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
忠烈公 金方慶 史蹟 "굳센 물은 모진 바람에서 알 수 있고 곧은 신하는板蕩中(판탕중)에서 볼 수 있다"는 옛말이 있다. 이는 아아 저 內外的(내외적)으로 多事多難(다사다난)한 판국에 出將入相(출장입상) 盡忠竭力(진충갈력) 능히 이를 克復(극복)하여 기리 빛나는 이름을 남긴 高麗朝(고려조)의 金忠烈公(김충렬공)과 같은 이를 두고 말한 것이리라.
公(공)의諱(휘)는 方慶(방경) 字(자)는 本然(본연) 貫(관)은 安東(안동)이요 考(고)는 兵部尙書 (병부상서) 翰林學士(한림학사) 諱(휘)孝仁(효인)이라. 公(공)은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사람됨이 特異(특이)하고 夙成(숙성)하여 高宗(고종)14년 16세에 散員兼式目錄事(산원겸식목록사)를 除授(제수) 仕路(사로)에 나서 그후 公(공)은 昇進(숭진)을 거듭 監察御使(감찰어사)에 任(임)하여 强直(강직)한 氣風(기풍)을 보였고 高宗(고종)35년(37歲)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는 蒙古兵(몽고병)의 侵入(침입)을 避(피)하여 葦島(위도)에 入保(입보) 住民(주민)을 耕食(경식)케하다. 그 후(元宗時) 南京留守(남경유수) 西北面兵馬使(서북면병마사)를 歷任(역임) 간곳마다 善政(선정)을 행하고 들어와 刑部尙書樞密院副使(형부상서추밀원부사)의 要職(요직)을 띠다. 이때는 高麗(고려)가 이미 元(蒙古)의 節制(절제)를 받고 內外的(내외적)으로 복잡한 環境(환경)속에 있었으나 公(공)을 오직 忠直(충직)과 誠實(성실)로서 任務(임무)를 다하니라.
元宗(원종)11년(59세) 三別抄亂(삼별초란)에 公(공)은 元將(원장)과 더불어 珍島(진도)에 移據(이거)한 賊(적)을 쳐 이듬해 이를 掃蕩(소탕)하고 그 功(공)으로 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수태위중서시랑평장사:入相)에 昇進(승진)되다. 賊(적)의 餘黨(여당)이 耽羅(탐라)로 入據(입거)하매 同王(동왕)13년(61세) 公(공)은 또 行營重軍兵馬元帥(행영중군병마원수)로서 元軍(원군)과 合勢(합세)하여 上陸作戰(상륙작전)을 敢行(감행), 이듬해 드디어 亂(란)을 平定(평정)하고 凱旋(개선)하니 元宗(원종)은 公(공)을 慰賀(위하)하고 紅정(홍정)을 下賜(하사)하고 侍中(시중:首相)을 拜(배)하다. 同年(동년)七(칠)월에 元帝(원제)의 부름을 받고 元(원)에 가니 帝(제)는 公(공)을 禮遇(예우)하여 金鞍綵服(금안채복)과 金銀(금은)을 賜(사)하고 寵愛(총애)함이 極盡(극진)하고 돌아와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를 加授(가수)하다. 帝(제)의 要請(요청)으로 公(공)은 元將(원장)과 더불어 많은 戰船(전선)을 이끌고 對馬.一岐島(대마.일기도)를 攻破(공파)하고 내키어 九州北岸(구주북안)을 치다가 颱風(태풍)을 만나 돌아와 부虜(부로)器仗(기장)을 바치니, 王(왕)은 公(공)에게 上柱國判御史臺事(상주국판어사대사)를 加(가)하고 同年(동년:충렬왕 원년)에 官制改革(관제개혁)으로 인하여 僉議中贊(첨의중찬:侍中)上將軍判典理監察司事(상장군전리감찰사사)를 拜(배)하고 또 이듬해 元帝(원제)로부터 最高武功勳章(최고무공훈장)인 虎頭金牌(호두금패)를 받았다.
