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본문

p11.png 충렬공 전기문(1)

 

1. 출전 : <소년소녀 한국전기전집>(계몽사. 1989)

2. 제공자 : 김발용(군). 2002. 10. 19.

3. 글 : 예 용 해 /   그림 : 이 우 경

김 방 경(金方慶 : 고려 1212~1300)

 

삼별초의 불을 끈 애국의 일생

몽고가 고려를 침략하고 반도 전체가 저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힐 때, 김방경은 나라의 기둥으로서 끝까지 충성을 바쳤습니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벼슬길에 들어선 이래,그는 사사로운 부정을 물리쳐 관리들 사이에 떳떳한 기풍을 일으켰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기꺼이 뛰쳐 나가 한치의 땅도 빼앗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몽고는 중국 대륙을 휩쓸고 역사상 가장 강대한 제국임을 자랑하였으나, 김방경은 몽고 황제를 움직여 몽고군이 대동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한 일도 있습니다.

강화도로 피난 갔던 고려의 도읍이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자 삼별초군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 김방경은 몽고군과 힘을 합하여 반란군을 무찔렀습니다. 그 후 몽고의 끈질긴 압력으로 고려는 몽고의 일본침략에 가담하였습니다. 이토록 나라가 몽고의 세력에 휘둘릴때, 그는 나라를 사랑하는 한갓된 마음으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파란 많았던 89년, 그의 일생을 더듬어 봅시다.

 

글쓴 분 : 예 용 해 <한국 일보 논설위원>

 

될 성싶은 아이

 

“와아, 와아!”

동구 밖 언덕에서는 마을 개구쟁이들의 전쟁놀이가 한창입니다.

“저 쪽이다, 쳐들어가자”

손에 손에 막대기를 쥔 조무래기 한 패가 적진을 향해 등성이를 넘어갔다.

“음매에 ......”

개울 건너 풀밭에서는 송아지 우는 소리가 한가로이 들려 왔다. 이윽고 전세가 바뀌었는지 등성이를 넘어갔던 패들이 이 쪽으로 쫓겨오기 시작하였다.

“이 놈들, 내 칼을 받아라!”

쫓아오는 패의 앞장에서 나무칼을 휘두르며 소리소리 지르는 꼬마 대장이 있었다. 모두가 그 아이에게만은 감히 달려들 생각을 못 하고 마구 쫓기기만 하였다.

비탈길을 내리달려 냇가에 이르자 더 도망칠 기력을 잃었던지 아이들은 모두 헐떡거리며 주저앉아 버렸다.

“자, 칼을 받아라. 아니면 항복을 해라.

” “졌어, 졌어!”

주저앉은 패들은 맥없이 항복을 하고 말았다. 그제야 뒤늦게 쫓아온 패들은 신바람이 났다.

“야아, 우리가 이겼다!”

그들은 소리치면서 막대기로 항복한 패들을 치려고 달려들었다.

“칼을 거두어라. 항복한 적을 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자 냇물에 가서 땀이나 씻자.”

꼬마 대장이 호령을 하니 모두가 싸움을 그치고 우우 냇가로 몰려갔다. 이 꼬마 대장이 바로 뒷날 고려의 유명한 명장이 된 김방경(金方慶)이었다.

 

김방경은 고려 강종(康宗) 1 년인 1212 년에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핏줄을 이어받은 훌륭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효인(金孝印)은 성품이 엄하고,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병부 상서와 한림 학사등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붓글씨에도 뛰어나 이름이 나라 안에 너리 알려져 있었다.

어머니 또한 인자하고 다정한 성품이라 누구나가 다 우러러보는 부인이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구름과 짙은 안개를 마구 삼키는 꿈을 꾸었다. 어머니는 참 이상한 꿈도 다 있다고 신기하게 여겼다. 그 꿈을 꾸고 난 뒤에 어머니는 곧 아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 후에도 구름과 안개를 삼키는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참, 이상해요. 나는 소담스런 흰구름과 안개를 먹는 꿈을 자주 꾸어요. 아마도 내가 낳을 아기는 신선(神仙)이 낳게 해 줄 훌륭한 아기인가 봐요!”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아들이나 하나 낳아 주오.”

이윽고 어머니는 아주 튼튼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우뚝한 콧날, 부리부리한 눈동자, 두툼하고 큰 입술. 이 갓난 아기는 어딘지 모르게 어른스러웠고, 위엄이 있어 보였다. 점점 자랄수록 이 아이는 더욱 더 두드러진 점이 많았다. 남달리 아이들과 잘 어울려 노는가 하면 싸움도 잘 하였고, 고집이 세어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였다.

자기가 한번 옳다고 생각한 일은 조금도 굽히지 않고 그대로 처리해 나갔다. 병이 나도 자리에 누워 앓는 일이 없었다. 무슨 일이든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하였으며, 그것이 안 될 때에는 땅바닥에 뒹굴며 크게 울어 대곤 하였다.

“웬 고집이 황소 고집이라 말을 들어야지.”

“저 아이는 별난 아이야. 제 비위에 맞지 않으면 저렇게 땅에 뒹굴며 울어 대거든.”

“저 아이 때문에 부모도 여간 속이 썩지 않겠군.”

“그렇지만 사내 대장부가 저만한 고집은 있어야지.”

동네 사람들은 방경이 거리에 나와 뒹굴며 우는 꼴을 보고 그런 말을 주고 받았다.

 

김방경은 나이 15 세 때 이미 산원(散員; 무관의 정8품 벼슬)이라는 벼슬에 올랐고, 또 식목 녹사(式目錄事)라는 벼슬까지 겸하게 되었다. 나이가 어린데도 나라에 충성스럽고 무슨 일이든 막힘 없이 척척 잘 처리해 나갔다. 나이 많고 높은 벼슬자리에 있던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도 어린 김방경에게 깍듯이 예를 차렸고 큰 일은 모두 그에게 맡기곤 하였다. 이렇듯 김방경은 충성스럽고 의롭고 부지런해서, 벼슬이 자꾸 올라 감찰 어사(監察御史;감찰사의 종6품)가 되었다.

감찰어사가 된 그는 나라의 곡식을 보관하는 크나큰 창고인 우창(右倉)을 맡아 보게 되었다. 이 때,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들이나 그와 가까운 친구들이 그를 못살게 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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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나 거 쌀 좀 내주게나.”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아, 그래? 그것이 자네 쌀도 아닌데 그까짓 좀 내주기로서니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지 말고 좀 내주게.“

“이것이 농민들의 뙤약볕 아레서 비지땀을 흘리며 고생하여 지어 바친 곡식입니다. 그런 나라의 소중한 곡식을 사사롭게 내드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러지 말고 둘이서 나누어 가지면 서로 좋을게 아닌가?“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곡식은 나라에서 전쟁이 있을 때 군대를 위해 풀어야 할 것입니다. 또 모진 흉년이 들었을 때 노인이나 어린이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니 함부로 처분할 수가 없습니다.“

“아따 그 사람, 머리가 잘 돌지 않는군. 남들은 다 그리하는데 자네만 정직한 체해서 무얼 하겠나?“

“백만 사람이 다 그런짓을 한다 하더라도 저 혼자만은 바른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아무리 꾀어도 김방경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벼슬아치들은 자기들과는 달리, 정직하게 일해 나가는 김방경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어느날, 늙고 썩은 벼슬아치들이 세도가 있는 제상을 찾아가서 그를 모함하였다.

“지금의 어사는 전의 어사보다 일 처리를 잘 못 하는 것 같소.”

