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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주요 유적지 탐방>

     5)참판공(휘 彦默)과 만헌공(휘 孝甲) 선조님 묘소 이장기

(2006. 3. 17. 글-상석(제), 항용(제). 사진-항용(제) 제공)

 

 문중의 숙원사업이었던 제학공의 5대손이신 참판공(휘 彦默)과 7대손이신 만헌공(휘 孝甲)선조님 양위의 묘소 이장 행사가 시흥시 소래산의 선조님 묘역에서 능촌종중,병천종중,비안공문중의 종친들이 참여한 가운데 산신제와 고유제를 시작으로 괴산의 영상공 묘역까지 이어지는 행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기에 그 전말을 기록하여 현종제위께 전합니다.

 

<행사요약>

1.일       시: 2006. 3. 15(수). 10:00시--17:30시

2.집결 장소: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소래산 산 13번지 참판공, 만헌공 양위묘역

3.이장 장소: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개향산 영상공(휘 錫) 묘역

4.행사 주관:제학공파 능촌종중, 병천종중, 비안공문중

5.참석자(무순,존칭생략)-재기,상순,상석,학응,두응,남응,천응,복응,태석,태옥,태호,태섭,태관,규호,규문,기복,항용,우용,임왕식(산신제 제관).하용환(소산서원 사무국장)--20 여명

 

오전 10:00정각에 경기도 시흥시 신천동 소래산 13번지의 선조님 묘하에 도착하여 병천종중의 남응님 일행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뒤따라온 포크레인 기사에게 장비의 진입로를 안내하며 길을 내어 묘역으로 올라갑니다.협로를 뚫고 올라간 장비를 묘역 가까이에 준비를 시키고 나니 11:00가 되었습니다.

 

 곧이어 08:00에 괴산을 떠난 능촌종중 일행이 하 연領相(감찰공 휘 孟廉의 장인)의 묘소쪽에서 제물과 함께 호미와 삽 등의 연장을 챙겨 올라 오십니다.

 

 11:00 산신제를 올립니다.제관(타문중인 임왕식),축관(규문).차례로 참판공,만헌공 묘소에 고유제를 올립니다.제관(학응),축관(규문)

 

 11:40 참판공(휘彦默) 선조님께서 몰하신 지 500년(1506년 몰)이 지나 이제,괴산의 영상공(휘錫)묘소 위 의성김씨 할머님과 합장으로 모시기 위해 먼저 비신과 문인석에 가마니를 둘러 안전하게 옆으로 옮기고 파묘를 시작합니다. 3미터 가량을 개장하니 관에 쓰여진 굵은 철핀과 함께 유해의 흔적이 나타납니다.정성들여 수습을 한 후 바로 아래의 만헌공(휘孝甲)묘소로 장비를 옮겨 이동합니다.

 

 만헌공 묘소 역시 3미터가 넘게 개장을 하고 나서야 회벽이 나타납니다.포크레인 장비로도 엄두가 나질 않아 우선 개인장비로 시도를 하였습니다.그 시간 12:40분을 넘고 있기에 잠시 행사를 멈추고 주변을 정돈한 후 근처에 있는 제주숯불집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시간을 갖습니다.행사의 점심비용을 비안공문중(회장 두응)에서 치르기로 정하고 비안공문중 사무국장(항용)께서 셈을 한 후 다시 묘소로 이동하여 포크레인으로 작업을 이어갑니다.

 

 14:00가 되었습니다.20여 센티의 회벽을 걷어내자 두께가 10센티가 넘는 직사각형의 목곽이 원형 그대로 나타납니다.그 커다란 목곽을 들어내니 관이 나옵니다.절손이 되신 연유로 만헌공 선조님의 유품이 있을까?,하는 후손들의 생각과는 달리 따로이 흔적이 없었습니다.유해를 정성스럽게 수습을 하고 옆에 따로이 모셔져 있는 할머님 묘소를 개장합니다.  

 

 이어지는 행사의 마무리는 항용님께서 작성합니다.

 

 학교의 강의시간을 조정하여 앞당겨 해결하고는 비안공문중회장님이신 두응대부님을 모시고 서둘러 시흥시의 소래산 참판공 묘역으로 향했습니다. 12:00시경 현지에 도착해보니 약 20여명의 낯익은 종친 여러분들께서 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상석대부님께서 바쁜 업무도 마다하지 않고 아침 일찍이 오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전일 소래산 현지에 가서 3번째나 연락하여 가까스로 예약한 포크레인과 점심식당 덕에 별 차질 없이 이장공사는 진행되어 갔습니다.  

