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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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충렬공 행장(忠烈公 行狀)

(2002. 1. 21 영환(문) 제공)  

 

김공 방경(方慶)은 안동 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사람으로 병부상서  한림학사(兵部尙書翰林學士)로 중서령(中書令)에 추봉(追封)된 효인(孝仁)의 아들이고 직사관(直史館) 민성(敏性)의 손자요,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15세손이다.

 

처음에 그의 어머니께서 임신(姙娠)하실 때에 구름이 안개를 잡수시는 꿈을 꾸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입과 코에는 항상 운기(雲氣)가 남아있으니 이 아이는 반드시 신선(神仙) 중에서 점지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公)은 어릴 때 안동에 있는 조부(祖父)의 집에서 자랐는데 조금이라도 불쾌한 일만 있으면 반드시 길거리에 나가 누워서 울어 수레와 말들이 지나가지 못하니 사람들이 그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하였다.

 

나이 16세가 되어 삼한공신태사대광(三韓功臣太師大匡)을 지낸 일긍(日兢) 선조(先祖)의 음보(蔭補)로 양온사동정(良 史同正)에 선임 되었다가 다시 대정(隊正)이 된 지 얼마 안되어 태자부견룡(太子府牽龍)을 거치어 산원(散員)에 배명(拜命)되고, 식목록사(式目錄事)를 겸하게 되니 군국(軍國)의 중한 임무를 동료(同僚)들이 다 양보하게 되었다.

 

그 때 문하시중 최종준(門下侍中 崔宗竣)이 공의 충직(忠直)함을 사랑해서 모든 일을 예(禮)로써 대우하고 중대한 일이 있으면 모두 공에게 알리니 이때부터 그 명예(名譽)가 세상에 뛰어났다. 외직(外職)으로 나가서는 서북면병마록사(西北面兵馬錄事)가 되고 내직(內職)으로 들어 와서는 별장(別將)이 되었다가 다시 낭장감찰어사(郎將監察御史)로 전임하여 우창(右倉)을 감독하는데 아무 청탁(請託)도듣지 않으니 어떤 재상(宰相)이 권신(權臣)에게 가서 참소(讒訴)하기를 "지금 어사(御使)는 전 어사(前御史)처럼 봉공(奉公)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때 마침 공이 이르르니 권신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가?"고 하니, 공이 대답하여 말하되 "전 어사(御使)와 같이 봉공(奉公)하려고 하면 나도 또한 능히 할 수 있으나 나의 중요한 근본요강(根本要綱)은 국고(國庫)를 채우는데 있을 뿐이요, 모든 사람들의 입과 귀는 다 충족시킬 수 없다"고 하니  참소(讒訴)하던 자가 크게 부끄럽게 여기고 권신(權臣)도 또한 부끄러워 안색(顔色)이 변하였다. 그때 공은 영지(令旨)대로 이를 다하고 돌아가니 국고(國庫)가 만적(滿積)하게 되었다.

 

정미(丁未)년(서기1247년)에 공(公)은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승진되었다. 그때 몽고병(蒙古兵)이 침공(侵攻)해 들어오니 공(公)은 여러 성주(城主)에게 명령하여 "위도(韋島=지금의 정주)에 들어가서 잘 보전(保全)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섬은 넓이가 십여리가 되니 조수(潮水)가 자주 드나들어 농경(農耕)을 할 수가 없어 공(公)은 사람들을 동원(動員)하여 제방(堤防)을 쌓게 하니 그 위는 수레가 능히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안을 개간(開墾)시키고 씨를 뿌려 농사를 짓게 하니 당시 백성들이 고생을 하다가 가을이 되니 만곡(萬穀)이 무르익었다. 그러나 한편 몽고병들이 계속 주둔(駐屯)하고 물러가지 않았다. 섬사람들은 그 곡식으로 먹고 살 수는 있었으나 또 한편 그 섬에는 우물이 없어서 백성들이 육지(陸地)까지 식수(食水)를 길러 갔다가 왕왕 몽고병들에게 포로(捕虜)가 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공(公)은 다시 뚝을 견고(堅固)하게 쌓아 조수(潮水)가 드나드는 것을 막고 비가 올 때에 물을 가두어서 큰 저수지(貯水池)를 만드니 여름에는 그 물을 길어다 먹고 겨울에는 어름을 뚫고 물을 쓸 수 있게 하니 이로부터 육지까지 물을 길러 가는 노고(勞苦)와 몽고병에게 붙들려 가는 걱정이 없어졌다.

 

 이어 벼슬이 견룡행수(牽龍行首)를 대수(代授)하자 이 때에 금위관료(禁衛官僚)들이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에만 아부(阿附)하고 내직(內職)은 게을리하니 공(公)이 이르기를 "신자(臣子)의 의리(義理)가 이래서야 되겠는가?"라 하고 동료(同僚)인 박(朴)모와 더불어 상약(相約)하고 내직(內職)에서 근무(勤務)하는데 비록 질환(疾患)이 있어도 휴가(休暇)를 얻지 아니하였다. 그때 직려(直廬)가 비좁아서 금중(禁中)의 관료(官僚)들이 모두 밖에서 자는데 그 근방(近方)에 한 창녀(娼女)가 있었으니 그 자색(姿色)이 뛰어난지라 박(朴)모가 누차(累次)끌어내려고 하였으나 공(公)이 거절(拒絶)하니 박(朴)모가 부끄러워하여 잘못을 사과하였다. 이어서 금중(禁中)으로 천직(遷職)되어 유섭장군(諭攝將軍) 겸 급사중어사중승(給事中御史中丞)으로 지명(指命)되어 대각(臺閣)에 출입하니 그 위풍과 곧은 절개가 조야(朝野)에 용동(聳動하였다.  

 

대장군(大將軍)을 또 배명(拜命)하고 지합문형부사(知閤門刑部事)와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제수(除授)되고 선군별감사(選軍別監使)를 겸하게  되니 매일 첫닭이 울면 선군청(選君廳)에 앉아서 송사(訟事)를 판결(判決)하고 날이 밝으면 어사대(御史臺)에 들어가서 모든 기강(紀綱)을 더욱 준엄(竣嚴)하게 하였다. 그때에 좌승선(左丞宣) 유천우(兪千遇)가 오래동안 집권(執權)하고 있어 여러 벼슬아치들이 모두 그 위풍(威風)을  추종하여서 아첨을 하는 터인데 공(公)이 등청(登廳)길에 도중에서 홀연히 그를 만나자 말을 탄 그대로 읍(揖)만하고 지나가려고 하니 천우(千遇)가 말하기를 "나는 본시(本是) 조삼( 衫)으로 왕명을 봉행(奉行)하는데 삼품(三品) 이하는 피하지 않는 자가 없거늘 그대는 유독 어찌하여 이와 같이 대하는가?"라 하니 공(公)이 말하기를

 

