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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익원공파내 소파 문중회소개  

   3) 수원시 이의동 종중 소개

 

  <주요 선조님 소개>

   가) 참의공 김언침(金彦沉). 1514. 중종9~1584. 선조12.  수-71세

 

 충렬공(忠烈公)의 11세손이며 익원공(翼元公) 김사형(金士衡)의 7세손으로서 경기도 수원시 이의동 두릉리의 입향조이신 통정 대부(通政大夫) 형조참의(刑曹參議) 증(贈)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이시다.

 

 공은 선조대(宣祖代)의 문신으로 자(字)는 정중(靜仲)이다. 익원공(翼元公-金士衡)의 7세손이자 부평부사(富平府使) 김성동(金誠童. 1452~1495)의 손자이며 충좌위 부호군(忠佐衛副護軍.  金濾 1485~1550)의 2남이다. 1543년(중종38) 진사(進士)가 되고 1548년(명종3)문과에 급제 후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贈 貞敬婦人)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장사랑(壯仕郞) 이응진(李應軫)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산34-1으로  2007. 5. 31. 수원시 향토유적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승지골로 뻗어내린 광교산의 남쪽 능선에는 안동김씨 세장 묘역이 자리잡고 있으며 가장 상단에 김언침이 위치하며 그 아래쪽으로 김호(金鎬)-김근(金謹)-김효건(金孝建) 묘역(墓域)이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6 폭81 두께49)  상석(높이23 폭173 두께41)  향로석(높이29 폭40 두께31)  촉대석(燭臺石, 높이12 폭31.5 두께31), 망주석(높이183 폭39 두께41), 문인석(높이212 폭69 두께55),  방부(높이36 폭88 두께55)의 옛 석물이 잘 갖추어져 있는데, 상석의 앞면에 ‘증 영의정 행형조참의 김공 언침지묘 증정경부인 전의이씨 부좌(贈 領議政行刑曹參議金公彦沉之墓 贈貞敬夫人全義李氏祔左)’라는 각자(刻字)가 있어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혼유석의 좌측에도 옛 석물(높이6 폭40 두께24)이 놓여 있으나 정확한 용도는 미상이다. 하단이 매몰된 향로석의 좌우에 촉대석을 준비한 것이 주목되며, 복연(覆蓮)과 안상(眼象)이 장식된 방부는 묘역의 좌측에 놓여 있으며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착용한 문인석의 금관이 다소 높지만, 전체적으로 안정된 신체 비례에 얼굴과 손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원형 호석을 두른 봉분 우측의 앞쪽, 지대석(地臺石-높이13 폭111 두께81)위에는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의 묘비(총높이210)가 당당하게 서있다.

 

 오석의 비신(높이118 폭48.5 두께25) 앞면에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행 통정대부 형조참의 안동김공묘비명 병서(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行通政大夫刑曹參議安東金公墓碑銘幷序)’ 라 써서 김언침의 묘비임을 밝히고 있다.

 

 원임 우참찬 조경(原任 右參贊 趙絅. 1586~1669)이  찬(讚)한 비문을 후학 완산후인 이기선(後學 完山后人 李箕善)이 서(書)했으며 건립연대는 ‘檀紀四千二百八十一年 戊子(1948) 三月 日’ 이고 상태 양호하다.

 

 한편 묘역의 우측 뒤쪽에는 산신제(山神祭)에 사용하던 옛 상석(높이15 폭105 두께63)이 마련되어 있다.

 

     <묘역 사진 자료> (2008. 11. 9. 항용(제) 촬영 제공)

 

   묘비석

 

  <과거 급제 사항 >

 

김언침(金 彦 沉), 명종(明宗) 3년(1548년), 별시(別試) 을과1(乙科1)  

인적사항

가족사항

          이력 및 기타

생년(生年)

1514년, 갑술

부(父)

김려

(金濾)

소과(小科)

  1543(계묘)

     진사시

자(字)

정중(靜仲)

조부

(祖父)

김성동

(金誠童)

 

 

호(號)

 

증조부

(曾祖父)

김질

(金질)

전력(前歷)

  진사(進士)

분파조

(分派祖)

익원공 사형

(翼元公 士衡)

외조부

(外祖父)

우즙

(禹楫)

 

 

거주지

(居住地)

 

처부

(妻父)

이응진

(李應軫)

관직(官職)

  형조/참의

 (刑曹/參議)

시호(諡號)

봉호(封號)

 

숙부

(叔父)

김언

(金언)

 

 

 

 

자(子)

김임(金琳)

김근(金瑾)

김찬(金瓚)

 

 

 

<향토 유적 고시문> (수원시 고시 제2007-113호)

    종          별   :   향 토 유 적

    지 정  번 호  :     제 23호

    명         칭   :   안동김씨 참의공파 세장 묘역

    소   재   지   :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산  34-1, 42-1

    수량(면적)   :    일  원

    지   정   일   :   2007.5.31

    소유자(보유자) :  안동김씨 종중

    관  리  자    :  안동김씨 종중

                  (제23호)            지 정 서

 

     위    치 :  영통구 이의동 산 34-1, 42-1

     명    칭 :  안동김씨 참의공파 세장 묘역  

     수    량 :  일 원   

    소유자(보유자) : 안동김씨 종중

     관 리 자 : 안동김씨 종중

                              위를 향토 유적으로 지정합니다.

                                              2007년 6월 4일

 

                                    수  원  시  장    직인

 

  나) 참판공 김근(金謹) (1538~1594)

 

  선조대(宣祖代)의 문신으로 자는 숙온(叔溫)이고, 참의공(參議公) 김언침(金彦沉)의 차남이다. 1564년(명종19) 진사(進士)가 된 후 관직에 나아가 여러 벼슬을 거쳐 포천현감(抱川縣監)을 역임하였다. 김근 묘는 김호 묘 아래에 위치하며 원래 김근과 두 번째 부인 언양김씨(彦陽金氏)의 합장묘이나, 근래에 경기도 안산(安山)에 있던 첫 번째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이장해 옴에 따라 삼위합장(三位合葬)으로 다시 조성하였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6 폭81 두께49) 상석(높이23 폭173 두께113) 향로석(높이29 폭40 두께31) 망주석(높이12 폭31.5 두께31) 문인석(높이183 폭39 두께41)의 옛 석물이 잘 설치되어 있는데, 근래에 밀양박씨가 이장해오면서 석물도 같이 옮겨오게 되어 상석(높이23 폭126 두께81)은 김근 묘 상석의 우측에 놓고 망주석(높이169 폭36 두께36)은 김근 묘 문인석과 망주석 사이에 다시 세웠으며 향로석(높이27 폭32 두께27)과 혼유석(높이5 폭59 두께30)은 묘역의 좌측 공간에 두었다.   

 

 김근 묘의 상석 앞면에  ‘贈戶曹參判行縣監金公謹之墓 贈貞夫人密陽朴氏墓在安山 贈貞夫人彦陽金氏祔左’라고 각자(刻字)되어 있어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다.  

 

 밀양박씨 묘의 상석을 대리석으로 마련한 것이 주목되며, 금관조복(金冠朝服)을 착용한 문인석의 의복선(衣服線)이 여러 겹으로 표현된 것이 양식상의 특징이다.  

 

  묘는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산 34-1에 있다.  

 

   다)판결사공 김효건(金孝建).  1584(선조 17)∼1666(현종 7).

 

 조선 중기 현종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선술(善述), 호는 경현옹(警絃翁) 또는 경옹(警翁). 중시조 충렬공의 13세손이고 익원공 金士衡의 9세손이며 좌의정 김질(金礩)의 7세손으로 조부 증 영의정공 김언침(金彦沉)이 별세하여  수원시 이의동 두릉리 수토산에 장례를 모신 갑신년(1584년)에 포천현감(抱川縣監) 근(瑾)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1596년)에 칠언시(七言詩)를 지어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였고, 24세(1607년)에 참선, 1609년(광해군1)에 진사(進士)가 된 후 출사(出仕)하여 다음해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614년(31세)에 사옹원 봉사, 1623년(인조1) 삼가현령(三嘉縣令)을 거쳐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장령 등을 지냈다. 1623년 장령으로 있을 때 함경감사 목장흠(睦長欽)의 인목대비 폐모절목(廢母節目) 작성문제를 변명하다가 흥해군수(興海郡守)로 체차(遞差)를 당하였다. 1634년에는 광해군 때 폐모 정청(庭請)에 참여하였던 문제로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양해를 받았다.  

 

 용인현 두릉리에서 동국사기 선세사적을 편집하고, 1639년 56세에 광교산에 등정하여 칠언율시(七言律詩) ‘광교산추경’을 찬(撰)하셨고 두릉한거와 당시 문호였던 좌의정 이민구, 이조판서 조경 등의 한시(漢詩) 128수를 편집한 창수록을 저술하였다.  