 

 20여명의 종친들이 참여한 가운데 계속되는 이장공사가 14:00시를 넘기자 대종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꼭 참여해야 하는데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하신다는 사과와 함께 오늘 행사의 무사 안녕 기원과 숭조목족하는 종친들의 활동에 대한 덕담과 격려의 말씀입니다. 온 참석종친들이 더 큰 힘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작업인 만헌공(현감공 휘 효갑) 선조님의 배위이신 하동정씨할머님의 묘소로 향했습니다. 할머님은 세종조때 훈민정음 제작에 참여하셨고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을 쓰셨으며 용비어천가를 권제 안지와 함께 지으신 영의정 정인지의 현손이십니다. 당시 우리 집안의 명성과 권위를 생각하며 할머님이 덮고 계시던 이불(봉분과 흙)을 걷어 내었습니다.  

 

 할머님은 만헌공과 쌍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만헌공의 묘소와 같은 단단한 회벽을 예상했지만 이번에는 회벽 대신 희고 뽀오얀 마사토가 원흙인 붉은 적토에 수북이 섞여 나왔습니다. 따님 두 분과 사위분(平山人 進士 申鎭과 李俊)들께서는 바로 이 마사토 흙을 옷깃에 담고 아들 없이 돌아가신 불쌍하신 어머님과 장모님의 영면 잠자리 위에 울고 울며 뿌렸을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계속해서 파들어가던 포크레인의 움직임이 둔해지다가 멎었습니다. 관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금씩 흙을 벗겨 나가던 포크레인의 삽질이 예상되는 지점에 검은빛이 보이자 멈춘것입니다. 태옥아저씨, 규문아저씨 등 몇 분이 삽과 호미를 들고 광속으로 내려가 조심스럽게 겉흙을 벗겨 냈습니다. 머리쪽에서 뽀족한 관못이 몇개 나왔습니다. 관으로 쓴 나무 흔적은 어느곳에서도 찾을 수 없이 완전히 녹아 없어졌습니다. 동시에 시신의 어느 부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약간 검은빛의 흙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랬습니다. The Nothiong!---수학의 공집합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순간 '色卽是空'을 생각했습니다. 존재인 나와 무존재인 선조님들 사이에 존재하는 500년이란 시간의 의미, 무와 유를 갈라놓은 그 시간이 다시 '空卽是色'을 이루어 놓으리라는 기대도 동시에 했습니다. 그래서 만해선생은 '푸른 숲과 단풍나무 숲'을 동시에 보는 역설을 <님의 침묵>으로 노래하셨나봅니다.  

 

 다소 검은 흙을 상,중,하로 나누어 고운 한지에 한 줌씩 싸고 글을 써서 작은 함에 담았습니다. 함께 나온 관못도 동봉했습니다. 모든 묘소의 앞부분도 파 보았습니다. 혹시 묘지석이라도 나오지 않을까해서요.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작업은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문관석, 묘비석도 챙겼습니다.  

 

 그런데 이때 아주 애닯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참판공의 상석을 현지에 묻어버리라는 어느 강력한 원로 대부님의 령(?)이 있자 그 어느 누구도 대꾸나 이의 제기가 없습니다. 묻더라도 괴산 능촌리 묘역 근처에 묻자는 공손하고 애닯은 나의 설득도 아무 말 없이 가로 젓는 대부님 한 번의 고갯짓에 허공으로 사라졌습니다.  

 

 정지작업하는 포크레인 기사가 상석을 땅 속으로 묻으려 하자 나는 만류하며 다가가서 귓속말로 가져갈 것이니 묻지 말라고 말한 뒤 주위의 몇몇 분들에게 간곡하게 다시 한번 원로 대부님께 부탁드려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나의 모습이 애처로웠습니다. '이 상석은 우리의 유물이다. 이 상석 위에는 영상공(휘 석)과 그 아드님들인 오갑 선조님들의 눈물과 애간장이 녹아 있다. 여기 두고 가면 늘 우리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부탁하여 일단 괴산으로 가져가자'고 말입니다. 그리고 괴산의 아버님께도 전화하여 이 문제의 처리를 여쭤 보았습니다. 역시 같은 답이십니다. 묻더라도 괴산으로 가져 오라고---

 

 몇몇 분이 원로대부님께 간곡히 말씀 드리자 더욱 화를 내며 묻으라고 소리를 칩니다. 왜그러는지 아무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마지 못해 기사는 겉 흙만 살짝 덮고 마무리 하고 맙니다. 한 쪽 모서리가 내맘인양 조금 삐죽이 나온 채 뒤에 남겨두고 떠나왔습니다.  

역 10m 우측에 박힌 도로 접경구역 표시 푯말>

 

(전체 7000여 평의 병천문중소유의 임야 중 124평이 국유지로 강제 수용됨)

 

 16시 30분, 모든 것을 마무리 하고 일을 종결지었습니다. 괴산과 병천행 분들을 전송하고 비안공 문중의 두응회장님을 모시고 돌아오는 서울길은 아무런 일 없었던 모습으로 2006년 3월의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란 무한의 숙제를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