마침 그 때 김방경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재상은 그를 보자마자 나무랐다.

“어사의 일 처리가 왜 그 모양이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무슨 일 처리를 잘 못 했다는 말씀입니까?“

김방경은 누가 모함을 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일을 어떻게 처리해 나가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느냔 말이오.“

“예 그 일 말입니까. 아무렇게나 일을 하려면 못 할 것도 아닙니다. 나라의 곡식을 가지고 나 개인의 인심을 얻는 것보다는, 나 개인이 인심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의 살림을 알뜰하게 돌보는 것이 신하된 도리인가 합니다.“

김방경은 거침없이 잘라 말하였다.재상도 벼슬아치도 다 젊은 김방경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끈질긴 몽고와의 투쟁

 

김방경의 나이 20 세쯤 되었을때, 고려는 한창 어려운 고비에 있었다. 그 때 몽고는 금나라,요나라를 모두 정복하고 차차 중국 대륙으로 뻗쳐 오고 있었다. 세력이 강대해진 몽고는 마침내 고려까지 집어삼키려 기회를 엿보았다. 고종 12년인 1225년 정월,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신 몽고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 부근 함신진(지금의 의주에 고려 사람으로 가장한 거란인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자 몽고에서는 그 책임을 고려에 물어 왔다. 고려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였으나, 몽고에서는 고려를 의심하여 서로의 내왕을 끊고 말았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몽고는 고려를 치기로 결심하였으나, 자기들끼리의 정권 다툼으로 고려를 치는 일은 잠시 뒤로 미루었다. 그 동안 몽고에서는 몽고를 일으키고,중앙아시아는 물론 유럽일대까지 정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칭기츠 칸이 죽었다. 그러자 몽고는 왕위 계승 문제로 아들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웠으나, 곧 셋째 아들 오고타이(태종)가 왕위에 올라 조용해졌다. 고종 18년인 1231 년, 마침내 오고타이는 고려를 쳐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살리타가 이끄는 사나운 몽고병이 압록강을 건너 우리 땅에 발을 들여 놓았다. 눈 깜작할 사이에 약탈과 살상의 전쟁이 일어났다. 살리타의 군대는 철주(鐵州;지금의 철산)를 거쳐 귀주성(龜州城)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발걸음은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이 귀주성은 북방의 전략 요지로 일찍이 강감찬 장군이 거란의 침략군을 크게 무찔렀던 곳이다.

 몽고군이 귀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서북면 병마사인 박서(朴犀) 장군은 이들을 맞아 김경손(金慶孫) 장군과 함께 용감히 싸웠다. 엄청난 수효의 몽고군이 새까맣게 쳐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을 지키는 고려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몽고군은 고려군의 높은 사기에 밀려 번번이 패하여 도망치곤 하였다. 살리타는 어떻게 하든지 귀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하여 갖은 수단을 다 썼다. 성 밑으로 굴을 파고 들어오기도 하였고, 마른 풀을 성문에 쌓아놓고 물을 질러 성문을 태우면서까지 성 안으로 들어오려고도 하였다. 또 높은 사다리를 성에 걸쳐 놓고 성을 넘어오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박서 장군이 이끄는 고려 군사들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힘을 합해 번번히 이를 무찔렀다. 마침내 몽고군은 귀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말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이 때 귀주성 싸움을 보고 몽고군의 한 병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여러 싸움에 나가 많은 성을 공격하였지만 이와 같이 맹렬한 공격을 받고도 끝까지 항복하지 아니한 곳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이 말과 같이 그 당시 몽고군사는 천하에서 제일 강한 군사로서 쳐서 항복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 귀주성 싸움은 곧 고려인의 꿋꿋한 민족 정신을 드러낸 싸움이었다. 침략의 발길을 남으로 돌린 살리타의 몽고군은 마침내 개경을 포위하고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는 전쟁으로 백성을 더 괴롭힐 수 없다는 여론에 따라 몽고군과 화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몽고군은 72명의 다루가치(鎭守者; 지방 관청의 장관)와 수비군을 서경에 머무르게 하고 철수 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는 일시 몽고의 위력에 굴복하여 화해하였지만, 그 뒤 몽고의 힘겨운 물자 요구에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내 고려에서는 최우의 주장으로 몽고와 다시 싸울 것을 결심하고 1232년에 서울을 강화로 옮겼다. 이것은 사막 지대에서만 살아 온 몽고군이 바다를 두려워하는 약점을 이용한 것이다. 고려 조정에서는 임금과 귀족들이 강화도로 옮아가면서 백성들에게는 산 속 깊숙이 있는 성이나 또는 섬으로 피난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렇게 고려가 끝까지 몽고와 싸우겠다고 결심한 것을 안 몽고는 고종 19년인 1232년에 또다시 살리타를 보내어 고려에 쳐들어왔다. 이 때 살리타는 역적 홍복원(洪福原)의 도움으로 서경을 쉽게 함락하고 남으로 내려와 개경까지 점령하였다. 몽고군은 갖은 만행을 저지르며 점점 남으로 내려와 처인성(處仁城; 지금 경기도 용인)을 쳐들어왔다. 이 곳에서 살리타는 승장 김윤후(金允候)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지휘관을 잃자 몽고 병사들은 싸울 기력을 잃고 부랴부랴 돌아갔다.

 그러나 몽고군의 침략은 이로써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고려를 쳐부수어 저희들의 속국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고려도 이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결심이었다. 몽고군이 물러간 후에도 역적 홍복원은 약간의 몽고군을 거느리고 북부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군사를 내어 이들을 랴오동(遼東)으로 몰아 내고 국토를 되찾았다. 몽고의 2차의 고려 원정에서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당올태를 보내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당올태의의 몽고군은 북부 지방은 물론 멀리 남쪽으로 쳐들어와 지금의 전주.경주까지도 짓밟았으나 강화도만은 해전에 서툴러 치지 못하였다. 고려는 강화도의 좁은 섬에서 몽고의 대군과 맞섰다. 뭍에서 크게 소리치면 들리는 가까운 곳이었지만, 몽고군은 빤히 강화도를 바라보면서도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다만 그들은 산마루에 서서 고려군을 뭍으로 끌어 내려고 소리칠 뿐이었다.

“빨리 뭍으로 나오라. 그렇지 않으면 고려를 쳐 없앨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 너희들이 모두 너희 나라로 돌아가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

“너희들이 뭍으로 나오기만 하면 우리는 돌아갈 것이다.”

 한편, 육지에 남아 있던 백성들의 어려움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몽고군은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고, 죽이고,빼앗고, 잡아 가는 등 그들의 만행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고려에서는 극토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자 사신을 보내어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몽고군은 고려 임그이 친히 자기의 임금을 찾아볼 것을 조건으로 내세우고 물러갔다. 그러나 고려는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이를 핑계로 몽고는 4차, 5차 계속 쳐들어왔다. 특히 고종 41년인 1254 년, 6차 침입 때에는 차라대(車羅大)가 역적 홍복원의 안내를 받으며 쳐들어왔다. 이 때 고려의 피해는 참으로 컸다. 몽고군의 침략 중에서 그 피해가 가장 커, 사로잡혀 간 백성만도 20만 명이 넘었으며, 죽은 사람의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몽고 병사들이 지나간 도시나 마을은 잿더미가 되었다. 시체는 산을 이루었고 흘린 피는 내를 이루었다. 이 전란으로 아까운 복숨과 함께 귀중한 문화재까지도 많이 불타 없어졌다. 그 중에서도 경주 황룡사(皇龍寺)의 목조 9 층탑과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소중히 간직되었던 대장경 경판이 모두 불타 버린 것은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이렇게 고려의 온 나라 안이 그들의 횡포와 만행 아래 짓밟혔어도 강화로 옮긴 고려 조정은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라가 어려운 고비를 겪게 되자, 백성들은 몽고군을 쳐부수어야겠다는 염원이 커져 종교를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처님을 의지하려는 백성들의 신앙심은 마침내 팔만 대장경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 경남 합천 해인사에 간직된 그것이다.

