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정공파(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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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조 : 구덕(九德) 파종회장 : 주 소 :
김구덕(金九德) ?∼1428(세종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로 척약재 김구용(金九容)의 동생이다. 나이 19세에 진사(進士)·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補職)되었다. 1379년 전(前) 좌우위(左右衛) 보승산원(保勝散員)이었다. 여러번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으로 천전(遷轉)되어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을 거쳐, 1396년(태조 5) 형조의랑(刑曹議郎)에 올랐다. 이때 형옥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뒤 외직으로 나가 단양·청풍(淸風:현재의 堤川)·한주(韓州:현재의 韓山) 등 3개 고을의 군수가 되어 선정을 폈고, 정종 때는 사헌부중승(司憲府中丞)이 되어 당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권력을 부리던 최운해(崔雲海)를 탄핵, 음죽(陰竹)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어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올랐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해주(海州)·광주(廣州)·청주(淸州)의 세 주(州)의 목사(牧使)와 연안 부사(延安府使)와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는데, 그때(1401년 태종 11) 그의 딸이 태종전(太宗殿)에 간택되어 명빈(明嬪)이 되자, 벼슬이 올라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12년(태종 12) 한성부윤(漢城府尹)을 지내고, 이어서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1414년) 또 한성윤(漢城尹)으로서 들어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기 위하여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윽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고, 1427년(세종 9)에는 손녀(金五文의 딸)가 세자빈(문종, 휘빈)에 간택되었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고, 조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안정(安靖)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화합함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그는 성품이 온량(溫良)하여 사람들을 예(禮)로서 대접하였다.
평소에 사장(詞章)을 좋아하여 시(詩) 읊기를 폐하지 않았으며 음악을 좋아하였다. 아들은 김오문(金五文)이었다. 묘는 경기 여주군 가남면 삼승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첫 일요일에 시제를 봉행한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2)묘소 참배 사진 (2007. 2. 25. 윤만(문) 제공) 경기도 여주군 가남면 삼승리 <삼승리 마을 전경>
<삼승리 마을 입구>
<안정공(김구덕) 묘역>
<우측 : 안정공(김구덕) 묘, 좌측 : 배위(?) 묘>
<묘역 석물>
<안정공(김구덕) 묘갈>
<안정공(김구덕) 배위(?) 묘갈>
<우측 문인석>
<좌측 문인석>
<중앙 : 용도를 알 수 없는 석물>
<묘역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던 곳>
<훼손된 묘소가 있던 곳>
망주석 1개가 땅에 묻혀 있다. 다른 망주석 1개와 비석은 도난을 당했다고 하며, 이 자리에 또하나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관리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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