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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 선생의 <한국사의 주체적 인물들> 소개 (2004. 10. 25. 영환(문) 제공)
한국사의 주체적 인물들 이이화-1994,여강출판사
머리말
우리 역사에서 주체적 이물은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그 판4단 기준은 무엇인가? 참으로 이 문제는 단순치 않다. 먼저 주체에 대한 해명이 따라야 학T다. ‘주체’란 건전한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판단에 의해 규정된다. 주체는 단적으로 말해 인간과 민족을 중심으로 한 이념이다. 우리에게 있어 ‘주체’는 오랜 역사에 걸쳐 논란거리가 되어 왔다. 늘 주변 국가의 침략을 받아왔고 또 사상이나 사조가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되어온 탓이다. 그리하여 자기를 상실하거나 자기 비하를 일삼아온 경우도 많았다. 특히 15세기 유교 문화와 19세기 서양 문화, 20세기 일본 문화와 미국문화가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거나 선진문화로 수용되면서 이 문제는 더욱 당면의 과제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우리의 민족혼을 확립하고 우리 문화를 가꾸어 정치적 독립과 함께 문화적 독립을 추구하는 길이 바로 ‘주체의 확립’과 맞물려 있었다.
그리하여 맹목적으로 외래 사상에 빠지거나 자기 얼을 빼놓고 외국의 문화만이 우월하고 자기 문화는 보잘것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한 역사 인물을 꾸짖거나 타기(唾棄)한 일들이 벌어졌다. 사실 그런 인물들이 우리의 역사를 끌어온 게 사실이다. 주체를 강조한다고 해서 세계사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국수적 성향으로 흐르는 것도 경계한다. 어디까지나 인간과 민족이 공존하고 존중하는 하나의 철학일 뿐이다. 따라서 자기 것을 온전히 가꾸어 세계사의 흐름에 참여하는 이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나라 역사에 나타난 주체적 인물 54인을 뽑은 것은 편의에 따른 것이다. 원래 모 일간지에 “통일시대와 민족주체성 확립”을 위한 시리즈물로 쓰여진 것인데 “54인”은 그 지면에 맞춘 것이다. 또 그 기준도 뚜렷이 제시된 것은 아니자. 다만 우리나라의 역사에 나타난 인물들 중에서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때로는 민족의 확대, 때로는 사상의 확립, 때로는 자주 독립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 주목하고 그들의 행동과 사상을 추적한 정도이다.
특정 인물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우리 사회의 제약이 많은 탓으로 애매모호한 선정기준과 명석치 못한 해석이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54인들 중에 이른바 민족주의노선이나 사회주의노선을 추구했더라도 민족해방이 그 첫 행동목표였음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민족통일을 제일의 과제로 알고 있다. 54인의 인물들을 통해 좀더 자기 주체를 확립하고 민족통일을 위한 의지를 가꾸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필자로서는 큰 보람을 얻는 것이다. 이 책의 출판을 맡아준 여강출판사 이순동 사장과 편집진에 감사드린다. 통일의 희망을 잃지 않고 또 한 해를 보내며 지은이 쓰다.
목록 제1부 전근대편
고구려의 기상 광개토대왕. 백제문화의 상징 왕인. 삼국통일의 화신 김춘추. 민족사상의 여명 원효. 고구려의 부흥 대조영. 동북아의 해상왕 장보고. 대륙정신의 표상 왕건. 민족자주의 화신 묘청. 사상의 통합자 보조. 민족사학의 효시 일연. 항쟁굴종의 버팀목 김방경. 오천년의 성군 세종. 한국사상의 독창 서경덕. 임진왜란의 명재상 유성룡. 호국볼교의 구현자 유정. 세계의 명의 허준. 구국의 주화(主和) 최명길. 실학의 원조 유형원. 중흥의 군주 정조. 실학의 태두 박지원. 실학의 집대성자 정약용. 근대의 징검다리 최한기. 집념의 지리학자 김정호. 제2부 근현대편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 반외세의 선봉 최익현. 평등의 구현자 최시형. 판소리의 완성자 신재효. 사상의학의 창시자 이제마. 독립운동의 터주 이상재. 새야 새야 파랑새야 전봉준. 항일의병의 상징 허위. 칼날같은 역사비평 황현. 민족사학의 효시 박은식. 천도교 3세 교주 손병희. 대종교 창시자 나철. 최초의 언론인 장지연. 광복운동 터전 마련 이회영. 항일투쟁의 주역 홍범도. 민족해방의 교량 이동휘. 나의 소원은 김구. 말과 민족보존 주시경. 승려, 시인, 지사 한용운. 항일 독립의사 안중근. 실천적 유학자 김창숙. 실천적 민족사학자 신채호. 목숨바친 민족사랑 여운형. 사상적 선각자 조소앙. 신민족주의 제창 안재홍. 딸깍발이 선비 정인보. 천재 아동운동가 방정환. 시대정신의 구현 이상화. 성서의 민족적 해석 김교신. 한국영화의 상징사 나운규.
