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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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충렬공 관련 역사 유적자료 소개

 

각종 문헌 속에 있는  ‘물계서원’ 관련자료 해제 (2007. 1. 18. 태영(군) 제공)

 

1. <蘆洲集 金兌一(1637~1702)의 詩文集>

勿溪書院移建記  

金方慶(1212~1300)과 金應祖(1587~1667)를 모신 甘泉 勿溪書院의 移建 시말을 기록한 글. 李光斗의 주도로 移建이 추진되어 1697년 2월 別堂에 位版을 移奉한 후, 林秀瓊, 金著一, 李光畢, 林鳳在 등의 주관으로 일을 시작하여 윤3월에는 役事를 마치고 還安?慰安祭를 거행하였으며, 8월에는 鄭東奎, 南在衡의 주도로 廚庫까지 완성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2. <木齋集 洪汝河의 문집1620-1674 (광해군12-숙종1)字: 百源 號: 木齋>

 1) 勿溪書院?金鶴沙時告上洛公文  

    勿溪書院에 金應祖(1587-1667)를 부묘할 때 金紐(1420-?)에게 고하는 고문이다.

 

 2) 金鶴沙奉安文

    勿溪書院에 金應祖(1587-1667)를 봉안하는 글이다.

 

3. <訥隱 李光庭의 문집 1674~1756 (현종 15~영조 32) 字: 天祥, 號: 訥隱,>

 1) 勿溪書院追享奉安文

    안동 勿溪書院에 惕若齋 金九容(1338~1384)과 虛白堂 金楊震(1467~1535)을 追享할 때의 봉안문이다

 

 2) 愚川鄭公墓誌銘

    愚川 鄭?(1601~1663)의 묘지명이다. 정칙은 안동 출신으로 1627년 進士가 되었으며, 생전에 鶴沙 金應祖, 桑村 金自粹를 勿溪書院에 제향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3) 鶴沙金先生行狀

鶴沙 金應祖(1587~1667)의 행장이다. 김응조는 榮川 출신으로, 본관은 豊山이다. 南川 權斗文, 陶隱 權虎臣에게 수학하였고, 1623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 한성부우윤 등을 지냈다. 甘泉 勿溪書院과 義山 ?峯書院의 건립을 주도하였고, 사후에 追享되었다.

 

<물계서원 이건 봉안문(勿溪書院 移建 奉安文)> (2007. 2. 25. 태영(군) 제공)

 

대사간 목재 홍여하(木齋 洪汝河)지음

 

화산(花山) 높고 푸르르며 낙동강 물 맑게 흘러

지령(地靈)길러 정기(精氣)모아 신선(神仙)에서 하강(下降)하니 단우(壇宇)도 넓고 넓다.

세상(世上)에 드믄 재주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하니

때마침 태어나사 몸바쳐 보국(輔國)할제

곧은 기풍(氣風) 충천(沖天)하고 엄숙 강기(嚴肅綱紀) 떨쳤도다.

총마 어사(驄馬御史) 나가실제 죽절(竹節)같이 곧은 충성(忠誠)

신명(神明)도 감동(感動)하고 만백(蠻백=오랑캐)도 순종(順從)하다

정의(正義)세워 역적토벌(逆賊討伐) 괴수(魁首)잡아 목을 베니

인륜(人倫)좋은 동국(東國)땅에 어진 장상(將相) 위풍(威風)밝혀

동해(東海)로 군려(軍旅)떨쳐 파도(波濤)가 조용하고

생령(生靈)은 덕(德)을 입고 사직(社稷)은 혈기(血氣)찾아 미관 피발(微管被髮) 본받으니

태산(泰山) 북두(北斗) 높은 명성(名聲) 우주(宇宙)를 덮은 공적(功績)

사후 조두(死後俎豆) 마땅하고 향방(鄕邦)이 추모(追慕)하니

성사(盛事)에 운수(運數)있어 五百년 지낸 후에

부용산(芙蓉山) 기슭에 엄연(儼然)한 정사(精舍)있어

맑은 사당(祠堂) 오가(五架)로다 거북점(龜筮) 이미 치고

좋은 날 선택(選擇)하고 어진 선비 모여드니

공중(空中)에 도는 향연(香煙) 휘황(輝煌)하게 밝은 촛불

방불(彷彿)하신 그 영풍(英風)은 천만세(千萬世)를 두고 두고

나의 초예(蕉荔) 흠향(歆饗)하고 후생(後生)들을 도우소서

 

홍여하 (洪汝河 1621∼1678(광해군 13∼숙종 4))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백원(百源), 호는 목재(木齋)·산택재(山澤齋). 본관은 부계(缶溪). 1654년(효종 5) 진사에 급제하고 이어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쳤고, 사간원 정언(正言) 때 시사(時事)를 논하다 좌천되어 사퇴하였다. 1658년 경성판관으로 복직되었으나 그가 올린 상소문에서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하여 유배되었다. 그 뒤 고향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가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자 다시 병조좌랑·사간을 지냈다.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1689년(숙종 15)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尙州)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목재집》 편서로《주역구결(周易口訣)》,《의례고증(儀禮考證)》,《사서발범구결(四書發凡口訣)》,《휘찬여사(彙纂麗史)》,《동국통감제강(東國通鑑提綱)》 등이 있다.

 

※ 생각건대 물계서원(勿溪書院)은 옛날 감천현(甘泉縣) 서북 이십리(西北二十里) 물한촌(勿閑村)에 있었는데 학사 김공 응조(鶴沙 金公應祖)의 건의(建議)로 사당(祠堂)을 세워서 충렬공(忠烈公)을 봉향(奉享)하다가 경술(庚戌)년에 와서 학사(鶴沙)를 또 배향(配享)하였다. 정축(丁丑)년에는 一도(道)의 선비들이 “서원(書院)으로써 현(縣)의 한 구석에 있고 기지(基址)가 온당(穩當)치 못해서 영원(永遠)한 봉안(奉安)에 험(欠)이 있다.”하여 드디어 발의(發議)하고 현(縣)의 서쪽 三리(里) 가량 되는 고방산(苦方山)밑 천전리(泉田里)로 이건(移建)하니 천전은 곧 지금의 안동부내 감동(安東府內 甘洞) 물한촌(勿閑村)이며 현재의 경북 예천군 감천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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