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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6. 14. 글-윤식(문), 사진-발용(군) 제공)
일시 : 2007년 6월 10일(일요일) 장소 : 경기도 여주 일대 선조 묘소 및 유적지 참석 : 11명(무순, 경칭 생략) 영환, 은회, 발용, 진회, 태우, 태영, 항용, 영식, 용주(부부), 윤식
■ 신륵사 답사 안정공 묘소 참배를 마친 일행은 10:41분에 다음 목적지인 여주 신륵사와 귀백리 일대로 향했습니다. 온 길을 되짚어 나가 내륙고속도로 밑에서 좌회전하면 여주로 가는 길입니다. 고속도로 밑 굴다리를 지나 11:10분경 신륵사 입구 집단상가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여주 신륵사 가는 길 안정공 묘역(10:41) → 점동4거리(10:51), 직진 → 도로표지판 <여주>向 → 이완 장군묘/명성황후 생가 안내판(10:55) → 여주CC 3거리(10:57 도로 오른쪽 명성황후 동상) → 도로표지판 법원 검찰청(10:59), 직진 → 여주대(11:00) → 육교(11:00) → 도로표지판 여주군청(11:03), 직진 → 교리3거리(11:03) → 여주시내, 우회전(원주 양평 방향) → 여주대교(11:07) → 신륵사 입구 주차장(11:09)
주차장에서 5분 가량 걸어가는 길은 주위를 잘 단장해 놓았습니다. 좌우에 심어 놓은 벚나무에 버찌가 까맣게 익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봉미산 신륵사 산문 입구에 비포장 주차장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보행이 어려운 분들은 이곳에 주차하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신륵사 산문은 최근에 지은 것으로 그다지 조형미가 아름답지 못합니다. 봉미산은 신륵사 뒤쪽의 나지막한 산줄기입니다. 신륵사에는 여말의 고승인 나옹화상이 열반한 유서 깊은 사찰로 문온공(휘 구용)과 관련된 유적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신륵사 경내 동쪽에는 여강(驪江)이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바위 위에 모전(벽돌)으로 만든 고려시대 다층전탑이 서 있어 ‘벽사(璧寺)’라고도 부릅니다. 이 전탑은 현재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려시대 전탑이라고 합니다.
전탑 아래에도 자그마한 크기의 고려시대 석탑이 서 있으며, 전탑 바로 위쪽에는 ‘신륵사 대장각기비’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은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나옹화상의 제자들과 함께 대장경을 인쇄 보관하는 2층 규모의 대장각을 신륵사에 세웠는데, 그 내력을 적은 것이 바로 대장각기입니다. 오랜 세월로 비석은 여러 조각으로 깨졌으나 글자는 금방 새긴 듯 날이 서 있습니다. 비문은 여말의 천재로 일컬어졌던 이숭인 선생이, 글씨는 권주 선생이 썼습니다.
우리 일행은 잠시 여강을 조망한 다음 ‘조사당’ 뒤쪽에 있는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부도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나옹화상은 충숙왕 7년(1320년)에 태어나 우왕 2년(1376년)에 입적한 고승으로 속성(俗姓)은 아씨(牙氏)라고 합니다. 공민왕 재위시 나옹화상은 충렬공의 <초당일기>가 있었다는 황해도 신광사(神光寺)에 머물기도 한 분입니다. 나옹화상은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머물다 경남 밀양으로 가다가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이때 사리를 수습해 부도를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보제존자 석종(普濟尊者石鐘)’입니다. 그 형태가 아름다고 특이해 보는 이를 사로잡습니다. 그 옆에 이를테면 나옹화상의 묘비라고 할 수 있는 ‘보제존자 석종비’가 있습니다. 이 비석의 글은 목은 선생이 짓고, 글씨는 명필로 유명했던 한수 선생이 썼습니다. 비석 위에는 기와집 지붕 형태로 조각했는데, 25~6년 만에 다시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비면에는 나옹화상의 묘탑(부도)과 영정을 모신 진당(眞堂)을 조성한 내력이 적혀 있는데, 뒷면에 당시 이 일을 추진했던 고려시대 인물들과 시주 등 200여 명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그 명단 중에 문온공과 왕대고모님 휘자가 들어 있습니다. 관련 내용은 영환 종친을 비롯해 윤만, 주회, 태영 종친 등 여러 현종들께서 올리신 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보제존자 석종비 뒷면에 수록된 선조님 전삼사좌윤(前三司左尹) 김구용(金九容) 상락군(上洛郡) 김씨묘영(金氏妙英) 상락군(上洛郡) □□□□ 상락군(上洛郡) 김씨묘명(金氏妙明)
또한 부도 앞에는 고려시대 석등이 있는데, 속인으로 치면 장명등인 셈입니다. 조선 중기에 이곳에 들렀던 계암 김령은 이 석등을 보고 ‘화려하기가 극에 달했다’고 평할 정도였습니다. 크기는 불과 67cm에 지나지 않으나 팔각형 각 면마다 화사창(火舍窓)이 뚫려 있고, 화사창(火舍窓) 사이사이 기둥에는 놀랄 정도로 정교한 반룡(蟠龍)을 새겼습니다. 고무찰흙으로 빚는다 해도 이처럼 정교하게 조각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재질은 화사석(곱돌)이라고 하는데 마치 모래를 섞지 않은 콘크리트 가루를 물에 개서 굳힌 것처럼 보입니다. 할아버지와 왕대고모님 휘자를 손으로 더듬어 그 옛날 할아버지 온기를 느낀 다음 신륵사 산문을 나서니 11:50분입니다.
