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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욕의 세월을 산 고려무장 김방경 (2009. 9.22. 김영윤(문) 제공)
출전 : 한국사인물 열전(2009. 3. 2) http://kr.blog.yahoo.com/shim4ro/2899
영욕의 세월을 산 고려무장 김방경 (金方慶 1212∼1300 )
무장으로서의 길
김방경은 안동(安東) 김씨이며 경순왕의 10대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가문의 배경으로 인해 16세에 무시험으로 관직에 오르긴 하였지만,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뛰어난 덕망을 고루 갖춘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무장으로서 길을 걷게 된 것은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 兵馬判官)으로 부임하면서부터였지만, 부임 초부터 거대한 전쟁의 폭풍에 정면으로 맞서야만 되었다. 바로 세계최강 몽골군의 침공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몽골군의 침공이 시작되자 김방경은 주민들과 함께 위도(葦島)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제방을 쌓는 등 농토를 개간하는등 장기 농성체제를 갖추며 수차례에 걸친 원제국의 침략에도 끄떡없이 방어해 냈다. 하지만 고려 24대 원종이 왕위에 오른1259년 고려와 몽골의 화의조약이 성립되면서, 그의 입지는 조금 어중간하게 되어 버렸다. 원종이 즉위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최씨 무인정권을 제거하고 권좌를 차지한 김준 일당에 의해 정권이 좌우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김준은 원종이 몽골에 볼모로 가 있던 시절, 원종의 동생이었던 안경공을 왕위에 올리려고 시도할 절도로, 원종과는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김방경은 권력에 영합하지 않고 무장으로서의 길을 지켰다. 1263년(고려 원종 4) 진도(珍島)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상장군(上將軍)으로 오르기까지 하였다. 또 김준 일당과의 마찰로 인해 남경유수(南京留守)로 좌천되기도 하였지만, 왜구격퇴의 공이 참작되어 서북면병마사로 복직되었다. 그리고 잠시 사신으로 원나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때 몽골은 쿠빌라이가 황제로 등극하여 원제국을 선포한 상태였다. 쿠빌라이칸은 고려가 무력에 의한 굴복이나 투항이 아니라, 협상에 의한 항복이었다는 점에서 원종이 볼모로 잡혀 있을 때도 왕의 예로 대하였으며 고려의 독립도 보장해 주었다. 김방경 역시 인물됨과 뛰어난 학식으로 인해 쿠빌라이칸의 깊은 신뢰를 얻었다. 그런데 그가 고려를 비운사이, 고려에서는 반란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고려조정은 여전히 강화도에 있었는데, 개성으로 환도하여 왕권을 되찾으려는 원종과 대몽항쟁을 구실로 권좌를 유지하려는 김준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이에 원종은 1269년 임연(林衍)으로 하여금 김준을 제거하도록 하였지만, 오히려 임연은 김준을 제거한 후 안경공(安慶公)을 왕위에 옹립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이 원종의 태자 왕심에 의해 원제국에 알려지자, 쿠빌라이칸은 김방경으로 하여금 맹격도(孟格圖)의 군사 2천명과 합세해 진압하려 하였다. 비록 원종복위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우리민족사로 볼 때는 원제국의 앞잡이로 전락할 처지에 놓이고 만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상황이 여이치 않을 것으로 판단한 임연이 원종을 5개월만에 복위시킴으로써, 민족의 배신자로 전락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임연은 1270년 등창으로 인해 병사하고 말았으며, 그 일당역시 원종에 의해 모두 제거되었다. 이렇게 환도 반대파를 모두 제거한 원종은, 개성으로의 환도를 단행함으로써 1230년부터 시작된 몽고와의 전쟁을 종결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원종의 개경환도에 대해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권좌를 위해서도 탐욕을 위해서도 아닌 민족의 자존과 국가의 독립을 위해 일어선 삼별초(三別抄)였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이었지만, 최씨 무신정권몰락 이후에도 대몽항쟁에 언제나 선두를 지켰던 군사조직이었다. 언제나 고려를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서 싸워왔던 그들은, 하루아침에 원제국의 군사조직에 편입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1270년 배중손(裵仲孫)의 지휘아래 승화후(承化侯)를 왕으로 옹립하고 근거지를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겨 반원민족항쟁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 삼별초 진압에 대한 추토사(追討使)직을 김방경이 맡게 된 것이다.