忠烈王(충렬왕)七(칠)年(七十歲)에 再次(재차)日本征伐(일본정벌)의 命(명)을 받아 公(공)을 元軍(원군)과 合勢(합세) 博多(박다)를 攻擊中(공격중) 또 颱風(태풍)을 만나 돌아오니라. 公(공)은 年老(년로)를 理由(이유)로 屢次(누차)致仕(치사:退職)를 乞(걸)하였으나 王(왕)은 이를 不許(불허)하고 元帝(원제)는 公(공)에게 中善大夫管領高麗國都元帥(중선대부관f령고려국도원수)를除授(제수)하였으며(충렬왕6년)同王(동왕)九年(9년:72세)에 또 致仕(치사)를 乞(걸)하니 王(왕)은 公(공)에게 推忠靖難定遠功臣三重大匡僉議中贊典理司事世子師(추충정난정원공신삼중대광첨의중찬전리사사세자사)를 삼아 致仕(치사)케하고 다시 上洛郡開國公(상라군개국공)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식읍일천호식실봉삼백호)를 封(봉)하였다. 公(공)은 致仕(치사)한 뒤에도 憂國如家(우국여가) 大事(대사)가 있을 때는 반드시 王(왕)의 諮問(자문)을 받더니 同王(동왕)二十六年(26년)庚子(경자:1300년) 八月(팔월)十六日(십육일)에 享年(향년)八十九歲(89세)로 卒(졸)하매 朝野(조야)가 모두 痛嘆(통탄)하니라. 忠宣王(충 왕)卽位初(즉위초:1307년)에 王旨(왕지)를 내려 [故 上洛公은 社稷(사직)에 有功(유공)함이 帶礪(대려)와 같다]하여 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을 追贈(추증)하고 諡(시)를 忠烈(충렬)이라하고 命(명)하여 神道碑(신도비)를 세우게하였다. 嗚呼(오호)라! 公(공)은 실로 憂國盡忠(우국진충)으로서 始終一貫(시종일관)한 偉人(위인)이었도다. 그 그릇과 度量(도량)은 弘大(홍대)하여 小事(소사)에 拘碍(구애)치 않고 天稟氣質(천품기질)은 凡人(범인)과 달라 늙어도 머리가 희지 않았고 盛寒極署(성한극서)에도 疾病(질병)을 몰랐다하니 公(공)의 長壽(장수)가 여기에 緣由(연유)함을 알겠도다. 또 그 '忠直信厚(충직신후)' '嚴毅寡言(엄의과언)' '不怨不尤(불원불우)'의 君子人的性格(군자인적성격) '文武兼全(문무겸전)' '博識故典(박식고전)' '處事無錯(처사무착)'의 才識(재식)과 智略(지략) 또 그 律己(율기)는 嚴格(엄격)하여 낮에는 누어본 일이 없다 하니라. 이로써 公(공)의 多事(다사)한 難局(난국)을 克服(극복)하여 큰 功勳(공훈)을 세웠으니 그 重重한 爵號(작호)와 그 諡號(시호)가 其宜(기의)를 得(득)하였다 하겠도다. 公(공)의 아들에는 小宣(선). 小斤(흔). 恂(순). 小侖(논)이 있어 長男(장남) 小宣(선)은 官(관)이 副知密直司事(부지밀직사사)에 이르고 그의 뒤 역시 名公巨卿(명공거경)으로 連連(연연)하여 東國(동국)의 華門大族(화문대족)을 이룩하라. 公(공)의 옛 神道碑(신도비)가 不幸(불행)히도 壬辰倭亂(임진왜란)에 毁損遺失(훼손유실)되어 그후 改竪(개수)치 못한 것을 遺憾(유감)을로 여겨 金氏大宗會(김씨대종회)에서 이를 再建(재건)코자 나에게 글을 청하니 나는 일찍부터 公(공)의 崇高(숭고)한 精神(정신)과 圓滿(원만)한 人格(인격)을 追慕(추모)하는 터이라 不文(불문)이나마 삼가 略述(약술)하노라 서기 1971년 10월 일 學術院長 文學博士 李丙燾 謹撰 後世孫 醫學博士 思達 謹書
*<漢字가 지원되지 않는 글자 해설> 홍정(紅--革+呈=가죽띠 정), 부로( 人+孚=가둘부--- 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