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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의 현손. 제학공(提學公)파 파조. 1380년(고려 우왕6년. 41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순대부 밀직사좌부대언(正順大夫密直司左副代言)을 거쳐 보문각 직제학지공조사사(寶文閣直提學知工曹司事)에 오름. 묘는 실전(失傳)이며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 도정사에 설단(設壇)함. 시제일은 음력 10월 6일이다. (연락처:043)832-3550.총무 김태옥)
<영단>(구 단소)
<관직명 조사> (2010. 7. 7. 항용(제) 제공) *출전 : 1)<새국사대사전> 교학사. 1996. 2)네이버 포털사이트 *벼슬명 : 1)정순대부 밀직사 좌부대언(正順大夫密直司左副代言), 2)보문각 직제학 지공조사사(寶文閣直提學知工曹司事)
1. 정순대부(正順大夫)
1)고려시대
가)고려시대 18품계 가운데 제5등급인 정3품 상계의 관계명이다.
나)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복위하여 문산계의 정3품을 상계와 하계로 나누면서 정3품 상계(上階)로 처음 설치되었다.
다)고려시대의 문산계는 이품∼사품이 대부계였으며, 대부계는 종2품의 통헌대부(通憲大夫) 이상과 그 이하 사이의 구분이 있었다.
라)1356년(공민왕 5)에는 1076년(문종 30) 문산계 29계 중 제6계인 정4품 상계의 관계명으로 제정되었던 정의대부(正議大夫)로 개칭되었다.
마)1362년(공민왕 11) 관제가 개편되어 정순대부로 고쳤다가 1369년(공민왕 18) 정의대부로 다시 바뀌었다.
바)1372년(공민왕 21)에는 1362년(공민왕 11)의 관제로 복구되어 정순대부로 다시 개칭되었다.
2)조선시대
가)조선시대 문산계 정3품 상계의 관계명은 통정대부(通政大夫)였으며, 정순대부는 의빈계(儀賓階) 정3품 하계의 관계명으로 당하관에 해당되었다
2. 밀직사(密直司)
1)고려시대 왕명의 출납, 궁중의 숙위(宿衛), 군기(軍機) 등을 관장한 관청이다.
2)991년(성종 10)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여 숙위를 맡아보게 하다가, 1009년(목종 12) 중추원 · 은대(銀臺) · 남북원(南北院)을 폐하고 중대성(中臺省)으로 개편하여, 왕명의 출납 ·군기 등의 임무를 더 맡겼다. 사(使) · 부사(副使) · 직중대(直中臺) 등의 관원을 두었다.
3)1011년(현종 2) 중대성을 중추원으로, 헌종 때는 추밀원으로 고쳤다.
4)1275년(충렬왕 1) 처음으로 밀직사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1298년 광정원(光政院)이라 고쳤다가 곧 밀직사로 환원하였다.
5)1310년(충선왕 2) 밀직사의 관질(官秩)을 높여서 첨의부(僉議府)와 함께 양부(兩府)라 불렀으며, 승지(承旨)를 대언(代言)으로 고쳤다.
6)1354년(공민왕 3) 판사사 ·지신사 ·대언을 녹관(祿官)으로 하고,1356년 문종 때의 구제도로 복귀하여 추밀원으로 하였다.
7)1362년 다시 밀직사로 고쳐 종2품의 판사사 ·사사 ·지사사 ·첨서사사 ·동지사사 및 정3품의 좌 · 우 대언, 좌 · 우 부대언을 두었다.
8)1369년 제학(提學)을 학사(學士)로, 대언을 승선으로 고쳤다가 다시 제학 ·대언으로 환원하였다. 밀직사의 이속(吏屬)은 문종 때 별가(別駕) 10명, 주사(主事) 10명, 시별가(試別駕) 2명, 영사(令史) 2명, 기관(記官) 8명, 통인(通引) 8명을 두었다.
3. 좌부대언(左副代言)
1)고려시대 정3품. 밀직사 내의 벼슬로 대언은 후에 승지로 고쳤다.
2)조선조의 좌부승지(정3품)와 같다.
4. 보문각(寶文閣)
1)고려시대 경연(經筵)과 장서(藏書)를 맡아보던 관청.
2)1116년(예종 11) 예종(睿宗)이 궁궐 안에 설치한 청연각(請讌閣)이 궁중에 있기 때문에 학자들의 출입과 숙직이 불편하다 하여 같은 해 11월 따로 설치한 것이다. 관원으로는 제거(提擧) ·동제거(同提擧) ·관구(管句) ·동관구(同管句) 등을 두고, 중추원의 내신(內臣)이 겸직하였다.
