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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는 경실(景實). 제학공(휘 益達) 후손. 충북 괴산 출생. 승지 구만(龜萬)의 손자. 어려서부터 재지(才智)가 출중하여 남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 11로 급제하여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에 임명되었다. 그 뒤 병조정랑 ·용강현감(龍岡縣監)을 지내고 1765년(영조 41) 통정대부 공조참의, 이조참의를 지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에 돌아와서 후진들의 교육과 경전을 외며 자기수양에 진력했다. 74세에 몰하였으며 묘는 당진 장항 묘좌이다. 참의 윤규범(尹奎範)이 찬(撰)한 묘갈이 있으며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이 지은 행장이 있다. 공의 문장과 학행은 조야(朝野)에 널리 떨쳐졌으며 울진과 용강에는 거사비(去思碑)가 있다. 호서(湖西) 육군자(六君子)의 한 사람이다.
용강현감으로 있을 때 권력을 쥐고 있던 윤모(尹某) 재상의 청탁을 물리친 일화가 《목민심서》에 전한다. 죽은 뒤 1796년(정조 20) 호군(護軍) 채홍(蔡弘)의 천거로 청백리(淸白吏)에 천거되었다.
<각종 역사 자료>
1) 목민심서에서 (2007. 1. 9. 발용(군) 제공) 역사전관(歷辭銓官)에 불가작감사어(不可作感謝語)니라. 解釋
전관(銓官)에게 들러 하직 인사를 하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解說
전관은 나라를 위하여 사람을 뽑아 쓴 것이니 사사로운 은혜를 끌어대서는 안 되며, 수령은 자격에 따라 관직을 얻는 것이니 사사로운 은혜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어서는 안 된다. 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말이 자신을 추천해 준 데에 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조선 숙종 때 사람 참의(參議) 김변광(金汴光)이 병조낭관(兵曹郎官)을 지내고 물러나 시골에 궁하게 살면서 벼슬을 구하지 않았는데, 윤씨(尹氏) 성을 가진 어떤 사람이 전관이 되자 그를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임명하였는데, 그 후에 윤씨가 딸을 혼인 시키면서 말(馬)을 보내달라고 도움을 청하였다. 김변광은 이런 답서를 보냈다.
"가난하면 서로 도와주는 것이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나 혐의 받을만한 경우에는 군자(君子)로서 삼가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공과는 전부터 사귀던 사이가 아니었으며, 후에는 천거해서 발탁해 준 힘을 입었으니, 비록 명분이 있는 선물일 뿐 재물을 취하는 일이 아니겠지만, 모르는 자들은 반드시 이러쿵저러쿵 말을 할 것입니다. 변변치 못한 이 사람이 수십 년 스스로 지켜온 바를 하루아침에 잃게 된다면, 어찌 청덕(淸德)에 누가 되고 아름다운 명예에 손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심부름꾼을 그냥 돌려보내니 부끄럽고 송구하기 그지없습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正祖實錄, 牧民心書, 國朝人物志
2) 조선왕조 실록에서 영조 105권 41년 1월 27일 (계유) 004 / 이성규·원인손·이해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성규(李聖圭)를 승지(承旨)로, 원인손(元仁孫)을 이조 참판(吏曹參判)으로, 이해중(李海重)을 대사간(大司諫)으로, 이현조(李顯祚)를 사간(司諫) 으로, 남운로(南雲老)를 장령(掌令)으로, 서명선(徐命善)을 헌납(獻納)으로, 윤사국(尹師國)·이동현(李東顯)을 정언(正言)으로, 김변광(金?光)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삼았다. 김변광은 호서(湖西)에 살다가 일찍이 용강(龍崗)으로 부임하여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체직되어〉 돌아와서는 승자(陞資)되었는데 수년이 되도록 통정직(通政職)의 의망을 받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이조 판서 김치인(金致仁)이 비로소 의망하였으니, 임금이 김치인을 불러 하교하기를,
