 실제 상황을 아뢰니, 현종(顯宗)께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복계(覆啓)하게 하였는데, 김남중(金南重) 공과 이일상(李一相) 공이 앞뒤로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내면서 그 사실에 의거하여 관작(官爵)을 추증(追贈)할 것과 정려(旌閭)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드디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하고 집 앞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갑진년(甲辰年 1664년 현종 5년)에 현종께서 재이(災異)로 인하여 대신들을 인견(引見)하였을 때 적신(敵臣) 허적(許積)이 공의 여러 아들에게 묵은 원한이 있어서 공에게 내린 정문을 넘어뜨림으로써 재이를 풀리게 하는 한 사건으로 삼자, 여러 아들들이 상언하여 송소(訟訴)하였는데, 지금 원임 의정(原任議政) 정지화(鄭之和) 공이 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어 여러 아들의 상언을 무고(誣告)한 것이 아니라고 여겼으나, 당시에 허적의 세력 확장이 심하여 그 원한을 풀지 못하다가 지금 주상(主上)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 허적과 그 무리가 모두 처형되어 죽자, 여러 아들들이 다시 전에 상언한 것을 거듭 올려 청하니, 사건이 다시 해조(該曹)에 내려졌다.

 

해조에서 대신에게 의논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지금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 공이 그 사실에 의거하여 법도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자 주상께서 윤허하였으나, 지금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민정중(閔鼎重) 공이 또 그 일을 중대하게 여거 ‘다시 본부(本府)의 군민(軍民)들에게 조사해 물어서 그 상세함을 얻은 다음에 시행하여도 늦지 않다.’고 청하였다.

 

민정중 공은 또 그 고을의 기생 금옥(今玉)이 같은 때에 순절(殉節)한 일을 아뢰었는데, 서로 참고하여 조사해 본 결과 온 부중(府中)의 유생(儒生) 계층의 노소(老小)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공이 산 아래에서 적을 만났을 때에 산 위에서 피병(避兵)하던 사람들이, 공은 돌을 손에 쥐고서 적을 치고 금옥은 옷으로 얼굴을 덮어 가리고서 낭떠러지에 몸을 던지는 상황을 보았다.’고 말한 것으로써 관아(官衙)의 서류를 구비하여, 이미 임금께 알리어 아울러 금옥에게도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으니, 아! 임금과 정승이 절의(節義)를 장려하고 원통함을 풀어 준 까닭은 세상에 지켜나갈 올바른 도리를 위하여 염려한 것이 지극하였던 것이리라.

 

공은 관향이 안동(安東)으로 그 선대의 계통은 실로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에게서 나왔는데, 김방경(金方慶)이란 분은 고려 때 큰 명성이 있었고, 그 뒤로 높은 관작이 대대로 빛났다.

 

공의 고조 김지(金墀)는 문의 현령(文義縣令)을 지냈고, 증조 김공연(金公衍)은 군자감 정(軍資監正)을 지냇으며, 조부 김계현(金繼賢)은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김낙서(金洛瑞)는 진사(進士)인데, 율곡 선생(慄谷先生 이이)에게 수학하여 음사(蔭仕)에 나아가지 아니하고서 시(詩)를 읊고 술 마시는 것을 스스로 즐겼으며, 승지(承旨)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전의(全義)의 대성(大姓)으로, 그의 선고(先考)는 병절 교위(秉節校尉) 이희담(李希聃)이다.

 

공은 만력(萬曆 명 신종의 연호)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 6월 2일에 태어나서,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에 상사(上舍)에 올랐고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선발되어 들어갔으나, 7~8년 뒤에 비로소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에 조용(調用)되었는데, 대개 광해조(光海朝) 때에 간악한 흉도(兇盜)들이 성모(聖母 인목대비)를 원수로 여기는 논의를 주장하자 공이 붙좇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침체되었던 것이고 또한 높이 등용할 조짐이 없었다.