후에 대학사(大學士) 1명을 두었다.
3)1151년(의종 5) 보문각 내에 문첩소(文牒所)를 두었다. 1275년(충렬왕 1) 보문서(寶文署)로, 1198년 동문원(同文院)으로 개칭되었다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다시 보문각으로 환원되었다.
4)충렬왕 이후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1420년(세종 2) 수문전(修文殿) · 집현전과 합하여 집현전에 통합되었다.
5. 직제학(直提學)
1)고려시대는 예문관(藝文館) · 보문각(寶文閣) · 우문관(右文館) · 진현관(進賢館) 등에 딸려 있던 정4품 벼슬이었다.
2)조선 전기에는 집현전(集賢殿)에 종3품관으로 두었다가 후에 홍문관(弘文館) · 예문관(藝文館)에 정3품의 직제학 각 1명씩을 두었는데, 예문관의 직제학은 승정원(承政院)의 도승지(都承旨)가 겸하였으며, 후기에 이르러 예문관의 직제학이 없어지자 홍문관의 직제학을 겸하였다. 정조 때는 규장각(奎章閣)에도 직제학 2명을 두었는데, 정3품 당상관에서 종2품관인 자로 임명하였다. 규장각의 직제학은 홍문관의 부제학(副提學)으로 추천된 자로 임명하였다.
6. 지공조사사(知工曹司事)
1)고려시대 공조(工曹)에 속한 상서(尙書) 아래의 종3품직으로 추정,
2)공조(工曹) : 고려 초에는 공관(工官)이라 하다가 995년(성종 14) 상서공부(尙書工部)로 개칭하였으며, 1275년(충렬왕 1) 폐지하였다가 1298년 공조(工曹)를 설치하였다. 속관(屬官)도 명칭의 변경에 따라 인원·품계 등이 바뀌었으나 문종(文宗:1046∼1083) 때의 것을 보면 판사(判事:宰臣 겸임) 1명, 상서(尙書:정3품) 1명, 지부사(知部事:他官 겸임)1명, 시랑(侍郞:정4품) 1명, 낭중(郞中:정5품) 2명, 원외랑(員外郞:정6품) 2명이며, 이속(吏屬)으로 주사(主事) 2명, 영사(令史) 4명, 서령사(書令史) 4명, 기관(記官) 8명, 전서서자(篆書書者) 2명이 있었다.
3)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설치되어 소속부서로는 토목공사를 맡은 영조사(營造司), 공예품의 제작·도량형을 관리하는 공야사(攻冶司), 산림·소택·목재·궁궐의 정원·교통사무·필묵(筆墨)·칠기(漆器)를 맡은 산택사(山澤司)가 있었으며, 소속관청으로는 상의원(尙衣院)·선공감(繕工監)·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전연사(典涓司)·장원서(掌苑署)·조지서(紙署)·와서(瓦署) 등이 있었다. 관원으로는 판서(判書:정2품) 1명, 참판(參判:종2품) 1명, 참의(參議:정3품) 1명, 정랑(正郞:정5품) 3명, 좌랑(佐郞:정6품) 3명이 있었다. 1894년(고종 31) 공무아문(工務衙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이듬해 다시 농상아문(農商衙門)과 합하여 농상공부(農商工部)로 개편되었다.
<기타 중요 역사 자료 소개> 1.<민무회(테종의 막내 처남-원경왕후의 아우)는 제학공의 사위였다>는 기록 (2004. 3. 18. 주회(안) 제공) 출전 : 춘정집 2 (2001, 민족문화추진회) * <춘정집>은 변계량의 문집임
민제(閔霽) 묘지명 병서
공의 성은 민씨(閔氏). 휘는 제(霽). 호는 어은(漁隱)이니, 여흥(驪興)의 대족(大族)이다. 증조 휘 종유(宗儒)는 고려 의왕(毅王)에게 벼슬하여 도첨의 시랑 찬성사로서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충순공이 조부 판밀직사사 휘 적을 낳았는데 시호는 문순(文順)이고, 문순공이 대광 여흥군 휘 변을 낳았는데, 선수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 중대광 도첨의 찬성사 시호 문정(文正) 허공(許公) 휘 백(伯)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공(▶민제)을 낳았다. --- 대부인(大夫人, ▶송선의 딸)이 4남 3녀를 낳았는데, 우리 원경왕태후(▶태종 비)가 둘째 따님이다. 대부인의 맏아들은 무구, 다음은 무질, 다음은 무휼, 다음은 무회인데 모두 죄를 얻어 대부인보다 먼저 귀양지에서 죽었다. 장녀는 조박에게 출가하고, 막내는 노한에게 출가했다. --- 무회는 우부대언(右副代言) ★김익달(金益達)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뇌(磊)는 어리고 딸은 유학 김치(金,삼수변빼고쇠금변淄)에게 출가했다.
