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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호루 유허비 (2008. 8. 30. 발용(군) 제공)
경남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전북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남한 4대 누각으로 불리우는 안동의 映湖樓(영호루)입니다.
충령공. 도첨의사사공 선조님의 시 편액이 걸려있고 척약재 할아버님의 영호루 관련 시도 전해옵니다. 충렬공께서 1274년 영호루에 올라 지은 시로 인하여 영호루의 창건 년도를 추정한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종인들은 안동 시향 길에 꼭 들려가는 명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조님들께서 시를 읊으신 영호루의 원래 위치는 강 건너편이죠. 결국 강건너편에서 선조님들은 우리쪽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1934년 홍수로 소실된 영호루를 1970년 현 위치에 문화재적 가치가 없는 철근.콘크리트로 흉내 낸 것입니다.
다행이 1934년 소실되기 이전의 사진 자료가 남아있고, 문화와 역사를 사랑하는 뜻있는 지역민들이 원위치에 원래 건축양식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니 반가운 일입니다. ▲ 1934년 홍수로 소실되기 이전의 영호루 모습 ▲ 1992년 세운 영호루 유허비 - 본 유허비의 위치는 안동 시가의 남쪽, 중앙선 철교와 강변도로 교차 지점에서 강변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100여미터 지점 우측 도로 옆 언덕에 있습니다. 옛 영호루의 위치는 유허비 전방 20미터 지점이었다 합니다.
영호루 유허비문(映湖樓遺墟碑文)
永嘉府의 關門인 이곳이 映湖樓의 옛터다. 背野臨水로서 앞으로 鳳凰岩과 烽枝山이 屛風같이 둘러있고 洛東江 七百里 맑게 흐르니 四時之景이 壯觀이라. 春和景明에 破瀾이 紋彩를 이루고 皓月千里에 上下樓景이 映水萬頃하므로 이름하여 영호루라 하고 嶺南 三大樓의 하나로 명성이 높다.
그 創建 年代는 未詳이나 密陽의 嶺南樓와 晋州의 矗石樓는 麗末에 建立되엇으나, 영호루는 高麗 忠烈王 初年(1274년) 名賢 金方慶이 日本 遠征에서 돌아오는 길에 故鄕인 안동에 드려 이 樓에서 詩를 지었다는 記錄을 보아 高麗 中葉 以前에 建立된 것으로 推定된다. 高麗 恭愍王이 紅巾賊의 亂을 避하여 安東에 蒙塵하면서 이 樓에 자주 逍遙하였고 還都後에 映湖樓 三字의 御筆을 下賜하니 恭愍王 十七年(1368년) 安東 判官 申子展이 樓閣을 重建하고 額字에 金을 입혀 懸額하였으며, 百二十年 後 成宗 十九年(1488년) 頹落으로 因하여 府使 金耋이 重建하였고, 明宗 二年(1547년) 七月 洪水로 流失되어, 五年 後 府使 安漢俊이 復元하였으며, 宣祖 三十八年(1605년)에 두 번째 流失되어, 七十四年 後인 肅宗 二年(1676년)에 府使 孟冑瑞가 復元하였고, 英祖 五十一年(1775년) 洪水로 세 번째 流失, 十二年 後 戊申에 府使 申益彬이 復元하였으며, 正祖 十六年(1792년) 洪水時에 네 번째 流失, 四年 後 丙辰에 府使 李集斗가 復元하였고, 百三十九年 後 甲戌(1934년) 七月 洪水로 다섯 번째 流失되어, 三十六年 後 庚戌(1970년)에 市長 金恪鉉 在職時 江 건너 南岸 現位置로 移建하고 朴正熙 大統領의 영호루 三字의 친필 額字를 거니 지체로나 創建 年代로나 全國의 樓中 단연 으뜸이다.
回想하면 物理의 興廢가 無常하여 恭愍王 後 六百四十年間 洪水로 流失된 것이 五次요 重建 復元이 七次다. 歷代 先賢들의 風遊詠詩한 곳도 여기, 여러 차례의 復元을 爲해 祖上들의 盡誠竭力한 것도 또한 여기다. 그러나 지금은 礎石마저 埋沒되고 빈터마저 分間할 수 없음을 慨嘆하여 安東市 初代 議會에서 發議되어 遺墟碑를 建立키로 하고 此役을 文化院이 擔任하여 이 碑를 세우니 雄府 安東의 傳統文化의 자취를 永遠히 後世에 傳하고저 함이다.
一九九二年 월 일 義城 金 日 大 謹撰 英陽 南 長 洙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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