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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문영공 묘역 개축 공사 참관기>(제52회 안사연 정기산행)

  (2008. 4. 17.  사진- 발용(군), 글- 윤식(문) 제공)

 

◇일시 : 2008년 4월 13일(일요일)

◇장소 : 안양시 관양동 문영공 묘역

◇참석 : 문영공종회 임원 및 후손, 안사연

 

會潤(문영공종회 회장), 在鴻, 在光, 在英, 在永, 相錫, 明會, 聖會, 安會, 健會, 元會, 佐會, 潤萬, 國會, 銀會, 勃鏞, 滿吉, 振浩, 喆浩, 恒鏞, 容周, 胤植(무순, 존칭 생략)

 

조상님 음덕으로 약간 구름이 낀 날입니다. 산역 일에는 적당한 날이었습니다. 약속장소인 인덕원역(지하철 4호선)에 도착해 인근 지리를 살펴볼 겸 몇 걸음 옮겼더니 저만치 만길 종친(익원공파 사무국장)께서 빠른 걸음으로 문영공 묘역을 향해 걸어가십니다.

 

문영공 할아버지 묘역 정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약속장소에서 종친들을 기다렸습니다. 10여 분 후 만길 종친께서는 택시를 타고 재실 쪽으로 떠나시고, 곧바로 발용 종친과 항용 종친께서 약속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문영공 할아버지 묘역으로 걷는 길은 어느새 벚꽃이 지고 있습니다. 묘역에서는 고유제를 마치고 포크레인을 이용해 주변을 정리한 뒤였습니다. 11:15분경부터 약 15분간 묘소 앞 석물(상석, 묘비 등)을 멀찍이 옮긴 뒤 문영공 할아버지 묘지석을 찾기 위해 상석 자리에서부터 앞쪽으로 약 3미터 정도 조심스럽게 파내려갔습니다. 묘지석은 그 동안 사진으로만 전해질 뿐 실물이 보존된 장소가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문영공 묘소를 개성에서 이곳으로 천봉할 당시 이 일에 관여하셨던 문중 어르신들 역시 대부분 타계하신 뒤라 당시 상황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문영공(휘 순) 묘소

 

△묘소 앞 석물을 옮기는 장면

 

 

약 1.5m 깊이로 파내려가자 생땅이라 생흙만 나올 뿐 유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영공종회 임원을 중심으로 많은 분들께서 문중 어르신들께 자문을 구했지만, 묘지석을 봉분 앞에 묻었는지 여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봉분 앞쪽에서는 문영공과 관련된 유물이 전혀 발견되지 않고, 조금 파내려가자 생땅이 드러났다.

 

봉분 앞쪽에서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 아래 12:00경부터 봉분을 조심스레 파묘하기 시작했습니다. 내부 상태를 전혀 모르는 터라 종친들 손길이 더욱 조심스러워졌습니다.

 

10여 분 뒤 12:10분경 애면글면하던 묘지석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봉분 중앙부분에 지표면과 같은 높이의 광중 자리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는데, 문영공 할아버지 시신 발치 자리였습니다. 묘지석은 앞뒷면에 글자를 새겼는데, 앞면이 위로 향한 상태로 놓여 있었습니다. 호미와 손으로 묘지석을 모셔낸 뒤 별도로 준비한 자리로 묘지석을 옮기고 햇볕을 가렸습니다.

 

 

△봉분 중앙 광중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문영공 묘지석. 정확히 발치 자리에 해당하는데, 지표면에서 70cm 깊이에 모셔져 있었다.

 

△묘지석을 살펴보는 종친들. 묘지석은 앞뒷면에 모두 음각으로 글자를 새겼는데, 앞면이 하늘을 향해 모셔져 있었다.

 

 

 

 

△문영공 묘지석(앞면). 상단 양쪽을 귀접이 형태로 다듬었으며, 충렬공 묘지석과 동일한 형태이다.

 

 

 

 

△문영공 묘지석(뒷면). <안동김씨보감>에 실린 사진처럼 상단 1/3 지점에서 두 부분으로 훼손되었다.

