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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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김 익(金 釴) 1484(성종17)∼1548(명종3)--(제)

조선의 문신. 字는 군주, 제학공(휘 익달) 후손으로 경력(經歷) 언홍(彦弘)의 아들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1516 년(중종11) 생원(生員)이 되고, 1519년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 12인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정언(正言)이 되어 이른바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언사(言事)를 담당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등이 투옥되자 유인숙(柳仁淑), 공서린(孔瑞麟), 홍언필(洪彦弼)등과 함께 대궐에 나가 조광조와 같이 옥에 갇히겠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辛巳誣獄)으로 관직을 삭탈(削奪)당하고 유배 되었다가 중종 말년에 방환되었으며, 1545년(명종 즉위)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를 거쳐 용담현령(龍潭縣令)이 되었다. 안동김씨 최초의 족보인 경진보를 편찬하였다.

 

묘는 개죽동(서울시 관악구 상도동)에서 1968년 경남 산청군 생초면 월곡리 용암치 신좌로 이안했다.

 

 <각종 문헌 자료 소개>

1)《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  

(2006. 11. 7. 태영(군) 제공)

[科] 법(程)이란 뜻이다. 삼태기. 물건(品)이란 뜻이다.

 

[복천거과(復薦擧科)]: 인조가 크게 점교(漸敎)하여 말하기를 “조광조(趙光祖)등의 일은 내가 항상 마음속에 잊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왕(先王)께서 허락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감히 가볍게 고칠 수가 없었다. 지금 내 병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조광조의 작질(爵秩)을 회복하고 현량과(賢良科)도 또한 환수(還收)하노라. 명종 을사년(1545)의 유지를 따라 기묘 제인의 죄를 모두 씻어 버리고 과거에 다시 천거하노라”라고 하였다. 그때 천과가 없어진지가 이미 27년이나 되어 해당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죽었고 살아있는 사람도 이미 늙었다. 이부(李阜), 김대유(金大有), 유정(柳貞), 안정(安珽), 김신동(金神童), 김옹(金옹), 김익(金釴) 일곱 사람을 육품에 제수 하였다. <戊午事蹟>

 

2) 동방급제자 명단

(2005. 12. 20. 항용(제) 제공)

중종14년(1519) 현량과시때는 76명의 합격자를 냈다.  