 

인조(仁祖)께서 반정(反正)하여 즉시 병조(兵曹)의 낭관(郎官)에 임명하였는데, 부모 봉양을 위하여 외직에 나가 부안 현감(扶安縣監)이 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부모의 상고(喪故)를 연달아 당하여 의례를 지켜 집상(執喪)하였고, 상복 입기를 마치자 예조(禮曹)ㆍ병조의 정랑(正郞)과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임명되어, 장차 대성(臺省)에 처하게 되었으나 공과 사이가 벌어진 자의 저지하는 바가 되었다.

 

이어 예빈시 정(禮賓寺正)을 역임하고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거쳐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에 외직에 나가 영천 군수(榮川郡守)가 되었는데, 부안(扶安)에 있을 때의 일을 가지고 맡고 있는 관사(官司)에서 추후 논의하여 파직시키자, 부안 사람들이 궐문(闕門)에 와 지키면서 그의 억울함을 풀어 주어 아뢰었으므로, 서용(敍用)하여 사도시 정(司道寺正)으로 삼았다.

 

이때에 조정에서 서쪽 변경(邊境)에 임명하는 것을 신중히 여겨 공을 성천 부사로 삼았는데, 정치와 교화(敎化)가 크게 이루어지자 임금에 품계에 따른 의복(衣服)을 내려 포창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에 이르러 청(淸)나라와의 틈새가 벌어져서 서도(西道)의 수령을 모두 무신(武臣)으로 교체 임명하였는데,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상신(相臣) 김유(金瑬) 공이 ‘성천(成川)에는 어진 정치를 넉넉하게 베풀어 위급할 때 힘을 얻는다.’고 하여 드디어 바꾸지 않았었다.

 

이 해 겨울에 백성들은 모두 피란할 짐을 꾸리어 놓고서 변고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공은 하늘을 우러러보고 탄식하기를, “는 관수(官守)의 직임에 있으니, 분의(分義)로 보아서 당연히 떠나지 말아야 될 것이다. 살기를 탐내어 구차스레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라고 하더니, 마침내 그 말과 같이 하였다.

 

공이 가정에 거처할 때는 선행(善行)이 있었고 관직에 있을 때는 훌륭한 공적이 있었으며, 또 그의 선공(先公)께서는 대현(大賢 율곡을 지칭함)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으므로 사우(師友)들이 모두 높이 받들었는데, 마침내 시례(詩禮)의 교훈이 있는 집안의 명재(名宰)와 서로 혼인하는 계합(契合)을 이루게 되었다.

 

공은 처음에 군수(郡守) 최응주(崔應周)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김세홍(金世弘)을 낳았고 딸은 승지(承旨) 유도삼(柳道三)에게 출가하였다.

 

후취(後娶)는 국성(國姓)인 이씨(李氏)로, 세종 대왕의 6대손인 이선립(李先立)의 따님이고 직제학(直提學) 홍종록(洪宗祿)의 외손녀인데, 경자년(更子年 1600년 선조 33년) 11월에 태어나서 갑인년(甲寅年 1674년 현종 15년) 정월 6일에 졸하였다. 공의 묘소는 광주(廣州) 기자산(其自山) 가자동(加資洞)에 있는데, 부인 이씨를 합부(合祔)하였다.

 

공은 처음에 원종 공신(原從功臣)으로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가 여러 번 추증이 더해져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고, 이씨는 참 고명(誥命)을 받아 정부인(貞夫人)이 되었다. 부인은 성질이 온화하고 유순한 데에다 몸 가지는 법도가 엄격하고 올발라서 과수(寡守)로 산 지 38년 동안에 가도(家道)가 이지러짐이 없었으니, 대개 효경(孝敬)에 주관점을 두어서 여러 가지 행동이 모두 갖추어진 것이었다.

 

맏아들 김세보(金世輔)는 일찍이 현감(縣監)이 되었고, 다음 김세필(金世弼)은 좌랑(佐郞)이며, 셋째 김세익(金世翊)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판관(判官)이다. 사위는 곧 광남(光南 김익훈)이다.

