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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11.28. 윤만(문) 제공) *출전 : 고려사(高麗史)」의 열전(列傳) 정가신편(鄭可臣編)
무당의 기원을 고대에 널리 번졌을 이 신처(神妻)에 두는 학자도 있으나 단정할 수는 없고, 무당이 된 여러 가지 복합 요소 가운데 한 기원일 수는 있을 것이다. 신처가 무당화하는 과정을 금성산신(錦城山神)의 신처에서 엿볼 수 있다. 나주(羅州)의 금성산신에 대한 설화는 「고려사(高麗史)」의 열전(列傳) 정가신편(鄭可臣編)에 기록되어 있다.
『나주 사람이 칭하기를 “금성산(錦城山)의 산신이 무당에게 내려 ‘진도(珍島)· 탐라(耽羅)를 정벌할 때 내가 실상 많은 힘을 썼는데 장수·군사들에게는 상을 주고 나에게는 아무 녹도 주지 않은 것은 어째서냐? 반드시 나를 정녕공(定寧公)으로 봉하여야 한다.’고 말했다”라고 하였다.
정가신이 그 말에 미혹되어 왕에게 넌지시 말하여 정녕공으로 봉하게 하고 그 읍녹 쌀 5석을 걷어 그 산신의 사당에 해마다 보내주게 하였다.
그가 좌사의 대부로 조동되었을 때 이분희(李汾禧) 형제가 홍다구에게 붙어 김방경의 죄를 빚어냈다. 정가신은 그들과 같이 조정에서 일을 보는 것을 치욕으로 알고 왕에게 요청하여 자기 집으로 가서 어머니를 봉양하겠다고 두세 번씩 제기하였다. 그러나 왕이 그를 위로하고 타일러 보냈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가 옳은 일을 한다고 칭찬하였다.』
그 얼마 후 장성(長城)의 한 여인에게 금성대왕이 하강하여 신당에 신처로 들지 않으면 부모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여 그 여인은 금성신당의 신처가 되었는데 그 신처가 곧 유명한 금성신당 스캔들의 씨앗이 되었다. 그 후 금성산신은 한 명의 신처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던지 매일 밤 네 명의 기녀(妓女)를 윤직(輪直)으로 시신케 하였으며 이 기녀시신(妓女侍神)의 습속이 프리섹스의 탈도덕적(脫道德的) 무습을 이 곳에 형성하게 한 것이다.
《출전 :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이규태 및 신편고려사 열전 정가신편》
[정가신(鄭可臣)]
? ~ 충렬왕24(1298) 초명은 흥, 호는 설재, 본관은 나주 나주시 동강면 양지리 시중 골에서 향공진사 송수의 아들로 출생. 어릴 때 중 천기를 따라 개경에 가서 태부소경 안홍우의 집에서 부양받았고, 고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충열왕 3년(1277)에 보문각대제가 되고 이어 좌간(☞좌사)의 대부가 되었을 때 이분희 형제가 홍다구에게 붙어서 김방경을 모함하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함께 벼슬하기를 부끄럽게 여겨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얼마 후에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서원, 승지, 감찰, 제도안렴사, 별감 등을 역임하면서 향리단속 과 민생고(民生苦) 해결에 주력하였다. 16년(1290)에 민궤(☞민지)와 함께 세자(충선왕)를 수행하여 원나라에 가서 원 세조의 특별한 예우를 받고 돌아와 첨의찬성사가 되고 [천추금경록]을 지었으며 24년(1298) 5월 벽상삼한삼중대광 수사공에 이르고 그해 6월에 갑자기 병졸하였다. 그 사인에 대해서 원나라에 보내는 청선위표(왕위 넘겨주기를 승인 신청하는 글)를 지었는데 그 표문의 내용이 왕의 뜻에 거슬린 점이 있었기 때문에 문책이 두려워서 그렇게 되었다는 설도 있었다. 천성이 정직 단정 엄격하고 문장력이 뛰어나 그 당시 외국으로 보내는 문서가 모두 그 손에서 이루어졌고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사생활은 서생 때와 같았으며 총재가 되어서는 모든 국민들이 그에게 태평의 치세 이룩하기를 기대했는데 갑자기 죽으니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였다. 문정의 시호가 내리고 충선왕조에 배향하였으며 조선 숙종 19년(1693) 나주에 설재사가 건립되었다.(고려사열전, 청선고) 《출처 : 나주시청 홈페이지/역사 인물· 정가신》
1.1270년(고려 원종11년) 진도에 진을 치고 있던 삼별초가 호남을 장악하기 위해 나주를 공격(원종11년 1270년)했으나 나주의 관민이 금성산성에 들어가 저항하자 7일 동안 공격에도 불구하고 나주를 빼앗지 못하고 물러났다. 또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나주에 와서 김장손이 나주 금성산신에게 승리를 위한 기원제를 올리고 삼별초를 진압했다.