○민종유---민적(+재취)---민변---민제---(태종비)원경왕후, 민무구 4형제, 민무회(+김익달 녀) ○충렬공 3김순---김영돈---김진---김익달---여(+민무회)
●민제(閔霽) 1339(충숙왕 복위 8)∼1408(태종 8).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중회(仲晦), 호는 어은(漁隱). 여흥출신. 변(#변03)의 아들이고, 무구(無咎)의 아버지이며, 태종의 장인이다.
---생략---
이어 무구·무질형제가 붕당을 지어 세자를 끼고 집권을 도모한다는 탄핵이 있었으나 그의 공덕으로 두 아들이 무사하였으며, 이듬해 검교찬성사(檢校贊成事) 조호(趙瑚), 전 총제(摠制) 김첨(金瞻)·허응(許應) 등과 붕당을 지어 난을 도모하고 있다는 탄핵을 받았으나, 그의 성품이 평소 온후하고 청렴하여 사치를 즐기지 않았던 관계로 태종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기 때문에 성명(性命)을 온전히 보존하였다. 그해 병으로 눕게 되자 유배지에 가 있는 무구·무질형제를 사간들의 여러 차례 반대상소에도 불구하고 문병차 불렀으며, 자리에 누운 지 6일 만에 죽었다. 그는 태종의 잠저시에는 항상 ‘선달(先達)’이라 일컬어졌고, 태종은 그를 ‘사부(師傅)’라 부를 정도로 가까웠으며, 그가 사건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거나 자식들이 죄를 지었는데도 큰 화를 입지 않은 것은 태종으로부터의 두터운 신임과 왕의 장인이라는 위치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는 하륜·이무(李茂)·조호 등과 뜻을 같이하는 사이였으며, 문생에는 전가식·조서(趙敍)·이공의(李公義)·옥고(玉沽) 등이 있다. 젊어서부터 예절을 잘 알아 추부(樞府)에 올라서는 항상 예조(禮曹)를 겸하였고, 국가의 전례(典禮)를 모두 자세하게 정하고 예문(禮文)을 세웠다. 또한, 이단(異端)과 음사(淫祀)를 싫어하여 강력히 배척하였고, 복색을 정하고, 불사(佛事)를 줄일 것을 청하여 춘추장경(春秋藏經)외는 모두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타고난 자질은 어질고 검소하였으며 경사(經史)에 밝았는데 특히 사학(史學)을 잘하였고, 시에 대한 평도 잘하였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太宗의 外戚除去에 對하여―閔氏兄弟의 獄―(金成俊, 歷史學報 17·18合輯, 1962). 〈金成俊〉
●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공민왕 14)∼1420(세종 2). 조선 태종의 비(妃). 본관은 여흥(驪興).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여흥에서 출생하였다. 1382년(우왕 8)에 방원(芳遠)에게 출가하였으며, 1392년(태조 1)에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
제1차왕자의 난 때 부군(夫君)을 도와 공이 출중하였으며, 1400년(정종 2) 2월에 방원이 왕세자에 책봉되자, 세자빈이 되어 정빈(貞嬪)에 봉해졌다. 이해 11월에 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어 정비(靜妃)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1398년 8월에 정도전(鄭道傳) 등이 주살될 때에 그는 미리 변이 일어날 것을 예측하고, 때마침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여러 왕자와 숙직하고 있던 방원을 몰래 불러내어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또한 10여일 전에 여러 왕자가 거느리고 있던 시위패(侍衛牌)를 혁파하고 영중(營中)의 군기를 모두 불태울 때 정비가 몰래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일이 발생하던 그날에 방원의 군사에게 내어주며 선수를 쓰도록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종 초부터 궁녀문제로 불화가 일어났다. 