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본문

p11.png 충렬공 관련 역사 유적자료 소개

 

충렬공(忠烈公) 묘소(墓所) 실전(失傳) 시기(時期)에 관한 고찰(考察) (2004. 4. 14. 윤만(문) 제공)

 

1. 高麗宣忠協謀靖難定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上洛忠烈公金方慶墓誌。

  (고려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상락충렬공김방경묘지。)

  가. 【원문】

安東之金。系出新羅敬順王。公爲十五世孫。生麗代。仕高元忠烈朝。勳業茂著。轟輵古今。載在國史及行狀。斑斑可攷。姑撮其表表者言之。則忠直信厚。得於

 (안동지금。계출신라경순왕。공위십오세손。생려대。사고원충렬조。훈업무저。굉갈고금。재재국사급행상。반반가고。고촬기표표자언지。칙충직신후。득어)

 

 天性。制行也勤儉寡默。立朝也竭忠奉國。至於行師有律。戰克攻取。珍島之役。日本之征。此其大較也。厥後內外苗裔趾美舃赫。三百年于茲。豈非所謂德厚者流光歟。墓在禮安縣治西陵洞。神道有麗王命立碑。世久無徵。姓孫禮生曾監此縣。豎碣爲標。今幷與此碣而破折。嗚呼。後之人何以知爲公之墓乎。參奉金坼,生員金坪。以外裔居墓下。與姓孫參奉慶建曁在近諸孫。謀易他石以新之。且加封植。來語余。余於公。爲母姓十三代孫。嘗拜公之墓。爲之助其資。仍識其梗曁云。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

  (천성。제행야근검과묵。립조야갈충봉국。지어행사유률。전극공취。진도지역。일본지정。차기대교야。궐후내외묘예지미석혁。삼백년우자。기비소위덕후자류광여。묘재례안현치서릉동。신도유려왕명립비。세구무징。성손예생증감차현。수갈위표。금병여차갈이파절。오호。후지인하이지위공지묘호。참봉김탁,생원김평。이외예거묘하。여성손참봉경건기재근제손。모역타석이신지。차가봉식。래어여。여어공。위모성십삼대손。상배공지묘。위지조기자。잉식기경기운。가 대부경상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

大丘莩護府使。巡察使李某。志。

(대구부도호부사。순찰사이모。지。)

《출전 : 碧梧先生遺稿卷之五 墓誌(벽오선생유고권지5 묘지)》

  나. 【기미대보 번역문】

안동김씨의 계통은 신라 경순왕으로부터 나왔으니 공은 그 18세손(☞ 오전되었음)으로서 고려 때에 출생하여 고종·원종·충렬왕 등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여 훈업이 크게 나타나서 고금을 울렸음이 국사와 행장에 실려 있음은 상세히 알 수 있으나 우선 그 특수한 것만 뽑아서 말한다면 충직하시고 신후하심은 천성에서 우러났으니 처세를 하는 데는 부지런하고 검소하시며 말이 적고 조정에 나가서는 충을 다해서 봉공하시며 군사를 통솔함에는 엄한 규율이 있어서 싸워 이기고 공격하면 쟁취하심은 진도를 평정하고 일본을 정벌하심을 봐서 크게 알 수 있다.

그 후에 내·외손들의 밟아온 자취가 훌륭하고 빛남이 지금까지 300년을 지냈으니 어찌 이른바 후덕자의 혜택이 아니겠는가?

묘는 예안 치서 지례촌(☞ 지금의 안동군 록전면 죽송동)에 있으며 신도비는 옛날 고려왕이 세운 것으로 세월이 오래되어 실징할 수 없으므로 성손 예생이 이 고을 현감으로 와서 비석을 세워 표지를 하였더니 이제 이 비석까지 부러져 버렸으니 아! 후세의 사람들이 어찌 공의 묘소인줄 알 수 있을까? 참봉 김 기와 생원 김 평은 외 후손으로서 묘하에 살면서 성손인 참봉 김 경건과 더불어 근방에 사는 여러 자손들이 다른 비석으로서 바꾸고 또한 봉식도 더하기로 계획하여 나에게 와서 말하니 내가 공에게는 외가로 13대손이라 일찍이 공의 묘소를 참배하였는바 이 일을 위해서 경비도 보조하고 아울러 그 경개를 기록하노라.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대구도호부사 이 시발 지음.

 선무랑 전행 재용감 참봉 조 우인 씀.

 황명 만력 30년 임인 2월  일 세움.

 ※ 만력 20년(☞ 30년의 오기) = 선조 35년 서기 1602년임.

