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후(金永煦) 1292(충렬왕18)∼1361(공민왕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1325년(충숙왕 12) 7월 산원(散員) 장세(張世)가 소윤(少尹) 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은 사건이 일어나자 지평으로서 장령 김원식(金元軾)과 함께 총신(寵臣)의 비호를 물리치고 치죄(治罪)를 청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부처의 화상을 바쳤으며, 충혜왕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申靑)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그의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하여 중서성에 올릴 때 이를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

 

1341년(충혜왕 복위 2) 6월 조적(曺由頁)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왕을 시종한 공으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서 일등공신에 봉해지고 전(田) 100결과 노비 10구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심양왕 고(瀋陽王 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았다.

 

1343년 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끝까지 남아 있다가 창에 맞기도 하였다.

 

1344년 10월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고, 이듬해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1346년 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352년(공민왕 1)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356년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묘소는 실전이며  충북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의 안렴사공 묘소 묘역에 영단을 모셨다. 시제일은 음력 10월 5일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朴天植〉

 

<좌-정간공 단소.   우-영삼사공 단소> (충북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정간공 단소>

 

<영삼사공 단소>

 

■ 정간공 연보 (정리 : 김주회)

 

○1292(충렬왕18)∼1361(공민왕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국헌(菊軒)<급암시급, 척약재학음집>. 온재(穩齊)<화해사전>.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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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세) 1339년(충숙왕복위8) 4월 삼사우윤(三司右尹)으로 원나라에 가서 부처의 화상을 바쳤으며, 충혜왕이 자신을 헐뜯던 신청(申靑)을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그의 죄상을 행성(行省)에서 기록하여 김영후(金永煦)에게 주어서 중서성에 제출하게 하였다.  

 

김영후는 그 매부 별가불화(別哥不花)가 당시 원나라 평장사(平章事)였으며 왕에게는 양이형제(兩姨兄第)의 관계가 있는 까닭에 왕이 김영후에게 초 1백 정(錠)과 능직 비단 15필, 모시 30필을 주어 보냈다.  

 

 

 

○(50세) 1341년(충혜왕복위2) 6월 조적의 난으로 왕이 원도(元都)에 갔을 때 간신들이 변란을 꾸몄으나, 삼사우사로서 왕을 시종한 공으로 정승 채하중, 상락(上洛)부원군 김영돈(金永旽), 언양군 김륜(金倫), 김해군 이제현, 성산군 이조년, 첨의평리 한종유 등과 1등 공신으로 봉해져 벽상에 그들의 화상을 그리게 하고 그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7품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조카나 생질에게 대신 줄 것이며 사위는 8품 직을 주고 토지 1백 결(結)과 노비 10명을 받았다.

 

또한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등은 2등 공신으로 정하며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올려 작위를 주고 아들 한 명에게 8품 직을 제수받고, 아들이 없으면 그 대신 사위에게 9품 직을 제수하고 토지 70결과 노비 5명을 받았다.

 

○(51세) 이듬해에는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고,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임명되었다.

 

○(52세) 1343년(충혜왕 계미후4) 봄 2월 갑진일에 왕이 용사(勇士)들을 거느리고 씨름을 구경하다가 밤에 좌우사 낭중 김영후와 같이 북궁(北宮)에서 술을 마시었는데 김영후가 취하여 누우니 왕이 곁에 있던 사람들을 시켜 그를 부축하여 말 위에 올려 앉히고 마부를 불러 이르기를 “네 주인 낭중이 자기 타던 말을 나에게 선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튿날 김영후가 이내 그 말을 왕에게 바쳤다.

 

1343년 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홀로 김영후만은 왕을 호위하고 있으면서 1장 8척의 창을 맞았다.

 

1343년(충혜왕4)에 征東省郞으로 있었다. <안축의 근재집중 상주객관중영기>

 

○(53세) 1344년 10월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고, 이듬해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55세) 1346년 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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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 1356년(공민왕5, 병신년) 2월 갑술일에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70세) 1361년(공민왕10 신축) 5월 임술일에 상락후(相洛侯) 김영후(金永煦)가 나이 70세로 죽었는데,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주 해설>

 

심양왕 瀋陽王

 

고려시대 원(元)나라에서 고려 왕 또는 왕족에게 수여했던 봉작(封爵)의 일종. 1308년(충렬왕 34) 고려의 전왕(前王)인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봉한 것이 시초이다. 이것은 당시 심양(瀋陽) 등지에 고려인 전쟁포로나 유민들이 거주하여 특수한 지역을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교통·군사·경제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것으로, 심양에 대한 통치권한을 어느 정도 인정하여 주었다. 이후 심왕(瀋王)으로 개칭되었는데, 충선왕의 조카인 연안군(延安君) 고(暠)가 심왕이 된 뒤부터는 실권행사가 어렵게 되어 명예적인 봉작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 견제심리에 의해 반목과 질시의 대상이 되어 심양왕의 지위를 둘러싸고 분규가 잦았으며, 고려 조정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무리들이 심양왕과 결탁, 심양왕을 왕으로 추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관계를 교묘히 이용한 원나라는 쇠약해진 국력으로도 고려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주도적으로 군림했던 것이다.

 

조적(曺?)1

 

?∼1339(충숙왕 복위 8). 고려의 반역자.

 

의흥군(義興郡) 역리출신(驛吏出身)이라고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충렬왕 때 환관들과 결탁하여 권세를 내외에 떨쳤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왕의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승진하여 우상시(右常侍)에 이르렀다.

 

1312년(충선왕 4)환관을 바치고자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320년(충숙왕 7) 선부전서(選部典書)가 되었다.

