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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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6. 묘지석 소개

 

  1) 묘지석 모습  (2008. 5. 24. 묘지석 발굴 당시 발용(군)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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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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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

 

   2) 수원박물관 보관 전시 상태 (2009. 11. 7. 수원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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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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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장면

 


 

시대                  고려

연대                  1321년(충숙왕8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미지정  

크기                  미상

출토지               경기도 개풍군 임한면 가정리  

소재지               수원 광교박물관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민지(閔漬) / 미상 / 미상  

 

 4)<묘지명 소개> (2005. 3. 6. 발용(군) 제공)

 

   가) 묘지명 소개 : 이 묘지명은 1941년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임한면(臨漢面) 가정리(佳井里) 마산(馬山) 동쪽 기슭에서 발견되었다.  묘지명은 1321년(충숙왕 8) 민지(閔漬)가 작성하였다.

 

묘지명의 주인공 김순(金恂 : 1258~1321)의 자는 귀후(歸厚)이며,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의 10세손으로 안동부(安東府) 사람이다. 증조는 민성(敏成), 조부는 효인(孝印), 아버지는 방경(方慶)이다. 어머니 박씨는 익정(益旌)의 딸로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에 봉해졌다.

 

김순은 1279년(충렬왕 5)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또한 1295년(충렬왕 21) 동지공거(同知貢擧)로 과거를 주관하는 등 충렬왕 때 관인으로서 활약하였다.

 

김순은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은 영돈(永暾), 차남은 영휘(永暉), 3남은 사순(思順), 4남은 영후(永煦)이다. 장녀는 정지(鄭漬)에게, 2녀는 백이정(白正)에게, 3녀는 원의 좌승상(左承相) 아홀반(阿忽反)의 아들인 별리가불화(別里哥不花)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고로 아버지 방경, 부인 허씨의 묘지명이 있다.

 

   나) 묘지명 원문

 

   *출전:『安東金氏大同譜』(1979)〕  

 

 重大匡判三司寶文閣大提學上護軍金恂 墓誌銘 (幷序)

 

古所謂君子者德行云乎哉功業云乎哉予曰惟德行耳非功業也何也德行在心功業 在時在心者人所修也在時者天所授也能修人之所可修者爲君子耳夫德行本乎忠孝能以忠孝立揚於當世者惟我判三司相君有焉公諱恂字歸厚系出新羅王金傅□□□□□□□□□□□□□□□□□□□公爲金傅十世孫而安東府卽其桑梓之鄕也曾祖諱敏成追封左僕射行掌冶署丞兼直史관(집.舍+官)祖諱孝印追封中書令行正議大夫兵部尙書翰林學士充史관(집.舍+官)修撰官知制誥考諱方慶宣授中奉大夫管高麗軍都元帥推忠靖難定遠功臣匡靖大夫三重大匡判都僉議司事典理司事上將軍上洛郡開國公食邑一千戶實封三百戶贈宣忠協謨定難靖國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忠烈公母朴氏中書舍人知制誥諱益旌之女封陰平郡夫人公以善書多寫碑文年方志學以門蔭入仕爲掌牲署丞後改爲別將御牽龍行首職雖從東至西 其志未嘗不在文學盖嚴君雖位極兩朝將相惟以未參桂籍爲恨 冀嗣子之能復祖業故也公由是力學不倦至至元十六年己卯春場一擧爲金榜副元是年初拜攝郎將後改爲國學直講此公之能伸大人之遺憤者也自是先公益推偏季之恩常令不離左右賀正上國無不令隨但其東征船上不許追陪者不從軍參危事也公於是扈駕不待命而先登戰艦頗有扶衛救援之功是公惟專忠孝而奮不顧身者也壬午遷殿中侍史翌年出爲尙州判官政聲登聞未一年而入爲典法佐郞□知通禮門事考功正郞壬戌奉使南方爲陪先公拜祖墓於桑鄕也戊子除秘書少尹知通禮門事是年上命公爲世子府行李別監委以師傅之任壬辰加朝顯大夫典法摠郞知制誥累遷少府尹□□□學軍簿摠郞典理摠郎朝奉大夫秘書尹三司右尹皆兼三字元貞乙未冬同知貢擧所取皆當時名士大開綺席□□□□士朝野莫不嘉歎是先公之極於榮孝者也是年加朝議大夫丙申兼世子舍人大德丁酉遷國學典酒又拜奉烈大夫密直使右副承旨驟遷左副承旨寶文閣直學士翌年加右承旨知版圖司事每遷皆兼三字是年春奉使南方旣還改授通議大夫光政副使承旨成均祭酒又改爲正議大夫集賢殿學士左散騎常侍是年七月復爲密直司右承旨國學祭酒寶文閣學士知民曹事依前三字八月加奉翊大夫三司左使崇文관(집.舍+官)學士九月又改爲正獻大夫密直司左承旨判秘書寺事充史관(집.舍+官)修撰官知制誥知軍簿司事十二月拜奉翊大夫密直司副使文翰學士己亥知止乞退翌年八月先公棄世依遺囑葬于桑梓庚戌冬行祭于先公墓壬子起爲重大匡上洛君承襲先公之茅土己未又拜先公墓上命季子永煦奉使以陪行所以重其行也至治元年辛酉命相以賢擢公爲判三司事八月加寶文閣大提學上護軍至是月二十一日寢疾卒于第享年六十四公性敦厚直柔內實剛毅孝悌忠信出於天眞惜乎以公之才德若延數載則利澤豈不及於蒼生名位豈止如是而已哉娶匡靖大夫僉議中贊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典理司事世子師贈謚文敬公諱許珙之女生四男三女曰永暾今爲都官直郞知陜州事曰永暉今爲興威衛保勝別將曰思順剃度爲慈恩宗大德曰永煦爲司憲持平女一嫡入內侍中正大夫親禦軍大護軍鄭책(巾+責)二嫡大匡上黨君白이(턱이. 臣+頁)正三嫡舍人別里哥不花大元左承相阿忽反之子也永暾等旣卜兆于德水縣馬山將葬也以予爲先公親舊具公之行狀乞銘甚切予雖病不忍堅拒受而銘之銘曰