 

 그 뒤 1652년(효종 3) 정평부사(定平府使)로 있을 때에 영흥부사(永興府使) 김소(金素), 북청판관(北靑判官) 김이경(金以鏡), 경성판관(鏡城判官) 이성시(李聖時) 등과 함께 군사무기의 수리에 따른 직무태만으로 병조의 탄핵 대상이 되기도 하였으나, 승진하여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 등 여러 벼슬을 거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68세에 함경도 정평부사를 지내고 69세에 용인으로 귀향하였다. 83세에 몰한 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첫 번째 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참판(參判) 심경수(沈昌壽)의 따님이시며, 두 번째 부인 나주박씨는 91세를 장수하여 조정으로부터 정1품 증 정경부인을 받으셨으며, 공은 두 부인과 함께 품(品)자형 묘소를 유언하셨다.   

 

 <저서> : 동국사기선세사적(東國史記先世事蹟), 화산김씨 가승(花山金氏 家乘), 창수록(唱酬錄), 갑신갑계첩(甲申甲契帖), 경수록(慶壽錄), 김씨종계첩(金氏宗契帖), 간독문(簡讀文) 등

 

 <品자 판결사공 孝建 묘역>  

 

 김효건 묘는 김근 묘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김효건과 두 부인의 봉분을 각각 따로 마련하여 ‘品’자형 구조의 이색적인 묘제(墓制)를 갖추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9 폭105 두께44.5) 상석(높이27 폭186 두께85) 향로석(높이34 폭42 두께40) 망주석(높이194 폭41 두께42)의 옛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향로석에는 당초문을 장식하고 망주석의 柱身에는 다람쥐를 조각하였다. 상석의 앞면에 ‘行判決事金公孝建之墓西.....贈靑松沈氏  貞夫人.....라는 刻字가 있어 三位를 함께 모셨음을 알 수 있다.  

 

 <문과급제 내용>

 

인조(仁祖)2년(1624년),정시(庭試)병과5(丙科5)  

 

인적사항

가족사항       

          이력 및 기타

생년(生年)

1584년, 갑신

부(父)

김  근

(金  瑾)

소과(小科)

  1609(기유)

    진사시

자(字)

선술(善述)

조부(祖父)

김언침 

(金彦沈)

특별시 

(特別試)

 

호(號)

경현옹 

(警弦翁)

증조부 

(曾祖父)

김  려

(金  濾)

전력(前歷)

   현감(縣監)

분파조 

(分派祖)

익원공 사형

(翼元公 士衡)

외조부 

(外祖父)

김복흥 

(金復興)

품계(品階)

 

거주지 

(居住地)

 

숙부(叔父)

김  찬

(金  瓚)

관직(官職)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

시호(諡號) 

봉호(封號)

 

처부(妻父)

심창수 

(沈昌壽)

 

 

박  열

(朴  悅)

                  

 

                  

                     

자(子)

김  환

(金  鍰)

                                          

 

   品자형의 묘소

 

  판결사공(휘 孝建) 묘소 상석

 

  <각종 문헌 자료 소개>

  1. <용주선생 유고>에서   (2009. 8. 5. 은회(익) 제공)

출전 : 龍洲先生遺稿卷之五

    寄陜川倅 金 孝健

 嗜酒本天性。孰云而失性。酒性兩浩浩。相須不爲病。陽城醉諫議。千古稱忠勁。陶潛醉彭澤。高節簡策映。奈何江陽守。以酒遭廷評。封侯與䌟絖。藥同所用夐。我笑子手拙。酒何負子政。罪酒酒有辭。須徵昔喙硬。

 

  2. <홍재전서>에서 (2009. 8. 24. 은회(익) 제공)

   출전 : 홍재전서(弘齋全書) 제6권

     광릉(光陵)을 배알하던 도중에 운(韻) 자를 뽑아 어가(御駕)를 수행하는 대신(大臣), 각신(閣臣), 경재(卿宰), 승사(承史) 등 여러 신하에게 보이고 연구를 짓다.

 

1.지세는 존엄해라 하늘과 같이 거대한데 / 地勢尊嚴天共大--어제(御製)

 

2.나는 듯한 운악산은 백운향에 접하였네 / 飛騰雲岳接雲鄕-채제공 시

   솔과 삼목은 엄연히 일천 관원이 시립한 듯 / 松杉儼若千官侍

 

 3.하늘은 좋은 시절 위해 저녁을 서늘케 하네 / 天爲令辰住晩凉-김효건

    어가 머물 제 백성들의 바란 바를 알겠고 / 駐蹕仍知民所幸

 

 라) 호군공 김호(金 鎬)  1636~1721 (인조14~경종01)   壽 : 86세  

  경종대(景宗代)의 무신으로 자(字)는 자경(子京)이다. 형조참의 김언침(金彦沉)의 증손이자 포천현감(抱川縣監) 김근(金謹. 1538~1594)의 손자이며 장예원 판결사(掌隸院判決事) 김효건(金孝建. 1584~1666)의 장남이다.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으며 86세의 장수를 누렸다.  

  묘는 김언침 묘소 바로 아래에 위치한다.

 

마)중추부사공 (中樞府使公) 김 환(金 鍰) 1650~1745(효종01~영조21)   壽 : 96세  

 판결사공 효건의 네째 아들

 

   묘소 우측면

 

  묘소 정면

 

바) 효헌공 김찬(金 瓚). 1543(중종38)∼1599(선조32)-- (익)

 

  조선의 문신.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 익원공(휘 사형)의 후손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 언침(彦沈)의 아들. 1567년(선조즉위) 진사(進士)가 되고, 156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70년에 검열이 되고, 이후 대교·봉교·전적·형조정랑·검상·사인·이조정랑 등의 관직과 지평·집의·정언·헌납·사간·수찬·교리·응교 등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1573년 평안 삼도사로 나가 군적(軍籍)을 정리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평안도 순무어사로 활약하였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직제학·승지·좌참찬·동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대사성·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파천을 반대하였으며, 대사헌으로서 선조를 호종(扈從)했다. 임금 일행이 개경에 이르자 동인(東人) 이산해(李山海)의 실책을 탄핵하여 영의정에서 파직시키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김공량(金公諒)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뒤에 정철(鄭澈) 밑에서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역임하고,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1594년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  지원군을 인도(引導)하고 일본군과 강화회담을 하는 등 크게 활약했다.

 또, 일본과 강화회담을 벌일 때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부터 예조판서·지의금부사·대사헌·이조판서를 연이어 지냈고, 1596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우참찬(右參贊)까지 승진하였다. 대사헌 때 가족을 멀리 피난시켰다고 탄핵을 받고 체직되는 등 소소한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지만,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경제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이 능숙한 명신이었다.

 

  임진왜란 수습의 막후 인물로서 3국간의 외교적인 절충을 성공시킨 명신으로 특히 경제정책의 전문가이자 명문장가였다. 임진왜란 뒤 전쟁의 수습과정에서 죽자, 선조는 조회를 정지하여 추모의 뜻을 표했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배위는 증 정경부인(贈 貞敬夫人) 양성이씨(陽城李氏. 1549~1636. 8.29)이며 부는 용(墉)이다.  묘소는 현재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산 42-1이며 승지골(勝地고을:성죽골로 잘못 불리어짐)로 불리운다.

 

    <묘소 사진>  (2004. 5. 30. 발용(군) 제공)  

 

  

  <각종 교지 소개>

 

  

효헌공 시호를 내리는 교지

 

  

문과 급제 교지

 

   

성균관 전적에 임하는 교지

 

  

평안도 도사에 임하는 교지

 

 예조판서에 임명하는 교지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는 교지

 

이조판서에 임명하는 교지

 

예조판서에 임명하는 교지

 

 예조판서에 임명하는 교지

 

예조판서에 임명하는 교지

 

묘갈문 소개 (2005. 2. 18. 주회(안) 제공)

 

출전 : 龍洲先生遺稿 卷之十五

墓碣

吏曹判書訥庵金公墓碣 幷序

 

