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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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9. 문영공 연보

(2005. 3. 11. 주회(안) 제공)

 

 1) 선계

 공의 이름은 순(恂)이고, 자는 귀후(歸厚)이며, 가계가 신라왕(新羅王) 김부(金傅 : 敬順王)에서 나왔다. □□□□□□□□□□□□□□□□□□□공은 김부의 10세손으로 안동부(安東府)가 곧 그 고향이다. 증조 민성(敏成)은 좌복야 행장야서승 겸 직사관(左僕射 行掌冶署丞 兼 直史館)에 추봉되었고, 조부 효인(孝印)은 중서령 행정의대부 병부상서 한림학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中書令 行正議大夫 兵部尙書 翰林學士 充史館修撰官 知制誥)에 추봉되었으며, 아버지 방경(方慶)은 선수중봉대부 판고려군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판도첨의사사 전리사사 상장군 상락군개국공 식읍 1,000호 실봉 300호(宣授中奉大夫 判高麗軍都元帥 推忠靖難定遠功臣 匡靖大夫 三重大匡 判都僉議司事 典理司事 上將軍 上洛郡開國公 食邑一千戶 實封三百戶)로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 충렬공(宣忠協謀定難靖國功臣 壁上三韓 三重大匡 忠烈公)으로 추증되었다. 어머니 박씨는 중서사인 지제고(中書舍人 知制誥) 익정(益旌)의 딸로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에 봉해졌다.

 

2) 어머니 음평군부인(陰平郡夫人) 박씨(朴氏)

충렬공 전취 박씨(前娶 朴氏)는 1258년 막내아들 김순(1258~1321)을 낳고 얼마후에 돌아가시고, 손씨를 재취로 맞아들여 딸을 낳아(1260년대), 후에 채의(=채홍철, 1262~1340)에게 출가시킨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1300년 충렬공 묘지명, 이진 찬>

---전취 박씨(前娶 朴氏)는 공(公)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또다시 손씨(孫氏)를 재취(再娶)하여 딸 한 분을 나셨는데 그 따님은 통례문지후(通禮門 候) 채의(蔡宜)에게로 출가(出嫁)하였다.

 

3) 어려서부터 글씨를 잘 썼다.

공은 글씨를 잘 써서 여러 비문(碑文)을 베껴 썼다. 나이 15세쯤[志學]에(1272년쯤) 문음(門蔭)으로 벼슬하여 장생서승(掌牲署丞)이 되고, 뒤에 별장(別將)으로 바뀌면서 어견룡행수(御牽龍行首)가 되었다.

 

4) 중찬(中贊)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둘째 딸과 혼인하다.

***(1녀-정책, 2녀-백이정, 3녀-별리가불화, 장남-영돈 1285년생)

 

<1332년 김순처허씨 묘지명, 이제현 찬>

부인의 성은 허씨(許氏)이고, 중찬(中贊)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둘째 딸이다. 1265년(을축년 : 원종 6)에 태어났다. 조부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수(遂)이며, 증보부는 예빈소경(禮賓少卿) 경(京)이다. 어머니는 윤씨(尹氏)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평공(文平公) 극민(克敏)의 딸이다. 형제인 충선왕비인 순비 허씨는 묘지명이 있다.

부인은 삼가고 신중하여 문경공이 사랑하였다. (부인의 어머니인) 윤씨의 장사(葬事)날이 을축(乙丑)일이 부인의 출생한 해(을축년 : 원종 6, 1265)에 해당한다고 하여, 사람들이 날짜를 점쳐 바꾸자 하였다. 문경공은 “내 딸은 반드시 복을 누릴 것이니 꺼릴 것 없다.”고 하였다. 좋은 사위를 택하여 처로 삼게 했다. 죽은 상락군(上洛郡)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이다. 김씨와 허씨는 모두 대족(大族)이다. 사치스러움과 부유함이 서로 높았는데, 부인은 예법으로 스스로를 지켜, 사람들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문영공이 만년에 노래 잘하는 기생을 좋아하였으나, 투기하는 기색이 없었다.

 

5) (22세)1279년 과거급제로 아버지에게 큰 기쁨을 드리다.

관직은 비록 동반(東班, 文班)에서 시작하여 서반(西班, 武班)에 이르렀지만 그 뜻은 학문[文學]에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개 부친이 비록 양조(兩朝)의 장상(將相)이라는 극히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다만 과거[桂籍]에 오르지 못했음을 한스럽게 여겨, 아들이 조업(祖業)을 회복하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공은 이로 말미암아 힘써 공부하고 게으르지 않아서 지원(至元) 16년 기묘년(충렬왕 5, 1279, 22세)의 과거[春場]에 응시하여 단번에 2등[副元]으로 합격하였다. 그 해에 처음 섭낭장(攝郞將)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바뀌었으니, 이는 공이 아버지가 가진 분(憤)을 푼 것이다.