 

 

 

 

12:30분경 종친 두 분이 묘지석과 봉분을 수호토록 한 뒤 참석자들은 인근 식당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문영공종회 임원진에서는 12:40분경 긴급 회의를 갖고 묘지석 보관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한동안 신중한 논의를 거친 뒤 문영공종회 임원진은 임시총회 등을 통해 묘지석 보관 문제를 논의키로 결정했습니다. 다만, 도난이나 도굴 등이 우려되므로 별도의 안전한 장소로 묘지석을 옮겨 수호하고, 임시총회 결정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인근 식당에 모인 종친들

 

 

△인사말을 하시는 문영공종회 희윤 회장

 

묘지석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시대의 유물로서 우리 문중의 보물일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묘지석 발견과 묘소 천봉에 대해서는 연전에 발간된 <문영공종사록>에 내용이 실려 있고, 제가 잘 모르는 사항이라 이에 대해서는 보고를 생략합니다. 또한 묘지석 관련 내용은 향후 전문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사항이라 간략히 보고드리니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점심 식사 후 다시 묘역으로 올라와 14:00분경부터 광중 자리를 다시 파내려갔습니다. 묘지석 발견 장소에서 1m도 안 되는 곳에서 드문드문 회를 뿌린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고, 곧이어 홍대로 보이는 물체가 드러났습니다.

 

 

△광중 자리를 살피고 있는 종친들

 

 

△홍대가 삭아 함몰된 광중 모습

 

일제시대에 문영공 할아버지 묘소를 천봉하면서 묘지석뿐만 아니라 시신을 모셔왔을 가능성이 있어 일단 작업을 멈추고, 급히 베와 홍대 등을 마련해 준비를 마쳤습니다. 손으로 광중 자리를 쓸다시피 하면서 완전히 삭은 홍대 주위를 걷어내자 내곽 안쪽에서 봉분 주위와 달리 붉은색 황토가 나타났습니다. 현 문영공 묘역 주위는 부엽토가 두텁게 쌓인 곳이라 황토와 거무스름한 흙이 섞여 전체적으로 약간 거무스름한 빛을 띠는데, 내곽 안쪽의 흙은 선홍색에 가까워 확연히 다른 흙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희윤 회장과 명회 대종회 부회장께서 곡을 한 후 재배하고 있다.

 

 

△종친들이 손으로 광중에 모셔진 붉은색 황토를 정성껏 모시고 있다.

 

 

 

 

 

 

△홍대를 수습한 후 내곽을 실측하고 있다.

 

실측 결과 묘지석 발견 장소에서부터 내곽까지는 깊이 70cm입니다. 내곽은 폭 50cm(안쪽 22cm), 길이 184cm입니다. 홍대를 걷어내고 개성에서 모셔온 듯한 붉은색 황토가 모셔진 광중은 폭 25cm, 길이 155cm입니다.

 

문영공종회 회윤 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은 곡을 한 다음 베와 한지로 붉은색 황토를 정성껏 모셨습니다. 그 외의 참석자들은 묘지석을 실측하는 한편, 항용 종친께서 묘지석을 탁본했습니다. 묘지석은 가로×세로 각각 710cm이며, 안쪽에 새겨진 글자 주위에 반듯한 실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실선이 그어진 곳까지의 길이는 670cm입니다. 전체적인 형태는 충렬공 묘지석과 동일합니다. 상단은 고려 말에 유행한 귀접이 형태로 각이 져 있으며, 앞면과 뒷면에 각각 글자를 새겼습니다.

 

 

 

 

△내곽의 황토를 다시 베와 한지로 정성껏 모시는 종친들

 

 

 

 

△문영공 묘지석 탁본 장면

 

 

 

 

 

 

 

 

△명회 대종회 부회장께서 문영공 명정을 쓰고 있다.

 

 

 

 

△베와 한지로 정성껏 모신 다음 홍대를 덮는 장면

 

 

안타깝게도 <안동김씨보감>에 실린 사진처럼 묘지석은 둘로 부러져 있었으며, 두 개의 구멍이 관통한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상당 부분의 글자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성회 종친 등 몇 분께서 묘지석의 글자와 <문영공종사록>에 실린 비문을 대조한 결과, 앞면에서 몇 글자가 다른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중에는 문맥의 뜻이 상당히 달라질 글자도 일부 보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전체 글자를 판독한 다음 현재 알려진 비문과 비교한 뒤 문영공종회에서 발표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문영공 묘지석과 <문영공 종사록>에 실린 기존 비문 내용을 대조하고 있다.