 

1323년에는 만호로서 원나라에 공물을 바친 일도 있다. 일찍이 염승익(廉承益)의 서녀(庶女)와 혼인하였는데, 장인의 외손인 정안군(定安君) 허경(許慶)과 재물을 놓고 다투다가 최안도(崔安道) 등의 직설로 왕의 미움을 사자 호군인 고자영(高子英) 등과 몰래 원나라로 도망하였다.

 

그뒤 채하중(蔡河中)과 더불어 ★심양왕 고(瀋陽王暠)에 아부하여 갖은 모략으로 충숙왕을 비방함으로써 원나라 조정으로 하여금 왕을 불신하도록 조장하였으며, 다시 ★심양왕의 고려왕으로의 즉위를 노려 1324년에는 원나라에 거주하는 고려인 2, 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과 중서성에 충숙왕을 헐뜯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1327년에 왕으로 하여금 ★심양왕에게 선위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조년(李兆年) 등의 반대로 취소되자 왕이 귀와 눈이 멀어 정사를 처리하지 못한다고 무고하였다.

 

1328년에 원나라의 태정제(泰定帝) 가 평장사(平章使) 매려(買驪)와 사인(舍人) 역특미실불화(亦?迷失不花)로 하여금 진상을 조사하도록 명하자 매려 등과 함께 고려에 돌아왔으나, 무고임이 드러나자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1332년(충혜왕 2)선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자 ★심양왕과 함께 귀국하여 지밀직사(知密直事)가 되고, 이듬해 찬성사를 거쳐 1338년(충숙왕 복위 7)에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에 올랐다.

 

이듬해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이 복위하자 ★심양왕과 함께 원나라로 가던 도중 평양에 이르러 충숙왕 비인 경화공주(慶華公主)로부터 충혜왕의 음란함을 듣고 왕의 폐위를 공언하고 개경에 돌아와 전 호군 이안(李安) 등을 순군수령(巡軍首領)으로 삼아 국인(國印)을 영안궁(永安宮)에 감춘 뒤 무리 1, 000여명을 이끌고 충혜왕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林英正〉

 

심양

 

우리에게 봉천이라는 옛 이름으로 더 다가오는 도시이다. 원래 이름이 심양이었던 이곳은 청나라 때 봉천, 국민당 정권 때 심 양, 일제의 만주사변 후 봉천 등으로 여러 번 이름이 바뀌었으나 공산 정권 수립 후 심양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여기가 옛 부여.고구려의 땅이었는데, 고려 때는 '심양왕'이 설치되어 있기도 했다. 원나라가 고려로부터 항복을 받고 1308년 에 고려 왕자가 이 곳 심양왕이 되어 그 지방을 다스리게 한 것이다. 이 지방에는 고려인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반란을 염려하여 고려인으로 심양왕을 세운 것이다. 심양왕은 심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와 같이 고려 때까지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살던 고장이었다

 

1. 기타자료

 

 1)<신증동국여지승람 내 기록 내용> (2003. 4. 25. 윤만(문) 제공)

 

▣ 제3권 p427<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영후(金永煦)>

--김영후(金永煦) : 순(恂)의 아들이다. 성품이 엄숙하고 침중하였다. 친척이나 친구 중에 빈곤한 사람이 있으면 구휼해 주지 않음이 없었다. 충혜왕(忠惠王)이 원(元) 나라에 붙잡혔을 때에 모든 관원들은 다 달아나 숨었으나 홀로 영후(永煦)만은 왕을 호위(護衛)하다가 창에 찔리었다. 그의 손자는 사형(士衡)ㆍ사안(士安)이다. 나이가 20세를 넘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째서 외손자들을 위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손자들이 과연 현능(賢能)하다면 국가가 스스로 등용할 것이며, 현능하지 않다면 비록 벼슬을 얻은들 그 벼슬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다 탄복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2)<동사강목 내 기록> (2003. 7. 19. 태서(익) 제공)

 

  (1)을축년 충숙왕 12년(원 진종 태정 2, 1325) 추7월

 

만인(蠻人)왕삼석(王三錫)이 잡술로 왕에게 총애를 받아 사부(師傅)라 칭했는데 돈을 받고 관직을 팔아 옥사(獄事)를 처리하였다. 그의 처형(妻兄) 장세(張世)가 소윤(少尹)임준경(林俊卿)의 말을 빼앗았으므로 헌부(憲府)가 추궁하여 다스리니, 장세가 개물의 집에 와서 칼을 뽑아 자신을 찌르며 고함을 질렀다. 헌사가 세를 옥에 내리고 예궐(詣闕)하여 죄주기를 청하였는데, 삼석이 중간에서 왕에게 아뢰지 않고 개물을 매 때리고 제 마음대로 세를 석방하였다. 개물과 장령(掌令)김원식(金元軾), 지평 김영후(金永煦) 등이 예궐하여 세에게 죄주기를 청하니, 왕은 삼석의 말을 먼저 받아들여 노해서 일을 아뢴 자를 때렸다. 그래서 헌사가 문을 닫고 일을 보지 않자, 왕은 근시(近侍)를 보내어 일을 보라고 유시하면서,

 

 “상왕을 장사지낸 뒤에 삼석의 죄를 다스리겠다.”

 

하였다. 개물은 병을 핑계하여 사직하고 나오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가 관직을 떠남을 애석하게 여겼는데, 얼마 후에 졸하였다.

 

개물은 사람됨이 강정(剛正)하고, 사람들과 한결같이 믿음으로 사귀었으며, 시문(詩文)ㆍ글씨가 다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영후는 방경(方慶)의 손자이다.