이로부터 선공(先公)은 막내아들에게 은혜를 더 하여 늘 곁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였고, 상국(上國 : 元)에 하정사(賀正使)로 갈 때에도 따라가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단지 일본(日本)을 정벌하는 배[東征船]에는 따라 오르지 못하게 하였으니 종군하면서 위험한 일에 빠지지 않도록 한 것이었다. 공은 이 때에 임금을 호종하였는데, 명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전함(戰艦)에 오르니 자못 호위하고 구원한 공로가 있었다. 이 일은 공이 다만 충효를 오로지 하면서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이다.

 

6) (25-26세) 전중시사, 상주판관, 전법좌랑 등

임오년(충렬왕 8, 1282, 25세)에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옮기고, 이듬해에(26세)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되어 나갔는데, 잘 다스렸으므로 일년이 못 되어 들어와 전법좌랑 □지통례문사 고공정랑(典法佐郞 □知通禮門事 考功正郞)이 되었다.

 

7) (29세) 고향 증조부 묘 참배시 태백산(太白山)에 제고(祭告)

병술년(충렬왕 12, 1286, 29세)에 남녘 지방으로 사명(使命)을 받들어 내려가면서 선공을 모시고 고향에 있는 조상의 묘에 참배하였다.

 

<1300년 충렬공 묘지명, 이진 찬>

---병술(丙戌=1286)년에는 조부(祖父=김민성)께서 애육(愛育)해 주신 은혜(恩惠)를 생각하여 휴가(休暇)를 얻어 성묘(省墓)하실 때 왕(王)이 막내아들(季子) 고공정랑(考功正郞) 순(恂=문영공)을 보내서 태백산(太白山)에 제고(祭告)하니 호위(護衛)하는 공경(公卿)들이 떠나는 길에 장막(帳幕)쳤다.

아마 분영(墳瑩)에 참배(參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향당(鄕黨)의 친구들을 위해 칠 팔일을 머무는데 부로(父老)들에게 말하기를 '가을 일철이 등장(登場)하여 인력(人力)이 부족(不足)한데 어찌 내가 오래 머물러 방해가 되게 하리오!'하고 가마를 명하여 돌아왔다.

 

8) (31세) 비서소윤, 세자(훗날 충선왕) 사부

무자년(충렬왕 14, 1288, 31세)에 비서소윤 지통례문사(秘書少尹 知通禮門事)에 임명되고, 그 해에 임금의 명으로 공을 세자부 행리별감(世子府 行李別監)으로 삼아 사부(師傅)의 직책을 맡겼다.

 

9) (34세)1291년 장인(허공)이 별세하다.

장인 허공이 1291년(충렬 17, 34세)에 집에서 별세하니 향년 59세였다. 처음 정당문학(政堂文學) 윤극민(尹克敏)의 큰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고, 2녀는 김순(金恂)에게 시집갔는데, 승사랑 비서소윤 지제고(升仕郞 秘書少尹 知制誥)이다. 뒤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징(崔澄)의 여섯째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1291년 허공 묘지명>

공은 처음 정당문학(政堂文學) 윤극민(尹克敏)공의 큰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근시낭장(近侍郎將) 정(정)으로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기(奇)□□공의 딸과 결혼하였고, 2남은 조현대부 장군 감찰시사(朝顯大夫 將軍 監察侍史) 평(評)으로 찬성사 상장군(贊成事 上將軍)인 염(廉)□□공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3남은 대창서승(大倉署丞) 관(冠)이다. 장녀는 정승대부 판비서시사 문한시강학사 지제고(正丞大夫 判秘書寺事 文翰侍講學士 知制誥) 김변(金?)에게 시집갔고, 2녀는 승사랑 비서소윤 지제고(升仕郞 秘書少尹 知制誥) 김순(金恂)에게 시집갔다.

(공은) 뒤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징(崔澄)공의 여섯째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 총(寵)이고, 2남은 동면도감판관(東面都監判官) 부(富)이며, 장녀는 수태위 상주국 평양후(守太尉 上柱國 平陽侯) 현(?)에게 시집갔으며, 2녀는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조연(趙璉)에게 시집갔다.

 

10) (35세) 전법총랑, 군부총랑, 전리총랑, 삼사우윤 등

임진년(충렬왕 18, 1292, 35세)에 조현대부 전법총랑 지제고(朝顯大夫 典法摠郞 知制誥)로 승진하고, 여러 차례 옮기면서 소부윤 □□□학 군부총랑 전리총랑 조봉대부 비서윤 삼사우윤(少府尹 □□□學 軍簿摠郞 典理摠郞 朝奉大夫 秘書尹 三司右尹)을 지냈는데 모두 지제고(知制誥)[三字]를 겸하였다.

