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서공파(성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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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2.png 전서공파(성목)

 

*파       조 : 김성목(金成牧)

*파종회장 :

*주       소 :

*연 락 처 :

 

   

 

*임원명단

  1)역대 임원명단

 

회   장

기   간

도 유 사

1대

헌봉(憲鳳)

1912~1942

영도(榮道)

2대

태일(泰一)

1942~1980

경회(景會)

3대

정교(正敎)

1980~1985

수회(壽會)

4대

경회(景會)

1985~1993

수회(壽會)

5대

근성(根成)

1993~2012.11

수회(壽會),태익(泰益),승회(承會)

6대

승회(承會)

2012.11~2014.11

종회(鍾會),성회(成會)

7대

흥식(興植)

2014.11~ 현재

성회(成會)

태영(泰永,2021.6~ )

 

  2)현 임원명단

회  장

흥식(興植)

이  사

재룡(在龍)

총  무

태영(泰永)

재용(在龍)

감  사

성회(成會)

한회(漢會)

이  사

선묵(善默)

진회(珍會)

재욱(在旭)

선회(善會)

재석(在錫)

 

 

파조 : 김성목(金成牧) - 고려 때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으며, 1392년 조선(朝鮮)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충남 연기(戀岐)에서 은거했다.  

 

1. <주요 선조님 및 사진 소개>

  1) 장령공(휘 玖) 설단 (2005. 6. 12. 안사연 탐방시 촬영 제공)

        *묘역 소재지 : 충남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학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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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에서 본 묘역 원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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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단 ,  우 : 구비.  좌 :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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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설단비>

 

2) 전서공(휘 成牧) (2005. 6. 12. 안사연 참배시 촬영 제공)

충렬공(휘 방경)의 현손. 고려 때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으며, 1392년 조선(朝鮮)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 하여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충남 연기(戀岐)에서 은거했다. 가계는 忠烈公 方慶--判書公 小宣 --大提學公 承用--掌令公 玖--典書公 成牧 로 이어지는데 공은 전서공파 파조이시다. 감찰사 장령을 역임했던 구(玖)의 2남(김성목, 김천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말에 벼슬이 공조전서에 이르렀다. 고려를 반역하여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이 조정에 창궐하여 고려의 운이 기울어지자 문하평리 변빈, 판서 성만용, 박사 정몽주, 제학 홍재, 대사성 이색, 전서 조열, 전사 이오, 단구재 김후 등과 공당에서 기약없이 모여 술을 기울이며 정란을 상심 개탄하다가 합잠시를 지어 읊고 눈물을 흘리며 이색이 말하기를 "옛날 은나라에 3仁이 있어 나라가 망하자 비간은 죽고, 미자는 가고, 기자는 종이 되었다고 하니 우리도 각자의 의사에 따라 행동합시다" 하고 마침내 고려가 망함에 모두 망복지신의 절의를 지켜 은거하였다. <여말충의열전, 1996, 고려숭의회>

 

배위는 정부인 한양조씨이고 子는 학당공(휘 휴)이 있다. 묘는 충남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학당에 있다. 1992년에 대대적으로 사초하면서 묘비를 새로 세웠는데, 원 봉분은 그대로 두고 숯을 채우고 다시 봉분을 넓고 높이 세워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묘상에 묘소를 실전한 부친 장령공 휘 구(玖)의 단비가 건립되어 있고, 묘하에 아들 휴(休)의 묘소가 있다. 시제는 음력 10월 초정일(初丁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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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4. 20. 태병(전) 제공)

 

3) 학당공(휘 休) 묘소 (2005. 6. 17. 안사연 참배시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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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당 휘 휴 선조님 묘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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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측 문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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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문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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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비(舊碑)의 거북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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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당 선조님 유허비(國譯碑)

 

  4) 묘역 아래의 4위 공적비 (2005. 6. 17. 안사연 탐방시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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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재실 (2005. 6. 17. 안사연 탐방시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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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서공파 재실 학당재(學堂齋)-학당선조님이 사시던 실제 집터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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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학당공 유허비 (2005. 6. 17. 안사연 탐방시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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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당 김휴 선조님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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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4. 20. 태병(전) 제공>

 

소재지 : 충남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학당. 휴허비 내용은 많은 분들께서 올려 놓았기 때문에 생략함. 6.25사변 때에 총탄 포탄의 파편에 의하여 일부 파손된 흔적이 있다

 

 7) 김제정 정려 현판 (2005. 6. 17. 안사연 탐방 촬영)

    *소장 위치 : 충남 연기군 전의면 신방리. 김수회 종친 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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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판 기록 내용

    忠臣

   贈嘉善大夫 兵曹參判 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副摠管 行折衝將軍 燐山鎭管 兵馬僉節制使 兼 水軍防禦使 贈諡忠壯公 金濟鼎之閭

  (충신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절충장군 인산진관 병마첨절제사 겸 수군방어사 증시충장공 김제정지려)

 

  <김제정 소개 자료> (2007. 3. 3. 은회(익) 제공)

  출전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김제정 ,金濟鼎 (1578 ~ 1627)

김제정(金濟鼎)은 조선시대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첨중(僉中)은 태중(泰仲)이다. 효자 김익정의 현손인 김사철(金師哲)의 손자로 1578년(선조 12) 전의면 양곡리에서 태어났다. 1605년(선조 38)에 무과에 급제하여 금부(禁府) 직에 있다가, 1624년(인조 2) 진주방어사(晉州防禦使)를 역임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 강홍립(姜弘立)과 김경서(金景瑞)가 싸워보지도 않고 적에게 투항하자 인산방어사(燐山防禦使)로서 의주부윤 이완(李莞)과 힘을 합쳐 적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적의 세력에 눌려 이완이 전사하였고, 김제정 또한 적의 화살이 쉴새 없이 날아오는 적진에서 무수히 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조정에서는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비변사의 요청으로 병조참의에 증직하였고, 이와 함께 그의 처자에 대하여도 깊은 애도를 표하고 제사에 쓰일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 후 영조 때 ‘같은 정묘호란 때의 충신인 남이흥(南以興)과 이완이 정려를 받은 것과는 다르게 김제정 만이 누락되어 한탄스럽다’는 김제정의 7세손인 김노찬(金魯粲) 등의 상언과 우승지 조영진(趙英鎭)의 상소에 의하여 1774년(영조 50)에 치제문을 내리고, 제전(祭田)을 내려 영묘(靈廟)와 정려(旌閭)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또한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내렸으니, 몸을 바쳐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을 ‘충(忠)’이라 하고, 절의를 세우고 이롭게 죽은 것을 ‘장(壯)’이라 하였다.

현재 정려는 퇴락하여 허물어지고 명정현판만이 후손인 김수회(金壽會)의 집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 후손들이 전의면 달전리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연기군지, 연기인물지, 연기지역의 충열공 후예들, 연기군 충효열유적, 전의향토지)

 

*용골 산성의 전투에서 중군(中軍) 김종민(金宗敏)의 시종 역전한 상황이 장계 내용에 여러 번 나오니

우선 논상하여 권장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당상으로 승진시키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이흥(南以興)·김준(金浚)·장돈(張暾)·전상의(全尙毅)·김양언(金良彦) 등에게는 이미 포증(褒贈)의 명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김준의 아들 유성(有聲)과 김준의 첩 양녀 김씨 성을 가진 여인이 동시에 함께 죽었으니 더욱 가상합니다. 정표하시어 절의를 권면하소서. 의주성(義州城) 안에 있던 장수들은 방비를 잊고 있다가 습격을 받은 것으로서 잘못이 없지 않기 때문에 즉시 포상(褒賞)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듣건대 이완(李莞) 등이 군사를 모아 거리에서 싸워 매우 많은 적을 죽였고 힘이 다하여 패했다 하니 그 중에서 뚜렷이 드러난 이완·최몽량(崔夢亮)·여영원(呂榮元)·김제정(金濟鼎)·양극(梁) 등에게는 모두 추증(追贈)하게 하소서. 능한 산성(凌漢山城)이 함락되던 날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협(奇恊)은 단의(段衣)도 벗지 않는 채 적을 쏘다가 살해되었습니다. 본성을 지키던 신하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는데 기협만이 홀로 죽었으니 더욱 가상합니다. 포증(褒贈)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 쌍효자각 (휘 익정, 휘 사준) (2005. 6. 17. 안사연 탐방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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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입구 표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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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 효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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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양곡2리 전서공파 묘역으로 갑니다. 양곡리 압골에는 위에서부터 金龜年-金師俊-金師秀묘소와

 

9) 삼절각 순충비(三節閣 殉忠碑) (2004. 4. 24. 태병(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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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김씨 삼절각 순충비문 역문> (2004. 4. 24. 태병(전) 제공)

 보안불하가 건영에서 죽자 그 부인 아로 가 곧 그 아들을 안고 우물에 빠져 죽었고 그 딸과 그 첩 그 손녀가 모두 빠져 죽었다. 배영의 아들이 강물에서 죽으니 그 아들 거진과 그 종 합절이 적진에 들어가 전사하니 이 세상에 역사를 쓰는 자는 그 공덕을 높이 평가하였다. 하산(昌寧)의 옛 김씨 할아버지와 그 아들과 손자가 임란에 죽으니 앞의 두 가문에 뒤질까? 패잔병을 거두어 강한 도적을 쫓아 맹세코 한 하늘밑에 살지 않기 위해서 죽음에 이르러서도 싸움을 그치지 아니함은 앞의 두 가문에도 없는 일이지 않는가? 휘 걸, 부장 휘 대수, 주부 휘 후생 학생 김공은 안동사람이니 고려 맹장 충열공 휘 방경은 그의 이름난 할아버지더라. 휘 휴 호 학당은 포은 선생의 제자이며 이참 휘 익정 호 운암은 효성으로 3대를 전하였다  

 

 휘 주 첨지가 휘 희문을 낳고 창녕에서 비로소 살았다. 휘 희문이 응동을 낳고, 응동은 傑 부장을 낳고, 부장은 大壽 주부를 낳고, 주부는 학생을 낳아 만력 임진년에 부장공이 아들(大壽)과 손자를 거느리고 김문렬공 천일과 진주의 전장으로 달려가니 문렬공이 그 용맹과 지략을 장하게 여겼으며 선봉장으로 나가 공을 여러번 세웠다. 계사 유월에 성이 함락되고 문렬공이 돌아가시고 부장공(휘 傑)이 사로 잡혔으나 오히려 왜놈들을 호통치면서 죽으니 그 아들 주부공(휘 大壽)이 시체를 바위 틈에 숨겨두고 안고 통곡하며 가로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아들은 아버지를 위해 죽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며 남은 군사를 독려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정암진에서 싸우다가 화살이 다 없어져 죽자 그 손자 또한 죽으니 3대 세 사람이 같이 국사를 위해 죽었도다.  

 

 충신의 대를 한꺼번에 정하기 어려워 원종대사가 나라에 상소함이 21번이 되었으나 정표를 얻지 못했다가 335년이 지난 정묘년 지금에 와서야 고을 사람들이 그 거룩한 업적이 사라질까 걱정이 되어 비석을 구산리에 세우려고 후손 재훈, 재열이 나에게 글을 구하거늘 나 역시 창녕사람이라 어찌 병들고 늙고 글 못한다고 사양하리오, 왈

 

 아버지 가로되 "임금이 어려움에 처하면 나는 죽어도 마땅하다" 하며 칼 한자루를 가지고 일만 군사에게 돌격하며 "하늘과 때가 이롭지 못했으나 오직 “의” 만 한 것이 있겠는가?" 하였으며 아들은 가로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나 혼자 살아 있음이 부끄럽다"고 여기고 백리를 쫒아가 죽을 각오로 싸우다가 돌아가셨으며, 손자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3대가 어진 것을 이루었도다. 높고 높은 촉석루와 흐르고 흐르는 정암 물결에는 백대 천추의 충성스러운 넋이 길이 머무리

 

 정묘(1927) 소만절에 광주 노상직 근찬 병서

 창녕 조왈수 십이서 병전

 

10) 남양홍씨 열녀비 (김환의 배위) 정려 (2005. 6. 17. 안사연 탐방 촬영)

   *위치 : 충남 연기군 전의면 양곡2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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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각과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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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려각 후면, 이 길로 전서공파 묘역을 올라감>

 

 11) 시정공 (휘 瓛(환)) 묘소 (2005. 6. 17. 안사연 탐방 촬영 제공)

      *위치 : 충남 연기군 전의면 양곡2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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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김귀년(김龜年) 선조님 (2005. 6. 17. 안사연 탐방 촬영 제공)

      *위치 : 충남 연기군 전의면 양곡2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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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묘비>

 

 13)김사준(金師俊) 묘소 (2005. 6. 17. 안사연 탐방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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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묘비>

 

 14) 김사수(金師秀) 묘소 (2005. 6. 17. 안사연 탐방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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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묘비>

▲  휘 사수(師秀) 선조님 묘소의 묘비를 살펴보는 참례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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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 필적으로 쓴 묘비>

 

*<주요 자료 소개>

1. <연기군지, 1988> 내의 자료 소개 (2002. 1. 26. 주회(안) 제공)

 1) ▣ 金休 고려충정왕2년 (1350) - ?

안동인, 자는 鍊父(연부), 정몽주 선생의 문하생이며 고려 공민왕때 檢校近侍(검교근시)라는 벼슬자리에 올랐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 때 護軍의 명을 받았으나 연로한 아버지 (고려 공조판서를 지낸 바 있는 金成牧)를 모시기 위하여 직을 사양하고 송도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현재의 연기군 전의면 운주산 아래 거처할 장소를 구하여 은거하였다.태조는 다시 가선검교 한성좌윤이라는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아 그의 문하생 중에서 충효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 명인들이 유허비를 세웠는데 연기군 전의면 미곡리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가 은거하고 있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를 따라 학당리라 일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림 : 김휴 유허비

<구연기군지, 고장의 빛나는 얼과 전통(연기군), 해동인물지>

 

2) ▣ 金益精 ? - 세종31년 (1449)

안동인, 자는 자?, 호는 雲庵이며 金休의 아들이다.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태어난 그는 태조5년(1396)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이어 습유, 헌납, 사간을 역임하고 대사헌의 직을 맡고 있던 중 노친을 모시기 위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고 하는데 부모가 사망하자 6년간을 시묘하였다.이어 태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정계에 진출하여 충청,전라,경기관찰사를 지내고 세종17년(1435)에는 동지총제, 경창부윤을 거쳐 이조, 형조, 예조참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충효정신이 남달리 뛰어났다고 하는 그는 훈몽강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해 그가 죽자 세조는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여 현재 연기군 전동면 양곡리에 그의 효자비가 있고 경기도 양주군 고령사전리에 그의 묘가 있다.

 <태조,태종,세종실록, 해동인물지, 한국인명대사전, 구연기군지, 연기군정려대장>

 

3) ▣ 金師俊 세종21년(1439)-?

안동인, 자는 明叔, 호는 思庵, 형조참의 ★金龜年의 둘째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김귀년이 1455년 단종이 폐위되고 사육신이 처형, 집현전이 폐지되는 사건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연기군 전동면 양곡리로 돌아온 이래로 어린 나이에도 항상 부모를 효로서 섬겼다고 한다.어느 해에는 부친이 ?병이라는 모진 부스럼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연근이 먹고 싶다고 하였다. 때가 엄동설한인지라 그는 매일을 연못 빙판에 들어가서 기도하던 중에 연못에서 연근이 나왔고 이를 먹은 부친은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한다.부친이 75살에 사망하자 3년을 시묘하였는데 이를 들은 예종(1469)이 친히 칙사를 보내어 위로하고 그의 선산을 능참 ★복사누락 973쪽

 

4) ▣ 金濟鼎 선조11년(1578)- 인조5년(1627)

안동인, 자는 僉中이다. 선조12년(1578) 전동면 양곡리 (지금의 전의면 양곡리)에서 태어난 그는 1605년 무과에 급제하여 금부직에 있다가 1624년 의주의 방어사로 재직하고 있던 중에 인조5년(1627)에 강홍립의 난을 맞이하였다. 난이 일어나자 그는 당시 의주부윤으로 있던 이완, 남이흥과 더불어 전투를 벌이던 중에 적의 장수 강로의 세력에 눌려 이완이 전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용전을 거듭하였으나 적의 화살이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적진에서 대검을 휘두르다가 전사하였다.

그 후 영조50년(1774)에 우승지 조영진이 상소하여 인조묘에 당시 신하에게 내리는 제문인 치제문을 내리도록 하였으며 제전을 내려 영묘와 정려를 짓도록 하고 忠壯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한다. 그러나 현재는 종세가 여의치 못하여 영묘와 정려를 건립하지 못하고 연기군 전의면 신흥리(생촌부락)에 현판만 보관중이다.

 <연기지, 구연기읍지>

 

5) ▣ 金百悅 순조16년(1816) - ?

안동인, 자는 汝行, 연기군 동면 내판리에서 태어났다. 5살의 어린 나이에 부친이 병이 들어 자리에 눕자 매일같이 지성으로 간호하던 중 하루는 꿈에 신인이 나타나 곶감이 아버지의 병에 특효라고 일러주어 다음날 이를 구하여 주니 며칠 만에 차도가 있어 병이 나았다 한다. 이 소문이 세상에 알려지자 하늘에서 낸 효자라 하여 고종27년(1890)에 나라에서 동몽교관 조봉대부의 벼슬을 주었으며 정문을 세워주었는데 이는 현재 연기군 동면 내판리에 위치하고 있다.

 <구연기군지, 연기군정려대장>

 

6) ▣ 金休 유허비

소재지 : 전동면 미곡리 학당부락

이 유허비는 어느 연대에 건립하였는지 미상이나 다만 李采(이채) 찬, 金鑛(김광) 서로 되어 있고, 현재 그 지점은 밭으로 되어 있다. 비의 내용은 김휴가 정몽주가 순절하자 세상을 한탄하고 벼슬길에서 떠나 향리로 내려와서 강학으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검교김공 유허비

<비후면> 書고려검교학당김공狀錄後

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삼주 이채 찬

통정대부 행형조참의 연안 김광 서

<여말충의열전, 고려숭의회, 1995>

靖節編

 

7) ▣ 典書 金成牧(?-?)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공은 안동인으로 구(王+久)의 아들이요, 밀직사사 承用의 손자요, 평장사 方慶의 후손이다. 여말이 벼슬이 공조전서에 이르렀다.

때에 고려를 반역하여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이 조정에 창궐하여 고려의 운이 기울어지자 선생은 문하평리 변빈, 판서 성만용, 박사 정몽주, 제학 홍재, 대사성 이색, 전서 조열, 전사 이오, 단구재 김후 등과 공당에서 기약없이 모여 술을 기울이며 정란을 상심 개탄하다가 합잠시를 지어 읊고 눈물을 흘리며 이색이 말하기를

"옛날 은나라에 3仁이 있어 나라가 망하자 비간은 죽고, 미자는 가고, 기자는 종이 되었다고 하니 우리도 각자의 의사에 따라 행동합시다" 하고 마침내 고려가 망함에 모두 망복지신의 절의를 지켜 은거하였다.

義節編

 

8) ▣ 學堂 金休 (?-?)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휴

자는 연부요 호는 학당이고 成牧의 자로 안동인이다. 공은 고려말에 사간을 역임하고 <金承露 實錄>

고려가 망함에 향리에 퇴둔하여 조선조에서 여러차례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을 교육하면서 그 貞節을 지켰다. <대동운부군옥> 유고(遺稿)가 있다.

 

<연기군청 홈페이지 (http://gun.yeongi.chungnam.kr/)>

 

9) ▣ 김휴 유허비

소 재 지 :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시 대 : 고려시대

안동인으로 자는 연부 정몽주 선생의 문하생이며 고려 공민왕때 검역 근시라는 벼슬 자리에 올랐다.이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때 호군의 명을 받았으나 연로한 아버지 (고려 공조판서를 지낸바 있는 감성목)을 모시기 위하여 직을 사양하고 송도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현재의 연기군 전의면 운주산 아래 거처할 장소를 구하여 은거하였다.

태조는 다시 가선검교 한성좌윤 이라는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않이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더욱 닦아 후세 양성에 전력 하였으며 그의 문하생 중에서 충효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명인들이 유허비를 세웠는데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또한 그가 은거하고 있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를 따라 학당리라 일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 ▣ 학당(學堂)골 김휴(金休)

 본(本)이 안동(安東)으로 서기 1350년(고려충정2)고향에서 출생했다.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문하생(門下生)으로 고려 공민왕땐 검교근시(檢校近侍)라는 벼슬에 있었고 고려가 실가되자 이태조 등국시 호군(護軍)에 명을 받았으나 연로하신 아버지(고려공조전서 성목:成牧)을 모 시고자 송도(松都)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오늘의 전의(全義)운주산 아래 병 거지(屛居地)를 정하여 은거하자 태조가 하선검교 한성좌운(漢城左尹)이라는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않았다.그는 초야(草野)에 묻혀 있으면서 학문을 더욱 빛나게 닦아 그의 문하생으로 충효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명인(儒林名人)들이 유허비를 세웠고 운주산 아래서 살았으니 지금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號)를 따라 학당리(學堂里)라 일 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참고문헌 : 碑文, 族譜

 

*) ▣ 김익정.김사준 쌍효자문

소재지 :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시 대 : 조선시대

김익정은 이태조 5년(1396)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삼사를 역임하시고 사헌부대사헌에 재직중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부모의 상을 3년씩 6년간을 시묘하였다.그후 태종의 부르심을 받고 다시 정사에 진출 이조참판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민훈학강학을 독려하여 민족중흥을 진작하였으며 공은 또한 천성이 겸손하였고 학문이 탁월하고 덕행이 후덕하여 세인들이 충효명문이라 순배하였으며 세조조에 정려를 명받았다.충신명문이 충신을 낳는다고 공의 손자인 수령은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성종조에 좌이공신으로 복창군까지 봉하였으며 호는 문도공 이다. 또한 김사준은 총명예지하여 효행과 유덕을 닦았다.

부친의병에 연근이 특효라하여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어 하루같이 드리니 효험이 있어 병이 나을때까지 복용시켜 주었으며 부친이 75세의 장수를 누리었다.명종조에 효자로 정려를 명하였다.(참고문헌 : 정려기)

 

2. <디지털한국학> 내의 자료 (2002. 1. 26. 주회(안) 제공)

1) ▣ 김익정(金益精){1}

시대-조선   생몰년 ?-1436(세종18)   본관 안동(安東)   자 자비(子斐)   호

시호  활동분야 문신   다른 이름

?∼1436(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비(子斐). 아버지는 한성윤 휴(休).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문하부의 요직을 지냈고, 1409년(태종 9) 장령이 되었다. 이해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자, 그 별감이 되었다.

그뒤 헌납·예문관직제학·승정원우대언을 역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충청·전라·경기의 삼도 감사를 지냈다. 내직으로 돌아와서 1422년 승정원지신사가 되어 군정(軍政)의 확립을 건의하였으며, 1425년 대사헌에 올랐다.

1430년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으며,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과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이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고, 이조좌참판이 되었다.

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崔完基〉

 

 2) ▣ 김수령(金壽寧)

시대 :조선    생몰년 : 1436-1473(세종18-성종4)  본관:안동(安東)  자: 이수(#이96#수04)  호:소양당(素養堂)  시호:문도(文悼) 활동분야: 문신, 학자 1436(세종 18)∼1473(성종 4).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이수(#이96#수04), 호는 소양당(素養堂).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었던 숙(潚)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안숭선(安崇善)의 딸이다.1453년(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1455년(세조 1)에 집현전수찬에 승진되고 이어 병조좌랑·헌납·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부터 1462년까지 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5도의 체찰사인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주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1463년 집의에 오르고 그뒤 동부승지, 1465년에는 좌승지를 거쳤다.1468년 호조참의로 세조의 《주역구결 周易口訣》 간행에 참여하였다.

1469년(예종 즉위년) 공조참의가 되고 이어 형조·호조의 참의를 거쳐 1470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 재직시에는 성종에게 경연을 권고하는 명상소문을 남기기도 하였다.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뒤에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사재(史才)가 있어서 1458년에는 《국조보감 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고, 1463년에는 양성지(梁誠之)·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편찬하였으며, 성종 초기에는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大東野乘,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李根洙〉

 

3. <디지털한국학 내의 조선조방목> (2002. 1. 26. 주회(안) 제공)

1)김익정(金益精) : 태조5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익정(金益精)- 단종1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수녕(金壽寧)의 조부(祖父)

2)김익렴(金益廉) : 태종8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익렴(金益廉)-숙종28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일경(金一鏡)의 조부(祖父) 김익렴(金益濂) 단종1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한(金漢)의 부(父)

3)김한(金漢) : 단종1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한(金漢)-

4)김수녕(金壽寧) 단종1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수녕(金壽寧)-연산군4년 별시에 입격한 김말문(金末文)의 처부(妻父)

 

▣ 김익정(金益精) More Info.

태조(太祖)5년(1396년), 식년시(式年試) 을과1(乙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휴(金休)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성목(金成牧)

증조부(曾祖父) 김구(金玖)

외조부(外祖父) 김효신(金孝信)

처부(妻父) 권담(權湛)

손(孫) 김수녕(金壽寧)

제(弟) 김익렴(金益濂)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이조/참판&(吏曹/參判&), 대사헌&(大司憲&)

 

▣ 김익렴(金益廉)

태종(太宗)8년(1408년), 식년시(式年試) 을과3(乙科3)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휴(金休)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성목(金成牧)

증조부(曾祖父) 김구(金玖)

외조부(外祖父) 김희신(金希信)

처부(妻父)

형(兄) 김익정(金益精)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지평&(持平&)

 

▣ 김한(金漢)

단종(端宗)1년(1453년), 식년시(式年試) 정과14(丁科14)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익렴(金益濂)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휴(金休)

증조부(曾祖父) 김성목(金成牧)

외조부(外祖父)

처부(妻父) 최수민(崔秀民)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승의(承義)

품계(品階)

관직(官職) 직강&(直講&)

 

▣ 김수녕(金壽寧)

단종(端宗)1년(1453년), 식년시(式年試) 을과1(乙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36년, 병진

자(字)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문도,좌리공신/복창군(文悼,佐理功臣/福昌君)

>>> 가족사항

부(父) 김숙(金潚)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익정(金益精)

증조부(曾祖父) 김휴(金休)

외조부(外祖父) 안숭선(安崇善)

처부(妻父) 혜령군 이지(惠寧君 李祉)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가정대부(嘉靖大夫)

관직(官職) 호당&(湖堂&), 호조/참판&(戶曹/參判&)

 

4. 기타 자료 소개

1) 김익정(金益精){1}  (2002. 9. 20. 영환(문) 제공)

?∼1436(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비(子斐). 아버지는 한성윤 휴(休).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문하부의 요직을 지냈고, 1409년(태종 9) 장령이 되었다. 이해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자, 그 별감이 되었다.그뒤 헌납·예문관직제학·승정원우대언을 역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충청·전라·경기의 삼도 감사를 지냈다. 내직으로 돌아와서 1422년 승정원지신사가 되어 군정(軍政)의 확립을 건의하였으며, 1425년 대사헌에 올랐다.1430년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으며,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과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이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고, 이조좌참판이 되었다.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2)김수령(金壽寧) (2003. 9. 20. 영환(문) 제공)

1436(세종 18)∼1473(성종 4).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이수(#이96#수04), 호는 소양당(素養堂).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었던 숙(潚)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안숭선(安崇善)의 딸이다.1453년(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1455년(세조 1)에 집현전수찬에 승진되고 이어 병조좌랑·헌납·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부터 1462년까지 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5도의 체찰사인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주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1463년 집의에 오르고 그뒤 동부승지, 1465년에는 좌승지를 거쳤다.1468년 호조참의로 세조의 《주역구결 周易口訣》 간행에 참여하였다.1469년(예종 즉위년) 공조참의가 되고 이어 형조·호조의 참의를 거쳐 1470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 재직시에는 성종에게 경연을 권고하는 명상소문을 남기기도 하였다.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뒤에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에 이르렀다.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사재(史才)가 있어서 1458년에는 《국조보감 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고, 1463년에는 양성지(梁誠之)·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편찬하였으며, 성종 초기에는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효자 김익정·김사준 쌍효자문(전서공파) (2003. 2. 12. 발용(군) 제공)

 

지정번호 향토유적 제16호

위 치 충남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285

시 대 조선시대

설 명

이 정려는 효자 안동김씨 김익정과 그의 현손인 효자 김사준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김익정은 부모의 시묘살이를 각각 3년씩 행한 효자로 죽은지 20여년 후인 세조조에 명정을 받았으며, 김사준은 부친이 부스럼으로 고생할 때 연근을 구해드려 병을 낫게한 효자로 죽은 뒤 25여년 후인 명정조에 명정을 받았다. 그는 평생을 효행과 교육에만 전념하다가 1520년 81세의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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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탈 한국학

 

김익정(金益精){1}

?∼1436(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비(子斐). 아버지는 한성윤 휴(休).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문하부의 요직을 지냈고, 1409년(태종 9) 장령이 되었다. 이해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자, 그 별감이 되었다.그뒤 헌납·예문관직제학·승정원우대언을 역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충청·전라·경기의 삼도 감사를 지냈다. 내직으로 돌아와서 1422년 승정원지신사가 되어 군정(軍政)의 확립을 건의하였으며, 1425년 대사헌에 올랐다.1430년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으며,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과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이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고, 이조좌참판이 되었다.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전서공파 자료 종합>     (2004. 2. 8--2. 20. 주회(안) 제공)

전서공파 소개자료 01 ---전서공(成牧), 학당(休)  

현재까지 우리 사랑방에 단편적으로 소개되었던 전서공파 관련자료를 모두 모아 연재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전서공파>

成牧---休---①益精, ②益廉(→ 아산, 천안, 목천), 女+朴安生(순천박씨, 朴彭年의 조부)

益精---①潚(숙)---壽寧(태종의 손녀사위) →경상도 창령

-------②泂(형)---○○---○○---①사수, ②사준, ③사철, ④사민

①사수---金+吳(오) →신방리(방이골)

②사준 →양지촌

③사철---○○---濟鼎---基 →달전리

④사민 →경기 화성, 강화

 

전서공파의 파조가 되시는 成牧(성목)은 감찰사 장령을 역임했던 玖(구)의 2자중 장남으로 태어나 공조전서를 역임하였다. 그의 묘는 전동면 미곡리 학당에 있으며, 이곳에는 묘소를 실전한 부친 장령공 玖의 단비도 건립되어 있다. 연기대첩에 공을 세운 金 (김흔)의 연기와의 인연을 제한다면, 성목의 장자인 休(휴)는 전서공파 전의 입향조이자 연기지역에 연고를 가진 최초의 안동김씨 인물이 된다. 그러면 왜 전서공과 그의 아들 휴가 전의 지역에 터를 잡고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을까? 현재로서 우리는 그 진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전서공의 백증조가 되는 金 (김흔) 장군이 연기대첩에 참전하여 공훈을 세웠던 인연도 결코 배제하여서는 곤란할 듯하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고려말의 안동김씨들은 충렬공 金方慶 부자의 행적이 보여주는 것처럼 국권의 중심부에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세력에 의한 조선건국에 동조할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休는 호를 學堂(학당)이라 하였고 고려 공민왕 때에 검교로 있으면서 왕을 시종하였다. 어려서 포은 정몽주에게 수학하였고, 조선 개국 후에는 전의 운주산 밑 학당(현 전동면 미곡리 학당)에 은거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남면 양화리에 터전을 잡은 부안임씨 입향시조 임란수 장군도 같은 시기에 연기에 인연을 맺고 있어 두 인물간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한다. 전의에 은거한 休에게 태조는 護軍에 임명하지만 그는 노친을 봉양한다는 구실로 사퇴하였다. 그러자 태조는 다시 가선대부 한성부 판윤에 임명하는데 이때도 그는 끝내 새로운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성리학에서 가장 중시하는 忠,孝,烈의 三綱의 도리를 실천하여 주위의 칭송을 들었다고 한다.