安東之金。錫姓于吾東最先。而著且大而蕃。蓋本於新羅敬順王云。十二傳至上洛公方慶。以精忠?節。大鳴麗朝。入我朝。有諱士衡。佐太祖爲開國元勳。位左議政。諡翼元。四傳而諱?。始以文吏進。終?雲臺。爵左議政。封府院君。諡文靖。生諱誠童。嘉善府使。生諱濾。禦侮將軍忠佐衛副護軍。贈兵曹參判。於公爲祖。生諱?沈。通政大夫刑曹參議。贈議政府領議政。是爲皇考。?全義李氏。將仕郞應軫之女。嘉靖癸卯生公。公於兄弟。居第三也。公諱瓚。字叔珍。自幼氣專而容寂。不勤父兄。委己於博士業。卓然早成。年二十。赴壬戌殿試。危第而下。丁卯。成進士。又登其年上第。分隸槐院。庚午。以選入藝文館檢閱而待敎。辛未。由奉敎陞禮曹佐郞。壬申。以事罷。明年。敍拜殿中。遞付典籍。時朝廷以兩西軍逋籍校濫案。擇朝中素稱公明人。?以都事考講之任。乃拜公平安都事。至則凡視講。唯?其椎魯無能爲者。苟有寸長。必陟而?拂之。人人悅喜。雖汰者亦無怨?。其後關西人決科之盛由此云。甲戌春。拜司諫院正言。夏。由典籍拜持平遞。俄遷秋曹員外。俄陞正郞。踰月還持平。遞授司?署令。遷水曹郞。受平安道巡撫御史之命。復命拜正言。卽乙亥春也。歷直講,刑曹正郞。還持平。秋。改海運判官。是時兩湖漕運之臭相銜。朝廷咎管運者非人。故選授及公。自丙子至甲申。於憲府。爲持平者五。執義者一。於諫院。爲正言者一。獻納者二。司諫者一。玉堂修撰者三。校理者六。應敎者一。中書檢詳而舍人者三。天官直授正郞。師儒之職亦多往來。諸曹郞署可略也。甲申春。再入中書也。往餞赴京使。用樂而罷。故事雖遇災異。不廢習樂。論者實未?也。亡何。敍復。旋丁內艱。制除。又入中書閱月。拜典翰。俄陞直提學。丁亥。陞同副。轉左副。夏遷國子。無何。又還左副。陞東壁。時圻使缺。特命授公。蓋上察公有老母。爲便養也。瓜熟。授同知樞府。又轉國子。遷大憲。己丑。由護軍拜副提學。改少司寇,諫長,知申事。庚寅。用參鞫逆功。增秩嘉義。鉞下理。公與鄭逆。同年上舍。曾有問訊尺蹄故。上察無他。只坐罷。明年。別敍。時選曹上大諫望者再。上再置不用。敎曰。今敍中人可擬。公乃拜大諫。冬遞授同樞。移貳大戎。又還大憲。壬辰夏四月。倭入寇。巡邊使申砬出屯忠州。與戰?。飛羽急。上用二三大臣計。定去?。公時都都御史。率諸諫官排?而入。大聲呼曰。大司憲臣某來有急啓事。中貴人以內府劍二分與公及執義。仍導入御前。上下執公手曰。與卿等講治道凡幾年所。乃有今日耶。公俯伏呑聲。仰以對曰。臣等之罪也。遂極諫去?之非。請於明曉出御敦化門。集衆思招義勇。且以羽檄徵四方兵。以示效死勿去之義。二百年休養生靈。寧無感動。言甚切至。上?之。公退省老親于家則夜未艾矣。旋卽馳詣闕下。以俟敦化門御坐之儀。乘輿已駕出城矣。無如何。遂陪衛以從。至碧蹄。命加從臣資且錄功。公與同寮啓執不可。承允。至松京。又與同寮論首相李山海誤國罪。及金公亮招權?貨。釀成禍亂。請罷山海鞫公亮。上皆允之。仍命三司入侍。上謂執義權?曰。爾何不直勸我去?者獨山海乎。柳成龍亦然爾。公與?。反復陳成龍之言與山海異之之意。翌日。命加從臣資。公陞資憲。大駕駐平壤旬有餘日。報自海西來。言賊放兵四劫。畿輔郡邑折入虎口。血流原野。始公送老母于永平。聞是報。忽若無生。流涕陳疏請尋母。上許之。公竭蹶冒九死入圻。遇母夫人山谷間。卽扶入江華。時故相鄭澈自行在拜都體察使來江華。奏公爲副。癸巳。改全羅道都檢察使。冬。劉總兵綎統兵南下。自行在命公爲接伴使。公?相以禮。與俱上下於兵間。披露肝膈無間。雖以天將之貴倨。亦致敬重焉。臨別。贈以其先稿一帙爲信。甲午秋。隨總兵至義州。冬復命。乙未夏。由西樞拜秩宗。秋遷憲長。丙申。又還秩宗。俄拜天官?宰。時母夫人還西原舊居。公解職歸省。丁酉。五拜都憲。四遷秩宗。皆以親病未嘗淹數月京也。秋。倭奴又動。兵鋒綴稷山。京城凶凶。公以都憲。夙夜在公。聞大夫人疾危篤。呈辭馳往則訃至中途矣。公居喪。不以年迫耳順爲解衰麻。哭泣之節。不減壯年之爲。才免祥冠。美??革。啓手足于高陽村舍。卽己亥十二月某日也。訃聞。輟朝遣郞。文以祭之。越明年二月。葬于龍仁縣西頭郞里午向之原。從先兆也。夫人陽城李氏。甲午名臣大司憲世英之曾孫。務功郞墉之女。在家以孝稱。十六。歸公。事舅姑盡婦道。佐君子主中饋。肅恭誠至。及公歿。以未亡居者三四十年。持門戶斬斬如也。絅入甥館以來。升堂起居者數。夫人見子壻輩。必以議政公事勖之曰。夫子治經業。不?若嗜欲。一月之內。未嘗見一日怠而在家也。問其所與游則盡一時名流。而其中最相善者。西崖柳相,鶴峯金公也。金公於辛卯奉使日本也。無一字家問。而獨於公。封尺牘示情素。柳相坐時論。幾??墳墓矣。聞公之歿。哭而失聲。馳?千里。一字一淚云。此非老婦臆說。公猶子慶建能親目見二事而云。蓋公?順而裏方。入而事親。出而事君與待朋友。初持一心。未嘗變節。當官處事也。不以一毫私意間公道。當丙申間。大難甫定。仕途混淆。公時秉銓。權度不差。物論?然。吳晩翠億齡。正士也。嘗語人曰。亂後宰物之公。金某爲首云。公立朝。可觀事非一二數。子姓生晩且獨。又經兵?。家乘泯沒無傳。況某之?聞而杜撰乎。然公行應銘法。有識者無異辭者也。遂爲之銘曰。

 

惟金著姓。自羅遠哉。上洛?節。厥家昭開。歷麗入鮮。台斗蟬聯。公實其孫。嗣后光前。弱冠射科。同進讓先。載筆史苑。華聞日揚。夕郞銓部。粉署馨香。高臺?角。政府樞機。靡顯不踐。靡選或違。翔于郞署。進司喉舌。上省有母。超秩圻?。恩私無慮。所思盡節。逮夷猖獗。公長御史。排?陳猷。惟執效死。六?遽西。負?忘?。丸都一疏。方寸實亂。九死尋母。于海之岸。後命副體。流離亦渥。旋?天將。驅馳單力。于丙于丁。或秩或?。沙堤只尺。衆望之聳。如何奄忽。?慽是?。其躬不顯。惟後之遂。孫哉繩繩。毛皆五彩。太?不?。善庶無怠。

 

형태서지 권수제 龍洲先生遺稿    판심제 龍洲先生遺稿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1703年刊    권책 23권 9책    행자의 수 10행 20자    반곽의 크기 21.5×16.5(㎝)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도서번호 한46-가1182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90    

 

저자    성명 조경(趙絅)    생년 1586년(선조 19)    몰년 1669년(현종 10)    자 日章   호 龍洲, 柱峯, ?翁    본관 漢陽    시호 文簡

 

   <역문>

 

 묘비명(碑銘) 조경(趙絅 :효헌공 김찬의 사위) 지음.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우리 동방에서 가장 먼저 성씨를 하사받아 저명하고 번창하였는데,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뒤 12대를 거쳐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에 이르러 위대한 충절(忠節)로 고려조(高麗朝)에 크게 울리었고, 우리 조선조(朝鮮朝)로 들어와 김사형(金士衡)이란 분은 태조(太祖)를 보필한 개국 공신(開國功臣)으로서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익원(翼元)의 시호를 받았다.

 

 그 뒤 4대를 지나 김질(金礩)이란 분이 비로소 문관(文官)으로 진출하여 마침내 공신으로 녹훈(錄勳)되어 좌의정(左議政)의 벼슬을 지내고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문정(文靖)의 시호를 받았다. 문정이 가선 대부(嘉善大夫) 부사(府使) 김성동(金誠童)을 낳고 부사가 어모 장군(禦侮將軍) 충좌위(忠佐衛) 부호군(副護軍) 증(贈)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여(金濾)를 낳았는데, 이분이 공의 할아버지이다.  

