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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는 위수(渭수), 안렴사공(휘 사렴)의 후손. 환(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휘 종손(宗孫)이고, 아버지는 오위부장(五衛副將) 성(城)이며, 어머니는 임치(任治)의 딸이다.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1506년(중종1) 별시문과(別試文科) 에 병과(丙科)로 급제, 홍문관정자에 임용되었다. 이어서 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12년 병조좌랑에 올랐다. 1521년 제용감정(濟用監正)이 되어서는 재물관리를 철저히 하였고, 이어 해주목사가 되어 공부(貢賦)를 탕감하여 민생을 안정시켰고, 형옥(刑獄)을 공평히 처리하여 도내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인근 고을의 수령 중에서 사욕을 취하고자 하여도 김공망이 알고 있다면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5년 동안 선정을 베푼 뒤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양사(兩司)의 벼슬을 거쳐 목사(牧使)에 올랐으며,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각종 역사 자료 소개> 1. <황해도지> (1982.1) 기록-부용당 개건 내용 (2003. 11. 7. 주회(안) 제공) *芙蓉堂 : 황해도청 뜰에 있는 海西 8경의 하나다. 조선조 연산군 6년 목사 尹哲과 판관 鄭子芝가 창건했고, 중종21년 목사 ★金公望이 개축하면서 堂을 연못 안에 지었다. 연꽃이 활짝 피는 여름에는 그 淸楚한 모습이 물에 비치어 더욱 아름답다.
도청앞 뜰안에 있는 芙蓉堂은 연산군 6년에 목사 尹哲, 판관 鄭子芝가 지었고 25년 후인 중종21년에 목사 ★金公望이 개건했다. 건축의 규모가 宏大(굉대)하고도 優雅(우아) 典麗(전려)하여 韓--- 부용당이 세상에 더욱 널리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의 일이었다. 즉 왜란때 의주로 피난갔던 선조는 서울이 수복된 뒤에도 還都할 마음이 내키지 않아 해주에 들러 이 부용당에서 1개월 여 머루는 것을 비롯, 여기서 멀지않은 州民 집에서 선조의 손자 인조가 탄생하는 등 해주가 왕실, 정부와 깊은 인연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2. <林下筆記>내의 부용당(芙蓉堂) 기록 내용 (2003. 8. 20. 주회(안) 제공)
* 堂在海州客館西 牧使★김공망改建 ★송시열撰記 (林下筆記 : 李裕元(1814~1888)) *<林下筆記(奎4916)> : ★李裕元(1814~1888)이 隨意·隨錄한 것을 總集한 雜著. 筆寫本으로 著者의 여러 著述 중에서도 代表的인 것이다. 1871年(高宗 8)에 그의 寓居地인 天摩山 嘉梧谷 林下廬에서 脫稿하였다는기록으로 보아 이 책은 그가 宦海의 바쁜 생활속에서 틈틈이 써두었던 수록류를 한데 모아 이때에 와서 成冊한 것으로 보인다.
3. 각종 자료 종합 (2003. 8. 20. 주회(안) 제공)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출신으로서 사림계(士林系) 인물(人物)이다. ○1506년(연산군 12)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가 된 뒤, 성균관 전적(典籍)과 육조(六曹)의 낭관(郞官)을 두루 거쳐, 정언(正言) · 지평(持平) 등 사헌부 · 사간원의 요직인 청직(淸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중종 6년 (1511) 김공망(金公望)을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지평 ★김희수(金希壽)와 정언 김공망(金公望)이 소격서(昭格署)와 문계창(文繼昌)·홍경주(洪景舟)·허지(許遲)·조현범(趙賢範)·조준(趙俊)·심의(沈義)·이성언(李誠彦)·강태수(姜台壽)의 일을 논하고, 김공망이 또 오결(吳潔)의 일을 아뢰었다. 【사신은 논한다. 강태수가 뒤에 공조 좌랑이 되었을 때 아무도 논한 자가 없었는데, 이는 세력의 융쇠(隆衰)가 있었음인지 국법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걸핏하면 법을 고치고 형세에 따라 상벌(賞罰)하니, 이는 동방 말세의 일이다. 슬프다.】 