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필(金善弼) 1807(순조7)∼1883(고종20)--(부)

       

  자는 중필(仲弼), 부사공(휘 天順)의 16세손이다. 충무공(휘 응하)의 아우인 휘 응해의 후손이다. 군수(郡守) 정기(鼎基)의 아들로 학기(學基)에게 입양되었다. 1829년(순조29) 무과(武 科)에 급제, 전라도·충청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고종 때에는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중용되었는데, 1866년(고종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통진부(通津府)에 진을 친 선봉장(先鋒將) 이용희(李容熙)의 우익(右翼)으로 부평(富平)에 주둔하면서 수도 방위를 담당했다.

 

  경기중군(京畿中軍)을 거쳐, 1871년 신미양요 때 강화수로(江華水路)의 중요한 근거지인 광성진(廣城津)을 방어하다가 미군의 공격을 받아 장렬하게 전사한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의 후임으로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중군(中軍)을 지휘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복설(復設)된 삼군부(三軍府)의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를 거쳐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1882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역임했다.

 

<주요 자료 소개>

 

1. 김선필 선조님의 시 소개 (2003. 2. 8. (銀會(익) 제공)

 

    출전 : <江都古今詩選>(제2집) 2001. 강화문화원 간. 97p.

 

                       廣城祭壇 表忠碑銘(광성제단 표충비명)

 

                                                                             留守 金善弼

 

 어재연(魚在淵)   어엿한 충선된 그 용맹, 날로 빛나도다. 형제분이

                         인도하여 종군하였으니, 죽음을 서슴지 않고 함께 돌아오니,

 

 어재순(魚在淳)    형은 나라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음을 찾았으니.

                         한 집안이 충성과 우애로 가득하니, 백세에 긍한 교훈일세.

 

이현학(李玄鶴)    명관집 출신 인물인데, 위험을 무릎쓰고 홀로 살려고 하지 않았으니,

                        신여로 후로는 성명이 또 나타나는구나.

 

유풍로(柳豊魯)    바지에 가죽신으로 종군하였지, 그 규율이야 조금도 어김이 없었고

                         항상 자기를 돌보지 않는 심성이니, 죽음도 서슴없이 지었노라.

 

김현경(金鉉璟)   모든 장부를 위해 나아가서, 절개 지켜 죽음으로서 본 받으니 하늘이

                       낸 성품이고 땅에서 비저진 신령 가운데 호걸일세.

 

박치성(朴致城)   요충을 수비하는데, 어찌 살기를 꾀하랴, 적과 싸우는데 더러움도

                       없었다오 내 칼날은 이미 날카롭기만 하네.

 

전망무사(戰亡武士)    50분의 무사들은, 한마음으로 이 나라에 몸 바치니 위험하건만

                              높은 절개로 충성을 다 하였으니, 길이 새겨지지 않아서야 어이하리.

            * 유수 김선필은 진무사로 왔다가 유수로 중임 되었다.

 

    *<江都古今詩選>(제2집)에는 강화군 광성보에 있는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으나 2003. 2. 23. 현지 확인 결과 없었음.

 

2. 강화 역사 박물관 내의 비석군에 있는 선정비 (2003. 2. 23. 안사연 답사. 항용(제) 제공)

 

 

 

 

<김선필 선정비>(강화 역사박물관 내>

 

3. <무보>속에 들어 있는 기록자료 (2005. 6. 19. 윤식(문) 제공)

 

   출전 : <무보>

 

  *이 <무보>에는 강화유수공 외에도 조선조 말까지 부사공파 할아버지들 기록이 상당히 많음. 안렴사공파 휘 세익 할아버지와 동명이인이신 부사공파 휘 세익 할아버지 기록도 들어 있음.

 

 4. 선필 선조님이 경진보(1880년 간. 대동보)의 서문을 쓰심. (2005. 6. 18. 영환(문) 제공)

 

    2005. 6. 18. 영환종친(문)이 본 홈에 알려지지 않은 경진보(1880년 고종 17년 발행)총 21책중 16책을 입수함으로써 선필 선조님이 당시 이 대동보의 서문을 쓴 것이 확인됨.

 

 5. 안사연의 강화도 탐방기 (2003. 2. 25. 주회(안) 제공)

 

  2월 23일 아침

어제는 주5일 근무제로 하루 쉬는 날이었습니다. 딸 아이는 엊그제부터 감기에 장렴에 시달려 하루종일 자다가 일어나 앉았다가 또 자다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스럽습니다.

어제는 하루종일 봄을 재촉하는 봄비가 부슬부슬 봄안개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이레저레 심난합니다.