 

11) (38세)1295년 동지공거로 과거 주관

원정(元貞) 을미년(충렬왕 21, 1295, 38세) 겨울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자, 뽑힌 사람들이 모두 당시의 이름난 선비들이었다. 크게 잔치를 열자 □□□□ 선비와 조야(朝野)에서 훌륭하다고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은 선공을 지극히 영화롭게 한 효도이다.

 

12) (39-41세) 국학전주, 밀직사, 우승지, 성균좨주, 집현전학사 등

그 해에 조의대부(朝議大夫)로 승진하고, 병 신년(충렬왕 22, 1296, 39세)에 세자사인(世子舍人)을 겸하였다. 대덕(大德) 정유년(충렬왕 23, 1297, 40세)에는 국학전주(國學典酒)로 옮기고, 다시 봉렬대부 밀직사 우부승지(奉烈大夫 密直使 右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곧 좌부승지 보문각직학사(左副承旨 寶文閣直學士)로 옮겼다. 이듬해(41세) 우승지 지판도사사(右承旨 知版圖司事)에 올랐으며, 옮길 때마다 모두 지제고[三字]를 겸하였다. 그 해 봄에 남녘지방으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내려갔다. 돌아오게 되자 통의대부 광정부사 승지 성균제주(通議大夫 光政副使 承旨 成均祭酒)로 고쳐 임명되었고, 또 정의대부 집현전학사 좌산기상시(正議大夫 集賢殿學士 左散騎常侍)로 바뀌었다. 그 해 7월에 다시 밀직사 우승지 국학제주 보문각학사 지민조사(密直使 右承旨 國學祭酒 寶文閣學士 知民曹事)가 되었는데 전과 같이 지제고[三字]를 겸하였다. 8월에 봉익대부 삼사좌사 숭문관학사(奉翊大夫 三司左使 崇文館學士)에 오르고, 9월에 다시 정헌대부 밀직사좌승지 판비서시사 충사관수찬관 지제고 지군부사사(正獻大夫 密直司左承旨 判秘書寺事 充史館修撰官 知制誥 知軍簿司事)로 바뀌었으며, 12월에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문한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文翰學士)에 임명되었다.

 

13) (41세)1298년, 대구 동화사 홍진국존비 書

충렬왕24 戊戌 (1298, 41세)에 세운 동화사 홍진국존비는 金暄(김훤)이 짓고 밀직승지 김순이 썼으니 대구 팔공산에 있다. <해동금석총목>

 

弘眞國尊碑銘(篆 題)」

高麗國大瑜伽桐華寺住持五敎都僧統普慈國尊贈諡弘眞碑銘幷序」

奉翊大夫副知密直司事國學大司成文翰學士臣金?奉敎撰」

正議大夫密直司左承旨判秘書寺事文翰學士充史館修撰官知

制誥臣金恂奉敎書」

門人桐華寺住持深智洞解五明大師孝楨立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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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德二年十月 日」

 

우리 문중의 비조이신 대보공(휘 알지)의 탄강설화 <금궤도(金櫃圖)>를 그린 조속(1595-1668)은 진적(眞蹟)과 금석문(金石文)을 수집하여 <금석청완>을 엮는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금궤도와 금석청완이 소장되어 있고 금석청완에 홍진국사비 탁본이 실려 있다.

비명제목 6자(弘眞國尊碑銘)를 1행에 3자 2행에 3자, 두칸으로 나누어 제작하고 비문 중앙의 일부분을 6행 11열로 총 60자로 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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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박물관 소장 '금석청완' 내의 홍진국사비 탁본>(2002. 1. 항용(제) 비디오 촬영후 재촬영)

 

이우(1637-1693)가 1668년 엮은 탑본첩.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이 책에도 비교적 선명한 홍진국사비 탁본 1점이 실려 있다.

비석 말미에 적는 銘 부분으로 탁본 右上 4-5글자는 장서각 소장 탁본의 左下 조각과 같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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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금석서 내의 문영공 홍진국사비 탁본 일부>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에는 “탁본 實物”1점이 소장되어 있다. 서울 柳正秀(작고)藏 舊탁본(154.5×84.8)이다.

비편 6조각을 비문 내용에 맞추어 배열하여 탁본한 것이다. 현존하는 유일한 탁본이라 귀중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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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원 소장 홍진국사비 탁본 일부>

 

추사 김정희 42세, 1827년 1월 26일, (청나라)장심이 (추사 동생)김명희에게 장찰을 보낸다. ‘桐華 2비’등 여러 탁본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의를 표하고 있는데 이 중 하나는 동화사 홍진국사비 탁본이 아니었을까?

