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사공파(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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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 조 : 金天順 * 파종회장 : * 연 락 처 : * 주 소 :
<분파 소개>
중시조 충렬공(方慶) 현손(玄孫)代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 중 15파가 현존하고 있다. 그 중에서 문숙공(文肅公-永暾)의 손자인 익달(益達)의 제학공파(提學公派), 정간공(貞簡公-永煦)의 손자 사렴(士廉)의 안렴사파(安廉使派), 사형(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가 안동김씨 인구의 60-70%를 차지하며 통칭 <提安翼 3派>라 부른다. 이밖에 군사공파(郡事公派-七陽), 문온공파(文溫公派-九容), 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九鼎) 등 3파가 그에 버금 간다. 그 파계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 맨 우측의 짙은 글자의 종파가 현존하고 있는 15개 분파임. * 파명 옆의 ( )의 인원은 2001년 8월 현재, 추정 인원임. * -표는 해당 파 종인들의 주 거주지임.
<부사공(副使公)파계도 >(2002. 9. 14. 정보미(미상) 제공.) 시조, 충렬공, 파조
*아직 준비중입니다. *부사공파 여러분께서는 다음의 내용을 준비하시어 관리자 이메일로 조속히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다 음 1.설립일시 : 2.사무실 및 연락처 3.문중회 소개 1)파조이신 ○○ 이하 후손들의 문중회이다. 2)관리 또는 향사하고 있는 묘소 및 설단위 : 3)주요 향사일 및 장소 : 4.연혁 : 연도별로 주요 활동내용 기록 5.회칙(정관) 6.임원명단 1)역대 임원명단(회장 중심) 2)현 임원명단 7.파 문중회내 주요 조상님 소개. 8.파 문중회내 주요 자료 소개 예) 묘소, 사당, 문헌, 교지, 유물, 역사 유적지, 신도비 등 사진을 스캔에 떠서(PC방 이용) JPG파일로 저장하여 보내며, 사진 설명을 곁들여 보냄. 9.파내 기타 소파 문중회 소개
<주의사항> *모든 내용은 컴퓨터의 아래한글로 작성하여 보냅니다. *사진은 위 7번 8번항에서 설명하여 작성하고, 스캔으로 떠서 저장한 사진은 따로 입력하여 보내야 함. *보낼 곳---이메일 주소 : khy5278@chollian.net
<주요자료 모음> *파조 부사공파 주요 사진 1) 부사공파 묘역 전경 *1991. 7. 28 건립. 충남 홍성군 은하면 대천리 은하봉. *향사 매년 음력 10월 16일 *자료 출전:<대구청장년회 15년사>(2005. 1. 간) 2) 부사공(휘 天順) 설단 3)좌랑공(휘 談, 부사공 子) 단묘 (상-부사공, 우하-좌랑공) 4) 미암공(薇菴公-휘 大來) 묘소 5) 묘역 아래에 있는 조성 특별 성금 명단 비 (2005. 8. 4. 안사연 여름캠프시 촬영)
<주요 선조님 소개> 1. 김대래(金大來) 1)교관공 김대래 (敎官公 諱 大來) 소개 (2007. 10. 3. 태영(군) 제공) 동영주사(東瀛洲事)를 지내고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치사한 부사공 천순(天順)의 손자요, 통예문봉예랑(通禮門奉禮郞)을 지내고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증직된 휘 담(談)의 아들이다. 태종17년(1417) 생원(生員)이 되고 세종25년(1443) 정월에 임금의 특지(特旨)로 포상하고 세종26년(1444)에 교관(敎官)으로 발탁되어 종사(宗師)가 되어 조사첩(朝謝帖)을 받았다. 벼슬은 중군섭부사정 증 한성부참군(中軍攝副司正 贈漢城府參軍) 이다. 세조 원년(1455) 12월에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錄) 되었다. 단종(端宗)이 손위(遜位)되자 통곡하며 홍주 어은동(洪州 魚隱洞)에 들어가 號를 미암(薇菴)라 하고 후학을 길렀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덕이 높아 문충공 성삼문(成三問)과 충정공 박팽년(朴彭年) 최영성(崔寧城)등과 교유하였다. 묘는 충남 홍성군 은하면 대천리 은하봉(結城縣 碧池山 銀河峯下 魚寧里)에 있는데, 이조판서 우찬성 송환기(宋煥箕)가 묘지명을 짓고,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묘갈명을 지었다.
2)묘갈 (2005. 1. 30. 주회(안) 제공) 출전 : 藥泉集第二十. 墓碣銘 敎官金公墓碣銘 甲申 維我世宗大王二十六年。上爲未出閤諸宗豫養擇師。命集賢殿愼簡其人。咸曰有生員金其姓大來其名者。學問旣精。又以孝登名于朝。上又議于承政院。皆曰可。於是以敎官召之。公在忠淸道結城縣蓋山下。奉母夫人。專心於志物之養。無慕乎其外。及膺命入朝。上曰予知某孝親。離違從宦。能無愛日之情乎。其傳歸迎母。公於是以馹還家。奉雕軒登途。往來有?。一時榮之。朝廷賢士大夫多贈以詩章。成公三問詩有云如公可使終野遺。以禮擢爲宗英師。鳴騶一朝入雲?。兒隨母後駟馬馳。朴公彭年以公同年子。又作詩卷序。備言公窮經篤孝。備承恩寵之實。此則得於二公詩若序。可以徵信。乃若其後事。傳聞不及。無從而記焉。公墓在本縣碧池山銀河峯下魚寧里負甲之原。公有二子曰鉉曰鎭。鉉之七代孫興九,夏九尙守公丘墓。時奉香火。鎭官定平府使。子麟祥徙于江原道鐵原府。官禮曹正郞贈判校。子?官兵曹正郞贈承旨。子地四早歿。贈戶曹參判。有二子曰應河,應海。應河光海戊午。以宣川郡守。從征建州。二元帥生降而獨戰死。節義暴於天下。事具載忠烈錄。褒贈領議政諡忠武。立祠龍灣。應海御營大將。忠武之子益鍊孫世龜?水使。曾孫重禹以奉忠武祀。朝家推延世之賞。今官判官。重器摠戎使。應海孫世翊漢城府左尹。曾孫重元兵使。重三水使。重九營將。維我朝世廟之治爲極盛。??吉士。盈于朝廷。而宗英之師之選。僉擧公而屬之。至若馳馹輦母。養以祿于京中。其殊榮異數。實前世之所未有。然則公之人品之高。學行之卓。百載之下。猶可想見。而似續之不大顯久矣。積慶餘休。及忠武始發。不但一時大其門戶而已。將門出將。擁節?列棨戟。累累而未艾。福祿之悠長。伊誰之自也。公新羅國姓。至高麗上洛公方慶移籍安東。高祖寶文閣大提學諱承用。曾祖監察司掌令諱玖。祖密直副使諱天順。考通禮門奉禮郞贈戶曹佐郞諱談。銘曰。
立身揚名。不必在高位。惟孝惟學。垂裕後昆。不但在近代。愈遠愈?。凡今之人。如不信者。請視斯銘。於公徵也。
형태서지 : 권수제 藥泉集. 판심제 藥泉集. 간종 활자본(芸閣印書體字) 간행년도 : 1723年刊. 권책 : 34권 17책. 행자의 수 : 10행 20자. 반곽의 크기 : 21.6×14.8(㎝). 어미 : 上白魚尾. 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도서번호 : 한46-가921.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131~132 저자 : 남구만(南九萬) 생년 : 1629년(인조 7). 몰년 : 1711년(숙종 37). 자 : 雲路. 호 : 藥泉, 美齋. 본관 : 宜寧. 시호 : 文忠
3)묘갈명 역문 <교관(敎官) 김공(金公) 묘갈명> 갑신년(1704. 숙종30) (2007. 10. 3. 태영(군) 제공)
우리 세종대왕이 즉위한지 26년 되던 해에 상은 아직 궁중을 나가지 않은 여러 종친들을 위해서 스승을 가려 뽑아 미리 기르려 하였다. 그리하여 집현전(集賢殿)에 명해서 인물을 신중히 선발하게 하였는데, 이때 모두들 말하기를, “생원으로 성은 김(金)이고 이름이 대래(大來)인 자가 있는데, 학문이 이미 정밀하고 또 효성으로 이름이 조정에 올랐습니다.“하였다. 상이 또다시 승정원에 의논하게 하자, 모두들 말하기를 ”좋습니다.“하니, 이에 교관(敎官)으로 불렀다. 공은 이때 충청도 결성현(結城縣) 개산(蓋山) 아래에 있었는바, 모부인을 모실 적에 뜻을 받들고 물건으로 봉양함에 온 마음을 다하고 그 밖의 일은 사모하지 않았다. 공이 왕명에 따라 입조하자, 상이 말하기를 “내 그대가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줄을 아니, 멀리 어버이를 떠나 벼슬하게 된다면 어찌 날짜를 아끼는 정(情)이 없겠는가. 역마를 타고 돌아가 모친을 맞이해 오라.”하였다. 공이 이에 역마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곱게 꾸민 가마를 받들고 길에 올라 오고 가는 행차가 찬란하니, 당시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이에 조정의 어진 사대부들이 많이 시장(詩章)을 지어 주었는바, 성공 삼문(成公三問)의 시에 공과 같은 분 끝내 초야에 버릴수 있겠는가 / 如公可使終野遺 예로 발탁하여 종영의 스승을 삼으셨네 / 以禮擢爲宗英師 우는 말 하루 아침 구름 속의 궁궐문에 들어오니 / 鳴騶一朝入雲扃 아들이 어머니 뒤를 따라 사마를 달리네 / 兒隨母後駟馬馳
라고 하였으며, 박공 팽년(朴公 彭年)은 공과 동방(同榜)에 합격한 분의 자제로 또 시권(詩卷)의 서(序)를 지을 적에 공이 경서(經書)를 연구하고 효성이 독실하며 은총을 골고루 받은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으니, 이는 두 분의 시와 서문을 보면 증험하여 믿을수 있다. 그 후의 일로 말하면 전하여 알려진 것이 없어서 기록할 수가 없다.
공의 묘소는 결성현(結城縣) 벽지산(碧池山) 은하봉(銀河峯) 아래 어령리(魚寧里) 갑좌(甲坐)의 산에 있다. 공은 두 아들을 두었으니 현(鉉)과 진(鎭)인데, 현의 7대손 흥구(興九)와 하구(夏九)는 아직도 공의 묘소를 지키면서 때맞춰 향화(香火)를 받들어 올린다. 진은 벼슬이 정평부사(定平府使)이고, 인상(麟祥)은 강원도 철원부(鐵原府)로 이사 하였는데 벼슬이 예조 정랑으로 판교(判校)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인(軔)은 벼슬이 병조 정랑으로 승지에 추증되었고, 아들 지사(地四)는 일찍 죽었는바 호조 참판에 추증 되었다. 지사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이름이 응하(應河)와 응해(應海)인데, 응하는 광해군 무오년(1618)에 선천 군수(宣川郡守)로 있다가 건주(建州)를 정벌 할적에 종군하였는바, 두 원수(元帥)는 살아서 항복하였으나 공은 홀로 싸우다가 죽으니, 절의(節義)가 천하에 드러 났다. 이 사실이 ≪충렬록(忠烈錄)≫에 자세히 기재 되어있다. 표창하여 영의정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무(忠武)라 하였으며, 용만(龍灣 의주義州)에 사당을 세웠다. 응해는 어영대장(御營大將)이다.
충무공의 아들 익련(益鍊)과 손자 세귀(世龜)는 모두 수사(水使)이고, 증손 중우(重禹)는 충무공의 제사를 받든다 하여 조정에서 대대로 이어가는 상을 내려 지금 벼슬이 판관이고, 중기(重器)는 총융사(摠戎使)이다. 응해의 손자 세익(世翊)은 한성부 좌윤이고 증손 중원(重元)은 병사(兵使)이고, 중삼(重三)은 수사(水使)이고, 중구(重九)는 영장(營將)이다.
우리 조선조에는 세종의 정치가 가장 훌륭하여 수많은 어진 선비들이 조정에 가득하였는데, 종영(宗英)의 스승을 뽑을 적에 여러 사람들이 공을 천거하여 맡겼으며, 역말을 달려 돌아가 어머니를 가마로 모시고 와서 서울에서 녹봉으로 봉양함에 이르러는 특별한 영화와 남다른 예우가 실로 전대에 일찍이 없던 것이었다. 그러하니 공의 높은 인품과 뛰어난 학행을 백년이 지난 뒤에도 오히려 상상해 볼 수 있다. 다만 후손들이 크게 현달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쌓아 놓은 경사와 남은 아름다움이 충무공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서 다만 일시적으로 그 문호를 번창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수의 가문에 장수가 배출되어 부절을 잡고 병마를 호령하여 계속 이어지고 끊이지 않으니, 복록의 유구함이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공은 신라의 국성(國姓)이니, 고려 때 상락공(上洛公) 방경(方慶)에 이르러 관향을 안동(安東)으로 옮겼다. 고조는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낸 휘 승용(承用)이고, 증조는 감찰사 장령(監察司掌令)인 휘 구(玖)이고, 조고는 밀직부사 휘 천순(天順)이며, 선고는 통례문 봉례랑(通禮門奉禮郞)으로 호조 좌랑에 추증된 휘 담(談)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입신 양명은 / 立身揚名 굳이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요 / 不必在高位 오직 효도와 학문이라오 / 惟孝惟學 후손에게 넉넉한 복을 남김은 / 垂裕後昆 근대에 있을 뿐만 아니라 / 不但在近代 멀수록 더욱 빛나도다 / 愈遠愈焯 지금 사람들 / 凡今之人 만일 이것을 믿지 못하거든 / 如不信者 이 명문을 보라 / 請視斯銘 공에게 증거할 수 있으리라 / 於公徵也
1) 날짜를 아끼는 정(情): 날짜를 아낀다는 것은 부모가 늙어 봉양할 날짜가 만지 않으므로 효성을 다해 봉양함을 이른다. 2) 종영(宗英): 종친의 영재(英才)를 이른다. 3) 두 원수(元帥): 원수 강홍립(姜弘立)과 부원수 김경서(金景瑞)를 가르킨 것이다.