 오늘 아침 하는수 없이 딸아이와 아들놈과 안 식구를 남겨놓고 혼자서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솔직히 가족을 남겨놓고 혼자서 떠나려고 하니 외롭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그러나 집을 떠나면서부터 느끼는 호기심과 설레임으로 소풍가는 기분입니다. 집을 나서면서부터는 보는 것도 많고 듣는 것도 많고,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됩니다.

 강남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무순) 재광, 만길, 성회, 명회 어르신께서 도착해 계시고, 이어서 우회 종친 내외분, 윤만 종친 내외분과 태경이가 속속 도착합니다.

 한참을 추위에 떨다보니 강화도행 답사버스가 도착합니다. (무순) 재철(용진)종친님, 영윤 내외분, 항용 내외분, 발용 내외분과 아들, 은회 종친님, 상석 종친님께서 승차하고 계십니다.

 항용 종친님의 사회로 간단한 인사소개가 이어지고, 비디오 시청이 이어집니다. 역사스페셜 <강화도는 1/3이 바다였다.> 테이프를 미리 구해 오셨다고 합니다. 답사 기분이 소록소록 새어납니다.

 드디어 강화역사관에 도착합니다. 한바퀴 둘러보다 보니 <김공선필애민선정비>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뒤편에는 갑곶돈대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좌둔전(제포, 와포)는 군사구역이라 들어갈 수가 없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우둔전(이포, 초포)지역 답사가 이어집니다. 강화도의 칼바람을 맞으면 이포 언덕에 섰습니다. 화강석이 너무나 깨끗한게 최근에 보수한 듯 합니다. 화강석 사이사이에 끼어있는 빛바랜 돌을 줏어 들고 충렬공 할아버지를 생각합니다.

 37세때 1248년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계실때에 평안도 정주 앞바다 위도에 주민들을 이끌고 들어가셔서 방파제를 쌓고 개간을 하고 우물을 파고 하셨습니다. 1250년경 이내 강화도로 들어 오셔서 견룡행수 (국왕친위대의 지휘관)를 지내시면서 45세때 1256년에 제포와 와포를 쌓아 좌둔전을 만들고, 이포와 초포를 쌓아 우둔전을 쌓으셨을 겁니다.

 광성보에 도착합니다. 광성보에 오르니 외성의 흔적인 옛 토성이 있어 밟아 봅니다. 한참을 오르니 용두돈대와 손돌목돈대가 나타납니다. 이곳 광성보는 1871년 신미양요때 어재연 장군이 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곳입니다. 어재연 장군의 후임으로 김선필공께서 진무사로 이곳 광성보에 부임하였습니다. 전사한 어재연 장군과 전몰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제단을 쌓고 표충비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김선필 찬 표충비는 없습니다. 눈을 돌려보니 무명용사 51인 묘역이 있습니다. 안내문을 보니 어재연 장군의 묘는 충북 음성으로 이장하였다 합니다. 아마도 이때에 김선필 찬 <광성제단 표충비>를 함께 옮겼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돈대가 마치 용의 머리 모양을 하였다고 하는 1679년에 축성한 천연적인 교두보 용두돈대와 원통하게 죽은 뱃사공 손돌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손돌목 돈대를 일별하고 내려옵니다.

 

전등사 아래 원두막가든에서 회 한접시와 (항용 종친님께서 가락동시장에서 떠 온) 소주 한잔에 얼었던 몸을 녹이고, 전등사에 오릅니다. 이곳은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옥등을 시주하면서 전등사라 하였다 합니다. 정화궁주는 후에 김방경 무고사건때 함께 연루된 것으로 보아 충렬공 할아버지와 교유가 있었던 듯 합니다. 또한 이곳 전등사에서 남쪽으로 2km 아래에는 충렬공 할아버지의 집터라고 전해오는 길상면 온수리 해령당터와 포구의 흔적이 남아 있고, 정족산에는 또한 별궁이 있던 곳이며, 군창(군량창고)의 흔적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곳 정족산에는 업무상 또는 등산삼아 충렬공께서 자주 오르신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외포리의 삼별초호국항몽유허비를 둘러보면서 항몽은 그래도 괜찮은데, 호국은 전혀 아니올시다 라고 모든 분들이 한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이때부터 삼별초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하셨듯이 마치 삼별초를 토벌하듯 열변을 토하시는 분이 여럿입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지석묘를 둘러본 후, 빗방울이 한두방울 떨어지는 가운데 강화읍내 고려궁지에 도착합니다. 강화부유수부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강화부사를 지내신 김오공, 강화유수를 지내신 김시양공과 김휘공, 정묘호란때 인조를 강화도로 호종하시고 강화부윤을 지내신 김자점공, 신미양요때 어재연 후임으로 진무사로 오셔서 <광성제단 표충비>를 지으시고 이내 강화부 유수를 지내신 김선필공께서 정사를 보시던 곳입니다. 흩날리는 빗방울을 피해가다가 보니 고려궁지가 나타납니다. 이곳은 충렬공 할아버지께서 1232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도에 계시면서 자주 들리시던 곳, 고려궁터입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서울로 서울로 방향을 잡습니다. 재철 종친님의 <충렬공 신도비문의 상락君에 대한 고찰>과 <문영공휘순字비석문의 의문점에 대한 고찰>에 대한 해박한 설명이 이어지고, 이어서 재광 종친님의 안동 음수재, 문영공 묘역 역사에 대한 설명이 술술 이어집니다. 마이크는 드디어 항용 종친님께 돌아가고 앞으로 3,4,5월은 충렬공과 삼별초의 달로 정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하자는 제안이 이어집니다.