 

81세로 일기를 마쳤으며 부인은 선산김씨이고, 슬하에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益精(익정)은 효자로 정려를 표창받았으며, 차남은 益廉(익렴)이다. 형제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막내 사위가 바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朴彭年(박팽년)의 조부인 ★朴安生(박안생, 순천박씨)이었다. 연기지역에 순천박씨들의 터전을 마련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같은 안동김씨의 사위로 입향함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의 외손으로는 이외에도 타우 ★李翔(이상), 도암 ★李縡(이재) 등이 유명하다.

 

학당리에는 전서공파의 파조가 되는 成牧과 아들 休의 묘소와 재실이 있는데, 金成牧의 묘비는 구비는 戊午년에 건립된 것이고, 1992년에 새로 수립되었고, 休의 유허비는 원래 1819년 戊午년에 세워졌었는데, 1992년에 새로 세웠고 주변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

 

○ 學堂公(休) 遺墟碑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학당 마을 입구에 세워진 이 유허비는 1819년(순조19) 후손 ★光淳(광순) 등이 건립한 것으로 전의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2km정도 떨어진 미곡리 학당 마을에서 수구동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의 주변은 논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다.

 

이 유허비의 둘레는 최근 화강암 석재로 단장해 놓았으며, 유허비는 대좌(비석받침)와 이수(비석의 머리장식)를 갖추고 있는데 대좌는 4각의 화강석재로 크기는 너비 120cm 두께 70cm 높이 40cm이다. 비의 몸체 역시 화강석재를 사용했으며 크기는 너비 80cm 두께 25cm 높이 180cm이며, 빗머리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이 두 마리 엉켜있는 모습을 조각하였으며 너비 90cm 두께 30cm 높이 60cm이다.

 

이 유허비문은 ★宋穉圭(송치규)가 찬했으며, 후면에는 외후손인 ★李采(이채)가 찬한 후록이 있다. 글씨는 ★金鑛(김광)이 서했으며 이 유허비의 건립에는 후손으로 전의현감으로 부임했던 ★金奎漢의 주선이 컷었다고 한다. 건립후 丙申년 2월에 개각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義鉉, ★國鉉 등의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1896년(고종33)이 아닌가 추측된다.

 

여말선초의 갈림길에서 우리 선조님들은...

 

▣ 여말충의열전 (1996, 고려숭의회)

靖節編 典書 ●金成牧(?-?)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공은 안동인으로 구(王+久)의 아들이요, 밀직사사 承用의 손자요, 평장사 方慶의 후손이다.

여말이 벼슬이 공조전서에 이르렀다.

 

때에 고려를 반역하여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이 조정에 창궐하여 고려의 운이 기울어지자 선생은 문하평리 변빈, 판서 성만용, 박사 ★정몽주, 제학 홍재, 대사성 이색, 전서 조열, 전사 이오, 단구재 김후 등과 공당에서 기약없이 모여 술을 기울이며 정란을 상심 개탄하다가 합잠시를 지어 읊고 눈물을 흘리며 이색이 말하기를

 

"옛날 은나라에 3仁이 있어 나라가 망하자 비간은 죽고, 미자는 가고, 기자는 종이 되었다고 하니 우리도 각자의 의사에 따라 행동합시다" 하고 마침내 고려가 망함에 모두 망복지신의 절의를 지켜 은거하였다.

 

義節編 學堂 ●金休 (?-?)

*방경- (1/5)선- (2/4)승용- (2/2)구- (1/2)전서공 성목- 휴

자는 연부요 호는 학당이고 成牧의 자로 안동인이다.

공은 고려말에 사간을 역임하고 <金承露 實錄>

고려가 망함에 향리에 퇴둔하여 조선조에서 여러차례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을 교육하면서 그 貞節을 지켰다. <대동운부군옥>

유고(遺稿)가 있다.

 

 

呈從叔척若齋島配時韻 / 종숙척약재 유배때 보낸시< 학당(學堂) 休(휴)>

大理島中叔是非 / 대리도에 계신 숙주(叔主)의 시비(是非) 때문에

浮雲山下姪冠衣 / 부운산 밑에있는 종질(從姪)은 의관(衣冠)이 잦습니다.

島山千里相思夜 / 도산천리(島山千里) 떨어져서 서로 사모(思慕)하는 밤에

自獨無言不掩扉 / 스스로 홀로 말없이 사립문을 못닫나이다.

 

학당(學堂) 김휴(金休) 고려충정왕2년 (1350) - ?

안동인, 자는 鍊父(연부), 정몽주 선생의 문하생.

父는 전서공 김성목이며 아들이 김익정이다.

 

■ 연기군지, 1988

▣ 金休 고려충정왕2년 (1350) - ?

안동인, 자는 鍊父(연부), 정몽주 선생의 문하생이며 고려 공민왕때 檢校近侍(검교근시)라는 벼슬자리에 올랐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 때 護軍의 명을 받았으나 연로한 아버지 (고려 공조판서를 지낸 바 있는 金成牧)를 모시기 위하여 직을 사양하고 송도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현재의 연기군 전의면 운주산 아래 거처할 장소를 구하여 은거하였다.

 

태조는 다시 가선검교 한성좌윤이라는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아 그의 문하생 중에서 충효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 명인들이 유허비를 세웠는데 연기군 전의면 미곡리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가 은거하고 있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를 따라 학당리라 일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림 : 김휴 유허비

<구연기군지, 고장의 빛나는 얼과 전통(연기군), 해동인물지>

▣ 金休 유허비

소재지 : 전동면 미곡리 학당부락

이 유허비는 어느 연대에 건립하였는지 미상이나 다만 ★李采(이채) 찬, 金★鑛(김광) 서로 되어 있고, 현재 그 지점은 밭으로 되어 있다.

비의 내용은 김휴가 정몽주가 순절하자 세상을 한탄하고 벼슬길에서 떠나 향리로 내려와서 강학으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검교김공 유허비

<비후면> 書고려검교학당김공狀錄後

가선대부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삼주 이채 찬

통정대부 행형조참의 연안 김광 서

 

<자료소개> (2005. 1. 29. 주회(안) 제공)

1) 김사수(金師秀)

■ 연기군지

○김사수(金師秀) : 김귀년(金龜年)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현감(縣監)을 지냈다. 선정비(善政碑)가 있는데 야당(野塘) 홍성민(洪聖民)이 찬(撰)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묘비의 글씨를 썼다.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益精의 현손대에 이르러 인물들이 배출되어 이 가계를 번창하게 하는데, 첫째인 師秀(사수)는 1490년(성종21)에 태어나 사헌부 감찰과 회덕현감을 역임하였고, 압실에 있는 묘소의 묘비를 石峰 韓濩(한호)가 써서 유명하다.

 

* 회덕현감 師秀의 묘갈문

師秀의 행적을 간략히 적고, 특히 회덕현감으로 재임중에 백성들이 선정을 노래하였다는 것, 향리에 돌아와 지극한 효성을 지녔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묘갈문은 명필로 알려진 한석봉의 글씨이다.

 

* 회덕현감 金師秀의 묘비

이 묘비문을 한석봉이 써서 유명하다.

 

拙翁集卷之十

碑銘ㆍ碣銘

 

懷德縣監金公墓碣銘

 

金生九鼎狀厥大父行。來叩某曰。今將石于墓。敢請銘。蓋致其父節度公之意也。某於節度公舊。欲辭而未。公諱師秀。字公彦。金氏籍安東。古也。有曰方慶。翊麗朝。爲公上洛。入國朝。益精以文學顯。參判于吏曹。參判生進士?。進士生贈判事司導寺富寧。寔生皇考。曰龜年。贈刑曹參議。?李氏。國姓。誼成君寀。其考也。公少志學。擧不中。晩補禮賓別坐。遷直長宗簿。主簿繕工。由監察出監懷德。民歌其惠。卽閑于全義鄕之郊者餘十年。公奉先考。嘗曰。吾不忍死吾親。吾當生事之于廟。晨昏見而朔望享。出入而告面之。生在弘治庚戌。歿于癸丑三月。葬于全之鴨谷先塋側。後贈嘉善戶曹參判。以子貴也。夫人趙氏。長端府使世禎女。端直且嚴。家有式。誠于祀。手紡績不老倦。福可德對。子旣貴。孫至曾玄熾。年九十二而逝。當萬曆乙酉四月。是年九月。葬與公合。有男四。長節度使?(오)也。次錞。監察。鍊。禦侮將軍。?(  )。建功將軍。節度男長。卽九鼎。次治鼎, 台鼎。女適評事柳拱辰。監察男曰大鼎, 寶鼎。禦侮男曰潤鼎。中武科。次周鼎。建功男曰安鼎, 應鼎。女長嫁忠義衛李夢軫。次爲進士趙德年妻。某嘗目節度公動止中度。心偉之。今見九鼎狀。始信家有訓。而餘慶有自。銘曰。

 

家孝官謹盡所職。克婦克母配以德。齊美獲?大厥慶。壽蹟于石子亦令。

 

拙翁集卷之十  

 

형태서지

권수제 拙翁集

판심제 拙翁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1631年刊의 後刷本

권책 10권 4책

행자의 수 10행 19자

반곽의 크기 19×14.2(㎝)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번호 奎405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46

 

저자

성명 홍성민(洪聖民)

생년 1536년(중종 31)

몰년 1594년(선조 27)

자 時可

호 拙翁

본관 南陽

시호 文貞

봉호 益城君

 

2) 김오(金 金吳)

■ 연기군지

○김오(金 ) : 김사수(金師秀)의 아들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통어사(統禦使)를 지냈다.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師秀의 장남인 金吳(오)는 1520년(중종15)에 태어나 명종때 무과에 급제하여 12주의 목사와 4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묘비는 柳拱辰(류공신)이 찬하고 서하였다. 이 가계는 전의면 신방리(방이골)에 세거하고 있다.

 

■ 안동김씨 홈

7)金 金吳 : 전서공 후손. 1520년(중종15)에 태어나 명종때 무과에 급제. 12주의 목사와 4도 병마절도사를 역임. 현감 金師秀의 자. 선계는 김휴-김익정-김형-김부녕-김귀년-김사수(현감)-김오(병사)-金九鼎

 

<1580년 경진보>

4)1577년 (정축년. 선조 10년), 金齊賢(제. 김곽의 자)이 옥산(현 전남 해남)으로 전보됨에 따라 그 부임 초에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여러 宗長들에게 세보 편집과 발간 문제를 품의함. 또한 강화부 백령공(?. 휘 오)과도 상의하여 본 족보와 대조해 보고 당시에 편찬된 파평윤씨와 전성이씨 등의 姓譜를 모방하여 문제가 되었던 외파에 대한 기록 문제에 있어 외손의 지파는 삭제하고 同姓의 자녀만 기록하기로 결정함.

 

6)그 후(1580년. 경진년. 선조 13) 감사공(휘 億齡. 익)과 참찬공(휘 瓚. 익)이 여러 종친들과 함께 이 문제를 협의하였는데, 당시 강화부사로 있던 병사공(휘 金吳  . 전)가 충청도 절도사가 된 뒤 천안(金 昉)으로부터 이 사업을 인수하여 다시 교정하고 자신의 비용으로 판각하여 출판을 마침.

 

3) 김구정(金九鼎)

■ 충렬공 행장

또 한 책이 있으니 김감사 덕룡(金監司 德龍) 이 기도(箕都=평양)에서 인출(印出)해서 반포(頒布)한 것이다. 그 글을 본즉 이것과 틀린 바 없으니 이제 아울러 쓰게 되면 중첩(重疊)이 됨으로 단지 그 발미(跋尾)만을 아래에 부기(附記)하는 바이다

후손 구정(後孫 九鼎)은 삼가 기록함(謹識)

 

■ 연기군청 홈페이지

학당(學堂)골 김휴(金休)

본(本)이 안동(安東)으로 서기 1350년(고려충정2)고향에서 출생했다.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문하생(門下生)으로 고려 공민왕땐 검교근시(檢校近侍)라는 벼슬에 있었고 고려가 실가되자 이태조 등국시 호군(護軍)에 명을 받았으나 연로하신 아버지(고려공조전서 성목:成牧)을 모 시고자 송도(松都)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오늘의 전의(全義)운주산 아래 병 거지(屛居地)를 정하여 은거하자 태조가 하선검교 한성좌운(漢城左尹)이라는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초야(草野)에 묻혀 있으면서 학문을 더욱 빛나게 닦아 그의 문하생으로 충효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명인(儒林名人)들이 유허비를 세웠고 운주산 아래서 살았으니 지금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號)를 따라 학당리(學堂里)라 일 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참고문헌 : 碑文, 族譜

김 휴 유허비

[소 재 지]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시 대] 고려시대

안동인으로 자는 연부 정몽주 선생의 문하생이며 고려 공민왕때 검역 근시라는 벼슬 자리에 올랐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때 호군의 명을 받았으나 연로한 아버지 (고려 공조판서를 지낸바 있는 감성목)을 모시기 위하여 직을 사양하고 송도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현재의 연기군 전의면 운주산 아래 거처할 장소를 구하여 은거하였다.

 

태조는 다시 가선검교 한성좌윤 이라는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않이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더욱 닦아 후세 양성에 전력 하였으며 그의 문하생 중에서 충효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명인들이 유허비를 세웠는데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가 은거하고 있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를 따라 학당리라 일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박안생 유허비

[소 재 지] 연기군 전동면 송곡리

[크 기] 비신 - 62 x 29 x 153cm (고)

    비좌 - 95 x 72 x 36cm (고)

    옥개 - 105 x 75 x 40cm (고)

조선국의령고사 중 이조판서 순천박공안생지묘 증 정부인 안동김씨부후라고 묘비에 쓰여 있으나 건비연대는 불확실하다.

박안생은 박팽년의 조부이며 묘제는 고려시대의 모형을 닮은 것으로 추정된다.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 연기 미곡리 김휴 유허비

【관리번호】 339-840-231-151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 기타비(유허비)

【유적위치】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유적 분포지도 참조

【소 재 지】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학당리 마을

【시 대】 조선시대

【관 리 자】

【유적내용】

 

전의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2㎞ 정도 떨어진 곳에 미곡리 학당이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수구동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는데, 비석은 이 고개의 상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의 주변은 논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다. 이 유허비의 둘레는 최근 화강암 석재로 단장해 놓았다. 유허비는 대좌와 비신과 이수 등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화강석재를 가공하여 제작하였다. 대좌는 방형의 화강석재로 규모는 너비 120㎝, 두께 70㎝, 높이 40㎝이다. 비신 역시 화강석재를 사용했으며 규모는 너비 80㎝, 두께 25㎝, 높이 180㎝이며, 이수는 너비 90㎝, 두께 30㎝, 높이 60㎝이다. 이수는 방형으로 여의주를 입에괼 용이 두마리 엉켜있는 조각이 되어있다. 이 유허비는 영조 35년(1759)에 세워진 비로 가선대부대사헌 ★송치규가 찬했다. 후면에는 김공행장이 적혀있는데 ★이채가 찬하고 통정대부 형조참의 ★김광이 서했다.

 

【참고문헌】

【비 고】

●김휴의 외증손자

★박팽년(朴彭年)

1417(태종 17)~1456(세조 2). 조선 초기의 문신. 단종복위운동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 자는 인수(仁#수04), 호는 취금헌(醉琴軒). 회덕(懷德) 출신. 안생(安生)의 손자이며, 중림(仲林)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44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이듬해는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뒤 1455년(세조 1)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음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때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등 당대의 유망한 젊은 학자들과 집현전의 관원이 되었다. 이들 학사들은 모두 그 시대의 이름높은 선비들이었으나 그 가운데서도 경술(經術)과 문장․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삼대가 화를 입은 멸문(滅門)으로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추강집》의 사육신전이나 다른 서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경술과 문장․필법에 뛰어난 존재로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명문(名文)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되나 이와같은 문집이 전하지 않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단종이 왕위를 잃게 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하여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왔으니, 이와같은 높은 절의는 오늘날까지 온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그의 묘에는 그저 박씨지묘(朴氏之墓)라고 새겨진 표석(表石)이 새겨져 있다. 그 이유에 대하여 허적(許積)은 ꡒ성삼문 등 육신이 죽은 뒤에 한 의사(義士)가 그들의 시신(屍身)을 거둬 이곳 강남(노량진) 기슭에 묻었으며, 그 무덤 앞에 돌을 세우되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저 ꡐ아무개 성의 묘ꡑ라고만 새겨놓았다.ꡓ라고 설명하고 있다.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는데, 특히 필법에 뛰어나 남북조시대의 종유(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버금간다 하였다. 이 묘역은 1978년 사육신공원으로 단장되었으며,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또한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肅宗實錄, 正祖實錄, 莊陵誌, 尤菴集,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槿域書畵徵(吳世昌, 啓明俱樂部, 1928)

韓國繪畵大觀(劉後烈, 文敎院, 1969). 〈李在範〉

 

●김휴의 외후손

★이상(李翔){1}

1620(광해군 12)~1690(숙종 1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운거(雲車) 또는 숙우(叔羽), 호는 타우(打愚). 유겸(有謙)의 아들이다. 송시열(宋時烈)을 통하여 김집(金集)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1658년(효종 9)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과 함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자의에 임명된 뒤, 산림직(山林職) 진선을 역임하였으며, 1661년(현종 2) 이후 지평을 비롯한 장령․집의 등의 사헌부 관직을 맡기도 하였다. 현종 말년의 예송(禮訟)에서 남인인 허적(許積)을 탄핵하다가 실세하였으나,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재등용되어 1681년에 사업이 되고, 그뒤 형조참의․우윤․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숙종연간에 노론과 소론이 분기할 때에는 송시열을 따라 노론의 편에 서서 남인의 등용을 주장하는 소론의 주장을 반대하였다.

1688년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먼 친척 유두성(柳斗星)의 음행사건을 고발하였으나 증인을 교사하고 재산을 탐냈다는 죄로 처벌받고,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세한 뒤인 1690년 옥사하였다.

1717년 서인들의 두호로 복관되었으며, 이조판서를 증직받았다. 전의의 뇌암서원(雷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참고문헌

孝宗實錄, 顯宗實錄, 肅宗實錄, 淸選考, 17세기 山林의 進出과 機能(禹仁秀, 歷史敎育論集5, 1983). 〈吳洙彰〉

 

●김휴의 외후손

★이재(李縡){3}

1680(숙종 6)~1746(영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진사 만창(晩昌)의 아들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1702년(숙종 28)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어 《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704년 설서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사서가 되어 170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문학․정언․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709년 헌납․이조좌랑․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하였고, 1711년 이조정랑으로 승진, 이어 홍문관의 수찬․부교리․응교․필선․보덕 등을 지내고 집의로 옮겼다.

1712년 장악원정․수원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1713년에 형조참의․대사성, 1715년에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는데, 이때 《가례원류 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싼 시비가 일어나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719년 형조참판․승문원제조․부교리 등을 거쳐 경상도에 균전사(均田使)로 파견된 뒤 당면한 토지정책을 논하다가 파직되었으며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1721년(경종 1)대사헌․동지춘추관사를 겸하였다가 실록청당상에 임명되었고, 이조참판에 제수되면서 실록청도청당상으로 승진하였다. 같은해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소론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

1722년 임인옥사 때 중부 만성(晩成)이 옥사하자 은퇴하고, 인제에 들어가서 성리학연구에 전념하였다.

 

1725년(영조 1)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하여 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으나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성립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된 바 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尹鳳九)․송명흠(宋命欽)․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하여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 예학(禮學)에도 밝아서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도암집 陶菴集》․《도암과시 陶글科詩》․《사례편람 四禮便覽》․《어류초절 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景宗實錄, 英祖實錄, 國朝榜目, 陶菴家狀, 陶菴年譜, 陶菴語錄, 老洲集. 〈李載琥〉

 

●학당공(休) 유허비 찬, 김익정 정려중건기 찬자 소개

★송치규(宋穉圭)

1759(영조 35)~1838(헌종 4).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기옥(奇玉), 호는 강재(剛齋).

아버지는 환명(煥明)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사덕(思德)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6대손으로 김정묵(金正黙)의 문인이다.

학문은 독서궁리(讀書窮理)를 근본으로 하고 반궁실천(反窮實踐)을 목표로 삼아, 평생을 이이(李珥)와 김장생(金長生)․송시열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지키는 데 전념하였다.

1798년(정조 22) 경상도관찰사 한용화(韓用和)의 천거로 영릉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은 것을 비롯, 이듬해 원자궁강학청료(元子宮講學請僚), 1800년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와 호조좌랑, 1801년(순조 1) 사헌부지평 등에 잇따라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뒤에도 1804년 군자감정(軍資監正), 이듬해 사헌부집의, 1812년 세자시강원진선․공조참의, 1815년 시강원찬선․공조참판, 1816년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당대의 거유로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평생을 두고 벼슬을 사양한 것은 스승 김정묵이 뜻하지 않은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유적(儒籍)에서 제적되었기 때문으로 전한다.

그러나 72세가 되던 1830년 왕의 간곡한 부름을 받아 세손의 시강원찬선을 거쳐 대사헌을 지냈고, 이듬해 이조참판이 되었다가 1838년(헌종 4) 80세의 수직(壽職)으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강재집》이 있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憲宗實錄, 剛齋集, 梅山集. 〈權五虎〉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休의 아들 益精(?-1436)은 호를 雲庵(운암)이라 하였는데 부친과는 달리 1396년(태조5) 문과에 급제한 뒤 삼사의 요직을 거치고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충청, 전라, 경기감사를 역임하였다. 그후 내직에 다시 들어와 대사헌, 이조참판, 예조참판, 형조참판을 지냈고, 1435년 경상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전의를 떠나 벼슬길에 올랐기 때문에 묘소는 양주 고령산 고령사 서남쪽 3리 지점에 있었으나 실전하였다. 그리하여 전의면 압곡에 설단하였고, 압곡에는 그의 효자정려가 있다.

 

益精은 영월군사로 있을 때 청렴하고 흥학에 공이 커서 지금까지도 칭송되고 있으며, 3년의 시묘로 효행이 출중하여 효자정려를 포장받았다. 현재의 정려중건기는 1824년(순조24) ★宋穉奎가 찬했으며, 현감 ★兪漢芝(유한지)가 글씨를 썼다.

 

동생인 益廉도 태종 무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까지 지냈다. 묘소는 전의 만노곡에 있다. 형제가 함께 3년의 시묘살이를 한 것으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益廉의 후손들은 현재 아산, 천안, 목천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김익정(金益精)이 모친께 드리는 제문

아, 본성이 착한 분이 이렇게 되고 말았단 말입니까. 곧고 아름다운 성품을 타고나 스스로 근검을 힘써 실천 하였습니다. 17세에 부친의 배필이 되어 훌륭한 부도를 갖추시고 집안 살림을 법도에 맞게 하였습니다. 시부모 섬기기를 효도로써 하고, 자녀를 가르침에 방도가 있으시어 어리석은 저를 또한 장성하게 하셨습니다. 족친에게 은혜롭게 하고 이웃 마을에 까지 사랑이 미쳤으며 노소의 비복(婢僕)들을 두루 어루 만지고 보살피셨습니다.

 

제가 옛적 약관의 나이가 지난후, 벼슬에 나가 영화롭게 봉양할 뜻을 두어 책을 끼고서 학문에 종사하여 대과에 급제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사판(仕版)에 올라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노력하여 근심을 끼치는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음식을 봉양하고 안부를 여쭙는 일을 일찍이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멀리 계신 어머니를 뵙고 싶어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한순간도 떨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지낼 뿐이었으므로 마음이 매우 슬펐습니다. 어머니께서 오래 사시면 곁에서 모시고 저의 직분을 다하여 여생을 위로해 드릴 날이 꼭 있을 것이라 생각 하였으니, 간절한 이 회포는 실로 하늘이 살펴 아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지난해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받드니, 지난날 잘못을 후회하여 깨닫고 이제야 옳게 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한번 편찮으시더니 쾌차하지 못하시고 그길로 이렇게, 길이 어긋나 저에게 영원한 슬픔을 품게 하였습니까.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저의 허물입니다. 효도 할날은 짧고 충성을 바칠 날은 길다는 예전 사람의 가르침에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슬퍼하는 조모께서 오히려 당에 계시니 기거 안부를 살피는 부지런함을 어머니의 뜻에 이어 실추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손수 한잔 술을 떠서 영전에 바치고 제문을 읽습니다. 영령께서는 곁에 계실 터이니, 아. 흠향하소서.

 

아, 어머니께서는

저를 길러 장성하게 하셨으니

고생 고생 저를 기르시며

영화로운 봉양 보리라 여겼습니다.

하늘이 저를 불쌍이 여기지 않아

홀연히 어머니를 잃게되니

나가서는 안부를 물을곳이 없고

돌아와서는 이를데가 없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마음은 더욱 아팠으니

색동옷 입고 재롱부리던 일

꿈속 같은데

저의 이 생이 마치도록

다시 할수 없습니다.

어머니 께서 만들어 주신 옷이

아직까지 저의 몸에 있는데

지금 후한 녹을 받기에 이르러

어머니께 미치지 못하니

어떻게 덕을 갚을지

하늘을 우러를 따름입니다.

아, 아름다운 우리 임금께서

저를 공신이라 일컫고

어머니의 작호를 내리시어

한국부인이라 하셨습니다.

 

춘정집(春亭集)에서 옮겼습니다.

춘정집에 익정 선조님 과의 관계된 시도 몇편 있는것으로 보아

춘정 변계량 선생과 가깝게 교유하지 않았나 생각 됩니다.

 

형조 참판 김익정(金益精)의 졸기(卒記)

형조 참판 김익정(金益精)이 졸(卒)하였다. 익정의 자는 자비(子斐)이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을과(乙科) 제 1등에 합격하여 여러번 천직(遷職)되어 습유(拾遺)․헌납(獻納)․장령(掌令)․지사간(知司諫)․대언(代言)에 임명되고, 나가서 충청․전라․경기 삼도(三道)의 감사를 지내고, 들어와서 동지총제(同知總制)․경창부 윤(慶昌府尹)․대사헌, 이조․예조․형조 삼조의 참판을 거쳤는데, 이때에 이르러 돌아갔다.

조문(弔問)과 부의(賻儀)를 내리고 제사를 내렸다.아들 둘이 있으니 김숙(金潚)과 김형(金泂)이었다.

≪출전 : 세종실록 71권 세종18년 1월26일(임진)≫

김익정(金益精)의 가족관계

박안생(朴安生)은 전의(全義)의 명족(名族)인 안동김씨 한성좌윤 학당(學堂) 김휴(金休)의 둘째 따님에게 장가들어 처가 근처로 이사하니 그가 살던 전의읍치 북쪽의 상(上), 중(中), 하대부리(下大夫里) 일대를 박동(朴洞)이라 부르기도 하였다,한다. 현재의 전의면 관정리(觀亭里) 일대이다. 상대부리는 전의읍치에서 7리, 하대부리는 5리 떨어진 곳이다.

 

박안생(朴安生) 의영고사(義盈庫使), 목사(牧使)를 지냈다.

자(子): 박중림(朴仲林) 한석당(寒碩堂)1400 ~1456) 이조, 형조판서를 지냈다.

손(孫): 박팽년(朴彭年) 취금헌(醉琴軒)1417 ~1456) 사육신 시호 충정이다.

 

ꡒ전의읍지에 의하면 집 부근에 한석정(寒碩亭)이라는 정자를 지어 놓고 있었다. 따라서 박중림은 외가가 있는 학당리에서 탄생하여 박동에서 성장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ꡓ

 

김익정(金益精)1375~1436)은 박중림의 큰외숙으로 태조5년(1396) 근정전 친시과에서 장원급제한 재사 이었는데, 재주뿐 아니라 인물도 빼어나게 잘생겨서 일찍이 태종의 눈에 띄어 청요의 직책을 두루 거친다음 세종이 세자가 되었을때는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으로 발탁되어 세종의 측근이 된다. 그래서 세종이 즉위(8월8일) 하자마자 좌부대언즉 좌부승지가되어 우대언, 좌대언을 차례로 거치면서 세종2년(1420) 12월9일에는 지신사(知申事)즉 도승지에 오르고 세종4년(1422)12월12일 파직 될때까지 항상 세종을 그림자 처럼 따라다니며 모시는데 태종과 세종이 베푸는 사사로운 연회좌석 마다 빠지지 않고 시연(侍宴)할 정도로 총애를 받았었다. 결국 국왕과 이런 근밀한 관계가 뭇사람들의 시기를 사게되어 하찮은일로 파직되지만 충청도관찰사, 예조참판, 대사헌, 형조참판, 이조참판, 호조참판, 한성부윤, 전라도관찰사, 경상도관찰사등을 역임하고 세종15년(1433)과 세종16년 양차에 걸쳐 하정사(賀正使)와 성절사(聖節使)의 정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다. 특히 하정사가 되었을 때 부사는 누이의 손자인 박팽년의 외조부 김익생 이었으니 사돈간에 정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된셈이다. 또 김익정은 절제 김종서의 재종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김종서는 ꡒ단종실록ꡓ권2 단종즉위년(1452) 임신(壬申) 7월4일 을미조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종서가 이르기를… 김익정은 바로 내 재종형이라 내가 사람됨을 상세히 안다. 염치와 절개를 스스로 지키고 신의와 과단을 스스로 기약하였으니 국량이 좁다고 한다면 그럴만 하지만 사헌부의 장이되어서는 남의 뇌물을 받았다면 결단코 그리하지 않았으리라. 재종형제의 촌수가 성립되는 것은 김종서의 조모가 선산김씨(善山金氏) 우류(右謬)의 따님이라 하였고, 김익정의 모친이 선산김씨라 하였으니 김종서의 조모가 김익정 모친의 고모가 됨으로써 선산김씨를 같은 외가로 하기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김익정의 생질인 박중림과 김종서와도 척분(戚分)이 생기게 되어 김종서가 박중림을 대사헌으로 천거하면서 그가 그의 족인(族人)이라 하였던것이다. 박중림의 장인 즉 박팽년의 외조부인 김익생이 부사가 되고 박중림의 외삼촌인 김익정이 정사가 되어 함께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영광을 누리며, 9월2일에 김익정은 한성부윤이 되고 10월30일에는 김익생이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어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며 11월16일에는 다시 예조참판 김익정이 성절사 정사가 되어 명나라로 사신이 되어 간다. 그리고 세종17년(1435) 을묘 3월21일 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갔던 김익정이 돌아와 3월27일에 함길도관찰사로 내려가 있던 김종서를 함길도 병마도절제사를 삼아 북변확장을 전담하게 한다. ?이하생략-

 

조선왕조 충의열전에서 옮김

▣ 솔내영환 - 김종서는 문온공파와도 사돈지간입니다. 문온공의 장현손(문온공-김명리-김맹헌-김자정-김연수)인 김연수(대사헌 역임)의 배위가 김종서의 따님입니다.