"그대도 삼품(三品)이요, 나도 또한 삼품(三品)이며 그대도 조삼( 衫)으로 봉명하며 나 또한 조삼으로 봉명(奉命)하는 터이니 나는 예(禮)만 행할 따름이다."고 하여 서로가 한참동안 다투다가 공(公)은 "오늘은 시간이 늦었다."하고 곧 가버리니 천우가 깊이 혐의를 품고 무릇 공(公)의 친족(親族)중에서 벼슬을 구하는 사람이 있어도 번번이 억제하고 등용(登用)하지 않았으나 공(公)은 조금도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이내 상국(上國=元나라)의 진봉사(進奉使)가 되어서 갈 때 나라의 노잣돈(出張費)인 금은(金.銀) 등의 물품을 혹시 궐원(闕員)이 있어 받을 사람이 없을 때에는 행인(行人=출장갔던 사람)들이 오직 써 버린 바 있었으나 공(公)은 다 돌아와서 그대로 국고(國庫)에 반납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국가(國家)가 바야흐로 서북지방(西北地方)이 크게 위태(危殆)하여 걱정됨으로 북방(北方)을 진무(鎭撫)하자면 반드시 덕망(德望)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여야만 되기 때문에 공(公)으로써 이에 당하게 하니 여러 성(城)의 백성들이 사랑하고 공경하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마침 모상(母喪)을 당하여 고향에 가셨다가 돌아온 지 얼마 안되어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법(法)으로써 중방(重房=당시 행정전반을 감독하는 기관을 도방(都房)이라 하고 군부(軍部)를 감독하는 기관을 중방(重房)이라 하였음)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조문도교위(詔文都校尉) 응양상장군(鷹揚上將軍) 전빈(全 =원나라 장군)이 공(公)의 좌하(座下)에 있음을 질투(嫉妬)하여 감히 항거(抗拒)하고 권신(權臣)에게 무고(誣告)하여 공(公)이 남경(南京)으로 좌천(左遷)되었으니 이 때가 바로 지원(至元) 5년(서기1268년) 무진(戊辰) 2월이었다.  그 때에 우승선(右丞宣) 박기(朴琪)가 대조(大朝=원나라 조정)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북방(北方) 사십여성(城)을 두루 거쳐왔는데 그곳 백성들의 연명장(聯名狀)에 의하면 "만약 다시 공(公)을 얻게 된다면 우리들은 안거락업(安居樂業)을 하여 전심(專心)으로 나라를 도울 것이다."고 진정(陳情)하였다.  이래서 공(公)은 남경(南京=지금의 서울(한양))에서 사흘을 지난 후에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로 승진되고 다시 서북병마사가 되어 형부상서 추밀원부사(刑部尙書樞密院副使)로 들어갔다.

 

기사(己巳=1269년)년 여름에 권신(權臣) 임연(林衍)이 제 마음대로 왕(王=원종)을 폐(廢)하였다. 이때 왕세자(王世子)가 원(元)나라에서 마침 돌아오다가 의주(義州)에 이르러서 국란(國亂)이 있다는 소문(所聞)을 듣고 다시 원(元)나라로 들어가서 본국(本國=고려)에 사신(使臣)을 파견(派遣)하여 부왕(父王)의 안부(安否)를 물어 줄 것을 청하였던 바 그 사신(使臣)이 일을 마치고 환조(還朝)할 때에 공(公)이 그 사신(使臣)과 같이 원(元)나라에 입조(入朝)하니 중서성(中書省)에서 세자(世子)가 고려에 파병(派兵)해 줄 것을 주청(奏請)한 일로 세자(世子)와 의논(議論)하였는데 공(公)이 말하기를 '몽가독(蒙哥篤)장군이 출발해서 만약 서경(平壤)에 오래도록 머물면서 대군(大軍)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면 임연(林衍)은 이미 배명(拜命)한자라 반드시 모든 물자를 공급(供給)하지 않을 것이니 그 일을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세자(世子)는 마땅히 임연과 더불어 뜻이 같지 않고 일을 분별(分別)할 줄 아는 사람을 선택(選擇)하여 몽가독장군과 동반(同伴)하여 먼저 돌아가게 하소서'하자 세자(世子)가 그런 사람 선택하기를 어렵게 여기니 이때 시중(侍中)이장용(李藏用)등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방경(方慶)은 두 번이나 북계(北界)를 진무(鎭撫)하여 백성들에게 많은 사랑을 끼친 바 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됩니다."고 하니 세자(世子)가 말하기를 "꼭 나와 뜻과 같도다."라고 하였다.

 

이때 공(公)으로써 몽가독(蒙哥篤)과 함께 행군(行軍)케 되니 장차 출발(出發)함에 앞서 공(公)이 계략(計 )하여 말하기를 "관군(官軍)이 서경(西京)에 도착(倒着)하여 만일 대동강(大洞江)을 건너게 되면 왕경(開城)이 스스로 혼란(混亂)을 일으켜 장차 큰 변(變)이 있을까 두려우니 황제(皇帝)의 영지(令旨)를 받아서 대동강(大洞江)을 건너지 못하게 함만 같지 못할 것이오"하니 모두가 "그 말이 옳다"하고 이를 아뢰니 황제가 윤허(允許)하였다.

 

동경(東京=요동)에 돌아와서 왕(王=고려 원종)이 다시 복위(復位)하였다는 소문(所聞)을 듣고 다시 원(元)나라에 입조(入朝)하여 머물면서 본국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북계(北界)에 있는 반역민(反逆民) 최탄(崔坦)과 한신(韓愼)등의 무리들이 여러 성(城)의 수령(守令)들을 죽였는데 오직 박주(博州)수령 강빈(姜 )과 연주수령(筵州守令) 권천(權闡)은 다 공(公)의 매부(妹夫)인고로 죽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禮)로써 대우(待遇)하면서 "아무 공(某公=충렬공을 말함)의 은덕(恩德)을 어찌 감히 잊으리요"라고 말하였으니 공(公)께서 그 인심을 얻음이 이와 같았다.

 

이 해 12월에 왕이 행궁(行宮)에 있을 때 동지추밀원사어사대부(同知樞密院史御史大夫)를 배명(拜命)하고 경오년(庚午年=1270년) 정월에 서경(西京)에 이르르니 부로(父老=그 고을에 연세 많으신 분들)들이 와서 울면서 말하기를 "공(公)께서 만약(萬若) 이곳에 계셨던들 어찌 최탄, 한신등의 반역사건이 있었으리오"하고 매일과 같이 앞을 다투어 진수성찬(珍羞盛饌)을 드리니 최탄들도 또한 조석으로 와서 배알(拜謁)하나 그 역민(逆民)들은 천병(天兵=몽고군)들을 의지해서 그 허점(虛點)을 타고 몰래 나라를 삼키려는 음흉(陰凶)한 뜻이 있어 몽 가독을 후(厚)히 대접(待接)하면서 매일 거짓 계략(計略)으로 유혹(誘惑)하나 공(公)은 매양 좋은 계책(計策)으로서 가만히 이를 저지(沮止)시켰다.

 

이때 왕(고려 원종)은 황제(원나라 임금)를 뵈옵고 청병(請兵)을 하고 다시 돌아오니 그 때에 임연(林衍)이 거명(拒命)의 뜻을 품고 지보대(知甫大)란 사람을 시켜서  가만히 군졸(軍卒)을 이끌어 황주(黃州)에 주둔(駐屯)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신의군(神儀軍)에 명령(命令)하여 초도(椒島)에 나가게 하니 최탄과 한신 등의 무리들이 그 사실을 알고 비밀(秘密)리에 배를 준비하고 또 병사를 매복(埋伏)시켜 놓고 몽가독과 더불어 밀약(密約)하기를 "왕경(開城)에서 장차 관인(官人=몽가독을 말함)과 대군(大軍)을 죽이고 황주(黃州)로 들어가려 하니 청컨대 관인(官人)은 말로만 사냥 간다고 핑계하고 경군(京軍)의 움직이는 동태를 살피면서 목표(目標)물을 취하여서 서로 맞닿게 하면 우리들은 병선(兵船)을 이끌고 보음도(甫音島)와 말도(末島)방면으로 진공(進攻)할 것이고 관인(官人)은 군사를 이끌고 좁은 다리에 이르르면 저놈들은 오도 가도 못할 것이니 이미 그 실정(實情)을 포착해서 모두 황제께서 들으시게 한다면 왕경(王京)을능히 멸망(滅亡)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왕경(王京)을 점거하면 아름다운 여자와 보물(寶物)과 비단 등이 모두 남의 소유(所有)가 되겠습니까? 다 그대의 물건이 될 것입니다.."하니 몽가독이 기꺼이 허락(許諾)하였다.

