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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안동김씨 족보 소개(2003. 12. 28. 항용(제) 제공)
<경진보 표지 사진 소개>(1980년 경 대종회에서 보수하여 철한 표지임) (2003. 9. 21. 발용(군) 제공) 1. 발간연대 : 1580년(선조 13)
2. 발간 활동 참여자 : (<경진보> 서문, 발문, <弘毅齋營建記> 참조 작성) 1)金釴 (제학공파. 김익달-김고-김맹렴-김철균-김수형-김언홍-★김익) 2)金胤先 (문온공파. 김구용-김명리-김맹헌-김자양-김예생-★김윤선) 3)金钁 (제학공파. 김익달-김고-김맹렴-김철균-김수형-김언홍-★김곽) 4)金齊賢(제학공파. 김익달-김고-김맹렴-김철균-김수형-김언홍-김곽-★김제현) 5)金昉 (제학공파. 김익달-김고-김맹렴-김철균-김수형-김언홍-김익-김윤운-★김방) 6)金億齡(익원공파. 김사형-김승-김종숙-김 질 -김성동-김 언-★김억령) 7)金瓚 (익원공파. 김사형-김승-김종숙-김 질 -김성동-김 려-김언침-★김찬) 8)金鋘 (전서공파. 김성목-김휴-김익정-김형-김부녕-김귀년-김사수(현감)-★김오) 9)柳希潛(미상)
3. 내용 1)규모 : 1책(41장) 가로 31cm ×세로 38cm 2)판본 : 목판본 3)기록체제(1-88P) (1)序文(1-4P):승정원 좌승지 億齡 謹書 (2)天:5P-6P 가)대보공(金閼智)--경순왕(김부)까지의 기록은 없음 나)"新羅 敬順王 十一代孫 利請, 子 義和(追奉 威尉注簿)"라고 최초 기록한 후 시작. 다)판서공(휘 愃)의 子인 밀직사공(휘 七祐), 개성윤공(휘 七霖)은 휘만 나오고 그 이후 후대의 기록은 없음 라)군사공(휘 七陽) 문온공(휘 九容), 지제교공(휘 齊顔), 안정공(휘 九德) 이후 후손 기록은 있음 마) 부사공(휘 天順), 도평의공(휘 九鼎), 현감공(휘 潤), 대호군공(휘 儒)은 기록에 없음 (3)地:7P-8P 가)제학공(휘 益達), 판사공(휘 士謙), 안렴사공(휘 士廉), 익원공(휘 士衡) 이후의 기록 있음. 나)판삼사공(휘 場), 충강공(휘 士安), 서운관정공(휘 綵)은 기록에 없음. (4)玄:9P-呂64P 가)군사공(휘 七陽)의 자인 金설(土+舌) 이후 각 파 후손 기록 (5)65P-81 : 상 충렬공 행장 가)安震 跋. 後孫 九鼎 謹識 (6)83P-84P : 先世詩文 가)상서공(휘 孝印)-三日浦 丹書石. 나)충렬공(휘 方慶)-福州 다)상락군공(휘 忻)-福州映湖樓 마)좌정승공(휘 永暾)-扈從白馬山應御製) 바)참판공(휘 益精)-送秋 사)내서사인공(휘 齊顔)-休暇 아)감사공(휘 德龍)-題珍島龍藏洞 (7)85P-88P : 발문 가)사간원 헌납 瓚 跋 나)호조좌랑 齊賢 跋
4. 기록 방법 1)각 장을 6단으로 구분. 2)각 인의 출생년, 문, 무과, 주요관직, 몰년, 배위. 처의 부 기록. 아랫단에 자와 녀(사위 명)를 기록. 3)1P(일부), 88P(맨 뒤)는 목판본 글자가 아님. 원본 훼손으로 인해 후대의 족보를 보고 1980년 경 첨기한 것.
5. 현 소장처 :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5호, 대전 족보박물관 위탁 보관
5. 진본 전수 및 제공자 김용세(金容世. 안렴사공파. 목사공 휘 公望 종손). 현 서울 서대문 거주. 1975년 경 선고(先考)이신 김기원(金起源) 공께서 대종회에 기증함.
