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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충렬공 관련 역사 유적자료 소개

 

해남의 국사봉 (2006. 12. 10. 태영(군) 제공)

 

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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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의 뿌리

 

아! 저 백두대간을 타고 힘차게 타고 내려오는 기운은 노령을 지나 영암 월출에 이르러 덕음산에 기운을 북돋고, 그 기운이야말로 땅끝을 풍요롭게 하는 상승지기이노라.  

덕음산에서 출하는 하나의 기운은 두륜의 천의무봉을 만들었고, 다른 기운은 서쪽의 금강(금강골)에 이르러 천개의 봉우리와 만개의 고개를 열립케 하였으니, 곤륜의 장엄함은 백두의 시작에서 출발해 만인이 평화로운 땅끝에 그 순양함을 마음껏 발하니 머지않아 곤륜이 힘찬 기운이 솟아날 것이라.

다시 서남방으로 달리는 기운은 황산에 이르러 풍료로운 진을 구축하였으니!~  황산의 첫머리는 형제봉이 솟아올라 그 기세를 비로소 알리노니 기실 음과 양의 지기가 이 형제봉을 떠나 합일을 이루고 이로운 세상을 만들지어다.  본디 무극과 태극 속에서 음양이 나왔고 형제봉은 그 음양이 조화를 이루기 위한 황산의 근본으로 부족함이 없으리라.

 

합일을 이룬 지기는 용맥을 따라 흘러 원호마을에 이르러 철마산를 머리에 세우고, 해남의 명산 국사봉을 솟게 하였으니, 고려의 김방경 장군이 출사 전 대제를 모셔 국사를 나눈 뫼이로다.   

철마(국사봉)의 허리에는 안장이 기세를 북돋는 박차에 명혈이 증거하고, 신선이 글을 읽는 한서봉 또한 황산의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곳이라.

더욱이 명산의 기운을 받은 용맥은 서남방으로 흘러 송호의 명당곡을 이르러 지석묘를 통해 풍요로움을 증험하였고, 다시 서쪽으로 달린 지기는 복호곰 호동에 이르러 둥둥뫼를 솣구쳐 정의와 의기를 부르니 어찌 김도사형제가 분연히 일어나지 않을 손가!

대처 중앙의 대혈이 형성된 이치는 인재를 배양하는 교육의 장이 펼치기 위한 하늘의 배려였으니, 그 대혈은 관두산이 증험함이로다.

서쪽으로 뻗은 용맥의 기운은 와우산을 만들어 우항이라는 천고에 남을 큰 땅을 이루었고 누워 있는 소의 명혈지기는 해남 최고의 인걸을  탄생시킴이요, 이어지는 공룡화석지의 발견은 후대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장구한 하늘의 위대함이 아니었겠는가!  

 

힘을 더한 기운은 다시 남서쪽으로 달려, 연꽃마을에 미륵불을 산자수려한 덕음산에 복바우를 탄생시켰으니 미륵과 복바우의 명혈은 손 없는 민초들을 위한 하늘의 증험이었고 인걸은 지령이요 지령은  곧 하늘의 뜻이로다.이내 한줄기의 맑고 맑은 기운은 남쪽의 입암산으로 뻗쳐 호남 웅산을 만드노니, 호남거부의 탄생은 반증하고도 남음이요, 만호바다의 푸른 물줄기가 이를  어우러지니 수 백 년 동안 어찌 우국지사와 충렬지사가 끊김이 있겠는가!   

다른 한줄기는 서쪽으로 발하여 옥의 땅을 풍요롭게 만드니 이는 만물이 조화를 이루고 하늘이 보배를 안겨 준 이치로다.

 

이 밖에 황원은 은인처사를 많이 낳아 그들로 하여금 바다를 막아 큰 들(연당, 옥동, 삼덕포)을 생성케 하고, 큰 들과 옥토는 나라를 부강케 하는 근본이 되어 만민을 풍요롭게 하였으니 이 또한 명당이요, 명승지가 아니겠는가?

아~ 저! 아침 해 찬란히 떠오르는 황원이야말로 과연 하늘의 현묘함이 만든 풍요로운 땅이로구나!  

 

1. 김방경과 국사봉

삼별초 항쟁은 최씨 일파의 무인정권이 무너지고 강화도에서 고려조정의 개경환도 문제가 제기 되며 시작되었다.