 이 때까지도 고려는 무신 최씨 일가가 세도를 잡고 있었다. 특히 최우(崔偶)가 죽고 최이(崔怡). 최항(崔沆) 등이 권력을 잡게 되자 그 횡포가 심하여 임금과 문신들은 차차 최씨 세력을 몰아 내려고 하였다. 그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고종 45년인 1258 년에 김준(金俊) 등이 일어나 최이. 최항 등의 무리를 죽이고 마침내 왕권을 되찾게 되었다. 이로써 최충헌 이래 4대에 걸친 60 여 년 동안의 무단 정치가 막을 내린 것이다. 정권이 임금에게로 다시 돌아가자 몽고와의 싸움을 그만두자는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다음 해인 1259 년에는 태자 전(전)이 몸소 몽고에 찾아 들어가 항복할 뜻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이 때 삼별초(三別抄;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은 끝까지 몽고에 항쟁할 것을 고집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강화도에 겹겹이 쌓아올렸던 성을 허물어 몽고와 더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보여 주었고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로써 약 40년 동안의 몽고와의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이 때부터 고려는 몽고의 뜻대로 움직이는 속국이 되고 말았다.

 

의무를 다하고 백성을 먹이고

 

김방경은 감찰 어사를 거쳐 서북면 병마 판관이 되었다. 이 때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몽고의 침입이 한창 심할 때였다. 젊은 김방경은 밀물처럼 몰려오는 몽고군과 싸우는 데도 용감했지만 전쟁에 시달린 백성들의 생활을 돌보는 일도 잊지 않았다. 몽고군의 침입이 심해지자, 이들의 약탈과 학살을 피해 백성들을 이끌고 사방이 10 리밖에 안 되는 위도(葦島)로 들어갔다. 위도는 몽고군을 피해 온 수많은 피난민들로 들끓었다. 먹을 양식도 얼마 남지 않아, 그냥 있으면 몽고군에게 사로잡히기도 전에 굶어 죽게 될 어려운 형편에 이르렀다.

 

김방경은 이들의 딱한 형편을 잘 알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식량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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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적과 싸우는 틈틈이 섬을 두루 살펴보았다. 바닷가에는 평평한 갯벌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바닷물이 들어오면 그대로 물에 잠겨 버렸다.

<......음, 됐어.>

한참 살펴보던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곧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와 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바닷가로 나오게 하였다. 바닷가로 몰려 나온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러분, 조용히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짐승 같은 몽고군들은 육지에서 이리 떼같이 우리의 강토를 짓밟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곳에서 다시 그리운 고향 땅으로 돌아갈 날이 언제 찾아올지 제 자신도 잘 모릅니다. 이런 때에 언제까지나 아무 대책 없이 이렇게 지낼 수는 없습니다. 먼저 식량을 마련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모두 긂어 죽고 말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농토를 만들기 위해 이 갯벌에 둑을 쌓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굶주림을 우리네 손으로 이겨 나가야겠습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힘을 합해 이 큰 일을 맡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 힘을 냅시다.“

 마침내 큰 공사가 시작되었다. 누구 하나 몸을 사려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은 없었다. 돌을 나르고, 흙을 나르는 등 바닷가에는 개미 떼처럼 일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김방경도 싸울 때처럼 몸소 앞장서서 땀을 흘리며 일하였다. 하루 이틀 둑은 그 길이를 더해 갔다. 이렇게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김방경의 지시와 뜻에 따라 힘을 다하였으니,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 해도 안 될 까닭이 없었다. 피난민들은 김방경의 감화를 받아 힘든 것도 다 잊고 스스로 밤늦게까지 일하였다. 한 사람의 큰 뜻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케 했던 것이다

 마침내 새로 만들 밭에 씨를 뿌려, 가을에는 풍성한 곡성한 곡식을 거두어들였다. 그리하여 굶주렸던 피난민들은 식량 걱정 없이 지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다른 곳으로 피난 가서 서로 시비나 일삼던 사람들은, 추운 겨울날 알몸으로 떨다 죽어 갔다는 소문도 들려 왔다. 섬 사람들은 용기를 가지고 마을과 뜻을 합해 노력하면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살 길이 열리게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들은 다시 한번 김방경을 흠모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장군은 참 훌륭하신 분이야....”

“이런 어른을 만났으니 우리가 이 난리 속에서도 살아날 수 있었지 그렇잖으면 모두 굶어 죽었을 거아....“

“그야 두말 할 필요가 있나.”

피난민들은 모이기만 하면 김방경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식량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또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섬 안에는 물이 귀해 배를 타고 뭍으로 건너가 물을 길어 와야만 하는 것이었다. 뭍에는 사나운 몽고 군사들이 여전히 우글우글할 때였다. 자칫 잘못하면 몽고 군사들에게 사로잡히는 수가 많았다. 이렇듯 물이 귀했지만 우물을 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섬이 돌산으로 되어 있어서 감히 팔 생각을 못 하였던 것이다.

“자, 이번에는 돌산을 뚫어 우물을 파 봅시다.”

김방경은 또 피난민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피난민들은 둑을 막아 밭을 만든 김방경이라 그에게는 신비스런 힘이 있다고 믿고 정을 벼려 돌산을 뚫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깊이 파도 물은 나오지 않았다.

“장군님, 워낙 돌산이라 물 나올 가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리를 옮겨 또 파기 시작하였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위해서는 천만 사람이 무어라 해도 상관하지 않는 그였다. 두 번째 역시 실패였다.

“아무래도 틀렸습니다. 물줄기가 있어야 물이 나오지요.”

사람들은 엇수고라고 수군거리며 더 파지 않을 눈치였다.

“한 번 해서 안 되면 두 번, 두 번 해서 않되면 세 번, 몇 번을 거듭해서라도 기어코 물을 나오게 하고야 말겠소.“

김방경의 결심은 돌 같았다. 세 번째로 다시 다른 장소를 파기 시작하였다.

“글쎄, 물줄기가 있어야지요. 공연히 헛수고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두 번째만 해도 행여나 하고 들여다보던 사람들도 이제는 숫제 헛일이라고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김방경은 몽고군과 싸움을 하고 돌아와서는 틈이 나는 대로 우물 파는 일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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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쩡쩡 바위를 쪼던 정 소리가 뚝 그치더니,

 

“물이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물이 나왔다고?”

사람들이 놀라 달려가 보았다. 과연 그 단단한 바위 틈에서 맑고 시원한 물이 펑펑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야, 물이 나왔다.”

온 섬의 피난민들은 와아 몰려들어 만세를 불렀다.

“장군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야.”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장군의 끓임없는 노력에 하늘이 감동해서 물줄기를 내려보낸 거야.“

“장군은 생명의 은인이다.”

