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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 17. 항용(제) 제공)
1) 일시 : 2008. 1. 10(목). 09:00-17:00시 2) 장소 :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 두은리 일대 3) 답사 참가자(무순) : 용주(안), 좌회(익). 항용(제) 4) 목적 : 시중공 허유전 묘소 현장 답사 5) 내용 :
오늘은 시중공 허유전 묘소 현장 답사를 가는 날이다. 2일전 안양 문영공재실에서 있었던 자문회의에 이은 활동이다. 문영공선조님의 묘역 개축의 표본으로 정해진 묘소이기 때문이었다. 표본 선정이유는 다음과 같다.
1)문영공 몰년(1321년)과 거의 동시대에 조성되었다(허유전-1323년 몰), 2)문영공(종1품)과 같이 고위 관직자(정승 역임)였다.
3)개성에서 근무하다가 죽은 뒤 이곳에 와서 묻힌 허유전 묘는 당시 경기도 전역의 전형적인 묘소 형식이다.
4)오늘날 남아 전하는 고려시대 분묘 중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묘소이다.
일행은 아침 09:00시 서울 사당동에서 만나 좌회님의 승용차로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읍에서 선물용 귤 한 박스를 싣고 시내에서 전등사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불은면 농협을 지나자마자 허유전 묘를 알리는 안내판이 보이고 우회전 하여 약 200m 정도 들어가니 마을 끝 부분에 또 하나의 안내판이 나타나면서 우측으로 홍살문(허선생님 개인이 세움, 쇠로 제작)이 보였다. 10시 30분, 총 1시간 30분이 걸렸다.
재실에 이르는 길 좌측에는 각종의 기념비가 있었고 대문 앞에는 관청에서 세운 해설판이 있었다. 우리 문영공 선조님도 이것이 필요하다며 용주님과 좌회님은 이를 실측하셨다. (높이-185cm, 폭-145cm, 내부 폭-100cm)
<강화읍-전등사길 도로, 불은 농협 옆에 세워져 있는 도로 안내판>
<허유전 묘소에 이르는 소 도로 안내판> <대문 입구의 석물들>
<대문 입구의 홍살문-허선생님 개인 설립>
<홍살문의 문양, 물고기는 김해허씨의 상징이라고 한다>
<허유전 묘소 앞 재실의 솟을 대문, 華雲門이란 현판이 있다.>
<대문 안쪽 위>
<해설판>
<해설판>
<대문 안의 모습, 담 넘어에 허유전묘가 보인다.>
<재실(두산재)>
어제 묘소 앞 재실의 관리사옥에 살고 계시는 허관구 선생님께 미리 전화 약속을 드렸었다. 우리 일행을 맞으시는 사모님(밀양박씨)의 표정이 참으로 따뜻하고 정 또한 가득하시다.
<관리사옥>
인사를 올린 허관구선생님은 금년 75세로 원래는 홍천에 사셨다.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는데 정년 퇴직하시고 95년에 이곳에 와 사시는 분으로 지난 1987년 허유전 묘를 최초로 발견한 분이시다. 허선생님과 사모님은 허선생님이 꿈에서 인도하는 대로 이곳에 오게 되었고, 묘 전면(혼유석과 묘소 사이) 땅 속에서 허유전 묘란 표석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문중에 알린 뒤 기초 발굴을 한 뒤, 다시 문화재 관리국에 신고하여 정식으로 발굴 작업을 하였으며, 그 후 문화재로 지정 된 과정을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허선생님은 2년 전에 묘소의 낙엽을 줍다가 뇌졸중이 왔고 구사일생으로 회복되셨는데, 현재 수족이 일부 불편하시고 말씀도 좀 어눌한 상태이셨다.
<방안에 있는 허관구님의 호 액자--尋齋幽軒>
<앨범 사진-1987년 허관구 선생님이 최초로 묘소를 발견한 장면, 표석 발견 모습>
<앨범 사진-발견 당시 발굴 고유제>
<앨범 사진-묘소 발굴, 복원 후 허선생님 내외분>
<앨범사진-1989년 10. 15일. 시중공 묘소 복원 준공식. 중앙 갓을 쓴 분은 허문도씨>
<앨범사진-묘소 복원 공사 과정 장면>
<앨범사진-준공일 모 방송국 무용단 축하 공연 장면>
<앨범사진-준공일 모 방송국 무용단 축하 공연 장면>
<복원 당시 발간 책자1>
<복원 당시 발간 책자>
<복원 당시 발간 책자>
<복원 당시 발간 책자>
마치 어린이같은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고 계시는 선생님에게서 순진무구의 완전한 순수를 보는 듯했다. 허관구 선생님이 꿈 속의 계시에 의해 묘소를 찾아 나서던 허유전 묘소 발견 단계에서부터 현재의 완전 복원과 정비된 모습까지의 과정을 사모님(밀양박씨)이 중심적으로 해설해 주시고 드문드문 허선생님은 보충 설명해 주셨다. 우리는 마치 신화를 듣는 듯했다. 감동이었다.
