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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1. 30--2. 1. 발용(군) 제공) 출전 : <안동문화 제12집> (2004. 안동문화원 간) 제목 : 상락군 김방경 장군 발표자 : 권오신
권오식 선생은 시인, 향토사학자, 안동문화원 운영위원이시며, 현재 경안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십니다. <안동의 전탑 및 법림사와 양지법사> <성주신앙의 역사적 배경과 실체> 등 많은 향토 자료를 연구 발표하신 바 있습니다.
안동문화 제12집에 실린 <상락군 김방경 장군>은 5~6년 전 안동교육청에 위촉받아 중ㆍ고교생 교육용 인물교재를 목적으로 쓰셨다합니다. 그러나 소위 민중사학자들의 반대(삼별초를 토벌했다는...)에 부딪쳐 교재로 삼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때는 시대가 그랬다고 부연하셨습니다. 이제는 이 글을 발표할 시대도 되었고 마침 안동문화원의 부탁으로 안동문화에 기고하셨다 합니다. 5~6년 전에 쓰신 글이라 우려가 된다 하시며 고려사와 안동김씨족보를 토대로 글을 쓰셨다하셨습니다.
안동김씨 홈페이지에 게재를 흔쾌히 허락해 주신 권오식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본래 사진은 흑백으로 게제 되었으나 칼라로 바꾸었고 주석은 많이 생략하였습니다.
상락군 김방경 장군
권 오 신 (경안중학교 교사)
1. 그가 살던 시대 상황
김방경 장군의 영정 13세기의 고려는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내우외환의 크나큰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안으로는 문(文)만 승상하고 무(武)를 멸시하는 데에 반감을 품고 1170년(의종 24년)에 정중부(鄭仲夫)가 일으킨 무신의 난 이후 무신들은 정권을 잡는 등 국정을 제멋대로 하여 그 전횡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리하여 전국 곳곳에서 굶주리다 못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쫓겨난 문인(文人)들은 세상에 뜻을 잃고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특히 최충헌(崔忠獻)이 정권을 잡은 이후는 최우(崔瑀 : 후에 怡로 개명), 최항(崔沆), 최의(崔?)의 4대가 대를 이어 60여 년 간 권력을 독점했다.
밖으로는 유럽과 아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한 대제국 몽고는 1231년(고종31년) 1차 침입을 시작으로 30여 년 간 여섯 차례나 침입을 계속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최이는 몽고군이 수전(水戰)에 약한 것을 알고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가며 대몽 항쟁을 벌였다. 우리 고려는 불굴의 민족정신으로 군관민이 힘을 합해 용감히 몽고에 대항하여 때로는 승리하기도 하였지만 세계 대제국인 몽고와 대적하기에 고려는 너무 힘이 약했다.
특히 강화 천도로 정부 관리들과 그 가족들은 섬에서 몽고의 위험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었으나 섬을 제외한 전 국토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리하여 몽고군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갖은 노략질을 다 하였다.
이러한 국난 중에 토탄에 빠지고 희생당하는 것은 죄 없는 백성이었다. 아무 실권 없는 왕실도 무신 정권과 몽고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사직을 지키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80평생을 바친 분이 우리 고장이 낳은 상락군(上洛君) 김방경(金方慶)이다.
2. 출생과 성장
김방경의 본관은 안동(安東 : 김선평의 안동김씨와 구분하여 구안동 또는 상락김씨로 불림)이고, 자는 본연(本然)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안동김씨보’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둘째 아들인 숙승(叔承)을 시조로 한다. 김방경의 가계(家系)는 본관이 ‘안동’이고, 고조 이청(利請)이 안동 태수를 역임하고 상락군(上洛君)으로 봉해진 것으로 보아 김방경 이전부터 대대로 안동에 살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김방경의 조부 민성(敏成)1)은 풍산(豊山) 회곡(檜谷)에 거주하였으며, 두 아들 창(敞)2)과 효인(孝印)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김방경은 효인의 장자로 1212년(강종 1)에 안동 회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효인은 성격이 엄하고 강직했으며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어 당시의 대학자요 문장가인 금의(琴儀 )문하에서 배웠으며 글씨를 잘 쓰고 등제 후 관이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한림학사 지제고(翰林學士 知制誥)에 이르렀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방경의 어머니가 방경을 잉태했을 때 가끔 구름이 안개를 잡수시는 꿈을 꾸어 사람들에게, “나의 입과 코에는 항상 운기(雲氣)가 남아있으니, 이 아이는 반드시 신선(神仙)중에서 점지한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방경은 어려서부터 그 아버지를 닮아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으며, 풍채가 늠름하였다. 아버지가 외지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관계로 주로 낙동강 변에 자리한 안동 회곡(檜谷) 마을에서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다. 어린 방경은 조금만 화가 나도 반드시 거리에 누워 울었는데 지나가던 마소가 아이를 피하여 가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고 한다. 1) 안동김씨보에 의하면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翰林直史館 兼 掌冶署令을 역임하였다고 되어있다. 2)初名은 孝恭으로 고려 희종 때 급제하여 尙書右丞ㆍ太師門下侍郞判使部事 역임.