출전: 약천집 (남구만)
4)충정공 박팽년이 김교관(金敎官) 대래(大來)에게 주는 시 (2005. 8. 5. 태영(군) 제공)
들으니 결성현이 해미의 동쪽에 있고 / 吾聞結城之縣在海湄 은덕을 쌓은 김후가 여기에 산다더라 / 金侯隱德居於斯 집에 계시는 자친이 장수하시니 / 堂上慈親垂鶴髮 아침 저녁으로 잘 모셨다더구나 / 晨昏樂志要無違 신선한 물고기 낚고 좋은 나물 캐다가 / 釣水採山鮮又美 맛있게 요리하여 입맛에 들게 하였네 / 入廚滌隨聽전이 엄동의 얼음에서 잉어가 나왔으며 / 玄冬鯉魚躍出氷 뜰 아래 개 먹이는 닭 소리가 슬펐다네 / 階下哺狗鷄聲悲 효심에 하루 이틀을 아끼니 / 孝心一日二日愛 성의를 천인 만인이 알았네 / 誠意千人萬人知 게다가 우리 임금께서 효도로 다스리니 / 況當吾君勤孝理 공과 같은 사람을 초야에서 늙게 할손가 / 如公可使終野遺 임금의 사자가 하루 아침에 운경에 드니 / 鳴騶一朝入雲扃 아들이 모친 뒤를 따라 사마를 달렸더라 / 兒隨母後駟馬馳 어찌 가문에 귀한 작록만 미칠 뿐이리오 / 豈惟及門貴爵祿 예로 발탁되어 종영(宗英)의 스승 되었다네 / 以禮擢爲宗英師 이제부터 그의 사업을 헤아릴 隋 없으리니 / 從今事業不可量 효도를 옮겨다 임금께 충성할 줄 알겠네 / 信知事君忠可移 맑은 풍도 굳은 절의 흠앙했던 바이거니 / 淸風苦節久所欽 순수하고 온화한 모습 이제 보니 하늘 같은 마음일세 / 粹和今得乾如心 학도들 광간하여 비연한 문장이라 / 小子狂簡足斐然 늦게 만나 자주 보며 망년우가 되었도다 / 晩交數見相忘年 출전: 육선생유고(취금헌 박팽년)
미암공 김대래(薇庵公 金大來) 安東人 王子師傅世宗朝荑學純孝承召特命馳馹迎母祿養京中事具著成忠文公三問朴忠正公彭年詩若序端宗遜位痛哭入結城口口名其居曰薇庵 祖父 密直副使 천순(天順)(부사공파조) 父 通禮門奉禮郞 贈戶曹佐郞 담(談)
5) 김 교관(金敎官)의 시권(詩卷)의 서문 (205. 8. 5. 태영(군) 제공) 성상께서 평소에 유술(儒術)을 숭상하여 문치(文治)를 크게 일으킨 덕에 인재(人才)를 교양(敎養)하는 법이 실제로 갖추어 졌다. 국내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곳으로는 태학(太學)과 소학(小學)이 있고 종친(宗親)을 가르치는 곳으로는 종학(宗學)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모두 경전(經典)에 밝고 행실을 잘 닦은 자를 선발하여 사표(師表)로 삼았다. 그러고도 오히려 출합(出閤)하지 않은 종친을 미리 양성하고 내시(內侍)도 학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염려하여 문학과 행실을 겸비한 한 사람을 선발해서 스승으로 삼고 궁중에서는 항상 칭하기를 ‘사부(師傅)’라고 하였으니 그 임무가 막중하다 하겠다. 어느 해에 집현전(集賢殿)에 명하기를 “궁중(宮中)에 학도(學徒)가 많아서 한 사람의 교관(敎官)이 감당할 수 없으니 마땅히 신중을 기하여 간택하도록 하라.” 하니, 모두 적합한 사람으로 생원이 한 사람 있다고 하였다. 그는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대래(大來)인데, 학문이 이미 정밀하고 또 효성으로 인하여 그의 이름이 조정에 알려졌다는 것으로 건백(建白) –원문빠짐- 하였다. 상이 또 승정원에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적합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를 명소(命召)하였다. 선생이 이 당시에 충청도(忠淸道) 결성현(結城縣)에 살면서 모부인(母夫人)을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조정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의리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어서 행장을 꾸려 길에 오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노래와 시를 지어서 전송하였다. 조정에 온 지 두어 달이 지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모(某)의 어버이에 대한 효성을 안다. –원문빠짐- 모친을 두고 왔으니, 세월이 가는 것을 아까워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마를 타고 가까운 곳으로 모셔 올 것을 윤허한다,” 하였다. 이에 김공이 역마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훈훈한 화기가 온 집안에 넘쳐 흘렀고 고을 사람들도 흐뭇하게 여겼다. 그렇게 몇일을 보낸 다음 모친을 모시고 오려 하자, 고을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영광스럽게 여기고 한편으로는 섭섭하게 여기면서 시를 지어 주어 작별을 하였는데 그 시를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나에게 서문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나는 공의 족손(族孫)뻘이고 동년(同年)의 자식인데 감히 사양할 수 있겠는가. 대저 사군자(士君子)라면 어느 누가 경전(經典)을 연구하고 글을 읽어서 세상에 나아가 출세하여 자신의 어버이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도(道)와 시기(時機)가 간혹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고 재주와 운명도 흔히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 법이어서 비록 현명한 임금이 위에 계시더라도 좌우의 신하들이 먼저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로 선뜻 임금의 문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수가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재주를 간직하고 도를 품은 채로 초야에서 여생을 마치는 자가 열이면 팔구 명이 되었다. 과거법(科擧法)이 실시된 뒤로 사람들의 벼슬길 진출이 더욱 어려워 졌으니 잘 알지 못한 가운데 경쟁을 하고 한 사람의 눈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낙방하고 마는 자가 상당히 많았다. 가령 옛날의 호걸스러운 선비들을 시험보인다 하더라도 합격할 것인지의 여부는 장담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이 묘령(妙齡)의 나이에 우리 가군(家君)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명성이 자자 하였다. 과거에 응시하자, 동료들이 맨 먼저 등과(登科)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지금까지 아직도 급제하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어찌 밝은 시대를 만나서 위로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아래로는 자신의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공이 가정에서 행실을 닦았는데 조정에서 그를 채용하였고 집현전이 천거 하였다. 상도 역시 공의 효성을 알아서 칭찬을 하였으며 심지어 역마를 주어서 모친을 모셔오도록 하기까지 하였으니 녹봉으로 봉양하기가 충분하고 대궐에 출입하게 된 것을 사림이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 효성이 이 정도에 이르면 가하다고 할 것이니, 어찌 과거에 급제하는 것만 귀하다고 하겠는가 게다가 지금 국가에서는 강경(講經)하는 법을 다시 세워서 선비들을 뽑고 있는 마당에 공이 경문에 밝은것으로 성주(聖主)의 인정을 받았고 --원문빠짐- 합문 내의 종현(宗賢)들이 추대하여 스승으로 삼았으니 경문을 공부하여 활용을 다할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 하겠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일이 어찌 여기에만 그치고 말 뿐이겠는가 공은 힘쓰도록 하시오.
출합(出閤): 왕의 자녀들이 장성하여 결혼하면 궁을 나가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동년(同年): 같은 해에 함께 과거에 급제한 자들을 가르키는 말로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동기생(同期生)의 개념이다. 출전: 육선생문집(취금헌 박팽년)
출전 : 육선생유고 [六先生遺稿] 조선 세조 때의 사육신(死六臣)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의 시문을 엮은 3권 3책. 규장각도서, 국립중앙도서관 ·단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박팽년의 7대손 숭고(崇古)가 사육신의 유문(遺文)을 모아 편집하고, 1658년(효종 9)에 충청도관찰사 이경억(李慶億)이 간행하였다. 정조 때 보각(補刻), 1878년(고종 15)에 중간(重刊)하였다. 권1은 박팽년의 유고, 권2는 성삼문의 유고, 권3은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의 유고로 되어 있다. 책끝에는 사육신의 필적(筆跡)과 소전(小傳)이 붙어 있다. 책머리에 조경(趙絅)의 서문이 있고, 책끝에 김상헌(金尙憲) ·이경억 ·박숭고가 쓴 3편의 발문이 있다
2. 참판공(휘 지사) 1)묘역 소개 (2004. 11. 안사연 방문시 촬영, 발용(군) 제공)
▲ 참판공(휘 地四) 묘소
▲ (휘 地四) 묘비
3.김응하(金應河) 1580(선조13)∼1619(광해군11). 조선의 문신. 자는 경희(景羲), 철원군 어운면 갈원동 하갈리에서 안동김씨인 아버지 김지사(金地四)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나, 14세에 전염병으로 양친을 잃고 동생 응해(應海)와 함께 자라면서 사냥을 즐겨 맨손과 단검으로 범과 돼지를 잡았다고 한다. 키가 8척에 힘이 세어 장사로 알려졌다. 1604년(선조37) 25세에 무과(武科)에 급제, 말직에서 전전하다가 병조판서 박승종(朴承宗)의 추천으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가 1608년 박승종이 전라도 관찰사가 되자 그의 비장(裨將)으로 기용되었다. 31세 때 선천 군수를 하면서 청렴하게 백성을 다스렸다. 1610년 다시 선전관, 이어 경원판관(慶源判官)·도총부경력(都摠府經歷)·삼수군수(三水郡守)·북우후(北虞候) 등을 역임했다.
광해군 10년(1618)에 만주에서 누루하치가 후금국을 세우고 명나라를 침범하자 명에서는 건주위를 공격하기 위하여 조선에 원군을 청하였다. 김응하는 이 때 명나라의 원군으로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 휘하에 들어갔다. 이듬해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鴨綠江)을 건넜다. 3월 명나라 도독(都督) 유정(劉綎)이 명군 3만을 거느리고 부차령(富 車嶺)에서 패전하여 자결하자 조선군(朝鮮軍)은 6만의 적군과 대전케 되었다. 그런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우영장 이일원(李一元)은 달아났고, 그는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군 분투 끝에 전사하고 휘하 군사는 괴멸했다. 1620년(광해군12) 명나라 신종(神宗)에 의해 요동백(遼東伯)으로 추봉(追封)됨과 동시에 처자에게는 은(銀)이 하사되었고 조선에서는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묘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東松邑) 하갈리(下葛里) 山(軍糧洞) 에 있다.
*후손들이 안동김씨에서 갈리어 철원김씨의 시조로 삼았다고도 한다.(철원군청 홈페이지 자료 기록내용)
철원(鐵原)의 포충사(褒忠謝), 종성(鍾城)의 행영사(行營祠), 경원(慶源)의 충렬사(忠烈 祠), 선천(宣川)의 의열사(義烈祠)에 제향(祭享)되었었는데 지금은 그의 고향인 철원 포충사에서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에는 철원의 유림이 주관하는 제향을 올리고 있다. 그의 묘정비는 송시열이 지었고, 사헌부 지평인 박태웅이 글씨를, 영의정 김수항이 제자를 썼으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5호이다. 영의정에 추증(追贈) 되었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621년 9월에 훈련도감을 시켜 김응하의 행적을 적은 <충렬록>을 간행하였다. 그의 행장록이 남아 전한다.
<묘소> (2004. 11. 16. 안사연 참배시 촬영)
<묘비>
+ <김응하 장군 묘역>
<신도비>
1) <신도비 소개> (2005. 10. 23. 발용(군) 제공)
소 재 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東松邑) 하갈리(下葛里) 山(軍糧洞) 건립연대 : 1899년(고종 광무 3) 찬 : 조경(趙絅) 서 : 이유승(李裕承) 전 : 조희일(趙熙一) 추기(追記): 정기회(鄭基會) 추서(追書): 김동수(金東壽) 비규모(碑規模): 총고 328cm, 비고 188cm, 폭 92cm, 후 27cm 서자경(書字徑): 전자(篆字) 12.0cm, 음기(陰記)2.1cm, 추서(追書)1.5cm 재질(材質) : 개석(蓋石) 화강암, 비신(碑身) 대리석, 대석(臺石) 화강암
김응하 신도비는 철원서 양지리로 가는 464번 국도에서 군부대를 통과 후 군량동으로 가면 김응해(金應海) 신도비가 있는 우측 산에 있다. 1899년에 개수한 이비는 비좌 개석(碑座蓋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대석은 문양이 없이 단조롭고, 대석에는 복연(覆蓮)과 상단에 당초문(唐草紋), 하단에 연화문(蓮花紋)과 목단화(木丹花)가 있는데 장방형 대석위에 세워져있다. 비의 마멸상태는 양호하나 앞면에 총탄흔적이 30곳과 뒷면에 3곳이 있고, 우측면에는 위에서 아래로 금이 가고 있다. 신도비 앞에는 하마대(下馬臺)가 있다. 묘소는 의관장(衣冠葬)으로 상석ㆍ향로석ㆍ족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이 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 건립된 비좌 개석의 묘표가 있다. 정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의 묘소는 동송읍 하갈리 여우산(如愚山)에 있으며 비좌 개석의 묘표는 1738년(영조 14년) 건립되었고, 비문은 현손 김유(金濰)가 지었다.
<신도비 탁본>
皇命 詔贈遼東佰 本朝贈領議政諡忠武金公神道碑銘 皇命 詔贈遼東佰 本朝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觀象監事行通政大夫宣川郡守兼平安道助 防將諡忠武金公神道碑銘 幷書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兼□□判書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成均館事五衛都摠莩摠管 世子右賓客趙 絅撰 崇政大夫前行吏曹判書□□ 經筵春秋館同知成均館事李裕承 書 資憲大夫前工曹判書同知成均館事趙熙一 篆 (後略)
황명(皇命) 조증요동백(詔贈遼東佰) 본조(本朝) 증영의정(贈領議政) 시충무(諡忠武) 김공(金公) 신도비명(神道碑銘) 황명(皇命) 조증요동백(詔贈遼東佰) 본조(本朝) 증대광보국숭록대부(贈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영경연관상감사(兼領經筵觀象監事) 행통정대부(行通政大夫) 선천군수(宣川郡守) 겸평안도조방장(兼平安道助防將) 시충무(諡忠武) 김공(金公) 신도비명병서(神道碑銘幷書)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겸□□판서(兼□□判書) 판의금부(判義禁府) 경연춘추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성균관사(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成均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莩摠管)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 조경(趙絅)이 글을 짓고, 숭정대부(崇政大夫) 전행이조판서(前行吏曹判書) □□경연춘추관(□□經筵春秋館)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이 승(李裕承)이 글을 쓰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전공조판서(前工曹判書)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조희일(趙熙一)이 전액을 쓰다.
(후략) 위 정부인 파평윤씨의 비문을 쓰신 김유(金濰) 선조님은 안동김씨 두 번째 족보인 기미보(1739년)의 서문을 쓰신 분입니다.
김유(金濰) 숙종(肅宗) 36년 (경인, 1710년), 증광시(增廣試) 병과29(丙科29) *인적사항 : 생년(生年) 을축1685(乙丑1685). 자(字) 여즙(汝楫).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가족사항 : 부(父) 김중우(金重禹), 조부(祖父) 김세귀(金世龜), 증조부(曾祖父) 김익련(金益鍊), 외조부(外祖父) 이강(李綱), 처부(妻父) 정형익(鄭亨益), 제(弟) 김호(金浩), 숙(叔) 김중희(金重熙), *이력 및 기타사항 : 소과(小科) 1702(임오) 생원시, 전력(前歷) 통덕랑(通德郞), 관직(官職) 우윤(右尹) <참고자료 : 철원금석문대관 2004>
2) 주요 사진 자료 소개 (1)영정 (철원군 교육청 소장.2002. 3.19. 영환(문) 제공) <영정>
(2) <친필>(국사편찬위원회 소장. 2002. 4.11. 태서(익) 자료 발견. 제공))
(3)묘비석 탁본 (2002. 2. 19. 규장각 소장. 항용(제) 제공)
(4) 충렬록 소개 (2002. 6. 7. 소장자 태영(군) 자료, 발용(군) 사진 제공)
<충렬록> (1621년 작. 목판본)
<충렬록> (1991. 부사공파 간행본)
<충렬록 내부 사진 자료 소개> (2004. 6. 18. 은회(익) 제공) 출전:고미술 네트워크
*<충렬록 소개> (2004. 11. 6. 영윤(문) 제공) 忠烈錄<古 貴 923. 55-G417c> 朴承宗 編, 1621년(광해군 13년) 간행 2권 1책, 목판본, 20. 7cm. x 32. 7cm . 1619년(光海君10) 明의 요청으로 建州 後金을 치는데 원병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전사한 宣川府使 金應河(1580-1619)의 공훈宣을 기리려고 편찬한 책. 목판본으로서 간행 년대는 이이첨이 쓴 서문의 刊期로 볼 때 光海君 13년(1621)으로 추정된다. 간행된 시기가 비교적 오래된 탓인지 책장의 4면이 상당히 훼손되어 있다 서두에는 大北派의 영수로서 정국을 주도하던 李爾瞻의 서문이 실려 있다. 당시 後金의 기세는 날로 극성 하여 明은 遼東의 대부분을 失陷당한 상황에서 임진왜란에도 참전한 경험이 있던 楊鎬 , 劉綎 등을 지휘관으로 삼아 大軍을 일으켜 후금의 본거지를 토벌하려 했다. 동시에 조선에 대해서도 원군의 파병을 종용하였는데 光海君은 마지못해 姜弘立, 金景瑞 등에 게 약 1만여의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게 했으나 '深河의 전투'에서 朝明연합군은 대패 하고 강홍립 등은 후금군에 투항했던 것이다.