《출전 : 안동김씨대동보(1979년 기미)권지1. pp200-202》

  다. 【국회님 번역문】

  --<전략>--

그 뒤로 안팎으로 후손들이 종적이 아름답고 크게 빛나기를 지금까지 300년이니, 어찌 이른바 덕이 깊은 사람이 끼친 후광이 아니겠는가?

묘는 예안현 관내 서릉동에 있고, 신도는 고려 왕명으로 비를 세움이 있었다(고 하나) 세대가 오래되어 징험할 수 없다. 후손인 예생(禮生)이 일찍이 이 현(☞ 예안현)을 살펴보고, 비석을 세우고 표식을 하였는데, 이제는 이 비석과 더불어 깨져 버렸다. 아! 뒷사람이 어떻게 (충렬)공의 묘임을 알 수 있겠는가?

  --<후략>--

《출처 : 풀어쓴 이-김 국회(익원공파, 유림학당)》

 라. 1602년 이 시발 撰, 조 우인 書로 세운 충렬공 묘갈을 보면 1602년 충렬공 묘갈 이전에 세운, 즉 지금은 깨어져 없어져 버린 忠烈公 墓碣(墓碑)이 예생(禮生)이란 분에 의해 세워졌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 예생(禮生)이란 분이 어떤 분인가가 밝혀지면 충렬공 할아버지 묘소 실전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작금(昨今)까지 후손 예생(禮生)에 대해서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와 관련하여 1500년을 전·후하여 경상도 청도군수(淸道郡守)를 하신 문온공(文溫公)의 현손(玄孫) 예생(禮生)을 소개하면서 이 문제에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마. 그런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姓孫禮生曾監此縣. 竪碣爲標. 今幷與此碣而破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접근방법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국회님 해석대로라면 ‘청도군수 예생’께서 이웃 고을 예안에 있는 중시조이신 충렬공 할아버지 묘소를 살펴보고 비석을 세우셨다고 하겠으나 기미대보 해석대로라면 반드시 ‘예안현감 예생’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문헌상(文獻上)의 김 예생(金禮生)

  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성종실록 267권 성종 23년(1492년)/07/26(갑오)

 삼척부사(三陟府使) 이 예견(李禮堅)·이산현감(尼山縣監) 이 장윤(李長潤)·지례현감(知禮縣監) 김 예생(金禮生)·강진현감(康津縣監) 김 부석(金負石)·검모포 만호(黔毛浦萬戶) 김 이장(金以章)이 사조(辭朝)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후략>--

  ○ 중종실록 022권 중종 10년(1515년)/06/29(갑신)

  --<전략>--

  순천군수(順天郡守) 김 예생(金禮生)은 지난해 여름에 정읍현감(井邑縣監)에서 체임하여 사의가 된 것이 겨우 1년입니다.

  --<후략>--

  나. 『국역 선성지(國譯 宣城誌)』

  <읍을 세운 연혁>

 본래 고구려 매곡현이었는데· · · · ·공양왕이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本朝)에 와서 현감으로 고쳤다· · · · ·태종대왕 영락 11년 계사(1413년)에 현감으로 고치고 김 길덕(金吉德)으로부터 박 간(朴桿)에 이르기까지 모두 82인이니 도합 111인이 개국 초로부터 예안현을 지켰다.

  --<후략>--(34∼35쪽)

  <공평하고 청렴하며 정직했던 명관(名官)>

  권천, …… 김 예생(金禮生), …… 등 모두 17인.(35∼36쪽)

  <현감(縣監)>

  태종대왕 영락 11년 계사년(1412년)에 감무를 없애고 현감을 부활했다. 각 도의 감무를 현감으로 개칭했다.……

  ◇ 김 예생(金禮生): 연산군 원년 을묘년(1495년) 8월 부임. 무오년(1498년) 6월 체직됨. 청렴하였으며 백성의 송사를 다스림에 오직 명쾌하였다. 일을 처리함에는 그 마땅함을 얻었다. 동헌 남쪽 청사는 모두 그가 지은 것이다.(73쪽)

《출처 : 안동김씨 홈페이지, 작성자 : 김 윤식, 작성일 : 2004/01/01》

☞ 윤식님 의견 : 예안현감 중에 '金禮生'이란 분이 계신데 청도군수공의 활동 연대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이분이 청도군수공을 이르는 것이라면 예안현감으로 계실 때 당연히 충렬공 할아버지 묘소를 돌봤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 『예안향교지(禮安鄕校誌)』

  第五節 官案

  一. 高麗時代(宣城縣) - 宣城誌에서 轉載

      --<생략>--

  二. 朝鮮時代(宣城縣) - 향교의 교장을 겸직

      --<전략>--

金 禮生(김예생) : 통선랑(通善郞), 1495년(연산군 1 을묘) 8월~1498년(연산군 4 무오) 6월 체직, 송사 처결이 오직 명확하고 동헌(東軒)과 남청(南廳)을 구축함.