3. 벼슬길에 나아감
김방경은 1227년(고종 14) 16세의 나이로 음보(蔭補) 산원(散員)겸 식목녹사(式目綠事)로 관직에 나아갔다. 당시의 시중(侍中) 최종준(崔宗峻)은 어린 나이지만 충직하게 일을 잘 처리하며 바른 말을 잘하는 그의 곧은 성품을 사랑하여 예(禮)로써 대우하고 중요한 일이 있으면 도맡아 처리하도록 맡겼다. 그 뒤 승진을 거듭하여 감찰어사(監察御使)에 이르러 우창감(右倉監)이 되었는데 일체의 청탁을 배격하고 국고를 풍부히 하는데 힘썼다. 이를 못 마땅히 여긴 어느 재상이,
“지금 어사는 전 어사처럼 근무가 착실하지 못하다.” 고, 권신(權臣)에게 참소했다. 그 말을 들은 권신은 김방경을 징계하려, “그대는 복무 자세가 성실하지 못하다는 말이 들리는데……. 하였다. 이에 방경은, “전임 어사처럼 근무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니고, 다만 국고를 채우고 지키는 무거운 책무에 충실하려 하니, 사람마다의 입맛에 모두 맞게 해 줄 수 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에 권신과 참소하던 이가 모두 부끄러워했다. 그 뒤 규정대로 양곡(糧穀)을 관리하니 창고가 가득 차게 되었다.
4. 위도의 개펄에서
징기스칸의 뒤를 이어 등극한 오고타이가 1230년 친히 금(金)나라를 치는 한편 다음해인 1231년(고종 18) 살레타이(撒禮塔)에게 군대를 주어 제 1차 고려 침공을 감행하게 하였다. 고려군은 구주(龜州 : 현 평북 龜城)와 서경(西京 : 현 평양) 등에서 완강히 저항했지만 의주(義州)를 포위하고 철주(鐵州 : 현 평북 鐵山)를 함락시키며 물밀 듯이 남으로 밀려왔다. 추운 겨울 몽고군에게 겹겹으로 둘러싸인 구도 개경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마침내 고려는 많은 예물을 주고 몽고에게 항복을 하여 살레타이는 개경과 여러 주현(州縣)에 다루가치를 설치하고 회군하였다. 그러나 계속 몽고의 요구가 지나치자 당시의 집권자 최이는 몽고와 장기 항전을 위해 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1232년 강화 천도를 안 살레타이는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해전에 미숙한 몽고군은 강화도는 쳐들어가지 못하였으나 대신 내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무고한 백성을 죽이고 갖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많은 재산과 소중한 보물이 약탈당하고, 대장경이 불타고, 황룡사 9층탑도 잿더미로 화해 버렸다.
1차 몽고 침입 무렵인 1231년 김방경은 20세의 나이로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다. 그는 몽고의 수차례 침략 속에서 백성들이 집을 잃고 먹을 것이 없어 유리 걸식하는 참상을 직접 목도하였다. 그는 어떻게 하면 이 백성을 가난에서 구할 것인가 생각하였다. 강도 정부에서는 몽고병의 침략에 대비하여 북계(北界 : 현 함경, 평안도)의 백성들을 황해의 여러 섬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는 이 때 주민들을 인솔하여 위도(葦島)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위도의 지형이 평탄하여 개간할 수 있는 곳임에도 10여 리나 바닷물이 들어와 개간할 수 없음을 알고 백성을 시켜 제방을 쌓고 곡식을 파종케 하였다. 백성들은 몽고병의 말발굽을 피해 위도로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김방경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괴롭게 여기던 백성들도 가을에 크게 수확하게 되자 한 마음으로 개간에 힘썼다. 육지를 차지한 몽고병은 여러 해를 물러가지 않았고 섬(위도)에는 우물이 없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육지로 물을 길러 갔던 주민들이 몽고병에게 포로로 사로잡히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김방경은 저수지를 만들고 빗물을 모아 식수로 사용하게 하여 물 걱정이 없어지게 되었다. 서북면 병마판관으로서 김방경이 한 일은 이와 같이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과 고락을 같이 하는 일이었다. 이 때 김방경이 백성을 위해 목민관으로서 행한 선정은 백성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 후일 김방경이 모함을 받아 좌천되었을 때 서북 여러 성의 백성들이 진정서를 올려 그에게 보답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겠다.
김방경은 내직으로 들어와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다. 그 때 금위(禁衛)의 벼슬아치들이 다투어 권세 있는 자에게 아부만 하고, 숙직(宿直)하는 방이 좁고 불편하다고 모두 자기 집에서 자고 궁성 수비를 등한시 했다. 이에 분개한 김방경은, “임금을 섬기는 신하의 도리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며, 병이 나도 휴가를 얻지 않고 직무에 충실했다.
5. 사직을 지키기 위하여
1257년(고종 44) 몽고와의 전쟁을 주장하던 실권자 최항(崔沆)이 죽고, 그의 비첩(婢妾) 소생인 최의(崔?)가 뒤를 이었으나, 이듬해 유경(柳璥), 김준(金俊 : 일명 仁俊) 등에게 살해당했다. 이에 4대 60년에 걸쳤던 최씨 무단 정치는 종막을 고하고 형식적으로나마 왕정이 복귀되었다.
1259년 고종이 승하하고, 이듬해 몽고에서 귀국한 태자 전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고려 제24대 원종(元宗)이다. 김방경도 1263년(원종 4) 어사중승(御使中丞)에 승진되어 대각에 출입하니 그 청직공정(淸直公正)함이 조야에 알려졌다. 이어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선군별감사(選軍別監事)를 겸하자 매일 첫닭이 울면 선군별에 나가 송사(訟事)를 판결하고, 날이 밝으면 어사대로 나가 기강을 준엄하게 다스렸다.