 

 이분의 아들 통정 대부(通政大夫) 형조 참의(刑曹參議) 증(贈)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김언침(金彦沉)이 공의 아버지이고, 전의 이씨(全義李氏) 장사랑(壯仕郞) 이응진(李應軫)의 딸이 공의 어머니이다.  

 

 공이 가정(嘉靖) 계묘년(癸卯年 1543년 중종 38년)에 태어났는데, 형제 중에 셋째였다. 공의 휘(諱)는 찬(瓚)이고 자(字)는 숙진(叔珍)이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온전하고 용모가 차분하여 부형(父兄)의 권유 없이도 박사(博士)의 학업에 열중하였으므로 탁월하게 숙성(夙成)하였다.  

 

나이 20세에 임술년(壬戌年 1562년 명종 17년) 전시(殿試)에 나아가 근소한 차이로 낙방하였다가 정묘년(丁卯年 1567년 명종 22년)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그 해에 또 대과(大科)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에 예속되었다가 경오년(庚午年 1570년 선조 3년)에 예문관(藝文館)으로 들어가 검열(檢閱)과 대교(待敎)를 역임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571년 선조 4년)에 봉교(奉敎)를 거쳐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승진되었다가 임신년(壬申年 1572년 선조 5년)에 사건으로 인해 파직되었고, 이듬해에 기용하여 전중(殿中)에 임명되었다가 전적(典籍)으로 교체되었다. 그때 조정에서 본래 공평 명철로 일컬어진 사람을 간택하여 검열하는 도사(都事)의 임무를 주었는데, 공은 평안 도사(平安都事)에 임명되었다. 공이 부임하여 검열할 때 어리거나 노둔하여 무능한 자들은 도태하고 재능이 있는 자는 반드시 기용하니, 사람마다 기뼈하였고 도태된 사람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 뒤 관서(關西)의 사람이 무과에 많이 합격한 것은 이로 말미암았다고 한다.   

 

 갑술년(甲戌年 1574년 선조 7년) 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고 여름에 전적(典籍)을 거쳐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교체된 지 얼마 안 되어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전직되고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한 달이 넘어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사온서 영(司?署令)으로 교체되었고,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전직되어 평안도 순무어사(平安道巡撫御史)의 명을 받았다가 다시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바로 을해년(乙亥年 1575년 선조 8년) 봄이었다. 직강(直講), 형조 정랑을 거쳐 다시 지평에 임명되었고 가을에 해운 판관(海運判官)으로 전직되었는데, 이때 호서(湖西)와 호남(湖南)의 곡물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잇따라 침몰되자, 조정에서 해운을 관장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라고 탓하였기 때문에 공을 선발한 것이었다.  

 

 병자년(丙子年 1576년 선조 9년)부터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에 이르기까지 사헌부에서는 지평을 다섯 번, 집의를 한 번 하였고, 사간원에서는 정언을 한 번, 헌납을 두 번, 사간을 한 번 하였으며, 홍문관에서는 수찬을 세 번, 교리를 여섯 번, 응교를 한 번 하였고, 의정부에서는 검상과 사인을 각각 세 번씩 하였으며, 이조에서는 곧바로 정랑을 하였고 사유(師儒)의 직책도 많이 맡았는데, 기타 육조(六曹)의 낭관으로 왕래한 것은 생략한다.

 

 갑신년 봄에 재차 의정부로 들어가 연경(燕京)에 가는 사신을 전송할 때 음악을 사용하였다가 파직되었다. 고사(故事)에 비록 재이(災異)를 만나도 음악을 익히는 것을 폐하지 않았는데, 탄핵한 사람이 실로 그 고사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사면을 받았다가 곧 바로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다. 상복(喪服)을 벗고 또다시 의정부로 들어가 한 달이 넘자 전한(典翰)에 임명되었고, 얼마 안 되어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정해년(丁亥年 1587년 선조 20년)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승진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기었고, 여름에 국자감(國子監)으로 전직되었다가 이윽고 또다시 좌부승지로 돌아와 좌승지로 승진하였다. 그때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의 자리가 비어 특별히 공을 임명하였는데, 이는 임금이 공에게 노모(老母)가 있는 것을 살펴서 봉양하라고 한 것이었다. 임기가 차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가 또 국자감으로 옮기고 대사헌(大司憲)으로 전직되었다.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년)에 호군(護軍)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참판(刑曹參判), 대사간(大司諫), 지신사(知申事 도승지)를 역임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590년 선조 23년)에 역적의 국문에 참여한 공로로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승진되었다가 이윽고 하옥(下獄)되었다. 이는 공이 역적 정여립(鄭汝立)과 같은 해에 상사(上舍)로서 일찍이 안부를 묻는 서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임금이 별다른 의도가 없는 것을 알고 파직만 하였다. 그 이듬해 별도로 기용할 때 이조에서 대사간(大司諫)에 추천한 자를  

 

두 번이나 올렸으나, 임금이 두 번 다 쓰지 않고 하교(下敎)하기를, “지금 서용하는 사람 중에서 추천하라.”고 하였으므로 공이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동지중추부사로 교체되었다가 병조 참판(兵曹參判)으로 전직되었고  

 

또다시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여름 4월에 왜적이 침범할 때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立)이 충주로 나가 싸우다가 패배하였다는 급보가 올라오자 두서너 대신(大臣)들의 계책에 따라 서울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공이 그때 도어사(都御史)로 간관(諫官)들을 이끌고 대궐 문을 박차고 들어가 큰소리로 말하기를, “대사헌 신 아무개가 급히 아뢸 일이 있어 왔다.”고 하니, 중귀인(中貴人)이 내부(內府)의 칼 두 자루를 공과 집의(執義)에게 나누어 주고 임금의 앞으로 인도하였다. 임금이 내려와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경들과 몇 년간 치도(治道)를 논하였는데, 오늘날 같은 일이 있단 말인가?”라고 하니, 공이 엎드려 울먹이다 우러러보고 대답하기를, “신들의 잘못입니다.” 하였다. 이어 서울을 떠나는 잘못에 대해 극구 간하고 나서 청하기를, “내일 아침에 돈화문(敦化門)으로 납시어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고 의병(義兵)을 모집하소서. 그리고 사방에 징병(徵兵)의 격문(檄文)을 발송하여 죽어도 서울을 떠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소서. 그러면 2백년 간 육성한 백성들이 어찌 감동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매우 간절히 말하니, 임금이 머리를 끄덕였다. 공이 물러나 집으로 가서 노모(老母)를 뵙고 나니, 날이 아직 밝지 않았다. 곧바로 대궐로 달려가 돈화문에서 임금이 납시기를 기다렸으나 어가(御駕)가 이미 성 밖으로 떠나버렸으므로 할 수 없이 어가를 호위하고 따라갔다. 벽제(碧蹄)에 이르러 임금이 수행하는 신하들의 품계를 올려줌과 아울러 공로를 기록하라고 명하자, 공이 동료들과 같이 불가(不可)함을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 송경(松京)에 이르러 또 동료들과 같이 나라를 그르친 영의정(領議政) 이산해(李山海)의 죄와 권력을 이용해 뇌물을 탐하다 화란(禍亂)을 양성한 김공량(金公亮)의 죄를 탄핵하면서 이산해는 파직하고 김공량은 국문할 것을 요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하고 이어 삼사(三司)를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집의(執義) 권협(權俠)에게 말하기를, “너는 왜 정직하지 않는가? 나에게 서울을 떠날 것을 권한 사람은 이산해뿐만 아니라 유성룡도 그러하였다.”고 하니, 공이 권협과 같이 유성룡의 말은 이산해의 뜻과 다르다는 점을 반복해서 개진하였다. 그 이튿날 수행하는 신하들의 품계를 올려주라는 명에 따라 공은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다.  