 이번 행사를 위해 너무나 고생하신 은회 종친님과 항용 종친님께 두 손 모아 감사 드립니다.

 

6. 족보 발간에 참여한 기록 (2002. 7. 17. 주회(안) 제공)

   (전략)

그리고 1902년 임인보 발간에는 善弼이 보사를 시작하였고, 圭默이 교정하고 서문을 지었습니다.

 

▣ 족보 발간사

---임인보 (광무6년 1902)

 ●임인보 서

歲 임인 중추 하한 (仲秋下澣) ---충렬공 22세손 ★圭默 근서

무릇 족보라는 것은 그 先世를 계승하고 그 族屬을 敍記하는 것이다. 우리 김씨는 ★태보공을 시조로 하고, ★충렬공을 중시조로 해서 멀리 신라와 고려를 지나 이조에 이르기까지 세대가 멀고 氏族이 더욱 번성하여 名公碩學과 勳烈文章이 찬란하고 쟁쟁하여 국사에 밝게 실려있는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그후에 자손들이 별과 같이 8도에 흩어져 살고 있어 각각 자기의 조상을 그 顯祖로 하고 각각 그 족보를 따로 해서 올바른 계통이 있을 수 없더니 이것이 선조 庚辰(=1580)년과 영조 己未(=1739)년 정조 戊戌(=1778)년과 순조 乙酉(=1825)년에 대보를 만든 것이 이러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 역대 年條가 대개 사실과 틀리는 것이 많았다

정조 甲辰(=1784) 년에 ★대안군(=은열) 誌文을 그 실전했던 묘소에서 발견하여 이에 대한군 휘은열이 ★경순왕의 넷째아들임을 알게 되었고, 그 밑으로 3세사 ★시랑공(=숙승) ★태사공(=일긍) ★상락군(=이청)으로 면면히 서로 이어 왔음을 가히 상고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고 또 그 년기를 상고하고 그 세대를 계산하여 본즉 ★태보공 생년 乙丑년(=?65)으로부터 지금의 壬寅년(=1902)에 이르기까지 1,838년이 되고 ★圭默은 ★태보공에서 58세가 되니 1세를 30년으로 계산하면 대략 서로 부합되며, ★得顯씨의 戊戌보(=1778) 辨證과 ★用栢씨의 丁卯譜(=1867)의 發明이 각각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로 본다면 겨레가 비록 번성해도 오히려 그 計寸을 알 수 있고 세대가

 비록 멀어도 계대를 알 수 있으니 어찌 우리 김씨의 다행한 일이 아닌가.

옛사람이 이른바 "조심스럽게 그 아는 바를 존중하고 그 고증을 상세히 해서 고증하기 어려운 것을 억지로 만들지 말라"고 말함이 거의 근사한 것이다.

 

지난 甲戌년(=?)에 지삼군부사 ★善弼씨가 이 보사를 시작하였을 때, 나(=규묵)는 젊은 나이로 교정역에 참열하였더니 재력이 부족하여 완성치 못하고 오랫동안 한탄하여 왔었다.

己亥년(=?) 가을에 서울의 제종들과 더불어 시작했으나 준공하지 못하고 드디어 철수하고 목주(현 목천)로 돌아가서 모 모 제공들과 그 役事를 주간하고 가 사본을 보충해서 2년이 지난 후에 완공을 보게 되니 무릇 31권이 되었다.

 

이에 선조의 昭穆(소목)의 차례가 있게 되고 자손의 항렬이 歸一하게 되니 비로소 같은 계통의 의의를 얻게 되었다.

족보가 殷盛하게 이루어 졌으니 서문이 없어서는 아니됨으로 삼가 그 사실을 위와 같이 서술하노라

 

歲 壬寅 仲秋 下澣

충렬공 22세손 ★圭默 謹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