당시 좌승선(左丞宣) 유천우(兪千遇)가 오랫동안 관리들의 인사 업무를 관장하고 있어서 여러 관리들이 그 위풍에 눌려 아첨을 하였다. 김방경이 등청(登廳) 길에 그를 만나 말을 탄 채로 읍(揖)만 하고 지나가려 하니, 유천우가 말하기를,
“나는 조삼(?杉)으로 왕명을 받드는 사람이라 3품관 이하는 피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유독 그대는 어찌하여 이와 같이 대하는가?” 하고 힐책했다. 이에, 김방경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3품관이요, 다만 그대가 왕명을 봉행하고 있으니 내가 먼저 예를 행할 따름이다.” 하며 서로 한참 다투다가,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다.”
하고 가니, 유천우는 깊이 앙심을 품고 김방경의 친족 중에 벼슬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억제하여 등용하지 않았으나 김방경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김방경은 1265년 광평공(廣平公) 순(恂)을 모시고 사은사(謝恩使)로 몽고의 수도인 연경(燕京 : 현 北京)에 다녀왔다. 1268에는 진도(珍島)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중방(重房)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 때 1군의 상장군이던 반주(班主) 전빈(田? : 몽고사람)이 선배인데도 김방경의 아래에 있음을 꺼려 권신(權臣)에게 무고하여 남경 유수(南京留守)에 좌천되었으나 전에 서북면 병마판관으로 있을 때 선정을 배풀었기 때문에, 서북 여러 성 사람들의 진정이 자기 고을에 와 달라고 하여 남경에 부임한 지 3일만에 다시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
1269년 김방경은 형부상서(刑部尙書),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다. 당시의 조정은 전에 최의(崔?)를 살해하여 왕정 복귀에 공이 컸던 무신(武臣) 김준(金俊)이 권력을 잡고 무신 집권 때와 마찬가지로 몽고에 대해 강경론을 펴고 있었다. 문신(文臣) 이장용(李藏用)이 화친을 주장하고 있었다. 강경론과 화친론은 전화(戰禍)에 시달리는 고려로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정책 대결이었다. 다만 어느 것이 현 시국에서 더 바람직하고 현실성이 있는 정책인가가 중요할 뿐이었다.
1260년(원종 1)새로 등극한 쿠빌라이는 고려를 정벌한 후 일본 정벌의 야욕을 품고 있었다. 1266년 쿠빌라이는 사신 흑적(黑的)과 은홍(恩弘)을 고려에 보내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려고 하니 고려가 길안내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 간의 전쟁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한 고려로서는 그 전쟁의 뒷감당을 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노련한 이장용은 몽고 사신 흑적과 은홍을 일본에 보내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그들을 거제도 앞바다로 보내어 파도가 거센 것을 보게 하여 되돌아가게 하였다.
1269년 몽고는 또 흑적과 은홍을 고려에 보내어 고려의 길안내로 일본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은 몽고의 요구를 들은 체도 하지 안않다. 몽고는 일본을 치겠다고 수많은 선박과 물자를 요구하는 고려만 중간에 끼어 진퇴양난 이었다. 1269년(원종 10) 6월 김준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무신 임연(林衍)은 원종이 자기를 꺼려함을 알고 삼별초(三別抄)와 육번도방(六番都房)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을 세우고 원종을 별궁(別宮)에 가두었다. 이에 이장용과 김방경은 비밀리에 원종을 알현하고 복위에 힘쓸 것을 다짐하였다. 이때 왕세자(뒤에 충렬왕)가 몽고에서 돌아오다가 의주(義州)에서 정변소식을 듣고 다시 몽고로 돌아가 세조에게 임연을 치고 원종을 복위시켜 줄 것을 청하니 몽고에서는 몽구토(蒙哥篤)를 보내어 원종을 복원시켜 주기로 결정하였다. 임연은 원종 폐위에 대한 몽고의 문책을 듣고 이장용으로 하여금 몽고에 입조(入朝)하여 사태를 수습케 하였다. 이에 이장용은,
“몽고 세조는 김방경의 인품을 사랑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고 들었소, 그의 말이라면 믿을 것이오.”
하였다. 이리하여 김방경은 대장군 최동수(崔東秀)와 같이 입조하였다. 몽고는 원종 형제 및 임연의 입조를 요구하며 몽구토가 2천 군사와 함께 임연을 치려고 동경(東京 : 현 중국 遼陽)에 이르렀다. 이때 김방경도 몽가독과 같이 동경에 와 있었다. 몽고는 한편으로 사신 흑적(黑的)을 파견하여 원종 폐립 사건을 추궁하였다. 이에 임연은 할 수 없이 흑적의 권고와 이장용의 수습책을 받아들여 원종은 5개월만에 다시 복위되었다.
복위된 원종은 몽고를 무마하여 일본원정에 따른 부담을 면해보려고 복위 4일 만에 이장용을 몽고에 파견하였다. 이장용이 강도(江都)를 떠난 직후 서북면 병마사의 기관(記官) 최탄(崔坦)이 임연을 징토 한다는 명목으로 난을 일으켜 서북각지의 수령을 죽인 뒤 몽고에 투항함으로써 일시에 서경(西京 : 현 평양)을 비롯한 서북 50여 성이 몽고의 영토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몽고는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라 개칭하고 최탄을 총관(摠管)으로 삼았다. 이에 원종은 내우외환을 해결하기 위하여 직접 몽고로 갔다 1270년 1월 1일 새 해, 원종은 이국(異國)의 눈벌판에서 마중 나온 이장용, 김방경과 눈물의 재회를 하였다.