 

 어가가 평양(平壤)에 머문 지 10여 일 만에 해서(海西)에서 소식이 왔는데,

 

왜적이 병력을 놓아 사방에서 공격하여 경기의 고을이 호구(虎口)로 들어가 들판에 핏물이 흐른다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이 노모(老母)를 영평(永平)으로 보내 놓고 이 소식을 듣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 눈물을 흘리고 상소를 올려 어머니를 찾겠다고 요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공이 허겁지겁 죽음을 무릅쓰고 경기로 들어가 산골에서 어머니를 만나 곧바로 강화(江華)로 모시고 들어갔다. 그때 고(故) 의정(議政) 정철(鄭澈)이 행재소(行在所)에서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되어 강화도에 왔다가 임금에게 아뢰어 공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다시 전라도 도검찰사(全羅道道檢察使)로 임명되었다가 이 해 겨울에 총병(摠兵) 유정(劉綎)이 군사를 거느리고  

 

남하하자 행재소에서 공을 접반사(接伴使)로 임명하였다. 공이 예로 대우하고 그와 같이 군중(軍中)에서 노닐며 충심을 피력하여 간격이 없자 거만한 명(明)나라 장수도 매우 존경하였고, 이별에 임해 그의 선친(先親) 유고(遺稿) 한 질을 주어 믿음을 표시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 가을에 총병을 따라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다가 겨울에 임무를 마치고 복명(復命)하였다. 을미년(乙未年 1596년 선조 28년) 여름에 중추부사(中樞府使)를 거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고 가을에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겨졌다.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또다시 예조 판서로 돌아왔다가 얼마 안 되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임명되었다. 이때 공의 어머니가 서원(西原)의 옛 집으로 돌아왔으므로 공이 사임하고 돌아가 문안 인사를 드렸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다섯 번 대사헌에 임명되고 네 번 예조 판서로 전직되었는데, 모두 어버이의 병환으로 인해 몇 달 동안 서울에 머문 적이 없었다. 가을에 왜적이 또 군사를 출동하여 직산(稷山)을 공격하자 서울이 술렁술렁하였다. 공이 대사헌으로서 주야로 공무를 보다가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사임하고 달려가다가 도중에 부음(訃音)을 받았다. 공이 거상(居喪)할 때 나이 육순에 가까웠으나 상복(喪服)을 벗지 않았고, 곡하는 예절이 장년(壯年)에 못지않았다.  

 

 겨울 대상(大祥)을 지나고 나서 병환이 점점 위독해져 고양(高陽)의 촌사(村舍)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때는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 12월 모일(某日)이었다. 공의 부음을 보고하자 조회를 중지하고 제문(祭文)을 관리에게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그 이듬해 2월에 용인현(龍仁縣) 서쪽 두랑리(頭郞里) 남향(南向)의 자리에  장례를 치렀는데, 선영(先塋)의 아래였다.  부인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갑오년(甲午年) 명신(名臣) 대사헌(大司憲) 이세영(李世英)의 증손이자 무공랑(務功郞) 이용(李墉)의 딸이다. 출가하기 전에 효성으로 소문이 났고 16세에 공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를 섬기되 며느리의 도리를 다하였고, 남편을 보필하되 집안일을 맡아 엄숙하고 정성이 지극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미망인(未亡人)으로 30~40년을 지내면서 가문을 반듯하게 꾸려나갔다. 내가(조경) 그분의 사위가 된 이후로 자주 문안 인사를 드렸는데, 부인이 아들과 사위를 보면 반드시 의정공(議政公)을 본받으라고 권면하면서 말하기를, “너희 아버님이 경서(經書)를 맛있는 음식보다 더 좋아하여 한 달 동안 하루도 그냥 집에서 나태하게 있은 적이 없었다. 같이 노니는 사람들은 물어보았더니, 모두 일시의 유명한 인사였고 그 중에 가장 친한 사람은 서애(西厓) 유 상공(柳相公 유성룡)과 학봉(鶴峯) 김공(金公 김성일)이었는데, 김공이 신묘년(辛卯年 1591년 선조 24년)에 일본(日本)에 사신으로 갔을 적에는 집안의 소식은 한 글자도 물어보지 않고서 너희 아버님에게 서신을 보내어 심경을 털어놓았으며, 유 상공이 시론(時論)의 탄핵을 받을 때 무덤까지 해를 입을 뻔하였는데, 유 상공이 너희 아버님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통곡하고  천리 먼 곳에서  

 

제문(祭文)을 보낸 것에 글자 하나마다 눈물 한 방울씩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너희 아버님의 조카 김경건(金慶建)이 직접 두 가지 일을 보고 말해 주었다.”고 하였다.  

 

  대체로 공은 외모는 유순하였으나 마음은 방정하였다. 집에 들어와 어버이를 섬길 때나 조정에 나가 임금을 섬길 때나 벗을 대할 때나 처음에 가졌던 일심(一心)을 변한 적이 없었으며, 공무를 처리할 때 털끝만큼도 사사로운 뜻으로 공도(公道)에 개입하지 않았다.  

 

 병신년(丙申年 1596년 선조 29년)에 이르러 큰 어려움이 진정되자 벼슬길이 혼탁해졌는데, 그때 공이 인사권을 담당하여 전형(銓衡)에 착오가 없게 하니, 여론이 수긍하였다. 만취(晩翠) 오억령(吳億齡)은 정직한 선비였는데,  

 

그가 일찍이 남에게 말하기를, “난리 이후로 사람을 공평하게 쓴 사람은 김 아무개가 으뜸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조정에 벼슬 할 때 볼 만한 일이 한두 가지뿐만 아니었으나 자손이 어리고 고독한 데다가 전란(戰亂)을 겪은 바람에 가승(家乘)이 없어져 전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더구나 나처럼 견문이 좁은 자가 비명(碑銘)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의 행실은 명법(銘法)에 맞으므로 유식한 사람은 이의가 없을 것으로 여긴다. 이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김씨는 저명한 성씨로 먼 신라 때 시작됐도다.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의 위대한 절개는 그 가문을 환히 열었도다.

고려부터 조선 때까지 고관(高官)이 줄줄이 나왔도다.

공은 실로 그 후손으로서 뒤를 이어 선조(先祖)를 빛냈도다.  

약관(弱冠)에 대과(大科)에 급제하니 동료가 선두를 양보했도다.  

한림원에 필단(筆端)을 잡으니 명성이 날마다 들날렸도다.  

이조에서 낭관을 지내고 사온서에서 향(香)을 맡았도다.  

승정원에서 치관(?冠)을 썼었고 의정부의 중임을 맡았도다.  

지내지 않은 고관이 없었고 선발이 틀린 적도 없었도다.  

낭서(郎署)에서 나래를 펼치었고 승진하여 승지를 맡았도다.  

임금이 어머니 있음을 보살펴 경기 관찰사에 발탁했도다.  

무려 사사로운 은총 이러했으니 생각하는 바 절개를 다하는 것뿐이었네.  

왜적이 걷잡을 수 없이 침범할 때 공이 어사(御史)의 장(長)이 됐도다.  

입궐하여 계책을 개진하고 죽기로 마음을 먹었도다.  

어가가 서쪽으로 떠나니 짐을 지고 고초를 잊었도다.  

상경한다고 상소를 올리니 마음이 정말로 산란했도다.  

죽음을 무릅쓰고 모친을 찾아 해매었도다.  

뒤에 체찰 부사(體察副使)로 명하니 유리(遊離) 속에도 은총이 후했도다.  

명나라 장수 접반사가 되어 있는 힘을 다하여 주선했도다.  

병신년과 그리고 정유년에 예판(禮判)과 이판(吏判)을 지냈도다.  

의정(議政)의 길이 가까워지니 여망의 기대가 컸었도다.  

어이하여 갑자기 떠났는가? 상중에 슬픔이 빌미됐도다.  

자신은 현달하지 않았으나 후손이 그 뜻 이룩하리로다.  

자손이 뒤를 계속 이어받아 재덕(才德)이 모두 선대와 같을 것이다.  

저 하늘은 변하지 않으니 선행에 나태하지 말지어다.  

 

  <묘역 소개>

 

  출전 : 수원 참의공 후손 카페 http://cafe.daum.net/k1259

 

  새말의 동쪽 구릉에 김찬 묘가 자리잡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높이16 폭100 두께62) 상석(높이30 폭178 두께117)  향로석(높이29 폭35.5 두께32) 촉대석(높이12 폭31 두께27)  망주석(높이218 폭45두께45) 문인석(높이231 폭72 두께52)  방부(높이47 폭112 두께75)의 각종 옛 석물이 구비되어 있는데,  최근에 雙墳으로 구성된 각 봉분에 원형 호석을 둘렀다.  

 

하단이 매몰된 향로석의 좌우에 촉대석이 있어 주목된다.  

 

 覆蓮(복연), 眼象(안상),唐草紋(당초문)이 잘 조각된 방부는  묘역 좌측의 육중한 문인석과 망주석 사이에 놓여 있다.  金冠朝服을 착용한 문인석은 신체에 비해서 머리와 손이 크게 표현되었지만,  앞면의 과 뒷면의 와 에 장식된 문양이 매우 화려하다.  망주석 역시 雲角, 連珠의 문양 조각이 세밀하다.  또한 묘역의 우측에 方趺蓋石 양식의 묘갈(총높이271)이 건립되어 있다.  

 

 오석의 비신(높이162 폭64 두께34.5) 전면에  ‘贈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行資憲大夫吏曹判書右參贊兼知春秋館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安東金公瓚之墓碣 贈貞敬夫人陽城李氏附左’라  되어 있어 비석의 종류가 묘갈임을 밝히고 있다.  