 

14) (42세)1300년 정치적 소용돌이 중에 아버지 충렬공 별세

기해년(충렬왕 25, 1299, 42세)에 물러날 때가 된 것을 알고 은퇴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43세) 8월에 선공이 세상을 떠나니 유언에 따라 고향에 장례지내고,

 

<고려사 김방경 열전 부 김흔 열전>

---중 일영(日英)이 한희유가 반역을 음모한다고 무고하였을 때 김흔은 인후(印候)와 더불어 군대를 출동시켜 한희유를 붙잡아다가 좌승(左丞) 합산(合散)에게 고발하여 문초케 하였다. 그러나 한희유 등은 죄행을 시인하지 않았고 일영도 또 달아나 버렸으므로 인후, 김흔 등이 장차 원나라로 가서 황제에게 하소하려 하였는데 왕이 말리었으나 그 말을 따르지 아니 하였다. 그래서 왕도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 한희유의 죄가 무고임을 판명케 하였다. 때마침 대사령이 내렸으므로 김흔 등도 죄를 면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귀국하여 복상을 마치고 다시 원나라로 갔다.

당시에 한희유가 재상으로 있었으므로 김흔은 고려로 돌아오려 하지 않고 연경에서 대략 7년간이나 머물러 있었다. 한희유가 죽고 난 뒤에 김흔을 찬성사 자의(咨議) 도첨의사사로 임명되고 삼중 대광(三重大匡)의 작위를 더하여 받았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으로 봉하였으므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만호의 관직은 사양하여 형의 아들 김승용(承用)에게 주었다.

 

<1300년 충렬공 묘지명, 이진 찬>

---대덕4년(大德4년=1300년) 8월 16일에 병환(病患)으로 인하여 백목동(栢木洞) 영계리(◀앵계리)에서 돌아가시어 9월 초3일에 예안현(禮安縣) 서쪽 산록(山麓)에 유교(遺敎)에 따라 안장(安葬)하였다.

 

<1350년 충렬공 행장, 안진 발>

---89세에 병환(病患)으로 본댁(本宅)에서 돌아가시니 임종(臨終)시까지 아품이 없이 조용히 앉아서 돌아가시니 유언(遺言)에 따라 안동(安東) 조부(祖父)산소(山所  ◀안동府西 一息 花林村)근처에 장사(葬事)하게 되었다.

영구(靈柩)가 떠날 때는 삼관녹사(三官錄事) 80여명이 모두 소복(素服)으로써 제사(祭祀)를 드리고 울음으로서 보내는데 그 때 공(公)을 미워하는 간신(奸臣)들 무리의 모사(某事)로 예장(禮葬)을 치르지 못하여서 왕(王)이 또한 후회(後悔)하고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26년에 그는 병으로 죽었는데 나이는 89세였다. 김방경은 사람됨이 충직하고 진실하고도 후하였으며 도량이 아주 넓어서 사소한 일들에 구애됨이 없었고 엄격하고도 굳세었으며 항상 말이 적었다.

-----그는 죽은 뒤에 안동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당시에 정권을 잡고 있던 자들이 이것을 싫어하여 예식대로 장사 지내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왕이 이것은 잘못이었다고 후회하였다.

 

15) (49세)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書

(49세)1306년 9월 書하신 <高麗國大藏移安記(고려국대장이안기)>의 기록이 元의 周南瑞(주남서)가 편찬한 <天下同文>에 수록되어 있는데, <사고전서>의 천하동문집에도 본문이 축소된 채 수록되어 있다.

이 비는 민지 찬, 김순 서로 만든 것으로, 비의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鐵山(紹)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劉喜海의 海東金石存攷(고)에는 "大德10年9月閔漬撰 金恂書 在江原道淮陽府金剛山"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에도 기록되어 있다.

 

<고려국대장이안기>

선수 조열대부 한림학사(宣授 朝列大夫 翰林學士) 겸본국 광정대부 자의도첨의사사사 연영전대학사 동제수사 판문한서사(兼本國 匡靖大夫 咨議都僉議使司 延英殿大學士 同提修史 判文翰署事) 민지(閔漬)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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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大德) 10년 병오년(충렬왕 32, 1306) 9월 일 적음.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판비서시사 문한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判秘書寺事 文翰學士) 김순(金恂)이 씀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국학대사성 숭문관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國學大司成 崇文館學士) 윤보(尹珤)가 전액(篆額)을 씀

고려국 금강산 성불난야 호송대장경 백실사문(高麗國 金剛山 成佛蘭若 護送大藏經 白室沙門) 석(釋) 일목(一牧)이 돌을 세움

선수 강서도 원주로 의춘현 대앙산 당대주지(宣授 江潟 袁州路 宜春縣 大仰山 當代住持) 전법허곡대선사(傳法虛谷大禪師) 희릉(希陵)

 

16) (53세) 중대광 상락군

경술년(충선왕 2, 1310, 53세) 겨울 선공의 묘에 제사지냈다. 임자년(충선왕 4, 1312, 55세)에 다시 중대광 상락군(重大匡 上洛君)으로 임명되면서 선공의 작위[茅土]를 이어받았다.