이렇게들 김방경을 칭찬하며 우러러보았다. 이제는 아무도 목마름을 참지 않아도 되었다. 또 물을 길으러 뭍에 나갔다가 사나운 몽고군에게 끌려가는 일도 없게 되었다. 백성들은 다시 한 번 김방경의 의지 앞에 머리를 숙였다. 전쟁이 끝났을때, 위도에서 쌓은 전공과 피난민을 훌륭히 돌본 이야기가 임금께도 알려져, 김방경은 견룡 행수(牽龍行首)가 되어 개경으로 영전하게 되었다. 김방경이 위도를 떠날 때 그 부하인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섬에 피난 온 백성들도 헤어지는 것을 슬퍼하여 모두 옷소매를 잡으며 울었다. 그가 탄 배가 멀리 수평선으로 사라질 때까지 섬 나루터에서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손을 흔들며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떠날 줄을 몰랐다.

 

의로우면 외로운 것

 

나라 안팎이 어수선할 때, 김방경은 견룡 행수라는 벼슬에 앉게 되었다. 나라 일이 어려운 고비에 있을 때나 어수선할 때는 벼슬살이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달라져, 자칫하면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게으름을 피우기가 쉽다. 고려의 벼슬아치들도 매한가지여서 서로 일을 미루거나 남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눈을 속여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라 살림은 점점 더 어려워지기만 하였다. 심지어는 임금 가까이에서 일을 보는 높은 벼슬아치들까지도, 세도 있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을 일삼았다. 자기 할 일는 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헐뜯는 그런 습성들이 나돌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김방경은 충성된 마음을 잃지 않았다. 나라가 어지럽고 벼슬아치들이 썩으면 썩을수록, 그 가운데서 성심껏 일하는 사람의 충성은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법이다. 그는 벼슬이 어사 중승(御使中丞)으로 올랐다. 김방경은 나라의 법을 잘 지켰을 뿐 아니라, 권세가 있다고 해서 아첨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마음이 곧고 절개가 푸르러 원종(元宗) 4년인 1263년에는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승진하였다.

 그 무럽, 좌승선(佐丞宣)의 벼슬자리에 앉아 있던 유천우(兪天遇)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높은 벼슬아치들에게는 아부와 아첨을 일삼았다. 그러나 자기보다 벼슬이 낮거나 비슷한 사람에게는 행동이 거만하였고 또 트집을 잘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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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우연히 길에서 김방경과 마주치게 되었다. 김방경은 말에 탄 채 가볍게 고개만 끄덕하였다. 이를 본 유천우는 또 트집을 잡았다.

“어찌 그대는 말 위에서 고개만 끄떡이고 마는가? 모든 사람이 말에서 내려 깊이 허리를 꺾고 절을 하는데....“

유천우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은 김방경은 조용하게 대답하였다.

“그대도 3품(三品) 벼슬이요, 나도 같은 3 품 벼슬인데, 어찌 벼슬이 같으면서도 내가 필요 이상으로 말에서 내려서까지 절을 할 수 있겠소?“

이 말을 들은 유천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 얼굴을 붉으락 푸르락 하면서 시비를 걸어 왔다. 그러자 김방경은,

 

“지금 날은 저물고 내 갈 길이 바쁘니 이만 합시다.”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음, 어디 두고 보자.”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 유천우는 일마다 트집을 잡아 김방경을 해치려 하였다. 김방경의 친척이나 또는 그와 가까운 사람이면 모두 벼슬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또다시 벼슬을 하려고 해도 도무지 뽑아 주지를 않았다. 이러한 일은 모두 유천우가 권신들에게 뇌물을 써서 일을 꾸몄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방경은 조금도 굽히는 법이 없이 태연하였다.

 1263년, 김방경은 상장군이 되어 진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치기 위해, 전라도 지방에 가서 군인을 뽑게 되었다. 그 때 마침 그 고장에 유천우의 큰 농장이 있었다. 거기서 일하는 장정들도 많았다. 그러나 김방경은 일부러 그의 농장에서 일하는 청년들을 뽑아 앙갚음하는 일이 없었고, 모든 일에 공평히 하였다. <만일 농장에서 일하는 장정들을 모조리 군인으로 뽑는다면, 내가 유천우와 원한이 있어 그러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마땅히 경계해야 할 점이다.> 그 고장 사람들은 김방경의 이런 처사를 보고 모두 그를 어진 분이라 우러러보았다.

 

오직 국가와 민족만이

 

고려가 몽고와 의좋게 지내기 위해 원종의 아들 심(諶)이 연경으로 들어간 틈에, 고려에서는 또다시 피비린내나는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원종 9년인 1268 년, 최씨 일파를 무찌른 김준(金俊) 형제가 그들과 공과 힘을 믿고 행패를 부렸다. 그러자 다시 부하이던 임연(林衍)이 김준 형제를 죽이고 권세를 잡았다. 새로 정권을 쥔 임연은, 임금 원종이 자기를 싫어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임금을 억지로 내몰았다. 그러고는 그 동생인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받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는 곧 중서 사인(中書舍人) 벼슬에 있는 곽여필(郭汝弼)을 몽고에 보내어, 임금은 병이 나서 아우에게 그 자리를 물려준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하였다. 이 때 왕자 심은 고려로 돌아오는 길에 이 소문을 듣고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였다. 그러다가 차차 그것이 거짓임을 알게 되자 발길을 돌이켜 연경으로 돌아갔다. 왕자는 몽고의 세조에게 임연 일당을 쳐부수어 주도록 사정하였다. 몽고의 세조는 이 틈을 타서 고려의 정치에 철저히 간섭할 것을 마음먹고 먼저 알탈아불화(斡脫兒不花) 등을 보냈다. 알탈아불화는 고려에 닿자마자,

“원종은 과실이 있단 말을 일찍이 듣지 못하였는데 어찌 신하가 마음대로 하는고! 만일에 무슨 잘못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먼저 우리 황제에게 상의하고, 그런 다음에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일의 순서가 아니겠는가!“

하고 나무랐다. 임연은 시중(侍中) 이장용(李藏用)에게 간청하기를 제발 몽고로 들어가서 이 일을 무사히 해 달라고 하였다. 이 때 이장용은 굳이 사양하면서 김방경을 추천하였다. 이장용이 김방경을 추천한 이유는 몽고의 세조도 김방경의 용감하고 성실한 인품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이런 어려운 임무를 감당할 사람은 김방경밖에 없었던 까닭에서였다.

 마침내 김방경은 9 월 초에 대장군 최동수(崔東秀)와 더불어 사신들을 이끌고 강화도를 떠나 몽고로 갔다. 김방경은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몽고가 트집잡는 것을 미

리 막기 위해, 이번 일이 임금의 병으로 할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몽고의 세조는 자기 앞에서 그 사실의 진상을 밝히려 하였다. 그러고는 곧 흑적(黑的)등을 보내어 원종 형제와 임연 등을 몽고로 데려오라고 명령하였다. 세조는 또한 두련가(頭輦哥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 국경에 대기시킴으로써 고려를 위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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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에 질린 임연은 흑적을 자기 집에 불러 크게 잔치를 벌이고 그를 구슬리는 한편 원종을 다시 왕위에 오르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로써 임연은 몽고로 끌려가는 것만은 면하였다. 다시 왕위에 오른 원종은 그의 아들 순안후(順安侯) 종(琮)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몽고 사신 흑적과 함께 몽고로 가야만 했다. 이에 앞서 몽고의 세조는 고려의 왕자 심의 청을 듣고, 맹격도(孟格圖)로하여금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고려에 가서 임연의 일을 간섭케 하려 하였다.

 이 때 몽고 정부에서는 고려 세자 심에게 이같이 말하였다.