 

 비신의 四面에 국한문으로 지어진 묘갈문을 기록하였으나  撰書者는 남기지 않았고 건립연대는 1963년이다.  개석(높이56 폭117 두께85)에는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방부(높이53 폭118 두께88)에는 문양을 넣지 않았다.  그리고 묘역 우측의 뒤쪽에는 山神祭 상석이 마련되어 있다.  한편 묘역입구에는 1987년에 건립한  이首龜趺 양식의 신도비가 서 있는데  용주(龍州) 조경(趙絅:1586~1669)이 찬(撰)한 것을  13세손 김재선(金在璿)이 번역하여 국한문 혼용으로 새기고 있다.  

 

눌암공 시장 (2007. 3. 14. 영환(문) 제공)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儀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行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春秋館義禁府事五衛都摠莩摠管訥菴金公諡狀

 

公諱瓚。字叔珍。自號訥菴。其先安東人。新羅敬順王之裔也。在麗。上洛公方慶。以精忠偉節鳴。入聖朝。有諱士衡。官左相。爲開國元勳。四傳而諱礩。亦官左相。封府院君。諡文靖。寔公高祖也。曾祖諱贖。嘉善府使。祖諱濾。忠佐衛副護軍。贈兵曹參判。考諱彦沈。官刑曹參議。贈領議政 妣全義李氏將仕郞應軫之女。以嘉靖癸卯生公。公力學早成就。丁卯。中進士。又擢其年第。分隷槐院。庚午。薦入藝文館爲翰林。由奉敎陞禮曹佐郞。自是諫院則歷正言獻納司諫。憲府則爲持平執義。玉堂則拜修撰校理,應敎。政府則檢詳舍人。吏曹則正郞。一官而屢經者多。外則爲平安都事海運判官京畿灾傷敬差官。如國子樂院禮賓及諸郞署。可畧也。公素以公明著稱。方是時。朝廷患兩西軍額逋校儒濫。則擇公而拜都事。患兩湖管運者非其人。漕舶多臭。則擇公而授判官。公亦所至殫誠。皆得以稱旨。而其珥事。講校儒也。不鄙夷。其人苟有寸長。必奬勵而剪拂之。人人悅喜。由是而感發成名者多。甲申。丁議政公憂。廬于墓。服闋。由典翰陞直提學。明年。擢拜同副承旨。轉左副。尋遷大司成。已而。京畿按察使缺。上特授公。盖察公有老母。使便養也。秩滿。授同知樞府。又轉大司憲。己丑。拜副提學。屢遷戶曹參判,大司諫,都承旨。庚寅。用參鞫逆功。陞秩嘉義。辛卯。拜兵曹參判。又移大司憲。壬辰夏四月。倭奴大入冦。巡邊使申砬敗報至。京城鼎沸。上用二三大臣言。定去邠策。公率諸諫官。排闥而入。大聲呼曰。大司憲臣瓚有急啓事。叫至再三。時夜已深。內侍持內府劒二。以上命分與公及執義。仍導入。上露坐堦席上。遽下執公手曰。與卿等講治道凡幾年。乃有今日耶。公哭失聲對曰。臣等之罪也。遂極陳去邠非計。請於明曉出御敦化門。招義勇。且以羽檄徵四方兵。以示效死勿去之意。二百年休養生靈。寧無感動。言甚切至。上頷之。公退省母夫人。卽馳詣闕下。以俟上之出御敦化門。乘輿已駕出城矣。無如何。遂陪衛至碧蹄。命加從臣資。且錄功。公曰。一日扈駕。反以是陞資耶。執不可。上允之。至松京。與同寮論首相勸上去邠之非及金公諒招權黷貨罪。請罷首相鞫公諒。上皆從之而公諒已逃矣。尋命加從臣資。公亦陞資憲焉。初。公送母夫人避冦于永平。至是。扈駕駐平壤十餘日。聞賊放兵刦畿輔。血流原野。公流涕陳䟽請尋母。上許之。公冐死行虎口。遇母夫人山谷間。卽扶入江華。時。鄭相國澈。拜都體察使來江華。上令自擇副。奏公爲副使。癸巳。改全羅道都檢察使。冬。劉総兵綎。提兵南下。自行在揀公爲接伴使。公承命儐相。誠禮並至。雖以天將之貴倨。敬重殊甚。臨別。贈以其先稿一帙以致意焉。乙未。拜禮曹判書。俄遷大司憲。丙申。又判禮曹。俄拜吏曹判書。時。大難甫定。仕途混淆。公秉銓權度不差。未嘗以一毫私害公。吳晩翠億齡嘗語人曰。難後宰物之公。金某爲首云。時。母夫人還西原舊居。公解職歸省。丁酉。五拜都憲。四遷宗伯。間爲右參贊知義禁。皆以親病未嘗淹數月京也。秋。倭奴又動兵。京師震。公時珥憲爲扈從計赴京。聞大夫人疾篤。拜䟽馳往。則訃及中道矣。公不以年老爲解。執禮過毁。纔祥禫竟。卒于高陽村舍。卽己亥十二月十二日也。訃聞。上震悼輟朝停市。遣郞致祭。哀榮備矣。越明年二月。葬于龍仁縣頭郞里某向之原。從先兆也。夫人陽城李氏。大司憲世英之曾孫。務功郞墉之女。生五女一男。女長適宋碩祚牧使。次適洪汝翼都正。次適沈績進士。次適趙文簡公絅。次適尹世耈進士。男弘建。公恭以處己。和以接物。稱人善唯恐不彰。掩人過如或不及。撫兩兄遺孤恤嫠妹。皆出至誠。顚沛必與之同。侍母夫人承順慰悅之。靡所不用其極。立朝三十餘年。位躋八座。身不衣錦綃。居止若寒士。卽亡論雅望傾朝野。宣廟之禮遇公甚至。當己丑獄。辭連公。下之理。上察無他。卽命赦之。只坐罷。已而別敍。時。選部上大諫望者再。上再不用。敎曰。盍以別敍人注擬。嗚呼。公之能得此於君父者。非言孚行假曷以哉。公立朝可觀事非一二數。家乘閱兵燹。蕩佚無在者矣。趙文簡公嘗言。李夫人見子婿輩。必擧公而勖之曰。夫子治經業。不啻若嗜欲。所與遊盡一時名流。而最相善者。西厓柳相,鶴峯金公云。金公於辛卯奉使日本也。無一字家問。而獨於公有書。柳相聞公歿。馳誄千里。所以稱詡而悼惜之殊至。嗚呼。如柳相者。汙不至阿好。觀於此亦可以知公之平日矣。玆用藉手於太常氏。要以易名焉

 

嘉善大夫龍驤衛副司直兼藝文館提學同知春秋館事蔡濟恭撰

 

乾隆三十二年十一月照訖

 

落點 孝獻 慈惠愛親曰孝 嚮忠內德曰獻

章憲  出言有文曰章 行善可紀曰憲

景獻  由義而濟曰景 獻上同

 

출처 : 樊巖先生集卷之四十一  채제공(蔡濟恭). 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春秋館義禁府事五衛都摠莩摠管訥菴金公諡狀   

 

  사) 고령공(高靈公) 김주(金 周). 1597--1663

 

    <교지 소개>

 

 아)선전관공(宣傳官公) 김정회(1636~1715)

 

    출전 : 수원 참의공 후손 카페 http://cafe.daum.net/k1259

 

 肅宗代의 무신으로 字는 子嘉이다. 高靈縣監 金周의 五男이자 奉直郞 金正彪의 동생이다. 첫 번째 부인 靑松沈氏는 進士 沈壽卿의 따님이다.

 

 1676(숙종2)년 무과 급제 후  宣傳官을 역임하였다. 김정회 묘는 김홍건 묘의 우측 구릉에 위치하며,  묘역에는 혼유석(높이13 폭83.5 두께31.5) 상석(높이36 폭140 두께89) 향로석(높이48 폭38.5 두께32) 망주석(높이148 폭34 두께33.5)의 옛 석물이 설치되어 있다.

 

 향로석의 윗면에 ‘子午’라고 글씨를 새겨 正北과 正南의 방향을 표시하였다. 이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어 石物 연구의 희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 향로석에 唐草紋을 장식하였으나 망주석에는 아무런 문양도 조각하지 않았다.

 

상석의앞면에 ‘宣傳官安東金公正會之墓 靑松沈氏 金海金氏附同’이라는 刻字가 있어

 

三位合葬임을 알 수 있다.

 

 상석은 고석 대신에 2개의 장방형 板石이 받치고 있는데, 앞쪽(높이29 폭148.5 두께23)이 뒤쪽(높이29 폭149 두께44)보다 조금 더 규모가 크다.