 

그 때 영원별장(寧遠別將) 오계부(吳繼夫)의 아들 득공(得公)은 탄(坦)의 집 안채 행랑에서 주야로 서로 지킨 연고로 그 음모(陰謀)를 다 알고 밤중에 몰래 담을 넘어 들어와서 공(公)께 이 사실을 아뢰었다.  그 때 공이 말하기를 "어찌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는가?"하니 득공이 말하기를 "나의 말을 만일 믿지 못하시면 딴사람으로 하여금 비밀(秘密)히 살펴보게 하시면 가히 알 것입니다."고 말하니 공(公)이 말하기를 "내 어찌 믿지 않겠는가"하고 그 이튿날 아침 일찍이 몽가독의 관문(館門)에 나아가니 모든 군사들이 벌써 나와 있고 최탄과 한신도 기쁜 빛이 있는 것 같았다. 공(公)이 들어가서 몽가독을 만나니 몽가독이 말하기를 "객지(客地)에 나와 오래되니 심심하기 짝이 없어 사냥을 나가 즐겨 볼까 하는데 공(公)도 나와 같이 가지 않겠소"하니 공(公)이 "어느 방면(方面)으로 사냥을 가겠소" 한 즉 몽가독이 말하기를 "대동강(大洞江)을 건너서 황주와 봉주를 거처 초도까지 들어갈까 하오"라고 말하였다. 공(公)은 말하기를 "성지(聖旨)에 이르시되 '만약 대동강(大洞江)을 건너가면 법(法)에 위반(違反)된다'는 것은 관인(官人)도 또한 들었을 것인데 어째서 강을 건너려 하오"하니 몽가독이 말하기를 "몽고사람이 사냥하는 것을 일로 삼는다는 것은 황제께서도 또한 알고 계시는데 그대가 어찌 막으려하는가?"고 하자 공(公)은 "내가 그대의 사냥하는 것을 금(禁)하는 것이 아니라 강을 건너가는 것을 금할따름이오.

 

만약에 사냥을 나가고저 한다면 하필 그곳으로 가야만 즐길 수  있는가"하니 몽가독이 "만일 강을 건너가는 것이 죄가 된다면 내가 혼자 당할 것이지 그대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라 하였다. 공(公)은 다시 "내가 이미 여기에 와 있는 한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이오, 기어코 강을 건너가겠다면 모름지기 사자(使者)를 보내어 황제(皇帝)의 칙명(勅命)을 받아 오시오"하고 공(公)은 지대보(知大甫)에게 밀유(密諭)하여 그의 병졸(兵卒)들을 물러가게하니 몽가독도 공(公)의 충직(忠直)함이 천성(天性)에 뛰어남을 알고 더욱 크게 경중(敬重)히 하여 사실대로 말하되 "왕경(王京)을 멸망(滅亡)시키려는 자는 다만 최탄의 무리들 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도 있다"고 하자 공(公)이 "그가 누구냐?"고 물으니 몽가독은 "모모(某某)의 사람들이다."라 하고 사실(事實)은 비밀(秘密)로 해서 말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참소(讒訴)하는 말들이 사직(社稷)에 들어가지 못하고 최탄의 무리에 농락도 되지 않았음은 다만 공(公)의 힘이었다.

 

그 해 여름 5월이 되어서 왕이 세자와 더불어 황제의 조지(詔旨)를 받고 동경행성(東京行省)에 가서 두렌가국왕(豆輩哥國王)  조평장(趙平章)등과 더불어 대군(大軍)을 이끌고 개성(開城)에 와서 주둔(駐屯)하여 원제(元帝)의 조령(潮齡)을 선포(宣布)하고 고도(古都=개성)로 나오자 그 때 삼별초(三別抄)가 제명(帝命)을 배반(背反)하고 몰려다니며 인민(人民)을 구략(寇掠)하여 남(南)으로 항해(航海)해 가니 왕이 재신(宰臣) 신사전(申思佺)을 추토사(追討使)로 보내고 또 공(公)을 연해주현(沿海州縣)의 안무(安撫)로 명하니 이로 인하여 적군(賊軍)은 함부로 횡행(橫行)하지 못하고 바로 진도(珍島)와 여러 섬으로 내려간 연후에 추토사(追討使)의 전세(戰勢)가 불리함을 복명하니 왕이 공(公)으로써 대신케 하였다.

 

그 때 적(賊)은 이미 진도(珍島)에 웅거하여 성에 사는 백성들 중에서 물에 익숙한 자를 모아 모든 군현(郡縣)의 배들을 모조리 약취(掠取)하고 또 나주산성(羅州山城)을 공격(攻擊)하고 일부의 군병은 전주(全州)를 침공(侵攻)하니 나주(羅州)는 적에게 항복(降伏)할 의론(議論)을 하고 전주(全州)는 아직 미결(未決)이었다.  공(公)이 도중에서 이 말을 듣고 급히 전군(全軍)을 버려두고 단기(單騎=호위도 없이 단 할필의 말)로써 주야(晝夜)로 남행(南行)하여 먼저 글로써 이르되 '모월 모일에는 당당히 일만군(一萬軍)을 거느리고 전주(全州)에 들어갈 것이니 필요(必要)한 군량(軍糧)을 준비(準備)해서 기다리라'고 하니 전주(全州)에서는 그것을 회람(回覽)하고 나주(羅州)의 적들은 이를 듣고 해산(解散)해 가니 이로써 전라도지방은 적에게 함락(陷落)되지 않고 공물(貢物)을 전과 같이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공(公)이 전라도 등지에 이르자 사졸(士卒)을 모집(募集)하고 군수품(軍需品)을 준비하는데 그 때 유천우(兪千遇)의 전장(田庄)이 장사현(長沙縣)에 있었고 그 장내(庄內)에는 사람도 많으니 공(公)의 금(禁)함은 하나도 범(犯)하지 아니하고 덕(德)으로써 되갚은 것이다. 이때 전투준비(戰鬪準備)가 모두 갖추어지고 상국원수(上國元帥=원나라 원수) 아하이(阿海)와 더불어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하여  진도(珍島)와 서로 대진(大陣)하니 적(賊)이 모든 섬에서 징집(徵集)한 선함(船艦)에 괴상한 짐승의 채색(彩色)그림을 그려서 바다를 덮고 물에 비치니 그 움직임이 마치 나는 것 같아서 그 형세(形勢)를 감히 당하지 못하였다.

 

매일과 같이 서로 싸우되 적(賊)도 능히 우리를 이기지 못하고 싸울 때마다 적군이 먼저 북을 치고 돌진(突進)해 오는데 혹은 떨어졌다가 모이고 모였다가 떨어지고 하여 일진일퇴(一進一退)하며 서로 싸우기를 여러 날이 계속(繼續)되었다. 그때 수사도참지정사(守司徒參知政事)의 반급(頒給)을 배수(拜受)하였다.