 

현감의 아들은 김광원(金光遠)ㆍ김광적(金光績)ㆍ김광도((金光道)이고 딸은 참봉(參奉) 황이장(黃爾章)에게 출가하였다. 좌랑의 두 딸은 사인(士人) 이지윤(李志尹)ㆍ신도동(辛道東)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판관의 아들은 김광석(金光錫)이고 두 딸은 사인(士人) 조의헌(趙儀獻)과 화릉 도정(花陵都正) 이조(李洮)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광남의 아들은 수찬(修撰) 김만채(金萬埰)와 생원 김만선(金萬墡)이다.

 

아! 의병을 모집하였고 일이 버려지자 목숨을 바쳤던 실상이 온 부중(府中)의 듣고 본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나서 이미 입으로 전하여 옮겨지는데도, 저 소인(小人)은 성인(成人)의 아름다움을 즐겁게 여기지 않고 기회를 틈타 원한을 풀려고 하여, 위로는 임금의 들음을 속이고 아래로는 백성의 이륜(彛倫)을 무너뜨렸으니, 통탄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다행스럽게도 흉도(兇徒)의 괴수를 죽여 없애자 공의(公議)가 빙 돌아 조정에서 다시 사민(士民)들이 바친 서장(書狀)과 유생들이 상서(上書)한 것에 의거하여 정문을 세운 은전(恩典)이 거듭 새롭게 되었으니, 옛날 태사공(太史公 한나라 사마천)이 형가(荊軻)에 대하여 전하면서 한 약의(藥醫)의 일로 증거하였고, 유후(留侯)에 대하여 기록하면서 한 화공(畵工)의 일로 증거하였는데, 하물며 온 경내(境內)의 질박한 사민들의 말이겠는가?

 

아! 공이 치켜세워지고 낮추어지는 것은 곧 세도(世道)의 쇠퇴함과 융성함에 관계될 것일진저. 기생 금옥이 낭떠러지에 투신(投身)한 것에 이르러서는 또한 공의 일로 인해서 아울러 드러났으니, 민정중 공의 청한 것은 대개 회옹 선생[晦翁先生 주자(朱子)]이 주 봉사(朱奉使)의 절개를 기록함으로 인하여 오대산(五臺山)의 의승(義僧)인 진보(眞寶)를 아울러 기록한 뜻을 인용한 것이다.

 

그 일이 더욱 기이하도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구독(溝瀆)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더라면, 사람들이 혹시 알지 못했을 것인데, 공이 산하(山下)에서 죽었으니, 사민(士民)들 이사(異辭)가 있지 않았도다.

 

부정(不正)한 말 늘어놓아 공격하니, 저는 어떠한 사람이었던가? 대신과 명경(明卿)이야 어찌 공에게 사정(私情)을 두어, 임금의 들음을 감히 속이겠는가?

 

공에게 대하여 알려고 하는 자 있거든, 대체로 그가 치켜세워지고 낮추어진 시기(時期)를 볼지어다.

 

 *묘갈 원문 (2005. 2. 16. 주회(안) 제공)

 

출전 : 宋子大全 卷一百七十三

 

墓碣

 

成川府使金公墓碣銘 幷序

 