원종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이 연경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몽고군은 몽구토를 대장으로 고려로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따라서 원종은 출륙환도(出陸還都)를 약속하고 되돌아왔다. 한편 동경에 남아 있던 김방경은 몽구토의 군대를 따라 고려로 돌아와 같이 서경에 머무르면서 몽고 군사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게 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몽고군의 남하는 고려를 더욱 혼란으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김방경이 서경에 도착하니 지방의 노인들이 다투어 찾아와 음식을 대접하며,
“공이 만약 여기 계셨으면 어찌 최탄 등의 반역 사건이 일어났으리오.” 하였다.
몽고의 압력도 견디기 힘든데 국내에서는 부몽(附蒙) 세력과 항몽(抗蒙) 세력간의 갈등도 날로 심화되었다. 무신 집권 세력을 대표하는 임연은 원종폐위도 실패로 돌아가고, 이장용 · 김방경 등에 의하여 개경으로 환도가 이루어지려 하자 더욱 항몽의 자세를 굳건히 하였다. 그러나 1270년(원종 11)갑자기 임연이 죽고 귀국길에 오른 원종은 최종적으로 개경 환도를 결정했다. 상장군 정자여(鄭子璵)를 앞질러 강화도에 보내어 문무 양반으로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가족을 데리고 개경으로 나오라고 하달했다. 이로써 강화도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으니, 무신 집권의 잔여 세력인 무신들은 개경환도를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1270년(원종 31) 강화 천도 39년만에 개경 환도가 이루어지고, 그동안 불굴의 민족정신으로 지켜왔던 강도(江都)는 하루아침에 폐허로 변하였다.
6. 몽고와 삼별초 사이에서
삼별초(三別抄)는 원래 당시의 권력자 최우가 모아 기른 그의 사병들이었다. 처음에는 도둑을 막기 위하여 설치된 야별초(夜別抄)에서 시작한 것인데 수가 많아짐에 따라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었으며, 몽고와 싸우다가 포로로 되었던 귀환병들이 신의대(神義隊)를 조직, 이를 합쳐서 삼별초라 불렀는데, 나중에는 도방(都房)과 더불어 최씨 정권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조정에서 개경 환도 문제를 논의할 때 원종을 비롯한 대부분의 문신들은 개경환도를 희망했으나 삼별초의 무신들은 완강히 반대했었다. 강화도에서 중신회의를 열고 마침내 개경 환도를 결정 공고하자 삼별초는 이를 몽고에 대한 굴욕이라고 생각하고 흥분했다. 조정에서 환도에 불응하는 삼별초군의 해체를 장군 김지저(金之?)를 통해 통고하는 동시에 그들의 명부를 압수해 가자 혹시 그 명부를 몽고에 넘겨 자신들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6월1일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주동자인 배중손(裴仲孫)은 노영희(盧永禧) · 김통정(金通精)과 의논하고 왕족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했다. 그러나 섬 안의 주민들이 호응하지 않고 임명된 관리들도 탈출하는 자가 많았다. 이에 배중손의 삼별초군은 개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안전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농토가 넓은 진도로 옮기기로 하였다. 드디어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강화에 있던 2만의 사람들과 모든 재물을 실은 1천여척의 배가 거센 파도를 헤치고 뱃머리를 진도(珍島)로 향해 남으로 향했다. 몽고에 대항할 힘이 없는 원종은 이장용 · 김방경과 같이 몽고와 굴욕적인 화친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 화친이 이루어지자면 항몽 세력인 삼별초군을 소탕할 수밖에 없었다. 6월 13일 개경 정부에서는 김방경을 추토사(追討使)로 임명하였다. 이때까지 김방경은 서경에 머무르면서 몽가독(蒙哥篤)의 군대가 대동강 이남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구실을 하고 있었다. 이미 두찬가(頭贊哥)의 군대가 개경까지 와 있는데 몽가독의 군대까지 남하하면 그 피해가 더욱 심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려로서는 정부군이 없어 김방경은 60여 명의 고려군과 몽고 송만호(宋萬戶)의 일천여 군과 더불어 삼별초군을 추격케 했다. 삼별초의 함선들이 남양(南陽) 앞바다 영흥도(靈興島)에 정박 중인 것을 보고 추격코자 했으나 송만호가 두려워하여 정지시키니 삼별초군은 계속 남하하였다.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궁궐을 짓고 성을 쌓아 도성(都城)으로서의 시설을 갖추었다. 남해의 거제·제주를 비롯한 일대의10여 섬을 세력권에 넣어 일대 해상 왕국을 이루었다. 뿐만 아니다 장흥·합포(현 : 馬山)·금주(현 : 金海) 등 고을과 섬에 군사를 보내어 협력을 구하고 군량미를 거두어 들였다. 경상도와 제주도의 조운(漕運)이 차단되어 개경 정부는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또 육지로 나와 나주(羅州)를 함락하고 전주(全州)마저 포위되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으며, 승하후 온(溫)은 황제를 칭하는 등 그 위세는 실로 대단하였다.
삼별초의 세력은 나날이 커지자, 몽고는 고려 조정에 토벌을 재촉했다. 전라도 추토사로 임명된 김방경은 단신으로 말을 몰아 주야로 쉬지 않고 전주로 가며 거짓으로 글을 띄워,
"모월 모일에 1만군을 거느리고 전주에 들어갈 것이니 군량을 준비하고 기다리라." 고 하였다.