 

 

조선초기 활자 인쇄술을 요약해 보면

1) 계미자는 태종3년(계미, 1403)에 주자소를 설치하면서 조선시대 최초로 주성된 동활자이고,

2) 경자자는 세종2년(경자, 1420)에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하여 주성된 동활자로 주조기간은 11월에 착수하여 7개월이 걸려 완성하였다. 이천과 남급이 주관하고 ★金益精 등이 감독하였다.

→경자자 제작감독에는 우리 가문의 전서공파 ★김익정 선조님께서 참여하였다

3) 1434년 초주 갑인자는 이후 6차례 (혹은 12차례) 개주된 바 있는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백미로 우리 가문의 군사공파 ★김돈 선조님께서 글자체 및 제작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 디지털한국학

김익정(金益精){1}

?~1436(세종 18).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비(子斐). 아버지는 한성윤 휴(休).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문하부의 요직을 지냈고, 1409년(태종 9) 장령이 되었다. 이해에 쇄권색(刷卷色)을 설치하자, 그 별감이 되었다. 그뒤 헌납․예문관직제학․승정원우대언을 역임하고,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가 충청․전라․경기의 삼도 감사를 지냈다. 내직으로 돌아와서 1422년 승정원지신사가 되어 군정(軍政)의 확립을 건의하였으며, 1425년 대사헌에 올랐다.

1430년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되었으며, 이듬해 인순부윤(仁順府尹)과 경창부윤(慶昌府尹)을 거쳐 이조참판․예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고, 이조좌참판이 되었다. 1435년 경상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참고문헌

太祖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 燃藜室記述, 國朝榜目. 〈崔完基〉

 

■ 연기군지, 1988

金益精 ? - 세종31년 (1449)

 

안동인, 자는 자?, 호는 雲庵이며 金休의 아들이다.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태어난 그는 태조5년(1396)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이어 습유, 헌납, 사간을 역임하고 대사헌의 직을 맡고 있던 중 노친을 모시기 위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고 하는데 부모가 사망하자 6년간을 시묘하였다. 이어 태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정계에 진출하여 충청,전라,경기관찰사를 지내고 세종17년(1435)에는 동지총제, 경창부윤을 거쳐 이조, 형조, 예조참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태조,태종,세종실록, 해동인물지, 한국인명대사전, 구연기군지, 연기군정려대장>

 

■ 조선 문과, 사마방목

★김익정(金益精) More Info.

태조(太祖)5년(1396년), 식년시(式年試) 을과1(乙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휴(金休)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성목(金成牧)

증조부(曾祖父) ★김구(金玖)

외조부(外祖父) ★김효신(金孝信)

처부(妻父) ★권담(權湛)

손(孫) ★김수녕(金壽寧)

제(弟) ★김익렴(金益濂)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이조/참판&(吏曹/參判&), 대사헌&(大司憲&)

 

★김익렴(金益廉)

태종(太宗)8년(1408년), 식년시(式年試) 을과3(乙科3)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휴(金休)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성목(金成牧)

증조부(曾祖父) 김구(金玖)

외조부(外祖父) 김희신(金希信)

처부(妻父)

형(兄) 김익정(金益精)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관직(官職) 지평&(持平&)

 

★김한(金漢)

단종(端宗)1년(1453년), 식년시(式年試) 정과14(丁科14)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김익렴(金益濂)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휴(金休)

증조부(曾祖父) 김성목(金成牧)

외조부(外祖父)

처부(妻父) ★최수민(崔秀民)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승의(承義)

품계(品階)

관직(官職) 직강&(直講&)

 

★김복수(金福壽) / 成宗 14 式年 進士

【시험년도】 성종(成宗) 14 (1483) 식년(式年) 진사(進士)

【합격등위】 3등 0085

【본인성명】 김복수(金福壽)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전력】 수의부위(修義副尉)

【부친성명】 ★김한(金漢)

【부친품계】 통덕랑(通德郞)

【부친관직】 성균관(成均館) /행직강(行直講)

 

송추(送秋)-김익정(金益精)

西風吹欲盡(서풍취욕진) : 서풍이 불어 다하려는데

白日向何歸(백일향하귀) : 여름은 어디를 향해 돌아가는가

?下?音斷(체하공음단) : 섬돌 아래 벌레소리 끊이고

天涯雁影稀(천애안영희) : 하늘 가에는 기러기 그림자도 드물다

山應臨別瘦(산응림별수) : 산은 응당 가을을 보내기에 파리하고

葉爲送行飛(엽위송행비) : 나뭇잎은 가을을 보내고 나르는구나

來往光陰變(래왕광음변) : 오가는 세월이 변해가니

衰翁也獨悲(쇠옹야독비) : 쇠한 늙은이야 홀로 슬퍼하노라

 

정대사(呈大使)-김익정(金益精)

欲歸歸未得(욕귀귀미득) : 돌아가려도 돌아가지 못하여

人事苦相牽(인사고상견) : 사람의 일이란 괴롭게도 서로 끌린다

回互路何遠(회호로하원) : 돌고 돌아 길은 어이 그리도 먼지

玄黃馬不前(현황마불전) : 머뭇 머뭇 말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秋風催落葉(추풍최락엽) : 가을 바람은 지는 나뭇잎 재촉하고

白髮報殘年(백발보잔년) : 흰 머리털은 쇠잔한 나이를 알린다

兩地相思恨(량지상사한) : 두 땅에서 서로 생각하는 마음의 한

難成一夜眠(난성일야면) : 하룻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노라

 

정대사(呈大使)

돌아가려도 돌아가지 못하노니 사람 일이 괴롭게 서로 끌리네.

돌고 돌아 길은 어이 그리 멀어, 머뭇 머뭇 말(馬)은 가지않네.

가을 바람은 지는 잎을 재촉하고 흰털은 쇠잔한 나이를 알리네.

두 땅에서 서로 생각하는 한(恨)으로 하룻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송추(送秋)

서풍이 불어 다하려 하는데,흰 날 어디를 향해 돌아가는고.

뜰 밑에는 벌레소리 끊이고, 하늘 가에는 기러기 그림자가 드물다.

산은 응당<가을을> 이별하기에 파리하고,

잎은<가을을>보내 노라고 나르네.

오가는 광음(光陰)이 변하니 쇠한 늙은이 홀로 슬퍼 하노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익정(金益精)․김익렴(金益濂)

▣ 제3권 p57<전의현 우거(寓居) 본조(本朝) ; 김익정(金益精)>

--김익정(金益精) : 안동(安東) 편 인물조에 자세히 발원하여 있다.

 

▣ 제3권 p432<안동대도호부 인물 본조(本朝)>

--김익정(金益精) ; 태종 조(太宗朝)에 장원급제하였다.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 제6권 p51<영월군 명환(名宦) 본조(本朝)>

--김익정(金益精) : 성품이 청렴하고 근엄하여 한 터럭만한 일도 백성을 요동시키지 않았다. 향교를 창설하여 백성의 마음을 진작시키고 학교를 일으키니 백성들이 다 감화하여, 지금까지도 강송(講誦)을 그치지 아니한다.

 

▣ 제3권 p57<전의현 우거(寓居) 본조(本朝)>

--김익렴(金益濂) : 김익정(金益精)의 아우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이르렀다. 두 사람 모두 3년 간 여묘(廬墓)를 살았다.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1982>

*한국문집 총간내의 김사수(金師秀) 묘갈 (2005. 1. 29. 주회(안) 제공)

 

拙翁集卷之十   碑銘ㆍ碣銘

懷德縣監金公墓碣銘

 

金生九鼎狀厥大父行。來叩某曰。今將石于墓。敢請銘。蓋致其父節度公之意也。某於節度公舊。欲辭而未。公諱師秀。字公彦。金氏籍安東。古也。有曰方慶。翊麗朝。爲公上洛。入國朝。益精以文學顯。參判于吏曹。參判生進士?。進士生贈判事司導寺富寧。寔生皇考。曰龜年。贈刑曹參議。?李氏。國姓。誼成君寀。其考也。公少志學。擧不中。晩補禮賓別坐。遷直長宗簿。主簿繕工。由監察出監懷德。民歌其惠。卽閑于全義鄕之郊者餘十年。公奉先考。嘗曰。吾不忍死吾親。吾當生事之于廟。晨昏見而朔望享。出入而告面之。生在弘治庚戌。歿于癸丑三月。葬于全之鴨谷先塋側。後贈嘉善戶曹參判。以子貴也。夫人趙氏。長端府使世禎女。端直且嚴。家有式。誠于祀。手紡績不老倦。福可德對。子旣貴。孫至曾玄熾。年九十二而逝。當萬曆乙酉四月。是年九月。葬與公合。有男四。長節度使?(오)也。次錞。監察。鍊。禦侮將軍。?(  )。建功將軍。節度男長。卽九鼎。次治鼎, 台鼎。女適評事柳拱辰。監察男曰大鼎, 寶鼎。禦侮男曰潤鼎。中武科。次周鼎。建功男曰安鼎, 應鼎。女長嫁忠義衛李夢軫。次爲進士趙德年妻。某嘗目節度公動止中度。心偉之。今見九鼎狀。始信家有訓。而餘慶有自。銘曰。

家孝官謹盡所職。克婦克母配以德。齊美獲?大厥慶。壽蹟于石子亦令。

拙翁集卷之十  

 

형태서지

권수제 拙翁集

판심제 拙翁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1631年刊의 後刷本

권책 10권 4책

행자의 수 10행 19자

반곽의 크기 19×14.2(㎝)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번호 奎4053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46

 

저자

성명 홍성민(洪聖民)

생년 1536년(중종 31)

몰년 1594년(선조 27)

자 時可

호 拙翁

본관 南陽

시호 文貞

봉호 益城君

 

 

해동잡록 - 김익렴(金益濂)

○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참판(參判) 익정(益精)의 동생이다. 태조(太祖)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형인 김익정과 함께 부모를 위하여 3년간 묘막에서 지냈다.

 

《출전 : 해동잡록 5 본조(本朝) 김익렴(金益濂)》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제8권 (8)

[精] 밝다. 바르다.

[김익정(金益精)]: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조선 태조(太祖) 임금때 장원(壯元)으로 뽑혀 벼슬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는데 글 잘한다는 이름이 있었다. 아우 김익렴(金益廉)과 함께 부모상(父母喪)을 위해서 3년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했다. 모두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京畿道安金史資料集

[세종실록 권13, 세종3년 8월 5일(을미)]

o 임금이 김익정(金益精)을 시켜 <광주> 헌릉(獻陵)에 제사할 때 백의(白衣)가 아닌 담복(淡服)차림으로 행사 한것으로 하연(河演)을 꾸짖음.

 

[세종실록 권13, 세종3년 9월11일(신미)]

o 상왕(上王)이 지병조사(知兵曹事) 민의생(閔義生)을 임금에게 보내어, 휘호(徽號)를 봉숭하는 내일 비가 올지 모르니 임금이 오늘밤 미리 <양주> 낙천정(樂天亭)으로 거둥 하라는 뜻을 전하자, 임금이 지신사(知申事) 김익정(金益精)을 보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존호(尊號)를 올리게 해달라고 청함.

 

[세종실록 권13, 세종3년 10월 6일(을미)]

o 변계량(卞季良), 지신사(知申事)김익정(金益精)을 <고양>벽제역(碧蹄驛)에 보내 명사(明使)를 위로 하게함.

 

[세종실록 권51, 세종13년 2월 25일(경신)]

o 특명으로 전 총제(摠制) 김익정(金益精)을 경기감사로 제수함.

 

[세종실록 권58, 세종14년 12월 18일(계묘)]

이조참판(吏曹參判) 김익정(金益精)이 금송(禁松)과 각도 공부(貢賦) 책정등의 문제를 아룀.

 

[세종실록 권71, 세종18년 1월 26일(임진)]

경기감사를 지낸 형조참판(刑曹參判) 김익정(金益精)이 졸(卒)함.

 

 

[연려실기술]의 김익정(金益精)

▣ 연려실기술 별집 제9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 3등과 총목(登科摠目) ▣

태조 2년 계유 봄에 송개신(宋介臣) 등 33명을 뽑았다. 을과(乙科)에 3명, 병과(丙科)에 7명, 동진사에 23명, 다음은 모두 같다. ○ 지공거(知貢擧) : 설장수(?長壽). 동지공거(同知貢擧) : 원굉(元紘)

 

동년(同年)에 감시(監試)에서 생원 안신(朴安信)등을 뽑았다. 5년 병자에 김익정(金益精) 등 33명을 뽑았다. 지공거 :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 조준(趙浚). 동지공거 : 판삼사(判三司) 정도전(鄭道傳). 고시관(考試官) : 우승지(右承旨)정탁(鄭擢). 좌산기(左散騎) : 이황(李滉). 대사성(大司成) : 함부림(咸傅霖). 판교서(判校書) : 유관(柳觀). 사헌중승(司憲中丞) : 이원(李原). 성균관 제주(祭酒) : 장덕량(張德良). 전부(典簿) : 강사경(姜思敬)

 

▣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야인(野人) 토벌 ▣

건주위(建州衛) 지휘 이만주의 관하 우량하[兀良哈]와 천호(千戶) 렐하[列兒哈] 두 사람이 문첩(文牒)을 가지고 포로로 잡힌 남녀 7명을 거느리고 여연(閭延)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이만주가 명 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토표(土豹)를 잡는데, 후라운[忽剌溫]우적하[兀狄哈] 등이 빈틈을 타 여연과 강계에 들어와 남녀 64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가면서 난투[暖禿]지방을 지날 때, 만주가 산골짜기의 요로를 질러막아 모두 빼앗아 보호하고 있으니, 원컨대 사람을 보내어 인솔해 가소서." 하였다. 임금이 정부와 육조(六曹)와 삼군(三軍)의 진무(鎭撫)들을 불러서 처치할 방법을 의논하니, 황희(黃喜)허조(許稠)안순(安純)과 판중추부사 하경복(河敬復), 찬성사 이맹균(李孟畇)성억(成抑), 공조 판서 조계생(趙啓生), 호조 참판 김익정(金益精), 공조 좌참판 전연(鄭淵), 예조 좌참판 유맹문(柳孟聞) 등이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강계(江界) 등지의 통사(通事)를 보내어 거느리고 와야 합니다." 하였다.

 

▣ 연려실기술 별집 제1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종묘(宗廟) 영녕전(永寧殿) ▣

세종 3년 신축에 영녕전을 세웠다. 이에 앞서 박은(朴?)이 소를 올리기를, ꡒ태조께서 4조를 추숭(追崇)하여 종묘를 세웠사온데, 지금 마땅히 신위를 옮겨야 할 조상은, 송 나라 제도에 의하여 별묘(別廟)를 세우소서.ꡓ 하였다. 이에 이르러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와 예조에서 아뢰기를, ꡒ송 나라 소희(昭熙) 4년에 4조의 신전(神殿)을 종묘 서쪽에 세우고, 조주(?主)인 희(僖)순(順)익(翼) (宣) 4조의 신주를 받들어 모시고 해마다 예관을 시켜서 제사드리게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목조(穆祖)의 신주를 옮겨야 하게 되었사오니, 이 제도에 의하여 따로 조묘(?廟)를 종묘 서쪽에 세우고, 신전의 칭호를 ꡐ영녕ꡑ으로 할 것을 청하옵니다.ꡓ 하니, 그 말을 좇았다.

 

처음에 태조가 4조를 추존하여 종묘에 향사하였는데, 태종 경인년 10년 에 송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별묘를 세우고, ꡐ영녕전ꡑ이라 하고 제사 시일과 제기(祭器)제수(祭需)의 다소 및 악기(樂器)의 차등을 의논하게 하니, 박은이 건의하기를, ꡒ문선왕(文宣王)은 다른 시대에 추존한 성인인데도 오히려 만세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립니다. 우리 4성께서는 성조의 처음 종묘에 모신 주인이시니, 마땅히 백 년을 두고 향사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사의 시일과 제기와 제수와 악기의 수효도 모두 문선왕의 제례에 의하여 시행하여야 하며, 옮겨 모실 때의 의장(儀仗)도 당(唐) 나라 대종(代宗)을 부묘(?廟)할 때에 헐린 사당을 옮기던 제도에 따라서 본실(本室)의 옛 의장을 사용하여 옮겨 봉안하도록 하소서.ꡓ 하였다. 박씨가승[朴氏家乘]

 

영녕전을 세운 것은 세종 3년의 일인데 여기서 태종 경인년이라고 하였음은 태조의 승하가 무자년의 일인즉, 경인년에 부묘한 후에, 영녕전의 건축을 의논하다가 실현하지 못하고 정종의 부묘가 신축년에 있었기 때문에 영녕전의 건축이 이 해에 있었던 것인가. 이때 예관들이 모여서 조묘(?廟) 짓는 장소에 대하여 의논하였는데 좌의정 박은과 참찬(參贊)변계량(卞季良)이 말하기를, ꡒ4조의 신전을 만일 종묘 신실(神室) 서쪽에 짓는다면, 종묘의 태조 이하가 모두 4조의 자손입니다. 자손들은 곁에서 네 절후마다 큰 제사를 받는데 선조인 4조가 제사를 받지 못한다면 인정상 미안한 일이니, 마땅히 종묘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야 한다.ꡓ 하였다. 이때 상왕(上王)이 풍양(?壤)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 이르기를, ꡒ하늘에 계신 선조의 영혼이 어찌 거리의 멀고 가까운 것으로 알고 모르겠는가. 마땅히 종묘의 서쪽에 세우고, 이름을 ꡐ영녕전ꡑ이라 하라.ꡓ 하니, 드디어 예조 판서이지강(李之剛)참판 하연(河演)참의 허해(許?)병조 참판이명덕(李明德)지신사(知申事)

 

김익정(金益精) 등에게 명하여, 풍수 지리를 아는 이양건(李陽建)고중안(高仲安)윤돈지(尹敦智)와 더불어 영녕전 터를 종묘 서쪽에 정하였다. 참찬(參贊) 허주(許稠)가 아뢰기를, ꡒ종묘의 다섯 신실이 매우 좁으니 조실(?室)을 반드시 종묘의 신실 그대로 할 필요는 없습니다.ꡓ 하니, 상왕이 이르기를, ꡒ종묘가 비록 좁다 하지만, 태조로부터 네 임금에 이르도록 받드는 데 부족한 일이 없었으니, 하필 달리 지을 것이 있겠느냐. 조실의 제도도 이에 의거하여 짓도록 하라.ꡓ 하였다.

6월에 붉은 글씨로 ꡐ전(前)ꡑ 자를 주독(主?) 전면에 써서 그 앞뒤를 구별하게 하였다. 10월에 영녕전이 낙성되었는데 예조에서 아뢰기를, ꡒ영녕전에는 따로 관청을 둘 것 없이, 종묘서(宗廟署)를 시켜 겸하여 관장하게 하소서.ꡓ 하니, 그대로 윤허하였다. 영녕전에는 춘추로 큰 제사만을 드렸는데, 제수는 종묘에 준하였다.

 

▣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世宗) ▣

상왕이 일찍이 포천(抱川)에 행차하였을 때에 곽존중(郭存中)에게 이르기를, "나는 나라를 맡길 사람을 얻어 산수 사이에서 한가히 노니 걱정없는 이로 이 세상에 하나이다. 역대 제왕들의 부자 사이를 보면 실로 나의 오늘과 같은 이가 없었느니라." 하였다.

 

또 일찍이 지신사 김익정(金益精)을 불러 이르기를, "임금께서 날마다 와 이야기를 하니 매우 좋기는 하나, 정사를 폐할까 두렵다. 네가 가서 여쭈어 격일로 오게 하라." 하니, 김익정이 대답하기를, "상감께서는 매양 일을 처리하신 뒤에 와 뵙는 것이며, 와 뵙는 동안에도 일이 있으면 곧 따라 여쭙게 하여 지체가 없습니다. 상감께서는 늘 옛날 문왕이 그 아버지께 날마다 세 차례 뵙던 일을 본받지 못함을 한스럽게 생각하시는데, 어찌 격일로 와 뵈려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왕이 이르기를, "그러면 호위하는 군사가 어찌 피로하지 않겠는가." 하니, 익정이 대답하기를, "다만 매일 당번된 금군만을 거느리고 올 따름이니, 뉘가 감히 수고로움을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4년 임인에 태상왕의 병이 위독하여 신궁(新宮)으로 옮길 때, 임금이 도보로 그 뒤를 따랐다. 임금이 태상왕의 병환이 있은 이래로 약과 음식 등을 모두 손수 받들어 드렸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밤이 새도록 그 곁에서 뫼시되 일찍이 옷끈을 풀고 눈을 붙인 적이 없었으므로 신하들이 모두 근심하였다. 태상왕이 돌아가신 뒤, 흙비가 심하여 대신들이 술을 드시기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정원에 꾸지람을 내려 이르기를, "상중에 술을 마심은 예법이 아닌데, 너희들은 어찌 감히 비례(非禮)의 말을 아뢰는가." 하니, 김익정(金益精)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태상왕 병환이 심하시던 날로부터 음식을 드시지 않은 지 이제 이미 20여일이 되었습니다. 이에 신들은 어쩔 줄을 몰라서 옮고 그름을 헤아리지 못하고 감히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였다.

 

▣ 연려실기술 제2권 태종조 고사본말(太宗朝故事本末)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폐위 ▣

세종이 왕위를 받은 뒤에 상왕[태종]이 편전에 있었는데, 세종이 모시고 있었고 양녕도 그 곁에 있었다. 상왕이 병조 판서조말생 참판이명덕(李明德), 지신사원숙(元肅), 좌대언김익정(金益精), 좌부대언윤회(尹淮) 등을 불러놓고 하교하기를, "내가 양녕을 처리할 방법을 깊이 생각하다가 지금에야 터득하였다. 양녕은 하는 짓이 광패하여 가르쳐도 고치지 아니하므로 드디어 이렇게까지 되었다. 가까운 곳에 두어 보전하게 하려고 하나, 오히려 깨닫지 못하니 부끄러운 노릇이다. 내가 젊었을 때에 연달아 아들 셋을 잃어버리고 정축년(1397)에 주상(여기서는 세종)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의 무리에게 꺼리는 바가 되어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형세였으므로 얼마 살지 못하게 될까 염려되어 답답하고 무료할 때이므로 나와 대비가 번갈아 안아주기도 하고 업어주기도 하여 무릎에서 떼어 놓지 않고 사랑하기를 가장 도탑게 하였다. 그러나 세자를 세우던 날에는 다만 적장자로서 양녕을 세웠을 뿐이니, 내가 어찌 털끝 만큼이라도 그 사이에 사사 뜻이 있었겠는가. 양녕은 동궁으로 있을 때부터 행실이 좋지 못하였다. 앞으로는 양녕을 의정부와 육조에 맡기고 나는 간여하지 않겠다. 만일 법을 범하여 정부에서 잡아오더라도 나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며, 육조에서 잡아와도 나는 상관하지 않고 한결같이 국가의 처치를 따르겠다. 환관과 궁첩이 감히 사사로이 양녕의 일로 내게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단연코 용서하지 않겠다. 그때는 내가 사정을 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양녕과 부자간인 까닭에 정리상 차마 못하는 바가 있지만 여러 신하들은 곧 이와 다를 것이다." 하였다. 또 양녕을 눈짓하면서 이르기를, "네가 도망하여 나갔을 때에 나와 대비가 너의 생사를 알지 못하여 항상 눈물을 흘렸으며, 주상도 옆에서 눈물을 흘렸다. 가령 네 몸이 편안한데 아우들에게 사고가 있다면 네가 지금의 주상처럼 하겠느냐. 주상은 효도와 우애가 천성에서 나오므로 너의 형제는 보전할 수가 있을 것이니, 나는 근심이 없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너 때문이 아니라 나라에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하였다. 《국조보감》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益精의 장자 潚(숙)의 계열은 부친을 따라 관로에 진출하여 전의를 떠났던 것 같고, 특히 손자인 壽寧(수녕)은 태종의 손녀사위로 단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성종대에는 좌리공신에 책봉되어 호조참찬에 이르고 문도공의 시호를 받기도 하였다. 이들의 후손은 경상도 창령에 세거지를 별도로 마련하여 번창하였다.

 

그러나 차남인 泂(형)의 계열은 그대로 전의 압곡에 터전을 마련하여 번창하게 되었다.

 

1. 파주시 박중손(朴仲孫)신도비 --- 김수녕(金壽寧) 찬(撰)

금석문 속의 선조님 숨결을 찾아서....(2.5)

파주시

박중손(朴仲孫)신도비 - 김수녕(金壽寧) 찬(撰)

 

2. 파주시 안참찬숭선비(安參贊崇善碑) --- 성삼문문(成三門文) / 김수녕서(金壽寧書)

 

Re:자료 보충 및 의문점

 

◈파주 - 군사공파 세거지로서 기록이 많은 편입니다.

◇안참찬숭선비(安參贊崇善碑) 성삼문문(成三門文) / 김수녕서(金壽寧書) - 오리동 공릉혈소외(五里同 恭陵穴巢外)

※安崇善은 김수녕의 외조부

 

3. 시흥시 강희안 묘갈 행장 --- 김수녕 찬

훈민정음을 창제한 강희안

1417(태종 17)~1464(세조 10). 조선의 문신. 자는 경우,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 지돈령부사 강석덕의 아들이며 ,강 희맹의 형이기도 하다.성격이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 소박하고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은 많지는 않는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그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화풍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가 사신으로서 중국을 다녀와 중국의 새로운 화풍을 일찍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돈령부 주부 등을 거쳐 1454년(단종 2)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1455년(세조 1)에 인수부윤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456(세조 2) 단종 복위 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신문을 받았으나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1458년 호조 참의가 되었다.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졌으며,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고,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하였다. 신도비 선생은 성격이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소박하고 물리에 통달하였고, 또 번거로운 싫 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젊어서부터 부귀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한때 의정부에서 검상(檢詳)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끝까지 사양하여 오해를 받은 바 있었다. 부인은 고성 이 씨와 언양 김씨로 슬하에 딸만 넷을 두어 후사가 없자 사후 12년 만인 성종 17년(1476)에 양자 문제를 조성에서 논의해 희맹의 2남 학손(鶴孫)을 양자로 입적케 하라는 결정이 내려 졌다.

 

사후 537년만인 2000년 10월에 경기도가 ꡐ이달의 인물ꡑ로 선정했고, 아울러 진주강씨 문양공파종중에 의해 한글창제비(글씨 : 한갑수)가 세워졌다. 본래 장단군 낙화창(落花 倉) 판원촌(板院村)에 있다가 1987년 5월 선생의 아우 강희맹의 묘가 있는 시흥시 하상동 산2(연꽃마을)로 이장되었다.

 

묘역에는 소양당(素養堂) 김수녕(金壽寧)이 선생의 행장을 엮은 묘갈이 있었다.

 

▣ 김태서 - 시흥시 하상동에는 강희안 뿐 만 아니고 강희맹묘소와 성자동자 할아버지 묘소도 있습니다. 연꽃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강희맹할아버지가 가지고 왔다합니다.

▣ 김태완 - 문정공 김질의 4째 아들 성동은 강희맹의 사위입니다.위세가 등등했던 양반가의 혼사이며 시흥시 하상동에 묘소들이 있습니다

문정공 김질 할아버지 기록(조선왕조실록 문종,단종,세조, 성종실록)

 

《 세조 008 03/06/07(기해) / 진감 등이 한강에서 유람하다 》

 

진감(陳鑑) 등이 한강(漢江)에 유람(遊覽)하고 제천정(濟川亭)에 올랐다. 임금이 문관(文官) 김수온(金守溫)․서거정(徐居正)․김수녕(金壽寧) 등에게 명하여 도감(都監)과 더불어 잔치를 베풀고 여러 잔을 돌린 뒤에 파하였다. 드디어 배를 타고 흐름을 따라서 내려가다가 고기잡이하는 사람을 시켜 고기를 잡게 하고, 진감 등은 심히 즐거워하면서 잉어[鯉魚] 두 마리를 사옹관(司饔官)에게 주어서 진상(進上)하였다. 임금이 예조 판서 홍윤성(洪允成)․동부승지 김질(金 )에게 명하여 곧바로 노량(露梁)의 여울 위로 가서 진감 등을 마중하여 알현(謁見)하게 하였다. 드디어 배를 같이 타고 천천히 노를 저어서 내려와 용산(龍山) 여울 아래에 이르렀다. 비를 만났으나 서로 더불어 부(賦)․시(詩)를 짓고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였다. 가을두(加乙頭)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오니, 예빈시(禮賓寺)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김질이 궁온(宮춠)과 어육(魚肉)을 진감 등에게 대접하였고, 홍윤성 이하가 각각 차례대로 술을 돌렸다.

 

【원전】 7 집 202 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사급(賜給)

 

진산세고

권3은 김수녕(金壽寧)이 쓴 강희안의 행장과 그의 시 66수,

 

■ 문화재청 홈

종 목 보물 1290호 명 칭 진산세고 (晉山世稿)

분 류 고문서류 수 량 4권1책 지정일 1998.12.18

소재지 서울 강서구 시 대 조선 성종

소유자 박영돈 관리자 박영돈

 

이 책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강희맹(1424~1483)을 비롯하여 3대에 걸친 인물들의「행장」,「서발」,「시문」,「시문집발」을 수록한 것으로, 성종 7년(1476)에 간행된 것으로 짐작된다.

 

강희맹은 세종 29년(1447) 문과에 18살의 나이로 장원급제한 뒤 종부시주부, 예조좌랑과 정랑, 예조와 이조의 참의 예조와 형조의 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의 벼슬에까지 올랐다.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하여 일을 잘 처리하였으며,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저서로 『금양잡록』, 『촌담해이』 등이 있다.

 

이 책은 강희맹의 할아버지 강회백, 아버지 강석덕과 조선시대 유명한 화가였던 형 강희안의 행장과 시문을 각각 1권으로 하고 강희안이 지은 『양화소록』1권을 합하여 전 4권으로 엮었다. 책의 첫머리에는 신숙주, 최항, 정창손의 서문이 실려있고, 책 끝에는 김종직, 서거정 등의 발(跋)이 있다. 권1은 강회백의 행장과 그의 시문집이고, 권2는 강석덕의 행장과 그의 시문집이며, 권3은 강희안의 행장과 그의 시문집이다. 권4는 강희안의 『양화소록』이 수록되어 있다.