또 군직(軍職)의 쓸모없는 관원으로서 녹을 받는 자를 도태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1512년 병조좌랑에 올랐다. ○중종 10년 (1515) ★김희수(金希壽)를 장령으로, 김공망(金公望)·채세걸(蔡世傑)을 지평으로, 최중연(崔重演)을 헌납으로, 이언호(李彦浩)·임추(任樞)를 홍문관 교리로, 민수원(閔壽元)·김인손(金麟孫)을 정언으로 삼았다. 조강에서 지평 김공망 등이 강릉의 풍속과 사치를 금하도록 아뢰다. 지평 김공망(金公望)이 아뢰기를, “강릉(江陵)은 풍속이 강한하고 품관(品官)이 모두 강성하기 때문에 수령이 제어하지 못하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품관이 자기의 사사로운 노여움으로, 관노(官奴)·인리(人吏)들에게 징속(徵贖)하되 법대로 하여 자기 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진상하는 물건을 빼앗거나 역마로 사물(私物)을 수운하니, 풍속의 방자하고 사나움이 이보다 심함이 없습니다. 청컨대, 새 관찰사가 배사(拜辭)할 때에 각별히 전교하시어 금하게 하소서.” ○중종 13년 (1518) 장령 ○중종 14년 (1519) 판사 ○1521년 제용감정(濟用監正), 내자시 정이 되어서는 재물관리를 철저히 하였고,
○이어 해주목사가 되어 공부(貢賦)를 탕감하여 민생을 안정시켰고, 형옥(刑獄)을 공평히 처리하여 도내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인근 고을의 수령 중에서 사욕을 취하고자 하여도 김공망이 알고 있다면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5년간의 지방관 임기를 마친 후 신병(身病)으로 사직했다가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양주사곶(蛇串: 남양주 퇴계원면 퇴계원리 山74-1) 임좌이며, 묘갈은 이암 송인 문, 김이 서, 김무 전<대동금석서 대동금석속목 p51> 여성군 송인 찬, 자 이 서병전<안렴사공파세보>이다. ○배위(*주1) 경주이씨(성현의 외손녀) 슬하에 4남 1녀를 두셨는데 장남은 ★순(淳)이시며 종사랑(從仕郞: 문관 주사)을 지내셨으며 앞서 세상을 떠나셨다. 차남은 곧 ★이(삼수변伊)이신데 현풍현감(玄風縣監: 현풍고을 원님, 면장)을 지내셨고, 三男은 ★서(삼수변筮)이신데 부사직(副司直: 무관직 소령)과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 노동청 사무관)을 지내셨으며, 四男은 ★준(浚)이시며 벼슬은 만호(萬戶: 외관직 무관, 대령)이셨다. 따님 한 분은 습독(習讀: 훈련원 무관) ★조섬(趙金+舌)에게 출가하셨다. <김공망 묘갈명 (송인 찬, 김이 서병전)>
*주1 : 배위 경주이씨는 <전의이씨>의 오기로써 현재 해 당 파종회에서 정정 작업을 준비중에 있다.(편집자 항용(제) 주)
4. 국역 국조인물고_김공망(金公望) (2004. 5. 12. 윤식(문) 제공)
▲출전 : 국역 국조인물고 제3집 93쪽~95쪽 목사(牧使) 묘갈명(墓碣銘) 송인(宋寅) 지음
공의 휘(諱)는 공망(公望)이고, 자(字)는 위수(渭叟)이며, 안동 김씨(安東金氏)로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25대손이다.
증조(曾祖) 증조(曾祖) 환(丸)은 승문원판교(承文院判敎)이고, 조(祖) 종손(宗孫)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고(考) 성(城)은 부장(部將)으로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별좌(別坐) 임치(任治)의 딸에게 장가들어 성화(成化) 임인년(壬寅年 1482년 성종 13년)에 공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일찍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으나 스스로 힘써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워 정덕(正德) 병인년(丙寅年 1506년 연산군 12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ㆍ주서(注書)가 되었으며,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옮겼다가 승문원 교검(承文院校檢)ㆍ공조 좌랑ㆍ형조 좌랑ㆍ호조 좌랑ㆍ예조 좌랑ㆍ병조 좌랑을 거쳐 재차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있다가 들어와 공조 정랑이 되었다가 형조 정랑ㆍ예조 정랑ㆍ사헌부 지평으로 바뀌었고, 훈련원(訓練院)ㆍ봉상시(奉常寺)ㆍ상의원(尙衣院)ㆍ군기시(軍器寺)의 첨정(僉正), 사복시(司僕寺)ㆍ선공감(繕工監)의 부정(副正)을 거쳐 제용감 정(濟用監正)으로 승진하였다.