이에 전주에서는 적도들에게 항거할 태세를 갖추었고, 나주에 침공했던 삼별초군은 겁을 먹고 진도로 물러가니 화살 하나 허비하지 않고 두 고을을 구할 수 있었다.
김방경은 몽고의 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일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도로 향했다. 삼별초군은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바닷가에 방어물을 설치하고 대항했다. 전투는 오히려 삼별초군의 선공으로 시작되고 번번이 관군이 수세에 몰렸다. 11월의 전투에서 연합군 100척과 삼별초군 30척이 접전을 벌였는데 삼별초군이 북을 치며 요란한 기세로 공격을 해 오니 몽고장수 아해는 처음부터 겁을 집어먹고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배에서 내려 막사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나주(羅州)로 후퇴하려 했다.
“원수(元帥)가 후퇴하면 적에게 약함을 보여 적이 더욱 기세를 올릴 것이며, 또 황제가 알고 문책하면 무어라고 대답하겠는가?”
하며, 김방경은 그의 후퇴를 저지시켰다. 이에 아해는 김방경의 만류로 후퇴는 하지 않았느나 전투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김방경을 원망하였다. 김방경이 고려 군사를 거느리고 적진으로 쳐들어가서 종일을 싸우는데, 적의 배가 사방에서 둘러싸고 반격하므로 전투가 격렬하여 장졸들은 많이 죽고 다치고 화살도 다 떨여져 더 싸울 힘이 없었다. 마침내 김방경이 탄 배는 포위되고 삼별초군이 칼을 빼어 들고 배로 뛰어들었다. 살아날 길이 없다고 생각한 김방경은,
“차라리 이 한 몸을 고깃배에 장사지낼지언정 어찌 적의 손에 죽으랴!”
하며, 바다에 뛰어들려고 했다. 이때 위사(衛士) 허송연(許松延)·허만지(許 萬之)등이 만류하자 이에 용기를 얻은 다친 군사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싸워 간신히 적진을 벗어날 수 있었으나, 싸움은 배중손이 지휘하는 삼별초군의 승리로 끝났다.
이 때 반남(潘南) 사람인 홍찬(洪贊)·홍기(洪機)가 아해에게 김방경과 공유(孔愉) 등이 적과 내통한다고 참소했다. 아해는 즉시 김방경을 잡아 가두었다. 지금까지 감찰어사, 병마판관, 어사중승 등의 벼슬을 거치면서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올바른 벼슬아치의 본보기를 보인 김방경이 적과 내통한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아해가 김방경을 잡아 가두어 개경으로 압송하니 보는 자가 다 원통하다고 하고 슬피 우는 자도 있었다. 아해와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서로 김방경의 처리를 맡겠다고 다투다가 맡았다. 개경으로 잡혀간 김방경은 홍찬과 대질 신문을 한 결과 무고임이 밝혀져서 풀려나고, 무고했던 홍찬의 무리는 처형되었다. 홍찬은 삼별초군에게 붙잡혀 있다가 도망쳐 온 자였다. 그리고 아해도 원수 자리에서 쫓겨났다.
1271년(원종 12) 아해 대신 새로 몽고군 지휘관에 임명된 홍다구(洪茶丘)와 흔도(?都)가 이끄는 몽고군과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이 연합해 진도를 총공격했다. 먼저 홍다구의 군대가 진도를 향해 떠나고 고려 수군300명도 그 뒤를 따랐다. 김방경은 흔도와 함께 중군을 거느리고 벽파정으로 쳐들어갔다. 홍다구는 좌군(左軍)을 거느리고 노루목에서 진격하고, 대장군 김석(金錫)과 만호 고을마(高乙?)는 우군을 지휘하여 동쪽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갔다. 동원된 전투함만도 1백여 척에 달하였다.
이전 전투에서 관군과 싸워 승리한 후, 관군을 가벼이 여겨 미처 대비하고 있지 않다가 공격을 받은 삼별초군은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러나 연합군이 삼면으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병력이 흩어진데다가, 몽고군이 화포(火砲) · 화창(火槍) · 화전(火箭) 같은 신무기를 사용해오자 싸움에 밀린 삼별초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칼에 찔려죽고, 배중손도 이 싸움에서 전사했다.
김방경은 진도에 들어가 노획한 쌀 4천 석과 강도에서 간 남녀 1만여 명, 전함 수십 척과 재화(財貨)를 개경으로 실어 보내고 양민(良民)들은 생업에 종사하도록 했다. 김방경이 개선하자 왕이 사신을 보내어 교외에서 맞이하고 그 공을 기려 수대위 중서시랑평장사(守大尉中書侍郞平章事)에 봉하였다.
적장 김통정(金通精)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耽羅 : 현 제주도)에 들어가서 성곽을 쌓고 항거를 시작했다. 남해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노략질을 하고, 안남(安南 : 현 全州)을 침범하여 수령 공유(孔愉)를 잡아갔다. 이에 김방경은 1278년(원종 14) 행영중군 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원나라 장군 흔도·홍다구와 함께 다시 삼별초를 토벌하러 출발하였다.