 

『진산세고』로 전하는 책이 더러 있기는 하나, 이 책은 원본이며 지금까지 알려진 여러 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한 그 시대 대가들의 글이 실려있어 역사 및 학술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 진산세고권지이(晉山世稿卷之二)(21장(長)) 완역재(玩易齋) 인재강공(仁齋姜公)(희안(希顔))행장(行狀)……세임진(歲壬辰)(성종 3년, 1472) 춘정월하한(春正月下澣)……가정대부(嘉靖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복창군김수녕근장(福昌君金壽寧謹狀) 인재시고(仁齋詩藁)

권3은 김수녕(金壽寧)이 쓴 강희안의 행장과 그의 시 66수,

 

4. 이함장 묘갈명 --- 김수녕 찬, 이수남 서

김수녕(金壽寧)과 이수남(李壽男)의 졸기

김수녕과 이수남은 어릴때부터 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하였고 일찍이 문과에도 20세 전후에 급제한 비슷한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당대에 문장이 있었다. 또한 두 사람은 친교(親交)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뜻을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고 졸한 것도 두사람 모두 30대로 각각 33세(이수남), 38세(김수녕)였다.

 

이함장 묘갈명(墓碣銘)

김수녕은 아래 묘갈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承旨與壽寧善哭且言曰當銘曰 승지(이수남)가 (김)수녕과 가까이 지내는 터인데 찾아와서 곡하면서 지명을 지어 달라고 청하기로 다음과 같이 명을 엮는다.

김수녕과 이수남은 평소에도 교분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67년(세조 13) 명나라 황제로부터 건주위(建州衛)의 정벌을 지원하라는 논지(論旨)가 있어 조정에서 예조참판(禮曹參判) 이함장[李 言咸 長:1410(태종 10) ~ 1467(세조 12)]을 선위사(宣慰使)로 삼아 안주(安州)에 가서 명(明)나라 군대를 맞이하라고 하니, 병(病)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수행하다가 09월 20일(임오)에 58세(五十八歲)를 일기(一期)로 안주(安州)에서 졸하였다. 그해 12월 28일(경신) 부평(富平)의 동쪽 수탄리(水呑里)에 예장(禮葬)하였는데 이함장(李 言咸 長) 묘갈명(墓碣銘)은 가선대부 중추부첨지사 겸 춘추관동지사 김수녕(嘉善大夫 中樞府僉知事 兼 春秋館同知事 金壽寧)이 짓고(撰), 글씨는 그의 둘째아들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있던 이수남(李壽男)이 썼다(書).

 

 

京畿道安金史資料集

 

[성종실록 권3, 성종1년 2월 14일(계해)]

o 대사간(大司諫) 김수녕(金壽寧)이 경기의 부역(賦役)이 다른 도에 비해 심하므로 공부(貢賦)를 반으로 줄여 주도록 청함.

 

[성종실록 권8, 성종1년 11월 2일(병자)]

o 경기 재상경차관(災傷敬差官) 김유(金紐)가 재상(災傷)과 연분(年分)의 등제(等第)시에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책을 만드는 대신에 도행장(導行帳)을 등사 하기를 청함.

 

[성종실록 권11, 성종2년 8월 2일(임인)]

o 대사간(大司諫) 김수녕(金壽寧)등이 사리(私利)를 추구한 김국광(金國光)을 죄를 나열하며 세조조(世祖朝)에 <개성> 산예역(散猊驛)의 조역(助役)을 폐치(廢置)하여 수중(手中)에 두려고 했었다는 것 등을 상소함.

 

[연려실기술]의 문도공 김수녕(金壽寧)

▣ 연려실기술 제6권 성종조 고사본말(成宗朝故事本末) 성종조의 명신 ▣

 

[김수녕(金壽寧)]

김수녕은 자는 이수(??)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참판 익정(益精)의 손자이다. 단종 계유년에 문과에 올랐다. 이때 나이 18세였다. 좌리공신이 되고 복창군(福昌君)으로 책봉되었다.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어느날 저녁에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죽었다. 시호는 문도공(文悼公)이다.

 

○ 임금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으니 대사간으로 있던 공이 글을 올렸다. 그 글에 아뢰기를, ꡒ학문을 한다는 것은 물 위에 떠있는 배와 같으니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날로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 지금 조강(朝講)주강(晝講)에만 경연에 나오시고 석강(夕講)에는 나오지 않으시니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공부하시려는 뜻이 아닌 듯 합니다. 바라옵건대, 경연관으로 하여금 번갈아 숙직하여 성상의 질문에 대비케 하소서.ꡓ 하였다. 임금은 기꺼이 받아드렸다. 《국조보감》《대동운옥》

 

○ 공은 문장이 뛰어나고 건실하며 더욱 소(疏)를 잘 하였다. 그 소에, ꡒ높은 지위에 계시면 겸손할 것을 생각하시고, 가득 차거든 덜 것을 생각하시며, 즐거운 일을 만나면 절제할 것을 생각하시고, 편안하실 때는 뒷날의 걱정을 생각하시며, 욕심낼 만한 것을 보면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집을 새로 지으려 하면 분수에 맞게 그칠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시며, 〈간사한 사람에게〉 총명이 가리워짐을 막으시려면 바른 말 받아들일 것을 생각하시고, 참소와 간사를 미워하려면 자신부터 바르게 되기를 생각하시며, 작상(爵賞)을 시행할 때는 혹시 기쁜 나머지 지나치지 않는가를 생각하시고, 형벌을 시행할 때는 혹시 노한 김에 함부로 하는가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열 가지 생각을 겸하여 꾸준히 행하시고, 믿음으로 지키신다면 민심이 기뻐하고 천도가 순응하여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당장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ꡓ 하였다. 《해동잡록》

 

▣ 연려실기술 별집 제9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 3 등과 총목(登科摠目) ▣

단종 원년 계유 즉위 증광시에서 이숭원(李崇元) 등 40명을 뽑았다.

동년에 생원 유학 김상(金湘), 진사 유학 최한보(崔漢輔) 등을 뽑았다. 연령 제한 법을 폐지했다. 십운시(十韻詩)를 고시(古詩)로 개정했다.

가을 식년시에서 김수녕(金壽寧) 등 33명을 뽑았다. 전시(殿試)대책(對策) 시제 : 수성난(守成難)

 

☞ 수성난(守成難) : 당 나라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창업(?業)과 수성(守成) 중 어느 것이 어려운가 하고 묻자, 혹은 창업이 어렵다 하고 혹은 수성이 어렵다 하였는데, 창업이란 왕업(王業)을 처음으로 일으키는 개국(開國)을 말한 것이고, 수성이란 그것을 이어 받아서 지키는 것을 말한 것이다.

 

▣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문집(文集) ▣

강희맹이 《진산세고(晉山世稿)》를 편찬하고, 김수녕(金壽寧)과 함께 점(點)을 치고 뭉개고 보태고 덜고 하여 남이 보기 좋게 하여, 선조의 시명(詩名)을 후세에 선양하였다. 사람들은 이것을 효도라고 하지만, 나는 불효라고 한다. 신영희(辛永禧)의 집에 그의 조부 문희공 석조(文禧公碩祖)의 시집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ꡒ자네 집 문집은 간행할 만한가.ꡓ 하니, 영희가 말하기를, ꡒ나의 할아버지가 비록 글을 잘 한다는 명성은 있었으나, 《가집(家集)》에 기재된 것에는 하나도 전할 만한 것이 없네. 일찍이 한 문생(門生)에 대한 만시로서,

 

32세에 죽었구나 / 三十二而卒

불행히도 안회와 같구려 / 不幸同顔回

 

라는 것이었는데, 이 시구 외에는 좋은 시가 없으니 어찌 간행하겠나.ꡓ 하였다고 한다. 남들은 이것을 불효라고 하나 나는 효도라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조부의 문예에 대해 곧게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교묘하게 꾸민 말과 거짓을 꾸민 붓으로 선조를 높인들 선조의 마음이 저승에서 어찌 부끄러움이 없겠는가. 《추강냉화》

 

▣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언해(諺解) ▣

보(補). 《태허정집(太虛亭集)》의 언해 발문을 보면 《시경》은 정인지(鄭麟趾), 《서경》은 정창손(鄭昌孫), 《예기》는 신숙주, 《논어》는 이석형(李石亨), 《맹자》는 성임(成任), 《중용》은 강희맹(姜希孟), 《대학》은 홍응(洪應)이 만들었고, 《소학》 구결은 세조 자신이 정하였는데, 구종직(丘從直)김예의(金禮儀)정자영(鄭自英)이채근(李菜根)박건(朴楗)김수녕(金壽寧) 등과 서로 의논하였다.

 

▣ 연려실기술 별집 제14권 문예전고(文藝典故) 문장(文章) ▣

우리 나라 문장이 최치원(崔致遠)에서 처음으로 발휘(發揮)되었다. 김부식(金富軾)은 풍부하면서도 화려하지는 못하였고, 정지상(鄭知常)은 화려하였으나 떨치지는 못하였으며, 이규보(李奎報)는 눌러 다졌으나 거두지는 못하였고, 이인로(李仁老)는 단련하였으나 펴지는 못하였으며, 임춘(林椿)은 면밀하였으나 윤택하지는 못하였고, 이곡(李穀)가정(稼亭) 은 적실하였으나 슬기롭지 못하였으며, 이제현(李齊賢)익재(益齋) 은 노련하고 기운찼으나 문채롭지는 못하였고, 이숭인(李崇仁)도은(陶隱) 은 온자(溫藉)하여 기운이 부족하였으며, 정몽주 포은(圃隱) 는 순수하였으나 요약(要約)하지는 못하였고, 정도전(鄭道傳)삼봉(三峯) 은 확대하였으나 검속하지는 않았다. 세상에서 일컫기를 이색(李穡)목은(牧隱) 은 시와 문이 구비되어 함께 우수하다 하나, 더럽고 엉성한 태도가 많이 있어서 원(元) 나라 사람의 시율(詩律)에 견주더라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당(唐)송(宋)의 경지에야 비길 수 있으랴. 권근(權近)변계량(卞季良)이 비록 문병(文柄)을 잡았으나, 이색에게도 미치지 못하였고, 계량은 더욱 비천하고 연약하였다. 세종(世宗)이 처음으로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고 문학하는 선비를 맞이하였는데, 신숙주(申叔舟)최항(崔恒)이석형(李石亨)과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유성원(柳誠源)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 같은 이는 모두 한때 이름을 날렸다. 삼문은 문장이 호방하나 시(詩)에는 모자랐으며, 위지는 대책(對策)과 소장(疏章)은 잘하여도 시를 몰랐다. 성원은 타고난 재주로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으나 견식이 넓지 못하였으며, 이개는 문장이 맑고 발월(發越)하였으며 시도 또한 정묘기절하였으나, 동료들은 모두 팽년을 집대성(集大成)하였다고 하니, 그의 경술과 문장필법이 모두 훌륭한 것을 말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죽음을 당하여서 그들의 저술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최항(崔恒)은 사륙체의 변려문에 정묘하였고, 석형은 과거의 글에 능하였으며, 오직 숙주의 문장도덕은 온 세상에서 모두 높이고 우러러 보았다. 그 뒤를 이을 자는 서거정(徐居正)김수온(金守溫)강희맹(姜希孟)이승소(李承召)김수녕(金壽寧) 및 성임(成任)뿐이었다. 거정은 문장이 화려하고 시는 오로지 한유(韓愈)육유(陸游)의 체를 공부하여 손을 대면 문득 글이 만들어져서 화려하기 짝이 없었고, 오랫동안 문형을 맡았다. 수온은 글을 읽으면 반드시 외웠으므로 문장이 체재를 얻었으며, 그 문장은 호방하고 웅건하여서 아무도 그와 더불어 기세를 다투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단속할 줄 모르므로 시의 운에 착오가 많고 격식에 맞지 않았다. 희맹은 시와 문이 전중 아담(典重雅淡)하고 타고난 재질이 제대로 무르익어서 여러 학자 중에 가장 뛰어났다. 승소는 시와 문이 함께 아름다워서 공교한 장인이 조각하여도 도끼로 찍은 흔적이 없는 것과 같았고, 수녕은 타고난 자질로 일찍 성취하였으며 반고(班固)를 본받아 문장이 노련하고 힘찼다. 《세조실록(世祖實錄)》을 편수할 때에 사실을 서술한 것은 그의 솜씨에서 많이 나왔던 것이다. 성임의 시는 만당(晩唐 당의 후기)의 체재를 본받아서 구름가듯 물흐르듯 걸림이 없었다. 이 몇 사람이 모두 이름이 났으며 당대의 문학이 빛났다. 《용재총화》

 

▣ 연려실기술 별집 제7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경연(經筵) ▣

○ 성종이 어려서 왕위를 이었는데 대사간 김수녕(金壽寧)이 차자를 올리기를, ꡒ학문하는 방법은 배[舟]가 흐르는 물에 뜬 것 같아서 전진하지 아니하면 후퇴하는 것이니, 경연관에게 날마다 교대로 번을 들게 하기를 청합니다.ꡓ 하였다. 성종기(成宗紀) 조에 상세하다.

 

성종조의명신 김수녕(金壽寧)

김수녕은 자는 이수(??)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참판 익정(益精)의 손자이다. 단종 계유년에 문과에 올랐다. 이때 나이 18세였다. 좌리공신이 되고 복창군(福昌君)으로 책봉되었다. 벼슬은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어느날 저녁에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 죽었다. 시호는 문도공(文悼公)이다.

 

○ 임금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러 받으니 대사간으로 있던 공이 글을 올렸다. 그 글에 아뢰기를, ꡒ학문을 한다는 것은 물 위에 떠있는 배와 같으니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날로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 지금 조강(朝講)주강(晝講)에만 경연에 나오시고 석강(夕講)에는 나오지 않으시니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공부하시려는 뜻이 아닌 듯 합니다. 바라옵건대, 경연관으로 하여금 번갈아 숙직하여 성상의 질문에 대비케 하소서.ꡓ 하였다. 임금은 기꺼이 받아드렸다. 《국조보감》《대동운옥》

 

○ 공은 문장이 뛰어나고 건실하며 더욱 소(疏)를 잘 하였다. 그 소에, ꡒ높은 지위에 계시면 겸손할 것을 생각하시고, 가득 차거든 덜 것을 생각하시며, 즐거운 일을 만나면 절제할 것을 생각하시고, 편안하실 때는 뒷날의 걱정을 생각하시며, 욕심낼 만한 것을 보면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집을 새로 지으려 하면 분수에 맞게 그칠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시며, 〈간사한 사람에게〉 총명이 가리워짐을 막으시려면 바른 말 받아들일 것을 생각하시고, 참소와 간사를 미워하려면 자신부터 바르게 되기를 생각하시며, 작상(爵賞)을 시행할 때는 혹시 기쁜 나머지 지나치지 않는가를 생각하시고, 형벌을 시행할 때는 혹시 노한 김에 함부로 하는가를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 열 가지 생각을 겸하여 꾸준히 행하시고, 믿음으로 지키신다면 민심이 기뻐하고 천도가 순응하여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당장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ꡓ 하였다. 《해동잡록》

 

김수녕의 소(疏)

○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자는 이수(??)인데 참판 익정(益精)의 손자다. 단종[魯山] 계유년에 18세로 장원에 뽑히어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였고,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며, 복창군(福昌君)으로 책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노련 건실하며 더욱이 소(疏)를 잘 지었는데, 어느날 저녁에 술을 심히 마시고 죽었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 성종이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으니, 대사간 김수녕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ꡒ학문을 하는 길은 배가 물에 뜬 것과 같사오니 날로 나아가지 않으면 날로 물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조강(朝講)과 주강(晝講)에만 경연(經筵)에 나오시고 석강(夕講)에는 나오지 않으시니,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공부하시려는 뜻이 아닐 듯 합니다. 바라옵건대, 경연관으로 하여금 번갈아 숙직하게하여 고문에 대비하도록 하소서.ꡓ 하였더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높은 자리에 계시면 겸손할 것을 생각하시고, 가득 찼을 때에는 줄어들 것을 생각하시며,

즐거운 일을 만나면 씀씀이를 절약할 것을 생각하시고, 편안할 때에는 뒷날의 걱정을 생각하시며,

욕심낼 만한 것을 보면 만족할 줄을 아시고, 장차 영선(營繕)하고 싶으면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시며,

간신에게 총명이 가리워짐을 막으려면 바른 말을 받아들일 것을 생각하시고, 참소와 간사함을 미워하려면 몸소 바르게 되기를 생각하시며,

벼슬을 상 주려 할 때에는 혹시 기쁜 나머지 지나치지 않는가를 생각하시고, 형벌을 줄때에는 혹시 노한김에 함부로 하지 않는가를 생각하셔야 할것입다.

이 10가지 생각을 겸하여 행하기를 꾸준히 하시고, 지키기를 성신(誠信)으로써 하신다면 민심이 기뻐하고 천도(天道)가 순하여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당장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김수녕의 소(疏)>

 

해동잡록(海東雜錄

동성동본에 대한 김수녕할아버지 말씀

국조보감 제15권 성종조 1 2년(신묘, 1471)

○ 대사간 김수녕(金壽寧)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예기(禮記)》에, '동성(同姓)에게 장가들지 않는다.' 한 것은 분별을 철저히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풍속은 이성(異姓)의 친척이라 할지라도 은혜와 의리가 동성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재종 형제끼리 혼인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인정으로 보아 매우 온당하지 않은 일입니다. 유사에게 명하여 이성으로서 혼인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하게 하소서.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는 것은 바로 나아갈 경로가 없는 자를 위한 것입니다. 종친은 왕실의 피붙이로서 관직이 높고 지위가 임금과 가까우니, 실로 재주와 행실이 있다면 위에서 알아주지 않는다고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인데, 기어코 외롭고 한미한 선비와 기예를 겨루어 나아가고자 합니다. 또 임용이 불행히도 적절하지 못했을 경우, 다스리면 은혜를 상하게 되고 다스리지 않으면 법을 폐지하게 되니, 그렇다면 임용한 것이 어찌 온전히 보전해주는 것이 되겠습니까. 종친의 과거 응시를 허락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대신과 의논하여 따랐다.

 

선조님 말 말 말

○ 문도공(文悼公)김수녕(金壽寧)이 두 번 승지가 되었으나 모두 파직되었었다. 문량공(文良公)강희맹(姜希孟)이 말하기를, ꡒ어찌하여 두 번 승지가 되어 두 번 다 파직을 당하였나.ꡓ 하니, 문도공이 말하기를, ꡒ능히 두 번 파직했으니 오히려 한 번도 하지 못한 자보다는 낫지 않겠나.ꡓ 하였다. 이것은 문량공이 승지를 하지 못한 것을 희롱하는 말이다.

○ 성종이 어려서 왕위를 이었는데 대사간 김수녕(金壽寧)이 차자를 올리기를, ꡒ학문하는 방법은 배[舟]가 흐르는 물에 뜬 것 같아서 전진하지 아니하면 후퇴하는 것이니, 경연관에게 날마다 교대로 번을 들게 하기를 청합니다.ꡓ 하였다. 성종기(成宗紀) 조에 상세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수녕(金壽寧)

▣ 제2권 p211<용인현 누정(樓亭)>

--신정(新亭) : 객관 동쪽에 있다. ○김수녕(金壽寧)이 지은 기문에, ꡒ용인은 작은 고을이다. 왕도와 인접한 까닭으로 밤낮으로 모여드는 대소 빈객이 여기를 경유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이는 대개 남북으로 통하는 길목인 때문이다. 옛 원관(院館)이 작아서 겨우 하룻밤을 묵을 수 있으나, 매우 더운 때이면 답답하고 트이지 않아서, 손님이 와도 더운 느낌과 번울(煩鬱)함이 가실 수 없어, 오랫동안 애먹었다. 천순(天順; 명나라 영종의 연호) 4년 겨울에 박군이 이 고을 원으로 와서, 세부(稅賦)를 누구럽게 하고 정사를 민첩하게 하니, 온갖 폐단이 다 없어지고, 아전과 백성이 두려워 하였다. 하루는 군이 아전에게 의논하기를, ꡐ내가 재목을 모아, 정자를 지어서 내객(來客)을 위해 납양(納凉)하는 곳을 만들고자 하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ꡑ 하였다. 군의 정사에 덕을 보았은 즉, 모두 ꡐ힘껏 하기를 원한다.ꡑ 하는 것이었다. 이에 공인(工人)은 힘써 일하고, 역군[役夫]도 부지런히 하였다. 새벽으로 밤으로 일한 보람이 드러나서, 달이 못되어 완성하였다. 시작할 때에 백성이 정자인 줄을 몰랐는데, 완성한 뒤에야 바라보고, ꡐ사또는 예전에 말하던 신명(神明)이라는 이가 아닌가. 정자를 지었는데 우리들은 어찌 알지도 못했나.ꡑ 하였다. 서로 더불어 감탄하면서 새로 지은 것을 경사로 여겼다. 지금 세상에 원된 자를 보면, 술취한 꿈속에서 세월만 보내고 관부(官府)를 주막같이 여겨서, 기울어진 뒤에 버티고 비샌 다음에 막는다. 심한 자는 기와 한 장도 바꾸지 않고, ꡐ나는 백성을 사랑한다.ꡑ 하며 풀 한 포기 없애지 않고, ꡐ관정(官庭)에 송사하는 자 없다.ꡑ 하니, 관사가 허물어 지는 것은 항상 이런 무리한데서 연유한다. 어찌 일에 용기를 내어 시작하기를 꽈하는 자 있으며, 또는 백성도 모르게 하면서 이렇게 성취한 자 있으리오. 내 일찍이 남쪽으로 가다가 선소(宣召)하심을 받고 용인읍을 지나는데, 박군이 나에게 붓을 주면서 기문을 청하였다. 내 졸문(拙文)임을 말하니, 군이 말하기를, ꡐ정자에 기문 받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정자 이름이 없으니, 어찌하랴.ꡑ 하여, 내 말하기를 , ꡐ이름이 있는 것이 진실로 옳지마는, 이름이 없어도 또한 않될 것도 없다.용인읍에 군같은 원이 없었더라면 정자를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정자를 지을 수 없었은즉, 정자 이름이 어디에서 나오겠나. 이름이 없다는 것으로 이름삼아도 역시 이름으로서 좋은 것이다.ꡑ 하니 군이 나에게 더욱 강청(强請)하였다. 그리하여 용인 백성이 우러러보고 새로 지은 것을 경축하던 뜻을 따서 이름 짓기를 ꡐ신정ꡑ이라 하였다. 전(傳)에, 신(新)이란 것은 고(故)가 있으므로서 이다.ꡐ 하지 않았느,s가. 처음부터 군자가 중하게 여기는 뜻이 있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박군의 이름은 거명(居明)이고, 자는회문(晦文)이며, 밀산인(密山人)이다.ꡓ 하였다.

 

▣ 제3권 p57<전의현 제영(題詠)>

--현고징교목(縣古徵喬木)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ꡒ고을이 오래 됨을 교목이 말해 주고, 연기 차가우니, 폐성임을 알겠도다.ꡓ 하였다.

 

▣ 제3권 p433<안동대도호부 본조>

--김수녕(金壽寧) : 익정(益精)의 손자이다. 나이가 18세 때에 계유년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렬하였으며, 벼슬이 호조참판에 이르고, 복창군(福昌君)에 봉작되었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을 드날렸다.

 

▣ 제4권 p100<성주목 제영(題詠)>

--호산형승갑남주(湖山形勝甲南州)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ꡒ호산의 좋은 경개가 남주에 으뜸인데, 백 가지 온갖 모양 봄빛이 아직 가을되지 않았구나.ꡓ 하였다.

 

▣ 제4권 p237<합천군 제영(題詠)>

--용문고처희초등(龍門高處喜初登)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ꡒ오늘 강양(江陽)에서 한 번 취하니, 용문 높은 곳에 처음 올라 기쁘다.ꡓ 하였다.

 

▣ 제5권 p343<안악군 누정(樓亭)>

--이요루(二樂樓) : 객관 동쪽에 있는데, 연못이 있다.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ꡒ홰나무는 천년이나 된 고을에 늙었고, 꽃은 백 척 누대에 둘렀네. 못이 열렸으니 대화지(大華池)에 연한 듯, 산이 가까우니 나부산(羅浮山)을 껴안은 듯. 이 세상에 선경(仙境)이야 있으랴. 하늘 서쪽에 좋은 고을이 있네. 공부(工部 두보)의 시흥 참을 수 없어, 때때로 낭만(浪漫)한 놀이 한다네.ꡓ 하였다.

 

▣ 제5권 p414<해주목 제영(題詠)>

--금도(金桃)는 붉은 것이 벌써 흐트러졌네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ꡒ금도는 붉은 것이 벌써 흐트러졌고, 은행은 푸른 잎 처음으로 그늘지네.ꡓ 하였다.

 

▣ 제5권 p528<삼척도호부 제영(題詠)>

--산에 의지한 촌집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ꡒ엇 비슷한 고목을 앞 여울에 가로질러서, 자국마다 서늘한 마음 몇 번이나 놀랐던가. 평지에 이른 풍파 아무도 모르면서, 다리에 와서는 두렵게 보누나.ꡓ 하였다.

 

▣ 제6권 p56-57<평창군 제영(題詠)>

--바른 산 그늘의 넓고 먼 곳에 이르니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ꡒ빨리 달리는 역마(役馬)를 타고 머무를 겨를이 없어, 바로 산 그늘의 넓고 먼 곳에 이르렀다. 사마천(司馬遷)같이 멀리 유람함은 아직 그치지 않았고, 진등(陳登)같은 호기(豪氣)는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노라. 시름을 씻는 데 병에 술이 없을 수 있으랴. 기이(奇異)한 것을 구하는데 도리어 상자에 글이 있구나. 이번 유람의 기절(奇絶)함이 평생에 으뜸되니, 좀 먹은 책속의 좀벌레 같은 생활이 우습기만 하여라.ꡓ 하였다.

 

☞ 진등(陳登) : 동한(東漢) 때의 사람이니 자는 원룡(元龍)이다. 허범(許氾)이라는 사람이 유비(劉備)에게 그의 인물평을 말하기를, ꡒ원룡은 호해(湖海)의 선비로서 호기(豪氣)가 일찍이 떨어진 일이 없다.ꡓ하였다.

 

▣ 제6권 p176-177<영흥대도호부 제영(題詠)>

--울총(鬱蔥)한 아름다운 기운이 신주(神州)를 싸고 있네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ꡒ하늘이 맑은 시냇물을 보내어 땅에서 솟아 오르니, 울총한 아름다운 기운이 신주를 싸고 있네. 순(舜) 임금의 옛날 밭갈고 고기잡던 그 자취는 모두 이 용흥강과 성역산(聖歷山) 머리에 있구나.ꡓ 하였다.

☞ 성역산(聖歷山) : 예전 순 임금이 역산(歷山)에서 밭을 갈다가 임금이 되었다 한다. 마침 영흥의 산 이름이 성역산이므로 이태조와 순 임금을 비유한 것이다.

 

▣ 제6권 p213<덕원도호부 제영(題詠)>

--이 덕원(德源)은 하늘이 만든 땅이로다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ꡒ반도(蟠桃)가 열매를 맺으려면 천 년이 걸리는데 선리(仙李)의 뿌리가 서리는데 8백년이 걸렸다네. 아름답다, 이 덕원은 하늘이 만드신 땅이로다. 면면(綿綿)하게 뻗은 오이덩굴 한 악장(樂章) 왕업(王業)의 아름다움을 찬송하였네.ꡓ 하였다.

☞ 선리(仙李) : 조선은 이씨가 왕이었으므로 이씨를 신선이씨라고 미화하여 말한 것이다.

☞ 악장(樂章) : 시전에 주나라 왕실을 예찬한 노래에 면면하게 뻗어나가는 오이덩굴이라는 말이 있다.

 

▣ 제6권 p217<문천군 누정(樓亭)>

--절문루(節文樓) : 객관 북쪽에 있다.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ꡒ호기(豪氣)는 백 척(尺)의 다락이라고 들어 왔지만, 나르는 듯한 누각이 시원스런 이 바닷가에 있을 줄을 어찌 알았으리요. 십천두(十千斗)의 술을 가지고 진왕(陳王)의 즐거움을 하려하지 않으니, 한 번 웃는 월녀(越女)의 만류함에 관계없는 것일세. 대지는 찌는 듯 더운데 바람은 고요하고, 하늘은 감색으로 푸른데 불이 흘러 내리는 듯하네. 당시의 더위먹어 죽은 사람을 응당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인데, 이같이 시원하게 노는 것을 기뻐하노라.ꡓ 하였다.

☞ 진왕(陳王) : 이태백의 시에 진왕 옛날 양평락에 한 말 술 십천(十千) 주고 사서 마음대로 즐겁게 놀았다. 하였는데, 진왕은 삼국시대 조조의 아들 조식이 진사왕에 부하여서 진왕이라 한 것이다.

☞ 월녀(越女) : 한퇴지의 시에 월나라 서시가 한 번 웃으니 3년을 머물렀다.라는 시귀가 있다.

 

▣ 제6권 p231<단천군 산천(山川)>

--마운령(磨雲嶺) : 본군 남쪽 37리에 있다. 옛날에는 두을외대령(豆乙外大嶺)이라 일컬었다.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ꡒ아늑한 마운령(磨雲嶺)의 최상단(最上端)을, 비틀거리며 가는 늙은 말 안장조차 못 이기네. 새만이 통행하는 길이 3천리나 된다고 전날에 들었더니, 이제 양의 창자같은 백 여덟 굽이를 오르네. 자는 안개 가벼운 산아지랭이에 옷은 반이나 젖었고, 매달린 언덕 위 절벽길은 두 눈이 차가웁네. 그대에게 말하노니 동쪽으로 가는 일을 이야기 하지 말라. 귀밑털이 서녘 바람에 또 얼룩지려 한다.ꡓ 하였다.

 

▣ 제6권 p331<경흥도호부 제영(題詠)>

--성 아래에 한 줄기의 강물이 길게 흐르다 :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ꡒ누른 구름은 국경에 가득하여 나그네의 근심을 자아 내는데, 성 아래 강물은 한 줄기가 길게 흐른다. 구슬픈 오랑캐의 피리소리 행여나 나그네의 긧전을 스치지 말아다오. 소리마다 국경의 여행을 괴롭혀 주느니.ꡓ 하였다.

 

▣ 제6권 p581<성천도호부 누정(樓亭)>

--강선루(降仙樓) : 객관 서쪽 모퉁이에 있다.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ꡒ우연히 송양(松讓)을 지나다가 꽃다운 샘에 목욕하고, 머리 말리며 흘골산 앞으로 돌아오네. 한 물은 뜰을 따라 물결이 다시 고요한데, 두어 봉우리는 문을 헤치고 들어와 푸르게 잇닿았네 하여야. 안개가 개인 산시(山市)의 저물려는 햇빛에 안개가 맑고 비가 내릴려는 때에 바람은 강루(江樓)에 가득하네. 재주없어 황학루(黃鶴樓)의 글귀를 이루지 못하니. 다만 앵무주(鸚鵡洲)에 풀만 처량하네. 하였다.