<내외분>
이어 말끔히 조성된 재실을 부러움으로 보면서 지나서 뒤편의 묘역으로 갔다. 주변이 잘 정비된 묘소는 마치 예술품을 보는 것 같았다. 아래 우측으로는 허유전 후손들의 단비(6자 비, 거북좌대, 이수)가 있었고 다시 작은 문(신도문)을 지나니 약 300여평의 공간에 아래 쪽에는 신도비(7자비, 거북좌대, 이수, 이가원찬), 상석,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 등의 석물들이 있었다. 묘소와는 약 30여m의 공간을 띄워서 세워져 있었다. 묘소가 문화재로 지정되자 가까이에는 어떤 시설물도 세울 수 없다는 관청의 지시 때문이었다고 한다. 묘소 전체를 흙으로 곡장했는데 이는 묘소 발견 후 최근에 조성한 것이라 한다. 묘소 전체를 실측했다. 복사본인 예장석이란 새로운 돌 모습도 보았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것이라 한다. 국가에서 예장을 한 증명물이다. 문인석은 거의 다 마멸되어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었다. 땅 속에서 나온 표석 복사본을 세웠는데 작았다.
<대문에서 본 시중공 허유전 묘>
<재실 내부>
<재실 내부 각종 현액들>
<허유전의 후손 설단비>
<설단비 좌측>
<설단비 후면>
<설단비 우측>
<단소에서 시중공 묘역 사이의 대문>
<묘소에서 본 대분 방향>
<묘소에서 약 30m를 띄워 담장 가까이에 설치한 석물들>
상석 : 가로-153cm 세로-100cm, 높이-40cm
<신도비. 7자 비. 이가원 찬>
<묘소 전면>
<묘소> 봉분 : 가로-5m, 세로-5m, 기단부 석축-96cm(앞), 70cm(뒤)
<문비석(門扉石)-예장석> 예장석 : 가로-58cm, 높이-83cm, 두께-5cm
<표석> (복사본) : 높이-67cm(전체), 45cm(땅 위부분), 가로-15cm.
<문인석> (1개는 실전함)
<묘소 전면>
<묘소 옆면>
<묘소 뒷면>
<묘소 윗면>
*<가락허시중공 무덤 발굴 조사 보고>(손보기, 장호수 저. 1988. 8. 한국선사문화연구소 간. 19p-37p) 책자 요약
1. 무덤의 방향 : 동에서 북으로 23도 기운 동동북방향 2. 둘레석 전면 양쪽에 집모양의 문양을 새긴 문돌(門扉石)이 있음 : 처음 발견된 특징있는 모습 (*필자주-허선생은 이것은 예장석이라 함. 즉 국가에서 장례를 주관한 증거라 함) 3. 무덤 앞쪽에는 2단으로 단막이돌을 짜서 단을 이룸. 사각형의 방형임 4. 내부 광은 동서로 길게 파져 있었으며, 내부는 돌들이 주위에 박혀 있었다. 내부 광 속에는 부식토가 가득 차 있었다. 5. 내부 광의 부식토 속에서 고려 토기 조각, 관못이 나왔고, 바닥에서 중국 엽전이 나옴 *청자잔 : 여러 조각 형식으로 출토. 입술지름-9.1cm, 바닥지름-5.5cm, 높이-3.4cm. 연한 연두빛, 12세기 전반의 청자 특징 *고려토기 : 움속 동벽 가까이에서 수십 점의 작은 토기조각이 나옴. 맞추어 보니 토기병 거의 하나. 전형적인 고려 토기병. 기타 회색, 갈색의 토기들임. *관못 : 나무에 쓴 쇠못 한 점. 길이-3.1cm, 머리 너비-0.8cm, 원 길이-5cm 이상으로 추정. *청동조각 : 여러점 나옴. 청동 허리띠 장식으로 추정. *엽전 : 총 수는 19점. 고려의 것은 하나도 없음. 10점은 원형 그대로, 나머지는 조각으로 남음. 종류를 알 수 있는 13점 중 12점은 송대, 1점은 금대에 만든 것임. @송나라 엽전 : 송원통보(宋元通寶)-1점, 지도원보(至道元寶) -2점, 함평원보(咸平元寶)-1점, 상부통보(祥府通寶)-1점, 천성원보(天聖元寶)-1점, 희녕원보(熙寧元寶) 1점, 원풍통보(元豊通寶) 3점, 원우통보(元祐通寶) 1점, 소성원보(紹聖元寶) 1점, @금나라 엽전 : 정륭통보(正隆通寶) 1점 대부분의 부장품은 도굴 되었다. 즉 발굴 당시 내부의 광 속이 다 드러나 있었다. 6. 