 

참석자들의 기념사진을 촬영 후 일부 종친들께서는 귀가하시고, 문영공종회 임원진 및 후손들께서는 묘역 정비작업이 이어졌습니다.

 

 

 

 

△문영공 묘지석 탁본(앞면)

 

 

△문영공 묘지석 탁본(뒷면)

 

 <추가 사진> (2008. 4. 23. 항용 제공)

 

 1. 묘역 공사 1일차(4. 13)

 

 

  12시 30분 경, 묘소 봉분을 걷어 내자 지표면으로부터 70cm 아래에서 최초로 나타난 묘지석 모습

 

 

  <흙을 조금 더 긁어 낸 모습>

 

   <묘지석을 지고 재실로 가는 모습, 좌-재영(익), 우-은회(익)>

 

 <새 묘소지 광을 파 놓고 나머지 작업은 내일로 미룸>

 

    <재실 금고에 임시로 모신 묘지석>

 

 

 2. 2008. 4. 21. 모습 (4월 13일부터 15일까지 묘역 공사를 마친 후 6일만에 본 모습)

 

  <묘소 입구 진입로, 포크레인으로 파진 부분을 식목했다>

 

    <묘역 동편에서 본 모습>

 

    <묘역 전경>

 

     <신 묘비석>  (전면 글씨는 예서의 대가이신 황재국선생의 글이다)

 

<비석 전면>

 

   <좌측면>

 

   <좌측면>

 

   <좌측면 확대>

 

 

  <뒷면>

 

  <뒷면 부분 확대>

 

  <뒷면확대>

 

   <우측면>

 

 

 

 

 

 

 

 

 

 

<오기, 오류 부분 모음>

 

<원문 및 수정 필요 부분>

 

 重大匡判三司事寶文閣大提學上護軍金恂墓碑銘幷序

 