☞ 황학루(黃鶴樓) : 황학루는 중국 호북성 무창에 있는 누각인데, 최호의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ꡒ옛 사람은 이미 흰 구름을 타고 사라지고, 여기에는 헛되이 황학루만 남아 있네.ꡓ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1982>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의현(全義縣) 편에 실려있는 선안동김씨의 인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8권의 충청도(忠淸道) 전의현(全義縣) 편에 선안동김씨의 3명의 인물에 대한 내용이 있기에 옮긴다.

선안동김씨(先安東金氏) 전서공파의 김익정(金益精), 김익렴(金益濂), 김수녕(金壽寧) 3인이다.

 

【전의현(全義縣)】

 

<우거 본조(寓居本朝)>

●김익정(金益精) : 안동(安東) 편 인물조에 자세히 발원하여 있다.

●김익렴(金益濂) : 김익정(金益精)의 아우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이르렀다. 두 사람 모두 3년 간 여묘(廬墓)를 살았다.

 

<제영(題詠)>

●김수녕(金壽寧)

제영 현고징교목(縣古徵喬木) : 김수령(金壽寧)의 시에, "고을이 오래됨을 교목이 말해 주고, 연기 차가우니 폐성(廢城)임을 알겠도다." 하였다.

 

※본조(本朝)란 조선(朝鮮)을 말한다.

※제영(題詠)이란 정해진 제목에 따라 시를 읊거나, 또는 읊은 시가(詩歌 : 詩詠)를 말한다. 주로 경승지(景勝地)를 대상으로 읊은 자연에 대한 찬미(讚美)의 내용이 대부분이다.

 

Re:전서공파 소개자료 03 ---益精 손자 壽寧 2  

■ 디지털한국학

★김수령(金壽寧)

1436(세종 18)~1473(성종 4).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자는 이수(#이96#수04), 호는 소양당(素養堂).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었던 ★숙(潚)이며, 어머니는 호조판서 ★안숭선(安崇善)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집현전부수찬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집현전수찬에 승진되고 이어 병조좌랑․헌납․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1458년부터 1462년까지 함길․평안․강원․황해․충청 5도의 체찰사인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이 되어 세조의 변방정책 수행에 주요한 소임을 담당하였다.

1463년 집의에 오르고 그뒤 동부승지, 1465년에는 좌승지를 거쳤다.

1468년 호조참의로 세조의 《주역구결 周易口訣》 간행에 참여하였다.

1469년(예종 즉위년) 공조참의가 되고 이어 형조․호조의 참의를 거쳐 1470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 재직시에는 성종에게 경연을 권고하는 명상소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1471년 성종을 보필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뒤에 공조참판과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특히 사재(史才)가 있어서 1458년에는 《국조보감 國朝寶鑑》 편찬에 참여하였고, 1463년에는 양성지(梁誠之)․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을 편찬하였으며, 성종 초기에는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참고문헌

世祖實錄, 成宗實錄, 大東野乘, 國朝榜目, 國朝人物志. 〈李根洙〉

 

■ 조선 문과방목

★김수녕(金壽寧)

단종(端宗)1년(1453년), 식년시(式年試) 을과1(乙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436년, 병진

자(字)

호(號)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문도,좌리공신/복창군(文悼,佐理功臣/福昌君)

>>> 가족사항

부(父) ★김숙(金潚)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익정(金益精)

증조부(曾祖父) ★김휴(金休)

외조부(外祖父) ★안숭선(安崇善)

처부(妻父) ★혜령군 이지(惠寧君 李祉)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생원(生員)

품계(品階) 가정대부(嘉靖大夫)

관직(官職) 호당&(湖堂&), 호조/참판&(戶曹/參判&)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제8권 (8)

[寧] 편안하다. 차리리.

[김수녕(金壽寧)]: 자는 이수, 본관은 안동, 참판(參判) 김익정(金益精)의 손자이다. 계유년(癸酉年1453)에 18세의 나이로 장원급제 하였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 하였다. 벼슬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다. 문장이 빼어나고 노건(老健)했는데 상소문(上疏文)을 더욱 잘 지었다. 어느날 저녁 술을 많이 마시고 죽었다.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김수녕(金壽寧)과 이수남(李壽男)의 졸기

1473년(성종 04) 07월 03일(임진) 김수녕(金壽寧)의 졸기(卒記)

복창군(福昌君) 김수녕(金壽寧)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김수녕은 자(字)가 이수(이臾)이고, 호(號)가 양소당(養素堂)이며, 안동인(安東人)으로, 절충 장군(折衝將軍) 김숙(金潚)의 아들이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로왔으며, 7세(歲)에 속문(屬文)에 능하니 당시에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었다. 그의 외조부(外祖父)인 좌참찬(左參贊) 안숭선(安崇善)이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ꡒ이 아이가 다른 날 마땅히 세상에 크게 날릴 것이다.ꡓ 라고 하였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년)인 나이 18세가 되던 해 봄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가을에 문과(文科)에 제1인으로 뽑혀서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을 제수(除授)받았으며, 병조 좌랑(兵曹佐郞)․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역임하였다. 당시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가 함길도(咸吉道)․평안도(平安道)․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충청도(忠淸道) 5도의 체찰사(體察使)가 되어서, 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하였다. 천순(天順) 신사년(1461년)에 한명회가 그를 보내어 변방(邊方)의 일을 아뢰었는데, 임금을 면대하여 말하는 것이 심히 자세하므로, 세조(世祖)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ꡒ지금 너의 말을 들으니, 비록 천리(千里)를 격(隔)하였지만 한명회와 더불어 면대해 말하는 것과 같도다.ꡓ

 

하고, 특별히 1자급(資級)을 더하였다. 임오년(1462년)에 세조(世祖)가 경회루(慶會樓)에 나아가서 예문관(藝文館)의 여러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옛날의 제왕(帝王)의 득실(得失)을 논란하게 하였는데, 김수녕이 경사(經史)를 증거하면서 시비(是非)를 변석(辨析)하니 문득 말할 때마다 임금이 감동하여 들었고, 또 명하여 자급을 더하게 하였으며, 발탁하여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삼았으나 일 때문에 파면당하였다. 성화(成化) 을유년(1465년)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고, 또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다. 병술년(1466년)에 다시 좌승지(左承旨)로 임명되었다가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임명되어서 형조 참의․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무자년(1468년)에 관계(官階)가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고, 경인년(1470년)에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다. 세조(世祖)와 예종(睿宗)의 두 《왕조실록(王朝實錄)》을 참찬(參撰)하였는데, 당시 좋은 사재(史才)가 있다고 칭찬하였다. 신묘년(1471년)에 순성 좌리 공신(純誠佐理功臣)의 칭호를 하사받고 복창군(福昌君)에 봉(封)해져서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진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다가 이 해에 다시 복창군에 임명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38세였다. 문도(文悼)라고 시호(諡號)하니 두루 묻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중년(中年)에 일찍이 죽은 것을 도(悼)라고 한다. 김수녕은 천자(天資)가 명민(明敏)하고 학문이 해박(該博)하며, 문장(文章)을 짓는 것이 남보다 뛰어나고 간고(簡古)하며, 필(筆)을 잡으면 바로 성취하여 전인(前人)의 말을 답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글로 써 둔 것이 없어서, 이 때문에 시문(詩文)으로서 세상에 전하는 것이 적다. 바깥으로는 온화(溫和)하고 안으로는 강직(剛直)하여서 진실로 적당한 사람이 아니면 비록 달관(達官)이나 귀요(貴要)라 하더라도 종일토록 마주 대(對)하여 일찍이 그와 더불어 말을 할 수가 없었으나, 만약 그 적당한 사람일 때에는 비록 위포(韋布)의 선비라 하더라도 반드시 신발을 끌고 나아가 맞아들였다.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항상 녹(祿)만을 받아서 먹었는데, 남의 집을 빌어 살면서도 종신토록 처세함이 둥글고 넓었으며, 작은 연고를 가슴에 끼어두지 아니하였다. 다만 익살이 많아 큰 소리를 치니 군자(君子)의 근묵(謹黙)하는 위용(偉容)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그의 단점으로 여기었다.

 

김수녕선조님의시

●中國使臣和談 (중국사신화담) / 중국사신과 화담

海天飛馹獨登樓 (해천비일독등루) / 바닷가 높은 루(樓)에 홀로 오르니

豪氣元龍洗不牧 (호기원용세부목) / 장한기운 널리널리 펼쳐있구나

漠漠長空迷去鳥 (막막장공미거조) / 나는새 하늘가로 사라져 가고

深深芽草沒行牛 (심심아초몰행우) / 가는소 풀사이로 자취 감추네

分溪白石難聲急 (분계백석난성급) / 바위는 물을 갈라 여울이 울고

夾路靑山樹影稠 (협로청산수영조) / 비탈길 산을 끼고 숲속으로 드네

好雨己隨車馬至 (호우기수차마지) / 비 산뜻 개이면서 찾는이 있어

陂塘五月欲先秋 (피당오월욕선추) / 못가에 낚대드니 시원하구나

 

역대명시집

김수녕 선조님의 시

아득한 마운령(磨雲嶺)의 가장 꼭대기를

비틀 거리며 가는 늙은말 안장조차 못이기네,

새 만이 통행하는 길이 삼천리나 된다고 전날 들었더니

이제 양의 창자같은 백여덟 굽이를 오르네.

자는 안개 가벼운 산아지랑이에 옷은 반이나 젖었고

매달린 언덕위 절벽길은 두눈이 차가웁네.

그대에게 말하노니 동쪽으로 가는일을 이야기 하지말라

귀밑 털이 서녘바람에 또 얼룩지려 한다.

 

<●함경도 단천군 마운령에서>

누런구름은 국경에 가득하여

나그네의 근심을 자아내는데.

성 아래에 한줄기의 강물이 길게 흐르네.

구슬픈 오랑캐의 피리소리 행여나

나그네 귓전을 스치지 말아다오

소리마다 국경 여행을 괴롭혀 주느니.

<●함경도 경흥 아오지성(阿吾地城)에서>

 

호기(豪氣)는 백척(尺)의 다락 이라고 들었을뿐

나는듯한 누각이 시원스런 이 바닷가에 있을줄을

어찌 알았으리요.

십천두(十千斗)의 술을 가지고 진왕(陳王)의

즐거움을 하려 하지 않으니

한번 웃는 월녀(越女)의 만류함에 관계없는 것일세.

대지는 찌는듯 더운데 바람은 고요하고

하늘은 감색(紺色)으로 푸른데 불이 흘러 내리는듯 하네.

당시의 더위먹어 죽은사람을

응당 헤아릴수 없었을것인데

이같이 시원하게 노는것을 기뻐하노라.

<●함경도 문천군 절문루(節文樓)에서>

 

천제가 맑은 시냇물을 보내어 땅에서 솟아나오니

성한 아름다운 기운이 신주를 싸고있네.

순(舜)임금의 옛날 밭갈고 고기잡던 그자취는

모두 이 용흥강과 성력산(聖歷山)머리에 있구나.

<●함경도 영흥 횡강(橫江)에서>

 

선조님의 시소개 (2)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엇비슷한 고목을 앞 여울에 가로질러서

자국마다 서늘한 마음 몇번이나 놀랬던가,

평지에 이는 풍파 아무도 모르면서

다리에 와서는 두렵게 보누나.

삼척도호부 <김수녕>

 

●평창군(平昌郡)

빨리 달리는 역마(驛馬)를 타고 머물겨를 없어

바로 산그늘이 넓고 먼곳에 이르렀다.

사마천 같이 멀리 유람함은 아직 그치지 않았고

진등(陳登)같은 호기는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노라.

시름을 씻는데 병에 술이 없을수 있으랴

기이한것을 구하는데 도리어 상자에 글이 있구나,

이번 유람의 기절(奇絶)함이 평생에 으뜸되니

좀먹은 책속의 좀벌래 같은 생활이 우습기만 하여라.

평창군 <김수녕>

동국여지승람에서 옮김.

 

●이요루(二樂樓)

홰나무는 천년이나된 고을에 늙었고

꽃은 백척 누대에 둘렀네.

못이 열리니 태화(太華)에 이어진듯,

산이 가까우니 나부산(羅浮山)을 껴안은듯,

이세상에 선경(仙境)이야 있으랴.

하늘 서쪽에 좋은 고을이 있네.

공부(工部:두보)의 시흥 참을수 없어

때때로 낭만(浪漫)한 놀이를 한다네.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김수녕>

 

●강선루(江仙樓)

우연히 송양(松讓)을 지나다 꽃다운 샘에 목욕하고

머리 말리며 흘골산(紇骨山) 앞으로 돌아오네.

한 물은 뜰을 따라 물결이 다시 고요한데,

두어 봉우리는 문을 헤치고 들어와 푸르게 잇닿았네,

안개가 개인 산시(山市)의 저물려는 햇빛에 안개가 맑고,

비가 내릴려는 때에 바람은 강루(江樓)에 가득하네.

재주없어 황학루(黃鶴樓)의 글귀를 이루지 못하니

다만 앵무주(鸚鵡洲)에 풀만 처량하네.

평안도 성천도호부 <김수녕>

 

●덕원(德源)

반도(蟠桃)가 열매를 맺으려면 천년이 걸리는데,

선리(仙李)의 뿌리가 서리는데 8백년이 걸렸다네.

아름답다, 이 덕원은 하늘이 만드신 땅이로다.

면면(綿綿)하게 뻗은 오이덩굴 한악장(樂章) 왕업(王業)의

아름다움을 찬송 하였네.

함경도 덕원도호부 <김수녕>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차문천판상시운(次文川板上詩韻)-김수녕(金壽寧)

盛漢當千載(성한당천재) : 한 나라는 천 년을 갔고

匈奴値百年(흉노치백년) : 흉노는 그 나라가 백년을 갔었노라

掃?長白嶺(소분장백령) : 요나라 재앙을 장백산 고개에서 쓸어버리고

歇馬黑龍川(헐마흑룡천) : 말은 흑룡강 물 가에서 쉬게 하리라

聖德元和上(성덕원화상) : 성덕은 당나라 헌종인 원호의 위 시대이요

戎功大雅前(융공대아전) : 훈공은 시경 ꡒ대아ꡓ편의 앞이도다

燕然須勒頌(연연수륵송) : 두현이 연연산에 공을 기록하듯 기록하여

留取後來傳(류취후래전) : 모아서 후세에 전하게 하리로다

 

●차삼척죽서루와수목교(次三陟竹西樓臥水木嬌)-김수녕(金壽寧)

?牙古木截前灘(사아고목절전탄) : 늙은 나무로 베어 떼 만들어 앞 여울에 걸쳤니

步步寒心幾駭瀾(보보한심기해란) : 걸음걸음 조심하며 몇 번이나 물결에 놀랐던가

平地風波人不識(평지풍파인불식) : 평지에도 풍파 있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到橋猶作畏途看(도교유작외도간) : 이 다리에 이르러 도리어 두려운 길이라 여긴다오

 

용인 신정 기(龍仁新亭記)

 

용인(龍仁)은 작은 고을이나 서울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밤낮 없이 폭주하는 대소의 빈려(賓旅)가 이곳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으니, 대개 남북의 인후(咽喉)라 하겠다. 옛 관원(館院)이 적어서 겨우 하룻밤을 지낼 만하며, 한더위를 당하면 막히고 답답하여 손이 오더라도 회포를 풀 길이 없어 번열(煩熱)에 허덕이니, 병으로 여긴 지가 오래였다. 천순(天順) 4년 겨울에 박군(朴君)이 와서 이 고을을 맡게 되자, 과세(課稅)에 너그럽고 정사에 민첩하여 온갖 폐단이 다 없어지니, 서리(胥吏)는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그리워하였다. 하루는 군이 서리와 상의하기를, ꡒ내가 재목을 모아 정자를 지어 손님의 납량(納凉)할 곳을 만들고자 하는데 옳다고 생각하는가.ꡓ 하니, 이미 군의 정사를 덕으로 여기는 처지라 모두 하는 말이, ꡒ원컨대 힘을 다하겠습니다.ꡓ 하였다. 그래서 장인(匠人)은 정신을 가다듬고 역사하는 자는 힘을 부지런히 하여, 새벽과 밤으로 일을 서둘러서 한 달 안에 낙성을 고하게 되었다. 시작할 때에 백성은 정자를 짓는 줄도 몰랐다가 완성된 뒤에 바라보며 말하기를, ꡒ우리 원님은 옛날의 이른바 신명(神明)이 아닌가. 정자를 지었는데도 어찌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을까.ꡓ 하며, 서로 우러러 보고 감탄하며 그 새로 지은 것을 경축하였다. 요즘 세상의 수령들을 보면 도취한 꿈속에서 날을 보내며, 관청을 여관집 보듯이 하여 기울어진 뒤에야 기둥을 바꾸고 비가 샌 뒤에야 수선하며, 심한 자는 기와 하나도 갈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ꡒ나는 백성을 아껴서 그렇다.ꡓ 하며, 풀 한 포기도 제거하지 아니하고서, ꡒ내 뜰에는 송사가 없어서 그렇다.ꡓ 하니, 관사의 퇴락은 항상 이러한 무리에게 기인하는 것이다. 어찌 능히 일에 분발하여 처음부터 튼튼히 하는 자가 있으며, 또 어찌 능히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도 못하게 하고 이와 같이 짓는 자가 있으리요. 내가 일찍이 남쪽에 노닐다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용인(龍仁)을 지나는데, 박군이 나에게 붓을 주며 기(記)를 청하므로 나는 이미 이와 같이 졸하게 적었었다. 군은 말하기를, ꡒ정자가 기(記)를 얻었으니 다행이나, 명칭이 아직 없으니 어찌하랴.ꡓ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ꡒ명칭이 있어야 의당 옳겠지만, 명칭이 없더라도 또한 불가할 것은 없다. 용인 고을에 그대 같은 원이 없었으면 정자가 세워질 까닭이 없고, 정자가 세워지지 않았으면 명칭이 어디서 나오리요. 명칭이 없는 것으로써 명칭을 하는 것도 역시 좋은 명칭이 아닌가 싶다.ꡓ 하였다. 군이 나에게 간청하기를 더욱 부지런히 하므로 인하여 용인 백성이 우러러보며 새로 지어진 것을 경축하는 뜻을 채택하여 이름을 신정(新亭)이라 하자고 하였다. 전하는 말에 이르지 않았던가. ꡒ신(新)이라 이른 것은 옛날이 있기 때문이다.ꡓ 하였으니, 또한 처음부터 군자가 중히 여기는 의(義)가 없는 것이 아니다. 박군의 이름은 거명(居明)이요, 자는 회보(晦父)요,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출전;동문선

김종직과 김수녕 (원문 검색)

 

¤ 국역 점필재집 ¤ 점필재집 시집 ¤ 시집 제1권

▣ 합천 동헌에 있는 서 참판과 김 승지의 운을 차하다

합천 동헌에 있는 서 참판 【거정】 과 김 승지 【수녕】 의 운을 차하다[次陜川東軒徐參判 【居正】 金承旨 【 壽寧 】 韻] 【2수】

 

지루한 세월을 말 위에서 보내노라니 荏苒光陰馬上消

장안에 머리 돌리매 더욱 멀기만 해라 長安回首轉遙遙

눈에 가득한 봄바람은 이별을 슬프게 하고 春風滿眼堪傷別

창중에 뻗친 살기는 문득 높아짐을 알겠네 劍氣橫空?覺高

이 문지르는 청담 9) 은 달뜬 밤이 좋겠거니와 ?蝨淸談宜月夕

게 다리 쥔 미친 흥 10) 은 꽃핀 아침을 저버렸네 持?狂興負花朝

징심루 아래 흐르는 한계의 물에 澄心樓下寒溪水

술취해 난간 치니 귀밑머리 비치는구려 醉拍欄干燭?毛

 

남쪽에 온 정황은 몹시도 느슨하여라 南來情況苦騰騰

풍광을 관령하는 것도 잠시 뿐이로세 管領風光且暫能

한가한 놀이를 위해 항상 신에 밀을 바르고 11) ?爲優游常蠟?

말라빠진 환상 혐의해 문득 중을 멀리하네 還嫌枯幻便疎僧

취중의 별천지는 반드시 끝까지 찾는데 醉鄕日月須窮討

속세의 공명은 매양 만나기 어려워라 塵世功名每錯?

쓸모없는 이 사람을 그 누가 채용해주랴 跌宕散人誰省錄

등한히 동으로 갔다 다시 서로 오르네 等閑東度復西登

 

[註 9] 진(晉) 나라 때 청담으로 이름이 높던 왕맹(王猛)이 환온(桓溫)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방약무인한 태도로 옷속의 이를 문지르면서 당세(當世)의 일을 담론한 데서 온 말이다. ☞

[註 10] 진(晉) 나라 때 필탁(畢卓)이 일찍이 말하기를 ꡒ술 수백 섬을 배에 가득 싣고 사시(四時)의 감미(甘味)를 비치하고서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잡고 왼손에는 게의 앞다리를 쥐고 주선(酒船) 안에 떠서 노닌다면 일생을 마치기에 만족하겠다.ꡓ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註 11] 진(晉) 나라 때 완부(阮孚)가 나막신을 좋아하여 항상 신에다 밀을 발라 광택(光澤)을 냈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 卷四十九》 ☞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益精의 현손대에 이르러 인물들이 배출되어 이 가계를 번창하게 하는데, 첫째인 師秀(사수)는 1490년(성종21)에 태어나 사헌부 감찰과 회덕현감을 역임하였고, 압실에 있는 묘소의 묘비를 石峰 ★韓濩(한호)가 써서 유명하다. 師秀의 장남인 金吳(오)는 1520년(중종15)에 태어나 명종때 무과에 급제하여 12주의 목사와 4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묘비는 ★柳拱辰(류공신)이 찬하고 서하였다. 이 가계는 전의면 신방리(방이골)에 세거하고 있다.

 

***회덕현감 師秀의 묘갈문

師秀의 행적을 간략히 적고, 특히 회덕현감으로 재임중에 백성들이 선정을 노래하였다는 것, 향리에 돌아와 지극한 효성을 지녔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묘갈문은 명필로 알려진 ★한석봉의 글씨이다.

 

***회덕현감 金師秀의 묘비

이 묘비문을 ★한석봉이 써서 유명하다.

 

6. 경진보 발간 과정 :

*<경진보> 서문, 발문, <을유보> 서문, <기미보> 서문, <弘毅齋營建記> 기록 내용 참조 요약 작성

1)1500여년 경, 宗人 중에 유식한 인사들이 족보가 없음을 개탄하며 개인적으로 보첩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전해주곤 하였다. 그런데 그것들은 소홀히 하여 틀리기도 하는 등 여러 폐단이 있어 왔음.

2)1519년(기묘년.중종14), 上舍公 金胤先(제. 正言公 휘 익의 조카-齊賢의 초명으로 추정)이 백부 正言公(제. 휘 익)에게 족보 편집을 위탁하였고, 정언공은 최초로 이 족보 제작에 뜻을 두어 그동안의 보첩들을 수정하고 정리하여 世譜를 편찬하고 宗系를 밝혀놓았음. 그러나 그 세보를 간행하지 못하고 1548년(戊申년. 명종3년)에 몰하심.

3)1550년 경(추정), 김곽(제. 익의 아우)이 화성군수로 있을 때 귀양중이던 유희잠(柳希潛)에게 부탁하여 정언공이 정리해 놓았던 세보 초고를 보완하여 7권의 족보로 완성하게 함. 그런데 外派에 대한 기록상 문제점이 드러남.

4)1577년 (정축년. 선조 10년), 金齊賢(제. 김곽의 자)이 옥산(현 전남 해남)으로 전보됨에 따라 그 부임 초에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여러 宗長들에게 세보 문제를 품의함. 또한 강화부 백령공(?. 휘 ★오)과도 상의하여 본 족보와 대조해 보고 당시에 편찬된 파평윤씨와 전성이씨 등의 姓譜를 모방하여 문제가 되었던 외파에 대한 기록 문제에 있어 외손의 지파는 삭제하고 同姓의 자녀만 기록하기로 결정함.

5)1578년 경(추정). 金昉(제. 金익의 손. 金潤雲의 자. 당시 천안군수)이 先代(정언공 金익)의 뜻을 이어받아 직공(職工)을 모집하여 각자(刻字)를 시작함. 그런데 그것은 행장(行狀)과 서문(序文) 정도의 판각에 그침.

6)그 후(1580년. 경진년. 선조 13) 감사공(휘 億齡. 익)과 참찬공(휘 瓚. 익)이 여러 종친들과 함께 이 문제를 협의하였는데, 당시 강화부사로 있던 ★金오(?)가 충청도 절도사가 된 뒤 천안(金 昉)으로부터 이 사업을 인수하여 다시 교정하고 자신의 비용으로 판각하여 출판을 마침.

7)이 때 승지공(휘 億齡. 익. 당시 좌승지 겸 수찬관 지제교)에게는 서문을 의뢰하였고, 金瓚(익)과 金齊賢(제)에게 발문을 의뢰하여 편찬 및 발간 사업을 마침.

 

8. 기타 관련 자료

 

1) 경진보 (선조13, 1580) 서문 (金億齡) 역문 일부 (2003. 12. 15. 주회(안) 제공)

이제 강화부사 ★김공 오( )가 충청도 절도사가 된 뒤로부터 이를 다시 교정하여 비용을 들여 출간함에 있어 --

 

2) 경진보 (선조13, 1580) 발문 (김제현) 일부 (2003. 12. 15. 주회(안) 제공)

그런데 丁丑 년간에 마침 玉山(현재의 전남 해남군)으로 出宰(출재)의 명을 받아 부임초에 京中에 거주하는 여러 宗長들게 품의하고 또한 지금의 ★강화부伯令공(☞?전서 김오)과도 상의하여 本譜와 대조하고,

 

★正言공(☞제학 김익)의 손자이신 현 천안군수 ★昉공(제학 김방)이 선대의 뜻을 잘 이어받아 職工을 모집하여 刻字를 시작하였으나 行狀과 序文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을 ★강화령공(☞?전서 김오)이 천안으로부터 이 사업을 인수하여 공사를 마쳐서 누대 성취하지 못하였던 일이 마침내 그 손에서 완성하였으니 어찌 우리 전 종친들의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3) 기미보 (영조15, 1739) 서 (90세 김환) (2003. 12. 15. 주회(안) 제공)

병사공 ★오(오)가 당시 강화부사로 있을 때에 그가 족보를 板刻에 부쳤으니 이 해가 만력8년 庚辰(☞1580년)이다.

 

4) 기미보 (영조15, 1739) 서 (김유) (2003. 12. 15. 주회(안) 제공)

지금까지 전해오는 세보는 오직 만력 경진(1580)에 휘★오(오)가 강화부사로 있을 때에 발간한 한 책 뿐이다.

 

계곡집 Ⅱ (장유 著, 1995, 민족문화추진회)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인 장유(張維:1587~1638)의 시문집.

 

●-----유공묘비명 (柳公墓碑銘)

선묘(宣廟) 기축, 경인 연간에 ★송강(松江, 鄭澈정철의 호) 정공(鄭公)이 상부(相府)에 몸담고 있을 때, ---

그리하여 신묘년 여름에 이르러 화기(禍機)가 졸지에 발동된 결과, 송강공(松江公)이 서쪽 변방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것을 필두로 하여, ---

이에 선군자(先君子)께서도 온성(穩城)에 유배당하고, ★유공 공신(柳公 拱辰) 역시 경원(慶源)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이곳은 모두가 북쪽 변방의 원악지(遠惡地)로서 왕경(王京)과 2천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었다. 그런데도 시의(時議)는 여전히 계속 날뛰면서 기필코 불측(不測)한 지역에 빠뜨리고야 말려도 대들었다. 그런데 마침 이듬해에 왜란(倭亂)이 일어나 상이 장차 서쪽 지방으로 떠나려 할 무렵에 이른바 당인(黨人)들을 모두 풀어 주면서 행재(行在)로 오게 하였으므로 유공도 서용(敍用)되어 예조정랑이 되었다. 공의 자(字)는 백첨(伯瞻)이다. 유씨는 본래 문화(文化)에서 유래하는데, 고려의 공신 거달(車達)의 후예인 밀직사(密直司) 언침(彦沈)에 이르러 진주(晉州)로 이적(移籍)하면서 마침내 진주 사람이 되었다.

 

공의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절도사 ★오(金+吳)의 딸로서 부도(婦道)를 갖추고 있었는데, 공보다 5년 앞서서 죽었으며 현재 공과 부장되어 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위(偉)는 현감이고, 차남은 준(儁)이며, 장녀는 홍명남(洪命男)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심익세(沈翼世)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손은 모두 기록하지 못한다.

사자(嗣子)인 위가 행장을 가지고 찾아와서 말하기를, "선인(先人)의 장례를 모신 지 지금 25년이 되는데 아직껏 묘도(墓道)에 새기는 일을 하지 못하였다. 이는 어쩌면 이때를 기다린 듯한 느낌도 드는데, 그래서 감히 명을 써 주기를 청하게 되었다." 하였다. 아, 내가 어떻게 감히 거부할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감히 사양을 하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한다.

 

▣ 김주회 - 우리가문 최초의 족보 1580년 경진보 宇쪽에 兵使를 지내신 金,金+吳 라는 분이 계십니다.

전서공파로서 현감을 지낸 金師秀의 아들이십니다. 선계를 보면 김휴-김익정-김형-김부녕-김귀년-김사수(현감)-김오(병사)-金九鼎 가계입니다. 충렬공 행장 중에 김덕룡(익)이 평양에서 인출 반포한 또 한책이 있다고 金九鼎이 근지한 것이 있는데 시기적으로 보아 김오의 아들 김구정일것 같습니다.

 

■ 충렬공 행장

조선초기 <고려사>를 편찬할 때 '김방경 열전'의 중요한 근거자료는 <충렬공 행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충렬공 행장>과 <고려사 김방경 열전>을 비교해 보면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다른 내용도 있습니다. 충렬공 행장 간행과정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300년 충렬공께서 돌아가시고

1) (언제, 누구에 의해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충렬공 행장이 만들어졌고

2) 1350년 2월, 충렬공 행장에 안진(安震)이 끝에 적기를(跋), 충렬공의 손자 김영후(金永煦)의 집에 공(公)의 행장(行狀)이 비장(秘藏)되어 있으나 해가 오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썼다

3) 1421년 10월, 최개(崔開)가 말편(末篇)에 기록하기를, 상락공(上洛公) 5대손 김명리(金明理)가 "우리 선조(先祖)의 행장(行狀)이 집에 있으나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고 최개를 찾아가 부탁하였고, 최개는 한종우(韓宗祐)와 더불어 정이오(鄭以吾)에게 부탁하여 정이오가 십여자(十餘字)를 더 써넣었고, 한군(韓君)이 해자(楷字)로 청서(請書)해서 공장(工 )을 모집(募集)하여 출간(出刊)하였다

4) 후손 ★김구정(金九鼎)이 삼가 기록하기를(謹識), 또한 책이 있으니 김덕룡(金德龍)이 기도(箕都=평양)에서 인출(印出)해서 반포(頒布)한 것이다. 그 글을 본즉 이것과 틀린 바 없으니 이제 아울러 쓰게 되면 중첩(重疊)이 됨으로 단지 그 발미(跋尾)만을 아래에 부기(附記)하는 바이다.