 

17) (57세)1314년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 書

(57세)1314년 2월 書하신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의 기록이<옥금산 혜인고려화엄교사지>에 수록되어 있다.

이 비는 1314년 (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으로 민지 찬, 김순 서로 만든 것이다. 이의 내용은 첨의찬성사 元瓘이 일찍이 첨의중찬 안향(1243-1306)과 함께 대장경 1부를 인출하여 사명산의 천동선찰(*강절행성 경원로 ?현의 사명산에 위치한 천동사를 말한다)에 봉안하였으나 뜻에 차지 않아 다시 1부를 인출하여 혜인사에 봉안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고려국 첨의찬성사 원공 사대장경기>

한림원직학사 조열대부본국중대광 수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판선부사 치사 민(閔)□□ 지음.

중대광 상락군 김순(金恂)이 글씨와 제액(題額)을 씀.

---

연우(延祐) 원년(충숙왕 1, 1314 ) 2월 일

공덕주(功德主)는 대광 첨의찬성사 판총부사 치사(大匡 僉議贊成事 判總部事 致仕) 원관(元瓘)이고, 성해자조명종대사(性海慈照明宗大師) 화엄종주(華嚴宗主)로 항주로 고려혜인교사(杭州路 高麗惠因敎寺) 주지인 승려 혜복(慧福)이 비를 세움.

 

18) 만년 풍류

명(銘)하여 이른다.

---노년에 한가로이 물러났으니 하늘의 뜻을 그대로 따르도다.

끝내 작위[茅土]를 이어 받으니 가문에 다시 영광이 되었으나

시정(時政)에 참여하지 않은 채 마음을 비우며 9년을 보내었도다.

 

<<고려사> ‘김방경 열전’ 부 ‘김순 열전’>

---그의 성질은 너그럽고 후하였으며 예서(隸書)에 능하였고 성기(聲伎-노래 잘하는 기생)를 집에 데려다 두고 날마다 악기를 듣는 것으로써 낙을 삼았다.

 

<1332년 김순처허씨 묘지명, 이제현 찬>

---문영공이 만년에 노래 잘하는 기생을 좋아하였으나, 투기하는 기색이 없었다.

 

<디지털한국학>

---성격이 관후하고 예서(隷書)를 잘 썼으며, 거문고와 퉁소를 즐겼다.

 

19) (62세) 막내아들 영후(永煦)와 함께 선친 묘소 참배

기미년(충숙왕 6, 1319, 62세)에 또 선공의 묘에 참배하려하자, 임금이 막내아들 영후(永煦)에게 명하여 사명(使命)을 받들고 따라가게 하였으니, 그 행차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20) 동방급제 문량공(文良公) 조간(趙簡) 문병 가서

<역옹패설 전2>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은 문량공(文良公) 조간(趙簡)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방(榜)에서 첫째 자리는 문량공이 차지하였다. 문량공이 늙었을 때 악성 종기로 어깨와 목을 거의 분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의원은 손을 쓸 수 없었는데, 묘원(妙圓)이란 중이,

"이 종기는 뼈에 뿌리를 박고 있어서 뼈가 반은 썩었을 것인데, 그 썩은 뼈를 긁어내지 아니하면 치료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뼈를 긁어낸다면 그 아픔을 참아내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니, 문량공이,

"죽기는 마찬가지니 시험해 보라."

하였다. 중은 드디어 예리한 칼로 살을 베어내니 과연 뼈가 썩어 있었다. 그 썩은 뼈를 긁어내고 약을 바르니 문량공은 기절하여 이틀 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었다.

문영공이 이 말을 듣고 문병을 가서 문에 앉아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니, 문량공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사람을 시켜 말하기를,

"공이 나를 슬퍼함이 이와 같을 줄 몰랐다. 어찌 마음속으로는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슬퍼하는가."

하였다. 이에 문영공이 말하기를,

"허, 이게 무슨 말인가. 40년 동안 동년급제(同年及第)로서의 교분(交分)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니, 문량공이,

"내가 죽으면 같은 방 안에서는 공(公)을 앞서는 자가 없기 때문일세."