강화도와 조정 간에 세력다툼이 심화되자 결국 배중손은 1,0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진도에 들어가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다.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한 삼별초는 한때 거제·탐라(耽羅- 제주도) 등의 30여 섬 지역을 지배하여 하나의 해상 왕국을 이루었으나, 김방경(金方慶) 등이 거느린 고려의 관군과 몽골군으로 형성된 연합군에 의해 그 세력이 많이 꺾였고, 1273년(원종 14) 공격으로 삼별초는 끝내 패망하였다. 고려 ·몽골 연합군에 의한 탐라

 

현재 구전으로 전하는 우리지역에 삼별초에 관련한 내용은 춘정마을과 삼지원 그리고 국사봉, 송호 마을의 들문과 장승에서 발견 할 수 있으며, 지금의 춘정마을의 해안가는 삼별초군의 한시적인 근거지로써 전라 삼별초 비룡호가 들고나는 비룡(飛龍)바위라는 지명유적이 남아있다. 또한 삼지원은 진도 벽파진(碧波津)과 마주보는 나루터로 김방경과 몽고장수 아해(阿海)가 삼지원에 둔(屯)을 치고 여러 날을 포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몽 연합군의 대 진도 공략기지였음을 의미한다.   

 

원종 11년(1270) 12월 김방경과 아해가 이끈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하였으나 대패하였을 때 김방경은 삼별초군에 포위되어 바다에 투신하려고 하였지만, 양동무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면서 다시 대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한 후 일시에 진도를 공격하기 전 최금술의 비기(秘記)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마도 출사 전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는 지긋지긋한 이 싸움을 끝내려는 마음으로 간절히 국사봉(國師峰)에 올라 제(祭)를 올렸을 것이다.

 

2. 삼별초와 삼지원

 

삼별초군은 원종11년(1270) 8월19일 진도에 입거하였다.

삼별초군이 진도에 정부를 세우게 된 배경은 섬 안의 땅은 기름져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장기간 항전에 유리하고, 육지와 섬사이에는 명량해협으로 유속이 빨라 해전에 약한 몽고군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유리하였으며,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개경으로 운반되는 조곡선을 탈취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는 한편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일본이나 남송과 연대를 모색할 수 있는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가졌던 것이다.

이로써 삼별초는 태조 왕건이 그랬던 거처럼 진도를 장악함으로써 전라도의 서남해안은 물론 멀리 제주도에 이르는 해상권을 완전 장악하였다.

 

사실 춘정과 삼지원은 삼별초군에게는 육지로 가는 길목이었고, 여·몽 연합군에게는 불과 지척에 있는 삼별초군과 대치 할 수 있는 서로 빼앗길 수 없는 전초기지에 해당하였다.  

그런데 김방경이 삼지원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삼별초를 친 후 패퇴하면서 물러났을 때 삼별초는 해남에 대한 마땅한 응징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해남이, 정부군이나 여몽연합군에 대하여 그다지 호의를 표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삼별초 군인들이 난을 일으킨 이유를 알려주고 있으며, 배중손, 노영희 등이 난을 주도하면서 대내에 내세운 명분을 세우고 특히 배중손과 노영희 등이 내세운 명분은 오랑캐 군사(몽고군)이 인민을 살육하니 이에 대항하여 싸우자는 것이었다.

배중손 등은 민족적 모순을 강조하여 국민의 항쟁의식을 높이고 고려 정부와 몽고에 저항하였다. 배중손은 백성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였고 국민의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결집하여 항몽 전선을 구축하였다. 이에 우리지역의 농민층의 수 천명이 가담하였을 것으로 보이고 그러한 이유에 의해 우리지역을 비롯한 해남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다.

결국 여러 차례 여몽연합군과 삼별초군과의 싸움이 벌어졌고 여·몽 연합군의 제3차 공격 때 삼별초군은 패하고 말았지만, 삼지원을 비롯한 우리 지역의 해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편집자 주) 『대동지지』진도 전고에 보면, '원종 11년 삼별초적 입거진도 장군양동무등

 

이주사토진도'에 이어, '김방경 여몽원사아해 이병일천 토진도 시적세심치 주군망풍영항 방경 아해 둔삼견원(즉 삼지원) 대진도 이진광일상지 김방경‘이라는 기사를 볼 수 있는데, 해류의 조건과 시대·환경적 요소 등으로 춘정마을 장안리에 주둔했다는 설이 제기 되고 있다.)

 

국사봉(國師峰)

▶ 위치- 전남 해남군 황산면 원호리 산 66-1, 높이: 175m       

 

우리면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오고 있는 국사봉은 동부지역에 있다. 제정분리사회였던 삼한시대에 천신이 하늘에 제사를 지냈을 만큼 명맥은 고대사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고려시대에는 남경사신이 제를 지내고, 삼별초 항쟁 때는 김방경(고려시대 명장)이 삼별초와의 전면전을 앞두고 출사 전 대제를 지냈다는 구전이 내려 올 만큼 유서가 깊다.

풍수지리에 입각한 국사봉은 그 머리가 백두대간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는 철마(鐵馬)형의 지세이다.

 

<네이버카페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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