이름 생년 자 호 본관 합격등급

강은(姜(  )) 1492 임자 청노(淸老) 규형(葵亨) 진주(晉州) 丙科15

경세인(慶世仁) 1491 신해 심중(心仲) 경재(敬齋) 청주(淸州) 丙科25

고운(高雲)  종용(從龍)  장흥(長興) 丙科14

권겸(權㻩)  군형(君瑩)  안동(安東) 乙科3

권기(權祺) 1495 을묘 경노(慶老)  안동(安東) 丙科19

권장(權檣) 1489 기유 제보(濟甫) 제촌(霽村) 안동(安東) 乙科2

권전(權磌) 1490 경술 군안(君安)  안동(安東) 丙科6

금의(琴椅) 1489 기유 중재(中材)  봉화(奉化) 丙科17

김광준(金光準)  숙예(叔藝)  상주(尙州) 丙科12

김극개(金克愷)  무화(茂和)  광주(光州) 丙科18

김기(金紀)  중강(重綱)  광주(光州) 丙科8

김대유(金大有) 1479 기해 천우(天祐) 삼족(三足) 김해(金海) 丙科20

김명윤(金明胤) 1493 계축 회백(晦伯)  광주(光州) 丙科3

김식(金湜) 1482 임인 노천(老泉)  청풍(淸風) 甲科1

김신동(金神童) 1485 을사 성이(聖而)  광주(光州) 丙科14

김연(金埏)  계용(季鎔)  언양(彦陽) 丙科13

김연(金緣) 1487 정미 자유(子由)  광주(光州) 乙科4

김옹(金顒) 1484 갑진 대이(大而) 외재(畏齋) 상주(尙州) 丙科24

김윤정(金允貞)  정지(貞之)  미상(未詳) 丙科14

김익(金釴) 1486 병오 군거(君擧)  안동(安東) 丙科12-제학공파

김익수(金益壽) 1491 신해 인경(仁卿)  김해(金海) 丙科13

김취정(金就精)  자용(子鎔)  선산(善山) 丙科7

김탁(金鐸)  진경(振卿)  고령(高靈) 丙科16

김필(金珌)  자수(子修) 모기(慕箕) 안산(安山) 甲科1

김희열(金希說)  상경(商卿)  순천(順天) 乙科7

도형(都衡) 1480 경자 국전(國銓)  팔거(八莒) 丙科21

민세정(閔世貞) 1471 신묘 정숙(正叔)  여흥(驪興) 丙科23

민회현(閔懷賢) 1482 임인 계사(季思) 일제(一齊) 여흥(驪興) 丙科9

박공달(朴公達) 1470 경인 대관(大觀) 강호(江湖) 강릉(江陵) 丙科18

박광필(朴光弼)  국량(國樑)  상주(尙州) 乙科3

박세후(朴世煦) 1497 정사 중온(仲溫) 인재(認齋) 상주(尙州) 丙科5

박소(朴紹) 1493 계축 언주(彦胄) 야천(冶川) 반남(潘南) 甲科1

박한(朴翰)  규부(赳夫)  의흥(義興) 丙科11

박훈(朴薰) 1484 갑진 형지(馨之) 강수(江叟) 밀양(密陽) 丙科11

방귀온(房貴溫) 1465 을유 옥여(玉汝)  남양(南陽) 丙科16

상진(尙震) 1493 계축 기부(起夫) 범허(泛虛) 목천(木川) 丙科3

성수종(成守琮) 1495 을묘 숙옥(叔玉) 절효(節孝) 창녕(昌寧) 丙科2

송순(宋純) 1493 계축 수초(守初) 면앙(俛仰) 신평(新平) 乙科1

송호지(宋好智) 1474 갑오 경우(景愚)  여산(礪山) 丙科22

송희규(宋希奎) 1494 갑인 천장(天章) 야계(倻溪) 야로(冶爐) 丙科9

신잠(申潛) 1491 신해 원량(元亮) 영천(靈川) 고령(高靈) 丙科7

신준미(申遵美) 1491 신해 사휴(士休)  평산(平山) 丙科13

안정(安珽) 1494 갑인 정연(挺然) 죽창(竹窓) 순흥(順興) 丙科4

안처겸(安處謙) 1486 병오 백허(伯虛) 허재(虛齋) 순흥(順興) 丙科5

안처근(安處謹) 1490 경술 정부(靜夫)  순흥(順興) 丙科2

안처함(安處諴) 1488 무신 윤숙(允叔)  순흥(順興) 丙科10

원계채(元繼蔡) 1492 임자 수보(壽甫)  원주(原州) 甲科2

유정(柳貞) 1491 신해 복원(復元)  진주(晉州) 丙科17

윤풍형(尹豊亨)  구중(衢仲) 송월(松月) 칠원(漆原) 甲科2

이공인(李公仁)  제옹(濟翁)  광주(光州) 乙科6

이광식(李光植)  배지(培之)  여흥(驪興) 丙科3

이구(李搆)  성지(成之)  성주(星州) 丙科6

이기(李<0x3C48>) 1493 계축 사고(士高) 정헌(靜軒) 연안(延安) 丙科4

이령(李翎)  여익(汝翼)  함안(咸安) 丙科26

이몽필(李夢弼) 1487 정미 은경(殷卿)  전주(全州) 丙科10

이부(李阜) 1482 임인 자릉(子陵) 행원(杏院) 고성(固城) 丙科19

이수복(李壽福)  신지(申之)  옹진(瓮津) 丙科1