하였다. 문영공이 눈물을 거두고 웃으며 말하기를,

"이 늙은이가 죽지는 않겠다."

하고 돌아갔다.

 

조간(趙簡)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제(金堤).

1279년(충렬왕 5)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서적점녹사(書籍店錄事)에 보임되었고, 이듬해 왕이 문신들에게 시부(詩賦)를 시험할 때 또 수석을 차지하였으므로 황패(黃牌)를 받고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다.

1288년에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왕명에 의하여 새로운 악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벼슬이 점차 올라 보궐(補闕)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자, 왕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기거주(起居注)로 특진시켰고, 다시 첨의사인(僉議舍人)으로서 경상안렴사(慶尙按廉使)에 보임되었다.

1298년에는 좌사의(左司議)로 과거를 주관한 바 있고, 1300년 좌부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 부고시관)가 되어 진사를 뽑았다.

그뒤 좌간의·좌승지를 거쳐 우상시권수밀직부사(右常侍權授密直副使)에 올랐다. 충선왕 때 형조시랑우간의대부(刑曹侍郎右諫議大夫)를 거쳐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충숙왕 때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를 역임한 뒤 찬성사에 올라 죽었다.

시문에 뛰어나 조선 영조 때 유광익(柳光翼)의 《풍암집화 風巖輯話》에도 수록되어 있다.

 

21) 성품

공은 성품이 정이 두텁고 곧으면서도 부드러우며, 내실(內實)이 있으면서도 강직(剛直)하여 굴하지 않았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으며 충성스럽고 신의가 있는 것이 조금도 꾸밈없이 자연스러웠으니, 애석하다. 공의 재주와 덕으로써 만일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이익과 혜택이 어찌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았을 것이며, 명성과 지위가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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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말에 군자라고 함은 덕행(德行)을 말한 것인가, 공업(功業)을 말한 것인가. 나는 다만 덕행일 뿐이고 공업은 아니라고 말하고자 하니, 왜 그러한가. 덕행은 마음에 달려 있고 공업은 때에 달려 있는 것인데, 마음에 달린 것은 사람이 닦을 수 있으나 때에 달린 것은 하늘이 주는 바이니, 능히 사람이 닦을 수 있는 것을 닦으면 군자가 되는 것이다. 대저 덕행은 충과 효로 바탕을 삼는 것인데, 충효로 당시에 이름을 떨친 이는 우리 판삼사 상군(判三司 相君)이다.

 

22) 자녀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이며 시호가 문경공(文敬公)으로 추증된 허공(許珙)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영돈(永暾)은 지금 도관직랑 지합주사(都官直郞 知陜州事)이고, 차남 영휘(永暉)는 지금 흥위위 보승별장(興威衛 保勝別將)이며, 3남 사순(思順)은 머리를 깎고 자은종(慈恩宗)의 대덕(大德)이 되었으며, 4남 영후(永煦)는 사헌지평(司憲持平)이 되었다. 장녀는 내시 중정대부 친어군대호군(內侍 中正大夫 親御軍大護軍) 정책에게 시집갔고, 2녀는 대광 상당군(大匡 上黨君) 백이정(白?正)에게 시집갔으며, 3녀는 사인(舍人) 별리가불화(別里哥不花)에게 시집갔으니 원의 좌승상(左承相) 아홀반(阿忽反)의 아들이다.

 

<1332년 김순처허씨 묘지명, 이제현 찬>

장남 영돈(永暾)은 봉상대부 전법총랑(奉常大夫 典法摠郞)이다. 둘째 영휘(永暉)는 흥위위 낭장(興威衛 郎將)이다. 그 다음 사순(思順)은 출가하여 자은종(慈恩宗) 대덕(大德)이다. 그 다음 영후(永煦)는 봉선대부 자섬사사(奉善大夫 資贍司使)이다. 장녀는 대광 청하군(大匡 淸河君) 정책(鄭漬)에게 시집갔으나, 먼저 죽었다. 다음은 대광 상당군(大匡 上黨君) 백이정(白?正)에게 시집갔다. 막내는 강절성 참지정사(江淅省 參知政事)인 왕인 별리가불화(王人 別里哥不花)에게 시집갔다.

 

 

23) (64세)1321년 판삼사사, 보문각대제학 상호군, 8.21일 몰하다.

지치(至治) 원년 신유년(충숙왕 8, 1321, 64세)에 재상을 임명하면서 어진 이를 뽑도록 하였는데 공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8월에 보문각대제학 상호군(寶文閣大提學 上護軍)을 더하였다. 그 달 21일에 병이 들어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64세이다.