옛날에 이른 바 君子란 德行을 이름인가 功勳을 이름인가 나는 오직 덕행뿐이지 공훈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德行은 마음에 달려 있고 功勳은 時機에 달려 있으니 마음에 달린 것은 사람이 닦는 것이지만 시기에 달려 있는 것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므로 사람이 닦을 것을 닦는 자가 君子일 따름이다 무릇 德行은 忠孝에서 비롯하니 忠孝로 當世에 떨칠 수 있는(주1) 사람은 오직 우리 判三司 相君(故人)(주2)이 계실 뿐이다 公의 諱는 恂이요 字는 歸厚이다 世系는 新羅王 金傅에게서 나왔다 內孫으로 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이 있다 公은 金傅의 十五代孫으로 一二五八年(高宗四五)에 태어나시니 安東은 곧 그의 貫鄕이다 曾祖의諱는 敏成이니 左僕射에 追封되셨으며 行掌冶署丞兼直史舘이시라 祖의 諱는 孝印이니 追封中書令 行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舘修撰官 知制誥시라 父親의 諱는 方慶이니 元의 皇帝로부터 中奉大夫 管高麗軍都元帥 推忠靖難定遠功臣(주3) 匡靖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使司 典理司事 上將軍 上洛郡 開國公을 宣授하시니 食邑一千戶에 實封三百戶요 高麗에서(주4) 宣忠協 謨(주5)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을 贈職하신 忠烈公이라 母親은 朴氏니 中書舍人知制誥인 朴益旌의 따님으로 陰平郡夫人에 封해졌다 公은 붓글씨에 능하여 碑文을 많이 쓰셨다 나이 열다섯에(주6) 門蔭으로 入仕하여 掌牲署丞이 되었다가 뒤에 別將으로 御牽龍行首가 되었다 職務는 비록 東西로 달렸으나 그 뜻은 항상 大科에 있었으니 대개 父親이 비록 지위는 두임금의(주7) 將相에 이르렀으나 오직 스스로 桂籍에 오르지 못한 것을 恨으로 여기시고 아들이라도 할아버지의 偉業을 回復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公이 이 때문에 힘써 공부하고 게을리 아니하니 至元十六年 己卯年(주8) 春場에서 단번에 金榜의 副長元이 되었다 이 해에 처음에는 攝郎將을 제수했다가 뒤에 다시 國學直講이 되었으니 이는 공이 父親의 남긴 恨을 풀어낸 것이다 이로부터 父親께서 더욱 막내인 公을 사랑하여 항시 左右에서 떠나지 않게 하시고 上國(元)(주9)에 賀正할 때에도 늘 따르게 하셨다 다만 日本을 征罰(주10)할 軍船에 올라 따르는 것은 許諾하지 아니하였는데 從軍하여 危險한 일에 參與치 않게 하심이다 公이 이에 出戰의 命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戰艦에 올랐는데 자못 아버지를 지키고 구한 功이 있었다 이는 公이 오직 忠孝에 專一하여 奮鬪하고 自身을 돌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壬午年(주11)에 殿中侍史로 옮기고 다음해에 외직으로 尙州判官이 되었는데 政事의 名聲이 朝廷에 올라가 一年이 못되어 내직인 典法佐郞□ □通禮門事 考功正郞이 되었다 壬戌年(주12)에 南方使로 父親을 陪行하여 故鄕에서 할아버지 墓所에 參拜하였다 戊子年(주13)에 秘書少尹 知通禮門事에 除授받고 이해에 임금께서 公을 世子府 行李別監으로 삼아 師傅의 責任을 맡기셨다 壬辰年(주14)에 朝顯大夫 典法摠郞 知制誥가 加添되고 여러번 옮겨 少府尹□□□學 軍簿摠郞 典理摠郎 朝奉大夫 秘書尹 三司右尹가(15) 되니 모두 三字銜을 겸하였다 元貞乙未년(16) 겨울에 知貢擧로 선발한 이들은 모두 當時의 名士들로 크게 잔치를 여니 □□□□士 朝野의 輿論이 感歎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부친에게 극진한 효도이다 이해에 朝議大夫가 加添되었다 丙申年(17)에 世子舍人을 兼職하였다 大德丁酉年(18)에 國學典酒로 옮기고 또한奉烈大夫 密直使 右副承旨가 더해졌고 곧바로 左副承旨 寶文閣直學士로 옮겼다 다음해 右承旨 知版圖司事가 더해지니 매양 옮길때마다 三字銜을 겸하였다 이해 봄에 南方使를 하고 돌아오니 通議大夫 光政副使 承旨 成均祭酒를 내리고 다시 正議大夫 集賢殿學士 左散騎常侍가 되었다 이해 七月에 다시 密直司 右承旨 國學祭酒 寶文閣學士 知民曹事가 되었고 三字銜은 유지하였다 八月에 奉翊大夫 三司左使 崇文舘學士가 더해지고 九月에 다시 正獻大夫 密直司 左承旨 判秘書寺事 充史舘 修撰官 知制誥 知軍簿司事가 더해지고 十二月에 奉翊大夫 密直司副使 文翰學士를 除授하였다 己亥年(19)에 그칠 때를 알아 退職을 청하였다 이듬해 八月에 父親이 돌아가시니 遺言대로 故鄕에 葬禮하였다 庚戌年(20) 겨울에 先公의 墓에 祭祀를 치렀다 壬子年(21)에 임금께서 불러 重大匡 上洛君을 삼고 先公의 茅土(爵土)를 물려받았다 己未年(22)에 다시 先公의 墓에 參拜하였다 임금께서 막내 永煦를 奉使官으로 陪行케하니 그 行路를 重히 여겼기 때문이다 至治元年 辛酉年(23)에 賢明한 宰相을 뽑고자 함에 公이 判三司事에 拔擢되었다 八月에 寶文閣大提學 上護軍이 더해지고 이달 二一日에 病患으로 私邸에서 돌아가시니 享年 六十四이다 公의 性稟은 敦厚 溫柔하고 內實은 굳세셨으며 孝悌忠信은 마음속에서 우러나왔다 안타깝다 公의 才德으로 몇 년만 더 사셨다면 어찌 利澤이 만백성에게 미치지 않았겠으며 名位가 여기에 그칠 뿐이리오 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文敬公의 諡號가 내려진 許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四男三女를 낳았다 永暾은 지금 都官直郞知陜州事가 되었고 永暉는 지금 興威衛保勝別將이 되었고 思順(23-1)은 머리를 깎고 慈恩宗 大德이 되었고 永煦는 司憲持平이 되었다 따님은 첫째가 入內侍中正大夫親禦軍大護軍 鄭幘(24)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大匡上黨君 白頤正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舍人別里哥不花하니(25) 大元(26)左承相 阿忽反의 아들이다 永暾等이 德水縣 馬山에 葬地를 정하고 내가 先公의 親舊라 하여 公의 行狀을 갖춰 와서는 墓碣文을 청함이 매우 懇切하니 내 비록 病中이나 차마 굳이 拒絶하지 못하고 짓노라 銘하여 이르기를 偉大하신 忠烈公은 우리나라 郭汾陽이로다 집안가득 子孫들이 각재주를 뽐내나니 그중에도 막둥이가(27) 최고로 꼽히었네 아버지 섭섭함은 科擧及第 없음이라 公이 그 뜻 받들어 科擧를 準備하네 家法을 傳受하여 詩文을 본받더니 젊은 나이 及第하여 四方에 펼친 명성 臺閣重職 歷任하며 지으신 글 香氣롭다 文柄을 잡고부터 門下人材 成行하네 父親의 기쁨속에 長壽를 冀願(28)하며 生前에 宰相되고 金章에 記錄되네 孝道榮光 힘쓰니 故鄕도 애달프다 자식道理 흠없으니 온갖 상서 내리도다 늘그막에 退職하니 하늘의 뜻 아득하다 功臣田(29)을 傳承하니 家門의 榮光일세 政事에 未參하고 아홉해를 보내다가 最高 宰相 오르니 나라 百姓 平安했네 가실 때도 아니온데 급작스레 가시었소 公이야 괜찮다지만 나라에는 傷心일세 碑石에 새긴 功勳 無窮히 미치리라