 

신미(辛未=1271년)년 정월에 적(賊)과 더불어 대전(大戰)이 벌어졌는데 처음에는 적들이 군졸을 나누어서 교대로 쉬게 하더니 얼마 안 가서 전원(全員)이 배를 타고 기치(旗幟)를 모두 휘날리며 징과 북을 배(倍)로 늘리니 성중(城中)의 사람들은 노약(老弱)을 막론(莫論)하고 성 위로 올라가서 북을 치고 큰소리로 떠들며 사기(士氣)를 북돋아 주었다. 적선(賊船) 등이 같이 와 두루 돌면서 도전(挑戰)해 오니 공(公)도 또한 휘하(麾下)의 군졸(軍卒)이 앞을 다투어 전진(前進)하는데 징과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振動)하였다. 아침부터 해질 무렵까지 조금도 쉴새없이 격전(激戰)이 계속(繼續)되었는데 공(公)은 "결승(決勝)은 오늘에 있다"고 하면서 적중(賊中)으로 돌입(突入)하니 적의 배들이 포위(包圍)해서 공(公)의 배를 걸어서끌고 가는지라 배에 탄 사졸(士卒)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니 화살과 돌들이 다 떨어지고 또한 전원(全員)이 활에 맞아 일어나지도 못하는데 이미 진도(珍島)의 해안(海岸)에 다다르니 그때 적졸(賊卒)하나가 칼을 들고 우리 배에 뛰어 들어오자 우리 장군 김천록(金天祿)이 짧은 창으로 막아 역습(逆襲)을 하였다.

 

공(公)이 벌떡 일어서면서 "나는 차라리 고기배속에 장사(葬事)될지언정 어찌 적(賊)의 손에 죽으리오"하면서 바다 가운데로 뛰어들려고 하니 이때 다행히 호위사(護衛士) 허송연(許松延)과 허만지(許萬之)등이 억지로 만류(挽留)해서중지(中止)시켰다. 배 안의 사졸(士卒)들은 병창(病瘡)으로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공(公)의 이러한 상황(狀況)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다시 일어나서 재빨리 싸우니 적선(賊船)들이 모두 흩어져 가버렸다. 또 장군 양동무(梁東茂)는 몽고병과의 충돌(衝突)을 돌격전(突擊戰)으로써 구출(救出)하여 이에 위기(危機)를 벗어나게 하였다. 이때 원나라 원수 아하이(阿海)는 싸움에 겁을 먹고 배에서 내려서 막사(幕舍)로 돌아가 앉아서 보고만 있다가 또 나주(羅州)로 후퇴(後退)하고자 하거늘 공(公)이 말하기를 "원수(元帥)가 만약에 후퇴(後退)하면 그 약점(弱點)을 보이는 것이고 적(賊)이 원수(元帥)의 후퇴(後退)하는 것을 보게 되면 반드시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기세(氣勢)를 올릴 것이니 그의 강세를 누가 당해낼까? 만약에 황제(皇帝)께서 들으시고 문책(問責)을 한다면 그를 장차 무어라고 대답(對答)하겠소?"하니 원수(元帥)가 감히 물러가지 못하였고 이로 인하여 시기(猜忌)하는 마음을 품고 있더니 그 때에 반남현(潘南縣) 사람 홍찬(洪贊)과 홍기(洪機)라는 자가 거짓을 꾸며서 말하기를 "방경(方慶)이 비밀(秘密)로 적(賊)과 더불어 음모(陰謀)를 꾸미고 있다."고 하니아하이(阿海)가 즉시로 공(公)을 잡아 가두었다.

 

다루하치(達魯花赤=몽고 및 원나라의 관직 -점령지의 통치자)가 이 소문(所聞)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서 이르되 "방경(方慶)과 밀고(密告)한 자를 같이 서울(開城)로 보내면 내가 마땅히 국문(鞠問)해서 그 사실(事實)을 조사(調査)할 것이다"고 하니 원수(元帥)가 회보(回報)하기를 "왕경(王京)의 일은 그대 스스로가 주관(主管)할 것이나 군부(軍部)의 일은 내가 마땅히 임의로 처리(處理)할 것이다"고 하자 다루하치가 대노(大怒)하여 다시 사자(使者)를 보내 꾸짖기를 "지난날황제(皇帝)의 명령(命令)으로 군민(軍民)에 관한 일들은 우리 두 사람에게 맡기었는데 원수(元帥)는 황제(皇帝)의 명령(命令)을 쫒지 않을 것이냐?"고 말하니 원수(元帥)가 부득이 보내게 되었다.  다루하치가 고문(拷問)을 하여 사실(事實)을 철저히 밝히니 원고자(元告者)들은 능히 대답(對答)을 못하게 되어서 즉시(卽時)  공(公)을 석방(釋放)시켜 그 임지(任地)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이 상황(狀況)을 황제(皇帝)가 듣고 아하이(阿海)를 본국(本國=몽고)으로 소환(召喚)시키고 흔도( 篤)로써 대체하는데 따라서 홍찬(洪贊)과 홍기(洪機)를 죽이도록 조서(詔書)를 내리니 공(公)은 더욱 마음과 힘을 다하여 흔도( 篤)와 더불어 일심협력(一心協力)하여 모든 일을 같이 도모하였다.

 

5월에 진도(珍島)로 쳐들어가는데 흔도( 篤)는 서북방면(西北方面)으로부터 들어가고 홍다구(洪茶丘)는 서쪽으로부터 들어가고 공(公)은 남쪽으로부터 쳐들어가니 적(賊)은 퇴각(退却)해서 성중(城中)만을 지키는데 아군(我軍)이 일제(一齊)히 진격(進擊)하여 성을 넘어 들어가서 병력(兵力)을 다해서 치니 적(賊)은 마침내 궁지(窮地)에 빠져 해변(海邊)으로 도망(逃亡)쳐서 서로 앞을 다투어 배에 오르거늘 공(公)께서 적(賊)들이 흩어져 도망가는 것을 다시 배에 올라 북쪽으로 추격(追擊)하니 나머지는 제주(濟州)로 달아나 버렸다. 공(公)은 또 진도(珍島)로 들어가서 백미(白米) 사천석(四千石)과 재보(財寶)와 기구(器具)들을 모조리 왕경(王京)으로 실어 보내고 그 적(賊)에게 함몰(陷沒)되었던 양민(良民)들은 모두 돌려보내서 자기 업(業)에 종사(從事)하도록 명령(命令)한 후에 개선가(凱旋歌)를 올리며 돌아오니 왕(王)은 사자(使者)를 교외(郊外)까지 보내서 영접(迎接)하였다.

 

그해 겨울에 적을 토벌한 공으로 수대부중서시랑평장사(守大府中書侍郞平章事)를 더 하였다.  그 때 적들은 탐라(耽羅=지금의 제주도)에 들어가서 안팎으로 성(城)을 쌓고 그 지형(地形)이 험( )하고 견고(堅固)함만 믿고 날로 더욱 창궐(猖獗)하여져 때때로 나가서 노략질을 하여 안남(安南)까지 나가서 그 수령(首領)공유(孔瑜)를 사로잡아 가니 해변부락이 모두 피해(被害)를 입게 되었다.