영돈 등이 덕수현 마산(德水縣 馬山)에 무덤을 정하고 장례를 치르려고 하면서, 내(=민지)가 선공(=김순)의 친구라고 하여 공의 행장을 갖추어서 매우 간절하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내가 비록 병들었지만 차마 굳게 거절하지 못하고 수락하고 글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빛나는 충성과 절의는 우리 나라[東國]의 분양(汾陽)이 되고

뜰에 가득한 자손[蘭玉]들은 모두가 빼어나서 아름다움을 다투도다.

백미(白眉)는 바로 막내이니 당대에 가장 뛰어나다고 일컬어졌는데

부친이 아쉬워한 것은 과거[桂堂]에 오르지 못한 것이었도다.

공은 그 뜻을 이어 문장에 마음을 단단히 두고

집안에 전해오는 조상의 법(法)이 들어 있는 시(詩)의 비단주머니[錦囊]를 차서

젊은 나이[妙齡]에 을제(乙第)에 합격하니 이름은 사방에 떨치고

대각(臺閣)을 두루 거치면서 고명(誥命)을 펼치니 향기를 품었도다.

한 차례 과거를 주관하자 복사꽃과 오얏꽃 같이 뛰어난 인재가 줄을 이으니

부모님도 즐거워 눈물을 흘리고, 장수를 비는 술잔은 넘쳐 흐르도다.

생전에 재상에 임명되니 늙은 부모에게 영광이고

힘써 입신양명하여 효도를 다하고, 고향에 부친을 장례지내며 슬픔이 지극하도다.

아들된 도리를 다하였으니 마땅히 온갖 상서가 내릴 것이며

노년에 한가로이 물러났으니 하늘의 뜻을 그대로 따르도다.

끝내 작위[茅土]를 이어 받으니 가문에 다시 영광이 되었으나

시정(時政)에 참여하지 않은 채 마음을 비우며 9년을 보내었도다.

문득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니 백성은 안정되고 나라는 평안한데

어찌 나이를 다 채우지 않고 갑자기 선계(仙界)로 떠날 채비를 재촉하는가.

공은 아쉬움이 없을지라도 나라를 위해서는 애통하기만하여

명(銘)을 새겨 빛나는 이름을 전하고자 하니 무궁하기를 바라노라.

 

원[大元] 지치(至治) 원년 신유년(충숙왕 8, 1321) 10월 14일

선수 조열대부 한림직학사 삼중대광 검교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여흥군(宣授 朝烈大夫 翰林直學士 三重大匡 檢校僉議政丞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驪興君) 민지(閔漬)가 짓다.

 

24) 1321.10.14일, 민지(閔漬)가 문영공 묘지명을 찬하였다.

<중대광 판삼사사 보문각대제학 상호군(重大匡 判三司事 寶文閣大提學 上護軍) 김순(金恂) 묘지명> 은 1321년(충숙왕 8) 민지(閔漬)가 작성하였다.

묘지명은 1942년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임계면(臨溪面) 가정리(佳井里) 마산(馬山) 동쪽 기슭에서 발견되었다.

묘지석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고 하고, 1957년 간행 <안동김씨 보감>에 묘지석 사진이 희미하게 실려 있다.

 

김순묘지명(金恂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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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1321년(충숙왕8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미지정

크기 미상

출토지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소재지 (한국)국립중앙박물관-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57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민지(閔漬) / 미상 / 미상

 

민지(閔漬)

1248(고종 35)∼1326(충숙왕 1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용연(龍涎), 호는 묵헌(默軒). 평장사 영모(令謨)의 5대손이며, 상정(祥正)의 아버지이다.

1266년(원종 7)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지후(祗候)가 되고, 1279년(충렬왕 5)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예빈윤(禮賓尹)이 되었다. 충선왕이 세자 때인 1290년 정가신(鄭可臣)과 함께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한림직학사 조열대부(翰林直學士朝列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1258년 원나라가 두번이나 실패한 일본정벌을 결행하려 하자 좌부승지로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동정(東征)의 불필요함을 역설하여 전함(戰艦)건조를 중지하도록 하였다.

그뒤 집현전대학사 첨광정원사(集賢殿大學士僉光政院事)가 되고 충선왕초 첨의정승(僉議政丞)에 이르러 사직하였다.

1321년(충숙왕 8) 다시 수정승(守政丞)이 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여졌다.

1323년 가락군(駕洛君) 허유전(許有全), 흥녕군(興寧君) 김거(金$거02)와 함께 원나라에 가서 충선왕의 환국을 청할 표문(表文)을 지었다. 이 문장은 명문으로 그 뜻이 간절하고 때로는 애통한 듯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에 머무른 지 6개월이 되어도 심왕(瀋王)무리의 간계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정가신이 지은 《천추금경록 千秋今鏡錄》 7권을 권보(權溥)와 교열, 증수하여 《세대편년절요 世代編年節要》라 이름하였고, 또 《본국편년강목 本國編年綱目》 42권을 편찬하였으나 모두 전하지 않고 있다.