崇禎九年丙子。虜兵充斥。時成川府使金公?汝潤。卽團束官兵。馳往慈母山城。盡以屬諸監司洪公命?。歸卽召募義旅。欲以殺賊之侵?者。時亂起倉卒。人心渙散。莫可收拾。公?泣誓衆。激以死長之義。俄而賊兵大至。公又諭衆曰。賊之所求者我也。我則義當效死。爾等皆去。徒死無益也。衆皆爲公感泣。其中一人請負公跳。公固不許。賊果尋公。至以刃脅降公。公大罵賊終不屈。遂遇害。時十年丁丑正月初五日也。始公指送家屬使避兵也。諸子皆幼稚。外甥今光南君金益勳新居甥館。謂公曰。賊鋒不可當。?與家屬入山谷。爲百口計乎。公曰。吾以死自誓。不可爲全軀保妻子之計。及事急。光南又挽公?起。公堅坐不動。其時監司洪公聞公死。遣裨將及衣服。使之殮屍。而因至金化縣。軍敗殉節。時本道無官長上事以聞。洪公胤議政公重普每歎其久爲埋沒。諸子旣長。上言以白其實狀。顯廟命有司覆啓。金公南重,李公一相前後判禮曹。據其實。請贈官旌閭。遂贈吏曹判書。設棹楔于家。歲甲辰。顯廟因災異。引見大臣。賊臣許積有宿憾於公諸子。以?公旌門爲?災之一事。諸子上言訟之。而今原任議政鄭公知和爲刑曹判書。以諸子言爲非誣也。時積勢張甚。其?未伸。今上庚申。積與其徒皆伏法而死。諸子復伸前言以請。事復下該曹。該曹請議于大臣。今領議政金公壽恒據其實。請施行如章。上允之。今判府事閔公鼎重又重其事。請更査問於本府軍民。更得其詳然後施行未晩。閔公又白其邑妓今玉同時殉節事。以相參驗。一府儒品老少一口言公遇賊山下。山上避兵人見公手石擊賊。今玉蒙面投崖狀。案牘備具。旣上聞。?旌今玉門。嗚呼。君相所以奬節義伸?枉。爲世道慮者至矣。公安東人。其系實出新羅敬順王。有方慶有大名。其後簪纓赫世。高祖?(지)文義縣令。曾祖公衍軍資監正。祖繼賢贈參議。考洛瑞進士。受學於栗谷先生。不就蔭仕。以詩酒自娛。贈承旨。?李氏。全義大姓。其考秉節校尉希聃也。公生于萬曆戊子六月二日。己酉陞上舍。乙卯捷文科。選入槐院。七八年後。始調奉常主簿。蓋當光海朝。姦兇主?母議。公以不附。故沈滯甚久。而亦無幾微色。仁祖反正。卽拜騎省郞。爲養出爲扶安縣監。未幾。連遭內外艱。執喪以禮。服?。拜禮兵曹正郞,成均館司藝。將處以臺省。爲修隙者所沮。歷禮賓寺正。由掌樂正。戊辰。出爲榮川郡守。以扶安時事。所司追論而罷之。扶安人守闕伸白其?。敍爲司?寺正。時朝廷重西任。以公爲成川府使。政化大成。上賜品服以褒之。逮丙子虜?已啓。西路守令。皆以武臣換差。昇平金相公?以爲成川綽有惠政。緩急可以得力。遂不易。冬。民皆荷擔以待變。公仰天歎曰。職在官守。義當勿去。偸生苟活。非我志也。卒如其言。公居家有善行。在官有嘉績。且以其先公出入大賢門下。士友皆推重之。卒與詩禮家名宰成朱陳契。公初娶郡守崔應周女。生子世弘。女適承旨柳道三。繼娶國姓李氏。世宗大王六世孫先立之女。直提學洪宗祿之外孫。生于庚子十一月。卒于甲寅正月六日。公墓在廣州其自山加資洞。李氏?焉。公始以原從功贈參判。屢贈至左贊成。李氏受眞誥爲貞夫人。夫人性質溫柔而儀度嚴正。寡居三十八年。家道無虧。蓋主於孝敬而群行皆備焉。長子世輔。曾爲縣監。世弼佐郞。世翊判官文科。女壻卽光南也。縣監男光遠,光績,光道。女適參奉黃爾章。佐郞二女適士人李志尹,辛道東。餘幼。判官男光錫。二女適士人趙儀獻,花陵都正?。餘幼。光南男修撰萬埰,生員萬?。嗚呼。召募義旅。事去立?之狀。昭著於一府耳目。已成口碑。而小人不樂成人之美。乘時逞憾。上誣天聰。下壞民?。可勝痛哉。幸而兇魁誅除。公議旋行。朝廷更據士民之供狀及儒生上書。旌典重新。昔太史公傳荊軻。徵一藥醫。記留侯。徵一?工。況於闔境質爾之士民哉。噫。公之屈伸。卽關世猷之汚隆哉。至於玉妓之投崖。亦因公而?著。閔公之請。蓋用晦翁先生因記朱奉使節。而?記五臺僧義眞之義也。其事尤奇矣。銘曰。

 