7. 경진보 발간 과정 *<경진보> 서문, 발문, <을유보> 서문, <기미보> 서문, <弘毅齋營建記> 기록 내용 참조 요약 작성 1)1500여년 경, 宗人 중에 유식한 인사들이 족보가 없음을 개탄하며 개인적으로 보첩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전해주곤 하였다. 그런데 그것들은 소홀히 하여 틀리기도 하는 등 여러 폐단이 있어 왔음. 2)1519년(기묘년.중종14), 상사공 김윤선(上舍公 金胤先. 문. 문온공의 5대손)이 정언공(正言公. 제. 김익)에게 족보 편집을 부탁함. 이에 정언공은 최초로 대동보 제작에 뜻을 두고 약 30년간에 걸쳐 그동안의 보첩들을 모두 모아 수정하고 정리하여 세보(世譜)를 편찬하고 종계를 (宗系)를 밝혀놓음. 그러나 그 세보를 간행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1548년(戊申년. 명종3년)에 몰하심. 3)1550년 경(추정), 정언공의 아우인 김곽(제. 김익의 아우)이 화성군수로 있을 때 귀양중이던 유희잠(柳希潛)에게 부탁하여 정언공이 정리해 놓았던 세보 초고를 보완하여 7권의 족보를 완성함. 그런데 외파(外派)에 대한 기록상 문제점이 드러남. 4)1577년 (정축년. 선조 10년), 김제현(金齊賢. 제. 김곽의 자)이 옥산(현 전남 해남)으로 전보됨에 따라 그 부임 초에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여러 종장(宗長)들에게 세보 편집과 발간 문제를 품의함. 또한 강화부사 김오(金 金吳. 전)와도 상의하여 족보와 대조해 보고 당시에 편찬된 파평윤씨와 전성이씨 등의 성보(姓譜)를 모방하여 문제가 되었던 외파에 대한 기록 문제에 있어 외손의 지파는 삭제하고 동성(同姓)의 자녀만 기록하기로 결정함. 5)1578년 경(추정). 김방(金昉. 제. 정언공 김익의 손. 金潤雲의 자. 당시 천안군수)이 선대(先代-정언공 김익)의 뜻을 이어받아 직공(職工)을 모집하여 각자(刻字)를 시작함. 그런데 그것은 행장(行狀)과 서문(序文) 정도의 판각에 그침. 6)그 후(1580년. 경진년. 선조 13) 감사공 김억령(億齡. 익)과 참찬공 김찬(瓚. 익)이 여러 종친들과 함께 이 문제를 협의하였는데, 당시 강화부사로 있던 병사공 김오(金吳. 전)가 충청도 절도사가 된 뒤 천안공(金 昉)으로부터 이 사업을 인수하여 다시 교정하고 자신의 비용으로 판각하여 출판을 마침. 7)이 때 승지공(휘 億齡. 익. 당시 좌승지 겸 수찬관 지제교)에게 서문을 의뢰하였고, 참찬공(金瓚. 익)과 김제현(金齊賢. 제)에게 발문을 의뢰하여 편찬 및 발간 사업을 마침.
8. 가치 : 1580년(선조 13) 목판으로 간인(刊印)된 조선 최초의 동성보(同姓譜)
9. 기타 관련 자료 1) 경진보 (선조13, 1580) 서문 (金億齡) 역문 일부 (2003. 12. 15. 주회(안) 제공) 同宗 중에 유식한 인사들은 일찍이 이에 개탄하여 혹은 사사로이 보첩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전해주는 사람도 있었으나 소홀하거나 틀리는 등 여러 폐단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서 기묘 연간(1579년)에 ★김공 익이 이를 수정하려는 뜻을 두고 일가의 보첩을 만들었으나 또한 간행도 못하였다. 이제 강화부사 ★김공 오가 충청도 절도사가 된 뒤로부터 이를 다시 교정하여 비용을 들여 출간함에 있어 -- 2) 경진보 (선조13, 1580) 발문 (김제현) 일부 (2003. 12. 15. 주회(안) 제공) 김씨의 세대는 비록 오래 되었어도 일찍이 족보가 없었는데 김상사(金上舍) 윤선공(胤先公. 문)이 원고를 돌아가신 정언공(正言公. 김익. 제)에게 위탁하였던 바, 공이 미처 끝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그후에 선친(제. 김제현의 부 김곽)께서 화성원이 되어 귀양살이를 하던 지금의 선공부정인 유희잠(柳希潛)에게 부탁해서 원고를 정리시켜 족보를 완성하니 보(譜)가 무릇 7권이 되었으나, 다만 외파에 이르러서는 파열(派列)의 문별(門別)이 많으므로 도리어 종계(宗系)를 상세히 바로 잡을 수가 없음을 내가 항상 고민하여 왔었다. 그런데 정축년(丁丑年)간에 마침 옥산(玉山- 현재의 전남 해남군)으로 출재(出宰)의 명을 받아 부임초에 경중(京中)에 거주하는 여러 종장(宗長)들에게 품의하였고, 또한 지금의 강화부 백령공(伯令公. 