강홍립 등의 투항은 明의 의구심을 더하 기에 충분했고 동시에 出兵 회피를 비난했던 조선의 在野 사대부들을 격동시켰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서 '金應河가 결사항전하다가 전사했다'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는 조선정부로서는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는데 이러한 논리는 이 책 의 전면에 흐르고 있다. 곧 책 전체가 김응하를 찬양하는 내용 일색으로, 光海君에게 김응하를 顯彰하도록 요청하는 내용인 [進忠烈錄箋], 朴承宗이 쓴 祭文, 朴希賢이 쓴 傳記文 성격의 [金將軍傳], 이이첨이 쓴 [哀金將軍歌], 韓纘男이 쓴 발문, 沈喜壽 朴 弘耉 趙挺 李好閔 柳希奮 李慶全 李廷龜 尹昉 柳夢寅 洪命元 李 光 權盼 金 李安訥 등 당시 요인들이 쓴 추모시 등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밖에도 함께 참 전한 명나라 장수들과 전사한 將卒들을 추모하는 내용으로 쓴 [祭劉都督文], [祭喬遊 擊文], [戰亡將士賜祭祭文]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金將軍傳]에서 '그가 後金軍의 칼을 맞고서도 버드나무에 의지해 끝까지 항전했다'라든지 '죽어서 시신이 되어서도 손에서 칼을 놓지 않았으며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라는 이야기를 후금 병사의 傳聞으로 전하고 있는 것 등은 김응하의 공훈을 강조하려는 본서의 의도에서 볼 때 주목되는 대목들이다. 이것은 책의 도처에서 李廷龜를 위시한 非北人系 학인들 이 후금군에게 투항했던 姜弘立 金景瑞에 대해 가차없이 매도하고 있는 것과도 크게 대조되는 것이다.
요컨대 본서는 17세기 전반 '明淸交替'라는 국제적 전환기에 극히 미묘했던 조선과 명의 관계, 당시 지식인들이 대부분 지녔던 華夷觀의 실제적 모습, 그리고 외교문제를 둘러싼 조선 조정의 정치적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한명기)
(5)포충사 <철원 포충사 전경> (2003. 6. 16. 태서(익) 제공) (6)<김응하장군 묘정비 소개> (포충사 경내)
<묘정비> (2004. 10. 발용(군) 제공)
<묘정비 탁본 (2005. 10. 3. 발용(군) 제공)>
1)위치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278번지( 현위치 화지리 산1-1) 2)지정번호 : 강원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 105 호 3)개요 : 요동백 김응하 장군묘정비는 조선조 광해군때(1619) 명나라군 주위의 반란을 진입하기 위하여 조선 원군의 좌영장으로 출정하여 이름을 떨친 충무공 김응하 장군의 무훈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9년(1683)에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향교골(전 철원부 서화전리 일봉산 밑 역촌동)에 세운 기념비이다. 화강암의 석재를 사용하여 정면을 응시한 거북이 조각받침을 한 위에 250cm의 높이와 폭 98cm, 두께 33cm의 사면 비석으로 장군의 일대기를 현종 10년(1669) 6월 우암 송시열(좌의정)의 글과 사헌부 지평 박태유의 글씨에 영의정 문곡 김수향의 서제자를 곁들여 제작하였다. 당초에는 화지리 향교골 포충사에 함께 있었으나 6.25의 전화로 인하여 포충사우는 소실되고 비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 고장 출신으로 육군 제3군사령관이었던 이세호 장군이 1974년 2월 사령부 연병장으로 이전보호중 1984년 4월 3일 철원의 유생 및 철원군수의 노력으로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곡암산 기슭인 철원읍 화지리 산 1 -1번지에 봉안하였다.
褒忠詞廟庭碑(포충사묘정비) 左議政 尤菴 宋時烈 撰(좌의정 우암 송시열 찬)
(부사공 19대손 재원 역)
--신종황제 46년 만력 무오년(서기 1618년)에 건노(여진족 후금으로 뒤에 청이라 함)가 반하여 크게 천촉과 요○지방(현재 성도 중경 부근과 요동 북경 부근일대)의 군병을 발하고 도독 유정과 유격장군 교일기를 보내 정벌케 하고 우리나라에 청병하니 조선에서 2만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강홍립으로 원수를 삼고 김경서로 부원수로 삼아 유 교 이장과 힘을 합하여 밤을 낮삼아 적을 치게 하니 이때 장군은 선천군수로 좌영병을 거느리고 경서군에 예속되었다. 이듬해 기미년 2월 21일 요하를 건너 虜地(노지)에 들어가 부차령에 이르니 때에 황제가 연로하여 내관(내시)이 정무에 참여하고 전선에서는 전군의 행렬이 계속되지 못하고 또 모든 부대가 각자 공을 다투어 경진하다 패하니 部督(부독)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고 아군이 드디어 虜(노)와 더불어 충돌케 되니 장군은 수하병 3천명을 이끌고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가 지휘하여 진을 벌릴 때 신기가 평상시와 같이 안휴하며 진이 이마 이루어지매 홍립에게 고하여 말하되 속히 우영장군 이일원에게 명하여 힘을 아울러 마저 싸우게 하라. 홍립이 우영장군 이일원으로 하여금 우영병을 이끌고 서로 돕게 하니 장군이 일원에게 이르기를 아군이 세약하니 험한 곳을 택하여 지형 지물을 이용치 않으면 반드시 패하리라 일원이 불응하였다. 적 수천기가 좌우영사이를 횡단하니 일원은 달아나고 조금있다 적 6만이 우리 군병앞 1리밖에 진을 칠새 정예로 뽑아 적의 앞으로 진격하여 장군이 명하여 포수로 전례를 삼고 일시에 총을 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적병이 퇴각하기 세 번에 이르렀다. 이때에 교 유격장군이 패하여 홍립진에 있다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귀국위 보졸이 철기와 더불어 평지에서 당함이 능히 이와 같도다.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연기와 먼지가 4면에 차서 총과 활을 쏠 수 없게 되어(당시의 총은 火繩銃(화승총)으로 화승에 부시로 불을 대려서 쏨 큰 바람이 불면 쏠 수 없음)
적이 이에 힘을 다하여 돌격해 오니 아군이 순간에 무너졌으며 이때 장군은 손에 활을 들고 허리에 칼을 차고 홀로 류수하에 의지하니 두 군졸이 가지않고 한사람은 기를 잡고 한사람은 화살을 받들어 (김철현이 甲裏(갑리)에서 箭矢(전시) 300개를 바치고 장군과 同死(동사)를 원하다) 장군이 활을 쏘니 백발백중 맞고 맞으면 반드시 두세놈을 꾀장하니 적의 시체가 堆肥(퇴비)처럼 쌓이고 오랑캐의 귀한 장수가 많이 죽은 고로 적이 몹시 두려워 하였다. 장군이 중갑을 입었는데도 화실 꽂힌 것이 마치 고슴도치 같았으나 능히 뚫으지는 못하였다.
--화살이 이미 다 떨어져 드디어 칼로 적을 치니 一劍之下(일검지하)에 앞놈의 투구 쓴 대가리와 뒷놈의 갑옷 입은 허리가 割然(할연)이 아울러 떨어지니 그 소리가 산이 무너지는 것 같고 칼이 이르는 곳에 적병이 殲滅(섬멸)이라 이에 앞서 홍립이 譯官(역관) 河世國(하세국)을 노진에 보내 항복할 뜻을 전함으로 虜(노)가 급히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니 대저 화친을 권유코져 함이었다. 장군이 불응하고 크게 홍립을 꾸짖어 말하기를 너의 무리는 목숨을 아껴 나라를 저버리고 서로 돕지 않는다. 칼이 또한 부러지매 빈주먹으로 치니 오히려 奮(분)이 스스로 더하였다. 一賊(일적)이 뒤로 돌아 멀리서 창를 던지어 비로소 서서 운명함을 알았으니 이때가 바로 3월 초 4일이었다.
--오히려 칼자루를 꽉쥐고 노한 안색이 勃勃(발발)하여 풀어지지 않으니 적이 놀래어 서로 돌아보며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교 유격장군이 또한 자살하고 홍립 경서 일원 등은 다 갑옷을 벗고 虜酋(노추)에게 항복하니 이때 양진의 시체를 장사하니 장군은 홀로 썩지 않고 칼자루를 오히려 그 손에 굳게 쥐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사당을 龍灣江(용만강 : 압록강)상에 건립하고 廟庭(묘정)에 비를 세우고 유가족을 보살피게 하였다.
그 아우 응해가 형이 평상시 착용하던 의복으로 용만강상에 招魂(초혼)하고 (초혼시 “나 여기 나간다. 어서 가자”하는 장군의 음성이 낭낭하였다는 전설이 있음) 돌아와 그 의복으로 철원 선영하에 장례하니 그때 문인들이 다투어 挽狀(만장)을 썼다. 이듬해 경신년에 신종황제께서 거룩한 詔書(조서)를 보내고 벼슬을 증하여 요동백을 봉하고 유가족에게 백금을 하사하며 장군의 충절을 사람에게 계몽하는 등 대단히 행사가 놀라왔으며 그 사실이 충렬록(忠烈錄)에 다 기재되었고 그 후 潛谷(잠곡) 金相國(김상국)이 장군에 관한 사기와 전기를 수집하여 상하권(忠烈錄)을 작성 편입하였다. 국조명신록에 장군의 신장이 8척이요 언어가 적었으며 蓋世(개세)의 기품으로 음주가 數斗(수두)에 이르러도 志氣(지기)가 어지럽지 않고 용력이 절륜하여 18세시에는 맹호를 맨손으로 잡았는데 이때부터 시골 사람들이 장군이라고 별명을 불렀다. 또 금전을 탐내지 않음이 흙을 보는 것 같이하고 색을 피하기를 怨讎(원수)같이 하니 참된 호걸이요 위대하고 굳센 대장부라고 하겠다.
--집에 있을 때는 부모에게 효하고 동기간에 우애하고 14세되든 해에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임란중에 돌아가셔서 장지를 구하지 못하던 중 異僧(이승)이 지나가다가 그 슬퍼함을 보고 장지를 택하여 장사케 하였는데 그 그 장제의 예절이 비록 經生學士(경생학사)라도 이 보다 더 잘할 수가 없었다. 弟(제) 應海(응해)와 같이 힘써 농사를 짓고 낮이면 사냥하고 밤이면 병서를 공부하였다. 관찰사가 크게 철원에서 무사를 소집하여 재주를 시험하였는데 그 때 장군의 나이 극히 어렸으나 문득 활을 쏠 때마다 과녁을 맞추니 관찰사가 매우 기특하게 여겨 무과보기를 권하여 마침내 급제하였고 萬曆(만력) 乙巳科에 다시 선전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득과 손실 우대와 천대에 관심이 없어 항상 마음이 담담하였다. 白沙(백사) 李恒福(이항복)이 특별히 변방 수령으로 천거하여 임지로 떠날 때 貴家女(귀가녀)를 소개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 때 장군이 사절하며 말하기를 그 여자를 처와 동등으로 대우하면 명분이 紊亂(문란)할 것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드시 처보다 우대함을 바랄 것이다. 하고 頑强(완강)이 거절하였다.
--장군이 장년시에 선조상을 당하였는데 그때 군중에 聲技繁華(성지번화)한 중에도 주색을 멀리함이 엄하였으며그 몸가짐과 행동을 절제함은 근엄하였다. 효종대왕 때에 弟(제) 應海(응해)가 或逆獄(혹역옥)에 연락이 있지 않았나 의심받은 일이 있었는데 왕께서 此人(차인)은 응하의 弟(제)이며 일찍이 병자호란 때에 군병이 패하니 스스로 목을 찔러 亂屍中(난시중)에 기절한 것을 구출하여 소생한 일이 있는 사람인데 반드시 나라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라 하여 즉석에서 북병사를 제수하였다. 대저 광해조 때에는 의리가 밝지 못하였으나 장군에 대하여는 감히 欽尙(흠상 :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는 등 행사를 말함)을 아니하지 못하였고 戎虜(융노)에 이르러서도 또한 장군의 충절에 탄복하였다.
