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안동 능동 재실(음수재), 회곡동 상락재, 위토 설립과정> |
|
||
(초안) (2004. 1. 8. 항용(제) 제공) * 2004. 1.5--1. 8. 대종회 명회 사무국장. 경북 의성 사촌의 창회 전 부회장님께 문의 확인, 정리. * 현 수정 보완중
1.능동 재실 창건 1) 창건 연대 및 건축과정 : 미상 2) 규모 : 3칸 초가 3) 관리 : 안동의 익원공파 소산문중과 사촌의 도평의공파에서 관리. 4) 자료 : 관련 사진 자료--미상 5) 창건 연대 및 과정 추정 (1) 추정 1 : 1626년 *하담공(휘 時讓. 제학공 후손) 묘역 정비시(범장한 광산김씨 김해의 묘 이장. 상석 세우기. 봉분 사초. 제절 넓히기 등) 소규모의 재실 창건 가능성. 이 때는 위토가 없어 시제 때마다 사촌의 도평의공파와 안동의 익원공파 소산문중에서 제수비를 거출하여 시제를 모신 것으로 추정. (2) 추정 2 : 1600년대 후반. *양진당(휘 相璘. 도평의공 후손)께서 위토를 장만한 이후 창건했을 가능성 이 때부터 위토의 도지비로 시제를 모시기 시작함.
6) <관련 사진> : 없음(찾는 중임. 제보 요망)
2. 능동 재실 1차 중건 1) 중건 연대 : 1940년으로 추정 *추정 근거 (1)<음수재> 현판에 “庚辰 仲夏 *文演 印”의 기록이 있음. 경진년은 1940년임.
본래 <음수재>란 명칭은 회곡동의 재실의 명칭이었는데 이 현판을 달면서부터 <음수재>라 칭하기 시작함. (2) <國譯 晩沙文集>(金振鍾 저. 2003. 4. 金檍 발행) 내의 <陵洞齋舍 重建 上梁文> 내용 참조 확인. * 晩沙公(휘 振鍾) : 1883-1951. 도평의공파 19세손. 2) 중건과정 및 중건 시기 추정 관련 자료 : <國譯 晩沙文集>(金振鍾 저. 2003. 4. 金檍 발행) P.338-339. 내용 <슬프도다 세상의 억겁 변화 속에 말 못할 여러 해가 지났고 선영의 보호는 청산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말이 없고 징표가 없으니 외로운 중이 향불을 올렸으며 무덤가에 白楊은 묵은 지 오래였으니 나무하는 첨지들의 도끼질이라 슬픔이 더하였네. 무슨 다행인가 萬曆의 赤馬(丙午. 주:1606년. 선조39. 갑오(1594년)의 誤記인 듯)년에 다시 靑烏(주:道를 배운 선비)의 두 번째 가림을 받았으며 감히 먼 耳孫(주:八代 이하의 자손)들의 정성을 이루어 深目(주: )자의 가르치는 징표를 기꺼이 만났구나.
하潭公(주:荷潭公의 誤記. 휘 時讓을 말함)이 監司로 왔던 날에 미쳐서야 상석을 다시하고 투장을 파냈으며 養眞堂公의 보본의 정성으로 位土를 장만하고 묘사를 받들었네. 옛날부터 조상을 위하는 지성의 도리가 없었음인가 어찌 오늘에 와서 거창한 齋宮의 역사가 있을까?오랜 세월 비바람이 씻기어 그 무너질 걱정이 어이 없을소냐. 세상은 변천하고 형세는 줄었는데 하물며 또 다투는 부끄러움도 있었구나. 오랜 세월 경영이 항상 주저함이 있을 뿐 다만 세변한 것을 연고로 하며 경계의 분명치 못함이 거리낌이 되었네. 만약 管攝(관섭. 주:두 가지 일을 겸하여 조관함)하지 않고 버려서 行路에 거짓말을 시키면 또한 슬프지 않을까. 멀리 흩어져 사는 종친에게 널리 통고하여 이에 여러 대 겨를이 없어 이루지 못한 일 도모하였네.> (하략)
3) 관련 사진 : 없음(찾는 중임. 제보 요망)
3. 능동 재실 2차 중건 --1970. 11. 7. 재실 완공. 낙성식. (내용:대종회 연혁에서 발췌) 1) 대지 매입 : 대종회에서 1월 26일 재실 대지 2필지 438평 매입. 好振氏 대지 매입비 13만원 찬조 2) 규모 : 正門行廊 一棟 約五間과 坍墻 74.5m, 廚舍 一棟 五間을 신축하였는데 貳百萬원이 소요 3) 준공식 : 11월 7일 忠烈公 齋室을 단기간내에 완공하고 忠烈公 享祀와 아울러 400여명이 참석하여 준공식을 성대히 거행. 4) <음수재> 현판 : 종전의 文演氏(안렴사공파)께서 쓴 현판을 다시 달음. 5) 관련 사진
<영정각-1971년 벽해 김영배(僻海 金松培.당시 28세) 화백 작>