 

■ 1958년 안동김씨보감

●김사수 묘비 書, 사촌 만취당 현판 書, 충효당 영모각 소장 광국공신녹권 書

★한호(韓濩)

1543(중종 38)~1605(선조38). 조선 중기의 서예가. 본관은 삼화(三和).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청사(淸沙). 군수 대기(大基)의 5대손으로, 정랑 세관(世寬)의 손자이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寫字官)으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書寫官)으로 파견되었다. 벼슬은 흡곡현령(#흡02谷縣令)과 가평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그의 묘갈에 의하면, ꡒ송도(松都)에서 났으며, 점(占)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ꡐ옥토끼가 동쪽에 났으니 낙양(洛陽)의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날 것이다.ꡑ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글씨 쓰기에 힘썼고, 꿈에 왕(王羲之)에게서 글씨를 받아, 이로부터 마음속으로 자부(自負)하고 법첩(法帖)을 대할 때마다 신(神)이 돕는 것 같아 마침내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그 묘(妙)를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ꡓ고 하였다. 그의 서법(書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부80)의 서체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를 배웠다.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진위(眞僞)가 문제되는 악의론(樂毅論)․동방삭찬(東方朔贊)․황정경(黃庭經) 등의 소해(小楷)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조법(趙法)보다 뒤떨어져서 진당인(晉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氣韻)이 모자라는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오랫동안 사자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천분을 발휘하지 못하고 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앞섰다. 그러나 워낙 많이 썼으므로 공(工)과 힘(筆力)이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는다 하여도 동기창(董其昌)에게 미치지 못하니, 이러한 경지는 알지 못하는 자들과는 더불어 말할 수 없다고 김정희(金正喜)는 말하였다.

이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가창출될 만큼 그의 영향은 컸으며 또 이로부터 사자관제도가 이루어졌다.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金光啓碑)․황주서대수비(黃注書大受碑)․이윤식비(李允湜碑)․이별제공즙비(李別提公楫碑), 고양에 있는 권도원수대첩비전면(權都元帥大捷碑前面)․기응세비(奇應世碑), 장단(長湍) 윤감정변묘표액(尹監正#변03墓表額), 과천(果川) 유용비(柳容碑)․허초당엽묘표음(許草堂曄墓表陰), 포천(抱川) 이판서몽량비(李判書夢亮碑), 남양(南陽) 홍영상섬비(洪領相暹碑), 용인 정의흥희린갈(鄭義興姬#인23碣)․정대헌유비(鄭大憲裕碑), 개성 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합천 박사간소갈(朴司諫紹碣), 평양 기자묘비(箕子廟碑) 등을 썼다.

《동국금석평 東國金石評》에는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고 평하였다. 그로부터 비롯되어 사자관체(寫字官體)라는 서체가 형성되었고, 이러한 서체를 중국에서는 간록체(干祿體)라 한다.

 

참고문헌

阮堂集, 槿域書畵徵. 〈金膺顯〉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둘째인 師俊도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병환이 있자 한겨울에 연근을 구하고자 7주야를 얼음 위에서 호곡하자 홀연히 연근이 솟아 이로써 부친의 병환을 구하고 연명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효성이 인근 사람들에게 알려져 예종조에 휘릉참봉에 제수되었지만 사직하고 전의 楸下(추하, 현재의 양곡)에 은거하여 학문을 가르치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고 전한다. 명종때 효자로 표창을 받아 정려가 건립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퇴락하자 庚辰년에 중수하였는데 중수기를 ★宋穉奎가 찬하였고 현감 ★兪漢芝가 썼다. 師俊의 후손들은 전의면 양곡리(양지촌)에 세거하고 있다.

 

○ 金益精 金師俊 旌閭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양지촌에 위치한 이 정려는 원래는 명종조와 세조조에 명정을 받은 것이지만, 현재의 건물은 1820년에 중건된 것이다. 전의면 소재지에서 691번 국도를 타고 공주군 의당면 쪽으로 약 4.5,km 가면 양곡리 양지촌 마을의 입구가 나오는데 여기서 동남쪽으로 약 700여 m를 가면 논 위의 언덕에 정려가 있다.

정려는 정면2칸 측면1칸의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화강석재를 가공한 원형초석 위에 원주를 올렸으며, 4면에는 홍살을 돌렸다. 정렬의 각칸 하반은 시멘트로 고멕이하였으며, 창방 위에는 각각 1개씩의 화반대공을 놓았다. 양측면 박공 밑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판을 설치해 놓았다.

정려의 중앙 상단부에는 각 칸마다 하나씩 2개의 명정현판이 걸려 있는데, 정려 왼쪽에는 같은 크기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현판에는 '有明朝鮮國孝子嘉善大夫行司憲府大司憲金益精之閭 世祖朝 命旌 今上二十年庚辰三月日重建' 이라고 씌여 있다. 두 정려가 함께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정현판에 기록된 효자 ★金益精은 金休의 아들로 1396년(태조5)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삼사를 역임하였고 사헌부 대사헌에 재임중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부모의 상을 각각 3년씩 6년간을 시묘하였다. 그후 태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정계에 진출,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성종조에는 佐理功臣으로 福昌君에 봉해지기도 하였으며, 시호는 문정공이다.

 

정면에서 보아 오른쪽에 가로 145cm, 세로 48cm의 '有明朝鮮國孝子處士金師俊之閭 明廟朝 命旌 今上二十年庚辰三月日重建'의 현판이 있어 1820년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정받은 ★金師俊(1439-?)은 효행과 유덕을 닦았는데 부친의 병에 蓮根이 특효라 하여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어 구하여 드리니 효험이 있어 병이 나을 때까지 복용시켜 주었으며 부친이 75세의 장수를 누렸다. 명종조에 효자로 정려를 명하였다.

현재 정려 주변에는 시멘트 기단을 돌려 깨끗이 정비해 놓았으며, 잘 보호되고 있다.

 

***雲庵公 益精, 處士 師俊 정려중건기

 

1824년(순조24) ★송치규가 지은 이 중건기에는 후손인 ★光淳과 그의 종제인 ★樂淳이 학당의 유허비를 지은 뒤 다시 운암공과 처사공의 정려중건기를 부탁하여 짓게 되었다고 하고 빼어난 효행사적을 적고 정려가 누차의 병란으로 소실됨에 여러 종인들과 뜻을 합쳐 중건한 사정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 연기군지, 1988

 

▣ 金師俊 세종21년(1439)-?

안동인, 자는 明叔, 호는 思庵, 형조참의 ★金龜年의 둘째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김귀년이 1455년 단종이 폐위되고 사육신이 처형, 집현전이 폐지되는 사건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연기군 전동면 양곡리로 돌아온 이래로 어린 나이에도 항상 부모를 효로서 섬겼다고 한다. 어느 해에는 부친이 ?병이라는 모진 부스럼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연근이 먹고 싶다고 하였다. 때가 엄동설한인지라 그는 매일을 연못 빙판에 들어가서 기도하던 중에 연못에서 연근이 나왔고 이를 먹은 부친은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한다. 부친이 75살에 사망하자 3년을 시묘하였는데 이를 들은 예종(1469)이 친히 칙사를 보내어 위로하고 그의 선산을 능참 ---생략---

 

■ 문화유적총람

【유적명칭】 연기 양곡리 김익정․김사준 정려

【관리번호】 339-850-225-183

【지정사항】 <지정사항 없음>

【유적종류】 충효비(정려)

【유적위치】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유적 분포지도 참조

【소 재 지】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양지촌

【시 대】 조선시대

【관 리 자】

【유적내용】

 

전의면 소재지에서 691번 국도를 타고 공주군 의당면 쪽으로 약 4.5㎞ 가면 양곡리 양지촌 마을 입구가 나온다. 이 곳에서 동남쪽으로 약 700여 m 가면 논 위의 언덕에 정려가 있다. 정려는 정면 2칸, 측면 1칸의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화강석재를 가공한 원형초석 위에 원주를 올렸으며, 4면에는 홍살을 돌렸다. 정려의 각 칸 하방은 시멘트로 고멕이하였으며, 창방 위에는 각각 1개씩의 화반대공을 놓았다. 양측면 박공 밑에는 비바람을 막기위한 방풍판을 설치해 놓았다.

 

정려의 중앙 상단부에는 각 칸마다 하나씩 2개의 명정현판이 걸려져 있는데, 정면에서 보아 오른쪽에 가로 145㎝, 세로 48㎝의 ꡒ유명조선국효자처사김사준지려 명묘조 명정 금상이십년경신삼월 일중건(有明朝鮮國孝子處事金師俊之閭 明廟朝 命旌 今上二十年庚辰三月 日重建)ꡓ이라는 현판이 있다. 명정받은 ★김사준(1439~?)은 효행과 유덕을 닦았는데 부친의 병에 연근이 특효라 하여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어 구하여 드리니 효험이 있어 병이 나을 때까지 복용시켜 주었으며 부친이 75세의 장수를 누리었다. 명종조에 효자로 정려를 명하였다.

 

정려 왼쪽에는 같은 크기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현판에는 ꡒ유명조선국효자가선대부행사헌부대사헌김익정지려 세조조 명정 금상이십년경신삼월 일중건(有明朝鮮國孝子嘉善大夫行司憲府大司憲金益精之閭 世祖朝 命旌 今上二十年庚辰三月 日重建)ꡓ이라고 씌여 있다. 명정 현판에 기록된 효자 ★김익정은 김휴의 아들로 태조 5년(1396)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삼사를 역임하였고 사헌부대사헌에 재임중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부모의 상을 각각 3년씩 6년간을 시묘하였다.

그 후 태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정사에 진출, 이조참판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민훈학당을 독려하여 민족중흥을 진작하였으며 공은 또한 천성이 겸손하였고 학문인 탁월하며 덕행이 후덕하여 세인들이 충효명문이라 숭배하였다. 성종조에 좌리공신으로 복창군까지 봉하였으며, 호는 문정공이다. 세조조에 정려를 명받았다. 현재 정려주변에는 시멘트기단을 돌려 깨끗이 정비해 놓았으며, 잘 보호되고 있다.

 

김익정 김사준 쌍효자문

[소재지]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시 대]조선

 

김익정은 이태조 5년(1396)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삼사를 역임하시고 사헌부대사헌에 재직중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부모의 상을 3년씩 6년간을 시묘하였다. 그후 태종의 부르심을 받고 다시 정사에 진출 이조참판으로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민훈학강학을 독려하여 민족중흥을 진작하였으며 공은 또한 천성이 겸손하였고 학문이 탁월하고 덕행이 후덕하여 세인들이 충효명문이라 숭배하였으며 세조조에 정려를 명받았다.

 

충신명문이 충신을 낳는다고 공의 손자인 수령은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성종조에 좌이공신으로 복창군까지 봉하였으며 호는 문도공 이다. 또한 김사준은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나 벼슬은 물론 과거에도 일체 응하지 않고 오직 효행과 덕을 쌓는데만 노력했다. 부친의 병에 연근이 특효라하여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어 하루같이 드리니 효험이 있어 병이 나을 때까지 복용시켜 주었으며 부친이 75세의 장수를 누리었다.명종조에 효자로 정려를 명하였다.(참고문헌 : 정려기)

 

● 김익정,김사준 정려중건기 書

★유한지(兪漢芝)

1760(영조 36)~? 조선 후기의 문인․서예가.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덕휘(德輝), 호는 기원(綺園).

한준(漢雋)의 사촌동생으로 영춘현감(永春縣監)을 지냈다. 전서와 예서를 잘 써서 일대에 이름이 높았다. 신위(申緯)는 《경수당집 警修堂集》에서 ꡒ청풍군수 윤제홍(尹濟弘)의 산수화와 영춘현감 유한지의 전서․예서가 한때 뛰어났다.ꡓ고 하였고, 김정희(金正喜)는 《완당집 阮堂集》에서 ꡒ조윤형(曺允亨)과 유한지는 예서에 조예가 깊었으나 문자기(文字氣)가 적다.ꡓ라고 평하였다. 《근역서휘 槿域書彙》․《근묵 槿墨》 등에 전하는 그의 진적을 보면, 당시 중국과의 빈번한 내왕에 따라 전래된 비첩(碑帖)을 본격적으로 익혀 고법(古法)을 충실히 따랐음을 살필 수 있다. 금석으로 영천의 〈은해사영파대사비 銀海寺影波大師碑〉, 산청의 〈문익점신도비 文益漸神道碑〉등의 전액(篆額)을 썼다.

 

참고문헌

槿域書畵徵. 〈李完雨〉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3째인 師哲은 벼슬이 목사에 올랐고, 사철의 손자인 濟鼎(제정)이 충절로 충장공의 시호를 받고 충신으로 정려를 받아 더욱 명성을 날린다. 제정은 자를 첨중이라 하였고 戊寅생으로 乙巳년에 무과에 급제한 뒤 丁卯년에 강홍립과 김경서가 싸우지 않고 적에게 투항하자 인산방어사로서 역전하다 순절하였다.

인조조에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치루게 하였고 병조참의의 벼슬을 증직하였으며, 이와 함께 그의 처자들에 대하여도 깊은 애도와 제사에 쓰일 토지를 하사하였다.

그후 영조때에는 충장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정려를 포장받기에 이른다. 그의 후손들은 달전리에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현재 '忠臣 贈嘉善大夫兵曹參判 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副摠管 行折衝將軍燐山鎭 兵馬僉節制使 兼 水軍防禦使 贈諡忠莊公 金濟鼎之閭' (1774년, 영조50)이라는 정려 포장 현판이 후손인 壽會의 집에 보존되고 있다.

 

충장공 김제정에 관련된 기사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보이는데, 인조5년(1627) 4월 22일조에는 비변사에서 김제정의 추증을 요청하여 허락받는 기사가 실려 있고, 같은 해 12월 21일조에는 왕이 하교하여 "호란에 순절한 자의 부모와 처자에게 미찬을 하사하여 공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라" 하심에 김제정의 처자에게는 거주지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급하라는 지시가 보이고 있다.

 

***충장공 행장과 예조 계하문

행장문은 안동김씨삼강록에 수록된 것으로 충장공이 丁卯난에 인산방어사로서 역전하다 순절한 내용과 인조때에 예관을 보내 제사지낸 일, 병조참의의 벼슬 증직, 처자에 대한 토지 하사, 그리고 영조때의 忠莊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정려를 포장받을 때 내린 제문이 소개되어 있다. 아울러 아들인 ★基의 병자호란시 검천에서 순절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아래 자료는 1774년(영조50) 정려를 받을 때의 문서로 동시 순절한 남이홍과 이완의 경우는 모두 포장을 받았으나, 유독 충장공만이 누락되어 한탄스럽다는 보령유학 ★魯粲(노찬, 충장공의 7대손) 등의 상언에 의하여 정려가 내려지는 과정, 그리고 전의현은 이 문서에 따라 정려를 세우고 결과를 보고하라는 지시문이다. 제정의 아들인 ★基도 부친이 순절한 원수를 갚고자 병자호란에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적을 맞아 싸우다가 丁丑년 檢(險)川 姑峴에서 순절하였다. 한편 이 가계에서는 ★王+獻(환)의 처 남양홍씨가 1738년(영조14) 열녀로 포상받아 정려가 건립되기도 하였다.

 

○ 烈女 金王+獻 처 남양홍씨 旌閭

전동면 양곡리 압실에 위치한 이 정려는 1738년(영조14) 나라의 명령으로 건립되었던 것으로 현재의 건물은 1894년에 중건된 것이다. 정려는 압실마을에서 도로를 따라 약 1km정도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정려는 김환의 처였던 남양홍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한 정려로 1738년(영조14)에 세운 것인데, 건물규모는 정면1칸 측면1칸의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정려는 최근에 보수한 것으로 화강석재로 된 네모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올리고 있으며, 전면을 제외한 3면은 시멘트로 벽을 만들고 전면만 홍살을 돌렸다. 아랫부분은 시멘트로 고멕이 하였으며, 양측면의 박공 밑에는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정려의 내부 중앙 상단에는 '烈女 贈通訓大夫 司僕寺正 金王+獻妻 淑人 南陽洪氏 之閭' (가로 180cm, 세로 40cm)라 새겨진 명정문이 걸려 있고, 연대는 '崇禎紀元後 再 戊午'로 이는 1738년(영조14)이다. 후면 상단부에는 1738년에 남편이 김환이 書하고 刻한 가로 130, 세로 20cm 크기의 사적기가 걸려 있다.

열녀문을 명정받은 남양홍씨는 ★홍처한의 딸로 일찍이 가훈을 익히고 부덕을 쌓았으나 출가하기 전에 양친을 잃고 남매가 의지하여 길삼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모든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다 한다. 이웃마을에 사는 김환에게 출가하여 시부모를 정성껏 섬기고 동기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니 그 소문이 원근에 자자하였다. 그러던 중 영조8년(1732) 6월에 남편이 이름모를 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었는데 이때 부인은 임신 4-5개월이었다. 점장이를 찾아가서 점을 치니 남편이 죽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에 부인은 그날 일찍 일어나서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해 기도하였으나 남편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부인은 가장인 남편이 사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어찌 생명을 보존하겠는가 하고 급히 어린 자식을 불러 울면서 젖을 먹이고 광속에 들어가 음독자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부인의 열행에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남편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아서 살아나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이는 분명 부인의 지성이 남편의 생명을 연장시킨 것이라고 칭송하였다 한다.

 

이러한 부인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1738년에 정려를 건립하게 되었다. 명정 현판에는 최초 건립후 150여년이 지난 1894년(고종31)에 중수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정려는 중건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는데, 원래는 텃골에 있었다고 한다.

***烈女 金王+獻의 妻 南陽洪氏 事實記

 

이 글은 안동김씨삼강록에 수록되어 있는데, 남양홍씨는 홍처한의 딸로 전서공의 14세손인 김환에게 시집와서 시부모를 봉양과 동기간 우애를 돈독히 하다가 남편이 병들자 음독자살하였던 사실과 부인의 열행에 하늘이 감동하였던지 남편의 살아난 사실을 칭송하고, 1738년의 정려 건립 사실이 적혀 있다.

 

■ 연기군지, 1988

▣ 金濟鼎 선조11년(1578)- 인조5년(1627)

안동인, 자는 僉中이다. 선조12년(1578) 전동면 양곡리 (지금의 전의면 양곡리)에서 태어난 그는 1605년 무과에 급제하여 금부직에 있다가 1624년 의주의 방어사로 재직하고 있던 중에 인조5년(1627)에 강홍립의 난을 맞이하였다. 난이 일어나자 그는 당시 의주부윤으로 있던 이완, 남이흥과 더불어 전투를 벌이던 중에 적의 장수 강로의 세력에 눌려 이완이 전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용전을 거듭하였으나 적의 화살이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적진에서 대검을 휘두르다가 전사하였다.

 

그후 영조50년(1774)에 우승지 ★조영진이 상소하여 인조묘에 당시 신하에게 내리는 제문인 치제문을 내리도록 하였으며 제전을 내려 영묘와 정려를 짓도록 하고 忠壯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한다. 그러나 현재는 종세가 여의치 못하여 영묘와 정려를 건립하지 못하고 연기군 전의면 신흥리(생촌부락)에 현판만 보관중이다.

 

<연기지, 구연기읍지>

 

충신 김제정(金濟鼎)

김제정의 자는 첨중(僉中)이요 본은 안동(安東)으로 서기 1578년 (선조11)전동면 양곡리에서 태어났다.

공은 1605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금부직(禁府職)에 있다가 1624년 의주 인산방어사(防禦使) 로 재직시 1627년(인조5) 강홍립의 난(姜弘立의 亂)이 발생하므로 당시 의주부윤(義州府尹) 이완(李完)남이홍(南以興)등과 더불어 교전중 적장 강로(敵將 姜虜)의 세력이 강하므로 이완 이 전사하고도 용전을 거듭하였으나 마침 화살이 쉴새없이 날아오니 단신의 몸으로 대검을 휘두르며 적의 진중에 진격하여 적을 물리치다가 전사했으니 1774년(영조50년)이었다. 우승지 ★조영진(趙英鎭)이 상소하여 인묘조(仁廟朝)에 왕이 소 치제문(致祭文 신하에게 내리 는 제문)을 내리고 제전(祭田)을 내려 영묘와 정려를 짓도록 했다. 그러나 종세(宗勢)가 여의치 못하여 정려와 영묘를 건립하지 못하고 현판만 보관중이다.

 

* 참고문헌 : 族譜

 

남양홍씨 정려

[소재지]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시 대]조선

 

남양홍씨는 ★홍처한의 따님으로 일찍이 가훈을 익히고 부덕을 쌓았으나 출가하기 전에 양친을 잃고 남매가 의존하여 길삼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제례에 결함이 없었다. 이웃마을에 사는 안동 김씨 전서공의 14세손인 김 환에게 출가하여 시부모를 정성껏 섬기고 동기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그 어진 소문이 원근에 자자하였다. 영조 8년 6월에 남편이 이름모를 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자 남편의 병환에 동침하면 해가 온다하니 이때는 벌써 임신 4 ~ 5개월이 되었다. 점장이를 찾아가서 점을 치니 남편이 곧 죽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부인은 일찍 일어나서 목욕재개하고 정성을 다해 기도하였으나 남편의 병은 악화되어 이에 부인이 말하기를 "이 집의 가장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바랄 것이 없는 지경에 내가 어찌 생명을 보전하랴" 하면서 급히 어린아이를 불러 울면서 젖을 먹이고 광속에 들어가 음독자살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남편의 병이 차도가 있어서 살아나니 이를 보고 사람들은 부인의 지성에 하늘이 감동하여 남편의 생명을 연장시킨 것이라며 장한 열녀로 칭송하였으며 후에 후손들이 정려를 짓고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 정려기)

 

●김제정 치제문 영묘 정려 상소

조영진(趙英鎭){2}

1737(영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사린(士藺). 재선(載先)의 아들이다.

1769년(영조 45)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었으며, 이듬해 사간원정언․홍문관부수찬을 지내고, 1771년 수찬이 된 뒤 교리에 올랐다. 이듬해 삼강암행어사(三江暗行御史)가 되어 함경도 삼수지방에 파견되었으며, 돌아와 흉년으로 양곡난이 혹심한 때에 몰래 술을 만들어 매매하고 있는 현지실정을 보고하였다. 1773년 승지가 되고, 이듬해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며, 1781년(정조 5)동래부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國朝榜目. 〈文守弘〉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이 가계의 영예를 드높히고 있는 현대 인물로는 처사공(=師俊)의 후손인 연기군 농협지부장 權會, 사후의 후손으로 연기군 등기소장 智會, 옥천부군수 承會, 그리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鳳會(在重의 자), 서울대를 졸업하고 공학박사학위를 취득한 在善(봉묵의 자), 또 말파인 병사공(=金+吳)의 후예인 壽會는 전서공파 도유사 책임을 맡아 어려운 여러 종사일을 도맡고 있으며 재욱, 태환, 태익도 종사일과 연기대첩 조명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시군지순례12(연기군)

연기.전성지(연기군문화공보실, 1991)

▣ 이곳 연기. 전동은 전서공(성목)파의 세거지 입니다.

 

pp 91 성씨중.

○ 김성목(金成牧) : 안동인이다.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으로 전서(典書)의 벼슬을 지냈다. 고려말에 처음으로 본 현(縣)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김휴(金休) : 김성목(金成牧)의 아들이며 호는 학당(學堂)이다. 고려조에 문과로 검교(檢校)의 벼슬을 지냈다. 사적에 대하여는 유현록(儒賢錄)을 보아라.

○김익정(金益精) : 김휴(金休)의 아들이며 호는 운암(雲菴)이라 하였다.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헌의 벼슬을 지냈다. 효행록을 보아라.

○김익렴(金益廉) : 김휴(金休)의 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시랑(吏曹侍郞)의 벼슬을 지냈다.

○김숙(金潚) : 김익정(金益精)의 아들이며 한성판윤(漢城判尹)의 벼슬을 지냈다.

○김형(金 ) : 김숙(金潚)의 아우이며 진사였다.

○김저(金저) : 김익렴(金益廉)의 아들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한(金漢) : 김저(金저)의 아우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지냈다.

○김변(金 ) : 김한(金漢)의 아우이며 생원(生員)이었다.

○김복령(金福寧) : 김숙(金潚)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사과(司果)였다.

○김수령(金壽寧) : 김숙(金潚)의 아들이며 호는 몽암(夢菴)이었다. 생원과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의 제학(提學)을 지냈다. 좌리공신(佐理功臣) 복창군(福昌君)에 책봉되고 문도(文悼)의 시호를 받았다. 유고(遺稿)가 있다.

○김부령(金富寧) : 김형(金 )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사직(司直)이었다.

○김대성(金大成) : 김저(金저)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복수(金福壽) : 김한(金漢)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철문(金澈文) : 김변(金 )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참봉(參奉)이었다.

○김광(金鑛) : 김수령(金壽寧)의 아들이며 충훈부(忠勳府) 경력(經歷)이었다.

○김귀년(金龜年) : 김부령(金富寧)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부장(部將)의 벼슬을 살았다.

○김사수(金師秀) : 김귀년(金龜年)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현감(縣監)을 지냈다. 선정비(善政碑)가 있는데 야당(野塘) 홍성민(洪聖民)이 찬(撰)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묘비의 글씨를 썼다.

○김사철(金師哲) : 김귀년(金龜年)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목사(牧使)의 벼슬을 지냈다.

○김오(金 ) : 김사수(金師秀)의 아들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통어사(統禦使)를지냈다.

○김순(金淳) : 김오(金 )의 아우이며 음관(蔭官)으로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정(金錠) : 김귀년(金龜年)의 손자이며 음관(蔭官)으로 부장(部將)을 지냈다.

○김구정(金九鼎) : 김오(金 )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직장(直長)이었다.

○김윤정(金潤鼎) : 김사수(金師秀)의 손자이며 음관(蔭官)으로 봉사(奉事)였다.

○김대정(金大鼎) : 김순(金淳)의 아들이며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증직을 받았다.

○김선(金鐥) : 김구정(金九鼎)의 아들이며 장락정(掌樂正)의 벼슬을 지냈다.

○김해(金垓) : 김윤정(金潤鼎)의 조카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은(金銀) : 김사철(金師哲)의 아들이며 음관(蔭官)으로 좌랑(佐郞)의 벼슬을 지냈다.

○김제정(金濟鼎) : 김사철(金師哲)의 손자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조방장(助防將)을 지냈다.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절의록(節義錄)을 보아라.

○김인길(金仁吉) : 김구정(金九鼎)의 손자이며 진사(進士)로 도사(都事)의 벼슬을 지냈다.

○김인철(金仁哲) : 김대정(金大鼎)의 손자이며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증직을 받았다.

○김태기(金兌起) : 김인철(金仁哲)의 아들이며 호조판서(戶曹判書)의 증직을 받았다.

○김만직(金萬直) : 김선(金鐥)의 손자이며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증직을 받았다.

○김하진(金夏璡) : 김만직(金萬直)의 아들이며 좌윤(左尹)의 증직을 받았다.

○김혼(金混) : 김하진(金夏璡)의 아들이며 자헌대부(資憲大夫)의 수직을 받았다.

○김형(金珩) : 김태기(金兌起)의 손자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득해(金得海) : 김형(金珩)의 아들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는데 치민(治民)이 알뜰하여 거사비가 있다.

○김치혁(金致赫) : 김태기(金兌起)의 현손이며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지냈다. 누동(樓洞 ; 다락골). 방동(方洞 ; 사방골). 양지(陽地 ; 양지리). 생졸(生拙)에서 산다.

pp 111 유현(儒賢)

○김휴(金休) 안동인 전서(典書) 김성목(金成牧)의 아들이다. 호는 학당(學堂)이며 포은 정몽주선생에 따랐다.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검교(檢校)의 벼슬을지냈고 조선조가 되어 조정에서 한성좌윤의 벼슬을 가지고 불렀지만 따르지 아니하였다. 서울을 떠나 낙향하면서 읊은 시가 있다.

pp 112 인물과 유행(儒行)(원거인 : 原居人)

○ 김성목(金成牧) 안동인.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현손이며 전서(典書)의 벼슬을 지냈다.

○김익렴(金益廉) : 김성목(金成牧)의 손자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吏曹左郞)을 지냈다.

○김기(金基) 안동인. 충장공(忠壯公) 김제정(金濟鼎)의 아들이며 그의 아버지가 일찍이 전사함을 애통히 여기고 항상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드릴 것을 마은에 품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싸움에 나가 본진을 찾아서 정이흥장군(鄭以興將軍)을 만나 용감하게 적과 싸우다가 금천에서 순절하였다.

pp 121 절의(絶義)

○김제정(金濟鼎) 안동인. 목사(牧使) 김사철(金師哲)의 손자이며 인조조에 무과 (武科)에 올라 인산( 山)의 조방장(助防將)이었다. 정묘년(丁卯年, 1627년)의 호란(胡亂)에 절개를 지키며 죽었다. 병조참판의 증직과 제사를 내리고 영조조에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pp 124 효행(孝行)

○김익정(金益精) 안동인 호는 운암(雲菴). 생원으로 문과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대사헌(大司憲)의 벼슬에 올랐다. 학문이 일세에 뛰어나며 3년거상에 관직을 사양하고 빈민의 구제에 힘쓰며 법에 의하여 관직을 임명하고 법을 지키니 백관이 두려워하고 존경하였다.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김사준(金師俊) 김익정(金益精)의 현손이며 호를 사암(思巖)이라고 하였다. 천성으로 효성이 독실하며 학식이 고명하였다. 예종조에 참봉(參奉)벼슬을 내렸지만 받지 아니하였다. 명종조에 정려(旌閭)를 내리고 동구 밖에는 그를 기념하는 〈효자거리〉가 있다.

pp 137 총묘(塚墓)

○ 김성목(金成牧) 안동인. 관 공조전서(工曹典書). 묘는 동면(東面) 학당(學堂)에 있다.

○김휴(金休) 김성목(金成牧)의 아들로 관은 한성좌윤(漢城左尹)이며 묘는 학당(學堂)에 있다.

 

■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 (1997,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4째인 師敏은 注書를 역임하였고 후손들이 경기도 화성군, 강화군 일대에 이거하여 살고 있다.

 

시군지순례1(강화군)

강화사(사단법인 강화문화원, 1994)

p.368. 안동김씨.

고려조 충렬공 방경의 원손 應浩(응호)가 망월리에 왔다가 삼홍리(옛 홍천)로 이사하여 10여대를 살고 있다.

선행리에 살다가 월곶으로 이사한 일파는 김만숙의 후손이며 도장리에 사는 일파는 통정 金 (김영)의 후손인데 그 자손이 10여대에 이르고 있다.

 

■<강화사>에 보이는 선안동김씨 후예

◎ 김보욱(金普郁).(p391)

--익원공파--

 

◎ 김용우(金用雨).(p423)

--양도면 출신으로 안동김씨이니 일찍이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남가주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그후 배재중학교 교사로 있었으며,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방부장관으로 발탁되었고 영국 대사를 거쳐 제17차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활약한 명사이다.