--천자께서 惻然感動(측영감동)하여 이미 기재한 바 褒寵(포총 : 포는 표충(表忠), 총은 寵愛(총애)이 훌륭하였고 我朝(아조)에서는 역대왕의 旌褒事業(정포사업)이 극진하니 이는 前古(전고)에도 드믄 일이다. 崇禎(숭정) 정묘년에 장군을 모신 龍灣廟(용만묘)를 청나라가 헐어달라는 요청에 의하여 비와 함께 건물을 철거한 고로 今上王(금상왕) 병오년에 金應敎萬均(김응교만균)이 철원부사 당시에 비로소 廟屋(묘옥)을 지어 忠魂(충혼)을 편안히 모시게 되었고 당시 군수 世龜(세구)와 병사 柳斐然(류비연)은 장군의 내외손인데 비를 세움에 있어 비문을 청해 옴에 기록하기를 대저 장군에 대하여 논평컨대
--장군의 絶倫勇力(절륜용력)으로 弓馬(궁마 : 무관)에 종사하였는데 적은 일에도 항상 勤愼하여 家道(가도)가 매우 바른 즉 그 근본이 또한 확립되었고 출신하여 官(관)이 있으면서도 待遇(대우)의 優劣(우열)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美童(미동) 官妓(관기) 官婢(관비) 등을 멀리하였다. 그 修身(수신)함이 또한 확고하였고 갑자기 대적을 만나 일만군병이 魂飛魄散(혼비백산)하여도 침착하게 진을 치고 몸을 던져 적을 무찌르니 그 용력이 또한 크다. 적이 화친을 청하여 왔어도 듣지 않고 마침내 전사하니 그 의리가 또한 바르다. 삼군을 激動(격동)시켜 적을 향하여 다투어 전사하고 한사람도 발길을 돌려 물러서는 자가 없었은 즉 가히 삼군의 死力(사력)을 얻었다 하겠다. 柳河(류하)에 의지하여 적을 쏘고 화살이 떨어지면 칼로치고 칼이 부러지면 주먹으로 치니 가히 百夫(백부)의 防禦(방어)가 되었다. 전사 후 오히려 칼을 쥐고 안색이 산 사람같았고 시신이 오래토록 썩지 않았으니 그 충절하고 굳센 혼백이 또한 가히 죽엄을 따라 없어지지 읺고 영구히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이 문장이 장군의 위대함을 표현함에 부족하도다. 오직 君臣有義(군신유의) 父子有親(부자유친)의 大倫(대륜)과 천지간에 차있는 호연한 의기가 한데 뭉쳤으니 이른바 국민으로서 떳떳한 자라 하겠노라. 우리나라가 皇朝(황조)와 같이 3백년을 내려오며 신종황제에 이르러 壬亂時再造之恩(임란시재조지은)으로 말할 진대 의리로는 비록 형제지간이나 친 부자와 다를 바 없으니 우리나라 전국토의 一草一木(일초일목)에 이르기까지 帝德(제덕)이 힘을 입지 않은 자 없건마는 저 홍립 경서는 감히 밀지 운운하여 大義(대의)를 저버리고 逆(역)에 從(종)하여 我東方禮義之國(아동방예의지국)으로 하여금 禽獸(금수)의 지경에 빠지게 하였으니 장군의 전사가 없었더라면 장차 천하후세에 무슨 말로 從征之義(종정지의 : 원병을 파견진의)를 변명하리요. 그러면 장군의 전사는 천하의 大義(대의)를 밝혔고 천하의 大經(대경)을 세웠으니 日月(일월)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 기운이 滅(멸)하지 않고 山岳(산악)이 무너지지 않으면 그 節槪(절개)가 없어지지 않고 河海(하해)가 마르지 않으면 그 功(공)이 이지러지지 않으니 하늘이 장군을 이 세상에 生(생)케 함은 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천하만세를 위함이요 춘추대경에 주황실을 높이고 夷狄(이적)을 배척하든 공맹의 사상을 재실천케 함이니 天(천)이 이미 장군에게 生(생)을 주었은 즉 하늘이 또한 생을 거둠이라. 혹자는 홍립이 구원치 않아 장군이 전사하였다고 원망하나 홍립의 힘이 어찌 장군의 만고충절에 도움이 되리요 장군의 諱(휘)는 應河(응하)요 자는 景羲(경희)니 조상 때에 안동에서 철원으로 이주하였으니 경순왕의 후손이요 고려 명장 方慶(방경)은 11대조가 된다. 부친은 증호조참판 地四(지사)요 萬曆(만력) 8년경진3월초3일에 탄생하고 40세되던 해 3월초4일에 전사하니 廟(묘)는 철원부 보개산 동쪽 화전리와 선천, 종성, 창성에 있다. 崇禎(숭정) 乙酉(을유) 6월 일(서기 1669년)
김응하 묘정비 원문 ( 2005. 1. 31. 주회(안) 제공) 출전 : <한국문집총간>
詔贈遼東伯金將軍廟碑
神宗皇帝四十七年萬曆戊午。以建奴匪茹。大發川蜀遼?兵。遣劉都督綎,喬游擊一琦以征之。徵兵于本朝。本朝發二萬兵。以姜弘立爲元帥。金景瑞副之。與劉,喬二將刻日協攻。時將軍以宣川郡守。領左營兵。隷景瑞軍。己未二月二十一日。渡遼入虜地。至富車嶺時。皇帝已倦勤。??用事。軍興不繼。又諸軍輕進失利。都督自縊死。我軍遂與虜相當。將軍以手下兵三千。策馬直前。指揮擺陣。神氣整暇。陣旣成。告弘立曰。速令右營協力迎戰。弘立使右營將李一元擡營相助。將軍謂一元曰。我軍若不據險。必敗矣。一元不從。賊數千騎橫截兩陣間。一元遁去。旣而賊六萬與我對陣一里之外。抽發精銳。直犯其前。將軍以砲手爲前列。一時放丸。聲振天地。賊兵退却。如是者三。喬游擊時敗還弘立壁。望見歎曰。貴國步卒與鐵騎平地相當。乃能如此。俄而大風忽起。煙塵四塞。砲矢不得發。賊乃幷力衝突。我軍立盡。將軍手弓腰劍。獨倚柳樹下。有二卒不去。一人執旗。一人奉矢。將軍矢不虛發。中必疊雙。賊屍成堆。所殺多虜貴將。虜甚?之。將軍?重甲。亦矢集如蝟而不能穿。矢旣盡。遂手劍擊賊。兜頸札腰。?然?落。聲若劈山。每得十蕩而十空。先是弘立送舌人河世國于虜陣。虜急呼我人。蓋欲招誘也。將軍不應。大罵弘立曰。爾輩愛身負國。不以相救也。劍亦折。張空拳。猶益自奮。有一賊從後投?。遂?地而絶。實三月初四日也。猶握劍柄不捨。怒氣勃勃。賊相顧愕?。不敢遽前。喬游擊亦自殺。弘立,景瑞與一元等。皆解甲降。奴酋使?兩陣死屍。將軍獨不腐。劍柄猶在其握矣。朝廷遙贈領議政。建廟於龍灣江上。立碑廟前。復役子孤。其弟應海以遺衣招魂於江上。以其衣歸葬鐵原先塋之側。一時文士爭相?挽。翌年庚申。神宗皇帝下詔贈爵封遼東伯。賜妻子家白金。其誥命引重甚盛事。具載忠烈錄。其後潛谷金相國堉復收其終始。編入國朝名臣錄。將軍身長八尺。言語寡默。氣岸軒然。飮酒數斗。志氣不亂。勇力超絶。十八。手擊殺猛虎。自是鄕人輒呼以將軍而不名也。又能視金如土。避色如仇。眞魁傑偉毅大丈夫也。居家孝友出常。十四。父母皆沒兵荒中。無以營壙。有異僧見其哀號。指葬處以葬。其葬祭之禮。雖經生學士。不能過也。與弟應海力田自給。晝則射獵。夜讀兵書。有觀察使至鐵原。大集武士試藝。將軍年甚少。輒矢發的破。觀察大奇之。仍勸就試。遂捷萬曆乙巳科。再爲宣傳官。其於得失崇?。泊如也。白沙李相恒福超薦爲邊守。將行。有以貴家女來?者。將軍謝曰。彼貴家女。將敵之歟。名分紊矣。?之歟。則彼必望矣。壯歲當宣廟喪。佐幕于繁華聲妓中。絶酒色甚嚴。其持身制行類如此。孝宗大王朝。弟應海辭連逆獄。上曰。此應河之弟。又嘗與虜戰。兵敗自刎。必不負國。卽拜爲北兵使。蓋當光海朝。義理晦塞。於將軍莫不歆尙。至於戎虜。亦且歎服。卒乃皇上褒寵。而我聖考德音又如此。此振古之所未有也。崇禎丁卯。議者以龍灣廟有不便者。幷其碑撤去之。今上丙午。金應敎萬均宰鐵原府。始作廟屋而妥侑焉。今郡守世龜,兵使柳斐然。內外孫也。爲立?碑。來請文以記之。蓋嘗論之。將軍以絶倫勇力。從事弓馬。而細行旣謹。家道甚正。則其本旣立矣。出身?官。寵辱不驚。奴?婢膝。視之若?。則其守亦確矣。猝遇大敵。萬人魄奪。從容擺陣。挺身?戰。其勇亦大矣。賊欲無戰。呼與爲好。聽若不聞。卒隕其身。其義亦正矣。激動三軍。北首爭死。無一旋踵。則可謂得人之死力矣。倚樹射賊。矢盡劍擊。劍折奮拳。可謂百夫之防矣。死猶握劍。?色如生。原?之?。久不?敗。則其忠魂毅魄。又可謂不隨死而亡矣。然此皆不足爲將軍之大也。惟君臣父子之大倫。天之經地之義。而所謂民?者也。我朝歷事皇朝三百年矣。而及至神宗皇帝再 土宇。則義雖君臣。而恩實父子。環東土一草一木。誰非帝德之所濡。而彼二?者。乃敢稱有密旨。去順效逆。使我禮義之邦。擧淪於禽獸之域。?無將軍之一死。則將何以有辭於天下後世哉。然則將軍之死。所以明天下之大義。立天下之大經。日月不墜則其氣不滅。山岳不頹則其節不泯。河海不竭則其功不虧。然則天之所以生將軍者。不但爲我東也。將爲天下萬世也。爲春秋尊周攘夷之義也。天旣有所爲而生之。則亦有所爲而殺之也。或者乃咎弘立不救而致其死。烏足以知將軍哉。將軍諱應河。字景羲。世爲慶州人。慶州之金。實王者後。高麗名將方慶。其遠祖也。其考贈承旨地四。將軍以萬曆八年庚辰三月初三日生。死時年方四十。廟在鐵原府寶蓋山東西花田里云。時崇禎己酉六月日。
부사공 19대손 재원님의 번역에는 나와있지 않으나 묘정비 원문에는 『장군의 휘는 응하요, 자는 경의이니 대대로 경주 사람이다. 경주김씨는 실로 왕자의 후손이며 고려의 명장 방경이 그 원조이다.』라고 경주김씨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송시열의 저의가 의심스러운 부분
(7) <고 김사달 박사(안렴사공 파)의 김응하 장군 관련 묵서> (2002. 6. 25. 태영씨(군). 자료 제공)
<爲戒子姪及鄕黨少年書> (김사달 박사 서. 충렬록 번역본 내. 김응하 장군의 계언) <爲戒子姪及鄕黨少年書>(위계자질급향당소년서) 指目之家勿爲出入 (지목지가물위출입) : 지목받는 가정에는 함부로 출입하지 말 것 鄕人雖惡絶口不言 (향인수오절구불언) : 시골사람들이 설사 추하더라도 절대로 말하지 말 것 凶悍奴僕疾不己甚 (흉한노복질불기심) : 흉한한 노복일지라도 너무 미워하지 말 것 悖慢庶孼隱忍善待 (패만서얼은인선대) : 거칠고 게으른 첩의 자식일지라도 은혜로이 참고 잘 대우할 것 妾雖勝妻等不可紊 (첩수승처등불가문) : 첩이 아무리 처보다 좋더라도 평등하게 대하여 문란하지 않게 할 것 汝輩違此五條則禍厄立至愼之愼之(여배위차오조즉화액입지신지신지) : 너희들은 이 五條를 어기게 되면 禍厄이 곧 닥칠것이니 조심하고 또 조심할 지어다. 병진(176년) 늦가을에 63세 김사달 書
(8) <칠만암 소개> (2002.3. 19. 태서씨(익) 자료 조사. 제공)
이곳은 광해군때 명장 김응하, 김응해 두형제가 무예를 닦던 유서깊은 곳이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주변경치가 마치 수만개의 바위를 한 곳에 모아 놓은 것처럼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칠만암이라 칭했다 함. *칠만암 사진 소개 (2004. 11. 13. 윤만(문) 제공)
(9) <김응하 장군 추모가> (2002. 7. 5. 윤만(문) 조사. 항용(제) 제공)
(10) <친필 서찰 해독 및 해석> (가)친필 서찰 1-국사편찬위원회 소장본
*발견일 : 2002. 4. 11 *발견자 : 김태서(익) *소장처 : 국사편찬위원회 *작성연대 : 미상 *해독 맟 해석자 : 김익수(제). *윤문 및 편집 제공 : 김항용(제)
(1) 한문 원본 尙之疏讒已回啓恐鏃. 上裁也未知如何. 曰更之鈒 百官同之. 雖水無官 烏得免雪. 唯在夜中相敍. 尙之必犯我. 非細奈何. 卽 應河 頓
(2) 번역문 상(尙)의 상소에서 참소하니 이미 회계(回啓)에서 화살처럼 찌를까 염려됩니다. 상감께서 재가하셨는지 어떤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말에 의하면 다시 찌르려한다고 하며 모든 관료들이 그에 동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비록 수군에 관원이 없다한들 어찌 설욕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밤중에 있으면서 서로 얘기해 보았더니 상(尙)이 꼭 나를 범하고자 하니 조금이나마 한탄하지 않고 어찌하겠습니까.
즉시 응하(應河) 올림 *주1) 수신자 : 미상임. *주2) 서찰속의 상(尙) : 김상헌으로 추정. *주3) 지은 연대 : 1610-1615년으로 추정. 김상헌은 공보다 10세 위로 1608(광해 즉위)에 문과한 후 정언. 직제학의 관직에 있다가 1615(광해 7)에 <공성왕후책봉고명사은전문>의 문제로 파직되었고, 그 후 1624(인조 2년)에 등용됨. 따라서 김상헌의 재직기간인 1610년에서 파직시인 1615년 사이로 추정됨. *주4) 회계(回啓) : 임금의 下問에 대해 심의하여 상주(上奏)하는 것.
(나)친필 서찰 2 -한국정신문화원 소장본 (2003. 8. 1. 발용(군) 제공)
<서찰 해독 및 번역문> 원문 해독 및 해석 : 2004. 9. 1. 익수(제) 1) 해독 원문 西南覓修奉晤 無際悵恨曷極 伏惟中夏 旅宦起止神相 慰昻區區之至 內再從 白鬢殘縣 日事勞碌自憐奈何 門運不幸 若木叔主奄棄 子姪關外悲痛 有不可勝言 而千萬意外 又遭叅議兄主喪 門祚衰薄 已無可言 斯文厄會 至於今日而極 區區痛割 豈但親懿之情而已哉 痛哭何言何言 西土風謠 不幷以南 終無久留之計 稍竢凉生 欲定行止 早晩未可卜也 餘忙甚不備狀禮 壬寅五月初九日 金應河 頓
2)번역문 서남(西南)에서 찾아 뵙고 얘기를 나누어 무한히 슬프고 한이 맺힘이 얼마나 했는지 모릅니다. 삼가 한여름에 순무하시느라 거동이 어떠하신지요. 위로해 주신 덕분에 그럭저럭 지내며 육촌은 변방 현(縣)에서 머리가 세어가고 있습니다. 날마다 하는 일이 쓸데없이 애만 쓰니 스스로 가여움을 어찌하오리까. 집안의 운이 불행하여 약목(若木) 숙부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셔서 아들과 조카는 관새 밖에서 비통함을 말할 수 없습니다. 천만 뜻밖에도 또한 참의(叅議)형님의 상을 당하여 문중의 복이 쇠약해졌으니 이미 할말이 없습니다. 사문(斯文: 유림)에도 액을 만난 것이 지금까지도 너무나 구구하게 쓰라립니다. 어찌 다만 지친의 정 뿐이겠습니까. 통곡할 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서쪽지방의 풍문은 남쪽과는 다릅니다. 끝까지 오래 머물 계획은 없습니다. 조금 선선해지면 행동을 정하고 싶으나 조만간은 예정이 없습니다. 너무 바쁜 나머지 예를 갖추어 글월 올리지 못합니다. 임인(壬寅. 1602 선조35) 5월 초9일 김응하(金應河) 돈수
4. 김응해(金應海) 1588(선조21)∼1666(현종7). 조선의 무신. 자는 군서(君瑞). 응하(應河)의 아우. 1616년(광해군8)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도총부도사(都摠府都事)·희천군수(熙川郡守) 등을 거쳐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후금(後金) 정벌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등을 파견하자, 형 응하와 함께 출정하기를 청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20년 강계부사(江界府使), 인동(仁同)·정주(定州)의 부사를 등을 역임했고, 청렴결백으로 유명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별장(別將)으로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수비, 서울로 직행하는 적에 대항해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진로를 막고 고군분투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적에게 포위되자 자결하려 하였으나 부하의 응급구호로 소생했다. 그 뒤 1647년 어영 대장(御營大將)에 올랐다.
<묘역 사진> (2004. 11. 16. 안사연 방문, 발용 촬영 제공)
▲ 김응해 장군 묘소
▲ 김응해 장군 묘비
▲ 김응해 장군 묘역의 석물
▲ 김응해 장군 신도비
<묘역 입구의 신도비>
<김응해 장군 세장비>
▲ 김응해 장군 묘역
<각종 역사 자료 소개> 1) 신도비 소개 (2005. 10. 24. 발용(군) 제공) 소 재 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東松邑) 하갈리(下葛里) 山(軍糧洞) 건립연대 : 1684년(숙종 11) 찬 : 조경(趙絅) 서 : 박경준(朴慶俊) 전 : 박경준(朴慶俊) 비규모(碑規模): 총고 360cm, 비고 232cm, 폭 74cm, 후 23cm 서자경(書字徑): 전자(篆字) 14.0cm, 음기(陰記)2.7cm, 재질(材質) : 개석(蓋石) 화강암, 비신(碑身) 화강암, 대석(臺石) 화강암
김응해 신도비는 철원서 양지리로 가는 464번 국도에서 군부대를 통과 후 군량동으로 가면 김응하(金應河) 신도비가 있는 좌측 산에 있다. 1684년에 건립된 이비는 비좌 개석(碑座蓋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개석 상부좌우에 사자머리를 각(刻)한 것이 섬세하고 대석에는 복연(覆蓮)과 상단에 당초문(唐草紋), 하단에 연화문(蓮花紋)이 있으며 장방형 대석위에 세워져있다. 비의 마멸 상태는 앞면 하부가 심해 일부 판독이 난해하고 뒷면 상부에 총알 흔적이 남아 있다. 묘소는 정부인 동주최씨(東州崔氏)와 합장. 호석ㆍ상석ㆍ향로석ㆍ족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이 있다. 그리고 1761년(영조37)에 건립된 비좌 개석의 묘표는 5대손 김영우(金榮遇)가 비문을 짓고, 윤득양(尹得養)이 해서로 글씨를 썼다.