“지금 맹격도가 고려 서경에 가서 오랫동안 머물게 있게 되면, 임연은 아마도 우리 군사의 양식을 대주지 않을 것입니다. 임연과 한패가 아니면서도 임연이 두려워할 그런 인격을 지니고 있는 분을 같이 가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 때 김방경은 마침 사신으로서 몽고의 서울 연경에 가 있었고, 시중 이장용도 역시 같이 있었다. 나라의 중신이요, 또 고려의 운명을 어느 누구보다도 걱정하여 그 충성된 마음을 모두가 우러러 마지않던 김방경을 이장용은 추천하였다.

“이번 일에는 김방경이 아니면 적당한 사람이 없는가 합니다. 김 장군은 일찍이 우리 나라 북쪽에서 국경의 경비를 맡아 적이 조금도 우리 나라를 넘보지 못하게 했던 용감한 장군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 곳 벼슬아치들이나 백성들이 한결같이 김 장군의 명령을 어려워하고 또 그 인격을 따랐습니다. 또 두 번씩이나 거듭 북쪽 국경의 수비를 맡았던 명장이 아닙니까.“

고려 세자 심은 쾌히 승낙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소.”

세자는 즉시 김방경의 군사를 맹격도의 군사와 같이 가게 하였다. 이 때 김방경의 가슴 속에는, <어떻게 하면 몽고 군사를 나라 안에 끌어들이지 않고, 어지럽

게 헝클어진 나라의 형편을 바로잡아 모든 백성이 마음놓고 살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김방경은 떠나기에 앞서 한 가지 다짐을 받고자, 조용히 그러나 신념에 찬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지금 군사가 서경으로 밀려 가서 대동강을 건너선다면, 개경에서는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당황하고 겁에 질려 큰 혼란이 빚어 질 것입니다. 그러니 세자께서 몽고 황제의 승낙을 받아 무슨 일이 있어도 군사가 대동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결정을 지어 주십시오.“

왕실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함부로 자기 의견을 내세워,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자는 고집을 부리는 것은 자기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김방경에게는 자기 한 몸의 안전이나 명예 같은 것은 언제나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나라와 백성들의 먼 앞일을 생각하였을 뿐이었다. 이 충성된 마음이 통해 몽고의 군사는 단 한 발짝도 대동강을 건너지 못한다는 몽고 황제의 명령이 내려졌던 것이다.

 

어지러울수록 꿋꿋

 

임연과 같은 어리석은 무리가 나라 안을 어지럽히고 있을때, 한편에서는 나라를 배반하는 매국노의 무리도 있었다. 서북면(西北面)에 있던 최탄(崔坦)이 바로 그런 자였다. 최탄은 서묵면 병마사(兵馬使)의 기관(記官)이라는 벼슬을 하던 자였다. 그는 임연의 무리를 쳐부순다는 핑계로, 용강(龍堈). 함종(咸從), 삼화(三和) 등지의 백성을 꾀었다. 그는 먼저 함종 현령(縣令)을 죽인 것을 비롯하여, 그 일대의 벼슬살이하는 관리와 군사와 백성들을 마구 죽였다. 그러고는 차차 북쪽으로 쳐올라가면서 용주 . 영주 , 철주 . 서주 . 자주 등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런 최탄이 몽고 장수에게 거짓말하기를,

“고려는 장차 온 나라 사람들을 바닷속 섬으로 들어가게 하고 우리처럼 북쪽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죽일 계획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북쪽 여러 성에 와 있던 수령들을 모두 죽이고 이제 거룩한 몽고에 이 사연들 알려 드리는 것입니다.“

하고는 사로잡은 의주 부사(義州府使) 등 22 명의 고려 벼슬아치들을 바쳤다. 그리고 몽고군에 가담하여 고려를 배반하였다. 뿐만 아니라, 북쪽 50 여 개 성도 함께 몽고에 바침으로써 자기의 출세와 영화를 꾀하기에 바빴다. 임연의 무리보다 몇 갑절 더 간악한 자였다.

 몽고의 세조는 최탄 등의 역적 무리들에게 상을 후히 주었다. 이어 몽가독(蒙哥篤)을 안무 고려사(安撫高麗使)로 임명하여 군사 3000 명을 주어 서경을 지키게 하였다. 그 곳 이름도 고쳐 동녕부(東寧府)라 하고, 자비령(慈悲嶺)을 경계삼아 그 북쪽은 모조리 저희 땅이라 일컫게 되었다. 최탄은 반역을 한 댓가로 동녕부 총판이라는 벼슬살이를 얻어 좋아하였으나, 역사에 길이 추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1 년이 지나 최탄 등이 몽고 병사를 좀더 보내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그러자 몽고 장수 맹격도가 재 군사를 이끌고 서북의 여러 성을 다스리러 나왔다. 이 때 김방경도 그와 함께 나오게 되었다. 김방경이 조국 땅에 발을 들여 놓자, 그 고장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분한 마음을 호소하였다.

“김 장군께서 만약 이 곳에 계셨더라면 최탄과 같은 역적이 꼼짝 못 했을 것을..... 이렇게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편, 최탄 등 역적의 무리들도 자주 김방경에게 와서 비위를 맞추려 하였다. 그것은 저들이 몽고군의 힘을 빌려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으려는 더 끔직한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 맹격도가 김방경을 존경하고 있는 터여서 맹격도를 가까이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김방경의 뜻을 거스르지 않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잔꾀에 넘어갈 김방경이 아니었다. 다시 최탄의 역적 무리들은 맹격도에게 갖은 아첨을 다하였다. 끝내 맹격도는 그들의 수단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런 일로 해서 고려의 운명은 고비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기 전, 고려의 원종은 몽고의 압력에 못 이겨 몽고 황제를 만나러 친히 몽고에 들어갔다. 우리 나라의 임금이 이웃 나라의 임금을 만나고자 나라를 비운 것은 역사상 이것이 처음이었다. 원종은 나라의 앞날을 위해 분함과 수치를 참고 몽고로 들어갔던 것이다. 임금이 몽고로 들어가자, 임연은 몽고에 들어간 임금이 몽고군사를 이끌고 와서 자기를 해칠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었다. 그는 신의군(神義軍)을 초도(椒島)로 보내어 진을 치게 하고는, 야별초(夜別抄)를 각 지방에 파견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것을 눈치챈 최탄은 살며시 맹격도에게 다시 고려를 모함하기 시작하였다.

“임연을 중심으로 한 고려 군사가 힘을 모아 장군이 이끄는 몽고군을 쳐부수고 멀리 제주도로 도망치려 하고 있습니다. 사냥 간다는 핑계로 나가 보시면 고려군이 활발히 움직이는 것을 환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필시 몽고군의 앞을 가로막고 싸움을 걸어 올 것입니다. 장군께서 먼저 이들을 쳐부수고 또 저희들에게 알려만 주신다면, 저희들은 수군(水軍)을 풀어서 강화도 근해에 있는 볼음도와 말도로 쳐들어가겠습니다. 한편 몽고군은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손돌목을 지키면 고려군이 꼼짝 못 하고 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몽고 황제께 말씀을 드려 개경을 친다면, 그 많은 금은 보화와 어린이들과 부녀자들은 모두 우리 차지가 되지 않겠습니까?“

맹격도가 생각해 보니 천번 만번 자기와 몽고를 위해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 최탄, 자네가 시키는 대로 해 보겠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있던 최탄의 부하 한 사람이 몰래 김방경에게 그 흉계를 알려 주었다. 그는 아무리 최탄의 부하라고는 하나 나라를 팔아먹는 모의를

알고서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김방경은 말을 타고 맹격도 장군의 숙소를 찾아갔다. 숙소 뜰 앞에는 몽고군들이 수없이 열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김방경은 그 군사들이 무엇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곧 눈치챌 수 있었으나 넌지시 물었다.