     --<후략>--

《출전 : 예안향교지 pp327/예안향교/2002》

  라. 『경진보(庚辰譜)』

선조 13년(1580년)에 간행된 안동김씨 최초의 족보 “경진보(庚辰譜)”를 살펴보면 “洪”편(문온공파)에 金明理(김 명리) - 判事 孟獻(판사 맹헌) - 僉正 自壤(첨정 자양) - 縣監 禮生(현감 예생)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외에 경진보(庚辰譜)에서 예생(禮生)이란 휘(諱)를 쓰신 후손(後孫)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생(禮生)께서는 중종 13년(1518년)에 세운 당신의 묘비에 기록된 청도군수뿐 아니라 어느 고을인지 고증할 수는 없으나 현감을 지내셨음을 알 수 있고, 이것으로도 예생(禮生)께서 성종실록의 지례현감<성종23년(1492)>·선성지(宣城誌)의 예안현감<연산군 1년(1495)~연산군 4년(1498)>·중종실록의 정읍현감<중종 9년(1514년) 이전>을 지내셨음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그러나 경진보(庚辰譜)에는 밀직사공파, 개성윤공파, 군사공파 중 일부(괄 및 진의 후손), 부사공파, 도평의공파, 대호군공파, 판삼사공파, 서운관정공파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는 한계가 있어 이에 대한 보완자료가 필요합니다.

  마. 『파계도(派系圖)』

경진보(庚辰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하여 정보미(☞ 실명 미상)님이 2002. 8월부터 동년 12월 말까지 안동김씨 홈페이지에 올려 각 파 문중 소개란에 실린 파계도(派系圖)를 살펴보면 우리 선 안동김씨 15개파 중 오직 문온공파에서만 휘 예생(禮生)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1602년 이전에 세운 충렬공(忠烈公) 할아버지 묘갈(묘비)<墓碣(墓碑)>, 즉 지금은 깨어져 없어져 버린 이 묘비는 문온공 구용(文溫公 九容) 의 현손(玄孫) 청도공 예생(禮生)이 세우신 것이 분명해 졌습니다.

 

3. 청도공(淸道公) 예생(禮生)

가. 김 예생 표갈(金禮生表碣)

공(公)의 휘는 예생(禮生)이요. 안동인(安東人)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청도군수(淸道郡守)를 지냈으며 병조참판(兵曹參判) 증직되었다. 配자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인천이씨(仁川李氏)요, 감찰(監察) 만수(萬壽)의 따님이다. 2남1녀를 길렀는데 맏이 윤종(胤宗)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였고 벼슬은 경상도 좌병사(慶尙道左兵使)이며, 다음 윤선(胤先)은 진사에 등제하였다. 딸은 유 근(柳近)에게 출가하였는데 郡守이며, 서자 윤복(胤福)은 진사에 등제하였다. 묘(墓)는 계류동(溪流洞) 계좌(癸坐)의 언덕에 있다. 상하분(上下墳)으로 되어 있으며 표갈(表碣)이 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청도군수(行淸道郡守) 김예생지묘(金禮生之墓)

정덕(正德)13년 무인(戊寅 : 명나라 무종13년, 1518년) 10월13일 세우다.

☞ 청도공(淸道公) 예생(禮生) 할아버지는 1518년(중종 13년)에 졸하셨음을 알 수 있읍니다.

  나. 숙인(淑人) 인천이씨지묘(仁川李氏之墓)

음각(陰刻)에 이르기를, 고(考)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비(妣) 전의이씨(全義李氏), 부(夫) 청도군수(淸道郡守) 김공(金公)은 곧 상분(上墳)이다. 경태 병자(景泰丙子 : 세조2년, 1456년)에 태어나 정덕 신사(正德辛巳 : 중종16년, 1521년)에 졸(卒)하여 영평 계류동(永平 溪流洞)에 장사지냈다. 아들은 선전관(宣傳官) 윤종(胤宗)과 윤선(胤先)이요, 딸은 전설사 별제(典設使 別提) 유 근(柳近)에게 출가하였다.

《출전 : 가보(家譜) 번역본/김재희/1996》

 

4. 충렬공 묘소 발견 시기는.

 항용님의 기록 : 충렬공 묘소 발견 시기에 관한 논의가 일전에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이에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상고해보니 1594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래 관련 자료를 소개합니다.

<족보내 충렬공 묘소 발견과 관련한 내용 발췌>

  가. 인용 문헌 출전 : 안동김씨 제학공 파보 13P. 충렬공 조.

  나. 출판년도 : 1990.