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추토사직을 맡게 된 김방경은 무척이나 난감하였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구국의 이념으로 함께 싸웠던 전우들이 아니었던가? 김방경은 삼별초 진압에 적극적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원제국의 지휘관 아해는 수만의 군사로 거듭 공격을 하였지만 그때마다 해전에서 보기 좋게 패배를 맛보아야만 했다. 그런데 1271년이 되자 상황은 조금 바뀌었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아해 대신 부임한 지휘관은 흔도(炘都)와 홍다구洪茶丘(1244∼1291)였다. 그렇다면 홍다구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의 조부와 그의 아비 복원(福源)은 1231년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해 오자 싸우지도 않고 성을 들어 몽골군에 항복했다. 특히 복원은 그 후 서경의 낭장으로 복무하면서 고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정부군의 토벌을 받고 몽골로 쫓겨간 일이 있을 정도로 뼈 속까지 매국반역자였다. 또 몽골왕실에 밀착하여 고위직에 올라 몽골이 고려를 칠 때마다 앞잡이가 되어 갖은 횡포를 다 부렸으며, 몽골에 인질로 가 있던 고려의 왕족 안경공(安慶公)을 모함하다가 몽게칸이 보낸 군사들에게 맞아 죽어 일생을 마쳤다. 안경공의 부인이 몽골의 황족으로서 그녀가 몽게칸에게 복원의 흉계를 직소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그토록 허무하게 죽었으면 그 아들 홍다구라도 정신을 차릴 만하건만, 몽게칸이 죽고 쿠빌라이칸이 즉위하자 재빠르게「억울함」을 호소, 아비의 직책을 계승했다. 철저한 아첨근성과 고려에 대한 사정을 잘 안다는 이유로 쿠빌라이의 신임을 받은 그는 고려군민총관(高麗軍民總管)이 되어, 이후 고려를 끝없이 억압하였으며 김방경과도 악연을 이어갔다. 매국변절자의 지휘 아래 있어야 했던 김방경, 더구나 그가 쳐야 할 상대는 한때 뜻을 함께하고 고난을 나누었던 전우들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김방경은 고려가 삼별초 진압에 지나치게 방관적이라는 문책을 언제까지 무마할 수 없었다. 홍다구 정도의 인물이라면, 세치 혀를 놀려 삼별초와 고려조정이 힘을 합쳐 원제국에 대해 반란을 획책하려 한다는 참언을 하는 것은 대수롭지도 않을 것이다. 김방경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반원정책이 원종의 뜻이었다면 그대로 따르겠지만, 원종은 원제국의 힘을 이용하여 무인세력을 종식시키고 또 원만한 우호 관계 속에서 피폐해진 이 땅과 백성들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지금의 고려 전력으로는 원제국의 가공할 전투력을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만 되었다. 원제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북송인 수백만명을 고려로 끝없이 밀어 넣는 인해전술도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란 말이 있지만, 김방경으로서도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또 원종의 충실한 신하였기 때문에 삼별초와 연합하여 고려조정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김방경은 삼별초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일단 김방경이 나서자, 삼별초 군도 곧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1271년(원종 12)에는 원제국과 합세해서 진도에 총공격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진도는 함락되었으며 배중손은 전사하였고, 승화후는 홍다구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고려가 아직 대몽항쟁을 하고 있을 당시 위도라는 곳에서 농성전을 해본 경험이 있었던 김방경은, 섬에서 농성하는 장단점과 공략법 그리고 방어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삼별초는 이 같은 타격 속에서도 놀랍도록 다시 부활하였다. 김통정(金通精)은 삼별초의 잔여병력만을 이끌고 제주도(濟州島)를 점령하였는데, 1년여 만에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대로 가다간 국가가 분열되고, 이것을 빌미로 원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간섭이 더욱 극심해 질 것이 분명하였다. 특히 원종 14년(1273) 1월에 삼별초는 합포(현재 마산)를 공략하여 전함 32척을 소각하고 몽고병사 10여 명을 척살하는 등의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원제국도 1만명의 원군을 증파하여 김방경을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삼고 홍다구(洪茶丘)와 함께 제주도 본진으로 총공격을 나섰다. 