1) 탁본
統制使金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嘉善大夫三道統制使兼慶尙右道水軍統制使金公神道碑銘幷序 通訓大夫行司憲府持平兼春秋館記注官知製敎 朴慶後 幷篆 書 原任崇綠大夫判中樞府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兼知 經筵春秋館成均館事 世子左賓客趙 絅 撰
(後略)
통제사(統制使) 김공신도비명(金公神道碑銘)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가선대부삼도통제사(嘉善大夫三道統制使) 겸경상우도수군통제사(兼慶尙右道水軍統制使) 김공신도비명 병서(金公神道碑銘幷序)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헌부지평(行司憲府持平) 겸춘추관기주관(兼春秋館記注官) 지제교(知製敎) 박경후(朴慶後)가 전액과 아울러 글씨를 쓰고, 원임숭록대부(原任崇綠大夫) 판중추부(判中樞府)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조경(趙絅)이 글을 짓다.
(후략) <참고자료 : 철원금석문대관 2004>
2) 神道碑文 (2003. 6. 2. 태영(군) 제공) (1)원문
公名應海字君瑞深河之役手一大黃當浴鐵之騎數十萬柳下將軍應河之弟也萬曆丙辰登武科朝廷以其兄壯烈之故不次擢用所居官咸以廉潔稱丙子亂元帥自點建請公爲別將十二月翟不窺正方直走漢京公帥御營軍三百名橫截賊路與戰數十合勝否相當而我無後救敵來曰滋公決意倍城借一馬輒中虜箭而지公徒步倚洞仙巖彎弓而立有五賊繞出公前公射殺三人其中一賊叫躍用劒幾及公身公拔劒竟殺其賊然公氣竭不能耆力賊乘之公自度不能脫乃拔劒自刎及賊退偏裨等覓公於亂屍中猶不暝怒氣勃勃擔而入城用萬金良藥以救之考其袍甲九箭幾洞胸餘無鏃可入處噫兄死於深河弟生於洞仙一生一死雖殊而其誓心天地捨生取義則可謂難兄難弟矣顔平原以後千有餘載弟兄幷節有幾人哉使吾東重於九鼎大呂誰之力耶丁丑八月除副摠管朝廷始審大創之추也出爲慶尙左水使俄遷右兵使辛巳拜平安兵使甲申陞統制使明年除御營大將兼捕盜大將其歲夏特命拜摠戎使辛卯自點獄起公名出賊口遂下理供辭樸直無半辭衛爰書才上上曰應海忠節不減乃兄者賊口誣也其釋之卽拜北兵使公之純忠於是乎益彰徹大鳴其後摠戎大將中樞之命連歲相銜至拜春川府使砥려有加於前癸卯以副摠官上章乞骸骨上不許繼以展掃先墓爲請遂歸鐵原蓋公意則以爲年踰七十國家少安舊臣不於此時歸休何待故一臥不顧其他公可謂賢遠乎人矣吾觀統制爲人口不能道辨唯其忠實心앙於面背丙午二月十五日無疾而觀化卜口先塋之側公系出安東上洛公之後祖諱인兵曹正郞考諱地四贈參判娶虞侯善山金忠老女萬曆戊子生公公生才六歲俱失兩親惟兄弟相依以長公丙子東州崔氏洛厚女生一男一女男克鍊女適進士沈絿銘曰
氣專而勇沈 樹惇而心欽 欽惟其有是 兮滿腔子赫 然丹忠不畏義死不榮幸 生兮確乎介 石之守上格 蒼穹佩符建 節何處不用 氷蘗兮其永垂光于樂石 判中樞府事 龍州 趙絅 撰
(2)번역문 공(公)의 이름은 응해(應海)요 자(字)는 군서(君瑞)이다. 심하(深河) 싸움에 손에 큰 활을 들고 갑옷입은 철기(鐵騎) 수십만을 거느린 유하장군(柳下將軍) 응하(應河)의 아우이다.만력(萬曆) 병진(丙辰)에 무과(武科)에 올랐는데 조정에서 그 형의 장열(壯烈)했던 것으로 해서 차서가 없이 발탁해서 썼는데 가있던 관청마다 염결(廉潔)로 일컬어졌다.
병자(丙子) 난리에 원수(元帥) 자점(自點)이 위에 청해서 공으로 별장(別將)을 삼았고, 十二월에 오랑캐가 바른 방향을 엿보지 않고 바로 중국 서울로 달려오자 공은 어영군(御營軍) 三백명을 거느리고 적의 길을 가로막고 수십합(合)을 서로 싸워 이기고 지는 것이 서로 같았는데 우리에게는 구원병이 없고 적이 오는 것은 날로 늘어났다. 이에 공은 뜻을 결정하고 성을 등지고서 말 하나를 빌려 탔더니 문득 오랑캐의 화살에 맞고 쓰러진다. 이에 공은 도보(徒步)로 동선암(洞仙巖)에 의지하여 활을 당기고 서있으려니 이때 다섯명의 적이 공의 앞으로 돌아서 나오고 있었다. 공이 세사람을 쏘아 죽였더니 그 중의 한 적이 소리치고 뛰면서 칼이 거의 공의 몸에 닿는 것을 공이 칼을 빼어 마침내 그 적을 죽였다.
그러나 공은 기운이 다해여 능히 힘을 낼수가 없게되자 적들이 그 틈을 타서 쳐들어오니 공은 스스로 헤아리기에 능히 벗어날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미 칼을 빼어 스스로 목을 찔렀다. 이윽고 적이 물러간 뒤에 편비(偏裨)들이 어지러운 시체 속에서 공을 찾았는데 오히려 눈을 감지않고 노한 기운이 싱싱했다. 이에 떠메어 가지고 성으로 들어와서 만금양약(萬金良藥)을 써서 구원해 놓고 그 도포와 갑옷을 살펴보니 아홉화살이 거의 가슴을 뚫어서 그 나머지는 화살촉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아 아! 형은 심하(深河)에서 죽고 아우는 동선(洞仙)에서 죽었으니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은 것이 비록 다르나 그 마음으로 천지에 맹세하고 삶을 버려 의리를 취한 것은 가위 난형난제(難兄難弟)라 하겠다. 안평원(顔平原) 이후 천여년에 아우와 형이 함께 절개를 지킨 것이 몇사람이나 되는가. 우리나라로 하여금 구정(九鼎)과 대려(大呂)보다 무겁게 만든 것은 누구의 힘이었던가.
정축(丁丑) 八월에 부총관(副總管)에 제수했고, 조정에서 비로소 큰상처 나은 것을 살펴서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로 내보냈다가 이윽고 우병사(右兵使)로 옮겼고 신사(辛巳)에는 평안병사(平安兵使)에 배하고 갑신(甲申)에는 통제사(統制使)에 승진 되었다가 이듬해에는 어영대장(御營大將)겸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제수 되었으며 그해 여름에 특별이 총융사(摠戎使)에 임명 되었다.
신묘(辛卯)에 자점(自點)의 옥사(獄事)로 일어나서 공의 이름이 적의 입에서 나오자 드디어 죄를 다스렸으나 공사(供事)가 순박하고 정직해서 조금도 거짓이 없었다. 조사한 서류가 위에 올라가자 임금은 말하기를 “응해(應海)의 충절(忠節)이 그 형만 못하지 않으니 적의 말은 거짓이니 즉시 석방하라.” 하고 즉시 북병사(北兵使)에 배하니, 공의 순충(純忠)함이 여기에서 더욱 널리 나타나서 크게 울렸다. 그뒤에 총융(摠戎), 대장(大將), 중추(中樞)의 명령이 해마다 계속 되었고 춘천부사(春川府使)에 이르러서는 힘쓴 것이 전보다 더하였다. 계묘(癸卯)에 부총관(副總管)으로서 글을 올려 사직하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계속해서 선인(先人)의 묘소(墓所)에 성묘할 것을 청하고 드디어 철원(鐵原)으로 돌아갔다.
대개 공의 뜻은 나이가 七十이 넘었고 국가가 조금 편안한지 옛신하가 이 때에 돌아가 쉬지않는다면 무엇을 기다리랴 하고 짐짓 한번 누어서 딴일을 돌아다 보지 않았으니 공은 가위 어진 것이 보통사람과 많이 달랐다. 애가 통제사(統制使)의 사람됨을 보건대 입으로 능히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오직 그 충실한 마음이 낯과 등에 넘쳐 흘렀다. 병오(丙午) 二월 十五일에 병이 없이 세상을 떠나니 선영(先塋) 곁에 장사 지냈다.
공의 계통은 안동(安東)에서 나왔으니 상락공(上洛公)의 자손이다. 조부의 휘(諱)는 인이니 병조정랑(兵曹正郞)이요, 아버지의 휘(諱)는 지사(地四)이니 증참판(贈參判)이다. 우후(虞侯) 선산(善山) 김충로(金忠老)의 딸에게 장가들어 만력(萬曆) 무자(戊子)에 공을 나았다. 공은 난지 겨우 六세에 양친(兩親)을 모두 잃고 오직 형제가 서로 의지 하면서 자랐다. 공의 부인은 동주최씨(東州崔氏) 낙후(洛厚)의 따님으로 一남一여를 낳았으니 남(男)은 극련(克鍊)이요, 딸은 진사(進士) 심구(沈絿)에게 출가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기운은 전일(專一)하고 용맹은 깊으며 세운 것은 공손하고 마음은 조심했네. 조심하는 것은 오직 이것이 있으니 창자에 가득한 빛나게 붉은 충성 이었네. 의리에 죽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고 요행으로 나는 것을 영화롭게 여기지 않았네. 확실하게 돌보다 더 단단하게 마음을 지켰으니 이것이 위로 푸른 하늘에 이르렀네. 부절(符節)을 차고 절개를 세웠으니 어느곳에 빙벽(氷蘗)을 쓰지 않으랴. 그 길이 빛나 돌에 새겨 드리우네.
판중추부사 용주 조경
3) 묘지명(墓誌銘) (2003. 6. 3. 태영(군) 제공) 공(公)의 휘(諱)는 응해(應海)요 자(字)는 군서(君瑞)이다.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요동백(遼東伯) 충무공(忠武公) 응하(應河)의 아우이다.만력(萬曆) 기미(己未)에 명(明)나라 군사가 크게 심하(深河)에서 패했는데 이때 충무공(忠武公)은 힘껏 싸우다가 그 싸움에 죽어서 큰 의리를 천하에 나타냈다.
공은 병자(丙子)의 난(亂)을 당하여 정방성(正方城)을 지키는데 외로운 군사에 후원이 없어 적이 이틈을 타서 처들어와서 스스로 숨을 끊었다. 이것은 살고 죽은 것이 비록 다르지만 다같이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위해서 죽은 것이니 사람들이 이들을 안평원(顔平原)의 형제에 비교한다. 김씨(金氏)는 안동(安東)에서 나왔으니 고려 명장(名將) 방경(方慶)의 자손이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인상(麟祥)이니 장악원정(掌樂院正)이요 조부의 휘(諱)는 인이니 병조정랑(兵曹正郞)이며 아버지의 휘(諱)는 지사(地四)이니 증참판(贈參判)이다. 우후(虞侯) 김충노(金忠老)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만력(萬曆) 무자(戊子)에 낳았다. 공은 일찍 부모를 잃고 형과 서로 의지해서 자랐다. 병진(丙辰)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배했다가 도총도사(都摠都事)로 옮겼고 나가서 희천군수(熙川郡守)가 되었다. 이보다 먼저 충무공(忠武公)에 선천조방장(宣川助防將)으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심하(深河)로 가자 공은 강개(慷慨)히 따라가기를 청했으나 충무(忠武)는 이것을 말리고 말하기를, “형제가 모두 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 했다. 심하(深河)의 싸움에 패하자 공은 가슴아프게 한스러워 하여 밤낮으로 부심(腐心)했다. 경신(庚申)에 통정(通政)의 품계에 승진되어 강계부사(江界府使)에 임명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그 형으로해서 올려쓰는 것을 차서를 따르지 않았다. 갑자(甲子)에 가선(嘉善)에 발탁되어 부령(富寧), 인동(仁同), 정주(定州)등의 고을을 거쳤는데 모두 청렴하고 깨긋하다고 일컬었다. 병자(丙子)에 원수(元帥)의 천거로 별장(別將)이 되어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고 있는데 十二월에 적이 바로 한(漢)나라 서울로 달려가자 공은 경기(輕騎)三백을 거느리고 대로(大路)를 막고 수십합(合)을 싸워 승부를 가릴수 없었는데 공의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이에 공은 걸어서 동선암(洞仙巖)에 의지하여 활을 당기고 서서 세 사람을 쏘아 죽이니 적이 오는 것이 더욱 불어나서 수어 겹을 포위한다. 이에 공은 스스로 능히 벗어날수 없다는 것을 알고 크게 소리치기를 “심하(深河)싸움에 버드나무 아래에 서서 눈을 부릎뜨고 활을 쥐고서 죽은 것이 곧 우리형님 이다. 이제 내가 힘이 다하여 능히 너희를 섬멸하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面目)으로 살아서 우리 임금께 뵈고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우리 형님을 보랴” 하고 드디어 칼을 빼들고 적진(敵陣)을 가로 충돌하여 쳐죽인 것이 몹시 많았고 계속해서 스스로 목을 찌르자 적들은 공이 죽었다고 말하고 비로소 물러갔다. 이때 편비(偏裨)가 어지러운 시체 속에서 공을 찾았는데 노한 눈을 오히려 감지않고 기운이 왕성하다. 이에 떠메고 성으로 들어와서 만금양약(萬金良藥)을 써서 구원 했는데 갑옷 속에서 아홉개의 화살이 거의 가슴을 뚫었다. 공이 이미 깨어나자 군대를 해산 하였다.
정축(丁丑) 八월에 부총관(副摠管)에 제수되고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로 옮기고, 신사(辛巳)에 포도대장(捕盜大將)에 발탁 되었으며 나가서 황해병사(黃海兵使)가 되었다가 평안병사(平安兵使)로 옮겨 중국 조정통사(通使)의 배를 꾸며 보내다가 적신(賊臣) 이규(李硅)의 해를 입어 전감사(前監司) 정태화(鄭太和)와 함께 체포되어 봉성(鳳城)에 까지 이르러 화가 장차 헤아리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공은 정공(鄭公)을 따라 항의하고 굽히지 않아서 일이 중지 되었다. 갑신(甲申)에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되고 이듬해에 통제사(統制使)로 승진 했으며 또 그이듬해는 들어가서 어영대장(御營大將)이 되었다가 총융사(總戎使)로 옮겼다.
신묘(辛卯)에 자점(自點)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공은 무함을 입었으나 임금이 하교하기를 “응해(應海)는 군사가 패하자 자기목을 찔러서 충절(忠節)이 그 형만 못하지 않으니 적의 말은 거짓이다. 특별히 석방하라” 하고 즉시 북병사(北兵使)에 임명하니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두 감격해 날뛰었다. 뒤에 또 총융사(總戎使)가 되고 나가서 춘천부사(春川府使)가 되었는데 이미 돌아오자 공은 탄식하기를, “내나이 七十이 넘었고 벼슬이 높고 녹(祿)이 후하니 분수에 이미 족하다. 또 이제 국가가 조금 편안하니 쉬기를 고하는 것이 좋다.” 하고 드디어 글을 올려서 사직(辭職)할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지 않으므로 성묘(省墓)할것을 청하고
철원(鐵原)으로 돌아가 문을 닫고 손님을 거절하고서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수년동안 한가히 지내다가 병오(丙午) 二월 十五일에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나니 선영(先塋)곁의 간좌(艮坐)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동주최씨(東州崔氏) 장사랑(將仕郞)낙후(洛厚)의 따님으로서 一남을 나았는데 극련(克鍊)으로 조졸(早卒)했는데 증참판(贈參判)이다. 一녀는 진사(進士) 심구(沈絿)에게 출가했다. 측실(側室)의 아들은 석련(碩鍊)이요 딸 맏은 진사(進士) 정취상(鄭就祥)에게 출가 했고 다음은 찰방(察訪) 이수민(李守敏)에게 출가했다. 극련(克鍊)의 아들 세장(世章)은 증판서(贈判書)요 세언(世彦)은 증참판(贈參判)이요 세익(世溺)은 총융사(摠戎使)이다. 세장(世章)의 아들 맏은 중구(重九)이니 병사(兵使)이다. 그아들 준(浚)은 참봉(參奉)이요 광(洸)은 통제사(統制使)이다. 다음 중려(重呂)는 병사(兵使)요 그 아들 윤(潤)은 통제사(統制使)이다. 세언(世彦)의 아들 맏은 중원(重元)이니 통제사(統制使)요 그 아들 형(泂)은 조졸(早卒)했고 집(潗)은 통제사(統制使)이다. 다음 아들 중삼(重三)은 병사(兵使)요 계자(繼子) 서(敍)는 부사(府使)이다. 총융(摠戎)의 아들 맏은 중휘(重徽)이니 부사(府使)요 그 아들 흠(흠)은 어영대장(御營大將)이다. 다음 중일(重一)은 판관(判官)이요 그 아들 완(浣)은 방어사(防禦使)이다.
