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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충렬공 묘지석 및 복제본, 탁본 소개

가. 충렬공 묘지석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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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작 연대 : 1300년 9월

    2)발굴일시 : 2009. 4. 19. 오전 11시 49분

    3)발견 위치 : 경북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 능골 산19-1번지. 충렬공 묘소 내

    4)찬자 : 이진(李王眞)-전 정헌대부 밀직사 좌승지 판비서시사 문한학사 충사관 수찬관 지제고(前 正獻大夫密直司左承旨判秘書寺事文翰學士充史館修撰官知制誥)

    5)제원

          재질 : 오석(烏石)   

          서체 : 해서

          높이 : 805mm

          폭   : 620mm(상단, 중간, 하단 동일)

          두께 : 30mm

          귀접이 부분(왼쪽) : 75mm(그림의 ②부분)

          귀접이 부분(오른쪽) : 90mm(그림의 ③부분)

          귀접이 부분의 높이 : 42mm(좌우 동일)

          귀접이 제외 직선 부분 : 510mm(그림의 ①부분)

          외선과 내선 사이의 폭 : 부동(不同, ④부분)

   6)발굴자 : 안동김씨 대종회.

   7)발굴 기술 제공자 : 안동 한국 국학진흥원

   8)상기 사진 출처 : 안동 한국 국학진흥원

   9)발굴 후 소장처 : 안동의 학국 국학 진흥원(발굴 즉시 대종회에서 위탁 관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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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당시 촬영 묘지석>

 

   <묘지석 복제본과 탁본> (2009. 7. 30. 항용(제) 제공)

       1. 제작처 : 안동 한국 국학진흥원 (묘지석 보관처)

       2. 제작 : 2009. 7.  총 4개 제작

       3. 재질 : 특수 합성재질로 제작

       4. 보관처 : 충렬공 묘소, 대종회 사무실 등 4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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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탹본>

 

<묘지석 발굴기> (2009. 4. 29. 사진-발용(군), 글-윤식(문) 제공)

 

06:55분 능골로 들어오니 벌써 음수재 앞마당이 요란하다. 참석자들은 대략 30여 명이 넘어 보였다. 충렬공 묘소 사초 행사는 안동종친회에서 08:00시 정각 고유제를 시작으로 이곳 풍속에 따라 진행되었다.

 

     ■ 산신제

        헌관 : 장수

        독축 : 동수

        집사 : 재은, 재영

     ■ 고유제

        헌관 : 광회(대종회 부회장. 안동종친회장)

        집례 : 재영(대종회 이사. 익원공파 부회장)

        독축 : 봉수

        집사 : 동수,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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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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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공 묘소 사초행사 고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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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초 행사에 참석한 종인들.

고유제에 이어 남응 대종회장의 인사말씀, 태운 사무총장의 작업방법 안내 등이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대종회장께서는 먼 길을 마다않고 참석한 종친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뒤 오늘 행사가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는 뜻을 밝혔다. 또한 안동종친회 용준 사무국장은 충렬공 탄신 800주년 준비작업을 설명한 뒤 전 종인의 참여 등을 부탁하였다. 사초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서울과 인천, 수원 등 수도권과 충북 오창, 안동, 의성, 대구 등지에서 종인들이 속속 도착해 참석 인원이 60여 명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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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사말씀 중이신 대종회장.

한편, 이 자리에는 한국국학진흥원의 권진호 책임연구위원(목판연구소장), 김형수 책임연구위원(유교문화박물관 국학자료실장), 김경희 씨 등 3명이 입회하여 사초 행사를 참관하였다.

충렬공 묘소로 올라가는 지형이 매우 가팔라 포크레인이 묘소 인근으로 올라오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재직사 뒤쪽은 너무 경사가 심해 포크레인이 거의 충렬공 묘소 부근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가서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 쪽 골짜기로 다시 올라와야만 했다. 그러느라 10:10분경에야 진입로를 확보해 10:15분부터 작업이 시작되었다.

태운 사무총장과 작업 인부들이 작업방법을 논의한 뒤 10:20분부터 탐침봉을 찔러 가며 조심스럽게 작업을 시작하였다. 대종회 창립 직후인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 사이에 대종회 주관으로 충렬공 묘지석을 발굴하여 탁본을 하고 복사본을 제작한 다음 다시 묘소 인근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왔기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주관하셨던 분들이 타계하시고 한 분만 생존해 계시는데 고령과 노환으로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아무도 그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상석을 중심으로 혼유석과 봉분 등 여러 곳을 탐침봉과 삽으로 파면서 찾아보았으나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모두들 긴장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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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탐침봉을 이용해 묘지석을 찾는 종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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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초작업을 참관 중이신 어르신들. 왼쪽부터 남응 대종회장, 관묵 전 대종회 사무총장, 상천 제학공파종회 회장, 재호 종친(문), 광도 종친(문온공파 종손)

 

작업인부와 여러 명의 종인들이 한참 동안 여러 곳을 탐색한 뒤 드디어 봉분을 중심으로 묘지석을 찾기 시작했다. 11:49분 드디어 고대하던 충렬공 묘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묘지석은 봉분 전면을 향해 세워진 형태로 모셔져 있었다. 혼유석 바로 뒤쪽으로 지표면에서 봉분 안쪽으로 정확히 1m 깊이였다. 짧은 감탄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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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공 묘지석 출토 장면. 혼유석 뒤쪽으로 봉분 1m 깊이에 세워서 모셔져 있었다.