《출처 : 나주시청 홈페이지/빼어난 문화유산· 금성산》
2. 삼별초는 몽고에 항복한 고려조정에 반기를 들고 진도에 웅거하면서 자못 세력이 강하여 인근 지방 수령들이 맞이하여 항복하거나 진도에 가서 알현하였다. 나주부사 박부(朴王孚)가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상호장 정지려 등이 고수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달아날 일이지 나라를 배반하지 말라고 주장하여 나주와 인근 현에 기별하여 금성산성으로 들어가 가시나무를 세워 목책을 만들어 준비를 하였다. 삼별초군은 7주야동안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후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하러 와서 김경손이 출전에 앞서 금성산신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삼별초를 진압하였다.
《출처 : 나주문화원 홈페이지/명산·명수》
☞ 나주시청과 문화원 두 홈페이지를 살펴볼 때 나주시청 홈페이지의 김장손은 김경손의 오기로 생각합니다.
[김경손(金慶孫)]
24년(☞고려 고종 24년, 1237년)에는 전라도 지휘사로 임명되었다.
그 때 초적 이연년(李延年)의 형제가 원률(原栗)·담양(潭陽) 등 여러 고을의 무뢰배들을 규합하여 해양(海陽) 등 여러 고을을 함락하였다. 김경손이 나주(羅州)에 왔다는 말을 적이 듣고 나주성을 포위하였는데 적의 세력이 대단히 왕성하였다.
<중략>
김경손이 출전하자고 독촉하니 좌우 막료들이 말하기를 “오늘은 우리 병력이 적고 적의 무리가 많으니 각 고을의 응원부대가 도착될 때까지 기다려 출전하자!”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경손은 노하여 꾸짖어 물리치고 가두에서 금성산신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친히 술잔을 두 번 올리고 “마지막 한 잔은 전쟁에서 승전하고 돌아와 들이겠다”라고 하였다.
<중략>
36년(☞고려 고종 36년, 1249년)에 최항이 김경손의 인망이 있는 것을 꺼려 백령도(白翎島)로 귀양보냈다.
2년후(☞고려 고종 38년, 1251년)에 최항이 계모 대씨(大氏)를 죽이고 아울러 그의 전 남편의 아들인 오승적(吳承績)을 강물에 던져 죽였는데 김경손은 오승적과 인척관계라 하여 김경손의 귀양간 곳으로 사람을 보내 김경손을 바닷물에 던져 죽였다.
《출전 : 신편고려사 열전 김경손편》
☞ 우리는 위 기록을 통하여 두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1. 진도· 탐라를 정벌할 때 즉 삼별초의 난은 원종 11년(1270) ~ 원종 14년(1273)이므로 김경손은 이미 고종 38년(1251)에 졸하여 삼별초의 난과는 무관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2. 그리고 김경손이 비록 전라 지휘사로 나주에 가서 금성산신에 제사를 지내긴 하였으나 이는 고종 24년(1237)에 초적을 무찌르기 위하여 간 것으로 정가신편의 삼별초 관련 설화와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신사전은 나주에 이르러 반적들이 육지로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달아나 서울로 돌아가 버렸다. 전주부사 이삼(李杉)도 역시 전주성을 포기하고 도망해 버렸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모두 도망간 죄로 면직 당하였다.
김방경이 신사전 대신에 추토사로 임명되었고 몽골원수 아해(阿海)와 더불어 군사 1천여 명을 이끌고 반적을 토벌하게 되었다.
반적들은 나주성을 포위하고 또 군사 일부를 보내 전주를 공격케 하였다. 나주 사람들이 전주 사람들과 더불어 항복할 것을 상의하였는데 전주 사람들은 결정적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김방경이 전주로 가는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혼자 말을 타고 밤낮을 헤이지 않고 남으로 달려 내려가면서 먼저 전주에 공문을 보내기를 “아무날에는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입성할 것이니 빨리 군량을 준비하여 기다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전주 사람들이 이 편지를 나주 사람들에게 보이니 반적들이 이 말을 듣고 마침내 포위망을 풀고 가버렸다. 이로부터 다시 제멋대로 노략질을 못하게 되었다.
《출전 : 신편고려사 열전 김방경편》
☞ 위 기록으로 보아 충렬공께서도 진도에 웅거하고 있던 삼별초가 나주를 노략질할 때 추토사로 임명되어 노략질하는 삼별초를 격파한 사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나주(羅州)의 금성산신에 대한 설화는 「고려사(高麗史)」열전(列傳) 정가신편(鄭可臣編)에 분명히 삼별초와 관련된 설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주시청 및 나주문화원 홈페이지에 금성산신에 제사를 지낸 장군이 김경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김경손은 삼별초의 난(1270년) 이전인 1251년에 졸하였으므로 삼별초와 관련된 금성산신 설화와는 무관합니다. 또한 그 시대에 삼별초의 난 그리고 나주 전투와 관련이 있으신 장군은 우리 충렬공(방경) 할아버지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위 금성산신 설화는 충렬공과 관련된 설화가 분명하므로 나주시청 및 나주문화원 홈페이지의 정정을 조심스럽게 건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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