 

 (2)기묘년 충숙왕 후 8년(원 순제 지원 5, 1339) 하4월

 

신청(申靑)을 옥에 가두었다. 청은 역리(驛吏)로서 고(暠)의 종자(從者)가 되어 심저(瀋邸)에서 대행왕(大行王)의 총애를 받아 상호군(上護軍)에까지 이르렀다. 왕이 정사에 게을러지자 청은 왕의 위엄을 빌어 권력을 부렸으며, 박청(朴靑)ㆍ이청(李靑)과 함께 명성이 같아 당시에 삼청(三靑)이라 불렸다.

 

대행왕이 매번 폐왕의 과실을 말하니 그의 종신(從臣)인 조익청(曺益淸)ㆍ윤환(尹桓)이 왕에게 친압(親狎)하던 나쁜 무리들은 제거할 것을 모의하고 청을 시켜 도모하게 하니, 청은 이때 순군천호(巡軍千戶)로 왕지(王旨)를 칭탁하고 나쁜 무리 가운데서 더욱 심한 자인 송팔랑(宋八郞)ㆍ홍장(洪莊) 등을 잡아 가두고 매우 심하게 고문하므로 왕이 여러 번 석방시키려고 청을 불렀으나 청은 가지 않았다. 왕이 그것에 감정을 품고 권성사(權省事)홍빈을 시켜 청을 칼을 씌워 이문소(理問所)에 가두고 기로(耆老)인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권보(權溥) 등에게 명하여 청의 죄를 낱낱이 행성(行省)에 고하게 하니, 행성에서는 그것을 김영후(金永煦)에게 주어 중서성(中書省)에 올리게 하였다. 드디어 청을 순군옥(巡軍獄)에 이송(移送)하고는 송팔랑에게 청의 입에 똥을 칠하게 하고, 얼마 후에 청의 가산을 적몰(籍沒)하였다.

 

 (3)임오년 충혜왕 후 3년(원 순제 지정 2, 1342) 하6월

 

조적(曺?)을 토죄(討罪)한 공을 논하여 윤석(尹碩) 등에게 공신호(功臣號)를 하사하였다. 윤석ㆍ채하중(蔡河中)ㆍ이능간(李凌幹)ㆍ홍빈(洪彬)ㆍ김영돈(金永旽)ㆍ임자송(任子松)ㆍ김륜(金倫)ㆍ김인연(金仁沇)ㆍ이제현(李齊賢)ㆍ이조년(李兆年)ㆍ한종유(韓宗愈)ㆍ김영후(金永煦) 등 무릇 50여 인이었다.

 

 (4)계미년 충혜왕 후 4년(원 순제 지정 3, 1343) 11월

 

22일(갑신)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교외에 마중나가 행성(行省)에서 조서(詔書)를 듣는데, 타치ㆍ내주 등이 왕을 발길로 걷어차면서 포박하였다. 왕이 다급하여 고원사(高院使)를 부르니 용보가 왕을 꾸짖었고, 사신으로 온 자들이 모두 칼을 빼어들고서 시종하던 불량배들을 붙잡으니, 백관들이 모두 달아나 숨었다. 낭중(郞中) 김영후(金永煦) 등이 창에 맞고, 지평(持平)노준경(盧俊卿)과 용사 2명이 피살되었으며, 다친 사람이 매우 많았다.

 

 (5)갑신년 충혜왕 후 5년(원 순제 지정 4, 1344) 10월

왕후(王煦)를 좌정승으로, 김륜(金倫)을 우정승으로, 김영후(金永煦)ㆍ강윤성(康允成)을 찬성사로 삼았다.

 

 (6)을유년 충목현효왕(忠穆顯孝王) 원년 (원 순제 지정 5, 1345)

○ 정방(政房)을 다시 설치하였다. 찬성사박충좌(朴忠佐)ㆍ김영후(金永煦)와 참리(參理)신예(辛裔)ㆍ지신사(知申事)이공수(李公遂)를 제조관(提調官)으로 삼았다.

 

하4월 김영후(金永煦)를 좌정승으로, 박충좌(朴忠佐)를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손수경(孫守卿)ㆍ안축(安軸)을 찬성사로 삼았다. 동12월 왕후를 파면하고, 김영후(金永煦)를 우정승으로, 인승단(印承旦)을 좌정승으로, 이곡(李?)을 밀직사(密直使)로 삼았다.

 

 3) 상락후(上洛侯) 김영후(金永煦)의 졸기(卒記)  (2003. 10. 11. 윤만(문) 제공)

 

  ≪출전 : 동사강목 제14하 공민왕10년 5월(원 순제 지정 21, 1361)≫

 

--상락후(上洛侯) 김영후(金永煦)가 졸하였다.

--김영후 는 성품이 엄중(嚴重)하여 친척이나 친구 사이에 빈궁한 자가 있으면, 그 위급한 것을 구제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의 손자 사안 (士安)ㆍ사형(士衡)이 모두 20세가 넘으니, 어떤이가 말하기를, “어찌하여 벼슬을 구하여 주지 않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자제(子弟)가 과연 현량하다면 국가에서 자연히 써 줄 것이요, 만일 현량하지 못하면 벼슬을 구하여 얻더라도 어떻게 보존하겠는가?”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시호는 정간(貞簡) 이다

 

 4)<디지털 한국학 자료 및 연보> (2004. 2. 29. 주회(안) 제공)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김영후(金永煦)

1292(충렬왕 18)∼1361(공민왕 10).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호는 균헌(筠軒). 할아버지는 방경(方慶), 아버지는 중대광 상락군 판삼사사(重大匡上洛君判三司事) 순(恂)이다.