“도대체 이 군사들은 어디로 가려 합니까?”

“예, 하도 세월을 보내기가 지루하여 오늘은 사냥을 좀 가려 합니다. 김 장군도 같이 가 보지 않으시려오?“

“사냥은 어느 지방으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대동강을 건너서 초도 쪽으로 가려 합니다.”

“지난날 몽고 황제가 명령하기를 대동강을 건너지 말라고 했거늘, 어찌 그대는 대동강을 건너가여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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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사람이 본디 말타고 사냥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황제께서도 아시는 바인데, 김 장군은 어찌하여 사냥도 못 하게 하는 것이오?“

“사냥을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니오. 오직 당신들의 황제가 명령한 바를 당신들로하여금 지키게 하려는 것뿐이오. 굳이 사냥을 해야겠으면 당신들 황제의 양해를 받고 하시오.“

김방경은 이들이 대동강을 건너지 못하게 따졌다. 그러는 한편 김방경은 몰래 사람을 시켜 초도에서 군사를 빼돌리게 하였다. 나중에 닥칠지도 모를 환란에 대비하여서였다. 이쯤 되자 맹격도도 김방경의 사람됨이 매우 충성스러운 것에 새삼 감명을 받고 이렇게 일러 주었다.

“고려는 서울 개경을 쳐부수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은 최탄의 무리뿐 아니니, 김 장군께서는 깊이 명심하시오.“

삼별초의 난

 

원종 11 년이 1270 년, 몽고에서 굴욕적인 약속을 하고 돌아온 임금은 오래도록 몽고에 대항하여 싸워 오던 강화도를 버리고 개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에도 삼별초군은 끝내 개경으로 돌아갈 것을 반대하고 몽고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개경으로 돌아간 원종은 삼별초군의 해산을 결정하고, 김지저(金之氐) 장군을 보내어 이 소식을 알리는 한편 그들의 명부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 때 삼별초군은 혹시 그들의 명부를 몽고에 넘겨 주려는 게 아닌가 의심하여, 배중손(裴仲孫)을 중심으로 몽고와 고려 조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원래 삼별초는 최충헌이 정권을 잡았을 때 도적을 막기 위하여 야별초라는 특수 부대를 조직하여 각 도에 파견라였던 군대이다. 그러던 것이 후에 그 수가 늘어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었다.

몽고의 침입이 있자, 몽고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용감히 탈출한 사람들을 따로 모아 별초 부대를 조직하였다. 이 부대를 신의군이라 하였다. 신의군과 좌우 양별초를 합친 것을 삼별초라 한다. 삼별초는 강화의 수비를 맡는 한편 가끔 지방으로 내려가 몽와의 싸움에서 무훈을 세운 용감한 부대였다. 삼별초군의 세력이 날로 커지자 몽고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 조정에서도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몽고는 고려에 대하여 삼별초를 치라고 성화가 대단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로 있던 김방경을 토벌군 대장으로 임명하여 가장 세력이 큰 전라도 지방의 삼별초군을 무찌르게 하였다.

 그러나 김방경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삼별초군은 같은 고려 사람이 아닌가! 김방경은 생각하였다. <삼별초군의 정신은 옳다. 그러나 몽고에 반대하는 하나의 집단

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될지 모를 몽고와의 불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하루 속히 이들을 무찔러야 한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로다.> 김방경은 그의 부하와 몽고 군사 1000여 명을 거느리고 반란군이 도사리고 있는 전주와 나주 방면으로 내려갔다. 그 때 먼저부터 전주와 나주를 지키고 있던 군사들은 삼별초군에게 항복할 것만 생각하고 있을뿐, 그들과 싸울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김방경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한 꾀를 내어 가장 믿을 수 있는 부하를 전주로 보내면서 명령하였다.

“김방경 장군이 군사 1 만 명을 거느리고 곧 이 곳을 구하러 올 것이니 그 군사들의 밥을 지어 놓으라고 전하여라.“

이 말이 전주성에 전해지자 오늘 내일 항복해야겠다던 전주성은 갑자기 활기를 뛰기 시작하였다. 한편, 반란군도 김방경 장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진도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 뒤 김방경은 진도가 바라보이는 곳에 이르러, 진을 치고 그들을 쳐부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진도에 진을 친 삼별초군은 매우 강하였다. 김방경과 함께 온 몽고 장군 아해는 지레 겁을 먹고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동안 삼별초군과 토벌군 사이에 여러 번 싸움이 있었으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은 채 해가 바뀌었다. 몽고 황제는 겁많고 옹졸한 아해를 불러들이고, 새로이 흔도(忻都)와 홍다구(紅茶丘)를 보내어 삼별초군을 치게 하였다.

 1271 년 5 월, 마침내 토벌군과 삼별초군 사이에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아무리 용감한 삼별초군일지라도 수많은 토벌군 앞에 하나하나 쓰러져 갔다. 토벌군은 마침내 진도에 상륙하였다. 이 때 고려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은 몽고 장수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도 전사하고 말았다.

 진도가 함락되자 삼별초의 남은 무리들은 김통정(金通情)의 지휘 아래 80 여 적의 배를 타고 멀리 탐라(제주도)로 도망갔다. 김방경은 삼별초군이 버리고 간 재물들을 서울에 보내어 주림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죄 없이 끌려 온 백성들과 포로들을 모두 풀어 주어 그립고 그립던 부모 형제를 만나게 하였다. 싸움터에서는 비길 데 없이 용감한 김방경이었으나 한번 싸움이 그치면 후하게 덕을 베푸는 장군이었다. 따라서 그 높은 인품을 우러러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온 김방경은 그 공으로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라는 높은 벼슬을 더하게 되었다. 한편, 고려에 대한 원나라(원종 12 년인 1271 년부터 몽고는 나라 이름을 원이라 고쳤음)의 간섭은 날로 심해 갔다. 특히 원나라는 앞으로 일본을 치기 위하여 제주도를 그들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에는 삼별초군이 김통정의 지휘 아래 철통같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원의 세조 쿠빌라이는 사신을 보내어 홍다구와 함께 제주도를 정복할 것을 고려에 강요하였다. 고려에서는 할 수 없이 김방경을 행영 중군 병마 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삼고 제주도 토벌군을 일으켰다. 원나라에서도 흔도와 홍다구를 보내어 군사를 일으켰다.

 원종 14 년인 1273 년 2월,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 1 만 명은 배 160 척에 나누어 타고 제주도로 쳐들어갔다. 삼별초군은 끝까지 맞서 싸웠으나 워낙 수가 모자랐다. 성은 무너지고 토벌군은 물밀 듯이 성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김통정은 이미 싸움에 진 것을 깨달았다. 그는 무하 70 여 명을 이끌고 한라산 깊숙이 도망쳐 들어갔다. 그러고는 나무에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끓고 말았다.