 

심지어 경기도(京畿道)까지 침입(侵入)하여 도로(道路)가 불통(不通)하고 운명(運命)이 겨의 위태(危殆)로우니 왕(王)이 이를 심히 근심하여 군신(君臣)과 더불어 의논(議論)하였으나 감히 계획(計劃)을 세우는 자가 없는지라 왕(王)은 다시 공(孔)으로 하여금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삼고 다시 병졸(兵卒)과 수군(水軍) 일만여명을 훈련(訓練)시켜서 상국(上國)원수(元帥) 흔도( 篤), 다구(茶丘)아 더불어 반남현(潘南縣)에 주둔(駐屯)시키고 장차 출발(出發)코자하니 경상도(慶尙道)와 충청도(忠淸道)의 전함(戰艦)은 모두가 풍우로 인하여 키로 까불듯이 뒤흔들어 바다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이에 전라도(全羅道)의 배 1백 60척을 써서 그 해 여름 4월에 출발하여 추자도(楸子島)에 도착(到着)해서 바람을 기다려 바다를 나가다가 한밤중에 질풍(疾風)이 일어나서 지향(指向)할 바를 몰랐는데 날이 밝아오자 이미 탐라(耽羅)가 가까워졌으나 풍랑(風浪)이 소용돌이 쳐서 진퇴(進退)의 거점(據點)을 잃어버렸다.

 

이때 공(公)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歎息)하여 이르되 '사직(社稷=나라)의 안위(安危)가 이 한번 거사(擧事)에 달려 있으니 오늘의 일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는가?'고 하니 조금 있다가 풍랑(風浪)이 홀연(忽然)히 멈추어졌다.  적(賊)들은 돌모퉁이 바위틈을 이용하여 겹겹으로 복병(伏兵)하고 큰소리로 뛰어 나오며 우리 왕사(王師)에 항거(抗拒)하거늘 공(公)이 일어서서 크게  외치되 "모든 배들은 일제히 전진(前進)하라."하니 이 때 한 용사(勇士) 고세화(高世華)가 적진(敵陣)으로 뛰어 들자 모든 병졸(兵卒)들이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달려가니 적(賊)은 위세(威勢)에 눌려 중루(中壘)로 달아나기에 아군(我軍)은 모두 외성(外城)을 넘어서 중루(中壘)의 밑에 모여 불화살을 쏘면서 연기(煙氣)와 불꽃이 사방에서 일어나 적군(敵軍)은 크게 혼란(混亂)하게 되었다.

 

이때 적(賊) 가운데 투항(投降)해 온 자가 말하기를 '적(賊)의 세력(勢力)이 이미 궁지(窮地)에 빠져 각자가 도망(逃亡)쳐 가려고만 하니 입성(入城)만 하면 가히 소탕(掃蕩)할 수 있다.'고 하기에 공(公)이 급히 제장(諸將)을 지휘(指揮)하여 입성(入城)하니 부녀자(婦女子)들은 통곡(痛哭)을 하는지라, 공(公)이 이르기를 "그 괴수(魁首)는 섬멸(殲滅)하지만 위협(威脅)에 못 이겨 추종(追從)한 자는 다스리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걱정말고 두려워하지 말라."하고 그 괴수(魁首) 김윤서(金允敍) 등 6명을 잡아 길거리에서 목을 치고 두목 35명을 사로잡으니 적의 무리 가운데서 투항(投降)하는 자가 1천3백여명이나 되어 여러 배에 나누어 태워보내고 탐라(耽羅)의 원주민(原住民)들은 안도감(安堵感)을 갖고 전과 같이 살도록 하는 한편 군대(軍隊)를 주둔(駐屯)시켜 지키도록 하였다.

 

 5월에 군사(軍士)를 이끌고 돌아와서 삼견원(三堅院)에 도착(到着)하여 다시 나주(羅州)의 무리 35명의 목을 베고는  큰 잔치로 군사들을 위로(慰勞)하고 여러 주(州)의 군사를 해산(解散)시켜 고향(故鄕)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6월에 개선(凱旋)하여 왕궁(王宮)에 나아가 하례(賀禮)를 드리니 왕(王)이 잔치를 베풀어 위로(慰勞)함이 대단히 흡족(洽足)하였다. 계유(癸酉)년(1273년)에 수대사문하시중(守大師門下侍中)을 배명(拜命)하고 그 해 가을 7월에 황제(皇帝)의 부름을 받고 대궐(大闕)로 가니 황제(皇帝)가 수문장(守門將)에게 칙령(勅令)을 내려 들어오게 하여 서열(序列)을 승상(丞相)의 다음자리에 앉게 하여 어찬(御饌)을 하사(下賜)하시고 또 금안장(金鞍)과 채복(彩服)과 금은촛대(金銀錠)등을 하사(下賜)하며 그 총애(寵愛)함이 비할바 없더니 돌아올 때는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배명(拜命)되었다.

 

갑술(甲戌)년(1274년) 정월에 황제(皇帝)는 도원수(都元帥) 홀독(忽篤)과 좌우부원수(左右副元帥)를 파견(派遣)하여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라'하니 공(公)과 총관(總管) 홍다구(洪茶丘)는 전선(戰船)건조(建造)를 감독(監督)케 하였는데 만약에 그 양식(樣式)을 송만식(宋蠻式=중국 남쪽지방의 배모양)으로 한다면 경비(經費)가 막대(莫大)하고 또한 기일(期日)도 불급(不及)할까 해서 온 나라가 걱정하였다.  이때 공(公)은 동남도독(東南都督)으로서 먼저 전라도(全羅道)에 내려가서 사자(使者)를 보내서 격문(檄文)을 생략(省略)하고 동국선양(東國船樣=고려의 배모양)으로 할 것을 묻고서 전함(戰艦)을 만드는 감독(監督)을 하였다.

 

그해 6월에 충경(忠敬=고종)왕이 하세(別世)하고 충렬(忠烈)왕이 즉위(卽位)하니 공(公)은 홍다구와 더불어 추종(騶從)하여 왕경(王京)에 가서 조문(弔問)을 올리고 가을 7월에 합포(合浦)에 도착(到着)하여 9월까지 세원수(三元帥)와 더불어 전함(戰艦)을 사열(査閱)하여 사졸(士卒)들을 각 전함(戰艦)에 나누어 태우고 10월에 대마도(對馬島)로 들어가는데 왜인(倭人)들이 진(陣)을 치고 항거(抗拒)하였으나 아군(我軍)은 상륙(上陸)하여 심히 여럿을 격살(擊殺)하였다.  그리고 일기도(一岐島)를 지나서 이만도(伊蠻島)로 들어가는데 군대(軍隊)를 여러 길로 나누어서 중군(中軍)과 우군(右軍)은 이만도(伊蠻島)로 진공(進攻)하고 좌군(左軍)은 하까다(朴加多)로 향하니 왜인(倭人)의 병갑(兵甲)이 견고(堅固)하고 튼튼할 뿐 아니라 적군(敵軍)은 많고 아군(我軍)은 적으며 적군(敵軍)은 안일(安逸)하고 아군(我軍)은 피로(疲勞)하였다.  그래서 우리 군사는 사지(死地)에 빠졌으나 의(義)를 위하여 생명(生命)을 돌보지 않으므로 일당십(一當十)이라, 공(公)이 적(敵)을 대항(對抗)함에 있어 자신(自身)을 장벽(障壁)처럼 세우자 왜병(倭兵)들이 돌진(突進)하여 장검(長劍)으로써 좌우(左右)을 마주치니 그 기세(氣勢)는 탈출(脫出)할 수 없게 된 것을 공(公)이 성난 목소리로 크게 꾸짖으니 왜인(倭人)들은 놀라서 달아났다.