공이 무릇 벼슬하면서 일에 임하여 정성과 마음을 다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원대한 인물이 될 줄을 알았으며, 3년 동안 구임(久任)하기에 미쳐서는 조정의 논의가 공은 장관(長官)에 합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공이 살 집을 지을 때 어머니를 위하여 별도로 북당(北堂)을 지어 봉양(奉養)하는 곳으로 만들려 하였었는데, 공의 형 김공석(金公奭)이 보성 군수(寶城郡守)로 체직(遞職)되어 봉양하다가 떠났으므로, 공이 즉시 청원하여 나주 목사(羅州牧使)가 되어 그 가까움을 기뻐하며 정성을 거의 다하려다가,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어머니가 병이 들었다는 말을 듣고 지름길로 달려가 모시며 보살피다가 상사(喪事)를 당하였는데, 바로 정덕 신사년(辛巳年 1521년 중종 16년)이었다. 공이 집상(執喪)하면서 예절을 극진히 하였다.
가정(嘉靖) 계미년(癸未年 1523년 중종 18년)에 상복(喪服)을 벗고 군자감(軍資監)과 장악원(掌樂院)의 첨정(僉正)이 되었으며, 조금 있다가 사도시 정(司導寺正)으로서 외직으로 나가 해주목사(海州牧使)가 되었는데,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공평하게 하여 원한을 풀어주고 간교한 자는 꼼짝 못하게 하자 한 도(道)가 바람에 나부끼듯 따랐다. 그러자 근방의 고을 수령으로 의롭지 못한 짓을 하려던 자가 사사로이 서로 알리고 경계하면서 혹시라도 공이 알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5년 동안 있다가 병으로 사직(辭職)하고 돌아와 무자년(戊子年 1528년 중종 23년) 7월 계미일(癸未日)에 세상을 떠났는데, 춘추(春秋)가 47세였다. 9월에 양주(楊州)의 치소(治所) 동쪽 사관(蛇串)의 임좌 병향(壬坐丙向)의 터에 장사 지냈다.
공의 사람됨이 강직하여 지조를 굳게 지켜 구차히 화합하지 않아서 세속을 따라 그들이 하는 대로 순종하기를 즐겁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었는데, 그가 서로 허여하는 자는 반드시 명망이 있기가 참찬(參贊)인 문절공(文節公) 조원기(趙元紀) 같은 분이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공의 배위(配位) 숙인(淑人) 이씨(李氏)는 경주(慶州)의 명망 있는 집안으로, 증조(曾祖)인 사화(思和)는 부사(府使)이고, 조(祖) 익배(益培)는 좌랑(佐郞)이며, 고(考) 복형(復亨)은 주부(主簿)이고, 외왕부(外王父) 성현(成俔)은 예조 판서(禮曹判書)이다.
숙인이 홍치(弘治) 경술년(庚戌年 1490년 성종 21년)에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자애로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는데, 시집오게 되어서는 시어머니를 효도로 섬겼고 동서간에는 화기(和氣)로 대처하였으며, 친족에게는 긍휼하고 이웃에게는 화목하였으며 은혜로 종들을 어루만졌다.
제사를 받듦에는 그 정성을 다하였고 여공(女工)을 다듬어 나감에 있어서는 그 정교함을 극진히 하였으며, 평상시에는 채색(彩色)의 옷을 입지 않았고 음식을 구비하지 않았으며, 말을 꾸미지 아니하였고 얼굴빛은 사납게 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덮은 이불이나 입은 옷은 반드시 직접 빨면서 자부(子婦)나 여종이 그 수고로움을 담당하겠다고 청원하여도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갑자년(甲子年 1564년 선조 원년) 3월 기묘일(己卯日)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享年)이 79세이다. 김이 등이 관[櫬]을 부여잡고 돌아와 6월 임오일(壬午日)에 공의 묘소에 부장(附葬)하였다.
4남 1녀를 두었으니, 4남 중 순(淳)은 종사랑(從士郞)인데 먼저 죽었고, 다음이 바로 이(洢)인데 현풍 현감(玄風縣監)이며, 다음인 운(沄)은 부사직(副司直)이고, 다음인 준(浚)은 만호(萬戶)이다. 딸은 습독(習讀) 조섬(趙銛)에게 출가하였다. 종사랑은 2남 2녀를, 현풍 현감은 2남 1녀를, 부사직은 3남 3녀를, 만호는 1남 1녀를 낳았고, 외손(外孫)은 1남 5녀이며, 증손(曾孫) 또한 약간 명이다.