 

---생략---

 

1352년(공민왕 1)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1356년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朴天植〉

 

 

◆ 정간공(김영후) 연보

 

---생략---

 

○공(=김방경)의 손자 추성 보리동덕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복창부원군(=영후)의 집에 공의 행장이 비장되어 있었으나, 해가 도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써서 그 근본을 잊지 않게 했다 <1350 안진발 충렬공행장>

 

○(61세) 1352년(공민왕1 임진)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안산군 안진(安震),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밀직부사 안목(安牧),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면서,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65세) 1356년(공민왕5, 병신년) 2월 갑술일에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70세) 1361년(공민왕10 신축) 5월 임술일에 ♠상락후(相洛侯) 김영후(金永煦)가 나이 70세로 죽었는데,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받았다.

 

○그의 성품은 엄격하고 굳세고 침착하고 신중하였으며 일가 친척과 옛친지들 가운데 군색한 자가 있으면 모두 구제하여 주었다.

그 손자들인 ★김사안(士安), ★김사형(士衡)의 나이 20세를 넘었는데, 어떤 사람이 김영후더러 말하기를 “왜 그들을 위하여 관직을 얻어 주지 않는가?”라고 하니 “자제가 과연 현명하다면 국가에서 스스로 선발해서 쓸 것이며 만일 현명하지 못하다면 관직을 주어서 얻게 하더라고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그의 아들 ★김천은 관직이 밀직부사에까지 이르렀다.

 

 5) <고려사 기록 내용> (2004. 2. 29. 주회(안) 제공)

▣ 고려사 제38권-세가제38 (공민왕 임진원년 1352)

 

(★정간공 김영후 61세)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영천 부원군 이능간(李凌幹),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1300년 김방경 묘지명 찬한 이진의 자로, 1332년 김순처허씨 묘지명을 찬함

복창 부원군 김영후(金永煦), ★문영공 김순의 4자, 김영돈의 막내동생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연안 부원군 인승단(印承旦),

전 첨의 정승 이군해,

정승으로 치사(致仕)한 손기(孫琦),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충렬공 1자 김선의 장자, 김승택의 백형

안산군 안진(安震), ★1350년 김방경 행장 찬함

정천군 정을보(鄭乙輔),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충렬공 1자 김선의 3자

영산군 장항(張沆),

낙 낭군 이천선(李遷善),

밀직부사 안목(安牧), ★안렴사공 김사렴의 장인 안원숭의 부, 즉 김사렴처 안씨의 조부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문영공(김순)의 사위 백이정의 아들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게 하고,

 

또 교서를 내리기를

“원로와 대신과 사대부들이 교대로 들어와서 경서와 사기 그리고 예법에 관한 말(法言)들을 강의하며 권세 있는 집안에서 토지와 가옥 및 노비를 강탈하여 여러 해 동안 송사하고 있는 사건들과 무고한 죄로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사건들을 판결하여 처리하라!

첨의사와 감찰사는 나의 귀와 눈이다. 현행 정치의 옳고 그릇됨과 민간의 이해 관계에 대하여 기탄없이 바로 말하라!”고 하였다.

 

▣ 고려사 제39권-세가제39 (공민왕 병신5년 1356)

 

(★정간공 김영후 65세)

2월 갑술일에 복창 부원군 김영후(金永煦)를 원나라에 보내 공신호를 준 데 대하여 사의를 표하였다.

 

그 표문에 이르기를

“천 년에 한 번이나 있는 드문 당신이 준 이 칭호를 받으니 천하 만국이 모두 귀를 기울여 세상에 드문 이 영예의 소식을 듣고 있다. 이것을 뼈에 아로새긴들 잊을 수 있겠는가? 몸이 가루가 되어도 보답하기 어렵다.

 

당신은 아랫사람에게 간락하게 대하며 마음을 전일하게 하고 중정의 길을 취하며 선조의 길을 따르고 있으므로 노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으며 말하지 않아도 믿음이 있다. 당신은 하늘의 법을 따르고 있으므로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감화되며 간직한 마음 신통하여 마치 초목의 자라나는 것이 하늘과 땅이 길러 주는 그것과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당신의 밑에 있으면서 궁궐을 보위하였으나 사소한 공로도 없었으며 왕위를 이어 이 땅을 지키면서도 조그만 공적도 없다. 그런데 뜻 밖에도 12글자의 아름다운 칭호가 백 가지에서 한 가지의 재능도 없는 이런 자에게 잘못 오게 되었다.

 

당신은 여러 해 동안 당신에 대한 나의 수고를 잊지 않고 또 당신을 사모한 나의 성의를 고맙게 여겨 특히 조서를 내리어 공훈 높은 신하들의 대렬에 넣어 주었다. 나는 마땅히 인(仁)을 추구하여 당신의 혜택이 만물에까지 미치도록 노력하며 의(義)를 몸소 실행하여 당신에게 성의를 다할 것을 염원하여야 겠다.

 

먼 곳의 어리석은 백성들의 기대에 어그러지지 않게 그들을 안정시킬 것이며 당신의 교훈을 엄수하여 감히 노력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 고려사제39권-세가제39 (공민왕 신축10년 1361)

 

(★정간공 김영후 70세)

5월 임술일에 상락후(相洛侯) 김영후(金永煦)가 죽었다.