 

그때에 공(公)의 아들 대장군(大將軍) 흔( ))과 사위 장군(將軍) 조변(趙 )이 대장군(大將軍) 박지량(朴之亮) 장군(將軍 )조규(趙珪) 낭장(郎將) 허홍재(許洪才), 이당공(李唐恭) 김천록(金天祿) 신혁(申奕)등과 더불어 모두 힘써 싸우니 왜병(倭兵)이 어름 녹듯이 흩어지고 쓰러진 시체(屍體)는 삼대처럼 즐비하였다.  도원수(都元帥)가 말하기를 "비록 몽고(蒙古)인이 싸움에 익숙하다 해도 어찌 이보다 더 할까?"하고 감탄(感歎)하였다.  모든 군사(軍士)들이 종일(終日) 싸우다가 해가 저물어 드디어 해산(解散)하였는데 공(公)이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천리에 뻗친 군사(千里懸軍)라도 그 선봉은 가히 당하지 못한다(其烽不可當)'고 하였으니 우리의 군사는 비록 적다해도 가히 대적(大敵)을 당할 수 있다."

 

그 이튿날 다시 싸움이 시작(始作)되니 도원수(都元帥)와 몽장(蒙將)들이 모두 말하기를 "병법에 소적(小敵)은 아무리 굳세다해도 대적(大敵)에 사로 잡힌다고 하였는데 피로(疲勞)에 지친 병사(兵士)를 내세워서 날로 불어나는 적(敵)에 대하는 것은 양책(良策)이 아니니 회군(回軍)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여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게 되었다.

 

11월에 합포(合浦)에 돌아와서 향토병(鄕土兵)들을 해산(解散)시키고 잡아온 왜인(倭人)남녀 이백명과 전마(戰馬) 갑모(甲矛)등의 물품(物品)은 진소(진소=황제의 궁전)로 헌상(獻上)하고 또 남은 남녀(男女) 필마(匹馬) 갑모(甲矛)는 국왕(國王)에 진상(進上)하였다.  겨울 12월 왕(王)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장일(張鎰)을 보내서 위로(慰勞)의 말을 전하고 인해서 공(公)은 '먼저 입경(入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달에 상주국판어사대사(上柱國判御事臺事)로 전임(轉任)되고 또 이듬해에는 대조(大朝;원나라)의 제도(制度)를 피(避)하여서 광정대부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 감찰사사(匡靖大夫僉議中贊上將軍判典理監察事事)로 고쳤다.

 

병자(丙子;1276년)년 가을 9월에 또 조명(朝命)을 받고 금호부[金虎符=호랑이 머리가 새겨진 금패(金牌)로서 호부금패(虎符金牌)라고도 하며 元나라 全域을 통해 檢問檢索을 할 수 없으며 驛馬와 宿食을 받을 權利를 賦與한 특별 신분증]를 띄게 되었으니 동방(東方=고려)사람으로서 금호부를 차기는 공(公)이 처음이었다.  정축(丁丑=1277)년에는 흔도( 篤)가 군대(軍隊)를 인솔(引率)하고 염주( 州)에 주둔(駐屯)하여 왕경(王京)을 지켰다.  겨울 12월에 공(公)이 명(命)을 받고 가서 흔도를 만나니 흔도가 잔치를 베풀어 위안(慰安)하였다.  이튿날 왕경(王京)으로 돌아올 때 중랑장(中郞將) 한희유(韓希愈)와 대장군(大將軍) 위득유(偉得柔)가 서쪽 교외(郊外)까지 출영(出迎)했으나 득유와 희유는 일찍부터 사이가 좋지 못해서 두 사람은 취기(醉氣)로 인하여 사사로운 일을 가지고 싸우는데 희유가 득유를 꾸짖으니 득유가 공(公)에게 이런 사실(事實)을 고(告)하자 공(公)이 "취중(醉中)실수(失手)가 어찌 허물이 되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득유는 앙심을 품고 노진의(盧進義)와 더불어 흔도에게 참소(讒訴)하기를 "방경(方慶)은 희유(希柔)와 그 아들과 사위와 더불어 불의(不義)를 꾀하고 있다."고 하니 흔도가 입경(入京)하여 공(公)과 그 자서(子壻) 및 한희유(韓希柔) 나유(羅裕)등 군관(軍官) 수십명을 잡아 가두고 조금 뒤에 흔도가 고문(拷問)을 하다가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모두 풀어주었다.  이때 홍다구는 동경(東京)에 있다가 이를 듣고 중서성(中書省)에 들어와 고하니 홍다구를 격(檄)하여 와서 이를 문초(問招)케 하였다.

 

무인(戊寅=1278)년 정월달에 홍다구가 와서 흔도와 함께 봉은사(奉恩寺)에 자리잡고 엄중(嚴重)히 문책(問責)을 하니 홍다구는 원래 본국(本國=고려)을 해치고져 하는 자라 이러한 재앙(災殃)을 다행(多幸)으로 여겨 해독(害毒)을 하려는 것이나 공(公)은 아무런 죄(罪)가 없음으로 오래 굴복(屈伏)하지 아니하니 홍다구가 나뿐 안색(顔色)으로 성을 내며 매질을 하였으나 끝내 굴복(屈伏)치 아니하자 홍다구가 가만히 임금과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날씨가 대단히 춥고 눈비가 그치지 않으니 왕(王)도 또한 신문(訊問)하시기에 피로(疲勞)하실 것이온데 만약에 방경(方慶)으로 하여금 허물만 자복(自伏)하게 하면 죄(罪)는 한 사람의 몸만으로 그칠 것이며 법(法)은 또한 마땅히 유배(流配)를 하는 것이니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나이까?"고 하였다.  왕(王)이 이를 믿고 그 뜻을 타이르자 공(公)이 크게 노(怒)하며 말하기를 "왕(王)께서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신(臣)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충성(忠誠)을 다해서 나라를 받드는데 일찍이 두 마음을 갖은 일이 없으며 나라의 은혜(恩惠)를 입은 일도 또한 적지 않았는데 어찌 거짓 항복(降伏)으로서 국가(國家)에 후환(後患)을 끼치리요"하고는 홍다구 등을 보고 "죽일 테면 죽여라.  나는 감히 굴복하지 않겠다."고 하니 홍다구가 묵묵(默默)히 말을 못하고 바로 가 버렸다.  이튿날 공(公)을 대청도(大靑島)로 유배(流配)시키니 그 날 온 나라 남녀(男女)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울음으로 전송(餞送)하였다.  그리고 차자(次子)인 진주목부사(晉州牧副使) 흔( )도 백령도(白翎島)로 유배(流配)되었다.