광(움)의 크기 : 길이-250cm, 너비-105cm, 깊이-67cm, 동서로 긴 네모꼴. 7. 묘표석이 앞단 바로 앞 서쪽으로 치우쳐 있었음. 그 앞에 혼유석, 우측에 향로석이 있었음. 묘표석 : 전체길이-68cm, 글씨 쓰기 위해 다듬은 부분 길이-45.5cm. 머리쪽 너비-14.4cm. 두께-11.3cm. 뿌리쪽으로 가면서 차차 넓어져 뿌리 바로 위쪽 너비-17.1cm, 두께 12.3cm. 글씨는 한 쪽만 쪼아 새김. 알아 보기 힘듬. 빛의 방향을 한 쪽에서만 받게 하여 사진을 찍으면 글씨를 살필 수 있음.--駕洛許侍中公 8. 묘역 첫계단 왼쪽 끝에 문인석을 세움. 우측의 것은 실전됨. 쑥돌에 사람의 얼굴만 다듬음. 길이-105cm, 얼굴길이-34cm, 얼굴 너비-27cm, 몸통두께-17cm. 9. 묘역 계단 : 첫 계단 너비-120cm, 둘째 계단 너비- 170cm. 둘째 계단 오른쪽에 오르내리기 위한 단이 더 만들어져 있음. 무덤에 제를 올리던 곳으로 보임 10. 널은 땅속에 움을 파고 나무 널을 먼저 모시고 납작한 판자돌로 바깥돌널을 짜 맞추었다. 널의 길이는 2m, 너비는 1m 조금 안되는 크기. 11. 무덤(둘레석)의 크기 : 남북방향-493cm, 동서방향-489cm, --거의 정사각형 12. 둘레석의 두께 : 54--69cm 로 다양. 13. 둘레석 높이 : 약 90cm 14. 봉분에 쌓아 올린 흙의 높이(최초 남아 있던 남쪽) : 1.2m. 중앙은 그보다 훨씬 높았을 것으로 추측. 고려시대의 무덤 규격(16자)에 따르면 전체 높이는 약 490cm로 추측. 15. 무덤 앞쪽에서 엉치뼈 1점이 나옴. 엉치뼈 오른쪽 윗부분 뒷판으로 깨진 것임. 크기, 전체 모양으로 보아 어른 남성의 것임. 그 외의 유골은 없음.
<묘소 위에서 본 전면>
<묘소 옆의 시묘유지 표석>
< 기념촬영> (좌로부터 : 좌회님, 허관구님, 용주님, 필자(항용))
<기념촬영>
발굴 당시 동국대학교 팀들이 수고를 했다고 한다. 유물들은 현재 어디에서 소장하고 있는 지 모른다 한다. 문중에서 담장, 재실, 관리사옥을 지었다. 그리고 허선생님이 살도록 했다. 허선생님은 2년 전 가을, 묘소의 참나무 낙옆을 줍다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인천 길병원에서 치료 받았다 한다.
허유전의 배위는 실전했다. 그러나 제사시에는 배위분 것 까지 메와 잔을 2개씩 놓는다 한다. 처음에는 제사 때엔 약 500-600명이 모였다 한다. 80년 전두환대통령시절 실세였던 허문도, 허삼수 등이 그 후손이라 한다.
제물은 자손들이 약 2-3일 전부터 와서 준비한다. 약 400-500만원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점심은 전엔 도시락으로 대체하였는데 최근엔 사람을 사서 직접 음식을 장만한다고 한다.
묘소 발굴 후 주변 정리, 도로포장, 안내 해설판, 도로 안내판 등은 관청에서 해 준 것이다.
실물 예장석과 표석은 별도의 장소에 비밀로 보관하고 있었다. 이것도 보여 주셨다.
<예장석 실물 사진>
<표석 실물 사진>
모든 것을 살피고 난 뒤 묘소 관련 책자 4권을 복사하기 위해 강화읍내로 와서 복사하는 도중 중식을 하고 다시 허선생님께 가서 책을 돌려 드리니 자신 내외를 강화읍의 강화병원까지 좀 데려다 달라고 하신다. 병원가는 날이라 한다. 우리는 쾌히 응락하고 함께 강화병원 앞까지 가서 내려 드리고 여러번의 작별 인사를 나누니 오후 4시가 된다. 이제 서울행이다.
최초 출발 장소인 사당역에 도착하니 오후 5시 30분이다. 빨리 온 셈이다. 오늘 참 유익한 하루였다. 머리속에는 아름답게 태어날 문영공의 묘역이 꿈속처럼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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