 

 

 6)고려사 기록 내용 ( 2005. 3. 13. 태서(익) 제공)

 

<고려사절요 제25권> 충숙왕 忠肅王.기묘 8년(1339), 원 지원 5년

여름 4월에 전왕이 삼사우윤(三司右尹) 김영후(金永煦)를 원 나라에 보내어 부처의 화상[?佛]을 바쳤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혜왕.임오 3년(1342), 원 지정 2년

6월에 교서를 내리기를, "적신(賊臣) 조적(曺?)이 난을 꾸민 후 과인이 원 나라의 명을 받고 원 나라의 서울에 갔을 때에, 간신의 잔당들이 근거없는 말을 꾸며 내어 국가의 변란을 음모하였으나, 시종하였던 신하들은 종시 한결같은 충절로 과인의 몸을 보좌하여 그 공이 막대하였으니, 영원히 그 공은 잊을 수 없다.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석(尹碩), 정승 채하중(蔡河中),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김석견(金石堅), 정승 이능간(李凌幹), 이문(理問) 홍빈(洪彬),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暾)ㆍ서하군(西河君) 임자송(任子松), 찬성사(贊成事) 김인연(金仁沇), 언양군(彦陽君) 김륜(金倫),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 첨의평리(僉議評理) 한종유(韓宗愈),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영후(金永煦), 좌사(左使) 이몽가(李蒙哥), 판밀직사(判密直事) 이운(李雲), 개성윤(開城尹) 윤신계(尹莘係),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엄(李儼), 동지밀직(同知密直) 윤환(尹桓)ㆍ박청(朴靑), 밀직부사(密直副使) 강윤충(康允忠)ㆍ안천길(安千吉)ㆍ노영서(盧英瑞) 등을 1등 공신으로 삼고,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등 18명을 2등 공신으로 삼고, 각각 차등에 따라 공신의 부모와 아내와 그 아들에게 작위를 주고 전답과 노비를 주라." 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혜왕.계미 4년(1343), 원 지정 3년

봄 2월에 왕이 본궐(本闕)에 행하여 씨름놀이를 구경하였다. 왕이 김영후(金永煦)와 함께 북궁(北宮)에서 술을 마셨는데, 영후가 취하여 드러누우니, 왕이 측근자를 시켜서 부축하여 말을 태워주고, 따라온 사람을 불러 말하기를, "너의 주인이 이미 나에게 타던 말을 주었다." 하니, 영후가 마침내 그 말을 왕에게 바쳤다

 

임오일에 원 나라에서 내주(乃住) 등 8명을 보내어 왔는데, 이들은 거짓말로 말안장을 요구하였다. 갑신일에 대경(大卿) 타적(朶赤), 낭중 별실가(別失哥) 등 6명이 와서 교외에서 사면조서를 반포하였는데, 왕이 병을 칭탁하고 나아가 마중하지 않으려 하니, 용보가 말하기를, "황제께서 일찍이 나에게 왕이 불경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만일 마중하러 나가지 아니하면 황제의 의심이 더욱 심하여질 것입니다." 하여,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을 입고 교외에 마중나가 조서를 정동성(征東省)에서 듣고 있는데, 타적ㆍ내주 등이 왕을 걷어차면서 포박하였다. 왕이 급히 고원사(高院使)를 부르니 용보가 그를 꾸짖었다. 사신으로 온 자들이 모두 칼을 빼어들고서 왕의 시종들을 붙잡으니, 여러 불량배와 백관들은 모두 달아나 숨었다. 좌우사 낭중(左右司郞中) 김영후(金永煦), 만호 강호례(姜好禮), 밀직부사(密直副使) 최안우(崔安祐), 응양군(鷹揚軍) 김선장(金善莊) 등은 창에 맞고, 지평 노준경(盧俊卿) 및 용사 2명이 피살되고, 칼이나 창에 맞은 자가 매우 많았다. 신예(辛裔)가 복병을 두고 밖을 방어하여 그들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왕후(王煦)를 우정승에, 김륜(金倫)을 좌정승에, 김영후(金永煦)ㆍ강윤성(康允成)을 찬성사에, 전사의(全思義)ㆍ강우(姜祐)를 참리(?理)에, 이천(李?)을 정당문학에, 권적(權適)을 판밀직사사에, 허백(許伯)을 밀직사사에, 봉천우(奉天祐)ㆍ안축(安軸)을 지밀직사사에, 민사평(閔思平)을 감찰대부에 임명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목왕 忠穆王.을유 원년(1345), 원 지정 5년

여름 4월에 김영후(金永煦)를 좌정승에, 박충좌(朴忠佐)를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전사의(全思義)ㆍ손수경(孫守卿)ㆍ안축(安軸)을 찬성사에, 이천(李?)ㆍ이몽가(李蒙哥)ㆍ장항(張沆)을 참리(?理)에, 정을보(鄭乙輔)를 정당문학에, 인당(印?)을 밀직사(密直使)에 임명하였다.

 

12월에 좌정승 김영후를 원 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게 하였다.

 

왕후(王煦)를 파면하고, 김영후를 우정승에, 인승단(印承旦)을 좌정승에, 이곡(李穀)을 밀직사(密直使)에 임명하였다. 왕후는 정방을 폐지하고 과전(科田)을 폐지한 까닭에 욕심 많고 나쁜 무리의 미움을 받아서 파면되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실망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5권> 충목왕 忠穆王.병술 2년, 원 지정 6년

우정승 김영후가 원 나라에서 돌아왔는데, 그 편에 황제가 왕에게 의복과 술을 주었다.

 

<고려사절요 제26권> 공민왕 1 恭愍王一.병신 5년(1356), 원 지정 16년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김영후(金永煦)를 원 나라에 보내어 공신호를 내려 준 것을 사례하였다

 

<고려사절요 제27권> 공민왕 2.신축 10년(1361), 원 지정 21년

상락후(上洛侯) 김영후(金永煦)가 졸하였다. 김영후는 성품이 엄하고 굳세며 침착하여, 친척이나 친구 중에 궁색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 주었다. 그의 손자 김사안(金士安)ㆍ사형(士衡)은 모두 나이 20세가 넘었는데, 사람들이 혹 김영후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벼슬을 구하지 않느냐." 하면, 그는 대답하기를, "자제들이 참으로 어질다면 국가에서 자연히 쓸 것이요, 어질지 않으면 벼슬을 구해서 얻는다 해도 그것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니, 듣는 자들이 탄복하였다.