내가 공을 보건대 처음에는 몸을 버려 나라를 위해서 죽을 뜻을 가졌으니 이는 충성이요 끝에는 벼슬을 사퇴하고 그 만절(晩節)을 온전히 했으니 이는 용맹이다. 충성되고 용맹스러우니 충무(忠武)의 아우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도다. 이에 마땅히 명(銘)을 써야 할것이다.
명(銘)에 말한다.
심하(深河)의 버드나무에는 무지개가 있어 해가 비쳤고, 동선(洞仙)의 돌에는 칼이 있어 피가 날으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았으니 두 어려움이 같은 절개일세. 임금은 그 충성을 힘쓰게 하기 위하여 여러 번 병기를 잡게 했고, 나라에는 외적을 막을 장수가 있는데 머리털이 희게 세었네. 간단한 상소로 고향에 돌아 갔으니 내 뜻을 빼앗을수 없네. 하늘의 기러기는 더욱 멀리가고 높은 바람은 멀리서 불어오네. 후손들이 무관(武官)이 이어져서 산서(山西)가 대마다 나왔네. 철원(鐵原) 가파른 바위에 그 뼈를 묻었다 하네. 돌은 때로 깎아지지만 이름은 없어지지 않으리.
대제학(大提學) 홍량호(洪良浩) 撰
*홍양호 洪良浩 [1724~1802]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본관 풍산(豊山). 자 한사(漢師). 호 이계(耳谿). 초명 양한(良漢). 시호 문헌(文獻). 1747년(영조 23) 진사를 거쳐 1752년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 ·수찬 ·교리를 지낸 뒤 1774년 등준시(登俊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7년(정조 1) 홍국영(洪國榮)의 세도정치가 심해지자 경흥(慶興)부사로 나갔다가 홍국영이 실각한 뒤 한성부우윤 ·대사간을 지내고, 1782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대사헌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 1794년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이조판서가 되고, 1799년 양관(兩館) 대제학을 겸임, 1801년(순조 1) 중추부판사도 겸하였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갱장록(羹墻錄)》 《동문휘고(同文彙考)》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사신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대구형(戴衢亨) ·기효람(紀曉嵐) 등 학자와 교유, 귀국 후 고증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지방관으로 나가서는 산림녹화에 주력하였고, 1764년(영조 40)에는 일본에 가는 통신사에게 의뢰, 벚나무 묘목을 가져다가 우이동(牛耳洞)에 심었다. 글씨는 특히 진체(晉體) ·당체(唐體)에 뛰어났으며, 문집으로 《이계집(耳溪集)》이 있다. 편저에 《만물원시(萬物原始)》 《육서경위(六書經緯)》 《군서발배(群書發排)》 《격물해(格物解)》 《칠정변(七情辨)》 《목민대방(牧民大方)》《향약절중(鄕約折中)》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 《고려대사기(高麗大事記)》 등 다수가 있다.
*묘지명 원문 자료 (2005. 7. 25. 항용(제) 제공) 출전 : <耳溪洪良浩全書> (홍양호 저. 민족문화사.1982.)
5. 김세언(金世彦)
(1)묘갈문 탁본 (2005. 10. 26. 발용(군) 제공) 소 재 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東松邑) 양지리(陽地里) 山(漁隱洞 松眞) 건립연대 : 1704년(숙종 30) 찬 : 신완(申)琓 서 : 김구(金構) 추기 : 김집(金潗) 비규모(碑規模): 총고 229cm, 비고 147cm, 폭 58cm, 후 26cm 서자경(書字徑): 전자(篆字) 9.5cm, 음기(陰記)2.0cm, 재질(材質) : 개석(蓋石) 화강암, 비신(碑身) 화강암, 대석(臺石) 화강암
김세언 묘갈은 관우리에서 이길리로 가는 464번 국도에서 토교저수지(土橋貯水池)로 좌회전 후 제방의 좌측 길로 가면 저수지 중간 부분 가건물을 못가 좌측산에 있다. 1704년 건립된 이 비는 비좌 개석(碑座蓋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개석은 팔각지붕이고, 대석은 당초문(唐草紋)과 운문(雲紋)ㆍ복연(覆蓮)이 있는데 장방형 대석 위에 세워져 있다. 비의 마멸 상태는 양호하며, 묘소는 증정부인 진주강씨(晋州姜氏)와 합장. 상석ㆍ족석ㆍ향로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동자석ㆍ망주석이 있다.
김세언(1630~16580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백(聖伯), 어영대장(禦營大將) 응해(應海)의 손자. 증호조참판 극연(克鍊)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증정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천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부모님을 받들어 모실적에 좌우에서 모시면서 수고로움을 대신하여 조금도 낯빛을 어김이 없었으므로 향당에서 그 효성을 칭송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단명하였다.. 통덕랑(通德郞)이나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通德郞 贈嘉善大夫戶曹參判金公墓碣銘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平川君申琓 撰 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知 經筵事 世子左賓客 金構 書 (後略)
통덕랑(通德郞)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김공(金公) 묘갈명(墓碣銘)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겸영경연사(兼領經筵事) 감춘추감사(監春秋館事) 평천군(平川君) 신완(申琓)이 글을 짓고, 숭정대부(崇政大夫) 행이조판서(行吏曹判書) 겸지경연사(兼知經筵事)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김구(金構)가 글씨를 쓰다. (후략) <참고자료 : 철원금석문대관 2004>
<김세언묘갈(金世彦墓碣)> (2006. 5. 3. 윤만(문) 제공)
· 시 대 : 조선 · 연 대 : 1704년(숙종30) · 유형/재질 : 비문/돌 · 문화재지정 : 비지정 · 크 기 : 높이 147cm, 너비 58cm, 두께 26cm · 출 토 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산 (어은동) · 소 재 지 : (한국)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한국)-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산(어은동) · 서 체 : 해서(楷書) · 찬자/서자/각자 : 신완(申琓)/김구(金構)/미상
1704년(숙종 30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 어은동에 세워진 김세언(金世彦)의 묘갈명이다. 묘갈은 비좌개석(碑座蓋石)의 형태로 대석에는 당초문(唐草紋), 운문(雲紋) 복련(覆蓮)이 있고 개석은 팔작지붕형태이다. 비석은 양호한 편이나 옆면의 마모가 심하다. 찬자는 경암(絅庵) 신완(申琓)이며 서자는 김구(金構), 전액(篆額)은 김집(金潗)이 썼다. 김세언(金世彦 : 1630~1658년)은 안동인(安東人)으로 김응하(金應河)의 막내동생 응해(應海)의 손자이다. 나이 29세로 단명하였는데, 항상 총융공(摠戎公) 응해(應海)를 모시면서 효성을 다하였다. 비문에는 무신 명문가문으로서 요동백(遼東伯) 김응하 가문의 내력과 김세언의 가족과 자손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는데 단명한 관계로 충효를 더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표현되어 있다. 옆면 추기(追記)에는 묘소가 1717년 송진리(宋眞里) 이장(移葬)되었음이 양자로 들어간 찬자 집(潗)에 의해 밝혀져 있다.
【판독문】 贈戶曹參判金世彦之墓」 贈貞夫 人晋州姜氏祔左」
通德郞 贈嘉善大夫戶曹參判金公墓碣銘」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平川君申琓 撰」 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知 經筵事 世子左賓客 金構 書」 奧在 皇明萬曆戊午金將軍應河死綏於深河之役 天子嘉其節 詔贈遼東伯金氏之忠節自此聞於天下矣」 有季曰應海亦以武擧官至摠戎使子孫繩其祖武皆以忠孝相傳世所豔稱而今黃海道節度使金君重元乃其曾」 孫也自黃岡走書致命曰吾父早殊吾兄弟以藐爾孤乃能成立者莫非遺訓則其可無顯刻以詔來世耶願有以記」 之謹按其狀公諱世彦聖伯其字也系出安東上洛公方慶之後也代有聞人而至摠戎公與其兄遼東伯實世其家」 而有二難之稱焉卽公之祖考也曾祖諱地四考諱克鍊俱 贈戶曹參判皆以子若孫之貴也公天資至孝常奉侍」 摠戎公左右服勤少無違色鄕黨稱其孝人皆知金氏之忠孝之推也不幸短命卒於戊戌距其生年庚午得年僅二」 十九噫其命矣夫配 贈貞夫人晋山姜氏同知說之女與公同年生賢而有婦德卒於辛亥享年亦菫四十有二合」 窆於鐵原寬洞向庚之原從先兆也有子二人長重元卽節度君也次重三歷水使今爲會寧府使節度娶水使趙猷」 女生二子三女男長泂娶士人尹商老女次潗娶士人安胤迪女生子幼府使娶府使李萬枚女無子取兄子潗爲後」 焉嗚呼公以名家子忠孝之行得其家傳若使天假之年則固可以立揚於 朝移孝爲忠而卒蔪其壽者亦豈非有」 待於後而然耶今節度昆季乃克負荷接武登朝建節制閫爲 國家干城之用嗚呼其可謂不良之報也歟銘曰」 士或有有才而無命者人固不可以無年身雖不得享其祿猶可以責報於天系以銘詩俾後人有所勉旜」 崇禎紀元後七十七年甲申三月 日立」 歲丁酉十月十五日遷墓于宋眞里向卯原碣亦移樹盖先志也碣成後丙申先君卒官統」 制使男泂癸巳先圽無嗣不肖潗還于宗三女適李萬恒鄭壽樞沈鉐側出男汲二女水使」 元百揆妾李眞實妻甲午季父卒官兵使取三從弟郡守重三第八子漵爲後側出二男淇」 滌女權夢衡妻也 乙巳九月 日孫前府使潗謹識」
【해석문】 통덕랑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김공 묘갈명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평천군 신완이 글을 짓고, 숭정대부 행이조판서 겸지경연사 세자좌빈객 김구 가 글씨를 쓰다.
황명 만력 무오년(광해군 10, 1618년)에 김장군 응하께서 심하의 군역에서 돌아가셨다. 천자가 그 절의를 아름답게 여겨서 요동백에 증봉하였다. 김씨의 충절은 이때부터 천하에 알려졌다. 막내아우 응해 또한 무과 급제하여 벼슬이 총융사에 이르렀다. 자손이 그 선조의 무공을 이어 다 충효로서 서로 전하여 세상에서 선망과 칭송을 받고 있는데, 현재 황해도절도사 김군 중원이 바로 그 증손이다. 황강으로부터 서신을 전해 와서 말을 전하기를, “우리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셨으나 우리 형제가 묘연히 의지할 곳 없는 고아로서 능히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남겨주신 교훈 아님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현각을 하여 후세에 가르쳐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글을 지어주시기를 바라옵니다.”라고 하였다.
그 행장을 살펴보건대, 공의 휘는 세언이요 성백은 그의 자이다. 선계는 안동에서 나왔으니, 상락공 방경의 후손이다. 대대로 유명한 분들이 있었는데, 총융공과 그의 형 요동백에 이르러 실로 그 집안을 대대로 이어서 이난의 칭호가 있었으니, 바로 공의 조고이다. 증조의 휘는 지사이고, 아버지의 휘는 극연이며, 함께 호조참판에 증직되었으니, 다 아들과 손자가 귀해졌기 때문이다.
공은 천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항상 총융공을 받들어 모실 적에 좌우에서 모시면서 수고로움을 대신하여 조금도 낯빛을 어김이 없었으므로 향당에서 그의 효성을 칭송하였으며, 사람들이 모두 김씨가 충효를 추존함을 알았다. 불행히도 단명하여 무술년(1658년)에 돌아가셨다. 그 태어난 해인 경오년(1630년)과의 거리를 계산해보면 향년 겨우 29세였으니, 아 ! 운명인가보다. 부인은 증정부인 진주강씨로 동지 열의 딸이다. 공과 동년생으로 어질고 부덕이 있었다. 신해년(1671년)에 돌아가셨으니, 향년이 또한 겨우 42세였다. 철원 관동 경좌의 언덕에 합폄하였으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은 중원이니 바로 절도군 이고 차남은 중삼이니 수사를 역임하고 현재 회령부사이다. 절도는 수사 조유의 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형으로 사인 윤상로의 딸과 결혼하고 차남은 집으로 사인 안윤적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모두 어리다. 부사는 부사 이만매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집을 취하여 후사를 삼았다.
아! 공은 명문가의 아들로서 충효의 행실을 그 집안에서 전수 받았으니, 만일에 명 년 만 더 살게 해주었다면 진실로 조정에서 입신양명하여 효를 옮겨 충을 할 수 있었는데 끝내 장수를 누리지 못하였으니, 또한 어찌 훗날에 기다림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절도사 형제가 마침내 능히 계승하여 조정에 올라 부절을 잡고 한지방의 군사를 통솔하여 국가의 간성의 쓰임이 되었으니, 아! 불식지보라고 이를만하도다. 명하기를,
선비는 혹 재능은 있으나 좋은 운명이 없는 자도 있으며 사람은 진실로 오래살 수 없도다. 자신은 비록 그 녹을 누리지 못했지만 오히려 하늘에 보답을 요구할 수 있다네. 명시로서 이어서 후인들로 하여금 권면할 바가 있게 하노라.
숭정기원후 77년 갑신(숙종 30, 1704년) 3월 일에 세우다.
정유(1717년) 10월 15일에 송진리 묘좌의 언덕으로 묘를 옮기고 묘갈 또한 옮겨 세웠으니, 이는 선의 뜻이었다. 묘갈을 완성한 후 병신년에 선군께서 돌아가셨다. 벼슬은 통제사이다. 장남 형이 계사년에 먼저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서 불초 집이 양자 와서 본종을 이었다. 세 딸은 이만항∙정수추∙심성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측실에서 낳은 아들은 급이고 두 딸은 수사 원백규의 첩과 이진실의 첩이 되었다. 갑오년에 계부께서 돌아가셨다. 벼슬은 병사이다. 삼종제 군수 중삼의 여덟째 아들 서을 취하여 후사를 삼았다. 측실에서 낳은 두 아들은 기와 척이고 딸은 권몽형의 처가 되었다.
을사 9월 일에 손자 전부사 집이 삼가 기록하다.
6. 김세익 (2005. 1. 30. 주회(안) 제공) *충무공(휘 응하)의 손 1) 출전 : 시군지순례 26-4.(철원군 : 인물. 유적목록) 철원군지(하)/철원군지증보편찬위원회/1992.
▣ 역사인물(역사인물) pp1841~1904. ○ 金應海(김응해) 선조 21년(1588년)~현종 7년(1666년) 조선 인조 때의 장군. 자는 君瑞(군서).
○ 金世翊(김세익) 숙종 28년 임오(1702년)에 태어났다. 자는 聖佑(성우), 본관은 안동이며, 어영대 장 김응해의 孫(손)으로 무과에 등제되었으며, 벼슬은 총융사를 역임했다.