한편 삼별초는 연이은 승전으로 인해 다소 경비체제를 소홀히 한데다가, 3면에서 동시에 공격해 오는 1만명의 대군을 감당할 수 없어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이후 김통정은 1273년 4월에 전사하였고, 잔여병력 1천 3백 명도 포로로 잡혔다. 이렇게 삼별초의 항쟁은 3년 만에 끝났고,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김방경은 시중(侍中)이라는 최고직책에 까지 올랐다. 시중이라면 내무장관정도의 높은 직책이지만, 그 같은 명예가 과연 그가 감수해야 될 불명예를 가려 줄 수 있을까? 진정한 무장으로서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어야 하는 것일까? 자결이라는 극단적인 방법도 있긴 하겠지만, 자결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설령 그가 자결이라는 방법으로 삼별초와의 충돌을 피한다고 하여도 홍다구 같은 인물에게 전권이 돌아간다면 고려조정은 상상을 초월한 굴욕과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지원요구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고려의 충신으로서 또 한사람의 군인이자 무장으로서, 결정하기는 어려웠지만 가야할 길은 오히려 분명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원제국에 끝내 항복한 고려왕조가 그에게 드리운 무겁고도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였을 것이다.
영욕의 세월을 산 고려무장 김방경 2
1273년 3년간에 걸친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한 김방경에게 또 다른 역사의 시험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원제국의 요구에 의해 단행되었던 일본 원정이었다. 1274년 당시 고려는 충렬왕 즉위원년이기도 하였지만, 중국과 평등함을 상징하던 조종제도가 폐지되고, 왕으로 격하되기고 하였다. 이러한 때 김방경은 고려군을 지휘할 임무를 맡았지만, 이번에도 그의 직속상관은 원나라 출신 홀돈과 문제의 홍다구(1244∼1291)였다. 다만 이번에는 그동안 수없이 고려의 해안을 침범하고 백성들의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빼앗았던 왜적을 토벌한다는 대의 명분이 있었다. 물론 원제국에 소속되어 싸워야 된다는 점에서 군사들의 사기는 전반적으로 높지 못했지만, 그래도 같은 민족과 동료를 공격해야 되었던 삼별초의 항쟁보다는 나았다.
원제국의 이름으로 단행된 1차 일본원정
충렬왕 원년인 1274년 10월 3일 총 병력 4만여 명의 여몽연합은 900의 전함에 나눠 타고 합포(合浦: 馬山)항을 출발하여 대마도로 향하고 있었다. 이중 김방경 휘하의 고려 병사는 8000명이었고, 원제국군은 2만5천명 이었으며 길잡이 등을 포함한 뱃사공은 6700명 이었다. 총 도원수는 원나라 출신 홀돈이 맡았으며 홍다구가 우부원수였고, 고려의 김방경이 중군장(中軍將), 김신이 좌군사, 김문비가 우군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10월 3일 합포항을 출발한 연합군은 거제도를 거쳐 5일 밤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서해안 사스우라로부터 공격을 개시, 대마도를 정벌한 뒤 14일에는 이키도를 쳐서 그 성을 함락하였다. 다시 북구주의 태재부를 공략하기 위해 마쓰우라를 공략하고, 19일 하카타만으로 진입, 20일에 하카타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군세를 규합해 연합군에 대항했으나 수적 우세와 사거리가 더 긴 활 그리고 화약무기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0월20일 밤, 홍다구는 일본군의 야습(夜襲)을 두려워 한 나머지, 육상에 거점을 마련하지 않고 모든 병력을 병선에 재승선 시키고 말았다. 여기에는 10월20일의 전투에서 주력 병기인 몽골단궁의 화살이 다했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김방경은 육지에서 야영한 후 배수의 진을 치고서라도 반드시 결전을 치루고자 하였다. 여기에 대해 홀돈과 홍다구등은 병사가 피로하고 지쳐있기 때문에 완승을 얻기 어렵다며, 결국 병력전원을 재승선 시키고 말았다. 즉 의외로 완강한 일본군의 저항에 부딪친 원사령부는, 자신들의 목숨이 위협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철수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태풍이 불어 연합군은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었으며, 좌군사 김신이 물에 빠져 죽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고 합포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 때 돌아오지 못한 자가 절반이 넘는 1만3500명이나 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이 1차 정벌을 일본에서는 ‘문영(文永)의 역(役)’이라 부르고 태풍을 가미가제(神風)라 부르며 추앙하게 되었다.