 

7) 연복사종(演福寺鐘)에 실려 있는 정간공의 이름 소개 (2005. 6. 6. 태서(익) 제공)

 

 개성 연복사(演福寺) 종 표면에 새겨져 있는 명문(銘文). 종의 주조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1346년(충목왕 2년)에 고려출신으로 원나라 고관이었던 강금강(姜金剛)과 신예(辛裔) 등이 원나라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장인들을 이끌고 금강산에 종을 주조하러 왔을 때 고려측에서도 황실의 안녕을 축원한다는 명분으로 원나라 장인들을 시켜 연복사의 종을 새로 만들었다. 명문은 이곡(李穀: 1298~1351)이 작성하였으며, 명문 뒤에는 종의 주조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명단에는 고려의 국왕과 모후(母后)를 비롯하여 정동행성과 고려의 주요 관원들이 망라되어 있고, 작업을 실제 담당한 원나라 장인들의 이름도 적혀 있다. 이 연복사종은 현재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시대  고려

연대  1346년(충목왕2년)

유형/재질  금구명·종명 / 청동  

문화재지정  기타문화재 - 국외  

크기  높이 320cm, 입지름 203cm, 글자크기 1.8cm

출토지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남본 남대문  

소재지  (북한)-황해북도 개성시 북안동(北安洞) 남대문(南大門) 누각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이곡(李穀) / 성사달(成師達) / 미상  

 

대원 지정(至正 : 원나라 順帝의 연호, 1341~1367년까지 사용) 6년(1346, 忠穆王 2) 봄 자정원사(資正院使) 강공(姜公) 금강(金剛)과 좌장고부사(左藏庫副使) 신후(辛侯) 예(裔) 등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금과 비단을 가지고 와서 금강산에 종을 주조하니 그 때 금강산 주변의 여러 군현의 굶주린 백성들이 다투어 그 작업에 참여하여 곡식을 얻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종이 완성되어 강공이 중국으로 돌아가려 하니 국왕과 공주께서 신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금강산은 우리나라에 있는데 지금 신성하신 천자께서 근신을 보내시어 불사(佛事)를 베풀어 무궁한 복을 베푸신 것이 이와 같은데 우리들은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하였다. 무엇으로서 천자의 은혜에 보답할 것인가”라고 하니 모두 “연복사(演福寺)의 큰 종이 오래되고 부서져서 쓸 수 없습니다. 지금 대장장이들이 온 것을 인연으로 하여 다시 주조한다면 또한 천자의 뜻을 본받으면서 영원한 공덕을 쌓는 것이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강공에게 이야기하니 강공이 기쁘게 허락하여 행차를 멈추고 (연복사 종을) 만들게 하였고 왕께서는 신(臣) 곡(穀)에게 명령하여 그 명(銘)을 짓게 하셨습니다.

명(銘)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 함께 종소리를 듣고서 삼군을 정렬하고 악기들 [팔음(八音)]을 고른다.

석가노인의 가르침은 매우 깊은데 땅 밑의 지옥은 어찌 이리 어두운가.

만 번 태어나 만 번 죽으며 고난을 당한다.

취한 듯 꿈꾼 듯 귀멀고 어둡다가 한번 종소리 들으니 다함께 마음이 깨어난다.

왕성 연복사 큰 총림에 새 종소리 한번 울리니 남염부주(南閻部洲)를 뒤흔든다.

위로는 하늘을 뚫고 아래로는 깊은 명계까지 모두 깨끗한 복에 의지하여 오묘하게 장엄되도다.

동한(東韓: 우리나라를 가리킴)의 임금과 신하가 거듭하여 중화를 축원하니

천자는 만년토록 장수하며 많은 아들을 낳으시고, 끝없는 복이 온 나라에 함께 하소서.

신(臣)에게 명하여 명(銘)을 짓고 새기라 하셨네.

병술년(1346, 충목왕 2) 6월 기망(旣望: 16일)에 봉훈대부 중서사전부 광정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奉訓大夫 中瑞司典簿 匡靖大夫 政堂文學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인 신(臣) 이곡(李穀)이 지음.

고려국왕 왕흔(王昕: 충목왕)

덕령공주(德寧公主: 충목왕의 모후(母后)) 역련진반(亦憐眞班)

자선대부 자정원사(資善大夫 資正院使) 강금강(姜金剛)

장사랑 좌장고부사(將仕郞 左藏庫副使) 신예(辛裔)

정동행중서성 좌우사ꟅꟅꟅ(征東行中書省 左右司ꟅꟅꟅ)

낭중(郞中) 홍탁(洪鐸) 낭중(郞中) 이수산(李壽山)

원외랑(員外郎) 석말완탁(石抹完澤) 원외랑 강윤충(康允忠)

도사(都事) 신인적(申仁適) 도사 악우장(岳友章)

이문소관(理問所官)

상부관(相副官) 하유원(河有源)

도진무사(都鎭撫司)

부도진문사(副都鎭撫司)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정승(政丞) 노책(盧Ʂ)

찬성사(贊成事) 김영돈(金永旽)

찬성사 강윤(康允)

찬성사 안축(安軸)

찬성사 이군후(李君侯)

평리(評理) 정을보(鄭乙輔)