自經於溝瀆。人或莫之知也。而公之死於山下。士民罔有異辭。設淫辭而攻之。彼何人斯。惟大臣與名卿。豈私公而天聰敢欺。有欲知公者。蓋觀其屈伸之時也。

 

형태서지   권수제 宋子大全   판심제 宋子大全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1787年刊   권책 卷首, 目錄 2권, 原集 215권, 附錄 19권 합 102책   행자의 수 10행 20자    반곽의 크기 22.5×17.8(㎝)    어미 上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번호 奎3542    총간집수

 

저자

 

성명 송시열(宋時烈)    생년 1607년(선조 40)    몰년 1689년(숙종 15)    자 英甫    호 尤庵, 華陽洞主, 南澗老?, 橋山老父    본관 恩津    시호 文正     아명 聖賚

 

3. 민숙공 김언관련 각종 자료 조사서 (2002. 4. 3. 주회(안) 제공)

 

지난 토요일에 충북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에 있는 안렴사공 金士廉(김사렴) 묘역에 다녀 왔습니다. 재실인 永慕齋(영모재)에 민숙공 김언의 자료가 있어 이 자료와 관련기록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愍肅公(민숙공 김언) 할아버님의 약력

-1994년 2월 14일 (순절 357주기 기념)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좌승지공파 종친회

 

愍肅公(민숙공) 할아버님의 약력 (1994. 2.14  기록)

 

1. 서기 1588년, 선조21년 음력 6월 탄생, 거금 406년전임

2. 아버님 진사로 洛瑞(낙서), 율곡 선생의 문하생, 평생 불출사, 詩畵(시화)로 벗하고 유유자적, 승정원 좌승지 추증됨, 어머님 전의이씨 병절교위 지내신 희담의 따님

3. 서기 1615년 (28세시) 문과급제, 상봉주부 벼슬 7-8년간 계심, 광해군 폐모론에 불참하여 미관직에서 오래 계심, 36세시 인조반정으로 기성랑으로 승차

4. 부안현감으로 계실적, 양친이 연이어 돌아가심, 시기하는 자 있어 무고함에 오래 한직에 계심

5. 41세시, 영천군수로 재직시, 무안현감시 궐례로 탄핵받아 파직됨 (집상중궐례로)

6. 부안 관민이 무고함과 선정치적을 진정하야 복관되시고 사도사정으로 승차하심

7. 성천부사가 되시고, 선정으로 인조임금께서 품위를 높이고 표창하심

8. 병자년, 서기 1636년에 청나라 사정이 급박함에 서북지방 관장을 모두 무신으로 교체하였으나, 영상 김류가 공의 선치적과 민심이 따름을 들어 유임시킴

9. 병자년 12월 9일, 청태종이 20만 대군으로 압록강을 도하침공, 불과 7일만에 (12월 15일)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피함

10. 평양감사 홍명기의 명으로 자모산성으로 달려가 합류함

11. 평양감사 홍명기가 아무 연락 없이 딴 곳으로 가버림에 홀로 의병을 초모하여 적과 대치함

12. 상부와 연락이 두절되고, 고립무원으로 민심이 경동하여 관병의 이탈자가 속출함에 세궁력진 상태에 빠짐

13. 대세가 돌이키기에 불가능함에 관, 병, 민을 해산시킴 (가전에는 米, 布를 분배하였다 함)

14. 잔여 관, 민, 병이 같이 죽기를 간청하고 사위 金益勳과 시위병이 없고 달아나라 함에 크게 꾸짖고 죽기를 맹세하고 후일을 도모하라 이르시고 해산시킴

15. 소수의 시종 군사와 더불어 산성에서 돌로 적과 싸우시다가 적의 칼아래 쓰러지심

16. 적장이 항복하기를 권하나, 공께서 목숨이 끊어질때까지 크게 꾸짖고 불절하여 끝내 해를 입으심. 때는 인조15년 (정술년) 정월 초5일 (서기 1637년) 이며, 거금 352년전임