 

3월에 왕(王)이 공주(公主)와 더불어 경사(京師)에서 조회(朝會)를 할 때 "방경은 아무런 죄도 없다"고 하니 황제(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방경을 위득유, 노진의(盧進義) 두사람과 더불어 연경(燕京=지금의 북경)으로 보내서 사실(事實)을 밝히게 하라.'고 하였다.  공(公)은 이들과 함께 연경으로 떠났는데 노진의는 도중(途中)에서 별안간 혀가 타서 폭사(暴死)하고 위득 는 중서성(中書省)에 나가서 진술(陳述)을 하자 도당(都堂=중앙에서 행정전반을 감독하는 기관)이 위득유의 말을 듣고 모두가 크게 웃으니 그 후 십여일에 위득유도 또한 혀가 썩어서 죽었다.  의원(醫員)을 시켜 검시(檢屍)케 하자 의원의 말이 "병인(病因)은 신경(神經)을 너무 써서 일어난 병이다."하니 이때 세상 사람들은 이르기를 "천벌(天罰)을 받아 죽은 것이다."고 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공(公)으로 하여금 '구직(舊職)시키라'고 영(令)을 내리고 왕(王)을 따라 귀국(歸國)하게 하였다.  이해 10월에 다시 중찬(中贊)이 된 뒤로 세자사중대광(世子師重大匡)을 겸(兼)하게 하니 전소(전소)를 올려 퇴직(退職)할 것을 원(願)하였으나 왕(王)이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경진(庚辰=1280년)년에 공(公)에게 원(元)나라 황제(皇帝)의 조서(詔書)로 중봉대부(中奉大夫)로서 관고려군도원수(管高麗軍都元帥)를 임명(任命)해서 이내 또다시 '일본(日本)을 정벌하라 '는 명령(命令)을 하였다.

 

그해 섣달(12월)에, 공(公)은 하정사(賀正使)를 겸해서 경사(京師)에 이르렀다.  정월 초하루 아침에 황제(皇帝)가 대명전(大明殿)에 나와서 조하(朝賀)를 받을제 승상(丞相)이 만수(萬壽)를 비는 술잔을 올리고 사품(四品)이상관은 모두 어전(御殿)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 때 공(公)은 예(禮)를 간단(簡單)히 마치시고 잔치자리에 나가니 황제(皇帝)가 온화(溫和)한 얼굴로 말을 하면서 승상(丞相)의 다음자리에 앉히시고 진수성찬(珍羞盛饌)을 하사(下賜)하여 특히 백반(白飯)과 생선국을 주면서 "고려인(高麗人)은 이런 것을 즐겨 먹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 대우(待遇)가 매우 풍성(豊盛)하였다.  인해서 3일간의 잔치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때에 승상(丞相)과 안동(安童)이란 사람은 북방(北方)에 있으면서 정부에 소식(消息)이 없다기에 공(公)이 은쟁반과 모시를 그의 부인에게 보냈더니 부인이 전어(傳語)로 말하기를 "공이 바로 귀한 재상(宰相)이 아닌가요?  승상(丞相)이 입북(入北)하고부터 국신(國信)이 두절(杜絶)되였는데 공(公)이 아니면 누가 다시 부인(婦人)을 생각해 주리까?"고 하면서 인해서 울음소리가 밖에까지 들리니 공(公)도 또한 울면서 사례(謝禮) 하였는 즉 그것은 승상(丞相)이 본국(本國)과 더불어 은의(恩誼)가 있었던 까닭이다.

 

마침내 공(公)이 귀환(歸還)하게 되어 황제(皇帝)가 흰 깃으로 만든 갑옷(白羽札甲)과 활과 화살을 하사(下賜)하고 다시 갑옷과 방패 옷을 각각 1천벌씩 하사(下賜)하며 따라서 일본(日本) 정벌(征伐)에 대한 조령(條令)을 지시(指示)하였다. 신사(辛巳=1281)년 봄 2월에 고려(高麗)로 돌아와서 이달 17일에는 성지(聖旨)를 받들고 숭문관(崇文館)에 들어가니 군대(軍隊)를 통솔(統率)할 만부장(萬夫長)과 천부장(千夫長), 그리고 여러 군관리(軍官吏)들이 차례로 와서 배알(拜謁)하였다.

 

3월 16일에 이르러 숭문관(崇文館)에 앉아서 대오(隊伍)를 정리(整理)하여 군제(軍祭)를 지내고 군기(軍旗)를 들고 진(陣)터로 가는데 승제문(承制門)으로부터 나가 용뇌(龍腦) 교외(郊外)에서 자고 18일에는 정동행중서성우승(征東行中書省右丞)인 흔도와 다구(多丘)가 경사(京師)로부터 도착(到着)할 때 황제(皇帝)가 국왕(國王)에게 명령(命令)하여 '합포(合浦)에 가서 여러 군대(軍隊)를 감송(監送)하라'고 하였고 공(公)은 먼저 의안군(義安軍)에 가서 병장기(兵仗器)를 점검(點檢)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5월 3일에 왕(王)이 합포(合浦)까지 와서 송별연(送別宴)을 하고 다음날 모든 군선(軍船)이 주성이 이르러 후풍(候風)을 타고 대마도(對馬島)에 이르렀다.

 

6월에 일기도(一岐島)에 이르러 적(敵)을 격살(擊殺)하니 물에 빠져 죽은 자의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20여 일이 지난 후에 왜인(倭人)들이 병선(兵船)으로 와서 싸우다가 패(敗)하고 달아났다.  7월 1일에 또다시 싸우는데 저들이 또 달아났다가는 돌아오고 하여 그 이튿날도 또한 이와 같았다.  두 우승(右丞)이 회군(回軍)하려는 의사(意思)로 군관(軍官)을 모아서 의논(議論)하되 "황제(皇帝)의 성지(聖旨)에는 '강남군(江南軍)과 동로군(東路軍)으로 하여금 6월 보름 전에 일기도로 모이라'하였는데 이제 남군(南軍)은 그 기일에 미처 오지 못하고 우리 군(我軍)만이 먼저 와서 대전(大戰)을 자주 해서 식량(食糧)과 병기(兵器)가 장차 떨어지게 되고 군함(軍艦)이 부서져서 물이 새니 그를 장차 어찌할까?"고 하니 공(公)이 아무 말이 없으니 십여일이 지난 후에 또 전과 같이 의논(議論)하였다.

 

이때 공(公)이 말하기를 "성지(聖旨)로 내리신 3개월 분 양곡(糧穀)이 아직 한달 분은 남아 있는데 이제 남군(南軍)의 실기(失期)한 것은 법(法)으로서 논(論)해야 할 것이나 또 한 병(兵)이란 것은 흉기(凶器)와 같은지라 황제(皇帝)가 고르지 못하더라도 남군(南軍)이 와서 합세(合勢)하여 공격(攻擊)하면 반드시 섬오랑캐들을 멸망(滅亡)시킬 것이다."고 하니 모든 장군(將軍)들이 감히 다시 말을 못하였다.  이달에 강남(江南)의 범우승(范右丞)과 이좌승(李左丞)이 정군 십여만(正軍十餘萬)과 지원군 5천명으로서 대중선(大中船) 삼천소(三千 )와 소선(小船) 6천으로 내박(內泊)하고 억센 파도(波濤)를 건너온 사자(使者)가 와서 하는 말이 "청컨대 이곳을 떠났다가 전군(全軍)이 합세(合勢)하여 하륙(下陸)하자"고 하니 행성(行省)도 이를 따르기로 하였다.

 

8월 1일에 큰 바람이 불어 몽한군(蒙漢軍)과 남군(南軍)의 전함(戰艦) 과반수(過半數)가 부서지고 또 흩어져 버리고 해서 다시 싸우지 못하고 이내 회군(回軍)을 하게 되니 그 군졸(軍卒) 가운데 배가 부서져서 육지에 있는 자를 공(公)이 영(令)을 내려 병기(兵器)와 군마(軍馬)를 버리게 하고 각 배에 나누어 태워서 돌아오니 총계(總計)가 1천7십6명이었다.  8월에 합포로 돌아와서 군(軍)을 해산(解散)시켜 고향(故鄕)으로 돌려보냈다.