전. 김오)과도 상의하여 본보(本譜)와 대조하고, 근일에 편찬한 파평윤씨와 전성이씨 등의 성보(姓譜)를 모방하여 외손(外孫)의 지파는 삭제하고 다만 동성(同姓) 자녀만 기록하니 그 근원의 분파가 역력히 일목요연하게 나타나고 간략하고도 상세하고 간단하고도 긴요하니 다시 전일(前日)의 광대(廣大)하고 복잡한데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언공(正言公-제. 김익)의 손자이신 현 천안군수 ★방공(昉公-제. 김방)이 선대의 뜻을 잘 이어받아 직공(職工)을 모집하여 각자(刻字)를 시작하였으나 행장(行狀)과 서문(序文)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을 ★강화령공(전. 김오)이 천안(김방)으로부터 이 사업을 인수하여 공사를 마쳐서 누대 성취하지 못하였던 일을 마침내 그 손에서 완성하게 되었으니 어찌 우리 전 종친들의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대대로 내려가며 잘 증수(增修)하면 영구히 변함이 없이 전해질 것이니 후손들은 이에 힘써 주기 바란다.
3) 기미보 (영조15, 1739) 서 (90세 김환) (2003. 12. 15. 주회(안) 제공) 충렬공 10세손인 정언공 ★익(주살 익)이 세보를 편찬하여 종계(宗系)를 밝혔고 ★환의 증조부(曾祖父) 증의정공(贈議政公. 김언심)의 종제(從弟) 감사공 ★억령(億齡)과 환의 종조부(從祖父) 참찬공 ★찬(瓚)이 여러 상하 종인들과 논의한 끝에 병사공 ★오(金+吳)가 당시 강화부사로 있을 때에 그가 족보를 판각(板刻)에 부쳤으니 이 해가 만력8년 庚辰(☞1580년)이다.
4) 기미보 (영조15, 1739) 서 (김유) (2003. 12. 15. 주회(안) 제공) 지금까지 전해오는 세보는 오직 만력 경진(1580)에 휘★오(金+吳)가 강화부사로 있을 때에 발간한 한 책 뿐이다.
5) 을유보 (순조25 1825) 서 (金禹元) (2003. 12. 15. 주회(안) 제공) 그래서 기묘년(己卯年-1579년)에 명현 정언공 ★익(주살 익)이 가첩을 보수해서 계통을 명백히 고쳐서 족보 한권을 편성하니 이것이 족보의 시작이었다.
6) 弘毅齋營建記 (2003. 12. 12. 태영(군) 제공) 正言公 ★諱 익의 字之君擧니 西紀一四八六年丙午에 出生 一五一六年正德丙子에 進士가 되시고 一五一九年己卯에 賢良科에 及第하여 벼슬이 正言에 오르고 學文이 卓越하여 靜庵趙光祖와 더불어 性理學에 밝으셨다. 또한 正言公께서는 西紀一五八O年 萬曆八年 宣祖十三年庚辰에 우리 安東金氏 姓譜를 編纂하시다가 不幸히도 끝을 마치지 못하시고 逝去하신 後 三十餘年間을 지내오다가 正言公의 孫子되시는 奉常寺正公 ★諱 昉께서 天安郡守로 在任時에 祖父任의 거룩한 뜻을 繼承하여 이 일을 成就하기 爲하여 京鄕各地의 僉宗들에게 널리 通文을 내고 糾合商議하여 마침내 庚辰譜發刊의 大役事를 完成하기에 이르렀다. 庚辰譜는 우리 安東金氏의 가장 오래된 最初의 族譜이다. 一年辛酉五月三十一日 忠烈公 二十五世孫 崙會 謹識幷書 <산청군청발행: 산청누정기>
10. 경진보 편집 및 발간 관련자 종합 (2003. 12. 15. 항용(제) 제공)
1)金 金戈 : 1486(성종17)-1548년(명종3). 제학공 후손. 자 君擧. 1516년(중종11) 진사 급제. 1519년(중종14) 賢良科 급제. 正言. 壽 63세. 묘는 1968년 산청군 생초면 월곡리 籠岩峙로 이안. 2)金곽(金+藿) : 생몰년 미상. 자 君擇. 제학공 후손. 익의 아우. 1525년(중종20) 진사. 통천군수 역임. 壽 62 3)金齊賢 : 1535년(세종14)-?. 제학공 후손. 자 思伯. 1564년(세종43) 생원. 1570년(선조3)문과 급제. 개성유수 역임. 4)金昉 : 생몰년 미상. 제학공 후손. 자 明遠. 1561년(명종16) 생원. 1567년(명종22) 문과 급제. 奉常寺正 역임. 묘 생초면 월곡리 5)金億齡 : 1529년(중종24)-1589년(선조22). 익원공 후손. 생원 진사과에 모두 합격한 후 1552년(명종7년) 24세에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벼슬은 승정원 좌승지 지제교를 거쳐 강원도와 황해도 충청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이조판서 대제학에 추증. 6)金瓚 : 1543(중종 38)∼1599(선조 32). 