곤욕을 감수해야 되었던 김방경. 1차 일본원정에서 홍다구와 의견마찰이 있었던 김방경은, 고려로 귀환해서도 계속 마찰을 빚었다. 우선 김방경은 좌군수 김신이 물에 빠졌을 때, 이를 구하지 않았던 부사 위득유(韋得濡)를 파면하였다. 또 진도의 삼별초를 공략할 때 전투를 소홀히 하고 민가의 재산을 약탈하여 군기를 어지럽힌 낭장 노진의(盧進義)의 가산을 몰수케 하였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지극히 정상적인 조치였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위득유와 노진의는 김방경을 모반죄로 무고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고려사에는 정확하게 나와 있지 않지만 정황으로 보아 김방경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던 홍다구와 야합을 하였거나, 최소한 그를 뒷배로 삼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1차로 다루가치에게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었는데, ‘김방경 등 43명이 반역을 음모하고 다시 강화도로 들어가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익명의 투서라 하지만 위득유 일당이 꾸민 일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재상 유경(柳璥)이 구원하여 겨우 위기를 벗어나는 가 싶었지만, 위득유와 노진의 등은 김방경을 모반죄로 다시 한번 흔도에게 무고하였다. 그리고 이번의 무고는 이전 투서보다 훨씬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들의 고발장에는 ‘김방경이 그의 아들, 사위등과 함께 왕과 왕비(쿠빌라이의 딸)를 없애 버리고 강화도에 들어가서 반역하려고 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일본 정벌 이후 군기자재를 모두 나라에 반납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자기 집에다 감추어 둔 것 등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내용이 구체적이고 또 일부 의심스러운 증거물도 나오자, 흔도는 300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충렬왕에게 달려와 김방경의 신문을 요구했다. 재상 유경은 이번에도 적극적으로 변호하였지만, 이번에는 홍다구가 나서서 김방경에게 모진 형문을 가하였는데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홍다구는 쇠줄로 김방경의 목을 둘러 죄고 못이라도 박을 듯이 하였고, 또 刑杖(형장)을 가진 자를 꾸짖어 그의 머리를 치게 했으며, 종일토록 알몸으로 세워놓았다. 날씨는 극히 추워서 그의 피부는 얼어 먹을 뿌려 놓은 듯했다>
그야말로 형문이라기 보다는 죽이기 위한 고문에 가까웠다. 그러나 김방경은 이 모진 고문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홍다구는 2차에 걸친 혹독한 고문에도 반역에 대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 채, 김방경 부자 를 대청도와 백령도로 귀양 보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되었다. 이후 홍다구는 쿠빌라이칸에게 김방경이 양곡을 저축하고 선박을 건조하였으며, 많은 병기와 갑옷을 감추어 두고 불칙한 짓을 꾀하였기에 재산을 전몰하고 귀양을 보냈다는 내용의 보고를 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의 가옥에서 찾아낸 것이라곤 갑옷 46벌 뿐이었고 기타 병장기는 없었다. 또 양곡을 저축하고 선박을 건조했다는 것 역시 세곡을 운반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결국 이러한 점이 참작되어 김방경은 사면되었지만, 홍다구 역시 오직 일신의 영달과 원제국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매국노였기에 별다른 문책을 받지 않았다.