 삼별초의 난은 이렇게 평정되고 말았지만, 그들이 3,4년 동안 세계 대제국인 몽고 세력에 끝까지 항쟁하였다는 것은 역시 고려 무인의 투쟁 정신과 굽힐 줄 모르는 고려인의 기개를 보여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싸움이 끝난 다음, 김방경은 부하 1000명과 원나라 군사 500명을 제주도에 남겨, 그 지방에서 다시는 난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고, 나머지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로 돌아왔다. 이 때 그는 그의 아들 흔(忻) 등을 급히 보내어, 싸움에 이겼다는 것을 미리 임금에게 알리고는 개경으로 개선하였다. 임금은 이를 기뻐하여 김방경에게 빨간 비단 신을 내리고는 그 공을 크게 치하하였다. 장졸들에게도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 각각 공에 따라 벼슬을 높이고 상을 주었다. 이번 싸움의 공으로 김방경은 시중(侍中)이 되었고 개부의 동삼사(開府儀同三司)라는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김방경의 가슴은 울적하였다. 비록 삼별초군이 나라에 대하여 반대는 하였으나 끝까지 몽고에 대해 투쟁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같은 겨레였다는 데서 김방경의 가슴은 아팠던 것이다.

 

억울한 죄인

 

 원나라는 고려 원종 15년인 1274 년, 드디어 일본에 쳐들어갈 군사를 일으켰다. 고려는 그 해 9 월, 원종이 돌아가고 태자 심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임금이 되었다. 이가 곧 충렬왕(忠烈王)이다. 일본 원정군은 그 해 10월 초순, 900여 척의 배로 합포(마산)를 떠났다. 이 때 김방경은 도독사(都督使)가 되어 5300 여 명의 고려군을 이끌었다. 원나라에서는 흔도가 도원수가 되어 2만여 명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은 일본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쓰시마(대마도)를 우선 공격하였다. 그리고 또 이키 섬(壹岐島)으로 쳐들어가 적을 크게 무찔렀다. 파죽지세로 일본의 본토에 상륙한 고려와 몽고 연합군은 가는 곳마다 여지없이 적을 무찔렀다. 특히 김방경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용맹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고려군이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을 본 몽고의 장수 흔도는 혀를 내두르며 탄복하였다. 그리하여 고려군이 싸우는 것을 먼 발치에서 보고만 있던 그는 해가 저물자 웬일인지 병사를 거두어 더 싸우지를 않았다. 김방경은 흔도와 홍다구에게 속히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먼 길을 쳐들어온 군사는 그 용감함을 당할 수가 없는 법이오.

우리 군사는 수가 적다고는 하나 벌써 적중에 있으니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지 않소? 지금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오. 왜적들을 한꺼번에 무찌르는 것이 좋을 듯하니 싸움을어서 계속합시다.“

 흔도는 이제 자기들은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우겼다. 이 때 해마다 불어닥치는 폭풍이 일기 시작하였다. 배는 돛이 부러지고 배가 뒤집히는가 하면, 바닷가 바위에 부딪쳐 가라앉는 등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 때 물에 빠져 죽은 병사가 1만 3500여 명에 이르렀고 가라앉은 배도 200여 척이나 외었다. 할 수 없이 고려와 원나라 연합군은 군사를 돌이켜 합포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김방경의 의견을 조아 왜군을 무찔렀던들 이 같은 비극이 나지 않았을 것을, 오로지 흔도의 겁많은 판단이 처참한 결말을 불러 왔던 것이다. 일본 원정에서 돌아온 김방경은 상주국 판어사 대사(上柱國判御使臺事)의 새 벼슬에 올랐다.

 충렬왕이 새로 왕위에 오르자, 나라의 제도도 고쳐졌다.김방경은 다시 참의 중찬 상장군 판전리 감찰사사라는 긴 이름의 벼슬에 오르게 되었다. 충렬왕 2년임 1276 년, 김방경은 원나라로 가서 세조를 만났다. 이 때 김방경의 자리는 원나라한테 정복된 송나라 신하들의 누구보다도 높은 자리에 마련되었다. 그뿐 아니라, 원 세조는 그의 전공을 높이 칭찬하면서 호도 금패를 내렸다. 이것은 오늘날의 훈장과 같은 것으로서, 고려 사람으로 호도 금패를 받은 것은 김방경이 처음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고려에 와 있던 원나라 장수 흔도가 김방경 장군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황제가 명령하기를 이 곳에 있는 원군은 내가 다스리고,

고려군은 그대가 다스리라고 하였소. 그러나 그대는 무슨 일에 있어서나 임금만 내세우고, 또 임금은 언제나 그대만을 내세우고 있으니 대체 누가 그 소임을 맡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소.“

흔도로서는 꼬집어서 하는 말이었다.

“밖에서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마땅히 장수가 다스릴 것이며,

안에서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마땅히 왕명을 받들어 시행할 따름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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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 장군의 말은 당당하였다. 망신을 주려던 흔도는 그만 무색해져서 한동안 망설이는데 때마침 뜰 아래에서 노는 새끼새가 눈에 띄었다.

“여봐라, 저것을 잡아 오너라!”

옆에 있던 군졸이 새끼새를 잡아다 바치자, 흔도는 억센 손아귀로 움켜쥐고 이리저리 희롱하였다. 새끼새는 짹짹거리며 어미를 찾아 울었다. 김방경은 그것을 보자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미새가 처마 끝에 날아와서 우짖으며 새끼를 놓아 주기를 바라는 듯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김방경은 그 어미새와 새끼의 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얼마 있다가 흔도는 갑자기 새끼새를 뜰 아래로 홱 내동댕이치며 그 어린 목숨을 단숨에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김 장군 어떻게 생각하오?”

하며 시비조로 물었다. 야만인인 원나라 사람들은 문화가 저희들보다 발달한 고려의 선비나 무사들을 늘 이런 짓궂고 엉뚱한 짓으로 애를 먹이려 들었다. 그 눈치를 알고 있는 김방경은 넌지시 대꾸하였다.

“농부들이 땀 흘려 지어 놓은 곡식을 산새 떼가 덤벼들어 까먹고 있소. 지금 당신이 새끼새를 죽인 뜻은 농부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고자 한 것이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소?“

그러자 흔도가 또 입을 열었다.

“내가 고려 사람들을 보건대 다 글을 잘 하고 부처님을 섬기며 언제나 우리를 야만스럽다고 업신여기는데, 우리가 하늘로부터 내려받은 풍속은,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나 필요한 짐승을 마구 죽이는 일이오. 당신들은 우리가 함부로 생명을 끊으니 하늘의 미움을 받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정작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풍습은 무엇이든지 때려 죽이라는 것이오. 우리는 이에 따를 뿐이오. 글 잘 한다고 뻐기는 고려 사람들이, 함부로 사람이나 짐승을 죽이는 야만인 원나라 사람 밑에서 꼼짝 못 하게 되는 것도 다 하늘의 뜻인 까닭이오.“

전쟁에서 용감한 것으로나 평소의 글 실력에서나 김방경에게 늘 미치지 못했던 흔도가 이런 억지로 위세를 부리려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우리 나라를 재배하던 원나라 장수도 김방경 앞에서만은 함부로 굴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김방경 장군은 이렇듯 당당하고 충성심이 강하였지만, 워낙 세월이 어지러운 때라 시기하는 무리가 많았다. 여러 가지로 김방경 장군을 헐뜯고 모함하였다.

 원종 12년인 1271 년, 진도에서 삼별초군을 공격할 때 김방경 장군이 적과 통하고 있다고 모함한 무리가 있어서 몽고인들의 심문을 받은 일도 있었다. 그 뒤 충렬왕 4 년인 1278 년, 위득유(韋得儒)와 노진의(盧進義) 등이 또 김방경을 모함하였다. 김방경이 일본을 치러 갔을 때, 위득유는 좌군사 김신(金侁)이 배가 뒤집혀 물에 빠져 죽게 된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은 일이 있었다.