만여 명의 수군(水軍)을 모아 반남현에 주둔하였다가 장차 출발하려 하는데 여러 도(道)에서 보낸 전함이 바람에 휩쓸려 부서지고 떠내려가고 뒤집혀졌다. 할 수 없이 군사 1만과 전라도의 전함 1백 6십 척으로 추자도에 머무르면서 바람이 잦아지기를 기다리는데 밤중에 풍파가 급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하였다. 날이 새어 보니 배는 탐라에 가까이 와 있었으나 풍랑이 급하여 간신히 뭍에 가까이 접근했다.
연합군이 함덕포(咸德浦)로부터 들어가니 삼별초군이 암석 뒤에 숨어 있다가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왔다. 김방경이 큰 소리로 휘하 전선에 일제히 전진을 명령했다. 그리고 자신도 제선(諸船)을 조아 나아가니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용감히 적진에 뛰어들고, 장군 나유(羅裕)가 예병을 거느리고 뒤따르며 적을 무찔렀다. 좌군 전함 30척은 비양도(飛揚島)에 상륙하여 바로 삼별초군의 항파두리성으로 무찔러 들어가니 적은 후퇴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관군(官軍)이 외성(外城)을 넘어 사방에서 불화살을 쏘며 공격하자 사방에서 불길이 일어나며 삼별초군은 크게 혼란을 일으켰다.
이때 삼별초에서 투항해 온 사람이 있어,
“삼별초는 이미 궁지에 몰려 모두 도망갈 길을 찾기에 골몰하니 성안으로 들어가면 쉽게 소탕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여세를 몰아 성에 들어가니 삼별초의 군대는 무너지며 장군 김통정은 70여 인의 무리를 이끌고 산중으로 도망하고, 적장 이순공(李順恭)·조시적(曹時適)은 항복했다. 성안에 들어가니 주민들이 두려워 통곡하거늘, 김방경은 말하기를,
“다만 괴수만 베어 죽일 것이니 위협에 못 이겨 추종한 사람들은 두려워 말라.”
했다. 그리고 괴수 김윤서(金允敍) 등 6인을 거리에서 목 베고, 삼별초의 친당(親黨) 35인을 사로잡고 항복한 무리 1천 3백여 인은 배에 나누어 싣고 돌아오고 원주민들은 전과 같이 살도록 했다. 또, 몽고군 5백 명과 고려군 1천 명이 머물러 진무(鎭撫)케 하고 나주에 이르러 친당 35인은 죽이고 나머지 부득이 적도에 가담한 양민과 원주민은 석방하고 불문에 부쳐 석방했다.
김방경이 개선함에 원종은,
“김방경은 진도에서부터 탐라를 침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흉적(凶賊)을 없애어 병든 것이 다시 소생한 듯하니 그 공업(功業)을 맹세코 잊지 못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김방경을 모든 관리의 으뜸인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그해 가을에 조서(詔書)를 받고 몽고에 가니 세조는 승상(丞相)의 다음자리에 앉히고 금안(金鞍) · 채복(綵服) · 금은(金銀) 등을 하사하고, 돌아와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더 받았다.
1271년 호를 원(元)으로 고치고 수도 연경(燕京을 : 현 北京)을 대도(大都)라 한 세조는 삼별초가 토벌되자 일본 침략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지난 1772년 김방경과 함께 어려운 고려 사직을 지키기 위해 힘쓰던 이장용도 72세를 끝으로 병으로 죽었다. 1274년 이장용과 김방경의 두 기둥으로 하여 고려를 지키기 위해 그토록 노심초사하며 쿠빌라이와 싸워 온 원종도 56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7. 일본 정벌에 참가하여
1274년 쿠빌라이는 홀돈(忽敦)을 일본정토 도원수(日本征討都元帥), 홍다구를 동정우부원수(東征右副元帥), 유복형(劉復亨)을 좌부원수(左副元帥)로 임명하였다. 김방경도 고려군 8천 명을 이끌고 도독사(都督使)로서 참여하였다. 그해 10월 3일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 3만3천명여 명은 전함 9백여 척을 앞세우고 합포(合浦 : 현 馬山)를 출발하여 5일 대마도를 정벌하고, 14일 이끼도(壹岐島)를 점령하였다. 쓰시마섬(對馬島)을 다스리던 소스케국(宗資國) 일족은 모두 전사하고, 이끼도 수호(守護) 다이라(平景隆)도 패전하여 자살했다. 19일에는 구주(九州)의 하카타만(博多灣)에 육박하여 다음날 상륙을 시작했다. 규우슈(九州)의 무사들이 죽기를 무릅쓰고 싸웠으나 막강한 연합군을 막지 못하여 수많은 전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질풍같이 빠르고 자기들은 구경도 못한,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굉음을 내며 폭파하는 철포(鐵砲)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전략 전술이나 무기가 고작 긴 창이나 독화살을 메긴 강궁(强弓) 밖에 모르는 일본 내의 전투와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일본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연합군은 밤이 되자 공격을 중지하고 그들의 군선으로 철수했다.
그런데 그날 밤 갑자기 태풍이 불어 닥쳐 하카다만에는 산덩이 같은 파도가 휘몰아쳤다. 날이 새자 이제까지 하카다만을 메웠던 배는 한 척도 보이질 않고 부서진 뱃조각과 엄청난 시체들이 파도에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때 익사한 연합군이 1만 3천 5백 명 정도라고 일본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리하여 1차 일본 정벌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원종도 승하하고 이장용마저 죽은 지금 김방경은 이제 마지막 남은 원로였다. 그는 밖으로는 무장으로 원나라 장수와 더불어 동정군(東征軍)을 지휘하고, 안으로는 수상으로서 왕을 보필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즉 출장입상(出將入相)하며 원만한 인격과 굳은 의지로 난국을 타개해 나갔다.