 

10:55분 묘지석 전면의 흙을 걷어내고 사진촬영을 실시하였다. 11:16분 묘지석을 조심스럽게 들어내 상석 앞으로 옮긴 다음 후속작업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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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공 묘지석. 자획이 매우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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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분 앞으로 묘지석을 옮기는 종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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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지석이 모셔져 있던 위치.

 

충렬공 묘지석은 이번이 3차 발굴이다. 제1차 발굴은 조선 중기에 처음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제2차 발굴은 대종회 창립 직후인 1969년과 1971년 사이라고 한다. 이때, 앞에 언급한 것처럼 충렬공 묘지석을 보고 복사본을 제작해 현재까지 대종회에서 보존하고 있으며, 탁본 1매도 대종회 서고에 보관 중이다. 이로써 충렬공 묘지석은 제3차 발굴인 셈인데, 이 날 묘지석 외에는 자그마한 청자 파편 두어 점과 토기 편 1점 외에는 수습된 것이 없다.

충렬공 묘지석은 문영공(휘 순) 묘지석처럼 양쪽 상단 두 부분을 비스듬히 다듬은 귀접이 형태이다. 앞면에만 해서체로 정교하게 글자를 새기고 뒷면은 글자가 발견되지 않았다. 행(行)과 행 사이에는 머리카락처럼 가는 실선을 그었으며, 그 사이에 비교적 작은 글자를 정교하게 새겼다. 글자는 마치 방금 새겨 넣은 듯 자획의 삐침 등이 손을 벨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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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공 묘지석. 오석에 해서체로 묘지문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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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공 묘지석(부분). 3째줄에 충렬공께서 개성 "백목동 앵계리에서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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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지석 실측

 

     ■ 충렬공 묘지석 제원

         재질 : 오석(烏石)

         서체 : 해서

         높이 : 805mm

         폭   : 620mm(상단, 중간, 하단 동일)

         두께 : 30mm

         귀접이 부분(왼쪽) : 75mm(그림의 ②부분)

         귀접이 부분(오른쪽) : 90mm(그림의 ③부분)

         귀접이 부분의 높이 : 42mm(좌우 동일)

         귀접이 제외 직선 부분 : 510mm(그림의 ①부분)

         외선과 내선 사이의 폭 : 부동(不同, ④부분)

 

묘지석 뒷면에는 제2차 발굴 당시 주관하였던 종친들 이름을 적은 것으로 보인다. 먹으로 글자를 적었는데, 판독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일부 글자는 매우 희미해 확인하지 못하였다. 연도가 ‘1979년’인 것으로 보아 묘지석을 다시 안장한 시기로 추정되는데, 발굴한 뒤 한동안 대종회에서 보관한 것인지는 현재로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 묘지석 뒷면 먹글자

         서기 1979년 6월 11일

         후손 昌植 元榮 崙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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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지석을 음수재로 옮기기 직전 묘지석을 살펴보고 있는 은회 종친.

 

이후 현장에서 묘지석 앞면을 촬영하고, 11:45분 음수재로 옮겨서 탁본 3매를 떴다. 한편, 대종회장과 사무총장, 그리고 한국국학진흥원의 관계자 3인 등은 묘지석 기탁과 보존 등에 관한 논의를 가졌다. 현재 충렬공 묘지석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가기탁 중인데, 대종회와 한국국학진흥원이 구체적인 세부 협의를 논의하는 중이다. 묘지석 출토 이후 참석 종인들은 음수재로 내려와 점심을 먹은 뒤 13:05분 평토제를 올리고 태운 대종회 사무총장, 재호 종친(문) 등 일부 종인과 작업 인부만 남고 삼삼오오 귀가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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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지석 탁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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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공 묘지석 탁본. 행과 행 사이에 머리카락처럼 가늘게 새긴 실선이 너무나 생생해 감탄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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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토제

 

이번 사초 행사 및 묘지석 출토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교훈을 주었으며, 향후 유사한 사례에는 더욱 철저한 준비가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이상 충렬공 묘소 사초 및 묘지석 출토에 대한 보고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나. 복제본

   1) 제작일시 : 1979년 경(탁본은 1979. 1. 4. 묘지석을 발굴하여 제작)  

   2) 제작자 및 서자(書者): 金倫會(안렴사공파. 전 대종회 부회장)

   3) 제작 내용 : 1979년 1월 4일, 충렬공 묘지석을 탁본한 후 실제와 똑같은 규모로 오석에 새겨 쓴 복제품임.

   4) 규모 : 60cm(가로), 84cm(세로), 3cm(두께)      

   5) 소장처 : 안동김씨 대종회 사무실 및 서고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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