<중략>
육우당 터 답사 15:20분 광식 회장과 두식 총무와 헤어진 우리 일행은 문온공(휘 구용) 할아버지께서 여주 유배 시절 머무셨던 육우당 터를 찾기 위해 금사리로 향했습니다. 육우당은 목은 선생을 비롯해 고려시대 유명 문인들의 시나 문집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금사면 어느 곳인지 밝혀지지 않아 문온공파에서는 대대로 육우당 터를 찾기 위해 애를 써 왔습니다. 직제학공계 음성공 문중에 전해지는 <가보(家寶)>에 육우당 터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전해지고, 이 밖에도 여러 문집에 단편적으로 전해지는 근거 자료를 토대로 육우당 터를 찾는 중입니다. 또한 영환 종친과 종회 종친(전 문온공파 회장)을 비롯해 여러 종친들께서 꾸준히 현지를 답사해 오고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종친 여러분의 격려에 힘입어 언젠가는 육우당 터를 반드시 찾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일행은 이곳을 답사하신 영환 종친의 안내로 강애산공원으로 향했습니다.
◆금사리 가는 길 여강가 음식점(15:20) → 도로표지판 <동문/금사>向, 우회전 → 다리 건너자마자 우회전 금사向 → 계신리 → 금사면(15:25) → 도로표지판 <양평/금사>向 → 서원사거리(15:27), 우회전(‘거시기추어탕’음식점) → 강애산(江崖山)공원(15:29 공원 입구 계단 맞은편에 금사파출소)
근 10분 만에 여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강애산공원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금사참외축제가 열리는 기간이라 여기저기서 흥겨운 잔치 분위기가 납니다. 강애산공원에서도 축제행사로 푸닥거리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잠깐 눈길을 돌렸다가 공원 정상에 있는 팔각정으로 올라갔습니다. 멀리 이포대교와 강 건너편 대신면의 파사성터와 산록, 여강의 유장한 물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강애산 아래쪽 강가로 내려가는 길이 예상외로 가파릅니다. 그 아래로 집터가 두 군데 보이는데, 한 곳에는 무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아래쪽 집터 인근에 은행나무 노거수가 1그루 있는데, 다가가 살펴보니 수령 600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 아래쪽에 경사가 심하기는 하지만 넓게 펼쳐진 바위 위에 앉아 잠시 정담을 나눕니다. 바위에 발 뻗고 편히 앉아 쉬면서 바라보는 여강 줄기는 강폭이 넓고 물결이 잔잔해 커다란 호수를 연상시킵니다. 수면 위로 백로와 물총새가 재빨리 날아가면서 허공에 한 가닥 선을 긋습니다. 이대로 여기서 하룻밤 묵었다 갔으면 좋겠습니다. 영환 종친께서 미리 준비하신 자료를 나누어 주시며 ‘육우당기’와 ‘육우’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이외에도 광주이씨 문중과 세종대왕릉(영릉)에 얽힌 일화를 비롯해 둔촌 이집 선생이 여말에 몸을 숨기기 위해 절친한 벗 최원도 선생을 찾아갈 당시의 일화 등을 들으며 600여 년 전의 일들을 떠올립니다.
그렇게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17:15분 귀가길에 올랐습니다. 금사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양평이나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말이면 양평 방향이 혼잡하므로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시는 것이 덜 막힙니다. 금사리 강애산공원에서 중부고속도로로 나가는 길은 이포대교(17:38)에서 좌회전한 뒤에 ‘국지도 70번도로’를 따라가다가 <수원/이천> 방향으로 가시다가 도로표지판에 <수원/이천>과 <백사>가 표시된 곳에서 <백사> 방향으로 가시면 됩니다. 우리 일행은 그다지 막히지 않고 18:04분 중부고속도로 입구에 도착, 18:12분 서이천IC를 통과해 20:35분 서울 잠실운동장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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