----- 항쟁굴종의 버팀목 ----김 방 경
김방경(金方慶)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병부상서.한림학사를 지낸 효인(孝印)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다. 할아버지 민성(敏成)이 양육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땅바닥에 뒹굴면서 울었는데 소나 말이 그를 피해 지나가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은 고난의 새대에 살면서 그 주역의 한 사람으로 항쟁과 굴욕을 함께 맛본 역사인 이었다. 처절한 대몽 항쟁을 겪으면서 우리 겨레가 초개처럼 쓰러지는 참담함을 보았고 끈질긴 항쟁도 끝내 좌절되자 타협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것이다. 시대가 인물을 만들기도 하나 때로는 시대가 인물을 삼키기도 한다. 그는 어느 쪽인가? 징기스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태종)는 아버지가 채 아우르지 못한 금나라 정복전쟁에 나서면서 후방의 고려도 함께 정복케 했다. 이렇게 해서 1231년 몽고의 살례탑이 이끄는 몽고군은 압록강를 건너 물밀 듯이 쳐들어오면서 학살약탈을 저질러댔다. 각지에서 고려군사는 피나는 항전을 벌렸으나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우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강화를 모색하고 있었다.
강화천도 몽고군은 8천여 명의 병력으로 고려를 굴복시킬 수 없는 정세를 판단하고 형식상의 예물을 받고 황급히 철퇴하였고 이어 고려의 왕족과 벼슬아치들을 볼모로 보낼 것과 물품의 공납을 요구하기도 하고 일종의 감독관이라 할 다루가치(達魯花赤)을 보내 재정 간섭을 일삼았다. 이에 고려에서는 외교적 관계로 이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철저한 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30여년간 대몽 항쟁이 벌어졌고, 몽고에서는 6차레에 걸쳐 침략전쟁을 감행했다. 강화도는 역사가 크게 벌어져 궁궐과 관청을 새로 지었다. 섬 둘레에 방어성도 굳건히 쌓았고, 갑곶진, 광성보, 덕진 들의 보루도 완성했다. 결코 임시수도의 면모가 아니었다. 그리고 천여 척의 전함과 수만 명의 군사를 집결시켰다. 몽고는 고려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자, 1232년 다시 침략하여 강화도에서 나올 것과 고려왕 고종의 입조(入朝)를 강요하였다. 이를 거절하자 물러갔다. 그 뒤 몽고는 곧이어 금을 완전히 정복하고 만주땅을 차지하였으나 고려와 남송(南宋)만 굴복하지 않자 다시 1235년 고려를 침략하여 4년간 분탕질을 쳤다.
김방경의 아버지는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효인(孝印)이었는데 그는 아버지의 덕으로 차가타이가 황제에 오르던 해인 1227년 산원(散員)이 되어 벼슬길에 나왔고 이어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창고를 감독했다. 이때 그가 재상의 청탁을 들어주지 않자 권신(權臣)에게 고자질했고 그 권신은 “지금 어사가 옛 서사의 봉공만 못하다”고 꾸짖자 “나도 옛 어사와 같이 할 수 있으나 나는 오로지 나라의 재정을 비축할 뿐 뭇사람의 입을 맞추어 줄 수는 없다.”고 맞서서 그의 강직함을 드러냈다. 1248년 몽고군이 침략하여 성을 공략할 적에 그는 서북면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있으면서 위도(葦島=정주군에 있음)에 들어가 방어하고 있었다. 그는 섬에 제방을 쌓아 농사를 짓게 해서 자급하게 했다. 또 백성들이 물을 얻기 위해 육지르로 나갔다가 몽고병에게 포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웅덩이를 파서 빗물을 받아 식수를 해결했다.
무신들의 권력다툼 이로 보면 그는 강화도에 들어가지 않고 최전선에서 몽고병과 싸움을 벌이고 있었고 또 비참한 민생을 보고 피가 끓어올랐던 것이다. 그는 끓어오르는 적개심과 백성의 고통을 함께 푸는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임을 뼈에 사무치도록 새기고 있었다. 더욱이 몽고병은 가을에 침략해 와서 주식을 약탈했기에 민생은 더욱 가련하였고 흉년마저 들어 서로 베개 삼아 굶어죽은 모습이 질펀하게 널려 있었다. 이런 광경은 그의 의식세계를 변화시켰을 것이다. 1258년에는 김인준 등이 정변을 일으켜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졌으나 새로운 무신 김인준 일파와 임금 사이에는 권력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이 틈을 타서 몽고는 마지막 침략전쟁을 도발했는데 그들은 고려 태자를 몽고에 보내주는 조건을 제시하고 철수했다. 그리하여 30여년 동안 끝내 고려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태자의 입보만 성사시켰던 것이요, 태자(뒤에 원종)가 연경에 들어가 새 황제 쿠빌라이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쿠빌라이는 “고려는 당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그 나라 태자가 찾아 왔으니 하늘이 시킨 일이로다”라고 기뻐해 마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마침내 고려의 땅과 왕권을 인정했다. 태자는 곧 돌아와 부왕 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때 원종(元宗)과 김방경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다.