 

大元至治元年 辛酉年(30)十月十四日

宣授朝列大夫翰林直學士三重大匡檢校僉議政丞右文舘大提學監春秋舘事  驪興君 閔漬 謹撰

   傍孫 元榮 謹譯 (*이것은 묘비문에는 역문 원문에는 없는 국역자 이름임)

 

주1 : 떨칠 수 있는

   1)<떨칠 수 있는>은 능력을 말함. 현재형 표기임

   2)문영공의 위대성을 말하고, 돌아가신 분에 대한 글이므로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으로 표현해야 함

   3)따라서 <떨친>으로 해야 함

 

주2 : 相君(故人)

   1)相君은 이미 문영공을 의미하는 것임

   2)따라서 (故人)은 삭제하는 것이 좋을 듯함  

 

주3 : 推忠靖難定遠功臣

   1)<元의 皇帝로부터 中奉大夫 管高麗軍都元帥 推忠靖難定遠功臣>라고 풀이함으로써 推忠靖難定遠功臣의 직위를 원제로부터 받은 것이 됨.

   2)따라서 <고려에서 推忠靖難定遠功臣-->로 해야 한다고 봄

 

주4 : 高麗에서

   1)주3의 지적처럼 고치면 이곳의 고려에서는 삭제해야 함

 

주5 : 謨

   1)원문은 <謀>임. 원문대로 수정해야 함

 

주6 : 나이 열다섯에

  1)원문의 <年方志學>에 대한 풀이를 <열다섯>이란 구체적 나이수로 표현함으로써 오류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

  2)따라서 <소년의 나이에>, <志學의 나이에> 정도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함

 

주7 : 두임금의 將相

  1) 원문 <兩朝將相>에 대한 풀이로써 <두임금의 將相>이라 하면 두 임금의 관형을 받게 되어 문맥이 자연스럽지 못함.

  2)원문을 살려 <두 朝廷의 將相>이 좋을 듯함

 

주8 : 至元十六年 己卯年

  1)至元은 중궁연호임. 기묘년으로는 구체적 연도를 알 수 없음

  2)현 묘비문이 국한문 혼용으로 하여 현 세대와 미래의 세대들이 쉽게 읽고 이해할 목적으로 재 작성되고 있다면 서기로 기록돼야 함

  3)따라서 <一二七九年(忠烈五)>가 좋다고 봄

 

주9 : 上國(元)

  1)현재적, 미래지향적 표기를 중심으로 한다면 옳지 않음

  2)<中國>, 또는 <元나라>가 좋다고 봄

 

주10 : 征罰

  1)오기임

  2)<征伐>로 수정해야 함

 

주11 : 壬午年 : 一二八二(忠烈八)

 

주12 : 壬戌年

  1)병술의 오기임. 2008. 4. 13. 안양 묘소에서 묘지석을 발굴해 보니 <戌>의 앞자는 두 조각 난 사이의 글자로 마멸되어 있었음.