고달픈 2차 원정의 길
1281년(충렬왕 7) 김방경은 2차 일본원정길에 나섰다. 이번에도 홍다구가 직속상관이긴 하였지만, 김방경은 도원수(都元帥)로 직급이 올랐다. 최소한 고려군에 대한 지휘권은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고려군의 위상이 나아진 것은, 고려군의 사기를 고려한 원제국의 배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이 기회에 반드시 일본의 해적행위를 근절해야겠다는 충렬왕의 의지도 담겨져 있었다. 또 2차 원정은 1차 원정과는 달리 고려군이 주력인 동로군과 남송인이 주력인 강남군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에 동로군 (東路軍)은 900척의 병선에 4만 2천의 병력이 승선하였고, 강남군(江南軍)은 3500척의 병선에 10만명의 병력이 승선하였다. 이중 강남군은 구주도의 영구적 점령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면, 실질적인 핵심전력은 1만명의 고려군이 주축이 된 동로군이었다. 이 때문에 동로군은 강남군과 일본 이키도에서 6월 15일 합류하기로 하였지만, 그보다 40여 일이나 앞선 1281년 5월 3일 합포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즉 동로군이 일본 주력을 격파하여 교도보를 확보하면 강남군이 영구 점령한다는 것이 전략의 큰 틀이었던 것이다. 동로군은 2차 원정에서도 병력의 우세를 앞세워 대마도와 이키도를 쉽사리 점령하였다. 하지만 히카타만에 해안선을 따라 구축해 놓은 20km에 걸친 방루 (防壘)에 막혀 구주도 상륙이 쉽지 않게 되었다. 이후 동로군은 전략상 중요한 거점인 시카노도를 점령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고, 일본역시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면서 밀고 당기는 쟁탈전은 6월 6일 밤부터 8일간 계속되었다. 하지만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김방경은 분전하여 왜적 300여 급을 획득한 것에 비해, 홍다구는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여 1000여 명의 병사만 잃었다. 또 역병으로 인해 3000여 명이 싸워 보지도 못하고 병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한쪽에서 심각한 전력손실을 입자 동로군은 시카노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6월 15일까지 합류하기로 하였던 강남군이, 사전 약정된 이키도가 아닌 평호도(平戶島)에 보름이나 늦게 도착하였다. 결국 태풍의 계절이 오기 이전에 일본정벌을 마치려던 여몽연합군의 작전은 강남군의 늦장 합류로 인해 중대한 차질을 빚고 만 것이다. 여기에 부상자와 병자들을 제외하고 병력을 재구성하는데 보름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며, 7월 27일(양력 8월19일)이 되어서야 일본원정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음7월 30일 밤부터 윤달 7월 1일(양력 8월23일) 사이에 불어 닥친 태풍으로 인해, 여몽연합은 전체전력의 80%에 가까운 손실을 입고 퇴각 하고 말았다. 東國通鑑(동국통감)」에는「몽골군의 돌아오지 못한 자 무려 10만, 고려군의 돌아오지 못한 자 또한 7000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무장으로 살다간 김방경 김방경은 1295년(충렬21, 84세)에 상락군 개국공(上洛郡 開國公)에 가봉(加封) 되었고, 안동지방에 식읍 1천호(食邑1千戶)를 하사 받음으로써 안동김씨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또 89세가 되는 1300년까지 천수를 누리다가 음력 8월 졸하였다. 또 7년 뒤인 1307년(충렬33)에 벽상공신으로 추층되고 시호(諡號)도 충렬(忠烈)을 하사 받는 등 한 개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영화를 누렸다.
개인적으로 볼 때, 무인으로서 김방경의 능력은 매우 출중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대몽항쟁에서 단 한 번도 그가 사수한 위도를 점령당하지 않았으며, 또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하여 국가 분열의 사태를 봉합하였다. 비록 원제국의 이름으로 단행된 일본원정이었지만, 그는 충렬왕의 명을 받들고 시행한 고려무장으로서 한 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뛰어난 능력을 우리민족과 국가를 위해 쓰여질 수 있었다면, 어느 명장 못지않은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방경은 대몽항쟁에서 다소 소극적인 면이 있었고, 또 국가체제 보호라는 대의명분으로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하는 고뇌를 감수해야 되었다. 결국 그는 뛰어난 무장이긴 하였지만, 진정한 명장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원제국에 끝내 항복하고만 고려시대의 모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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