4. 1979. 충렬공 위토 730평 90만원에 추가 매입. 5. 1980년(庚申). 대동보증보판을 착수하여 八月 十五日에 이백질 三千五百券을 완성하여 分帙하고 600萬원의 기금을 조성하였다. 4月 10日 忠烈公 재실을 270만원을 들여 보수하였다. 6. 1981년(辛酉). 안동시 풍산읍 회곡동 山 154番地 9000여坪을 50萬원에 매입하였다. 7. 1982. 5. 2. : 忠烈公 影幀閣 신축. 八百六萬六千六百원을 들여 新築. 8. 1984. 10. 7. 재실 관리사옥 건축 1) 도평의공파 昌信氏 집이 헐리자 이 집을 기증 받아 그 재목으로 지음 2) 2,416,000원으로 건축 완료
9. 1985년. 7月 16日 檜谷洞 竹州 朴氏 할머님 壇碑를 七十三萬八千九百원을 들여 개수하였으며 9月15日에는 忠烈公 遺墟碑閣과 沿革碑를 一千二百七十二萬九千원을 들여 건립하였고 10. 1989년. 1月 10日. 檜谷洞 할머님 齋室 垈地 140坪을 135萬원에 매입하고 12月 7日 忠烈公 神道碑閣을 건축비 二千三百四十九萬一千三百六十원을 들여 건축
10. 1990. 7. 23. 忠烈公 묘소가 四百餘年間 ★光山金氏 종산에 모셔져 있어 ★泰亨 會長께서 ★崙會氏와 같이 安東에 내려가 都評議公派 ★冕鎬씨를 만나 光山金氏 종회장을 尋訪하여 祿田面 九松洞 산19番地 忠烈公墓域 二百九十九坪을 讓渡키로 합의하여 우리 산으로 확보하였다. 또한 우리는 光山金氏 문중에 고맙다는 뜻으로 金一千萬원을 희사하였다. 7月 23日 묘역 확장 축대 및 계단 축조 공사를 二千七百五十萬원을 들여 동시에 착공하여 단기간내 훌륭히 완공하니 數 百餘年의 통한을 풀게 되었다. 이에 ★泰亨會長의 공로가 지대하였다 11月 15日 노후된 檜谷洞 竹州 朴氏 할머님 齋室을 四千三百二十四萬六千원을 들여 훌륭하게 개축하였다. 泰亨會長께서 一百萬원을 특별 찬조하였다. 12. 1991년. 忠烈公 神道碑閣 마당에 忠烈公 略史臥碑를 三百四十六萬三千원을 들여 건립 13. 1992. 4. 20. 회곡동 위토답 515평을 14,324,400원에 매입 14. 1993. 4. 陵洞 齋室 管理舍를 一千一百四十二萬二千원을 들여 보수하였고 15. 1995. : 陵洞 位土畓 경지정리사업을 一百七十萬원을 들여 하였으며, 陵洞 齋室 寢具(담요) 60枚를 보충하는데 一百萬원 16. 1996. 3. 28. : 개인명의로 된 위토 四匹地를 특별조치법으로 대종회 명의로 등기 이전하였다. 位土畓은 二十八萬원을 들여 정리 작업함 17. 1998 : 상량문 목각 제작. 陵洞 齋室 上樑文(진종씨 찬)을 木刻 현판에 조각하여 게시하였는데 一百四十八萬三千원이 所要되었다. * 이 현액은 음수재 안에 게시하였었는데 2001년 3차 중건 이후 떼어서 관리사옥 창고에 보관중이라 함. * 사진 : 미촬영(준비 중) 18. 능동 재실 3차 중건 및 과정 1) 부지 확보 : 2001. 4. 2. 光山金氏 禮安派 會長 金俊植氏를 昌會副會長과 事務局長이 만나 影幀閣 敷地와 忠烈公 墓所 除下(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산19번지(現 忠烈公 墓所 除下)林을 우리에게 讓渡키로 合意하고 그 代價로 一金 壹千貳百萬원을 支拂하였다. 2) 등기 완료 : 2001. 4. 27. 讓渡받은 土地 竹松里垈 330番地를 330의1로 458평방미터(약15평)과 竹松里 山19번지를 19-1번지로 2,833평방미터(약936평)을 分割測量하고 7月5日 大宗會名義로 登記移轉을 畢하였다. 林野面積 936평중 260평이 종전 忠烈公墓所이나 持分登記로 되어있어 이를 말소하고 統合分割登記를 한 것이다. 3) 상량식 거행 : 6. 10. 飮水齋 上梁式을 工事 着手 3개月 만에 55명의 任員 및 宗員이 參席하여 精誠껏 擧行하였다. 4) 준공식 거행 : 11. 22. 宗親全員이 뜻을 같이하여 온갖 精誠을 다한 飮水齋 竣工式을 500여 後孫들이 雲集한 가운데 安東地域 關係機關과 儒林會員 地域 有志들의 激勵를 받으며 竣工式을 盛大히 擧行하고 11月 23日 忠烈公 701周忌 時祭를 奉享하였다. 5) 준공과정 요약 : 飮水齋 改築을 始作한지 19개月만에 竣工하였으며 獻誠金 合計가 貳億 貳仟七百參拾參萬 원이며 工事 代金 및 諸經費로 貳億貳仟七百六拾參萬參仟貳百九拾원이 支出 되고 九百 六十九萬六仟七百拾원이 남았는데 이 돈은 當初 個人 參拾萬원 以上 團體 五拾萬원 以上 獻金한 宗親과 團體를 獻誠碑에 刻字하여 紀念碑를 建竪키로 함에 있어 獻誠碑 建立基金으로 預置하였다. 6) <음수재> 현판 : 대종회에서 종전의 현판(<음수재>)을 확대하여 다시 판각, 제작한 것이며 종전의 현판(1940년 제작)은 대종회에 보관중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