익원공 후손.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 아버지는 형조참의 언침(彦沈)이다. 1567년(명종 22)에 진사가 되고, 156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70년에 검열이 되고, 이후 대교·봉교·전적·형조정랑·검상·사인·이조정랑 등의 관직과 지평·집의·정언·헌납·사간·수찬·교리·응교 등 삼사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1573년 평안 삼도사로 나가 군적(軍籍)을 정리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평안도 순무어사로 활약하였다. 1584년 이후로는 전한·직제학·승지·좌참찬·동지중추부사·대사헌·대사간·대사성·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임금의 파천을 반대하였으며, 임금 일행이 개경에 이르자 동인(東人) 이산해(李山海)의 실책을 탄핵하여 영의정에서 파직시키고,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던 김공량(金公諒)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뒤에 정철(鄭澈)밑에서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역임하고,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였으며, 접반사(接伴使)로서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또, 일본과 강화회담을 벌일 때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 때부터 예조판서·지의금부사·대사헌·이조판서를 연이어 지냈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우참찬까지 승진하였다. 대사헌 때 가족을 멀리 피난시켰다고 탄핵을 받고 체직되는 등 소소한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하였지만, 문장가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경제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이 능숙한 명신이었다. 임진왜란 뒤 전쟁의 수습과정에서 죽자, 선조는 조회를 정지하여 추모의 뜻을 표했다. 시호는 효헌(孝獻)이다. 7)金 金吳 : 전서공 후손. 1520년(중종15)에 태어나 명종때 무과에 급제. 12주의 목사와 4도 병마절도사를 역임. 현감 金師秀의 자. 선계는 김휴-김익정-김형-김부녕-김귀년-김사수(현감)-김오(병사)-金九鼎 (2004. 2. 13. 주회 제공) 8)柳希潛 : 미상
11. <경진보 서문> (선조13, 1580) (2002. 7. 4. 주회(안) 제공)
만력8년 맹하---예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수찬관 지제고 億齡 謹序
우리 김씨는 신라 경순왕 후로부터 대대로 卿相을 지내 왔으며 상락공에 이르러서는 공명과 사업이 빛나고 쟁쟁하여 고려사에 실려 있고, 이조에 들어 와서는 원류가 멀고 오래 되어도 더욱 번창하여 三韓世家의 으뜸이 되었다. 비록 그러하나 연대가 이미 얼어지고 지파가 서로 갈라져서 사람들이 先人의 業을 계승치 못함이 많았고, 또한 시골에 떨어져 살면서 겨우 같이 編戶(편호)는 하고 지내나 자기 자신이 상락공의 후손인지를 알지 못하는 자가 하물며 系世가 어떻게 내려온 줄을 능히 알 수 있겠는가 同宗 중에 유식한 인사들은 일찍이 이에 개탄하여 혹은 사사로이 보첩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전해주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것이 소홀하고 틀리는 등 여러 폐단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래서 己卯연간(=1579)에 김공 ★익(주살 익)이 이를 수정하려고 뜻을 두고 일가의 보첩을 만들었으나 또한 간행도 못하였다. 