이연경(李延慶) 1484 갑진 장길(長吉) 탄수(灘叟) 광주(廣州) 丙科1

이원휘(李元徽)  덕조(德操)  광주(光州) 丙科12

이지분(李之蕡)  자실(子實)  광주(廣州) 丙科15

이해(李海)  종원(宗源)  경주(慶州) 丙科2

임백령(林百齡)  인순(仁順) 괴마(槐馬) 선산(善山) 甲科3

장계문(張季文) 1478 무술 비연(斐然)  인동(仁同) 丙科10

전순인(全舜仁)  원경(元卿)  미상(未詳) 丙科1

전팽수(全彭壽)  중노(仲老)  옥천(沃川) 丙科5

정세호(鄭世虎) 1486 병오 자인(子仁) 서계(西溪) 하동(河東) 丙科11

정완(鄭浣) 1473 계사 신지(新之)  연일(延日) 丙科8

정원(鄭源) 1495 을묘 중원(仲遠)  동래(東萊) 丙科8

정편(鄭遍) 1475 을미 대수(大受)  초계(草溪) 丙科4

정휘(鄭輝)  광언(光彦)  연일(延日) 乙科5

조우(趙佑) 1484 갑진 성지(誠之)  한양(漢陽) 乙科1

조인규(趙仁奎)  경문(景文) 수암(陲庵) 풍양(豊壤) 乙科1

조효연(曹孝淵) 1486 병오 언박(彦博)  창녕(昌寧) 丙科9

허눌(許訥)  인중(仁仲)  김해(金海) 丙科6

허백기(許伯琦) 1493 계축 여진(汝珍) 호재(浩齋) 김해(金海) 乙科2

홍신(洪愼)  중숙(重叔)  남양(南陽) 丙科7

 

 3) 경진보(최초의 안동김씨 족보) 기록 내용 요약

(2007. 1. 8. 항용(제) 제공)

  출전 : <경진보>(1580년 간)

 

  경진보 발간 과정 :

  *<경진보> 서문, 발문, <을유보> 서문, <기미보> 서문, <弘毅齋營建記> 기록 내용 참조 요약 작성

 

  1)1500여년 경, 宗人 중에 유식한 인사들이 족보가 없음을 개탄하며 개인적으로 보첩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전해주곤 하였다. 그런데 그것들은 소홀히 하여 틀리기도 하는 등 여러 폐단이 있어 왔음.

 

  2)1519년(기묘년.중종14), 上舍公 金胤先(제. 正言公 휘 釴의 조카-齊賢의 초명으로 추정)이 백부 正言公(제. 휘 釴)에게 족보 편집을 위탁하였고, 정언공은 최초로 이 족보 제작에 뜻을 두어 그동안의 보첩들을 수정하고 정리하여 世譜를 편찬하고 宗系를 밝혀놓았음. 그러나 그 세보를 간행하지 못하고 1548년(戊申년. 명종3년)에 몰하심.

 

  3)1550년 경(추정), 김곽(제. 익(釴)의 아우)이 화성군수로 있을 때 귀양중이던 유희잠(柳希潛)에게 부탁하여 정언공이 정리해 놓았던 세보 초고를 보완하여 7권의 족보로 완성하게 함. 그런데 外派에 대한 기록상 문제점이 드러남.

 

  4)1577년 (정축년. 선조 10년), 金齊賢(제. 김곽의 자)이 옥산(현 전남 해남)으로 전보됨에 따라 그 부임 초에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여러 宗長들에게 세보 편집과 발간 문제를 품의함. 또한 강화부 백령공(?. 휘 오)과도 상의하여 본 족보와 대조해 보고 당시에 편찬된 파평윤씨와 전성이씨 등의 姓譜를 모방하여 문제가 되었던 외파에 대한 기록 문제에 있어 외손의 지파는 삭제하고 同姓의 자녀만 기록하기로 결정함.

 

  5)1578년 경(추정). 金昉(제. 金釴의 손. 金潤雲의 자. 당시 천안군수)이 先代(정언공 金釴)의 뜻을 이어받아 직공(職工)을 모집하여 각자(刻字)를 시작함. 그런데 그것은 행장(行狀)과 서문(序文) 정도의 판각에 그침.

 

  6)그 후(1580년. 경진년. 선조 13) 감사공(휘 億齡. 익)과 참찬공(휘 瓚. 익)이 여러 종친들과 함께 이 문제를 협의하였는데, 당시 강화부사로 있던 병사공(휘 金吳  . 전)가 충청도 절도사가 된 뒤 천안(金 昉)으로부터 이 사업을 인수하여 다시 교정하고 자신의 비용으로 판각하여 출판을 마침.

 

  7)이 때 승지공(휘 億齡. 익. 당시 좌승지 겸 수찬관 지제교)에게는 서문을 의뢰하였고, 金瓚(익)과 金齊賢(제)에게 발문을 의뢰하여 편찬 및 발간 사업을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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