“근래의 정사에는 매양 서울 사람을 우선적으로 하였는데, 경은 시골에 있는 김변광 같은 자를 먼저 좌이(佐貳)16162) 로 의망하였으니, 가히 그 공정한 마음을 알겠다. 이러한 마음을 이어간다면 나는 근심할 것이 없겠다.” 하였다. 【원전】 44 집 191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註 16162]좌이(佐貳) : 참판(參判)이나 참의(參議)
3) 조선 왕조실록에서
정조 20년 병진(1796, 가경 1). 4월 18일(계사) 제목 : 육조의 판서 이하가 청백리를 추천하여 올리다 상이 우의정 윤시동에게 이르기를,“청백리를 이미 천거하여 선발하였는가?” <중략> 얼마 뒤에 육조의 판서 이하가 청백리를 추천하여 올렸는데, <중략>
고 수사 허정(許晶), 고 병사 최명주(崔命柱)【수원 유수 조심태(趙心泰)가 추천하였다.】, 고 판사 정언유(鄭彦儒), 고 감사 정옥(鄭玉), 고 참의 김변광(金汴光)【호군 채홍리(蔡弘履)가 추천하였다.】, 고 판서 이병상(李秉常), 고 판서 조관빈(趙觀彬), 고 판서 윤심형(尹心衡)【호군 서용보(徐龍輔)가 추천하였다.】, 고 병사 이방좌(李邦佐), 고 부사 안상집(安商楫)【호군 서 대(徐有大)가 추천하였다.】, 고 판서 이태중(李台重), 고 통제사 김영수(金永綬)【호군 이한풍(李漢豊)이 천거하였다.】, 고 영의정 서지수(徐志修), 전 좌의정 김종수(金鍾秀), 고 집의 박치륭(朴致隆)【이조 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추천하였다.】
4) <동방급제자> (2006. 5. 1. 항용(제) 제공) 경종(景宗) 3년 (계묘, 1723년), 식년시(式年試) 병과18(丙科18) 경종3년(1723년) 식년시때는 94명의 합격자를 냈다. 이름 생년 자 호 본관 합격등급 고승헌(高丞憲) 1654 갑오 제주(濟州) 丙科20 권일형(權一衡) 1700 경진 신경(信卿) 안동(安東) 丙科3 권집(權䌖) 1696 병자 성회(聖會) 안동(安東) 丙科10 김광호(金光虎) 1695 을해 광주(光州) 甲科3 김권(金權) 1693 계유 여중(汝中) 안동(安東) 丙科28 김백호(金白虎) 1680 경신 광주(光州) 丙科26 김변광(金汴光) 1694 갑술 경실(景實) 안동(安東) 丙科11--제학공파 김상성(金尙星) 1703 계미 사정(士精) 강릉(江陵) 甲科1 김성(金聲) 1686 병인 안동(安東) 丙科16--도평의공파 김시방(金時芳) 1687 정묘 안동(安東) 乙科4 김오응(金五應) 1699 기묘 안동(安東) 丙科18--도평의공파 김우갑(金禹甲) 1693 계유 성서(聖瑞) 안동(安東) 丙科2 김정구(金鼎九) 1680 경신 수안(遂安) 丙科7 김집(金㙫) 1686 병인 순천(順天) 乙科1 김홍수(金弘壽) 1681 신유 의경(毅卿) 선산(善山) 丙科23 남위로(南渭老) 1699 기묘 성망(聖望) 의령(宜寧) 丙科31 목천현(睦天顯) 1669 기유 공저(公著) 사천(泗川) 丙科14 민기(閔圻) 1682 임술 군보(君輔) 여흥(驪興) 丙科20 박경조(朴景祖) 1683 계해 희숙(希叔) 고령(高靈) 乙科2 박규문(朴奎文) 1670 경술 문서(文瑞) 밀양(密陽) 乙科7 박문수(朴文秀) 1691 신미 성보(成甫) 고령(高靈) 丙科16 박사수(朴師洙) 1686 병인 경로(景魯) 반남(潘南) 甲科1 박사유(朴師游) 1697 정축 문경(文卿) 반남(潘南) 甲科1 박사제(朴師悌) 1683 계해 순보(順甫) 반남(潘南) 乙科6 박상진(朴祥震) 1693 계유 반남(潘南) 丙科15 박윤동(朴胤東) 1673 계축 세백(世伯) 밀양(密陽) 丙科1 박치문(朴致文) 1694 갑술 사빈(士彬) 밀양(密陽) 丙科17 박형윤(朴亨潤) 1683 계해 태중(泰仲) 밀양(密陽) 丙科2 배윤명(裵胤命) 1689 기사 흥해(興海) 丙科22 백태운(白泰運) 1678 무오 선산(善山) 丙科7 서명걸(徐命杰) 1680 경신 사호(士豪) 달성(達城) 丙科2 서명빈(徐命彬) 1692 임신 질보(質甫) 달성(達城) 丙科1 