▣ 명 묘. ○ 관리번호(0412-4-31-23), 관위(총융사), 품계(종2품), 피장자성명(김세익), 묘 소재지(동송읍 길동) 안김 삼도수군통제사 (安金 三道水軍統制使) 35대 김응해(金應海) 1646. 3. ~ 1648. 3. 만기.(副使) 63대 김세익(金世翊) 1685. 3. ~ 1686. 6. 병으로 사임.(應海의孫)
<김세익 묘갈> 西堂私載卷之十 墓誌銘
漢城府左尹金公墓誌銘
公之先安東人。安東之金。自忠烈公方慶始大。麗史載之備矣。至我世宗朝。有諱大來。篤學力行。以孝聞。時爲未出閤。諸王子妙簡師傅。集賢諸學士。交口薦。特除敎官。仍命馳馹將母。以便奉養。成公三問,朴公彭年。贈以詩若序。以榮之。五傳而有諱應海。丙子。提孤軍?正方。力戰殊而?。忠勇著于時。人謂不愧爲忠武公弟。歷三道統制使御營大將?戎使。晩致仕?田。以功名終。生諱克鍊。早沒。贈戶曹參判。娶靑松沈氏。佐郞?女。是寔生公。公諱世翊。字聖佑。生而母夫人沒。九歲而參判公又沒。育于王父。英雋??。王父奇愛之。常期以遠大。癸卯。以善射。補羽林。甲辰。薦授南行宣傳官。丙午。擢武科。赴防。秋。閔相國鼎重。按北藩?置幕府。甚器重焉。入爲宣傳官兼籌司郞。遷都?府都事。出監?義縣。?上官意。罷?。民多攀轅涕泣。復爲籌司郞兼管賑廳。分?甚平。都民頌焉。陞都?府經歷兼司僕寺內乘。出爲柒谷府使。未滿月。陞南原營將。以歲?。仍前任。癸丑。陞全州營將。未幾。首擬本道兵使。自是。時望漸隆矣。入爲御營別將。拜穩城府使。未及赴。坐前任柒谷時事。配定州。踰年而宥。復爲御營別將。出爲吉州牧使。己未。拜慶尙左水使。陞左兵使。壬戌。進秩嘉善。拜平安兵使。士無罷俉。壁無鈍械。戎政克脩。塞垣以寧。遞拜都?府副?管。
特旨拜漢城府左尹。武臣之未陟戎壇者。未?有是除。於是除也。而知上之注意公也深。乙丑。出爲三道統制使。陞辭日。上引見。命擧顔。先奬西?政績。繼?海防措置。眷諭甚渥。公感激思效。且謂是職也。寔先王父所?。斤斤奉公。毫無所私。物情大洽。用休于前人。屬時無虞。?風不警。疆?之司。率多晏安自逸。公獨日引將吏。簡其武藝。亦自?韋志?。竟夕忘倦曰。平時武臣位高。多不操弓。脫有緩急。誰當臨陣發一矢者。營有洗兵館。始公王父仍其制。拓而大之。及公來已四紀矣。不修且?。公旣政通財節。府有餘積。遂?功重新。?然改觀。病遞。入爲訓鍊中軍。俄除捕盜大將。歲飢。多?發。公原情。多傅生議曰。此良民也。飢寒於?。罹此大?。豈其情哉。或窮餓甚者。賜之食。兼經筵特進官。丁卯。除訓諫都正同知中樞府事。俱以病遞。就浴伊川之湯泉。朝廷就除其府使。?便治療。居一年。因事罷。入爲御營中軍。除京畿水使。遭臺?遞。甲戌。復授直前?也。乙亥。以?戎使召還。公 有水土病。不良於行步。至是漸篤。不任朝謁。而長子重徽病。夫妻同日死。公哀傷之病以益?。以戊寅五月二十三日。告終于寓邸。享年五十七。祠部?祭如禮。八月。權?于?原東先塋側。庚辰十月八日。遷?于陶洞里坐子之原。距先塋十里而近。公長七尺餘。美鬚眉。平居言笑不苟。其接人坦然。未?設畦畛。然內之所守者貞固。事有利害得失。幾微不露。初若不置。黑白至其所當爲。卽斷然行之。無所撓屈。方公在西?。適有北咨非常。訛言大行。而胡騎數百。忽馳至沿江沒幕。邏者飛傳報公。衆爲之??。公不爲動。徐曰。彼無?。奚動。不過爲獵胡之聚者耳。俄果自解去。在賊曹。有當路宰。宵而大亡其財。執比屋人告以偸。公置不問。反訊其女奴。卽首服。奴??其貨。故投一物於隣家指爲贓。時又有都城緣堞散穀之異。當軸者囑公?察。公執不可曰。譏察元非正道。?此特閭巷蚩氓。祈神?福之爲。奚用過慮。後獲其人詰之果然。公四典州郡。五?帥府。皆世所稱脂膏地。而律己斬斬。不使家計長尺寸。耽羅多駿乘。而自?義?。不私一?竅。及按西營。羨餘山積。庶弟乘間爲公言。日後子孫計。公正色呵之曰。吾籍先蔭。致位至此。潔身奉公。尙恐無以報國家。爾尙不知吾心耶。凡所施措。務循成規。不喜更張曰。與其擾民而弊生。豈若仍舊而脩擧。御下以誠。不屑?濡。而人樂爲用。將校或有相?者。公如不聞也者。人或問其故。則笑曰。吾旣任人以事。不可令人間之。且爲人幕屬者。初非讀書人。安可以細過苛責乎。事伯氏甚敬。奉諸?甚謹。分甘絶少。至老不衰。一?先逝。撫諸孤均腹出。至婚嫁。?不愆時。其在外內職。?族之窮而?者。如?其家。公接之終無倦色。其所要求非大害於義。輒曲爲之從曰。夫人也烏得無私。彼自謂無私而薄於所宜厚者。非人情也。其帥於外。有旅而?者。雖生平所不識。必爲之??而反?。親知有喪。竭力濟其殯葬。重施而不自德。急困而好義。有如是焉。而及公捐館。則乃無餘財。自斂?以往。皆籍親舊之助。於是乎公之操守。人知其不可及也。流輩之視炎凉爲趣舍者。心鄙之。尤愼樞機。雖盃酒間。未?評論時事臧否人物。始忠武公?有五條遺戒。其一言指目之家。勿出入。其識慮至爲深遠。公亦?手書淸白傳家。盡忠報國八字。
以貽子孫曰。吾家世受國恩。無以自效。若等宜各?躬殉國。毋墜先訓。烏呼。若公其可謂能繼先志者矣。夫人竹山安氏。僉知中樞府事緝之女。婦道甚脩。先公九年而沒。壽?四十五。葬?公墓。有二男四女。男長重徽。官府使。次重一。官判官。女長適都事沈?。次適士人尹宏。次適僉知中樞府事申▼(酉+酋)。次適士人成九齡。府使娶左尹崔敬中女。生一女。適承旨任守幹。後娶統制使李尙▼(香+全)女。生一男二女。男?。登武科。歷左尹御將。女適李壽龜。武科經歷。次適士人韓宗廈。判官娶主簿李延挺女。生一男四女。男浣。武科都事。女長適趙東鼎。武科內禁將。次適士人柳鎭泰。次適士人成?。次幼。曾玄及外孫曾多不盡記。御將子柱岳。累然衰服。以公外孫前大司諫申君致雲之狀。踵門而謁銘。余獲習於御將非一日也。自其逝。每爲國痛惜。今柱岳之請。猶其請也。其忍辭諸。爲之銘曰。
忠武有弟。弟又有孫。兩祖之遺。鍾于一身。投筆從戎。亦踵先緖。西塞南?。厥績大著。?佐京尹。??戎旅。事有糾紛。人多?撓。不色不動。洞見其要。爲彼不淸。玉雪其操。屢空奚恤。苟義斯嚮。約己濟人。有來穰穰。仁均存沒。以埋以養。八字揭訓。允矣臣典。雲?水逝。士女同泫。孝孫?銘。惟德之顯。
형태서지 권수제 : 西堂私載 판심제 : 없음 간종 : 寫本 간행년도 : 筆寫年未詳 권책 : 12권 12책 행자의 수 : 10행 22자 반곽의 크기 : 20.6×14.7(㎝)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번호 : 古3428-380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186
저자 : 성명 이덕수(李德壽) 생년 : 1673년(현종 14) 몰년 : 1744년(영조 20) 자 : 仁老 호 : 西堂, 蘗溪 본관 : 全義 시호 : 文貞
7. 김세장(金世章) 1)묘표 (2005. 10. 27. 발용(군) 제공) 소 재 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東松邑) 하갈리(下葛里) 山(軍糧洞) 건립연대 : 1725(영조 1) 찬 : 김준(金)浚 서 : 윤지대(尹)志大 비규모(碑規模) : 총고 245cm, 비고 157cm, 폭 58cm, 후 24cm 서자경(書字徑) : 전자(篆字) 9.5cm, 음기(陰記)2.5cm, 재질(材質) : 개석(蓋石) 화강암, 비신(碑身) 화강암, 대석(臺石) 화강암 김세장 묘표는 철원서 양지리로 가는 464번 국도에서 군부대를 통과 후 군량동으로 가면 부친 김극연(金克鍊)의 묘소 아래에 있다. 1725년에 건립된 이비는 비좌 개석(碑座蓋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개석은 팔각지붕으로 단조롭고 대석에는 복연(覆蓮)과 국화문(菊花紋)이 있다. 비의 마멸 상태는 양호하나 앞면에 총탄흔적이 있다. 이 묘소는 천장된 것으로 봉분은 없고 상석ㆍ향로석ㆍ문인석ㆍ망주석이 있다. 그리고 1740년(영조 16)에 건립된한 증정부인 성주이씨(星州李氏)의 묘표가 있는데 윤순(尹淳)이 글씨를 썼다. 김세장(1628~1685)은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문백(文伯). 조부의 휘는 응해(應海)니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냈으며 부(父)는 증호조참판 극연(克鍊)이다. 타고난 자품이 순실하고 효도와 우애가 진실하였다. 젊어서 과거공부를 익혔으나 마음에 두지않고 철원(鐵原)으로 물러나 살면서 글과 술로서 스스로를 즐겼다. 담박하여 산업을 경영함이 없으니 향당(鄕黨)에서 인후장자(仁厚長者)라고 칭하였다. 아들 중구가 귀해짐으로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 전면 탁본(58*157)
▲ 후면 탁본(58*157)
▲ 묘표 비문 일부 사진
▲ 묘소 전경(2004. 11. 14 안사연 답사 촬영)
▲ 묘표(2004. 11. 14 안사연 답사 촬영)
▲ 성주이씨 묘표
<참고자료 : 철원금석문대관>
8. 김극련(金克鍊) 묘표 (2005. 10. 28. 발용(군) 제공) 소 재 지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東松邑) 하갈리(下葛里) 山(軍糧洞) 건립연대 : 1761년(영조 37) 찬 : 김영우(金榮遇) 서 : 윤득양(尹得養) 비규모(碑規模): 총고 228cm, 비고 153cm, 폭 59cm, 후 25cm 서자경(書字徑): 전면(前面) 6.5cm, 음기(陰記)2.0cm, 재질(材質) : 개석(蓋石) 화강암, 비신(碑身) 화강암, 대석(臺石) 화강암
김극련 묘표는 철원에서 양지리로 가는 464번 국도에서 군부대를 통과 후 군량동으로 가면 부친 김응해(金應海) 묘소 아래에 있다. 1761년에 건립된 이비는 비좌 개석(碑座蓋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개석은 팔작지붕으로 단조롭고 대석에는 복연(覆蓮)과 당초문(唐草紋)이 있다. 비의 마멸 상태는 양호하다. 묘소는 증정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와 합장. 호석ㆍ상석ㆍ향로석ㆍ족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문인석ㆍ망주석이 있다. 김극련(1608~1650)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여정(汝精). 어영대장(御營大將) 응해(應海)의 아들이다. 훌륭한 자품과 평소에 받은 교육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단명하였다. 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 전면 탁본(59*153)
▲ 후면 탁본(59*153)
▲ 묘소 전경
▲ 묘소(2004. 11. 14 안사연 답사 촬영)
▲ 묘표(2004. 11. 14 안사연 답사 촬영)
▲ 묘표 비문 일부
<참고자료 : 철원금석문대관>
9. 김세성(金世聲) 묘표 (2005. 10. 29. 발용(군) 제공) 소 재 지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葛末邑) 동막리(東幕里) 山(華岳洞) 건립연대 : 1718년(숙종 44) 찬 : 김숙(金潚) 전면서 : 박필모(朴弼謨) 음기서 : 박태유(朴泰維) 집자(集字) 비규모(碑規模): 총고 239cm, 비고 157cm, 폭 64cm, 후 27cm 서자경(書字徑): 전면(前面) 8.0cm, 음기(陰記)3.0cm, 재질(材質) : 개석(蓋石) 화강암, 비신(碑身) 화강암, 대석(臺石) 화강암
김세성 묘표는 내대리에서 양지리로 가는 국도에서 화악동으로 우회전하여 군부대를 통과하면 행정반 앞 산에 있다. 1718년에 건립된 이비는 비좌 개석(碑座蓋石)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개석은 팔작지붕이고 대석은 당초문(唐草紋)과 국화문(菊花紋)ㆍ복연(覆蓮)이 있다. 비의 마멸 상태는 양호하나 총탄 흔적이 앞면 2곳, 좌측면 13곳, 뒷면 3곳이 남아 있으며, 묘소는 정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와 합장. 상석ㆍ혼유석ㆍ계체석이 있고 육각형 향로석은 분실되어 그 흔적만 남아있다. 김세성(1630~1699)은 조선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영숙(永叔) 증영의정 요동백(遼東伯) 휘 응하(應河)의 손자이며, 증호조참판 시연(時鍊)의 아들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산중으로 병난을 피하여 바위굴 속에서 살았는데 마마와 홍역에 걸려서 간신히 생명을 보전하였다. 자라면서 더욱 병치레를 많이 하여 과거 공부를 폐(廢)하였다. 1697년(숙종 23) 준원전참봉(濬源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노병(老病) 때문에 사양하엿고, 1699년(숙종 25) 재상(宰相)이 경연에서 아뢰어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수여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와 오위장(五衛將)에 임명하였다. 이해 6월 한성(漢城)의 낙선방(樂善坊)에서 사망하였다. 후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 전면 탁본(64*157)
▲ 후면 탁본(27*157, 64*157)
▲ 묘소 전경
▲ 묘표
▲ 묘표 비문 일부
<참고자료 : 철원금석문대관>
미채탁 철원지역의 부사공파 선조님 묘표1 (2005. 10. 31. 발용(군) 제공) <참고자료 : 철원금석문대관> 김지사(金地四) 묘표 · 위치 : 동송읍 하갈리 산(군량동). · 건립 연대 : 조선 중기 건립. · 자 : 응일(應一). · 조선 중기(1535~1593)의 문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 증좌승지 인(軔)의 아들. 배 증정부인 선산김씨(善山金氏)의 딸. 우후 김충노(金忠老)의 딸. · 상석ㆍ향로석ㆍ족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
▲ 묘표(2004. 11. 14 안사연 답사 촬영)
김응락(金應洛) 묘표 · 동송읍 하갈리 산(군량동). 2001년 건립. 자는 응일(應一). 조선 중기의 효자. 12세에 친환단지(親患斷指)로 요절(夭折) 하였음.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휘 지사(地四)의 아들. 배 증정부인 선산김씨(善山金氏)의 딸. 우후 김충노(金忠老)의 딸. · 상석ㆍ향로석ㆍ족석ㆍ혼유석ㆍ계체석.