  2)1943년 현 묘비석을 세울 때 임의로 <壬戌>이라 기록한 것임을 확인함

  3)<戌>자를 근거로 계산한 년수는 <丙戌>임

  4)따라서 <一二八六年(忠烈一二>으로 해야 함. 현 묘비에는 공란으로 되어 있음.

 

주13 : 戊子年 : 一二八八(忠烈一四)

 

주14 : 壬辰年 : 一二九二(忠烈一八)

 

주15 :  三司右尹가 되니

  1)보격 조사(이, 가)의 호응이 안 맞음

  2)<가>가 아닌 <이>로 바꾸어야 함. 묘비에는 <가>, 현 묘비석에는 <이>로 되어 있음

 

주16 : 元貞乙未년 : 一二九五(忠烈二一)

 

주17 :  丙申年 : 一二九六(忠烈二二)

 

주18 : 大德丁酉年 : 一二九七(忠烈二三)

 

주19 : 己亥年 : 一二九九(忠烈二五)

 

주20 : 庚戌年 : 一三一0(忠宣二)

 

주21 : 壬子年 : 一三一二(忠宣四)

 

주22 :  己未年 : 一三一九(忠肅六)

 

주23 :  至治元年 辛酉年 : 一三二一(忠肅八)

 

주23-1 : 思順

     1)斯順으로 바뀌어야 함

 

주24 : 鄭幘

   1)<鄭책>의 <책>은 <小(심방변)+責>인데 컴퓨터에서 지원되지 않는 한자임. 현재의 <幘>은 잘못으로 보임.

   2)원문대로 <小責>을 써야 함

 

주25 : 舍人別里哥不花하니

   1)<하니>를 <에게 시집가고>로 고쳐야 함

 

주26 : 大元 : <원나라>로 하는 것이 좋을 듯함

 

주27 : 막둥이가

   1)유아적 용어로 보임

   2)<막내> 정도가 좋을 듯함

 

주28 : 冀願

    1)오기임

    2)祈願으로 수정해야 함

 

주29 : 功臣田

    1)원문 <終傳茅土>의 풀이를 공신전이라 함

    2)<공신전>은 국가 또는 왕실에 특별한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 지급한 토지.  조선시대 국가에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공신이 책봉되고, 이들에게 지급한 토지를 공신전이라 하였다. 조선의 개국에 공을 세워 태조 때 책봉된 개국공신(開國功臣) ·회군공신(回軍功臣)·원종공신(原從功臣)·정사공신(定社功臣)을 비롯하여 태종 · 단종·세조· 중종· 인조· 영조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19차례의 공신 책봉이 있었다.

 이들에게 지급된 공신전은 사전(私田)으로 분류되어 상속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세금도 면제되었다. 한때 세금을 부과한 적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면세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영조 때 균역법이 실시된 이후에는 결작(結作)을 납부하였다.

   3)食邑, 茅土, 功臣田의 용어 개념을 확인할 필요가 있음

   4)따라서 원문대로 <茅土>, 또는 <食邑>이 어떨지

 

주30 : 大元至治元年 辛酉年 : 一三二一年

 

 주 31 :   傍孫 元榮 謹譯

      1)이것은 묘비문에는 역문 원문에는 없는 국역자 이름임

      2)원영은 대동보의 번역문 국역자임. 최초부터 문영공 종회에서는 국역자 이름을 넣지 않기로 했던 것임.

      3)본 국역자는 國會임

      4)이 부분은 당초 약속대로 여러 사람의 공동번역문을 싣는 것이기에 역자는 공란으로 두거나, 가칭 추진위원회로 해야 함.

 

<우측부분의 묘비문> 이 부분은 김항용(제)이 정리한 묘비문을 일부 변용하여 새긴 것임.