 

 赫赫忠烈 東國汾陽 滿庭蘭玉 幷秀爭芳 白眉爲季 時號最良 家尊所겸(부족할 겸.兼+欠) 未入桂堂 公承厥志 銳意文場 世傳祖法 時效錦囊 妙齡乙第 名振四方 揚歷臺閣 演誥含香 一提文柄 桃李成行 高堂喜淚 流溢壽觴  眼前拜相 錄(또는 綠)빈(구렛나루.髮의 윗부분+賓)金章 力彈(또는 殫)榮孝 哀極재(가래나무. 木+宰, 또는 梓)鄕 子道無缺 宜降百祥 暮年閑退 天意范范 終傳茅土 門戶更光 不參時政 虛度九霜 俄登極品 民固邦寧 胡未卒歲 遽促仙裝 在公無慊 爲國可傷 刻銘流耀 庶及無彊

 

   大元至治元年辛酉十月十四日

   宣授朝列大夫 翰林直學士 三重大匡 檢校僉議政丞 右文관(집.舍+官)大提學

   監春秋?事 驪興君 閔漬 撰

 

       *안동김씨대동보(기미보. 1977년 간)의 기록인 상기의 <新羅王金傅□□□□□□□□□□□□□□□□□□□公爲金傅十世孫>기록은 묘지명 원문이 아닌 변형 글임.  원문은 <新羅王金傅 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公爲金傅十五代孫>임

       *원문의 짙은 글씨 (  )는 김익수종친님의 교정 글자임

 

 5) 묘지명 관련 자료 종합 (2006. 4. 20. 항용(제) 제공)

   가)묘지명 개관

    (1)묘지명 제목 : 중대광판삼사사보문각대제학상호군 김순 묘지명 병서

    (2)제작 연대 : 1321년 대원 지치원년 신유 10월 14일 閔漬 찬-문영공은 1321년 8월 24일 몰했고 2개월 후인 10월에 묘지명은 제작됨.  

    (3)원 소재지(발견지) : 1942년(임오)에 경기도 개풍군 임한면 가정리 마산의 동쪽 기슭에서 발견

    (4)현 묘소 소재지 : 묘소는 1943년 시흥군 안양시 관양1동 후록에 모심

    (5)현 묘지명 소재지 : 수원 광교박물관

    (6)현 묘소 앞의 묘갈명 : 1946년 문영공 묘 앞에 세운 묘갈은 1942년에 발견된 묘지명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임.  

    (7)묘지명을 찬한 민지에 대하여 (문영공과 매우 다정한 사이임)

 

    *민지(閔漬)  

 

 1248(고종 35)∼1326(충숙왕 1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默軒). 평장사 영모(令謨)의 5대손이며, 상정(祥正)의 아버지이다.  

 

 1266년(원종 7)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후(祗候)가 되고, 1279년(충렬왕 5)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예빈윤(禮賓尹)이 되었다. 충선왕이 세자 때인 1290년 정가신(鄭可臣)과 함께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한림직학사 조열대부(翰林直學士朝列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1321년(충숙왕 8) 다시 수정승(守政丞)이 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여졌다. 그는 정가신이 지은 《천추금경록 千秋今鏡錄》 7권을 권보(權溥)와 교열, 증수하여 《세대편년절요 世代編年節要》라 이름하였고, 또 《본국편년강목 本國編年綱目》 42권을 편찬하였으나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저서로는 《묵헌집》이 있다. 시호는 문인(文仁)이다.  