하지만 1277년(출렬왕 3) 앞서의 일본 정벌 중에 좌군수 김신(金侁)이 익사할 때 이를 구하지 않았던 지병마사(知兵馬使) 위득유(韋得濡)를 파면하고, 진도의 삼별초를 공략할 때 전투를 소홀히 하고 재산을 약탈한 낭장(郎將) 노진의(盧進義)의 가산을 몰수한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하여 김방경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간인(奸人) 위득유 노진의(盧進義) 등이 원나라 장수 흔도에게 김방경이 국왕과 왕비 및 다루가치를 없애고, 장차 강도(江都)로 들어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참소했다.
이에 흔도가 왕에게 고하니 왕과 공주는 무고임을 알지만 할 수 없이 흔도와 더불어 국문을 하였다. 평소부터 김방경을 시기하여 사건만 있으면 문제를 일으키려던 홍다구는 모진 고문을 자행했다. 홍다구는 허위자백이라도 받아 죄를 만들기 위하여 김방경의 머리에 철사 줄을 얽어매고 메로 쳐서 살이 떨어져 나가고 기절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아무리 고문을 해도 죄가 드러나지 않자 사사로이 무기를 간직한 죄를 덮어 씌워 귀양을 보내기로 하였다. 나라의 힘이 없는 관계로 평생을 오직 사직 수호를 위해 힘써 온 김방경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67세의 나이에 대청도(大靑島)로, 아들 김흔(金?)은 백령도(白翎島)로 유배되었다.
이들 부자가 원나라 군사와 고려 군사에 둘러싸여 개경(開京) 남문을 나서니 사람들이 모두 길을 막고 울면서 배웅했다. 그러나 이 일을 들은 원세조가 홍다구를 소환하고 충렬왕에게 김방경 부자와 위득유·노진의 등을 데리고 원으로 오기를 명하여 김방경 부자는 석방되었다. 두 부자가 석방되어 돌아오매 사람들이 다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잡고 말하기를, “시중(侍中) 부자를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라고 하였다.
충렬왕과 더불어 원에 갔던 김방경은 왕의 적극적인 변호로 전후 사실로써 무고임이 밝혀져 왕과 같이 귀국하여 다시 첨의중찬(僉議中贊)에 임명되어 수상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280년(충렬왕 6) 홍다구가 재정군(再征軍) 통솔하는 자리에 올랐다. 홍다구의 아버지인 홍복원(洪福源)은 1231년 몽고의 1차 고려 침입 때 인주(麟州 : 현 평북 義州에 있음)의 신기도령(神騎都領)으로 있으면서 몽고가 침략해오자 1천5백 호의 주민들을 이끌고 항복하여 몽고의 앞잡이 노릇을 한 민족 반역자였다. 그의 아들 홍다구도 몽고의 세력을 등지고 그 아비에 못지않게 고려를 괴롭혔다. 홍다구는 삼별초의 토벌과 일본 정벌 등에 김방경과 같이 참전하였는데 늘 김방경과 뜻이 맞지 않았다. 더구나 위득유의 모함 때 김방경에게 모진 고문을 가한 일까지 있은 홍다구가 재정군을 통솔하게 된 이상 김방경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나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충렬왕에게 그 뜻을 아뢰었다. 그러나 왕은 아직 조정에 남아 자기를 도와주어야 한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쿠빌라이는 2차 일본 정벌을 위하여 정수일본행중서성(政收日本行中書省)이라는 별도 기구까지 만들고 온 힘을 기울였다. 병력도 1차 정벌 때의 5배로 남송병(南宋兵) 10만여 명, 군선 3천 5백 척을 강남군(江南軍)으로 편성하고, 고려 · 한 · 몽고병 4만과 군선 9백 척으로 동로군(東路軍)을 편성하였다. 김방경도 이싸움에 70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고려군 도원수(都元帥)로 참가했다. 1281년 5월 합포(合浦)를 출발한 동로군은 1차 침공때와 마찬가지로 쓰시마섬(對馬島)과 이끼섬(壹岐島)을 함락하고 시가섬(志賀島)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이 해안을 수축하고 완강히 대항했기 때문에 쉽게 상륙하지 못하였다. 밤이 되자 일본군이 작은 배를 타고 동로군 전선에 접근하여 횃불을 집어 던졌다. 동로군은 이 작전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또 크게 병이 나서 죽은 사람이 3천이나 되었다. 이에 일단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하여 히젠(肥前)의 다카시마섬으로 철수하였다. 강남군은 원래 이끼섬에서 동로군과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를 변경 히라도섬(平戶島)으로 향하였다. 이로 인하여 동로군과 강남군의 연락이 끊겨 6월 하순에야 다카시마섬에서 합류했다. 마침내 하카타에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북구주 일대에 불어닥친 태풍으로 연합군의 대 선단이 전멸 상태에 빠졌다. 겨우 목숨을 구해 타카시마섬에 집결한 패잔병들은 다시 일본군의 공격으로 모두 희생되고 15만에 가까운 군대 중 겨우 목숨을 구하여 본국으로 돌아간 것은 겨우 3만 여 명에 불과했다. 이 때 김방경은 귀국하여 개경으로 가는 길에 안동에 들러 낙동강 변에 있는 영호루(映湖樓)에 올라 고향에 돌아온 심회를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복주 영호루에서(題福州映湖樓) 산과 물은 모두 구명이라 반갑고 누대 또한 어릴 적 생각게 하네. 기특하여라, 고국 옛 풍속 전해오노니 악기 잡고 노래 불러 내 마음을 위로하네.