 이 때 김방경은 위득유를 파면시켰다. 이 후부터 위득유는 김방경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노진의는 김방경이 진도에서 삼별초군을 칠 때, 싸우지 않고 죄없는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 자기 욕심을 채웠다. 김방경은 이를 괘씸하게여겨 그의 재물을 거두어 나라의 것으로 삼았다. 노진의는 이것으로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들 두 사람은 흔도를 찾아갔다.

“김방경은 임금과 원나라의 장수들을 죽이고 강화도로 들어가 싸우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평소 김방경 장군을 좋게 여기지 않던 흔도는 마침내 김방경 장군을 문초하기 시작하였다. 이만저만한 문초가 아니었다. 대역으로 몰리는 판이었으나 거리낄 것이 없는 김방경 장군은 끝내 당당하고 충성스러운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홍다구가 자청하고 나서서 김방경 장군을 심문하였다. 홍다구는 고려 사람으로서 반역자 홍복원위 아들이었다. 그는 일이 있을 때마다 고려를 괴롭혀 오던 인물이었다. 홍다구는 김방경 장군의 목을 쇠사슬로 동이고 모질게 매질하였다.

“네 죄를 네가 아는가?”

“무슨 죄가 있느냐?”

“네가 반역을 하려 하였거늘 어찌 이제 발뺌을 하느냐?”

“나라를 위한 마음밖에 없었다. 어찌 나더러 반역을 하려 했다느냐?“

“저 놈을 쳐라!”

홍다구의 매질로 김방경 장군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끝까지 옳지 않은 일 앞에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고려 전체가 원나라의 간섭과 지배를 받고 있던 때라, 원나라의 힘에 등을댄 흔도나

홍다구를 충렬왕도 어쩔수가 없었다.

“이미 김방경은 흔도의 문초를 받았거늘 어찌 되풀이하여 이러는가?”

충렬공으로서는 이 정도의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홍다구는 그러한 충렬왕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매질을 계속하였다. 때는 마침 겨울철이어서 추위는 살을 에는데, 김방경 장군은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매를 맞았다. 충렬왕은 김방경에게 죄가 없음을 알았으나, 홍다구의 하는 짓을 말리지는 못하였다. 충렬왕은 안타까리 김방경 장군을 바라보았다.

“이 일은 결국 황제가 처리할 일이오. 그 때 가서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니 그 때를 믿고 기다리면 되겠소. 굳이 지금 고집을 부려 죽음에 이르는 일이 있다면 이 아니 통탄할 노릇이겠소!“

해결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모진 매를 피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김방경 장군을 주저하지 않았다.

 

“상감 마마, 어찌 그러한 분부를 내리시옵니까? 신이 보잘 것없는 데서 태어나 몸이 대신의 자리에까지 이르렀으니, 뼈가 부러지고 피 흘리는 일이 있다 해도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고는 할수 없습니다. 그러하거늘 어찌 제 몸이 편하고자 거짓 죄명을 쓰고 잠시나마 나라와 임금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김방경 장군은 당당하게 부르짖고, 홍다구를 돌아보며 크게 꾸짖었다.

“이놈 네가 나를 죽이려거든 죽여라. 네 놈이 나를 죽이기는 쉬우나 나에게 역적이나 옳지 않은 죄명을 씌워서는 죽이지 못하리라.“

김방경 장군은 끝내 버티어 무릎을 꿇지 않았다. 홍다구도 김방경에게 뚜렷한 죄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남쪽으로 귀양을 가게 하는 것으로 끝냈다. 이 날 백성들은 길을 막고 통곡하며 김방경 장군의 억울함을 슬퍼하였다. 그 뒤에 충렬왕은 몽고 황제에게 김방경에게는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다.

몽고 황제도 이에 동의하여 비로소 귀양에서 풀려 나게 되었다.

 

사라져 가는 큰 나무

 

몽고의 세조는 고려 백성이 겪는 괴로움은 아랑곳없이 오직 일본을 굴복시키겠다는 생각으로 고려를 괴롭혔다. 고려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배와 식량을 일본을 칠 때 쓰도록 마련하라고 강요했던 것이다. 충렬왕은 1275 년 김방경 장군을 원나라에 보내어 고려의 딱한 사정을 알리도록 하였다. 원나라로 들어간 김방경은 곧 원나라 세조를 만나 고려의 입장을 밝혔다.

김방경이 본국에 돌아가려 하자, 세조는 활 1000벌, 갑옷 200벌 등을 함께 내리면서 일본으로 쳐들어갈 장수들에게 두루 나누어 갖도록 하였다. 충렬왕 7년인 1281 년 5 월, 원나라는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일본으로 쳐들어가기로 하였다. 고려와 원나라 군사 10 여만 명이 동로군과 강남군으로 나뉘어 다시 일본에 쳐들어가게 되었다. 동로군은 고려군 1 만 명과 몽고 및 한나라 군사 3 만 명에 배 900여 척으로 이루어졌으며. 강남군은 중국 강남의 군사 10 여만명과 배 3 만 5000 척을 헤아리는 대군이었다. 동로군은 김방경과 몽고 장수 흔도가 이끌고 합포를 떠났다. 이키 섬을 비롯한 일본 규슈(九州)의 바닷가 마을들을 공격하면서 하카타(搏多)에 이르러 적과 싸움을 거듭했으나, 적의 저항이 강해 좀처럼 육지에 올라갈 수가 없었다. 강남군도 몽고 장수 범문호가 이끌고 뒤늦게 도착하여 힘을 합해 왜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바다 위에 배와 배를 서로 묶어 큰 성처럼 만든 뒤 포노(砲弩)를 쏘고 화살을 퍼부었다. 일본 군사도 용감하여 두 달이 지났는데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배 위에서만 싸우고 있노라니 때아닌 전염병이 나돌아 3000 여명의 군사가 차례차례 죽어 갔다. 따라서 사기도 차차 떨어져 갔다. 군사들은 싸우기보다는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7월이 되자 또 큰 태풍이 일어났다. 배와 배가 서로 맞부딪쳐 가라앉고 성한 배에는 파도가 덮쳐 병사가 휩쓸려 갔다. 하룻밤 사이에 자연의 힘 앞에 그만 박살이 나고 말았다. 폭풍이 잠을 자자 하카타 만에는 밀물에 쓸린 뱃조각과 바다에 빠져 죽은 병사의 시체로 가득하였다. 시체가 얼마나 많았던지 바다 위에 뜬 시체를 밟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흔도.범문호 따위의 장수는 이런 어지러운 틈에서도 저 혼자 살아나기 위해서 튼튼한 배를 골라 타고 달아나 버렸다. 이 때 몽고군 10 여만은, 거의 물에 빠져 죽었거나 왜군의 칼에 베이고 또는 창에 찔려 죽었다. 그리하여 무사히 돌아온 자는 셋밖에 안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싸움에서 희생된 고려 군사의 수도 8000 여 명에 이르렀다. 김방경은 어려운 뒤치다꺼리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고는 조용히 지내다 충렬왕 26년인 1300년 8월,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방경은 일찍이 나라가 어지러울 때 태어나 평생을 나라와 겨례를 위해 몸바쳤으니, 싸움이 있을 때에는 싸움터에 뛰쳐 나가 장수가 되었고, 조정에 돌아와서는 재상으로 훌륭한 정치를 베풀었다. 김방경의 성품은 나라에 충성스럽고 정직하고 거짓을 몰랐으며, 벗과의 사귐에 있어서는 신의가 두터웠다. 또한 그가 벼슬을 할 때나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나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임금도 서슴지 않고 그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였다.

그는 그가 살아서 원하던 대로 고향인 경상도 안동에 묻혔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려 생전의 공로를 기리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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