17. 당시 공의 가속이 각기 흐트러져 큰 환난을 당함, 世輔 15세, 世弼 7세, 世翊 4세였음

18. 감사 홍명기가 비장과 의복을 보내어, 공의 시선과 의대를 수습시키고 그는 김화현에서 청과 싸우다가 전사함

19. 그후 난리가 끝나고 세상이 안정됨에 경기도 광주군 기자산에 안장하시고, 후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墓碣문을 쓰심 (가전에 의하면 의대와 유품만을 가지고 쓴 허묘였다 함)

20. 초취부인 경주최씨 아들 世弘 벼슬 통덕랑 일찍 별세 (21세) 무후, 딸 한분 柳道三에게 출가, 최씨부인 묘는 오창면 양대리 뒷산, 시아버님 승지공 묘소옆에 있음

21. 재취부인 전주이씨로 세종대왕 6세손 李先立의 딸임, 남은 世輔, 世弼, 世翊과 1년 (광남군 金益勳에게 시집감) 두시고, 서기 1675년 정월 초6일 돌아가심, 향년 76세, 38년간 홀로 의도를 엄중히 하고 가도를 확립함에 가문을 지키고, 어린 세 자녀를 훌륭히 키워 출세시켰음, 묘소는 할아버님과 합장함, 현재 우리 모은 후손은 전주이씨 할머님의 후손임

22. 성천부 관기 今玉이 오래도록 할아버님을 모시다가 자모산성에서 끝까지 남아 돌을 나르다가 도우며 싸웠음. 후에 성천부민이 감격하여 貞節廟閣(정절묘각)을 세우고, 후에 다시 숙종 임금님께서 旌門(정문)을 세우도록 허락하여, 현재 성천에 현존한다 함

23. 난리가 끝나고 세상이 안정되었으나, 조정에 무고하는 무리있어 할아버님의 거룩한 죽음이 표상되지 못하여 영상을 지낸 홍중보가 항상 한탄하였으나 어찌하지 못하고 필경 둘째 아드님 世輔 할아버님이 장성하여, 그 실정과 억울함을 끈질기게 탄원하고 그치지 않으셨음

24. 예조판서 김남중, 이일상이 주청하여 현종임금께서 이조판서 추증하시고, 본가에 旌閭問(정려문) 세워 표창함 (때는 현종5년, 서기 1664년으로 순절후 27년만이었음)

25. 현종때 영의정 허적이 사사감정으로 비방 무고하여, 정려문을 헐고 묘갈을 땅에 묻었음 (장차 청나라의 노여움을 사서 나라에 재앙이 닥친다고 함)

26. 서기 1680년 허적이 역적으로 주멸됨에 자손들이 다시 탄원, 예조에서 재논의 영의정 김수항께서 주청하여 판부사 민승중에게 사실규명을 명함. 민승규 성천부 현지에 가서 직접 성천부 관민을 상대로 현지조사함

27. 할아버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관, 민, 병들과 장렬하게 순절하심을 목도한 백성들이 한결같이 그 행적을 똑똑히 증언하고 입증함 (가전에 의하면, 이미 전에 할아버님과 기생 금옥의 사당을 주민 스스로 지어놓고 추모하고 있었다 함)

28. 숙종 임금님께서 민승중의 복명과 성천부민, 유생의 탄원으로 본가에 정려문을 다시 복권시키고, 성천부에 사당과 순절비를 세우게 하시고, 묘비와 묘갈을 다시 세우게 하심 (묘소 : 광주군 기자산 가좌동 자좌 있었다 함)

29. 현종 임금님때에 이조판서로 추증, 다시 좌찬성으로 높이고 정종(=정조)때 민숙공이라 시호내림. 두부인 모두 정부인 교지 받음

 

▣ 김언 (金 王+言) (1588-1637)

김공연(金公衍)- 김계현(金繼賢)- 김낙서(金洛瑞)- ★김언, ▶형 김욱(金頊)

생년(生年) 1589년, 기축

소과(小科) 1609(기유) 생원시

광해군(光海君)7년(1615년), 식년시(式年試) 병과6(丙科6)

 

<민족문화대백과사전>

 金王+言(김언)

1588(선조21)-1636(인조14). 조선 인조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은 汝潤(여윤). 아버지는 진사 洛瑞(낙서)이다.