 

이듬해 가을 7월에 또 왕(王)에게 전문( 文)을 올려 퇴임(退任)할 것을 청했더니 계미(癸未=1283)년 겨울 12월에 추충정난 정원공신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推忠靖難定遠功臣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해서 퇴임(退任)치사(致仕)케하고 을미(乙未=1285)년에 와서는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을 봉(封)하시고 식읍(食邑)1천호에 식실봉(食實封)삼백호(三白戶)를 받으셨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충직(忠直)하고 신의(信誼)가 돈후(敦厚)하며 기량(器量)이 크고 식견(識見)이 넓어서 사소(些少)한 일에 구애(拘碍)되지 않으며 엄(嚴)하고 굳세고 과묵(寡默)하여 비록 자질(子姪)들이라도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박식(博識)하고 규범(規範)이 있어 일을 결단(決斷)함에 백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으며 서도(書道)는 가전(家傳)한 법(法)이 있고 시(詩)에도 또한 능(能)하여 기골(奇骨)이 보통이 아니어서 추위나 더위에도 병(病)이 없고 잠이 적으며 늙으셨어도 머리가 희지 않았다.  자신(自身)을 살펴서 근검하고 낮에는 잠시도 눕지 않으셨으며 세수할 때에는 한 사발 물을 더 쓰지 아니하셨다.  벗들을 잊지 않고 상사(喪事)가 나면 바로 가서 조문(弔問)하며 의식(衣食)은 화려(華麗)함을 배척하였으며 손님이 오면 친소(親疎)으 구별(區別)없이 대접(待接)을 극진히 하고 평생(平生)에 임금의 실책(失策)은 말하지 않았으며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퇴관(退官)해 계셔도 언제나 걱정하시고 큰 잔치가 있으면 반드시 초청(招請)을 받아 가시며 큰 회의(會議)가 있으면 반드시 공(公)을 불러 의논(議論)하였고 매년(每年)정초(正初)에는 공경(公卿)과 장상(將相)들이 모두 먼저 와서 배례(拜禮)하였다.

 

병술(丙戌=1286)년에는 조부(祖父)께서 애육(愛育)해 주신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휴가(休暇)를 얻어 성묘(省墓)하실 때 왕(王)이 막내아들(季子) 고공정랑(考功正郞) 순(恂=문영공)을 보내서 태백산(太白山)에 제고(祭告)하니 호위(護衛)하는 공경(公卿)들이 떠나는 길에 장막(帳幕)쳤다. 아마 분영(墳瑩)에 참배(參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향당(鄕黨)의 친구들을 위해 칠 팔일을 머무는데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가을 일철이 등장(登場)하여 인력(人力)이 부족(不足)한데 어찌 내가 오래 머물러 방해가 되게 하리오!'하고 가마를 명하여 돌아왔다. 89세에 병환(病患)으로 본댁(本宅)에서 돌아가시니 임종(臨終)시까지 아품이 없이 조용히 앉아서 돌아가시니 유언(遺言)에 따라 안동(安東) 조부(祖父)산소(山所)근처에 장사(葬事)하게 되었다.

 

영구(靈柩)가 떠날 때는 삼관녹사(三官錄事) 80여명이 모두 소복(素服)으로써 제사(祭祀)를 드리고 울음으로써 보내는데 그 때 공(公)을 미워하는 간신(奸臣)들 무리의 모사(某事)로 예장(禮葬)을 치르지 못하여 왕(王)이 또한 후회(後悔)하였고, 충렬왕(忠烈王) 33년 정미(丁未=1307)년 6월 14일에 왕(王)이 영지(令旨)를 내려 이르되 " 고 상락공 김방경(故 上洛公 金方慶)은 공(功)이 많은지라 대려(帶礪=黃河의 띠(帶)같이 작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낮아지도록 오래라는 뜻)와 같이 잊어버리기 어렵다."하고 그의 벼슬을 선충협모 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追贈)하고 충렬(忠烈)이라 시호(諡號)를 내리시고 왕명(王命)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충렬공(忠烈公)의 특수(特殊)한 공로(功勞)와 특이(特異)한 업적(業績)은 해와 별처럼 밝게 국사(國史)에 실려 있으니 옛 사람의 공로(功勞)와 업적(業績)이 저와 같으나 그의 자손(子孫)들에 와서 능히 계승하지 못하고 묻혀 버려서 세상에 듣기지 못한 것이 많더니 공(公)의 손자(孫子) 추성 보리동덕 익찬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복창부원군(推誠輔理同德翊贊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福昌府院君=永煦)의 집에 공(公)의 행장(行狀)이 비장(秘藏)되어 있으나 해가 오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써서 그 근본(根本)을 잊지 않게 했음이 대개 이와 같고 또한 자손(子孫)들에게 가히 공(公)의 남기신 기풍(氣風)과 공적(功績)이 나라와 더불어 모두 빛나서 백세(百世)을 두고 쇠(衰)하지 않을 줄 아노라.지정 십년 경인(至正 十年 庚寅=忠烈王 2年=1350年) 2月

 

광정대부 검교 도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안산군 안진(匡靖大夫 檢校 都僉議參理 禮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安山君 安震)이 끝에 적음(跋) 또한 책이 있으니 김감사 덕룡(金監司 德龍) 이 기도(箕都=평양)에서 인출(印出)해서 반포(頒布)한 것이다. 그 글을 본 즉 이것과 틀린 바 없으니 이제 아울러 쓰게 되면 중첩(重疊)이 됨으로 단지 그 발미(跋尾)만을 아래에 부기(附記)하는 바이다

후손 구정(後孫 九鼎)은 삼가 기록함(謹識)

 

상락공(上洛公)의 오대손(五代孫) 김군(金君) 명리(明理=문온공의 子)가 이 도(道)를 지나다가 고향(故鄕)인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에 와서 내게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의 행장(行狀)이 집에 있으나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해 대유(大儒)에게 물어 간행(刊行)코자 하나 이럭저럭 하다가 미처 성취(成就)하지 못했으니 당시(當時)의 큰 공로(功勞)와 뛰어난 업적(業績)을 후세(後世)에서 어떻게 알리요?"하고 하였다.  나는 다행(多幸)이 족질(族姪)이 고향에 있음으로 해서 판관 한군 종우(判官 韓君 宗祐)와 더불어 그 말에 감동(感動)되어 그 원고(原稿)를 대유(大儒)인 의정부 찬성사(議政府 贊成事)를 지내고 퇴임한 교은(郊隱 ) 정공 이오(鄭公 以吾)에게 물었더니 그 답서(答書)에 말하기를 "보내온 상락공 행장(上洛公 行狀)은 창연(蒼然)한 노대가(老大家)가 쓴 것이다.  좁은 소견(所見)이나마 병중에 마지못해 십여자(十餘字)를 더 써넣었으니 참람(僭濫)하지나 않을까?  또한 끝에 와서 오른쪽 수족(手足)의 병으로 전망후실(前忘後失)이 되니 어찌 감당(勘當)할까?"라고 하니 이것이 시정(是正)할 수 있는 증험(證驗)이다. 그래서 다행(多幸)히 한군(韓君)은 해자(楷字)로 청서(請書)해서 공장(工匠)을 모집(募集)하여 출간(出刊)하니 광참(狂 )함을 잊은 것이다.

 

영락(永樂)19년 신축(辛丑=세종3년=1421)년 10월   가선대부 판안동대도호부사(嘉善大夫 判安東大都護府事) 대영 최개(大寧 崔開)가 말편(末篇)에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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