☞ 본 게시판 03. 1.13. 주회 아우님이 올리신 전서공파 김용우(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편을 살펴보면

김용우의 "아버지는 종우(鍾宇), 어머니는 전영애(田英愛)이며, 부인은 심양순(沈良順)이다."라고 되어 있는 바 아래의 김용하는 김용우의 증보부이고 김종우는 부친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은우(金恩雨).(pp451)

--양도면 출신으로 안동인이니 연희대학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 입교대학 철학과를 마치고 미국 콜럼비아대학 대학원을 수료하고 한국기독교신문사 기자로 있다가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역임한 바 있어 국제 펜클럽대회 한국대표로 참가하였으며 경향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있어 대한민국 국민훈장을 받은 명사이다.

 

◎ 김용하(金容夏).(pp488)

--안동김씨로 호는 계암(啓巖)이니 어려서부터 글 배우기를 좋아했고 나무하러 가서도 반드시 자습하여 성장하면서는 성리학에 힘썼다. 효행이 돈독하여 한 고을에 명성이 높았다. 유지 전병규(田炳奎)씨와 친교를 맺어 문학과 도의에 밝은 지사엿다. 이어서 시대성에 맞춰 학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고 전병규씨와 함께 기독교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였으며 한편 교육의 선구자로 이름을 떨쳤다.

 

◎ 흥천(興天)학교.(pp559)

--양도면 삼흥리에 있었다. 1918년에 학자이며 군자(君子)의 칭호를 받은 김용하(金容夏)와 지사 전병규(田炳奎)가 동심 협력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이름을 보창(普昌)이라 하였다. 재력이 풍부하지 못하였으나 면내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김용하와 전병규, 지선주의 봉사적 교수생활 10여년에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1918년 4월 1일에는 사립 흥천학교라고 명칭을 고치었다. 원래 이 흥천학교 설립자 전병규와 김용하 선생은 기독교 신자로서 선교회의 보조도 많이 받아 교사를 증축하고 4년제를 6년제로 하였다. 1929년 12월 23일 양도공립보통학교가 인가됨에 따라 사립 흥천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광대한 양도면에 1개 학교로서는 취학 아동을 모두 수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통학거리 관계로 1938년 4월 1일 부설간이학교를 조산에 세웠다.

1938년 4월 1일에는 양도공립심상소학교로 명의를 변경하였다가 1943년 4월 1일 양도공립국민학교로 다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43년 4월 1일 조산간이학교가 조산국민학교로 승격하였다가 1954년 4월 1일에는 양도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 김종우(金鍾宇).(pp488)

--안동김씨로 용하(容夏)의 손자이며 한학에 능하였고 기독교인으로 박애정신이 투철하여 빈민구제와 농사개량에 선구자로 이름이 알려졌다. 일제(日帝) 하에도 망명 임시정부 요인과 교신한 바 있고 이동휘(李東輝)․ 전병규(田炳奎) 등과 상호 제휴하여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그의 활동 상황은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정동교회 전도시로 있다가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렀으며 감리사(監理師)로 부흥목사로 활약한 명사이다.

 

◎ 김영우(金榮禹).(pp490)

--익원공파--

<출전 : 증보 강화사/증보강화사편찬위원회/1983>

 

■ 디지털한국학

김용우(金用雨)

1912~1985. 정치가. 본관은 안동. 아명은 재용(在用), 아호는 삼농(三#농01). 서울 서대문구 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종우(鍾宇), 어머니는 전영애(田英愛)이며, 부인은 심양순(沈良順)이다.

1930년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마쳤다.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1939년 남캘리포니아대학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광복되던 해 9월 서울시장의 고문으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시 후생국장에 기용되었다.

한때 중앙기술교육위원회 사무총장과 주택영단(住宅營團)이사장을 지냈으며, 1950년 5․10총선거에는 서울시 서대문 갑구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제2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1954년 국회 사무총장을 거쳐, 1955년 국방부차관, 1956년 국방부장관에 기용되었다.

1957년 주영(駐英) 초대대사가 되었다.

1958년 국제해양법회의에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였고, 1959년 대한반공청년단 단장이 되었다.

1962년 국제테니스클럽회장, 5․16장학회 이사, 서울중앙기독교청년회연맹 총무,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 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그해 8월에는 제17차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민주공화당 창당에도 참여하여 1963년 당무위원에 뽑히고, 정책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68년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사무총장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총재가 되었다.

1971년 폭넓은 사회적 명망으로 대한체육회 회장이 되었고,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면서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에 부임하였다.

1972년 7월 적십자사 총재가 되었으며, 1975년까지 총재로 있으면서 남북적십자회담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립묘지 유공자묘역에 안장되었다. 〈權寧大〉

 

▶ 한국 현대 여성조각의 선구자 김정숙(1917-px91)과 장자 김인회 님 소개를 끝으로

전서공파 소개자료 연재를 마칩니다. 서봉 김사달 박사의 서예 입선 국전 도록을 보면 조각 부문에 김정숙 님의 입선 작품도 실려 있습니다. 같은 시기 활동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연재는 1997년 안동김씨 연기군종친회에서 펴낸 책 <연기지역의 충렬공 후예들>과 우리 홈페이지 게시판에 소개된 내용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연기군 거주 益精 후손 위주로 소개되었습니다.

 

아산, 천안, 목천에 세거한 益廉 후손 경상도 창령에 세거한 壽寧 후손 경기 화성, 강화에 세거한 師敏 후손은 거의 소개되지 않았습니다.

 

연재하면서 윤만 님께서 기 소개해주신 시군지 순례 중 연기군지와 강화사가 큰 길잡이가 되었음을 밝혀 둡니다.

연재중 김태병 님께서 소개해 주신 다음 자료는 아주 큰 기쁨이자 소득이었습니다.

태병 님의 간단소개를 부탁 드립니다.

 

▶ 앞으로도 계속 전서공파 소개 자료가 이어지기를 희망하며, 충남 연기군의 전서공파 세거지 답사가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또한 전서공파 후손의 우리 홈페이지 참여가 이어지기를 기다립니다.

 

■조선일보/문화

[미술] 김정숙씨 10주기 맞아 유작 ꡐ세상 밖으로ꡑ (2001.12.02)

한국 현대 여성조각의 선구자 ★김정숙(1917~1991)씨의 유작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고 , 기념재단 설립을 위한 기금으로 희사됐다. 고인의 장남인 ★김인회 연세대 교수(교육학) 등 유족들은 최근 국립현대미술관(관장 오광수)에 ꡐ비상ꡑ 등 유작 70여점을 기증하기로 했다. 미술관 자체 평가로 50억~70억원에 이르는 작품들이지만, 상설전시실 등 별도의 요구 조건 없이 기증했다. 국립현대미술관측은 기증작품을 중심으로 내년 1월27일까지 덕수궁 분관(02-779-5310)에서 ꡐ자라나는 날개-김정숙 10주기전ꡑ을 통해 일반에 선보이고 있다. 유족들은 또 오는 7일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하우스(02-395-0330)에서 기념재단 기금 마련을 위한 경매를 열어 유작 14점과 고인의 고미술 컬렉션 등 모두 35점을 내놓기로 했다.

 

★김인회 교수는 ꡒ저도 내년이 정년이어서 주변을 정리해야 할 입장이고 마침 어머니의 10주기여서 두 동생(★김혜영, ★김철회)과 상의해 우리가 가지고 있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내놓기로 했다ꡓ며 ꡒ경매에서 마련된 기금으로 기념재단을 설립, 후배 조각가들을 위한 상금 등으로 활용할 것ꡓ이라고 말했다.

( 김한수기자 )

 

■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http://www.moca.go.kr/)

현대조각의 선구자인 고 ★김정숙의 10주기를 맞이하여 2001년 11월 10일부터 2002년 1월 27일까지 덕수궁분관에서『자라나는 날개 : 김정숙 10주기』전을 개최한다. ★김정숙은 한국전쟁 이후 미술계가 배출한 전후 1세대 작가에 속한다. 그렇지만 김정숙은 그러한 역사적 경과를 장식하는 작가의 한사람이었다기보다는 우리 현대 조각사(彫刻史)의 여러 사건과 기류 속에서 언제나 제일 먼저 언급되는 전쟁터의 선봉장(先鋒將)같은 존재였다. 최초의 여성 조각가, 최초의 미국 유학, 최초의 용접기법 소개 및 교육 등 "최초" 라는 수식어를 숙명처럼 걸머지고 다녀야만 했던 선구자적 삶을 영위했던 것이다.

 

▣ 김정숙 연보

김정숙은 1917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52년 홍익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윤효중 선생문하에서 ★김영중, ★민복진, ★전뢰진, ★김찬식, ★최기원 등과 함께 수학했으며 ★김종영 등과 함께 추상조각 1세대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1955년 한미재단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시피대학교 대학원 연구과정에서 ★레오 스테파트교수에게 사사하고 이후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대학원과정을 수료하면서 석조, 용접, 테라조 등의 다양한 조각방식을 수용하였으며 1958년에는 두 번째 도미를 시도, 클리블랜드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에서 현대조각의 다양한 가능성을 목격하였다.

 

김정숙의 작품은 정확히 구분하기는 어려우나 크게 4개의 시기로 살펴 볼 수 있다. 1기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 작품으로 모성애를 테마로 한 인체조각이고, 2기는 1960년대 중․후반 작품으로 인체의 유기적 형태로써 단순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이며, 3기는 1970년대 작품으로 자연이미지의 추상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그리고 마지막 4기는 1980년대 작품들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비상연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1기인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의 작품경향을 살펴보면 구상에서 추상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역에 걸쳐져 있으며 재료 면에서도 석고, 대리석, 금속, 나무 등 거의 모든 재료를 섭렵하고 있다. 이 사실은 누구보다도 다양하게 조각이라는 예술세계를 접하려는 수업기의 의도로 보인다.

이렇게 다양한 작품경향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기작품에 흐르고 있는 일관된 주제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친밀감(親密感)"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성을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애정과 자연에 대한 애정 등을 탁월하게 소화해 낸 것을 초기의 대표적 작품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955년작인 <엄마와 아기>는 한 덩어리의 나무에 모자의 얼굴을 새겨 놓은 것으로서 엄마와 아기의 모습을 소박하면서도 사랑스럽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두말할 것도 없이 김정숙의 주제의식이 모성(母性)에 근원을 두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김정숙에게 있어 모성은 본질적인 것, 절대적인 것, 영구적인 것을 의미한다.

 

2기의 1960년대 중․후반 작품들은 그의 전형적인 형태감각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토르소> 연작에서 우리는 그가 인체의 일부를 생명력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환원시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김정숙은 자신이 형상화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친밀감을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한 형태감각으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1970년대 이후 작품의 추상화 과정을 통해서도 그대로 지켜지는 김정숙만의 조형적 특성이다.

 

3, 4기에 해당하는 김정숙의 후기 조각은 대개의 경우 인체, 새 등의 유기적 형태에서 발상되어 드로잉과 미니어처 등 여러 단계의 형상화 과정을 통해 구체적인 생명감을 지니면서 완결된다는 특성을 지닌다. 1960년대 작인 <생이전(生以前)>이라는 작품은 초기에 제작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완전한 의미의 추상성을 보여 준다. 완전한 형태의 상징과 같은 타원형의 중심체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면서도 구심점을 향해 조화되고 있는 외각의 형태로 구성된 작품이다. 대리석이라는 차가운 질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유기적인 생명감을 지니고 있다.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 끊임없이 순환하는 선과 면의 변주가 그러한 느낌을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작가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1971년을 전후해서 추상으로 전환한 듯 하다. 물론 그 이전 <모자상>, <토르소> 또는 <여인상> 같은 작품에서 매우 대담한 "추상화"의 시도를 볼 수 있었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완전추상"의 세계에 돌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추상의 세계는 '산'과 '강', '반달', 혹은 '해'라는 영원불변의 모티브를 채택하고 있다. 즉 가장 본질적인 요소들을 통해 영원한 우주생성의 질서에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김정숙의 작품들 대다수가 서구적 조형의식에 바탕을 둔 세련된 재질과 형태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동양적 세계관을 암시한다. 끊임없이 시도된 추상 작업 중에서 작가의 조형관을 궁극적으로 실현한 주제가 <비상(飛翔)>이다. 김정숙은 이 주제를 통해 본인의 인간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초월적 예술성의 실현으로 <비상>이라는 토템을 완성했다.

 

새의 날개를 형상화 한 듯 하지만 김정숙은 그 형상을 다양하게 변주함으로써 무한한 형상의 가능성을 일깨우려 하였다. 종국에는 어떤 구체적 형상성마저도 초월한 순수형태로 추상화되었다. <비상>은 상승과 하강의 리듬을 타고 무한한 공간으로 펼쳐진다. 펼쳐진 양날개는 때로는 나선형태 또는 부채꼴 형태 또는 수평으로 전개된다. 그 형상 속에서 김정숙은 조각이 추구하는 순수하고 본질적인 형태와 매스와 공간의 완벽한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가장 절대적이고 영원한 조형성을 추구하기 위해 김정숙은 어떠한 선, 어떠한 면, 어떠한 볼륨도 예사로이 다루지 않았음을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이 증거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말년의 김정숙은 자신의 인간적인 한계와 고독을 <비상>시리즈를 통해 초월하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영원히 다다를 수 없을 것 같은 예술적 완성을 위해 김정숙은 늘 분투했다. 10년이 지난 오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순수했던 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가 남긴 작품들을 통해 생생하게 만나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金 貞 淑 年譜 (1917-1991)

1917. 11. 10 서울 출생

1953 (37세) 홍익대학 미술학부 졸업 (조각과 1회)

1955 (39세) 미국 미시시피대학교 대학원 과정 연구(레오 스테팟교수에게 사사)

미국 뉴-욕 포룸 갤러리 조각 대학원 과정 연구(레오 스테팟교수에게 사사)

1956 (40세) 미국 미시간주 불룸힐드 크랜브룩 아카데미 오브 아트 대학원 과정 수료

1958-59(42-43세) 미국정부 ICA 기술원조 계획으로

오하이오주 크리브랜드 인스티튜트오브 아트 수학 (산업도안과 공예 연구)

1966 (50세) 홍익대학교 미술석사학 학위 수여

1991. 2. 19 (75세) 타계

 

▶ 經歷

1946 미국 공보원(USIS) 도서관 사서직

1953 숙명여고 교사로 출강 "코리아 헤럴드ꡓ의 전신인 ꡒ코리아 리퍼블릭ꡓ 에서 1년근무

1957-83 홍익대학교 조각과 교수

(조각과 전임강사, 조교수, 조각과장, 미술학부장, 조형미술연구원장 역임)

1957 대한민국협회 분과위원

1957-71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추천작가 임명 (문교부)

1957-91 국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조각분과 심사위원장 수차역임

1960 제3차 국제미술협회 총회에 한국대표(정대표)로 참석(비엔나, 오스트리아)

1961-64 공보부 주최 신인미술전 심사위원

1963-81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

1967 제9회 쌍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전권대표로 참가(커미셔너)

1970 한국일보사 주최 미술대상전 심사위원

1972-75 한국미술협회 위원

1974-82 한국여류작가회 회장

1975 제13회 쌍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전권대표로 참가 (커미셔너)

1975-78 한국미술협회 부회장

1979-91 한국미술협회 고문

1980-81 대한민국 미술대전 운영위원

1982 현대미술초대전 초대작가 선정위원

1982-83 서울시 문화정책 자문위원

1982-91 한국여류작가회 고문

1983-87 한국칠보작협회 회장

1984-91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1985-89 서울미술대전 선정위원 및 운영위원

1987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 個人展

1962 제1회 김정숙 조각전 (서울 신문회관)

1971 제2회 김정숙 조각전 (서울 신문회관)

1975 제3회 김정숙 조각전(미국 로스엔젤레스 헤리티지 화랑 초대전)

1977 제4회 김정숙 조각전(미국 로스엔젤레스 한국일보사 지사 초대전)

1978 제5회 김정숙 개인전 (서울 현대화랑)

1982 제6회 김정숙 개인전(미국 샌디에고 아시안 모던 아트 갤러리)

1983 제7회 김정숙 조각전 (서울 현대화랑)

1985 제8회 김정숙 조각전 (서울 미화랑 초대전)

1989 제9회 김정숙 개인전 (서울 현대화랑)

1992 호암갤러리 회고전 (서울)

1996 모란갤러리 5주기 회고전 (서울)

 

▶ 團體戰

1954 미국 미시시피 대학에서 전시

1955 미국 크랜브르크 아카데미에서 전시

1956 미국 디트로이트 아티스트 마켓에서 전시

1957-71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초대작가 (문교부 주최)

1958-67 대한민국 서울 한국 공보관에서 전시

1958 한국 공보부 주최 반공전

1960-62 현대미술 초대작가전 (조선일보사 주최)

1962 필리핀 미술협회 초대극동현대미술전 (마닐라, 필리핀)

베트남 미술협회 초대 현대미술전 (사이공, 베트남)

1964 동경 올림픽전 (한국 공보관, 동경, 일본)

1966 미국 크랜브르크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전시

현대미술전 말레이시아 박대통령 친선방문 기념전

1967 제9회 쌍파울로 비엔날레(작품<비정A>는 주최측에서 매입)(브리질)

1982-87 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83 밀라노市 초대 한국현대미술전 (밀라노, 이탈리아)

1983 한국 칠보작가 협회전

1985 현대미술 4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1985-89 서울미술대전 (시립미술관)

1987-89 한국 현대조각 초대전 (춘천 문화방송)

1989 89`한국조각 미술대전 (무역센터)

1989 현대미술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90 홍익 조각회전 (미술회관)

 

▶ 受賞

1963 오월문예상 (예술원, 문교부)

1976 국전 초대작가상

1982 교육공로 표창 (서울시 교육회)

1983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

1984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중앙일보사)

1985 신사임당상 (대한 주부클럽 연합회)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게시작품>

 

1 차 받침대 김정숙 CR-4451 1988

2 전복 껍질 김정숙 CR-4450 1950

3 전복 껍질 김정숙 CR-4449 1986

4 무제 김정숙 CR-4448 1987

5 나비액자 김정숙 CR-4446 1959

6 칠보사각 접시 김정숙 CR-4445

7 고개를 든 여인상 김정숙 SC-4444 1990

8 비상 김정숙 SC-4443 1990

9 두 얼굴 김정숙 SC-4442 1990

10 두 얼굴 김정숙 SC-4441 1990

11 소년 김정숙 SC-4440 1991

12 무제 김정숙 SC-4439 연도

13 비상 김정숙 SC-4438 3287

14 비상 김정숙 SC-4437 1990

15 여인 두상 김정숙 SC-4436 1990

16 비상 김정숙 SC-4435 1990

17 비상 김정숙 SC-4434 1981

18 비상 김정숙 SC-4433 1990

19 비상 김정숙 SC-4431 1990

20 뒤틀림 김정숙 SC-4430 1970

21 뒤틀림 김정숙 SC-4429 1970

22 비상 김정숙 SC-4428 1980

23 비상 김정숙 SC-4427 1980

24 비상 김정숙 SC-4426 1985

25 비상 김정숙 SC-4424 1983

26 비상 김정숙 SC-4423 1983

27 비상 김정숙 SC-4422 1981

28 해변에서 만남 김정숙 SC-4421 1985

29 비상 2 김정숙 SC-4420 1984

30 비상 김정숙 SC-4419 1984

31 비상 김정숙 SC-4418 1980

32 봉황 김정숙 SC-4417 1984

33 얼굴 김정숙 SC-4416 1980

34 키스 김정숙 SC-4415 1980

35 누워있는 여인상 김정숙 SC-4414 1980

36 키스 김정숙 SC-4413 1980

37 형제의 얼굴 김정숙 SC-4412 1984

38 반달 김정숙 SC-4411 1981

39 애인들 김정숙 SC-4410 1970

40 꼬임 B 김정숙 SC-4409 1977

41 꼬임 김정숙 SC-4408 1977

42 반달 김정숙 SC-4407 1970

43 봄과 가을 김정숙 SC-4406 1978

44 산과 물 김정숙 SC-4405 1976

45 산과 물 김정숙 SC-4404 1976

46 토르소 김정숙 SC-4403 1975

47 토르소 김정숙 SC-4402 1975

48 토르소 김정숙 SC-4401 1975

49 자라나는 날개 김정숙 SC-4400 1971

50 분류 김정숙 SC-4399 1971

51 핵 김정숙 SC-4398 1971

52 어떤 모뉴먼트 김정숙 SC-4397 1971

53 대리석 소품 김정숙 SC-4396 연도

54 대리석 소품 김정숙 SC-4395 1970

55 두 얼굴 김정숙 SC-4394 1970

56 대리석 소품 김정숙 SC-4393 1970

57 대리석 소품 김정숙 SC-4392 1970

58 프로필 김정숙 SC-4390 1969

59 여인흉상 김정숙 SC-4389 1969

60 벽면부각을 위한 부조 김정숙 SC-4388 1969

61 벽면부각을 위한 부조 김정숙 SC-4387 1969

62 생이전 김정숙 SC-4386 1968

63 엄마와 아기들 김정숙 SC-4383 1965

64 토르소 김정숙 SC-4382 1962

65 소년 김정숙 SC-4381 1962

66 엄마와 아기 김정숙 SC-4380 1960

67 브론즈를 씌운 선과 유리 김정숙 SC-4379 1956

68 엄마와 아기 김정숙 SC-4378 1955

69 K양 김정숙 SC-4377 1952

70 명상 김정숙 SC-4376 1952

71 비상 김정숙 DP-4375 1985

72 비상 김정숙 DP-4374 연도

73 힘의 군상 김정숙 DP-4373 1963

74 엄마와 아기 김정숙 DP-4372 1957

75 생 김정숙 SC-4384 1967

76 누워있는 여인 김정숙 SC-4109 1959

77 반달 김정숙 SC-0268 1976

78 비상 김정숙 SC-2870 1988

79 김정숙 인물 임응식 PH-0577 1970

80 봄의 움직임 김정숙 SC-4385 1967

 

■ 조선일보/문화

[문화] 나를 바꾼 知의 순간.........★김인회 (2001.04.03)

30년전 등 두드려주시던 ★임석재 선생의 손

1968년 5월 25일, 광화문에 있던 교육회관 대강당에서는 소장 교육학자들의 모임인 ꡐ목요회ꡑ 주최로 한국 교육과 교육학의 문제를 진단하는 학술회의가 열렸다.

나는 그날 학계의 주류를 비판하는 공격적 발표를 했다. 한국인을 위한 교육 연구에서 서양의 교육 이론과 방법에만 의존하는 것은 어쩌면 현대판 미신일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행사의 종합 논평을 맡은 ★황정규 교수는 나의 발표 내용에 대해서 ꡒ들을 때는 찡하고 뭔가 오는 것 같은 데 다 듣고 나면 무슨 소린지 종잡을 수 없는 무당의 넋두리 같다ꡓ는 평을 했다. 무당 같다는 표현 때문에 청중도 웃었고 나도 웃었다.

그러나 ꡐ무당ꡑ이라는 말을 듣는 그 순간 나의 머리 속에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ꡒ어쩌면 무당이야말로 한국인의 진짜 교사였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무당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으니 무당을 연구하면 그동안 서양 교육학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한국 교육의 많은 부분들을 알아 낼 길이 열릴지도 모르겠다ꡓ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인사동 고서점가를 뒤지면서 무당에 관한 문헌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5대째 기독교를 믿는 가정에서 자라나 책상 위에서 서구식 교육학만을 배운 철부지가 책을 통해 무당을 알아보겠다는 턱없는 치기로 겁도 없이 달려들게 된 것은 오로지 ꡐ무당ꡑ이라는 놀림조의 평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한국 무속에 관한 방대하고 종합적인 자료는 일본학자들 것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 학자들의 손에 의해 쓰인 무속 관련 문헌자료는 드물고 빈약했었다. 그로부터 3년, 무당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책으로만 무속을 연구하다가 무당보다 먼저 무속 연구의 대가인 ★임석재 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어줍잖은 솜씨로 주제 넘은 짓을 하느라 발표했던 ꡐ한국 무가와 찬송가의 비교 연구ꡑ라는 논문을 읽으신 임 선생님께서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 주신 것이었다. 오는 날 경복궁 건춘문 앞에서 임 선생님을 처음 뵙던 순간은 내가 무속 문화 연구를 통해 한국 교육 현상을 이해해 보려는 필생의 숙제를 만나는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ꡒ젊은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 신통한 생각을 다 했어요?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숨어 있던 인재가 홍길동처럼 이렇게 불쑥 나타나곤 했지ꡓ하면서 등을 두드려주시던 어르신의 칭찬 한 마디에 그만 넋이 나간 것이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 감동의 순간을 생생하게 가슴에 지니고 산다. 임 선생님은 그 후에도 무속에 대한 현장 연구를 도와주셨고 나는 그 결실을 묶어 1979년 ꡐ한국 교육의 문화적 기저에 관한 연구ꡑ라는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그리고 그 낙수를 엮어 ꡐ한국 무속사상 연구ꡑ를 펴냈을 때 서문을 임 선생님께서 써 주셨다. 어쩌면 임석재 선생님이야말로 진짜 큰 무당이셨던가 보다.

(연세대 교수․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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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수 묘지명>

1. 원문 (2005. 5. 15. 태서(익) 제공)

 

懷德縣監金公墓碣銘

金生九鼎狀厥大父行來叩某曰今將石于墓敢請銘蓋致其父節度公之意也某於節度公舊欲辭而未公諱師秀字公彦金氏籍安東古也有曰方慶翊麗朝為公上洛入 國朝益精以文學顯叅判于吏曹叅判生進士浻進士生 贈判事司導寺富寧寔生皇考曰龜年 贈刑曹叅議妣李氏 國姓誼成君寀其考也公少志學舉不中晚補禮賓別坐遷直長宗簿主簿繕工由監察出監懷德民歌其惠即閑于全義鄕之郊者餘十年公奉先考嘗曰吾不忍死吾親吾當生事之于廟晨昏見而朔望享出入而告面之生在弘治庚戌殁于癸丑三月葬于全之鴨谷先塋側後 贈嘉善戶曹叅判以子貴也夫人趙氏長端府使世禎女端直且嚴家有式誠于祀手紡績不老倦福可德對子旣貴孫至曾玄熾年九十二而逝當萬曆乙酉四月是年九月葬與公合有男四長節度使鋇也次錞監察錬禦侮將軍建功將軍節度男長即九鼎次治鼎台鼎女適評事柳拱辰監察男曰大鼎寳鼎禦侮男曰潤鼎中武科次周鼎建功男曰安鼎應鼎女長嫁忠義衛李夢軫次爲進士趙德年妻某嘗目節度公動止中度心偉之今見九鼎狀始信家有訓而餘慶有自銘曰

家孝官謹盡所職克婦克母配以德齊美獲隲大厥慶壽蹟于石子亦令  

 

資憲大夫禮曹判書洪聖民撰

活人署別提奉訓郞韓濩書

 萬曆十五年丁亥四月 日立 (1587.선조20)

孫安鼎刻

 

 출전 : 拙翁集卷之十碑銘ㆍ碣銘 .   

 

*아래 굵은 글씨는 전서공파 구 파보 기록 내용임(2005. 6. 16. 항용(제)제공)

 

  *찬자 소개

 

 성 명】 홍성민(洪聖民)

【생몰년】 1536(중종 31)∼1594(선조 27)

【본 관】 남양(南陽) 홍(洪)

【자·호】 시가(時可), 졸옹(拙翁)

【시 호】 문정(文貞)

【저서·작품】 《졸옹집(拙翁集)》

【시 대】 조선 중기

【성 격】 문신

   1536(중종 31)∼1594(선조 27).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이다. 관찰사 홍춘경(洪春卿)의 아들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명종 16년(1561) 진사시(進士試)에 장원급제하였으며, 1564년에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정자(正字) · 교리(校理) 등을 거쳐 대사간(1567) · 호조 참판(1575) · 부제학 · 예조 판서 ·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1591년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선조 8년(1575)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溟)에 가서 종계개정(宗系改正 : 종계변무(宗系辨誣))을 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이 일로 하여 1590년에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二等)에 책록되고 익성군(益城君)에 봉해졌다. 1591년 정철(鄭澈)이 건저(建儲)문제로 유배되자, 그 일당이라는 혐의로 삭탈관작(削奪官爵)되어 북변(北邊)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배지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며 곧 방면되었다.

그는 매우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운 이(利)를 쫓지 않았으며 효성이 지극했다. 또 문행(文行)과 정술(政術)이 본받을 만했으며 명신(名臣)으로 칭송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저서로는 《졸옹집(拙翁集)》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海東名臣錄, 墓誌銘

【관련항목】 이산보(李山甫) 홍명하(洪命夏)

 

<전서공파 유적지 탐방 및 05년 여름캠프 사전 답사>

 

 1. 일시 : 2005. 6. 12. 08:00--20:30

 2. 장소 : 충남 연기군 전의면 일대, 공주시일대

 3. 참석자 : 안사연(10명) : 항용, 태영, 은회, 윤식, 윤만, 발용, 용주, 진회, 행순, 상석

                현지종친 : 전서공파3명(근성,수회,승회), 안렴사공파3명(태동, 용식, 재은)

 4. 내용 : 각종 유적지 탐방

   <답사 후기> (2005. 6. 14. 발용(군), 행순 제공)

 

6월 12일 일요일 이른 아침! 조금은 지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입속말로 "오늘은 힘들어서 못가겠습니다"라고 연습해봅니다. 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소란을 피웁니다. 지각대장 행순이가  못미더워 발용님과 윤식님께서 저희 집 앞으로 직접 오셨습니다. 순간 힘이 불끈 솟아오릅니다. 힘들어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만 혼자 힘든 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번 산행은 공고했던 것과 같이 여름캠프 답사를 겸한 것입니다.   아침 8시 2분 정확하게 항용, 태영, 은회, 윤식, 윤만, 발용, 용주, 진회, 행순 9명, 이제 출발합니다. 출발하자마자 태영님께서는 지난번 실시했던 성희안 신도비 탁본을 큼지막하게 하나씩 실사출력해서 나눠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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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결지 잠실 종합운동장 앞

 

이번에도  발용님은 우리의 발이 되어주셨습니다. 수원계시는 태우님을 태우기 위하여 우리들의 수레는 잘도 달립니다. 벌써 마음은 천안까지 갔습니다. 상석 대장님은 미리 내려가셨습니다. 너무나 철저하십니다. 수원에서 태우님을 태우고 또다시 수레는 달립니다. 우리의 첫 목적지는 충남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학당동에 모셔진 典書公派 시조인 金成牧 선조님의 묘소참배입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정안IC로 빠져나와 23번 국도를 타고 천안쪽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다가 조치원쪽으로 꺾어져서 전의로 빠져나갑니다. 이정표가 아주 잘 되어있습니다.

