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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촌김선생사적변(桑村金先生事蹟辨) - 정칙 - (2008. 1. 7. 태영(군) 제공)
내가 15∼16세 때에 종형 도사군(都事君 : 이름은 전<佺>, 군<君>은 존칭)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르기를 "예로부터 위절(偉節)이 있는 선비로써 이름이 묻히고 전해지지 않은 일이 많았다. 이를테면 고려의 김관찰(金觀察) 자수(自粹)는 아조(我朝 : 조선을 지칭함)의 개국초(開國初)를 당하여 형조판서로 징소(徵召)되었는데, 공은 그날로 길에 올랐으나 어린 아들에게 흉구(凶具 : 초상을 치를 차비를 뜻함)를 가지고 뒤따르게 하였다. 광주(廣州)의 추령(秋嶺)에 이르자 아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두 성씨(姓氏 : 임금의 뜻)를 섬길 수 없으니 나는 죽을 수밖에 없다. 마음을 숨기고 여기까지 온 것은 너희들을 위해서이다. 이곳에서 죽으면 이곳에 묻고 해골을 반장(返葬)할 것도 없으며, 또 무덤에 비를 세워 후인들에게 알릴 것도 없다. 내 명을 어기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진(自盡)하였다. 그 아들은 공의 명을 받들어 추령의 길 윗편에 장사를 지냈다. 공은 이 고을 사람이지만 영가지(永嘉誌 : 영가<永嘉>는 안동<安東>의 고호<古號>)에는 역시 그 사실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내가 서울의 믿을 만한 사우(士友)에게 들으니 공과 같은 분은 사절(死節)한 분들 중에서도 한층 솟는 분이라 하더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감탄하여 마음에 새겨둔 지 오늘까지 40년이 되었으나 널리 사적을 상고하지 못하여 항상 결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무술년(戊戌年) 봄에 우천(愚川)의 반학정(伴鶴亭)에서 조용히 학사선생(鶴沙先生 : 김응조<金應祖>를 만남인 듯)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말이 승국(勝國 : 내가 이긴 나라, 즉 고려를 뜻함)의 인물에 미쳐 내가 들은 바로써 질문을 하니 선생은 일찍이 관찰(觀察)의 성명이 있음을 듣지 못했다고 말하고, 사실이 그러하다면 그 지덕(至德)은 야은(冶隱)보다도 더 나으니 그대로 민몰(泯沒)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내가 그 말끝에 이르기를 "상락 김공(上洛 金公) 역시 드물게 보는 영걸(英傑)로 공렬(功烈)도 탁월하니, 삼태사(三太師)의 사당에 배향함이 마땅하겠다"라 하였다. 그 뒤에 선생이 나에게 서찰을 보내서 사당에 김관찰을 모시고 아울러 상락도 배향하자는 뜻으로 말하여 내가 답장을 올리기를 "김관찰의 일은 한 사람의 말만 가지고 선뜻 중대한 논의를 발론할 것이 아니라 그 자손들이 다시 실적을 제시하여 의심할 바가 없는 연후에 발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다. 미구에 김경차관(金敬差官) 홍욱(弘郁)이 기술한 그 조상 관찰공의 사적서(事蹟序)와 시(詩)를 또 보게 되었는데, 내가 들은 바와 모두가 부합하였다. 그리하여 선생께서는 다시는 더 의심할 바가 없다고 여기고 드디어 여러 원임(院任)에게 통지하여 광흥사(廣興寺)에서 모여 온 경내(境內)에 통문(通文)을 돌려 두 분을 감문(甘文 : 개령<開寧>의 고호<古號>)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아울러 배향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곧 바로 어떤 이가 여지승람(輿地勝覽)의 김관찰 이름 아래에 본조에서 벼슬하였다[仕本朝]라는 세 글자가 있음을 말하자, 선생은 그렇다면 관찰은 그만두고 먼저 상락(上洛)을 모신 뒤에 다시 통문을 내자고 하였다.
~ 이하중략 ~
희라! 어진이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유림(儒林)의 성전(盛典)인 만큼 구차해서는 안되며, 다시 몇 해를 더 기다린다고 해도 신중을 기하는 뜻에서 잘못이 될 수는 없다. 우선 포쇄할 때가 되기를 기다려 실록(實錄)을 고열(考閱)하여 취사(取舍)를 정한다면 사람들도 자연히 말이 없게 될 것이다. 지금 상락(上洛)만을 단사(單祀)하기로 통문(通文)을 발송한다면 마치 선생은 그만두는 것같이 보일는지 모르나 상락(上洛)의 충렬(忠烈)도 선생과 아울러 제사를 지내서 안될 것도 없는데, 지금 만일 이쪽을 버리고 저쪽을 취한다면 혹 외로운 나무는 숲을 이룰 수 없다는 비방이 있을 수도 있으므로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문(斯文)의 중대한 일에 나같이 하찮은 소유(小儒)가 끼여들 일은 아니므로 우선 그 본말(本末)을 기록하여 지언(知言)하는 군자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김자수 [金子粹]
본관 경주. 자 순중(純仲). 호 상촌(桑村).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다. 우왕 때 왜적 격퇴의 전공으로 포상을 받은 조민수(曺敏修)의 사은 편지에 대해 회교(回敎)를 작성하라는 왕명을 받고, 이를 거절한 죄로 돌산(突山)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전교부령(典校副令)·사재시판사(司宰寺判事)에 이르고, 공양왕 때 대사성·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었다. 숭불(崇佛)의 폐해를 지적하고 연복사탑(演福寺塔)의 중수공사 중지를 상소하였다.
뒤에 전교시판사(典校寺判事)·좌상시(左常侍)·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정세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조선 개국 후 태종 때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려가 망한 것을 비관하여 자결하였다.
정칙 [1601~1663]
본관 청주(淸州). 자 중칙(仲則). 호 우천(愚川) ·와운옹(臥雲翁). 안동(安東) 출생. 광해군의 폭정을 보고 과거를 포기한 그는 향리에서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1627년(인조 5)에야 진사시에 급제, 진사가 되었으며, 그 후 참봉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직전에 동서분당 이후 붕당의 폐해를 논하면서 왕도정치를 시행하여야만 나라와 백성이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상소하였다. 청나라와 강화하자 향리로 돌아가 우천정(愚川亭)을 지어 생활하면서 후진을 양육하는 데 전념하였다. 저서로 《우천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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