▲ 묘표(2004. 11. 14 안사연 답사 촬영) 친환단지(親患斷指)로 요절(夭折)하신 휘 응락 선조님에 대하여 설명하시는 부사공파 전회장 재은님
김익연(金益練) 묘표 · 동송읍 하갈리 산(군량동). 조선 후기 건립. 자는 자정(子精). 조선 중기(1602~1650)의 문신. 1621년(광해 13) 무과(武科)에 특채. 전남우도수군절도사(全南右道水軍節度使)를 역임. 요동백(遼東伯) 휘 응하(應河)의 아들. 배 숙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 부좌. 이유경(李惟慶)의 딸. 배 숙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 부우. 총관(總管) 이인남(李仁男)의 딸. 상석ㆍ향로석ㆍ족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
▲ 묘표(2004. 11. 14 안사연 답사 촬영)
김인상(金麟祥) 묘표
· 동송읍 하갈리 산(연주현). · 조선 후기 건립. · 자는 상지(祥之). 조선 중기의 문신. 1513년(중종 8) 진사로 문과(文科)에 급제. 예조정랑ㆍ남원부사(南原府使)이나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에 추증. · 예조참의 진(鎭)의 아들. · 배 증숙인 풍천임씨(豊川任氏)와 쌍분. 인의(引儀) 임청(任淸)의 딸. · 상석ㆍ향로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
김인(金軔) 묘표 · 동송읍 하갈리 산(연주현). 조선 후기 건립. 자는 군발(君發). 조선 중기의 문신. 1552년(명종 7) 진사로 무과(武科)에 급제. 병조정랑이나 좌승지에 추증. 증승문원 판교 인상(麟祥)의 아들. 배 증숙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와 쌍분. 승사랑안귀종(安貴宗)의 딸. 상석ㆍ족석ㆍ향로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
김윤환(金允煥) 묘표 · 동송읍 하갈리 산(군량동). 1979년 건립. 자는 성집(成執). 조선 말기(1896~1974)의 유생. 1962~1966년 철원향교 전교(典校)를 역임. 1964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한림학사(翰林學士) 별칭(別稱)을 수여. · 두영(斗榮)의 아들. 배 공인 수성최씨(隨城崔氏)와 합장. 최기일(崔基一)의 딸. 상석ㆍ향로석ㆍ족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
<참고자료 : 철원금석문대관>
김시연(金時鍊) 묘표 · 갈말읍 동막리 산(능내). 1701년(숙종 27) 건립. 찬 : 김중기(金重器), 자는 이정(爾精), 조선 중기(1610~1634)의 문신. 호조참판겸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 요동백(遼東伯)의 응하(應河)의 아들. 배 증숙부인 청해이씨(靑海李氏)와 합장. 어모장군 이희성(李希聖)의 딸. 상석ㆍ족석ㆍ향로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
김중기(金重器) 묘표 · 갈말읍 동막리 산(능내). 1909년 건립. 서 : 김영수(金榮)壽), 자는대재(大哉). 조선 후기(1653~1735)의 문신. 1676년(숙종 2) 무과(武科)에 급제. 훈련대장(訓練大將)을 역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세성(世聲)의 아들. 배 정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와 합장. 증참판 이호인(李好仁)의 딸. · 상석ㆍ족석ㆍ향로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
김중원(金重元) 묘표 · 동송읍 양지리 산(어은동). 1737년(영조 13) 건립. 찬 : 김집(金潗), 서 : 김집(金潗), 자는 선경(善卿). 조선 후기(1653~1716)의 무신. 1676년(숙종 2) 무과(武科)에 급제.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이나 병조판서에 추증. 증호조참판 세언(世彦)의 아들. 배 정부인 평양조씨(平壤趙氏)와 합장. 통제사 조 유(趙猷)의 딸. · 상석ㆍ족석ㆍ향로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문인석ㆍ망주석.
김중삼(金重三) 묘표 · 동송읍 양지리 산(어은동). 조선 후기 건립. 자는 상경(尙卿). 조선 후기(1656~1714)의 무신. 1678년(숙종 4) 무과(武科)에 급제. 진주병사(晋州兵使)이나 병조참판에 추증. 증호조참판 세언(世彦)의 아들. 배 정부인 원주이씨(原州李氏)와 합장. 부사 이만지(李萬枝)의 딸. · 상석ㆍ향로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문인석ㆍ망주석.
김필구(金弼求) 묘표 · 동송읍 하갈리 산(연주현). 1987년 건립. 초명(初名)은 병원(秉源). 조선 후기(1842~1914)의 문신. 1858년(철종 9) 무과(武科)에 급제. 가산군수(嘉山郡守)ㆍ삼척영장(三陟營將)을 역임. 선진(善晋)의 아들이나 좌수사(左水使) 선경(善慶)에게 입양. 배 숙부인 해풍김씨(海豊金氏)와 합장. 부사 김태익(金泰益)의 딸. 상석ㆍ족석ㆍ향로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
김 광(金洸) 묘표 · 갈말읍 상사리 산(소후동). 1792년 (정조 16)) 건립. 찬 : 이복원(李福源). 서 : 이광학(李匡學). 자는 무백(武伯). 조선 후기(1697~1742)의 무신. 1723년(경조 3) 무과에 급제. 선전관ㆍ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을 역임. 증병조참판 중구(重求)의 아들. 배 정부인 무송윤씨(茂松尹氏)와 합장. 감찰 윤지상(尹志尙)의 딸. · 상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
김노성(金魯成) 묘표 · 갈말읍 신철원리 산(방축동). 1900년(고종 광무 4) 건립. 찬 : 유진규(兪鎭奎). 서 : 윤경규(尹庚圭). 자는 일지(一之). 조선 후기(1721~1793)의 문신. 11747년(영조 23) 무과(武科)에 급제. 경기영종진우방어사(京圻永宗鎭右防禦使)이나 병조참판에 추증. 함양부사(咸陽府使) 경우(慶遇)의 아들. · 상석ㆍ족석ㆍ향로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
김영기(金永基) 묘표 · 갈말읍 신철원리 산(방축동). 1900년(고종 광무 4) 건립. 立 : 김형렬(金衡烈),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 증병조참판 노성(魯成)의 아들. 배 증숙인 완산이씨(完山李氏)와 합장. 상석ㆍ족석ㆍ향로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
김선응(金善膺) 묘표 · 갈말읍 신철원리 산(방축동). 1900년 (고종 광무 4) 건립. 립 : 김형렬(金衡烈). 자는 원례(元禮). 조선 후기(1791~1814)의 문신.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 증사복시정 영기(永基)의 아들, 생부는 상기(相基). · 배 증숙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와 쌍분. 부사 김태익(金泰益)의 딸. · 상석ㆍ족석ㆍ향로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
ㆍ제공자 주 : 김선응(金善膺)선조님의 응자가 대동보에는 膺으로 철원금석문대관에는 應으로 기록되어 있어 대동보를 따라 膺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김정구(金正求) 묘표 · 갈말읍 강포리 산. 1900년 (고종 광무 4) 건립. 립 : 김형렬(金衡烈). 자는 여로(汝路). 조선 후기(1907~1856)의 무신. 1829년(순조 29) 무과에 급제. 대구진중영장(大邱鎭中營將)이나 병조참판에 추증. · 증좌승지 선응(善應)의 아들. 배 증정부인 동래정씨(東萊鄭氏)와 합장. · 상석ㆍ계체석ㆍ망주석.
김동수(金東壽) 묘표 · 갈말읍 강포리 산. 1900년 (고종 광무 4) 건립. 찬 : 이유승(李裕承). 서 : 김규홍(金奎弘). 자는 은중(殷中). 조선 후기(1827~1900)의 무신. 1850년(철종 1) 무과에 급제. 병조참판을 역임. 증병조참판 정구(正求)의 아들. 배 정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와 합장. 상석ㆍ족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망주석.
<05년 안사연 여름캠프, 부사공파 묘역 탐방 행사 내용 요약>
* 제4회 안동김씨 여름캠프 (2005. 8. 10. 글-윤식(문), 사진-항용(제), 정중(도) 제공) 대종회장님을 비롯한 문중 어르신들과 전국의 일가분들의 관심과 성원에 힘입어 2005년도 제4회 여름캠프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 말씀 올리며, 결과 보고를 드립니다. 이번 행사는 지난 해 충북 괴산 일대에 이어 충남 연기군(전서공파)과 홍성군(부사공파) 일대에서 실시되었습니다. 참여 종친은 지난 해와 비슷한 추세였으나, 안사연 자체 행사로 실시되던 여름캠프를 처음으로 대종회 주관으로 치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특히 대종회장님과 사무총장님, 그리고 인천종친회와 대구종친회는 물론 전서공파, 부사공파, 안렴사공파의 전 현직 회장님을 비롯한 문중 어르신들께서 대거 참석, 명실상부한 문중 주요행사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불순한 일기를 무릅쓰고 바쁘신 가운데 참석하여 격려해 주신 어르신들께 거듭 감사 말씀 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연로하신 재은 부사공파 전 회장님께서는 1박 2일 동안 함께하시며 참가 가족들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더없는 영광으로 여기며 감사 말씀 올립니다. 이번 행사는 총괄기획을 담당한 상석 종친께서 연초부터 수차례에 걸쳐 답사지역을 치밀하게 점검하여 첫날 장대 같은 폭우에도 무난히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6월 12일 상석 종친을 비롯한 안사연 9명이 답사지역을 점검한 바 있습니다. 이번 행사에 대한 행사개요 및 세부일정은 게시판의 <2005년 제4회 안동김씨 여름캠프 자료집(종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보고는 현지에서 듣고 본 내용을 위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시 : 2005년 8월 3일~8월 5일(2박 3일) ■장소 : 충남 연기, 홍성, 공주, 보령 일대 ■답사 지역
◆8월 3일(수) 전의면사무소 집결 → 연기군 학당골 전서공 묘역 → 점심식사 → 국촌리 연기대첩비 → 공산성 → 청양 칠갑산 까치내유원지 왕림회관(1박)
◆8월 4일(목) 칠갑산 장곡사 → 홍성군 은하봉 부사공 설단 → 점심식사 → 대천해수욕장 갯마을펜션(2박)
◆8월 5일(금) 보령시 호국사 → 점심식사 → 해산(귀가)
■참석자 : 무순, 존칭 생략, 괄호 안은 가족 ◆대종회 및 현지 종친(30여 명) ◆대종회 - 대종회장(홍식), 부회장(영만 안렴사공파종회장), 부회장(춘교 인천종친회장), 부회장(실경 대구종친회장), 사무총장(관묵) ◆현지 종친 - 전서공파, 부사공파, 안렴사공파 일가분 합(合) 25명 내외 ☆전서공파 - 근성(파종회장) 자제, 수회(도유사) 외 10여 명 ☆부사공파 - 재은(전 파종회장), 재용(부사공파 종손) 2 명 ☆안렴사공파 - 오창 일원 종친 10여 명
◆여름캠프 참가 가족 : 총 18가족 28명(괄호 안은 가족)
☆밀직사사공 - 진회 ☆군사공 - 태우 ☆군사공 - 태영 ☆문온공 - 광도(태行 문온공 종손) ☆문온공 - 영환(부부동반) ☆문온공 - 윤만(회行) ☆문온공 - 윤식 ☆도평의공 - 억(회行 : 대구종친회 총무) ☆도평의공 - 정중 2명(부인) ☆제학공 - 상석 3명(재行 1녀 1남 슬빈, 선응) ☆제학공 - 항용 4명(부인, 1녀 1남 예진, 용진) ☆제학공 - 운기(용行) ☆안렴사공 - 성회(전 대종회 부회장) ☆안렴사공 - 용주(부인) ☆안렴사공 - 용준(1남 필교) ☆안렴사공 - 용환(1녀 은영) ☆익원공 - 은회 ☆익 원 공 - 완식
099:40~10:55 장곡사 출발, 부사공 묘역 착 착잡한 마음으로 장곡사를 벗어나 부사공 묘역으로 향합니다. 선두 차량에 재은 전 부사공파 회장님께서 동승하셔서 길 안내를 맡으셨습니다. 지난 번 사전점검 당시 일정에 쫓겨 답사하지 못해 길 안내를 드리지 못하는 점 혜량하시기 바랍니다. 부사공 재실은 민가 형태였는데 화재로 소실돼 여러 해 전에 단층 슬라브 형태로 새로 지었습니다. 재실에는 부사공 종손이신 희용(재行) 종친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맞절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재은 전 회장님과 종손으로부터 귀한 말씀을 듣습니다. 충남 홍성군 은하면 대천리 은하봉의 부사공(휘 천순) 할아버지 묘역에는 파조이신 부사공을 비롯해 좌랑공(휘 담), 미암공(휘 대래), 소위장군(휘 현), 예조참의(휘 진), 부위공(휘 홍윤), 판교공(휘 인상) 할아버지께서 모셔져 있습니다. 미암공 묘소는 실묘이며, 다른 할아버지들께서는 단소입니다. 이에 부사공파 종친들께서는 성금을 모아 1991년 4월 5일 미암공 위쪽에 부사공 이하 선조님들의 단소를 설단하게 되었답니다.
충렬공부터 부사공파 선조님 계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세부 계대는 여름캠프 자료집(종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충렬공 → 1子 판서공(휘 선) → 2子 충숙공(휘 승용) → 2子 장령공(휘 구) → 2子 부사공(휘 천순) → 子 좌랑공(휘 담) → 子 미암공(휘 대래) → 1子 소위장군(휘 현), 2子 예조참의공(휘 진)
부사공 할아버지 단소를 설단하게 된 것은 미암공 할아버지 묘소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재은 전 회장님께서는 들려 주십니다. 또한 예조참의공(휘 진) 할아버지의 큰아드님 판교공(휘 인상)께서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철원으로 옮겨 그곳에서 풍천임씨 따님을 맞이하셨답니다. 이런 연유로 철원지역에 부사공파 종친들께서 세거하게 되었는데, 판교공의 장인은 후손이 없어 오늘날까지 외손봉사를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실묘인 미암공 묘소에는 오래 된 묘표와 망주석 1쌍이 서 있습니다. 상석은 2보×1.5보, 두께 0.5보로 상당히 큰 편입니다. 고비의 글자는 풍화돼 알아볼 수는 있으나 상당히 마멸된 상태였습니다. 1995년에 새로 세운 묘비에는 비문을 영의정 남구만이 찬 병서하였으며, 1995년 을해년 10월에 개립(改立)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미암공에 대해서는 최근 태영 종친께서 귀한 자료를 발굴, 소개하신 바 있습니다. 우리 홈 게시판의 <김 교관(金敎官) 시권(詩卷)의 서문>와 <김교관(金敎官) 대래(大來)에게 주다> 등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아래쪽 부호군공(휘 백영) 묘소에는 묘비와 망주석 1쌍, 상석(2보×1.5보)이 배치돼 있습니다.
▣ 부사공 묘역 헌관 ▲부 사 공 : 헌관 영환, 집례 항용, 집사 진회, 은회 ▲좌 랑 공 : 헌관 광도, 집례 항용, 집사 용준, 상석 ▲미 암 공 : 헌관 용주, 집례 항용, 집사 용환, 필교 ▲소위장군공 : 헌관 윤만, 집례 항용, 집사 용진, 필교 ▲예조참의공 : 헌관 태우, 집례 항용, 집사 용진, 필교 ▲부위공(휘 홍윤) : 헌관 진회, 집례 항용, 집사 용진, 필교 ▲장사랑공(휘 규) : 헌관 상석, 집례 항용, 집사 용진, 필교 ▲부호군공(휘 백영) : 헌관 태영, 집례 항용, 집사 용진, 필교
부사공 묘역에서 참배를 마치고 13:30분 시가지로 되짚어 나와 시원한 냉면으로 달궈진 속을 식혔습니다. 이 자리에서 재은 전 회장님께서는 오늘 아침 심사한 백일장 입상자에게 대종회장님을 대리해 상장을 수여하셨습니다. 점심식사 후 다음 날 행사를 계속할 가족만 남고 다른 분들은 귀갓길에 올랐습니다. 더운 여름날 노고가 크셨습니다. 무사히 귀가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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