원종은 왕권의 보호를 몽고의 힘에 의지하려 했고 김인준 일파는 이를 간파하고 왕을 제거하려 했다. 원종은 이제 왕의 신분으로 몽고 방문길에 나섰고 이어 몽고는 실권자 김인준의 몽고 내조(來朝)를 강요했다. 이때 무신 임연(林衍)은 김인준을 죽여 새로 실권을 잡았고 친몽적인 왕을 갈아치우고 왕족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몽고에서 돌아오던 태자(뒤에 충렬왕)가 이 소식을 듣고 몽고에 구원을 요청하여 원종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삼별초의 대몽항쟁
원종은 다시 몽고에 가서 무신들을 쳐 없애고 수도를 개성으로 옮길 것이니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고려 왕실은 점점 자주를 상실하고 있었다. 끝내 원종은 삼별초를 동원하여 임씨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왕권을 제대로 잡으니 이로써 무신정권은 1백여년 만에 끝장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럴 적에 김방경은 무신이면서도 절대 무신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1265년 대장군으로 몽고에 사신으로 갔고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로 몽고수중에 있는 북계의 40여 성을 회복하였다. 1269년 몽고병이 원종을 지원하러 왔을 때 몽고의 장수 몽가독(夢哥篤)이 서경에 웅거하면서 대동강 이남으로 사냥 따위를 핑계대면서 넘어오려 했다. 그는 몽가독과 함께 있으면서 미리 황제의 허락을 받아두었다고 질책하면서 대동강을 넘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는 민폐를 염려하여 미리 쿠빌라이의 다짐을 받아 둔 것이다. 고려의 왕실과 문신들이 무신정권을 타도하고 개성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자 삼별초는 철저히 항전을 다짐하며 반기를 들었다. 곧 농민, 노비로 이루어진 직업군인인 삼별초는 문신정권의 타도에 나섰고, 이어 그들 지도자 배중손(裵仲孫)과 김통정(金通精)등은 진도-제주도로 진출하여 3년동안 긑까지 대몽 항쟁을 펼쳤던 것이다.
김방경은 역적추보사(逆賊追輔使)로 삼별초 토벌의 고려쪽 책임자로 나섰고 이어 두 차례의 걸친 일본 정벌에도 한 번은 도독사(都督使), 한번은 도원수(都元帥)로 고려군사를 지휘했다. 그는 고려 왕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몽고군의 정벌전쟁에 끌려나간 것이다. 이 때 그는 세 번에 걸친 큰 시련을 겼었다.
첫 번째는 진도의 삼별초을 공격할 때 삼별초와 내통하고 있다는 밀고를 받은 것이다. 그가 개성으로 끌려와 문초를 받고 혐의가 풀리기는 했으나 몽고군의 장수 아해(阿海)와 알력을 빚었다. 두 번째는 그가 원나라(1217년 국호를 원으로 고침)의 성절사(聖節使)로 다녀왔을 적에 김방경이 40여명과 함께 강화도로 들어가 다시 항쟁반란을 계속했다는 혐의로 다루가치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일단 혐의가 없다고 하여 풀려났다. 그 다음해 다시 김방경 부자가 4백여명과 함께 왕과 다루가치를 죽이고 강화도를 점거하여 항쟁을 벌이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왕과 다루가치 앞에 끌려가 살점이 튀는 고문을 당한 끝에 대청도(大靑島)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렇게 그는 몽고(元)의 장수들에게 고초를 겼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원나라 사신으로 들어가서 고려의 실정을 호소하여 양곡공급을 줄이고 둔전(屯田)의 이전을 요구하여 성사시키기도 했다.
고려의 버팀목 그는 1283년 충렬왕 9년 70이 넘을 나이로 퇴직하여 한가한 나날을 보내다가 89세로 파란 많은 삶을 마쳤다. 그런데 그의 공적과는 달이 나라에서는 예장을 해주지 않아 쓸쓸한 장례를 치루어야 했다. 그에 대해 사관은 “방경은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으며 그릇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평생 동안 임금의 득실을 말하지 않았으며 비록 벼슬자리에 물러나 한가히 있을 적에도 나라 근심하기를 집일과 같이 하였고 큰 논의가 있으면 임금이 반드시 자문하였다.”( [고려사] 열전에 나옴)고 기록하였다. 이제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정리할 대목에 이르렀다. 그는 무신이면서 무신정권에 가담치 않았고 처음 대몽항전을 철저히 벌였다가 뒤에 삼별초 토벌에 동원되었고 고려왕실을 위해 몽고에 외교 솜씨를 보이며 일본정벌에 나섰다. 그런 속에서 그는 심한 갈등을 겼으며 몽고의 장수들과 계속 알력을 벌여 여러 번 문초를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늘 민생문제와 국가피폐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여 신명을 바쳤다. 그는 항몽(抗夢)과 부몽(附夢)사이에서 눈물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고려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하니 그는 비겁하거나 눈치를 살피는 타협주의자가 아닌 고려의 버팀목이었다. 뒷날 병자호란 때의 최명길의 행동과 아주 그럴싸하게 비교된다.
한국사의 주체적 인물들 이이화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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