나 송인이 현풍 현감과는 서로 알고 지낸 지가 대체로 오래 되었는데, 어느 날 상복(喪服) 차림으로 와서 묘갈문(墓碣文)을 청하기를, “그대의 선군(先君) 또한 우리 아버지를 아시는 터였다.” 하므로, 송인이 사양하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 가장(家狀)을 추려서 명문(銘文)을 지었는데, 명은 다음과 같다.
의지는 굳세고 기상은 높아, 마치 수레바퀴가 방정(方正)하게 구르는 듯한데, 어찌 두루 다니는 것을 이롭게 여기랴? 수명이 길지 않았던 것은 그 허물 다시 누가 감당하리, 배위가 매우 훌륭하여 집안에 감춰진 상서 있도다. 자손 중에 현량(賢良)한 이 많으니 장차 오래도록 더욱 번창하리로다. 이렇게 돌에다 문장을 새겨 영원토록 빛나게 하도다.
5. 목사공 묘갈명 소개 (2005. 2. 13. 주회(안) 제공)
출전 : ?(이)庵先生遺稿 卷之八文續集二 墓碣銘
海州牧使金公墓碣銘
公諱公望。字渭?。安東金氏。新羅敬順王二十五世孫也。曾祖丸。承文判校。祖宗孫。司憲監察。贈戶曹參議 考城部將。贈兵曹參判。寔娶別坐任治之女。以成化壬寅生公。自幼聰敏。蚤喪父而能自勵。受學於朱溪君深源之門。正德丙寅。登文科。由承文正字爲注書。遷成均典籍。歷承文校檢, 工刑戶禮兵曹佐郞。再爲正言。以江原都事。入爲工曹正郞。改刑曹禮
曹司憲持平。歷訓鍊奉常尙衣軍器僉正, 司僕繕工副正。陞濟用正。公凡居官?事。竭誠?慮。人知爲遠器。及是。久任三載。廷議謂公合於長官故也。初公營宅居。而爲母氏別構北堂。擬作奉養之所。適公之兄公奭爲寶城郡守。及奉而行。公卽乞得羅州牧使。喜其便近。庶盡其情。未下車。聞母氏?疾。經赴省侍。旣而丁憂。是正德辛巳歲也。公執喪盡禮。嘉靖癸未。服?。爲軍資掌樂僉正。尋以司?正。出牧海州。賦薄刑平。?伸姦伏。風動一道。傍近邑宰有欲爲非義者。私相告戒。恐公之或知也。居五載以病辭還。戊子七月 癸未。易?。春秋四十七。九月。?于楊州治東蛇串壬坐丙向之原。公爲人亢直耿介。不肯隨俗府仰。故人多不喜。而其所相許者。則必有名。如參贊趙文節公元紀。其一也。公配淑人李氏。慶州望族(*주1)。曾祖思和。府使祖益培。佐郞。考復亨。主簿。外王父成俔禮曹判書。淑人生于弘治庚戌。天性慈仁勤儉。及?而歸。事姑孝。處??和。恤族睦隣。恩撫婢使。奉祭祀盡其誠。治女紅極其精。居常服不彩。食不備。言不?。色不?。所御衣衾。必親漱澣。子婦女?。請任其勞。皆不許。甲子。隨子?之任所。隆慶戊辰三月己卯。疾終。享年七十九。?等扶?以還。六月壬午。?葬公塋。有四男一女。男淳。從仕卽。先歿。次卽?也。玄風縣監。次?。副司直。次浚。萬戶。女適習讀趙?。從仕生二男二女。玄風二男一女。司直三男三女。萬戶一男一女。外孫男一女五。曾孫又若干人。寅與玄風。相識蓋久。一日?然持服。來請碣文曰。子之先君。亦知吾父。寅辭不獲。?其家狀。系以銘。銘曰。
維志伉伉。維氣昻昻。如輪轉方。豈利周行。壽之不長。咎復誰當。維配孔藏。家有餘祥。子孫多良。將遠愈昌。鐫此石章。百世之光。
형태서지 권수제 ?庵先生遺稿 판심제 ?庵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도 肅宗朝刊 권책 碑碣目錄. 原集 12권 합 4책 행자의 수 10행 20자 반곽의 크기 20.6×13.8(㎝) 어미 上內向白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번호 奎4738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36
저자 성명 송인(宋寅) 생년 1517년(중종 12) 몰년 1584년(선조 17) 자 明仲 호 ?庵, 鹿皮翁 본관 礪山 시호 文端
* 주1 : 배위 경주이씨는 <전의이씨>의 오기로써 현재 해 당 파종회에서 정정 작업을 준비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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