文英公 墓誌石 發見 및 移葬 經緯 (김익수 역, 김항용 윤문 정리)

 

 嗚呼라 公의 墓所가 失傳된 것이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다가 一九四二年 봄에 公의 墓誌石이 京畿道 開豊郡 臨溪面 佳井里 馬山 동쪽 언덕에서 發見되었는데 張氏들의 무덤 부근이었다. 이에 받들어 살핀 다음 옛 자리에 그대로 守護하려 했으나 張氏들의 放恣한 惡行과 非常의 勢力으로 인하여 부득이 翌年인 一九四三年 봄에 京畿道 安養市 冠陽一洞 뒷산 언덕 艮坐에 移安하였다. 이때 配位이신 齊平郡夫人 陽川許氏 靈壇도 함께 세웠다. 이 산은 翼元公의 十六代孫인 讚源氏의 先山으로서 한 葬地를 獻納해 준 것이다.   

 

 舊墓碑는 閔公이 撰한 墓誌文을 다시 引用한 것이다. 閔公은 歷史의 巨匠으로서 當時 誌石에 새길 글을 부탁하였는데 그 事實을 記錄함에 있어 매우 뜻이 깊고 奧妙하며 모범되게 밝혔다고 後世에 傳해 지고 있다. 이에 그 墓誌文 記錄을 찾으려 노력했으나 萬의 하나도 엿볼 수가 없었다.

 

 다만 墓誌石의 一部 글자가 깎이고 떨어져 나가 恨이 되지만 중간에 빠진 것을 임의로 補識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한 토막의 고깃덩이로도 온 솥의 고기 맛을 알 수 있듯이 玉에 작은 티가 있어도 璞玉이라고 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리라.  

 

公 歿後 六百二十五年 後인 一九四六年 十月  日.  후손 若浩 謹識, 舜默 謹書, 達演 幷識.

 

文英公 墓所 聖域化記  

 

그 後 讚源씨 後孫이 이 山을 他人에게 賣渡할 때 文英公 墓 領域 三百餘坪을 우리 派門中에 喜捨하여 提,按,翼 三派 共同名義로 登記를 畢하였도다. 公께서 歿하신지 六八七年의 歲月이 흘렀도다. 墓域을 聖域化함에 있어 高麗末 宰相의 品階에 맞는 墳墓 樣式으로 重建하게 되었다. 墓碑銘을 바탕으로 新墓文과 부속 石物을 建立하게 되었도다. 任員들의 熱과 誠으로 計劃 推進하였는데 이는 五十萬 後孫들의 智慧와 力量이 集結된 것이로다. 公의 崇高한 精神과 빛나는 業績은 永久하게 傳授될 것이며 후손 白凡 金九先生과 같은 民族의 큰 스승과 棟梁들이 무수히 出現하여 國家와 世界의 歷史에 크게 공헌하기를 간절히 祈願항 뿐이로다.

 

                                       西紀 二00八年  月  日  安東金氏 文英公宗中  謹立. 平海人 黃在國 前面 謹書

 

 3. <2008. 4. 25. 문영공 묘역 재촬영> (2008. 5. 5. 항용(제) 제공)

 

  (2008년 4월 21일 1차 촬영 후 묘비석의 오자를 교정한 후 재촬영한 사진임)

 

  <전면>

 

  <좌측면>

 

  <뒷면>

 

    <우측면>

 

   <뒤에서 본 모습>

 

  <개성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는 구 상석의 고석>

 

   <묘비석 좌측>

 

   <묘비석 후면>

 

    <묘비석 후면 상세 사진>

 

   <묘비석 후면 2차 상세 사진>

 

 

  <묘비석 우측>

 

 <교정된 부분-9자> (글라인더로 갈아 내고 정으로 다시 팠다)

 

 1)謨-謀

 

 2)罰-伐

  

 3)하니-이니

   

 4)歎-嘆

  

 5)幘-책(小+責)

    

 6)榜-방(片+旁)

 

 8)從-徒

  

 9)깍이고-깎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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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치지 못한 부분>

 

 1)사순

    <思順>은 <斯順>으로, <깍고>는 <깎고>로 바뀌아야 함

 

 2)모토(작토)