1609년(광해군1) 진사가 되고

161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뒤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아 7,8년뒤 겨우 봉상시주부에 머물렀다.

인조반정후 부안현감, 예조정랑, 병조정랑, 성균관사예, 예빈시정. 장악원정 등을 역임하고 1628년(인조6)에 영천군수를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천부사로서 흩어진 관병을 정렬하여 관찰사 홍명구에게 예속시키고 의병을 모집하여 적의 진로를 막고 항거하다가 전사하였다.

그뒤 홍명구의 아들 중보의 주선으로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정려문을 세웠다.

그러나 현종때 허적이 성천부사를 지낼 때 그의 행적이 모호하다고 하여 旌表를 환수하였다. 1680년(숙종6)에 허적이 처형된뒤 아들 世輔등 삼형제의 상소로 다시 정표문제가 제기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愍肅(민숙)이다.

참고문헌 광해군일기 현종실록 숙종실록 국조인물고 국조방목 <徐信錫>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target=_blank>http://www.koreandb.net/)>

 

8. 김언(金언)

시대 조선

생몰년 1588-1636(선조21-인조14)

본관 안동(安東)

자 여윤(汝潤)

시호 민숙(愍肅)

활동분야 문신

다른 이름

1588(선조 21)∼1636(인조 14).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여윤(汝潤). 아버지는 진사 낙서(洛瑞)이다.

1609년(광해군 1) 진사가 되고 161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된 뒤 폐모론에 가담하지 않아 7, 8년 뒤 겨우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에 머물렀다.

인조반정 후 부안현감·예조정랑·병조정랑·성균관사예·예빈시정·장악원정 등을 역임하고 1628년(인조 6)에 영천군수를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성천부사로서 흩어진 관병을 정렬하여 관찰사 홍명구(洪命耉)에게 예속시키고 의병을 모집하여 적의 진로를 막고 항거하다가 전사하였다.

그뒤 홍명구의 아들 중보(重普)의 주선으로 조정에서는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정려문을 세웠다.

그러나 현종 때 허적(許積)이 성천부사를 지낼 때 그의 행적이 모호하다고 하여 정표(旌表)를 환수하였다.

1680년(숙종 6)에 허적이 처형된 뒤 아들 세보(世輔) 등 삼형제의 상소로 다시 정표문제가 제기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민숙(愍肅)이다.

참고문헌 : 光海君日記, 顯宗實錄, 肅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徐信錫〉

 

<오창지>

공은 안렴사의 10세손이고 참봉 洛瑞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성천부를 맡았는데 병자호란에 오랑캐가 발호하였다. 공은 성을 지키고 힘을 다해 싸우며 적을 꾸짖고 굽히지 않다가 끝내 나라를 위해 죽었다.

이 사실이 보고되자 정려문을 세우고 여러번 추증하여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를 민숙공이라 하였다.

묘갈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짓고 학사 김공 鎭商이 썼으며 죽천 김공 鎭圭가 두전을 하였다.

 

<청원군지 (1990.12)>

김언 (1589-1636)

조선조의 충신 김언은 본관은 안동. 자는 沃潤, 청원군 오창면 양지리에서 김낙서의 아들로 태어났다.

율곡 이이의 문인으로 광해군1년 (1609)에 진사가 되었으며, 광해군7년(1615)에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등용되고

인조반정으로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여러 벼슬을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는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항복하라는 위협을 물리치고 항전하다가 전사하여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愍肅公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현종2년(1661)에 정문이 세워졌다.

묘소는 청원군 오창면 복현리에 있으며 송시열이 지은 묘갈이 있다.

문헌 : 청주시지

 

<문과방목>

김언(金<0x3D0A>)

광해군(光海君)7년(1615년), 식년시(式年試) 병과6(丙科6)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89년, 기축

자(字) 여윤(汝潤)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낙서(金洛瑞)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계현(金繼賢)

증조부(曾祖父) 김공연(金公衍)

외조부(外祖父) 이희담(李希聃)

처부(妻父) 이선립(李先立)

형(兄) 김욱(金頊)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609(기유) 생원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사정&(寺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