山水無非舊眼淸 樓臺亦是少年情 可憐故國遺風在 收拾絃歌慰我行
8. 벼슬에서 물러남
1283년(충렬왕 9년) 김방경은 다시 왕에게 글을 올려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이에 충렬왕은 추충정난정원공신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세자사(推忠靖難定遠功臣三重大匡僉議中贊 判典理司事 世子師)로 치사(致仕)하니,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식읍(食邑) 1천호와 식실봉(食實封) 3백 호에 봉해졌다.
김방경은 치사 후 선산(先山)에 성묘하기 위하여 아들 순(恂)을 데리고 고향 안동에 내려와 친구들과 수일 동안 머물렀다. 그러나 자기 때문에 농사일을 할 시간을 빼앗기자,
“가을 곡식이 익어가 농사일에 한가롭지 못한데 내가 어찌 오래 머물러 번거롭게 하리오.”
하며, 다시 귀경하였다. 백성의 노고를 생각하는 김방경의 마음을 이런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늙어도 머리가 검을 정도로 건강한 김방경이었으나 세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1300(충렬왕 16) 89세를 일기로 고향 안동에 장례를 치러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조정의 집권자들이 이를 기피하여 안동에 예장(禮葬)하는 것을 막았다. 후일 충렬왕이 이를 후회하고 다시 그를 안동에 장례지내게 했으며, 1307년(충선왕 즉위초)에 삼한삼중대광 상락군개국공(三韓三重大匡上洛郡開國公)에 추증하고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내렸다. 묘지는 안동시 녹전면 죽송리(竹松里)에 있다.
9. 영욕이 교차된 90 생애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김방경은 충직하고 신후(信厚)하였으며 그릇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위엄이 있고 말수가 적었으며 자질(子姪 : 아들과 조카)을 대하여도 예(禮)로써 했다. 전고(典故)를 알아 일을 결단함에 어긋남이 없었다. 근검(勤儉)했으며 낮에는 눕지 않았고 늙어서도 머리가 검었으며, 추위를 모르고 병이 없었다. 친척이나 붕우가 상을 당하면 즉시 가서 조문했고, 벼슬을 물러난 후에도 나랏일을 집일처럼 걱정하여 큰 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자문하였다.” 라고 기록 되어 있다.
그러나 김방경은 벼슬을 산 것이 오래 되고, 또 원나라로부터 금부(金符)를 받아 도원수에 오르자 그 권세가 나라에 넘쳐났다. 여러 곳에 전원을 소유하였고, 휘하의 군사들은 그의 세력을 믿고 날뛰는 자가 있었으나 너무 연로해서 인지 이를 제대로 제지하지 못했다. 또, 외손자 조문간(趙文簡)을 원의 실력자 차신(車信)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니 원의 은총을 바라는 것이라고 못마땅해 하는 자도 있었다. 시간의 권신(權臣)들이 그의 예장(禮葬)을 막은 데는 이런 일들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어떤 이는 당시 원의 간섭으로 충렬왕이 폐위되었다가 복위되기도 하였던 만큼 김방경과 조정 대신들과의 사이에 원과의 관계로 인하여 어떤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사람의 생애를 돌아볼 때 평생 동안 한 점의 흠도 없기는 참으로 어렵다. 만년의 조그만 실수를 가지고 그의 한평생의 업적을 폄하(貶下)하는 일은 올바른 평가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몽고 지배 아래 있던 당시 고려에서 지식인의 처신 방법을 한 마디로 어떤 방법이 더 현명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느 방법이 더 국가를 위하고 백성을 위한 것인가를 깊이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김방경의 생애를 조망(眺望)해 보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몽고 침입 시에 고난의 현장에 앞장서서 고려의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을 구해낸 출장입상의 공신이 김방경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몽고에 대해 고려는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완강한 정신력을 보였고, 박서(朴犀), 김윤후(金允侯) 등과 같이 불굴의 민족정신을 보여준 이도 있다. 또 삼별초의 난도 어쩌면 당연한 저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국난을 당해서 국제 정세의 변화에 순응하여 더 높고 큰 차원에서 시국을 보는 안목도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동족이 더 이상 참상을 당하지 않도록 한 원종과 이장용 · 김방경 등의 실리를 중시한 외교 정책을 무조건 흑백 논리로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겠다.
특히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서 자기들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삼천리 강토가 전후 6차례나 몽고 군사의 말발굽 아래 밟히고 힘없는 일반 백성들이 겪는 참상을 생각한다면 강화 천도의 당위성은 한번 재고해 봄이 마땅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90생애를 오로지 국난 속에서 사직을 지키기 위하여 바친 김방경은 조준의 말처럼 고려 최대의 안사 공신(安社 功臣)임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 참고 문헌 ☜
1. 鄭鱗趾 · 金宗瑞 編纂 「高麗史」 2. 高柄翊 · 金庠基 外 著「韓國 人物 探査記」 3. 김종성著 「人物 韓國史 이야기」 4. 宋志香著 「安東 鄕土誌」 5. 國史編纂委員會 發刊 「韓國史」 6. 김희영 著 「日本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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