 

  나)묘지명 발견 경위 및 문영공 묘소 조성 과정

 

    (1)1942년, 개풍군 임한면 가정리 마산 동록 장씨 성을 가진 무덤 부근에서 誌石을 발견함

    (2)1943년, 봄에 경기도 안양시 관양1동 후록 양좌지원에 문영공의 유해를 옮겨 모심. 이때 배위 제평군부인 양천허씨 영단을 설단함 (이 산은 익원공 16대손 讚源씨 소유의 선산으로 경 내의 한 葬地를 문영공 묘소지로 헌납한 것임).  

    (3)1946년 문영공 묘소 앞에 석물과 묘갈을 세움. 이때 묘갈은 묘지명의 글을 그대로 옮김.

    (4)그 후 讚源씨 후손이 이 산을 타인에게 매도할 때에 문영공 묘역 300여평을 우리 문영공파 문중에 희사하여 제,안,익 3파 공동명의로 등기를 필함

 

     * 이상의 자료 출전  : <안동김씨 파보>(제학공, 안렴사공, 익원공)에서 인용

 

     * <각 파보에 기록된 문영공 (휘순) 묘지석 발견 및 이장 경위  기록 내용>

 

오호라 공의 묘소는 실전되어 未知何代而歲 壬午년(1942년) 봄에 개풍군 임한년 가정리 마산 동록 장씨 성을 가진 무덤 부근에서 誌石을 발견하여 奉審後欲爲[人+乃]舊守護卽 張姓之?惡非常勢  

 

부득이 익년 癸未(1943년) 봄에 시흥군 안양시 관양1동 후록 양좌지원에 옮겨 모시었다. 이때 배위 제평군부인 양천허씨 영단을 설단하였다. 이 산은 익원공 16대손 讚源 소유 선산 내의 한 葬地로 헌납한 것이다.  

 

이제 비석을 세우고 用閔公所撰誌文記之 盖閔公 史家臣匠 且當時托契深厚記實楷白 以後歲傳聞搜記 不敢窺其萬一者也 但恨綠於剝落 間有缺者 不敢恣意補識 然一 猶知其全鼎 ?瑕不害於[王+業]玉云[弓빼고彌]  

공몰후 625년(1946년) 갑신 10월 일  

문영공 21대손 若浩 謹識  

문영공 21대손 舜默 謹書幷篆  

문영공 22대손 達演 幷識  

 

追記 : 그 후 讚源씨 후손이 이 산을 타인에게 매도할 때에 문영공 묘 영역 300여평을 우리 문영공파 문중에 희사하여 제,안,익 3파 공동명의로 등기를 필함

 

  다) 문영공 묘지명 상의 몇가지 문제점

 

(전략)-公諱恂字歸厚系出新羅王金傅 內孫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 公爲金傅十五代孫而安東府卽其桑梓之鄕也---  

 

(후략)

 

<역문>

 

-공의 이름은 순(恂)이고, 자는 귀후(歸厚)이며, 가계가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 敬順王)에서 나왔다. 內孫으로 三韓壁上功臣司從亞父三重大匡金宣平이 있다. 공은 김부의 15대손인데 안동은 그의 고향이다.

 

   (1)위 글 중 內孫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 (가)내손(內孫)은 ‘우리 집안사람, 아주 가까운 일가사람(경순왕 김부와 8-10여 촌 내) , 족친’이란 뜻으로 外孫에 대한 상대 개념 등으로 사용한 것이란 학자들의 의견임

      (나) 따라서 해석은-삼한벽상공신사종아부 삼중대광 김선평은 우리 집안사람(족친)이다.

        *해석자 : 심경호교수(고려대 한문과), 김익수(한학자. 제주도 문화재위원, 제), 김재갑(한학자, 경기대교수, 군)

      (다)경순왕과 김선평의 관계에서

        *경순왕의 출생년은 ?∼978인데, 고려에 양위할(935년) 당시의 나이는 약 50세로 보고 있기에 출생년은 885년으로 추정할 수 있음.

        *김선평(최근 후안동 발표)은 901년생임. 따라서 경순왕은 김선평보다 16세가 더 많음.

        *또한 당시 경순왕과 김선평의 관계는 같은 신라김씨의 혈족으로서 경순왕이 아주 가까운 집안 사이의 조(祖)항렬일 수도 있다고 볼 수 있음.

        *이런 까닭으로 여기서의 <내손(內孫)>은 '아주 가까운 집안 사람으로서 경순왕의 손자뻘'으로 해석할 수도 있음.

   (2)김선평은 신안동김씨(일명 후안동김씨)에서 시조로 받들고 있는 분으로서 신라김씨의 후손인 것은 맞으나 경순왕과는 선대의 계를 달리하는 분이다. 그런데 이 묘지명 속에 찬자인 민지는 왜 김선평을 넣은 것일까?

     --김선평은 경순왕과 같이 고려조의 개국공신이다. 따라서 경순왕과 동시대 분이요 같은 신라김씨이며 크게 멀지 않은 혈족인 김선평을 언급함으로써 문중과 문영공의 가계 혈통을 크게 자랑하고 내세우려는 의도로 삽입 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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