태종과 정비의 불화는 빈어(嬪御)문제로 인한 갈등에 그치지 않고, 1407년(태종 7) 7월에 발발한 민무구(閔無咎)형제의 옥사를 계기로 하여 더욱 더 심각해졌는데, 민무구형제는 이미 태종 2년에 왕이 창종(瘡腫)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시녀를 끼고 왕의 병세를 염탐하며 은근히 협유집권(挾幼執權)의 기회를 노렸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정비가 직접 참여한 것 같지는 않지만, 민무구형제가 끝내 대역(大逆)에 몰려 비명으로 죽게 된 데에는, 정비의 정도에 지나친 투기와 불평으로 태종의 비위에 거슬린 것이 곧 민무구형제에게 영향을 주어 태종과 틈이 더 벌어지게 하고, 그들의 방자한 행동을 도와주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비는 민무구형제의 옥이 발발한 4개월 후 금령을 범하여 친정과 내통한 사실이 드러나서 그들의 옥을 악화시키는 요인을 만들었다. 정비가 친정과 내통한 일이 있던 직후, 민무구형제의 직첩(職牒)을 거두어 서인을 만들 정도로 정비의 무엄한 태도에 태종이 격분하였던 것이다. 민무구형제는 그뒤 태종이 정비의 면목과 장인 민제와 빙모 송씨(宋氏)의 생존으로 인하여 겨우 생명을 보전해나갔으나, 1408년 9월 민제가 죽자, 같은해 10월에 태종은 그들의 열가지 죄를 열거한 교서를 반포하였고, 1409년 10월에 그들의 옥에 관련된 이무(李茂)를 죽였다. 그동안 정비는 민무구 등의 일로 태종에게 불손한 말을 자주 하여 왕의 분노를 여러 번 사서 민무구형제가 죽은 지 1년 남짓 된 11월 9일에는 폐비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태종은 일빈이잉(一嬪二#잉01)의 빈어제도를 정하여, 같은해 10월 27일에 판통례문사 ★김구덕(金九德)의 딸을 빈으로 삼아 명빈(明嬪)에 봉하고, 전 제학 노구산(盧龜山)의 딸과 전 지함주사 김점(金漸)의 딸을 잉실(#잉01室)로 삼아 각각 소혜궁주(昭惠宮主)와 숙공궁주(淑恭宮主)로 봉하였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여 후덕왕대비(厚德王大妃)로 봉하고, 1420년 7월 56세로 죽었다. 시호는 원경왕후로 창덕소열(彰德昭烈)이라는 휘호(徽號)가 추상되었다. 소생은 세종과 양녕(讓寧)·효령(孝寧)·성녕(誠寧)의 3대군과 정순(貞順)·경정(慶貞)·경안(慶安)·정선(貞善)의 4공주가 있다. 능은 헌릉(獻陵)이다. 참고문헌 太宗實錄, 世宗實錄, 璿源系譜, 太宗의 外戚除去에 對하여―閔氏兄弟의 獄―(金成俊, 歷史學報 17·18合輯, 1962). 〈金成俊〉
2. 제학공의 과거시험 동년록 (2004. 4. 23. 윤식(문) 제공)
제학공(휘 익달) 동년록
출전 : <국조방목>
1)우리 족보 기록 내용 : 高麗王 禑 庚申(1380) 文科
2)<국조방목> 기록 내용
◆庚申年榜 : 洪武十三年 乙科三人賜馬
◇乙科三人 : 李文和(仁川人) 李之直(廣州人) 韓尙質(淸州人)
◇丙科七人 : 成守恒(昌寧人) 崔全(全州人) 李隲(延安人) 辛精(靈山人) 典農司承 金益達 安東人 提學 一夲云 益偉 吳蒙乙(寶城人) 權執經(尙州人)
◇同進士 二十三人 : 朴竪基(密陽人) 宋子郊(미상) 李汝良(原京人) 李作(全義人) 高安勝(미상) 郭恂(西京人) 閔汝翼(呂興人) 權湛(安東人) 金常(미상) 崔潾(미상) 尹相(坡平人) 朴希賢(미상) 柳謙(晋州人) 張至和(미상) 崔云嗣(미상) 徐坐(大丘人) 安省(廣州人) 李陽實(永川人) 金子猛(미상) 洪寶(미상) 金雅(미상) 金邰(慶州人) 王章(미상)
◇同年生員第一人 : 洪尙賓(미상, 壬戌科)
◇監試第一人 : 李汝良(同年科)--※동진사 23인에 속한 이여량과 동일인인 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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