이제 강화부사 김공 ★오(金吳)가 충청도 절도사가 된 뒤로부터 이를 다시 교정하여 비용을 들여 출간함에 있어 同姓은 상세히 해서 조상을 존중하고 외손은 간략히 해서 종친을 존중히 한 연후에 우리 김씨의 세대의 遠近과 지파의 條達(조달)과 族黨의 親疎(친소)와 자손의 多寡(다과)를 명약관화하고 손가락과 손바닥 보듯이 환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니 지금으로부터 항상 눈에 익혀서 派를 소급해서 그 근원을 찾고 近親으로부터 遠族에 이르기까지 한 뿌리에서 나누어짐을 알게 되어 더욱 친애하는 뜻을 돈독히 하면 이 보첩을 편수한 것이 어찌 곧 우리 김씨만의 다행한 일이겠는가. 또한 우리 국가로서도 총화단결해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만력8년 孟夏 ---裔孫(예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수찬관 지제교 ★億齡 삼가 씀
12. <경진보 발문> (2002. 7. 4. 주회(안) 제공) 예손 조봉대부 행호조좌랑 齊賢 跋 김씨의 세대는 비록 오래 되었어도 일찍이 족보가 없었는데 김上舍(생원) ★胤先공(문, 문온공 5대손))이 草稿를 돌아가신 백부 ★正言공(제. 김익)에게 위탁하였던 바, 공이 미처 끝을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그 후에 ★선친(제. 김제현의 부 김곽)께서 화성원이 되어 귀양살이를 하던 지금의 선공부정인 柳希潛(유희잠)에게 부탁해서 원고를 정리시켜 족보를 완성하니 譜가 무릇 7권이 되었으나 다만 외파에 이르러서는 派列의 門別이 많으므로 도리어 宗系를 상세히 바로 잡을 수가 없음을 내가 항상 고민하여 왔었다. 그런데 丁丑 년간에 마침 玉山(현재의 전남 해남군)으로 出宰(출재)의 명을 받아 부임초에 京中에 거주하는 여러 宗長들게 품의하고 또한 지금의 ★강화부 伯令公(전. 鋘)과도 상의하여 本譜와 대조하고 근일에 편찬한 파평윤씨와 전성이씨 등의 姓譜를 모방하여 外孫의 지파는 삭제하고 다만 同姓 자녀만 기록하니 그 근원의 분파가 역력히 일목요연하게 나타나고 간략하고도 상세하고 간단하고도 긴요하니 다시 前日의 廣大하고 복잡한데 비할 바가 아니었다. ★正言공(제. 김익)의 손자이신 현 천안군수 ★昉公(제. 김방)이 선대의 뜻을 잘 이어받아 職工을 모집하여 刻字를 시작하였으나 行狀과 序文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을 ★강화령공(전. 金吳)이 천안(시정공-昉)으로부터 이 사업을 인수하여 공사를 마쳐서 누대 성취하지 못하였던 일이 마침내 그 손에서 완성하였으니 어찌 우리 전 종친들의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대대로 내려가며 잘 增修하면 영구히 변함이 없이 전해질 것이니 후손들은 이에 힘써 주기 바란다. 예손 조봉대부 행 호조좌랑 ★齊賢(제. 제현) 跋
<경진보 원본 서문>. 1980년 경 일부 훼손된 부분(좌측 흰 부분)을 복원 작업한 모습.
<2003. 10. 대종회에서 2차로 발간한 영인본> (1차 영인본은 1983년 발간 배포)
<내부-경진보 서문(김억령 서)>
<맨 뒤의 발문 부분-김제현 발)>
12. <경진보> 필사본(筆寫本) 소개
가)전수 소장자 : 金恒鏞--제학공파. 비안공(휘 仁甲) 16세손. 나)제작 필사년 : 미상. 경진보 발간(1580년) 이후 필사하여 대대로 추록한 것으로 추정 다)내용 (1)집안에 전수돼 오던 것으로 상기 경진보 기록 내용에 이어 약 1700년대까지의 해당 계파의 생존인 기록. (2)기본 기록에 이어 비안공 후손 10대 까지의 계(시열-소-구만-남정-필광-동호-숙-회건-유화-대년)를 이어 적음. (3)상기 경진보와 글자체와 편제가 다소 다름. (4)부식 정도가 심하여 비닐로 각 장을 싸서 보관중임.
*상기 경진보(대종회 소장본)와 경진보 필사본(김항용 소장본)과의 차이점 --경진보(아래 사진 1, 2)의 훼손 부분을 1980년 경 대종회에서 복원작업 하는 과정에서 추록한 내용들이 필사본(사진 1, 2)에는 없는 점 1. <경진보 사진1>
2. <필사본 사진1>
3. <경진보 사진2)
4. <필사본 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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