사관은 민지를 평하기를, “그는 문예는 있으나 습속이 많고 심술이 바르지 않아 나인(內人)을 아첨하여 섬기고, 또한 성리(性理)의 학을 알지 못하여 주자(朱子)의 소목론(昭穆論:종묘 신위의 차례를 말함.)을 그르다고 하였으니 편벽함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아마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성리학자들의 견해로 보인다.

저서로는 《묵헌집》이 있다. 시호는 문인(文仁)이다.

 

25) 몰후12년 1332.7.신묘일, 배위 허씨 별세. 묘지명 이제현 찬.

문영공이 죽은지 12년 뒤인 지순 임신(至順 壬申 : 충혜왕 2, 1332) 7月 신묘(辛卯)일에 배위 허씨가 병으로 별세하였다. 묘지명은 1332년(충숙복위)에 이제현이 작성하였다. 묘지명은 이제현(李齊賢)의 문집 『익재난고(益齋亂藁)』 권7과 『동문선(東文選)』 권124에 실려 있다.

 

김순처허씨묘지명(金恂妻許氏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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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1332년(충숙왕19년)

유형/재질 묘지명·묵서명 / 돌

문화재지정 미지정

크기 미상

출토지 미상

소재지 (한국)-현존하지 않음

서체 미상

찬자/서자/각자 이제현(李齊賢) / 미상 / 미상

 

26) 1942년 실전묘소 발견

<안동김씨 파보 (안렴, 익원)>

문영공 (휘순) 묘지석 발견 및 이장 경위

오호라 공의 묘소는 실전되어 未知何代而歲 壬午년 봄에 개풍군 임계년 가정리 마산 동록 장씨 성을 가진 무덤 부근에서 誌石을 발견하여  찾아 모신 후에 옛모습 그대로 수호하려 하였으나 장씨 성을 가진 자가 포악과 비상 세력을 행하므로 부득이 익년 癸未 봄에 시흥군 안양시 관양1동 후록 양좌지원에 옮겨 모시었다. 이때 배위 제평군부인 양천허씨 영단을 설단하였다. 이 산은 익원공 16대손 讚源 소유 선산 내의 한 葬地로 헌납한 것이다.

이제 비석을 세우고 用閔公所撰誌文記之 盖閔公 史家臣匠 且當時托契深厚記實楷白 以後歲傳聞搜記 不敢窺其萬一者也 但恨綠於剝落 間有缺者 不敢恣意補識 然一 猶知其全鼎 ?瑕不害於[王+業]玉云[弓빼고彌]

 

공몰후 625년 갑신 10월 일

문영공 21대손 若浩 謹識 /문영공 21대손 舜默 謹書幷篆 /문영공 22대손 達演 幷識

追記 : 그후 讚源씨 후손이 이 산을 타인에게 매도할 때에 문영공 묘 영역 300여평을 우리파 문중에 희사하여 제,안,익 3파 공동명의로 등기를 필하였다.

 

<안양문화유적총람 (안양시 문화공보담당관실, 1996. 2월)>

● 종별번호 : 0704-31-015

● 시 대 : 고려 충숙왕 8년(1321년), 재건립 1943년

● 규 모 : 약 40평

● 소 재 지 : 관양동 산74번지

● 지 목 : 임야

● 재 료 : 토목

● 관 리 자 : 안동김씨종친회

---관양동 간촌 입구에 위치하는 김순 묘는 원래가 마산에 있던 것을 1943년 이장한 것이며 비문도 내용만을 옮긴 채 다시 세운 것이다.

---묘역은 40평 규모에 봉분은 높이 120㎝, 지름이 360㎝이고 상석은 가로 112㎝, 세로 80㎝, 두께 62㎝며 향석은 가로 32㎝, 세로 20㎝, 높이는 38㎝이다. 망주석은 2기로 각각 주고 160㎝에 지름 35㎝며, 양천허씨 비가 있다. 비는 오석으로 비고 100㎝, 너비 28㎝에 지대석은 가로 60㎝, 세로 38㎝, 두께 28㎝로 대부분의 석물은 최근에 세운 것이다.

---이외에 1948년에 다시 세운 김순 묘갈이 있으며 비갓은 가로 90㎝, 높이 50㎝, 두께63㎝며 묘갈신은 높이 152㎝, 너비 59㎝, 두께 27㎝에 지대석은 가로 92㎝, 세로 64㎝, 두께 2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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