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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숭의전지<충열공 중시조님 배양>
작성자 김규철
작성일 2017-11-05 (일) 19:54
ㆍ추천: 0  ㆍ조회: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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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숭의전지(崇義殿址)




사적 제223호
주소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382-27

조선의 개국과 왕씨의 수난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 고려의 왕손들과 그 후예, 일족들인 왕씨(王氏)들은 몰살에 가까운 죽임을 당하였다.

이는 전대왕조의 저항이나 모반을 우려한 새 왕조의 과도한 숙청이었는데 조선왕조가 안정되기 시작한 태종이나
문종 대에 이르러서야 탄압정책을 중지하고 일부 복권하거나 악화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우대정책을 폈다고 한다.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우왕, 창왕 모두가 신돈의 자식이라며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워 이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7남 강씨 부인 소생 방번이 결혼한 왕씨 사돈과 가까운 공양왕을 내세웠지만,
막상 왕위에 오르자 공양왕은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던 듯 하다. 심지어 이성계 일파에 반대쪽에 섰던
정몽주에 힘을 실어 주어 정도전 등을 탄핵하게 하였으며, 이성계의 희망대로 순순히 양위(讓位)의 형식으로
자리를 물려주지도 않아서 결국 이성계는 공양왕을 폐하고서야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 후 왕씨들을 모반사건
등으로 엮어서 숙청하기 시작한 것이다.

왕씨 귀족들과 이들 지지세력이 다수를 이루었던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는 이러한 처사에 대하여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조선이 개국과 동시에 한양으로 천도하게 된 것도 전조(前朝)를 지지하는 개성민심을
고려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고려 태조묘(太祖廟)를 마련하다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와 측근들 처지에서는 자신들이 고려왕조를 온전히 이어받았다는
정통성을 부각하기 위해서라도 고려왕실에 대한 처분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기에 즉위 후 반포한 교서를
 통하여 7남 방번과 사돈이 된 고려왕실의 후손 왕우(王瑀)를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하고
마전군(지금의 연천군 미산면 일대) 일대를 하사하여 고려 태조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새로이 사당을 지은 것은 아니고 마전면 아미산 아래 임진강 변에 위치한 앙암사(仰巖寺)라는
작은 절에 고려 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셔와 봉안하니 아쉽고 급한 대로 고려 태조묘(高麗太祖廟)가 건립된 것인데,
 앙암사는 왕건이 궁예의 수하 장수로 있으면서 도읍지 철원과 개성을 오가는 중간에 있어 자주 들렀으며
때로는 쉬어가던 곳으로 태조 왕건의 영정을 모시고 무병장수를 기원하던 원찰(願刹)이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멸망시킨 전조(前朝)의 사당을 세우도록 한 것은 전왕조 지지세력, 즉 자신들의 반대세력을 회유하고
이반되는 민심을 무마하려는 정치적인 행위이며, 이는 주나라 성왕이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의 이복형 미자를
송나라 땅에 봉해 선왕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그를 주나라 왕실에서 대접했다는 ‘서경(書經)’에 실린
고사(故事)를 참조한 것으로 주나라가 은나라를 계승한 것은 천명(天命)이라는 당위성과 정통성의 명분을
살린 것을 본떠 조선도 천명으로 고려를 이어받은 것이라는 명분을 살리려고 한 일이다.


숭의전(崇義殿) 건립

이렇게 마련된 고려 태조묘에는 태조 왕건뿐 아니라 백성에게 공덕(功德)을 베푼 고려 왕들을 추가하기로 하여
 1399년(정종 1년)에 태조 왕건 외에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 등 고려 8왕의 위패가 모셔지게
 되었으며 개성에서 태조 왕건의 주상(鑄像)도 옮겨오니 부족하나마 고려의 왕실 사당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 종묘에는 5왕을 제사하는데 고려 사당에 8왕을 제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니 줄여야 한다는 건의에
따라 태조 왕건과 거란족을 물리친 현종, 원(元)을 배척하고 명(明)에 사대(事大)한 공민왕 3위만 모시도록 하였으나
 다시 8위로 복위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세종 때인 1424년(세종 6년)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 4왕만을 봉향토록 하니
조선의 5왕보다 한 단계 낮춘 것이며 명칭도 묘(廟)에서 사(祠)로 바꾸어 '사위사(四位祠)'로 불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연천읍 서쪽에 있다는 사위사가 이를 말함이다.

이렇게 조선 개국 이후에 어렵사리 고려 태조 사당을 마련하고 후손을 지정하여 관리하도록 함에 따라
고려왕실의 사당이 유지되는가 싶었지만, 귀의군 왕우와 그 아들들로 이어지던 제향은 더는 후사를 잇지 못하였는지
그만 끊겨버렸으며 더는 살피고 돌보는 손길 없이 쇠락해져 사당이 빗물에 무너질 정도로 관리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무엇보다 사당에 제사하고 관리할 봉사손(奉祀孫)을 찾으려 했고, 마침내 1452년(문종 2년) 공주에서
성(姓)을 감추고 숨어 살던 고려 현종의 후손인 왕우지를 찾아 왕순례(王循禮)로 개명토록 하고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제사를 잇게 하였다.
그리고 주변에 터를 살피고 사당을 고쳐 새로이 건립하였으며 문종이 편액을 내렸다고 하니
 비로소 지금의 숭의전(崇義殿)이 세워진 것이다.

그에 더하여 고려조에 충성하였던 배현경, 홍유, 복지겸, 신숭겸, 유금필,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조충, 김취려,

김방경, 안우, 김득배, 이방실, 정몽주 등 16명의 공신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둘러보기

이렇게 지어진 숭의전은 조선 시대에 다섯 차례에 걸쳐 개수(改修)와 중수(重修)를 반복하는 등 유지했으나, 6·25전쟁으로
건물이 전소하였는바 1971년 이곳이 사적으로 지정된 다음 해부터 재건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당시 숭의전은 지금 재건된 것보다 규모가 더 컸다고 하며 그래서인지 나름대로 격식을 갖추어 복원해놓은 지금도 문화재청 명칭은
숭의전이 아니라 숭의전지(崇義殿址)로 터 지(址)를 붙여서 부르고 있다.
 


 

숭의전 입구에는 왕건이 오가면서 마셨다는 어수정(御水井)이 있어 지금도 지나는 길손들에게 시원한 약수를 제공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는 현대식(?)으로 다소 어설픈 하마비와 홍살문이 서 있어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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