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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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png 1. 문숙공(휘 永暾) 소개

 자(字)는 휘곡(輝谷). 호(號)는 균헌(筠軒) 또는 구봉(龜峰)이다. 충렬공(휘 方慶)의 손이며 문영공(휘 恂)의 장자이다. 장경공(章敬公) 정해(鄭土皆)로 부터 사사(師事)하였다. 1305년(충열21) 문과에 제 3등으로 급제하여 강릉부 녹사(江陵府 錄事)가 되었다. 1321년(충숙8)에 지합주사(知陜州事)가 되었고, 1340년(충혜왕 복위1)에는 지공거(知貢擧-선비를 뽑는 主任官)가 되어 이공수(李公遂, 호-익산, 시호 문충) 등을 뽑았다.

 

 1342년(충혜왕 3) 공은 조적(曺由頁- 주1)의 난을 평정할 때 아우인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와 함께 이에 대비하는 상소를 올렸고, 성병의상찬일등공신(誠秉義翊贊一等功臣)에 추천되기도 하였다. 그 교서의 글에 이르기를 "적신 조적이 난을 꾸미고 난 후에 과인이 수도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간신 여당이 거짓말로 날조하여 사람을 모아서 국가의 난을 모의하였지만 시종하는 신하들은 시종 절의를 지켜 과인을 보좌하고 협조하였는 바 그 공은 너무도 막대하고 커서 잊을 수가 없도다. 그것으로써 그대 등을 일등공신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충혜왕이 원나라의 재상인 국노(國老)에게 붙잡히매 공이 왕의 죄를 사면해 달라는 상서를 올리려 할 때 많은 사람들의 논의는 이와 같지 않았다. 이에 공은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음을 청함이 마땅한 일이다."고 하였다. 이는 고려사와 여지승람에 보인다.

 

 충혜왕때 삼중대광첨의사사(三重大匡僉議司事)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지고 1346년(충목왕2)에 찬성사(贊成事)로 원나라에 가서 의복과 옷, 음식 등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이듬해 왕후(王煦)와 함께 귀국하여 원나라에서 왕의 실덕을 묻는 말에 '소인들의 장난이라'고 변명하니 이를 정리하라는 원나라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충목왕 때(1347년)에 좌정승 판정치도감사(左政丞 判整治都監事-주2 )를 지냈다. 이때 공은 왕후(王煦)와 함께 지방 토호들과 권세가들의 불법적인 토지탈점 등의 횡포를 없애고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하여 서호(徐浩)ㆍ전록생(田祿生) 등의 젊은 신진 개혁세력을 등용하여 과감히 개혁을 수행하려고 하였으다. 그러나 고려 내부의 부원세력 교두보인 정동행성이무소(征東行省理問所)에서 활동을 방해하므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기황후(奇皇后-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의 4촌 아우(奇三萬-주3)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으로 인해 원나라로부터는 치하를 받았으나,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의 심한 반발에 부닥쳐 구금되기도 하였다.그러나 원나라의 지지로 곧 석방되었다. 결국 공은 의도한 목표가 좌절되자 홧병을 앓다가 1348년(충목왕 4년) 7월 13일 64세로 몰하였다.

 

 경남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에는 공이 합주지사로 재직시 창건한 누각인 <함벽루>(문화재자료 59호)가 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고, 묘는 풍덕(豊德) 앙동산(仰洞山)이나 실전하여 1974년 10월 충남 천안시 병천면 백전(栢田)에 영단(設壇)을 모셨다가.

 2022년 10월 16일 충남 천안시 수신면 장산리 773-3 백전묘원으로 옮겨 원형 봉분으로 설단하였다.

 시제일은 음력 10월 6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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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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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영단(1980년 항용(제) 촬영 제공),

 

   *<주 해설>

1) 조적(曺由頁)

?∼1339(충숙왕 복위 8). 고려의 반역자.

의흥군(義興郡) 역리출신(驛吏出身)이라고 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충렬왕 때 환관들과 결탁하여 권세를 내외에 떨쳤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왕의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승진하여 우상시(右常侍)에 이르렀다.

1312년(충선왕 4)환관을 바치고자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320년(충숙왕 7) 선부전서(選部典書)가 되었다.

1323년에는 만호로서 원나라에 공물을 바친 일도 있다. 일찍이 염승익(廉承益)의 서녀(庶女)와 혼인하였는데, 장인의 외손인 정안군(定安君) 허경(許慶)과 재물을 놓고 다투다가 최안도(崔安道) 등의 직설로 왕의 미움을 사자 호군인 고자영(高子英) 등과 몰래 원나라로 도망하였다.