 

   <무과방목>

 

김정회(金正會)  숙종(肅宗) 2년(1676년),  丙辰   武科

인적사항

가족사항

      이력 및 기타

생년(生年)

1636년, 병자

부(父)

김  주

(金  周)

소과(小科)

1675(을묘)

   생원시

자(字)

 

子嘉 (자가)

 

조부(祖父)

김홍건

(金弘健)

특별시

(特別試)

 

호(號)

 

증조부

(曾祖父)

김  찬

(金  瓚)

전력(前歷)

생원(生員)

분파조

(分派祖)

익원공 사형

(翼元公 士衡)

고조부(祖父)

김언침

(金彦沈)

품계(品階)

 

거주지

(居住地)

 

외조부

(外祖父)

 

관직(官職)

   선전관

  (宣傳官)

시호(諡號)

봉호(封號)

 

처부

(妻父)

 진사 심수경

(進士 沈壽卿)

 

 

 

  *승전선전관(承傳宣傳官) : 조선시대 선전관청의 당직 선전관. 그날의 왕명을 전달하는 일을 담당했다. 《경국대전》에 선전관은 8명이며 체아직(遞兒職)의 녹(祿)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정식으로 관아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선전관이 정직(正職)이 되면서 선전관청이 설치되었다. 《속대전(續大典)》에는 정3품 아문으로 되어 있고 《대전통편》에는 형명(形名)·계라(啓螺)·시위(侍衛)·전명(傳命) ·부신(符信)의 출납을 장악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병전수석(정3품 당상관) 1명, 참상관(參上官) 7명, 참하관(參下官) 14명과 문관 당상관 3명 등 25명의 선전관 가운데 4~8명이 승전선전관의 임무를 교대로 맡았다.

 

   *선전관(宣傳官) : 조선시대의 관직.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속하여 왕의 시위(侍衛)·전령(傳令)·부신(符信)의 출납과 사졸(士卒)의 진퇴를 호령하는 형명(形名) 등을 맡아본 일종의 무직승지(武職承旨)의 구실을 한 무관(武官)이다. 9품부터 정3품 당상관(堂上官)까지 있었는데, 초기에는 8명, 후에는 25명으로 증원하여 이를 수석(首席:정3품 당상관) 1명, 참상관(參上官) 7명, 참하관(參下官) 14명, 당하관 3명으로 구분하였다.

 

 이들은 대개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별시위(別侍衛)·갑사(甲士) 등에서 승서(陞敍)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모두 체아직(遞兒職)을 받았다. 종6품 문관이 이를 겸직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를 문겸(文兼)이라 하였다. 이 직은 1882년(고종 19) 선전관청의 폐지로 없어졌다

 

묘소

 

<이의동 묘소 이장시 출토 유물 소개>

 

   출전 : 수원 참의공 후손 카페 http://cafe.daum.net/k1259

 

▲ 광교 신도시내 안동 김씨 문중 묘에서 출토된 17세기 조선시대 복식.  

 

 조선 선조때 이조판서를 지낸 김찬의 딸로 추정되는 수원 광교 신도시 소재 묘에서 우리나라 복식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가 되는 유물이 다량 출토돼 학계에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수원역사박물관의 의뢰를 받은 단국대 석주선 기념박물관은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안동 김씨 문중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조선시대 복식이 다량 출토됐다고 9일 밝혔다.  이번에 발굴된 복식은 조선시대 복식 연구에 중요한 사료인 단령 1점, 장옷 3점, 중치막 3점, 저고리 8점, 치마 3점, 바지 2점,  배자 1점 등 총 30여점이다. 또 머리를 두갈래 양쪽으로 땋은 모양의 머릿단은 처음으로 출토됐다.   

 

 전문가들은 부인들이 '얹은 머리'를 할때 이같은 머리모양을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동 김씨 문중은 이 복식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김찬의 아들 김홍건의 묘 옆에서 발굴된 정황으로 미루어 1500년대 후반~1600년대 초반에 살았던 김홍건의 누이일 것으로 추정했다.  

 

 안동 김씨 익원공파 효헌공 문중 김태철 총무는 "3남 1녀를 둔 김홍건 조상님의 무덤 옆에서 유물이 발견돼 처음에는 결혼을 안한 채 돌아가신, 그래서 족보상에는 없는 김홍건 따님의 묘일 것으로 추정했다"며 "하지만 머리모양이 기혼 여성의 것이므로, 아마도 김홍건 조상님의 5명의 누이 중 한 명의 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원 광교 신도시내 묘에서 출토된 복식은 장장 400여년의 세월을 견뎌냈다. 9일 분류·확인 작업 중인 단국대 석주선 기념 박물관 관계자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매장 당시의 형상을 거의 유지하고 있다"면서 "장옷과 바지저고리, 신발 등도 함께 발견돼 복식 연구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특히 여자 어린이의 옷으로 추정되는 유물과 문관의 탈착형 중치막 등은 이번에 처음으로 발견돼 의의가 크다. 성인여성의 묘에서 어린이옷과 남성옷이 함께 발견된 것은 사망시 가족·친지의 옷을 함께 매장하던 당시 풍습에 따른 것이다.  

 

 

■ 여자 어린이의 옷(추정) 함께 발견.

 

 이번에 안동김씨 문중의 묘에서 발견된 작은 사이즈의 장옷(조선시대 일반부녀자가 사용한 내외용 쓰개)은 17세기의 여자 어린이의 옷으로 추정된다. 이제껏 1900년대 어린이의 옷이 출토유물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조선시대 어린이의 옷은 출토된 것이 거의 없다. 현재 1900년대 이전의 어린이옷은 17세기 중반의 남자 어린이의 옷으로 보이는 유물이 유일하다. 따라서 이번에 출토된 작은 사이즈의 장옷이 어린이의 것으로 최종적으로 밝혀지면, 조선시대 사대부가 어린여자아이의 옷 연구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 문관들도 탈착식 중치막 입었다.  

 

 중치막은 무관들의 옷에서 주로 발견됐었다. 말을 탈때 양쪽 소매를 떼거나, 활을 쏠 때 왼쪽 소매를 뗐던 식이다. 하지만 이번에 출토된 탈착식 중치막은 사대부 문관의 옷으로 추정된다. 오른쪽 소매가 탈착식으로 되어 있어,  

 

 문관들이 거추장스럽게 큰 오른쪽 소매를 뗀 후 글을 썼을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다. 문관의 탈착식 중치막도 이번 출토물이 유일하다.  

 

■ 조선시대 여성들, 단령 안 입었다?  

 

 단령은 깃이 둥글고 소매가 넓고 길이가 길어 발까지 내려오는 조선시대 관복(官服)이다. 이제껏 단령을 입은 여성들의 묘가 많이 발견돼 조선시대 여성들도 단령을 착용했을 가능성이 계속 제기돼왔다. 하지만 설득력있는 문헌기록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모두 한점씩 출토됐고 수의용 상복(上服)으로 착용된 점, 남편의 관직보다 높은 흉배(관복의 가슴과 등쪽에 수놓은 헝겊의 조각으로 붙이던 표장)를 착용한 장속(葬俗)의 사례, 품이 매우 넓고 상대적으로 소매가 짧으며 길이는 매우 길어 생전에는 여성들이 이 옷을 입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번에 발견된 여성단령 역시 얇은 사로 덧대어서 수의로 입고 있는 점, 엉성하게 바느질된 점 등을 고려해  

 

이 옷이 평소에 입은 옷이 아니라 수의로 특별 제작된 옷이라는 점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문화재전문위원인 단국대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박성실 교수는 "수원지역에서 조선시대 복식이 다량으로 출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임진왜란 이후 남녀복식의 특징을 연구하는데 이번 출토물이 큰 역할을 해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경인일보 / 2008년 06월 10일 (화)  이유리agnes71@kyeongin.com

 

  <유물 사진 자료>

 

 

 

 

 

 

 

 

 

 

<제58회 안사연 정기산행-참의공(휘彦沉) 묘역, 효헌공(휘 瓚) 묘, 수원 화성 후기>

                                                 글-상석(제),    사진 - 항용(제)  참석자(존칭생략) - 16명

 

관묵(전대종회 사무총장), 재호(문), 재용(전익원공파 회장), 재영, 재욱, 재만, 윤만, 은회, 태문 내외분, 태철, 항용, 춘식, 상석 가족

 

 일요일(2008. 11. 9) 아침 열 시 수원역 5번 출구에서 익원공 7세손이신 참의공(휘彦沉) 후손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멀리 대구에서 출발하여 경기대학교 후문에 도착해서 기다리시던 재욱(익), 재만(문)님과 합류하여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일대의 참의공(휘彦沉) 후손 집성촌에 도착하니 산골짜기마다에는 최근 신도시 개발로 가옥과 시설물들은 이미 철거되어 옛 흔적을 지우고 집터와 들길만 남아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참의공(휘彦沉) 묘소에 참배합니다.