평리 ꟅꟅ

政ꟅꟅꟅꟅꟅꟅꟅ

삼사(三司)ꟅꟅꟅꟅꟅꟅ

ꟅꟅꟅꟅꟅꟅꟅꟅꟅꟅꟅꟅ

ꟅꟅꟅꟅꟅꟅꟅꟅꟅꟅꟅꟅ

ꟅꟅ

ꟅꟅꟅꟅꟅꟅꟅꟅ司事 최천Ʂ(崔天Ʂ)

ꟅꟅꟅꟅꟅꟅ김윤장(金允莊)

부사(副使) 신좌(辛佐)

ꟅꟅꟅꟅꟅ

지신사(知申事) 곽연(郭延Ʂ)

우대언(右ꟅꟅ) 左Ʂ諝

좌대언(左代言) 정사(鄭思Ʂ)

우부대언(右副代言) 김용겸(金用謙)

좌부대언(左副代言) 이정길(李筳吉)

예문검열(藝文檢閱) 성사달(成師達) 씀.

함께 발원한 사람들[同願]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김영후(金永煦)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 인승단(印承旦)

함안부원군(咸安府院君) 박충좌(朴冲佐)

태부감승(大府監丞) 이복수(李福壽)

김해부원군(金海府院君) 이제현(李齊賢)

만호 보안군(萬戶 保安君) 이숙(林淑)

전이문(前理問) 윤계종(尹繼宗)

전찬성사(前贊成事) 윤환(尹桓)

직성군(直城君) 노영서(盧英瑞)

흥해군(興海君) 배전(裴全)

대호군(大護軍) 홍계(洪繼) 문대룡(文大龍)

보안택주(保安宅主) 박씨(朴氏)

영주군부인(榮州郡夫人) 우씨(禹氏)

검교판도판서(檢校版圖判書) 달마실리(達摩室利)

도련불화(都憐不花) 색인불화(賽因不花)

호군(護軍) 황순(黃順) 박윤주(朴允柱) 강석(姜碩)

산원(散員) 노승간(盧承幹)

호군(護軍) 주영보(周永保)

 

정동성위원(征東省委員)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강윤충(康允忠)

연사(掾史) 장군신(張君信)

 

제조관(提調官)

만호(萬戶) 권겸(權謙)

판밀직사(判密直事) 이능(李能)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인승서(印承叙)

밀직부사(密直副使) 김광재(金光載)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 ꟅꟅ 

 

감조관(監造官) 

상호군(上護軍) 임만년(林萬年) 배천경(裴天慶)

호군(護軍) 배수(裴守) 전성안(全成安) 이현(李賢)

내부부령(內府副令) 하즙(河楫)

사복부정(司僕副正) 이승목(李承牧)

중랑장(中郞將) 김용진(金用珎) 박세진(朴世珎)

평양판관(平壤判官) 최록수(崔祿壽)

유비창사(有備倉使) 정인로(鄭仁老)

낭장(郞將) 정순(鄭珣) 신승무(辛承茂)

지후(祗侯) 박인점(朴仁漸)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 박윤유(朴允瑜) 국유(鞠儒)

중군녹사(中軍錄事) 김계언(金季彦) 허원의(許元義)

조성도감(造成都監)

녹사(錄事) 고충익(高冲翊)

영사(令史) 유득량(兪得良) 이휘경(李暉景) 박홍(朴洪) 서의(徐義) 노천선(盧千善) 김인Ʂ(金仁Ʂ)

최양검(崔良儉) 박천절(朴千節) 최천계(崔天啓) 이원계(李元桂)

강절행중서성 부양현(江淅行中書省 富陽縣) 적송장수(赤松匠手) 제령(提領) 하귀덕(何德貴),

제령 하방달(何邦達), 제령 조명원(趙明遠) 등 1천 인. 상고파두(上高把頭) 우덕(牛德) 장옥(張玉)

사령(使令) 都Ʂ尉金平印之兪景ꟅꟅ正ꟅꟅ白Ʂ咸松 윤원세(尹元世) 박가Ʂ(朴加Ʂ) Ʂ맹룡(Ʂ孟龍)

김화상(金和尙)

어역(譯語) 도득명(陶得明)

 

<연복사종명(高麗國金剛山石鍾銘)>_탁본자료 (2007. 3. 13. 윤식(문) 제공)

 

 출전 : 국립중앙도서관 사이트. 제목이 <연복사종명>이 아니라 <고려국금강산석종명(高麗國金剛山石鍾銘)>으로 돼 있음

 

고려국왕 왕흔(王昕: 충목왕)

덕령공주(德寧公主: 충목왕의 모후(母后)) 역련진반(亦憐眞班)

자선대부 자정원사(資善大夫 資正院使) 강금강(姜金剛)

장사랑 좌장고부사(將仕郞 左藏庫副使) 신예(辛裔)

정동행중서성 좌우사□□□(征東行中書省 左右司□□□)

낭중(郞中) 홍탁(洪鐸) 낭중(郞中) 이수산(李壽山)

원외랑(員外郎) 석말완탁(石抹完澤) 원외랑 강윤충(康允忠)

도사(都事) 신인적(申仁適) 도사 악우장(岳友章)

이문소관(理問所官)

상부관(相副官) 하유원(河有源)

도진무사(都鎭撫司)

부도진문사(副都鎭撫司)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정승(政丞) 노책(盧□)

★찬성사(贊成事) 김영돈(金永旽)

찬성사 강윤(康允)

찬성사 안축(安軸)

찬성사 이군후(李君侯)

평리(評理) 정을보(鄭乙輔)

평리 □□

政□□□□□□□

삼사(三司)□□□□□□

□□□□□□□□□□□□

□□□□□□□□□□□□

□□

□□□□□□□□司事 최천□(崔天□)

□□□□□□김윤장(金允莊)

부사(副使) 신좌(辛佐)

□□□□□

지신사(知申事) 곽연□(郭延□)

우대언(右□□) 左□諝

좌대언(左代言) 정사□(鄭思□)

우부대언(右副代言) 김용겸(金用謙)

좌부대언(左副代言) 이정길(李筳吉)

예문검열(藝文檢閱) 성사달(成師達) 씀.