그뒤 채하중(蔡河中)과 더불어 ★심양왕 고(瀋陽王暠)에 아부하여 갖은 모략으로 충숙왕을 비방함으로써 원나라 조정으로 하여금 왕을 불신하도록 조장하였으며, 다시 ★심양왕의 고려왕으로의 즉위를 노려 1324년에는 원나라에 거주하는 고려인 2, 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원나라의 한림원(翰林院)과 중서성에 충숙왕을 헐뜯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1327년에 왕으로 하여금 ★심양왕에게 선위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조년(李兆年) 등의 반대로 취소되자 왕이 귀와 눈이 멀어 정사를 처리하지 못한다고 무고하였다.

1328년에 원나라의 태정제(泰定帝) 가 평장사(平章使) 매려(買驪)와 사인(舍人) 역특미실불화(亦?迷失不花)로 하여금 진상을 조사하도록 명하자 매려 등과 함께 고려에 돌아왔으나, 무고임이 드러나자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1332년(충혜왕 2)선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자 ★심양왕과 함께 귀국하여 지밀직사(知密直事)가 되고, 이듬해 찬성사를 거쳐 1338년(충숙왕 복위 7)에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에 올랐다.

이듬해 충숙왕이 죽고 충혜왕이 복위하자 ★심양왕과 함께 원나라로 가던 도중 평양에 이르러 충숙왕 비인 경화공주(慶華公主)로부터 충혜왕의 음란함을 듣고 왕의 폐위를 공언하고 개경에 돌아와 전 호군 이안(李安) 등을 순군수령(巡軍首領)으로 삼아 국인(國印)을 영안궁(永安宮)에 감춘 뒤 무리 1, 000여명을 이끌고 충혜왕을 공격하다가 오히려 패배하여 살해되었다.

 

 *심양왕 瀋陽王

 

고려시대 원(元)나라에서 고려 왕 또는 왕족에게 수여했던 봉작(封爵)의 일종. 1308년(충렬왕 34) 고려의 전왕(前王)인 충선왕을 심양왕으로 봉한 것이 시초이다. 이것은 당시 심양(瀋陽) 등지에 고려인 전쟁포로나 유민들이 거주하여 특수한 지역을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교통·군사·경제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이 지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것으로, 심양에 대한 통치권한을 어느 정도 인정하여 주었다. 이후 심왕(瀋王)으로 개칭되었는데, 충선왕의 조카인 연안군(延安君) 고(暠)가 심왕이 된 뒤부터는 실권행사가 어렵게 되어 명예적인 봉작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 견제심리에 의해 반목과 질시의 대상이 되어 심양왕의 지위를 둘러싸고 분규가 잦았으며, 고려 조정에서 소외되고 버림받은 무리들이 심양왕과 결탁, 심양왕을 왕으로 추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관계를 교묘히 이용한 원나라는 쇠약해진 국력으로도 고려에 대한 외교정책에서 주도적으로 군림했던 것이다.

 

2) 좌정승 판정치도감사(左政丞 判整治都監事)  

 

 정치도감의 長 . 整治都監은 1347년 충목왕 3년에 지방 토호족들이 과도하게 소유한 田土를 개량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했던 관청으로 이듬해 없어짐.

 

3)기삼만(奇三萬)

?∼1347(충목왕 3). 고려 후기의 권세가. 본관 행주(幸州).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기황후(奇皇后)의 족제(族弟). 고려를 지배한 원나라 황실의 권세를 등에 업고 남의 전토(田土)와 사람을 함부로 빼앗는 등 갖은 불법과 악행을 저질렀다. 그의 악행을 징치하고자 정치도감(整治都監)에서 그를 붙잡아 곤장을 쳐서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는데, 20일 만에 죽었다. 이에 그의 아내의 호소로 기삼만을 심문한 정치도감의 도감관(都監官)인 좌랑 서호(徐浩)와 교감(校勘) 전녹생(田祿生)이 대원(對元)관계의 범죄를 다룬 행성이문소(行省理問所)에 갇히고, 원나라에서는 특별히 관원을 파견하여 고려의 관계 관원을 심문하는 등 안팎이 이 일로 시끄러웠다. 정치도감의 상하 관원들은 끝까지 그들의 정당성을 굽히지 않고 관철하여 목종도 서호와 전녹생을 석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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