우리 일행은 상석 대장님을  전의면사무소에서 만나, 10시 20분쯤 도유사 수회님이 나와 계신 곳(소방서 앞)으로 가봅니다. 벌써 도착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두 여섯 분-근성 전서공파 회장님, 승회님(전), 도유사 수회님(전), 태동님(안), 용식님(안), 재은(안)님이 마중 나오셨습니다. 서로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눕니다. 일도 바쁘신 어른들께서 종사일에 관심있는 젊은이들을 흔쾌히 반겨주십니다. 또한 전서공파 회장님은 상중이신데도 나오셨습니다. 많은 곳을 둘러보고픈 마음에 서둘러 典書公 金成牧 선조님의 묘소로 이동합니다. 모두 17명, 5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움직입니다. 맨 앞에서 도유사 수회님께서 안내를 해주십니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하루종일 안사연과 함께 해주셨습니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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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캠프 1차 집결예정지 - 전의면 사무소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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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유사 수회님을 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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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서공파 회장님. 상중이심에도 어려운 걸음을 해 주셨습니다.

 

典書公 金成牧 선조님의 묘소 찾아가는 길은  전의면사무소 뒷길로 개천을 끼고 한국콜마를 지나서  천주교 성당을 지나고, 691번 지방도로(독립기념관과  성남방향)로 가다가  운주산성으로 우회전하여 갈래길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다가 선진 축사 지나 다리에서 우회전, 조그만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500m 거리의 언덕 고갯길을 넘어서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재실이 보이고 탁 트인 곳에 산중턱에 넓게 자리하고 계신 典書公 金成牧 선조님 묘소가 보이면 조그만 삼거리 갈래길, 김휴 유허비 옆길로 좌회전하여 들어갑니다.

 

참으로 잘 가꿔놓으셨습니다. 먼저 참배를 하고 도유사 수회님의 설명을 열심히 듣습니다. 이 묘소는 위에 金玖 선조님의 단묘가 있고, 바로 아래에는 아드님인 전서공 김성목 선조님의 묘소가 있습니다. 1992년에 대대적으로 사초한 것이라고 합니다. 전서공의 원 봉분은 그대로 두고 숯을 채우고 다시 봉분을 넓고 높이 세웠다고 합니다. 원형을 그대로 보존코자 그랬다고 합니다.

윤식님은 둘레를 재어봅니다. 30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초작업 당시 도유사 수회님은 사초작업에 매달리시자 미처 축사를 살피지 못해 키우던 돼지 100여 마리를 잃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애석한 일입니다. 이날도 우리는 도유사 수회님의 안내에 하루종일 감사하며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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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서공 묘역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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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휘 구(諱 玖) 선조님 설단 - 忠肅公 諱 承用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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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 비(舊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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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서공파 근성 회장님과 항용종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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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서공파조 휘 성목(成牧) 선조님 묘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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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역 조성 경위를 설명하시는 도유사 수회종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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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서공 묘소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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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당 휘 휴 선조님 묘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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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측 문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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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문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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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비(舊碑)의 거북좌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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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당 선조님 유허비(國譯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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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서공파 재실 학당재(學堂齋)-학당선조님이 사시던 실제 집터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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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시 30분, 전서공의 묘소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에 전서공의 아드님 檢校公 學堂 金休 선조님의 유허비를 둘러보았습니다. 유허비에는 포은 정몽주의 문하생인 학당 김휴 선조님께서 정몽주가 순절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강학하면서 일생을 마쳤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지들이 세워줬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두꺼비 두 마리가 유허비를 지키고 있습니다. 유허비는 연안 金鑛 序, 李采 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잠깐 머리 숙여 참배하고 전서공파 회장님께서 모친상을 당하였으나 문상을 하지 못하였기에 조문을 하고 조위금을 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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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당 김휴 선조님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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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弔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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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작로에서 보인는 묘역 원경

 

또다시 도유사 수회님의 댁(신방리)로 가서 보관중이신 <김제정 정려 현판>을 보았습니다. 이를 본 안사연 여러분들은 이런 역사 유물들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선 어서 <안동김씨 박물관>을 짓자면서 보존을 위해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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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자리를 옮겨 양곡리 입구에 있는 쌍효자문으로 갔습니다. 쌍효자는 김휴의 아들 김익정과 김익정의 현손 김사준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조조와 명종조에 받은 정려문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윈래 김사준님의 정려문이었는데 몇 해 전 앞마을(앞실-양곡2리)에 있던 김익정님의 정려현판을 이곳으로 옮겨 와 합한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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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양곡2리 전서공파 묘역으로 갑니다. 양곡리 압골에는 위에서부터 金龜年-金師俊-金師秀묘소와 조금 아래로 내려와 金瓛(김환)의 묘가 위치해있습니다. 묘소로 올라가기 전 길가에는 김환의 부인 남양홍씨의 열녀문이 있습니다. 김귀년선조님의 묘에는 풀이 없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너무 안타깝게 하였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은회님은 그러십니다. 종인들이 흙 한 삽씩 가져다가 토양을 바꿔서라도 잔디를 살려야 한다고 넌지시 말을 던집니다. 金師秀 선조님의 묘갈명은 한석봉의 글씨라고 합니다. 여기서 잠시 항용 선생님은 福昌君 金壽寧 선조님은 문장에 능하여 단종 때 장원하여 세조, 예종을 거쳐 성종까지 4명의 임금을 모셨으며, "국조보감", "동국통감" 등의 편찬에 참여하셨다고 준비하신 자료를 읽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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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환 처 남양홍씨 열녀비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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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귀년(龜年) 선조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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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효자문의 주인공 휘 사준(師俊) 선조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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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사수(師秀) 선조님 묘소의 석물들 - 안정된 배치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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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휘 사수(師秀) 선조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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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사수(師秀) 선조님 묘소의 묘비를 살펴보는 참례단 - 한석봉 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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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화로 인한 마멸이 상당히 진행 된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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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고픔도 잊은 채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이고, 선조님들의 발자취를 따라 다니다가 2시가 되어서 金흔 장군의 연기대첩비가 있는 고복저수지 근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다들 늦은 점심이기에 더더욱 맛있게 먹고 전서공파 회장님과는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일행은 또다시 발걸음을 전적비로 옮겼습니다.  

 金忻 선조님의 연기대첩비는 2곳에 있습니다. 국촌리의 고복저수지에 있는 전적비는 2000년도에 군에서 건립한 것이랍니다. 그리고 서면의 방촌리 길가에 있는 대첩비는 싸우시던 그 장소에 1997년 전서공파에서 세운 것입니다. 대첩비 주변에는 망초꽃이 가득했습니다. 종친님들 한 포기씩 뽑아내니 어느새 훤하게 대첩비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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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기종친회에서 설립한 연기대첩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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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 보이는 산이 연기대첩의 전투지인 정화산

 

시간은 흘러 어느덧 4시 넘었습니다. 종친님께서는 음료수를 아주 많이 준비하셨는데 급하게 다니느라 헤어지는 자리에서야 전해주셨습니다. 마침 더웠는데 정말 시원하게 마셨습니다. 이곳 대첩비에서 승회, 태동, 용식, 재은, 용주 종친님과 헤어지고, 우리 안사연 일행은 마곡사로 도유사 수회님의 안내로 출발합니다. 맘이 급해졌습니다. 도유사 수회님은 비상등을 켜고 마구마구 달립니다. 집에 두고 오신 돼지와 타조들이 걱정이 되시는가 봅니다. 우리 일행은 뒤쫓아 가기에 바쁩니다. 발용님 졸립다고 걱정을 하시다가 앞에서 도유사 수회님께서 지방도로를 100키로 가까이 쌩~~ 잠이 확 달아났다고 하십니다.

마곡사에 도착해서 도유사 수회님과 아쉬운 작별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돼지와 타조가 무사하길 바랍니다. 아이스크림 한 개씩 먹고 힘내서 마곡사는 안내지도만 보고, 우리는 다시 공산성으로 향했습니다.

 

 공산성 입구에 도착하니 입장료를 받지 않습니다. 벌써 시간은 5시 40분 공산성입구에 세워진 47개(?)의 불망비 중에서 안동김씨 문중에서 세운 4개의 사적비가 입구 맨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모두들 김씨 성의 불망비가 몇 개나 있는지 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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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성 안쪽으로 들어가니 고목들이 컴컴한 그늘을 만들어 주어 시원하였습니다. 준비해 간 맥주 한 캔씩 나눠 마시며 안사연 여름캠프에 대해 논의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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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캠프의 일정을 조율하는 시간.

 

오후 7시쯤 공산성을 내려와 상석 대장님은 안양으로 가시고, 나머지 일행은 발용님 차에 타고 버스전용차로를 올라탔습니다. 서울을 올라오는 길은 뿌듯하기만 합니다.  8시 20분, 교대부근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술 몇 잔을 곁들이고, 마냥 행복했던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글 김행순   사진 김발용>

<쌍효자문 소개> (2005. 6. 13. 항용(제) 제공)

 

출전 : 연기군청 홈페이지 (http://www.yeongi.go.kr/)

 효자 김익정·김사준 정려  

 

소재지 : 전의면 양곡리 양지촌 285번지

 시 대 : 세조조.명종조 명정. 1820년 중수

 지 정 : 연기군 향토유적 제 16호(2001년 5월 31일)

 

김익정은 김휴(金休)의 아들로 호는 운암(雲庵)이다.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태어난 그는 1396년(태조 5)에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사헌부 대사헌에 재임 중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직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각각 3년씩 6년간을 시묘하는 등 효행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세종이 즉위하자 외직으로 나아가 충청, 전라, 경기의 관찰사를 지냈다.

 

후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1425년 대사헌, 1431년 이조참판, 형조참판을 지냈고, 1435년 경상관찰사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성종조에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복창군(福昌君)까지 봉하여졌다. 전의를 떠나 벼슬길에 올랐기 때문에 묘는 경기도 양주군 고령산 고령사(高嶺寺) 서남쪽 3리 지점에 있었으나 실전하여 전의면 양곡리 압실에 설단하였다. 익정은 영월군사로 있을 때 청렴하고 흥학에 공이 커서 지금까지도 칭송되고 있다고 한다.

 

『충청도 읍지』,『호서읍지』「전성지 인물조」(1895),『대동신편(大東新編)』,「효자록」,『연기지』,『조선환여승람』에 그의 효행이 기록되어 있다. 김익정의 현손(玄孫)인 김사준(金師俊, 1439~1520)의 자는 명숙(明叔)이고, 호는 은암처사(恩庵處士)이다. 1439년(세종 21)에 형조참의(形曺參議)를 지낸 김구년(金龜年)의 5형제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정에 출사해서 정사를 보았고 어머니 이씨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의성군 이채(議城君 李采)의 딸로 효령대군의 손녀요, 태종의 증손녀로 남달리 출중한 가문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면서 자랐다. 혼란 속에 있던 조정은 마침내 1455년(단종 3)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은 12세인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올리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정변을 일으켰고, 다음 해에는 피비린내 나는 사육신(死六臣)의 처형이 단행되자, 그의 부친은 이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로 낙향하였다.

 

이러한 아버지의 뜻을 따르면서 사준은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어려서부터 김사준은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으며 벼슬은 물론 과거에도 일체 응하지 않고 오직 효행과 덕을 쌓는데만 노력했다. 사준은 부친이 부스럼으로 고생하자 연근을 구해드려 병을 낮게 했으며, 부친이 75세에 사망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러한 효성이 인근 사람들에게 알려져 1469년(예종 1) 예종이 친히 칙사를 보내어 위로하고 능참봉(陵參奉)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전의 추하(楸下,현재의 양곡)에 은거하여 학문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는 평생을 효행과 교육에만 힘쓰다가 1520년 81세의 장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명종대(1546~1567)에 이르러 ‘그의 출천지효(出天之孝)는 영세불망(永世不忘)이라’ 치하하면서 명정했다고 한다. 양곡리 동구 밖에는 김사준을 기념하는 ‘효자거리(정문거리)’가 있다고 한다.

 

 열녀 김환 처 남양홍씨 정려> (2005. 6. 13. 항용(제) 제공)

출전 : 연기군청 홈페이지

 소재지 : 전의면 양곡리 압실

 시 대 : 1738년(영조 14) 명정

 지 정 : 연기군 향토유적 제 30호(2001.5.31)

 

남양홍씨는 일찍이 가훈을 익히고 부덕을 쌓았으나, 출가하기 전에 양친을 잃고 남매가 의지하여 길쌈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모든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이웃 마을에 사는 김환에게 출가하여 시부모를 정성껏 섬기고 동기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자 그 소문이 멀리에 까지 자자하였다. 그러던 중 1732년(영조 8) 6월에 남편이 이름모를 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었다.

 

남편의 병환에 동침하면 해가 온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때 벌써 부인은 임신 4~5개월이었다. 점장이를 찾아가서 점을 치니 남편이 곧 죽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부인은 목욕재개하고 정성을 다해 기도 하였으나 점쟁이의 말대로 남편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에 부인은 가장인 남편이 사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생명을 보전하겠는가 하고 급히 어린아이를 불러 울면서 젖을 먹인 후에 광속에 들어가 음독 자살하였다. 이후 이러한 부인의 열행에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남편의 병이 차도가 있어서 살아나게 되었다. 이에 사람들은 이는 분명 부인의 지성이 남편의 생명을 연장시킨 것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김휴 유허비> (2005. 6. 13. 항용(제) 제공)

출전 : 연기군청 홈페이지

 

 소 재 지 :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

 시 대 : 고려시대

안동인으로 자는 연부 정몽주 선생의 문하생이며 고려 공민왕때 검역 근시라는 벼슬 자리에 올랐다. 이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때 호군의 명을 받았으나 연로한 아버지 (고려 공조판서를 지낸바 있는 감성목)을 모시기 위하여 직을 사양하고 송도에서 여러 신하들과 통곡으로 작별하고 현재의 연기군 전의면 운주산 아래 거처할 장소를 구하여 은거하였다.

 

태조는 다시 가선검교 한성좌윤 이라는 벼슬을 내려 그를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가지 않이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더욱 닦아 후세 양성에 전력 하였으며 그의 문하생 중에서 충효자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그의 덕망과 지조가 훌륭하다 하여 유림명인들이 유허비를 세웠는데 연기군 전동면 미곡리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그가 은거하고 있던 전동면 미곡리를 그의 호를 따라 학당리라 일컬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휴 유허비명> (2005. 6. 13. 태서(익) 제공)

金休 遺墟碑

〔頭篆〕 學堂金公遺墟碑

 高麗檢校金公遺墟碑

全義縣東雲住山下學堂洞者高麗檢校金公屛居而自靖之地也公名休字鍊夫安東人公以京華世族登第仕于朝圃隱鄭先生死與崔晩六瀁出國門痛哭相別各退隱于鄕盖二公同受學於先生之門公旣絶當世之念惟以養親講學爲務我 朝受命 太宗屢徵以官終不出沒而葬于是世傳洞之名肇自公時而因公實蹟云鳴呼文献無徵公之始終固不能得其詳考諸牒及邑誌所載有以見大節之偉然者則□可略也抑公師事大賢嘗以卓節至行見許而畢竟所成就如此其所講之學之正從可知也惜乎其泯泯無傳然公之後承多以忠孝蒙旌褒之典若外裔則平陽朴先生彭年貞忠貫日打愚李文穆公翔陶庵李文正公縡道學名世夫孰曰靈芝無根醴泉無源也哉公之諸後孫將立石以表其遺墟來請余識其陰者曰奎漢仁基也余以陋拙辭不獲略書此俾歸刻焉

 崇禎紀元後四己卯五月 日嘉善大夫大司憲恩津宋穉圭撰

〔後面題〕 書高麗檢校學堂金公狀錄後

昔在麗季天眷聖人新服厥命一時豪傑之士孰不願攀附風雪以興明良之會而公獨乃棄富貴如土苴走窮山絶峽之中寧枯死嵁嵒而靡悔焉者則其志不食周栗也韓愈氏所謂特立獨行而不願者非斯人之儔歟余讀高麗檢校金公狀錄諱曰休學堂其號盖亦慕伯夷之風者早從圃隱先生學洎先生殉國遂屛于全義之雲住山朝廷屢徵不就豈不誠烈丈夫哉當是時有若吉注書徐掌令諸公皆沒身跡爲萬世存大經君子義之紀于史銘于石垂四百餘年以壽其名夫子盖曰民皆有秉彛也故好是懿德然則公之所樹立如彼卓矣而世之尙論者獨未有揚抱何哉雖然公同門友崔瀁又以布衣避世相與作詩以示志痛哭于國門之南而去之後人稱爲晩六處士鳴呼誦公之詩百世之下猶可以想見其心而夷考其所與師友則所養又可知惜乎其事行之泯而不章也按全義誌公官漢城左尹不拜事親以孝訓子以方信於朋友惡聞人過是亦足以徵諸後也公家世崇顯雲仍又蟬聯不絶以忠孝旌者三於外裔盖多賢人名世者釆九世祖參判公配即公孫女公後孫佐赫奎漢以余得借彌甥謁爲文夫稱揚先祖之美而明著之後世者禮所勸也獨恨其不得於打愚陶庵之世而乃徵於余也遂書此以歸之

 嘉善大夫戶曹參判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三州李采撰

 通政大夫行刑曹參議延安金鑛書

 崇禎紀元後四□□月 日立

 後孫光淳 丙申二月 日改刻

   □□   義鉉

   □□   昌默

   國鉉   奎魯

   孝騫   鎭弼  

 <연기군의 충렬공 후예들--책자 소개> (2005. 7. 10. 항용(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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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발간년도 : 1997.

 2. 발간처 : 안동김씨 연기군 종친회

 3. 저자 : 이해준(공주대 역사학과 교수>

 4. 내용 : 이 책자는 2005. 6월 12일 연기지역 답사시 수회(전) 도유사님께서 선물로 주신 책이다.

1997년 연기군 종친회(당시 회장 김해연)에서 공주대학교 역사과 이해준교수팀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책자이다. 이 속에는 김흔 선조님의 연기대첩과 관련한 자세한 현지 소개와 당시의 전투상황이 자세하게 해설되어 있다.

그리고 연기지역과 그 주변지역에 산재해 있는 전서공파, 제학공파, 안렴사공파, 익원공파의 각종 유적과 선조님들의 묘소와 업적들이 소개되어 있다. 우리 문중에서는 최근의 서적으로 매우 학술적 가치가 높은 책이다.

 

<안동김씨 삼세순충비명 병서> (2007. 2. 20. 영환(문) 제공)

安東金氏三世殉忠碑銘幷序

普顏不花死於建寧其妻阿魯眞抱其子投井其女及妾孫女皆隨溺丕寧子死於甘勿其子擧眞及奴合節入敵中戰死載筆者特書之夏山故金氏祖子孫之殉其二家之亞流乎收殘兵追强敵誓不共一天至死而戰不休者二家之所未有也諱傑部將諱大壽主簿諱厚生學生金氏安東人高麗名將忠烈公諱方慶其大祖也檢校諱休號學堂學于圃隱先生吏參諱益精號雲庵以孝旌三傳有諱鑄僉知僉知生希文始家夏山希文生應東應東生部將部將生主簿主簿生學生萬曆壬辰部將公率子若孫赴金文烈公千鎰晉陽之陣文烈壯其勇略爲前鋒屢獲捷癸巳六月城陷文烈死之部將公被執罵不絶口而殉主簿公藏屍于巖穴抱子慟哭曰父死於君子不死於父非子遂諭聚餘卒追敵至鼎巖津矢盡而死學生亦死三世三人同死於事忠臣也難定幷錄原從多士請旌贈者凡二十一度猶未蒙恩典粵三百三十五年丁卯鄕人悼偉蹟漸湮豎石于回山里後孫在勳在烈屬余爲銘余亦夏山人曷可以病朽不文辭銘曰

 

父曰主辱死吾所欲一劍橫突萬騎奔蹶天時不利惟義與比子曰父死余生爲恥百里馳轉萬死一戰孫亦忘身三世成仁峨峨矗皐洋洋鼎濤百代千秋忠魄長留

 

전서공(성목)-학당공(휴)-익정-숙-덕녕-주-희문-응동-걸-대수-후생

출처;

小訥先生文集卷之三十四   소눌 盧相稷(노상직)

소눌 노상직(小訥 盧相稷. 1855~1931

 

<전서공파 집성촌 자료 소개> (2007. 4. 27. 본 홈 게시판 제공 자료. 태병(전) 제공)

전서공의 후손 중 제일 큰집은 경상북도 달성군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음으로는 경남 창녕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서기 1504년 충열공의 10세손이신 휘 "주" 할아버지는 갑자 사화로 인하여 벼슬을 버리고 경상북도 성주에 은거 하셨으며, 후손으로 형제를 두셨는데 1506년 병인 사화로 형제가 각자 헤어져 형 휘 "희수"는 경북 달성에, 아우이신 휘 "희문"은 경남 창녕에 은거 하게 되었습니다.  경북 달성과 경남 창녕으로 입성하신지 작년에 500년이 되었습니다          전서공(典書公) 파계도(2002. 9. 7. 정보미 제공)

 

  시조,충렬공,파조

 

11世 5世 1世

12世 6世 2世

13世 7世 3世

14世 8世 4世

15世 9世 5世

16世 10世 6世

17世 11世 7世

 성목(成牧)
 典書公

 휴(休)
 檢校公

 익정(益精)
參判公

 숙(潚)
 判尹公

 복영(福寧)
 司果公

 곤(金+昆)
  通德郞公

 계조(繼祖)
 學生公

 

 

 

 

 

 

 계한(繼韓)
 學生公

 

 

 

 

 수영(壽寧)
福昌君

 광(鑛)
 經歷公

 계한(繼韓)
 副司果公

 

 

 

 

 덕영(德寧)
通德郞公

  주(鑄)
  府使公

 희수(希壽)
 通德郞公

 

 

 

 

 

 

 희문(希文)
 通德郞公

 

 

 

 

명영(命寧)
僉知公 

 손(遜)
   掌令公

 세묵(世墨)
執平公

 

 

 

 형(泂)
 進士公

 부영(富寧)
寺正公

 구년(龜年)
 參議公

 사수(師秀)
 縣監公

 

 

 

 

 

 

 사준(師俊)
 處士公

 

 

 

 

 

 

 사철(師哲)
 牧使公

 

 

 

 

 

 

 사민(師敏)
 通德郞公

 

 

 

 

 

 

 사우(師友)
 通德郞公

 

 

 

 

 

 구수(龜壽)
 通德郞公

 

 

 

 익염(益廉)
正郞公

 저(저)
 郡守公

 대성(大成)
 郡守公

 맹견(孟堅)
 通德郞公

 

 

 

 

 

 

 철견(哲堅)
郡守公

 돈(王+豕)
  通德郞公

 

 

 

 

 

 영견(永堅)
 監察公

 기(琦)
  通德郞公

 

 

 

 

 

 

 몽월(夢月)
  通德郞公

 

 

 

 

 

 

  구(球)
  通德郞公

 

 

 

 

 

 

  린(璘)
 縣監公

 

 

 

 

구성(九成)
通德郞公

 옥견(玉堅)
 學生公

 언종(彦宗)
 學生公

 

 

 

 

 

 

 언신(彦臣)
 學生公

 

 

 

 

 

 

 언호(彦豪)
 學生公

 

 

 

 

 

 

 언기(彦器)
 進士公

 

 

 

 

 

 우견(右堅)
 學生公

 연(延)
學生公

 

 

 

 

 

 

 준(遵)
學生公

 

 

 

 

 

 종견(鐘堅)
學生公

 희수(熙粹)
學生公

 

 

 

  한(漢)
  直講公

 덕수(德壽)
   別提公

 하(하)
 監役公

 사영(士英)
 通德郞公

 

 

 

 

 

 

 사웅(士雄)
  通德郞公

 

 

 

 

 

 

 사걸(士傑)
 從士郞公

 

 

 

 

 복수(福壽)
 縣監公

 기(技)

 영필(英弼)

 

 

 

변(물수변+卞)
生員公

 철문(澈文)
參奉公

 거(王+居)
 通德郞公

 순항(順頊)
學生公

 

 

 

 

 

 

 순림(順琳)
學生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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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공파 창녕 종중 규약> (2007. 4. 28. 태병(전) 제공)

   

 

安東金氏 典書公派 諱 希文後孫 宗中規約

 

第一章  總      則

 

第1條 (目的) 本 宗中은 宗員相互間의 親睦을 圖謨하고 祖上을 崇拜 하며 愛族의 情을 警告히 함을 그 目的으로한다

제二조 (名稱) 本  宗中은 安東金氏 典書公派 諱 希文의 後孫의 宗中 이라고 한다

第三條 (宗員) 本 宗中의 宗員은 安東金氏 典書公派  諱 希文 後孫으로 한다

第四條 (事務所) 本 宗中의 事務所는 慶南 昌寧郡 昌寧邑 新村里 805번지 安東金氏 諱 希文의 齋室인 (環山齋)에 둔다

第五條 (財政)  本 宗中의 財源은 基本財産에서 發生하는 收入金과 宗員의 負擔金과 協贊金및 其他收入金 으로 한다

第六條 (事業) 本 宗中은 다음과 같은 事業을 한다

   1. 遺蹟의 保存및 管理

   2. 墓祀 奉行

   3. 宗員의 福利增進을 위한 事業

   4.其他 本 宗中의 目的에 附合하는 事業

 

第 2 章  任    員

 

第七條 本 宗中의 任員은 다음과 같이 둔다

   1. 會長 1名  理事 6名  有司 1名 監事 2名

   2. 各 任員 의 選出은 定期 宗會에서 呼選한다

   3. 各 任員은 無報酬 名譽職으로 한다

 

第八條 (任員의 職務) 本 宗中 任員의 職務는 다음과 같다

   1. 會長은 本 宗中을 代表하고 宗事의 一切事業을 管掌한다

   2. 有司는 宗會에서 議決된 諸般事業의 執行과 經理業務를 擔當한다

   3. 監査는 本宗中의 財政經理에 관한 業務를 監査하고 그 結果를 宗會에 보고 한다

   4. 會長의 有故時 에는 理事中에서 年長者의 順으로 職務를 수행 한다

 

第九條 (任員의 任期) 各 任員의 任期는 2年으로 하고 缺員이 생겼을 때에는 理事會에서 補選하며 그 任期는 殘餘其間으로한다

 

第三章   會      議

 

第十條 (宗會)  本 宗中은 最高議決機關인 宗會를 둔다

   1. 宗會는 每年 12月 22日 前後 冬至日에 開催하며 構成員은 全 宗員 으로 한다

   2. 宗會에서 다음 事項을 議決한다

     가) 事業運營에 관한 諸般事業

     나) 任員의 呼選

     다) 財政에 관한 事項

     라) 不動産에 대한 取得과 處分에 관한 事項

     마) 其他 중요한 事項

   3. 宗會의 議決은 參席宗員 過半數以上의 贊成으로 하며 可否 同數일 때에는 議長이 決定한다.

 

第十一條 (理事會) 本 宗中에는 理事會를 둔다.

   1. 理事會는 會長 理事 有司 監事가 構成員이 되며 會長이 召集하고 會議의 議長이 된다

   2. 理事會에서는 다음의 事項을 議決한다.

     가) 定期 宗會에서 委任된 事項

     나) 缺員된 任員의 補選

     다) 其他 重要한 事項

   3. 理事會는 在籍理事 過半數以上의 參席과 參席理事 過半數 以上의 贊成으로  議決하되 可否同數일때에는 議長이 決定한다

 

第四章  會計年度 및 帳簿

 

第十二條 (會計年度) 本 宗中의 會計年度는 每年 12月 22日 冬至를 基準으로 한다

第十三條 (帳簿) 本 宗中에는 다음 과 같은 帳簿및 補冊을 備置한다

   1. 經理帳簿

   2. 各種會議의 會議錄

   3. 本 宗中의 財産目錄

   4. 宗員 의 名簿및 任員의 名簿

   5. 其他 必要한 帳簿

 

附        則

 

 本 規約은 西紀 1993年 6月 10日부터 施行한다

 但 本 規約 施行前에 發生한 諸般宗事는 本 規約에 義擧하여 施行한 것으로 한다.

     西紀 2005년 12월 22일

 

   

 

<분파 소개>

 중시조 충렬공(方慶) 현손(玄孫)代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 중 15파가 현존하고 있다. 그 중에서 문숙공(文肅公-永暾)의 손자인 익달(益達)의 제학공파(提學公派), 정간공(貞簡公-永煦)의 손자 사렴(士廉)의 안렴사파(安廉使派), 사형(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가 안동김씨 인구의 60-70%를 차지하며 통칭 <提安翼 3派>라 부른다. 이밖에 군사공파(郡事公派-七陽), 문온공파(文溫公派-九容), 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九鼎) 등 3파가 그에 버금 간다. 그 파계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世

2 世

3 世

4 世

5 世(分派)

判書公  小宣

 都僉議公 資

 

 

大提學公 承用

 評理公 厚

密直司公  七祐 (100여명)

(밀직사공 칠우)- 이북,경기도일원

開城尹公  七霖 (100여명)

(개성윤공 칠림)-이북, 경기도 일원

郡事公  七陽 (1만여명)

(군사공 칠양)-전남 강진,경기 파주

 掌令公 玖

典書公   成牧 (1만여명)

(전서공 성목)-충남 전의(조치원), 경북 달성, 경남 창녕

副使公  天順 (1만여명)

(부사공 천순)-이북, 강원 철원,전북 순창

 良簡公 承澤

平章事公 昻

文溫公   九容 (6만여명)

(문온공 구용)-경기 포천,충북 음성,전북 정읍

知製敎公  齊顔

(지제교공 제안)

安靖公  九德 (100여명)

(안정공 구덕)-충남 공주 정안

 郞將公 冕

都評議公  九鼎 (6만여명)

(도평의공 구정)-경북 의성, 대구

 尙書公 承祐

 左尹公 之衍

縣監公   潤

(현감공 윤)

都僉議公 之瑞

大護軍公   儒 (3만여명)

(대호군공 유)-전남 함평, 보성

都僉議公 小斤

 判官公 承固

 

 

文英公   恂

 文肅公 永暾

上洛伯公 縝

提學公   益達 (10만여명)

(제학공 익달)-충북 괴산, 충남 천원, 경북 성주. 대구

 尙書公 永暉

書雲正公 荇

判三司公    場 (90여명)

(판삼사공 장)-경기 부천 일원

 慈恩師 思順

 

 

 貞簡公 永煦

領三司公 貳

判事公   士謙

(판사공 사겸)

按廉使公  士廉 (9만여명)

(안렴사공 사렴)-충북 오창,증평, 괴산,진천

忠康公  士安

(충강공 사안)

翼元公   士衡 (20만여명)

(익원공 사형)-경기 용인,충북 청원 강내,충남 부여,경북 안동 영주,경남 의령 산청, 전북 고창

 掌令公 長

書雲觀正公  綏 (2만여명)

(서운관정공 수)-서울,경기 광주 초월,부천

司事公  

 永照

 

 

大將軍公 永曜

 檢校公 杏

判書公    吉

(판서공 길)

正儀公    哲 (2천여명)

(정의공 철)-경북 예천 봉화 안동, 서울

 摠郞公 松

 

中郞將公 栢

兵使公    達

(병사공 달)

 惇

 永諱

 

 

           * 맨 우측의 짙은 글자의 종파가 현존하고 있는 15개 분파임.

           * 파명 옆의 (    )의 인원은 2001년 8월 현재, 추정 인원임.

           *  -표는 해당 파 종인들의 주 거주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