  다. 내용

  --<전략>-- 墓所 舊譜云 安東府禮安縣 時 禮安爲安東屬縣. 而失傳二百年 萬曆甲午 始尋瑩域. 麗王所爲神道碑 姓孫禮生 所竪碣 破折. 壬寅 改封立碑. 天啓丙寅 十二世孫時讓 按節本道 以失墓時 故翰林金垓之塚 逼近犯葬 啓請掘移 且以 床石狹小 改備. 姓孫 尙璘 議置墓田定以十月上旬 每歲享祠

  라. 해석문

묘소는 옛 족보에 이르기를, "안동부 예안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예안은 안동에 속한 현이었다. 그런데 200년간 실전되어 오다가 만력 갑오(1594년)에 비로소 묘소를 찾았다.

고려왕(충렬왕)이 세운 바 있는 신도비와 후손 예생(禮生)이 세운 묘갈은 모두 부서졌다. 임인년(1602년)에 다시 봉분을 하고 비석을 세웠다.

천계 병인(1626년)에 12세손인 시양(時讓)이 본도(경상도) 안절사(관찰사)로 와서 묘가 실전해 있을 때에 한림 김 해(金垓 - 광산인)의 묘가 아주 가까이 범장(☞ 몰래 장사지냄)해 있었으므로 묘를 파내어 옮기도록 요청하였고, 또한 상석이 협소하여 다시 설비하였다.

후손 상린(尙璘)은 의논하여 묘전(墓田)을 설치하였고 10월 상순에 매년 향사하기로 정하였다.

《출전 : 안동김씨 홈페이지, 작성자 : 김항용, 작성일 : 2002/09/17 15:43》

 

5. 결론(結論).

충렬공(忠烈公) 방경(方慶) 할아버지 묘비(墓碑)와 관련하여 벽오유고(碧梧遺稿)의 기록대로 선조 35년(1602년), 당시 ‘지금은 깨어져 없어져 버린 비석’을 세운 예생(禮生)이란 분은 문온공(文溫公) 구용(九容)의 현손(玄孫)예생(禮生)이 분명하십니다.

예생(禮生) 할아버지께서는 선성지(宣城誌)의 기록대로 연산군 1년(1495 을묘) 8월~연산군 4년(1498 무오) 6월까지 예안현감(禮安縣監)을 지내셨고, 이것으로서 충렬공 할아버지 묘소는 연산군 4년(1498)까지는 실전(失傳)하지 아니하고 실존(實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2002년 안사연 여름캠프 때 충렬공 할아버지 지석(誌石)과 관련하여 광산김씨이시며, 안동시 문화원장이신 김 준식 선생께서 말씀하신 “김 효로<金孝盧, 단종 2년(1454년)~중종 29년(1534년)> 공(公)의 장례 시 충렬공의 묘지 지석(誌石)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이 통설(通說)이나 김 효로(金孝盧) 공의 생몰 연대를 고려할 때 공의 증손자인 김 해<金垓, 명종 10년(1555년~ 조 26년(1593년) 공의 장례 시 충렬공(忠烈公)의 묘지 지석(誌石)이 발견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한다. 김 해(金垓) 공은 임진왜란<선조 25년(1592년)> 다음 해에 돌아가셨는데 충렬공(忠烈公) 묘소 위쪽에 김 효로(金孝盧) 공의 묘소가 있고, 충렬공(忠烈公) 묘소 밑에 땅을 판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 해(金垓) 공의 장례 시에 충렬공(忠烈公) 지석(誌石)이 출토된 것으로 추정한다.” 및 항용님이 올려주신 안동김씨 제학공파보(☞ 1990년도 간행)의 기록을 살펴볼 때 충렬공(忠烈公) 할아버지 묘소 지석(誌石)은 김 해(金垓) 공이 돌아가신 선조 26년(1593년) 내지 선조 27년(1594년) 출토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충렬공(忠烈公) 할아버지 묘소의 실전 기간은 예생(禮生) 할아버지께서 예안현감(禮安縣監) 시절인 연산군 4년(1498년)~선조 27년(1594년) 즉 최장(最長) 96년을 넘지 않는 기간동안 실전(失傳)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기간동안에 무슨 연유로 우리 충렬공(忠烈公) 할아버지 묘소가 실전되었는지는 앞으로 계속 우리 후손들이 풀어 나아가야할 숙제가 될 것입니다만 「안동김씨 제학공 파보 13P. 충렬공 조」“묘가 실전해 있을 때에 한림 김 해(金垓 - 광산인)의 묘가 아주 가까이 범장해 있었다.”로 볼 때 김 효로(金孝盧)공 장례 시<중종 29년(1534년)> 충렬공(忠烈公) 할아버지 묘소가 훼손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b00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