    <작토는 그대로 둠>

 

3)冀願-祈願

   

 4)방손 원영 근역

   <역자는 원영이 아님. 원영의 것은 족보에 있는 것임>

 

 5)기타 수정이 안된 것들

  

  4. <4. 21. 재촬영 사진> (4. 24. 항용(제) 제공)

    묘역 공사(4. 15) 후 1주일 뒤의 모습

 

    <묘역 전경>

 

<신 묘비석>  (전면 글씨는 예서의 대가이신 황재국선생의 글이다)

 

<비석 전면>

 

   <좌측면>

 

   <좌측면>

 

 <우측면>

 

<구 상석을 제평군부인 영단앞으로 모셨다. 이 상석과 고석은 부식 정도 등으로 보아 1943년 개성에서 옮겨온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상석은 1943년 조성 당시 상석 받침석으로 이용됐었다)

 

  <묘소 근접 모습>

 

   <신 상석, 맨 아래에 종전의 향로석 1개를 다시 사용했다>

 

<좌측에서 본 봉분, 고려말 1품계 관직자의 전형인 강화도 허유전의 묘를 본떴다>

 

   <제평군부인 영단>

 

  <영단 글씨>

 

   <구 상석-묘역 우측 상단에 산신단 자리로 이동했다>

 

   <뒤에서 본 모습>

 

  <앞부분 모습- 둘레에 판석을 배열했다. 좌석으로 이용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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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석 비문 수정 작업 후 4. 25일 재촬영> (08. 4. 26. 항용(제) 제공)

 

  <전면>

 

  <좌측면>

 

  <뒷면>

 

    <우측면>

 

   <뒤에서 본 모습>

 

  <개성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는 구 상석의 고석>

 

   <묘비석 좌측>

 

   <묘비석 후면>

 

    <묘비석 후면 상세 사진>

 

   <묘비석 후면 2차 상세 사진>

 

  <묘비석 우측>

 

  5.  <5. 24. 재촬영 모습> (2008. 5. 29. 발용(군) 제공)

 

▲ 문영공 묘소 전경

 

 ▲ 문영공 묘비 전면

 

 ▲ 문영공 묘비 전면 글씨

 

 ▲ 문영공 묘비 측면

 

▲ 문영공 묘비 후면

 

 ▲ 개풍군에서 천장 당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되는 옛 상석

 

▲ 양천허씨 할머니 단비 - 우측 위에 사초 전까지 문영공 묘소 상석으로 쓰던 석물이 보입니다. 현재는 산신석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 놓은 상태입니다.

 

 금번 문영공 묘역 성역화 사업과정에 부근 주민들의 민원이 구청에 접수되어 구청 공무원이 출동하는 일이 있었다 합니다. 워낙 많은 돌이 산으로 옮겨지다 보니 주민들은 납골당이 조성되는 것으로 오인한 까닭이지요. 결국 오해는 풀리고 묘역 조성 과정에서 훼손 된 주변 나무만 원상 복구 하기로 하여 소나무 30그루를 식목하였답니다.

 

또 부근에 사시는  84세의 어르신께서 사초 소식을 듣고 묘소를 당문하여 처음 조성당시의 일화를 들려 주셨다고 합니다. 우측에 보이는 산신석(당시 상석)을 그 어른의 집에서 끼우던 황소와 안양에서 제일 힘이 세다던 황소 두 마리가 끌고 올라갔다고 합니다.

백범선생님께서 참배시에는 관양동 일대가 지지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증언으로 볼 때 더 많은 사실을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어른들의 기억을 채록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문영공 묘소 후경

 

  <문영공 묘지석 사진 소개(08. 5. 24. 촬영)> (08. 5. 30. 발용(군) 제공)

 

묘지석

 

▲ 지석 앞면

 

 ▲ 지석 뒷면

 

▲ 지석 구멍난 부분

 

▲ 지석 깨진 부분

 

▲ 지석 부분 확대

 

▲ 지석 치수 - 뒷면을 잰 것입니다. 정밀한 기기를 이용하여 측정한 것이 아니므로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지석 옆면(괄호 안의 숫자는 반대편 두께입니다.)

 

 ▲ 지석 윗면

 

지석의 두께는 측정하는 곳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평균 3cm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