 

함께 발원한 사람들[同願]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김영후(金永煦)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 인승단(印承旦)

함안부원군(咸安府院君) 박충좌(朴冲佐)

태부감승(大府監丞) 이복수(李福壽)

김해부원군(金海府院君) 이제현(李齊賢)

만호 보안군(萬戶 保安君) 이숙(林淑)

전이문(前理問) 윤계종(尹繼宗)

전찬성사(前贊成事) 윤환(尹桓)

직성군(直城君) 노영서(盧英瑞)

흥해군(興海君) 배전(裴全)

대호군(大護軍) 홍계(洪繼) 문대룡(文大龍)

보안택주(保安宅主) 박씨(朴氏)

영주군부인(榮州郡夫人) 우씨(禹氏)

검교판도판서(檢校版圖判書) 달마실리(達摩室利)

도련불화(都憐不花) 색인불화(賽因不花)

호군(護軍) 황순(黃順) 박윤주(朴允柱) 강석(姜碩)

산원(散員) 노승간(盧承幹)

호군(護軍) 주영보(周永保)

 

정동성위원(征東省委員)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강윤충(康允忠)

연사(掾史) 장군신(張君信)

 

제조관(提調官)

 

만호(萬戶) 권겸(權謙)

판밀직사(判密直事) 이능(李能)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인승서(印承叙)

밀직부사(密直副使) 김광재(金光載)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 □□

 

감조관(監造官) 

 

상호군(上護軍) 임만년(林萬年) 배천경(裴天慶)

호군(護軍) 배수(裴守) 전성안(全成安) 이현(李賢)

내부부령(內府副令) 하즙(河楫)

사복부정(司僕副正) 이승목(李承牧)

중랑장(中郞將) 김용진(金用珎) 박세진(朴世珎)

평양판관(平壤判官) 최록수(崔祿壽)

유비창사(有備倉使) 정인로(鄭仁老)

낭장(郞將) 정순(鄭珣) 신승무(辛承茂)

지후(祗侯) 박인점(朴仁漸)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 박윤유(朴允瑜) 국유(鞠儒)

중군녹사(中軍錄事) 김계언(金季彦) 허원의(許元義)

 

조성도감(造成都監)

 

녹사(錄事) 고충익(高冲翊)

영사(令史) 유득량(兪得良) 이휘경(李暉景) 박홍(朴洪) 서의(徐義) 노천선(盧千善) 김인□(金仁□)

최양검(崔良儉) 박천절(朴千節) 최천계(崔天啓) 이원계(李元桂)

강절행중서성 부양현(江淅行中書省 富陽縣) 적송장수(赤松匠手) 제령(提領) 하귀덕(何德貴),

제령 하방달(何邦達), 제령 조명원(趙明遠) 등 1천 인. 상고파두(上高把頭) 우덕(牛德) 장옥(張玉)

사령(使令) 都□尉金平印之兪景□□正□□白□咸松 윤원세(尹元世) 박가□(朴加□) □맹룡(□孟龍)

김화상(金和尙)

어역(譯語) 도득명(陶得明)

 

<확대부분>

 

★찬성사(贊成事) 김영돈(金永旽) - 5쪽 끝과 6쪽 첫줄 아래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김영후(金永煦) - 16쪽

 

<관련 자료 사진> (2005. 6. 12. 주회(안) 제공)

 

 출전 : 개성포럼(http://www.kifez.com/)

 

   개성 남대문(南大門)

 

판문점에서 개성시내로 가면 앞에 평양 가는 고속도로 입구가 보인다.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통일거리로 직진하면 양 옆으로 15~20층의 고층 아파트가 도열해 있다. 그 앞에 로타리 가운데 개성의 관문인 남대문이 자남산 아래로 보인다. 남대문은 개성성중 내성의 정남으로 1391~1393년에 건설되었으며, 6.25 전쟁시 파괴된 것을 1945년복구하였고 국보급문화재 제 34호로 지정하였다.

 

남대문은 고려시대의 건축술을 이어받아 장식이 소박하면서도 짜임새가 있어 한국의 문루건축 중 뛰어난 작품이다. 아치식의 무지개문(높이 3.55m)과 축대 위의 단층문루로 저면 3간(길이 1.36m) 축면 2간(길이 7.96m)의 합각지붕에 3포집이 있다.

 

남대문 안에는 유명한 연복사(演福寺)종이 있는데, 이 종은 1346년에 제작되어 금강산의 연복사에 매달려 있다가 1563년 절이 불타자 이곳에 옮겨 20세기 초까지 타종되어 개성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던 유서 깊은 종이다. 연복사종은 청동제로 높이3.3m, 아구리 직경 1.9m, 두께 23㎝에 무게 14톤의 거대한 종으로 한국 5대명종의 하나로 꼽힌다. 종의 몸체에는 불상을 비롯해 특이하게도 용, 거북,봉황,사슴,게, 물고기 ,물결무늬들이 새겨져 있다.연복사종은 그 소리가 맑고 우렁차 한번 치면 10리 밖에서도 들린다고 한다.

 

 8) 정간공 선조님 어록 (2005. 7. 23. 발용(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