서명형(徐命珩) 1687 정묘 행옥(行玉) 대구(大邱) 丙科3 송이단(宋履端) 1681 신유 신초(愼初) 야로(冶爐) 乙科6 송징계(宋徵啓) 1690 경오 계인(季仁) 여산(礪山) 丙科4 신일청(申一淸) 1698 무인 고령(高靈) 丙科19 신횡(申澋) 1676 병진 고령(高靈) 丙科6 심세우(沈世遇) 1677 정사 익호(翼乎) 청송(靑松) 乙科2 심유의(沈游義) 1696 병자 의보(宜甫) 청송(靑松) 甲科2 안성시(安聖時) 1687 정묘 순흥(順興) 丙科10 오명후(吳命厚) 1682 임술 해주(海州) 丙科13 유엄(柳儼) 1692 임신 사숙(思叔) 진주(晉州) 丙科2 유최기(兪最基) 1689 기사 양보(良甫) 기계(杞溪) 丙科17 윤민교(尹敏敎) 1677 정사 백수(伯修) 파평(坡平) 丙科9 윤상백(尹尙白) 1701 신사 중소(仲素) 파평(坡平) 丙科3 윤지(尹志) 1688 무진 사심(士心) 함안(咸安) 乙科1 이규휘(李奎徽) 1698 무인 군미(君美) 성주(星州) 丙科22 이대원(李大源) 1678 무오 천경(天敬) 한산(韓山) 乙科2 이덕부(李德孚) 1675 을묘 달경(達卿) 전의(全義) 乙科1 이도원(李度遠) 1684 갑자 기보(器甫) 전주(全州) 丙科1 이만첨(李萬瞻) 1689 기사 백숭(伯崇) 연안(延安) 甲科3 이병태(李秉泰) 1688 무진 유안(幼安) 한산(韓山) 乙科1 이봉명(李鳳鳴) 1682 임술 방서(邦瑞) 서천(舒川) 丙科27 이사기(李師夔) 1692 임신 일경(一卿) 전주(全州) 丙科11 이성신(李聖臣) 1677 정사 무숙(茂叔) 연안(延安) 丙科13 이세춘(李世瑃) 1681 신유 백화(伯和) 벽진(碧珍) 丙科10 이수익(李壽益) 1685 을축 숙겸(叔謙) 여주(驪州) 丙科3 이윤신(李潤身) 1689 기사 덕중(德仲) 함평(咸平) 丙科8 이장(李槳) 1696 병자 주여(舟汝) 전주(全州) 丙科24 이정응(李挺膺) 1691 신미 원례(元禮) 벽진(碧珍) 丙科25 이제담(李齊聃) 1687 정묘 전주(全州) 乙科4 이종백(李宗白) 1699 기묘 태소(太素) 경주(慶州) 丙科9 이중진(李重震) 1685 을축 군원(君元) 전주(全州) 丙科12 이진수(李眞洙) 1684 갑자 자연(子淵) 전주(全州) 乙科5 이징하(李徵夏) 1683 계해 성중(成仲) 광주(光州) 丙科23 이창술(李昌述) 1693 계유 선보(善甫) 전주(全州) 丙科8 이철보(李喆輔) 1691 신미 보숙(保叔) 연안(延安) 丙科5 이태창(李泰昌) 1683 계해 내길(來吉) 광주(光州) 乙科5 이현보(李玄輔) 1679 기미 덕승(德升) 연안(延安) 丙科4 임광필(林光弼) 1682 임술 중량(仲亮) 평택(平澤) 丙科5 임정(任珽) 1694 갑술 성방(聖方) 풍천(豊川) 丙科21 임철(任轍) 1683 계해 풍천(豊川) 丙科29 정도은(鄭道殷) 1698 무인 질보(質甫) 온양(溫陽) 丙科7 정도형(鄭道亨) 1680 경신 백통(伯通) 온양(溫陽) 丙科6 정래복(丁來復) 1682 임술 영산(靈山) 丙科12 정우량(鄭羽良) 1692 임신 자휘(子揮) 연일(延日) 丙科19 정재춘(鄭再春) 1680 경신 자장(子長) 진주(晉州) 甲科1 정종주(鄭宗柱) 1690 경오 하동(河東) 乙科7 정진후(鄭震垕) 1669 기유 광주(廣州) 乙科3 조상(趙鏛) 1704 갑신 자상(子常) 순창(淳昌) 丙科30 조상명(趙尙命) 1687 정묘 자휴(子休) 풍양(豊壤) 乙科3 조정리(趙廷履) 1671 신해 덕기(德基) 한양(漢陽) 丙科5 진재박(陳在搏) 1697 정축 강릉(江陵) 丙科21 차이재(車以載) 1688 무진 연안(延安) 丙科14 채응만(蔡膺萬) 1677 정사 유언(幼言) 평강(平康) 丙科15 최규태(崔逵泰) 1684 갑자 달부(達夫) 강릉(江陵) 甲科2 최태두(崔泰斗) 1675 을묘 전주(全州) 丙科25 한현모(韓顯謨) 1693 계유 회이(晦而) 청주(淸州) 丙科18 현봉점(玄鳳漸) 1697 정축 성주(星州) 丙科6 홍경보(洪景輔) 1692 임신 대이(大而) 풍산(豊山) 丙科4 홍담(洪曋) 1693 계유 남양(南陽) 丙科24 홍득후(洪得厚) 1689 기사 재후(載厚) 남양(南陽) 丙科9 홍서(洪曙) 1686 병인 계휘(季輝) 남양(南陽) 丙科1 홍성(洪晟) 1702 임오 광국(光國) 남양(南陽) 丙科8 · 상석ㆍ족석ㆍ향로석ㆍ혼유석ㆍ계체석ㆍ문인석ㆍ망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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