 

초헌-관묵, 아헌-항용, 종헌-재욱 집례-재영, 좌집사-태철, 우집사-춘식

 

 재영 종친께서는 음복 후 묘역에서, 준비해 오신 <광교신도시 속의 소외된 문화유산 유적>의 자료를 나누어 주시고 참의공 이하 선조님들의 행장과 함께 경기도 문화재자료 지정에 따른 묘역수호 방법, 보존절차 등을 설명해 주십니다.  

 

 이어 증손 묘소와 그 아래로 능선을 따라 영면해 계신 현감공(휘瑾)과 판결사공(휘孝建) 묘소에 참배를 하고 내려옵니다. 판결사공 선조님은 사촌형인 교위공(휘慶建)과 함께 안동 충렬공 묘소 수호와 관련한 <계암일록(溪巖日錄)-김령 저>의 기사에도 많이 등장하십니다.

 

 효헌공(휘瓚) 묘소는 주봉을 같이하는 다른 능선에 있는데 최근 도시계획에 따라 묘하의 길목에 세워져 있던 신도비는 묘소 옆 하단에 옮겨 놓았고 상석,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은 온전하며 봉분의 호석과 장명등, 비신은 근대에 새로 세운 것이라 합니다.

 

 또한 참의공 묘소와 같이 석질과 형태, 문양이 같은 직사각형의 석물이 놓여 있는데 문중에서는 이를 방부(方趺)라 칭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참의공 묘소의 방부는 이보다 조금 작고 지대석 위에 가로로 놓여 있는 반면에 효헌공 묘소의 방부는 약간 크며 지대석 아래에 세로로 놓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헌-은회, 아헌-재호, 종헌-재만, 첨작-상석, 윤만, 집례-재영, 좌집사-태철, 우집사-춘식  

 

 <방부>는 옆면에 안상(眼象-참의공 묘소의 것은 후면 생략)을 조각, 윗면에는 사방에 정교한 연화문양을 새기고 중앙은 직사각형 자리를 다듬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기에 아마도 양위의 묘역 조영 당시 개석이 없는 묘갈이나 묘표의 좌대로 쓰려다 자연 용도가 없어진 것은 아닐까요? 실제 묘비석의 좌대는 무문(無紋)의 민짜(민패)로 방부보다 약 두 배가량의 높이로 비신과 개석을 받치고 있습니다. 또한 현 좌대와 개석의 석질이 같기 때문에 충분한 가능성이 있기도 합니다.

 

 효헌공의 묘비명은 사위인 한양인 조경(趙絅)이 찬하였는데 조경은 훗날 충익공(휘時讓)의 신도비문을 찬하기도 한 인물입니다.

 

 머지않아 후손들의 세거지였던 이 일대는 아파트 숲을 이룰 것입니다. 선조님들의 묘역이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계속해서 도심에서도 묘역을 수호할 수 있다하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익원공파 종친 인사소개. 좌로부터-은회, 재욱, 재용 전익원공파종회장, 태문님 내자, 춘식, 태철

 

 수원 참의공문중에서 <창룡문-화성동문> 근처 식당에서 제공해주신 달고 맛있는 수원갈비를 점심으로 들며 왕릉근처에 갈비요리가 발달한 것은 제수로 소를 잡을 수 있는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글을 빌어 참의공문중회에 감사의 말씀 전해 올립니다.

 

 현 청계천의 모델이 된 수원천 위 화홍문을 지나 용연을 굽어보는 <방화수류정>에 올라 성(城)으로는 유일하게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수원 화성>의 답사 코스를 잡아 장안문을 향해 산성길을 걸으며 담소를 나눕니다.

 

 <북동적대>부터는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북문인 <장안문>을 지나 거의 완벽하게 원형으로 보존되어 전하는 <화서문-서문>을 통과하여 서장대까지 성 밖의 억새와 성 안의 가을에 시선을 주며 걸었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그의 아버지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묘를 1798년(정조 13) 10월 화산(華山, 융릉)으로 이장한 후 수원에 유수(留守)를 두고 천도 계획하여 축성한 조선시대 축성기술이 총집결된 대표적인 성으로 한양 성곽의 3분의 1정도 길이가 됩니다.

 

 성곽 축조 후 정조는 축조기록의 명을 내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간행합니다. 화성성역의궤는 축성법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했으며 축성에 사용한 각종 기계의 그림과 설명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건축기술과 과학의 수준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산 정조의 동상 앞에서 정조가 꿈꾸었을 화성시대를 가늠하며 화성행궁에 드니 희미한 불빛에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쓰며 뚜껑이 열린 채 처마 밑에서 뒤주가 달그락거리자 붓끝을 흐리고 있었다.  

 

행궁을 나와 남문(팔달문)에서 대구로 가시는 재욱님과 재만님을 배웅하고 수원 화성을 빠져나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끝으로, 지난 광교산행에 이어 따스한 손길로 선조님 묘역과 화성을 안내해 주신 <참의공문중회>의 재용, 재영, 태철, 태문, 춘식 종친의 후의에 깊이 감사드리며 후일 다시 뵐 날을 기약하며 글을 줄입니다.  

 

  [수원박물관 소장 안동김씨 유물 소개]

 

 1. 전시 장면 (2010. 12. 7. 재영(익) 제공)

 

수원의 역사박물관(기증유물로 보는 수원 전시)

 * 전시기간 :2010.11.26-2011.2.10

 * 장소 :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1088-10(경기도 경찰청 부근), 수원 박물관 (TET 031-228-4138 FAX 031-228-4149)

 * 전 시 물 : 안동김씨 관련 전시물

  1)문영(김순)공 묘지석 - 민지 찬

  2)통제사(김광) 묘지석 - 병조참판 윤광소 찬(부사공(철원)에서 기탁)

  3)함양부사(김 경우) 묘지석 (부사공(철원)에서 기탁)

  4)숙부인 진주유씨(함양부사 부인) 묘지석 - 박일원 찬(부사공(철원)에서 기탁)

  5)장 옷(효헌공 김찬의 아드님 홍건 묘 아래에서 출토)

  6)겹저고리(상동)

  7)겹치마(상동)

  8)누비 중치막(상동)

  9)누비 배자(상동)

  10)교지(김찬교지, 정부인 이씨)

  11)김찬 시호 교지(서경완의, 시장 홍패)

  12)경수록(장수를 경하하는 문서--부모 형제 7분의 나이 합이 582년)

  13)갑신계첩(판결사 김효건의 생년인 1584년 동갑계원 명단과 계칙)

  14)화김래파(안동김씨 선세사적 발췌본)

  15)안동김씨 계첩(수원 참의공 1732년 이후 을묘년 재산명세 및 계칙)

  16)기타(교지 80여점, 창수록 간독문 등 많이 소장되어 있으나 금번 전시에는 공간 부족으로 전시하지 못 함)

  *참고 : 박유명 초상(보물 제1489호)를 비롯하여 정려문등 다수와 수원의 사회상과 역사 자료 등이 전시됨

 

  전시 안내판

 

  문영공 묘지석

 

  효헌공(휘 찬) 시호 교지

 

  효헌공(휘 찬) 시호 서경 완의

 

  치마 저고리-효헌공(휘 찬)의 아드님(휘 홍건) 묘 아래에서 출토

 

  장의- 효헌공(휘 찬)의 아드님(휘 홍건) 묘 아래에서 출토

 

  기타 의복들-효헌공(휘 찬)의 아드님(휘 홍건) 묘 아래에서 출토

 

2. 도록 [기증유물로 보는 수원] 내의 사진 자료 (2010. 12. 27. 항용(제) 제공)

  출전 : <기증유물로 보는 수원-2010 수원박물관 특별 기획전>(수원박물관. 2010. 11. 26)

 

효헌공(휘 찬)의 사헌부 지평 교지

 

효헌공(휘 찬)의 배위 정부인이씨 교지

 

효헌공(휘 찬) 시호 서경 완의

 

 효헌공(휘 찬)의 영의정 추증 교지

 

경수록-장수를 경하하는 문서--부모 형제 7분의 나이 합이 582년)

 

갑신계첩(판결사 김효건의 생년인 1584년 동갑계원 명단과 계칙)

 

화김래파(안동김씨 선세사적 발췌본)

 

화김래파 내부

 

  문영공 묘지석(전면)

 

 문영공 묘지석(후면)

 

  문영공 묘지석( 전면 우측 부분 확대)

 

통제사(김광) 묘지석 - 병조참판 윤광소 찬 (부사공(철원)에서 기탁)

 

통제사(김광) 묘지석 - 병조참판 윤광소 찬 (부사공(철원)에서 기탁)

 

  장의

 

  저고리

 

  저고리 문양 확대

 

  저고리 옷고름 확대

 

  누비중치막

 

  겹저고리

 

  누비 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