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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증동국여지승람 내의 기록> (2003. 4. 25. 윤만(문) 제공) ▣ 제2권 p383<풍덕군 산천(山川) ; 김영돈(金永暾)> --백마산(白馬山)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 고려에서 이 산을 우소(右蘇)로 삼았다. 고종 37년에 대장군 이세재(李世材)와 신집평(愼執平) 등을 보내 비로소 대궐을 이 산 남쪽 임해원(臨海院) 옛터에 지었다. ○ 고려 김영돈(金永暾)의 호종(扈從)시에, "비취빛 일산 푸른 바다 위에 거둥하니, 옥 퉁소 부는 소리 흰 구름 사이에 흘러가네. 여기는 티끌 한 점 날아오기 어렵구나. 수 많은 푸른 산, 비 온 뒤에 분명하네." 하였다.
▣ 제3권 p427<안동대도호부 인물 고려(高麗) ; 김영돈(金永旽)>--김영돈(金永旽) : 순(恂)의 아들이다. 충렬왕 조(忠烈王朝)에 급제하였다. 조적(曹頔)의 난리에 시종(侍從)한 공로가 있어서 훈일등(勳一等)에 기록되고 추성병의익찬공신(推誠秉義翊贊功臣)의 호를 내리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충목왕(忠穆王) 때에 이르러 좌정승(左政丞)에 임명되었다. 아들 진(縝)은 벼슬이 중대광(重大匡) 상락백(上洛伯)에 이르렀다.
2)<고려사, 고려사 절요 내 기록 내용>
(1)<고려사절요 제25권. 충혜왕> (고려사절요. 김종서 등. 1968). 임오 3년(1342), 원 지정 2년 (2003. 2. 2. 항용(제) 제공)
○ 6월에 교서를 내리기를, "적신(賊臣) 조적(曺?)이 난을 꾸민 후 과인이 원 나라의 명을 받고 원 나라의 서울에 갔을 때에, 간신의 잔당들이 근거없는 말을 꾸며 내어 국가의 변란을 음모하였으나, 시종하였던 신하들은 종시 한결같은 충절로 과인의 몸을 보좌하여 그 공이 막대하였으니, 영원히 그 공은 잊을 수 없다.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석(尹碩), 정승 채하중(蔡河中),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 김석견(金石堅), 정승 이능간(李凌幹), 이문(理問) 홍빈(洪彬),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暾)ㆍ서하군(西河君) 임자송(任子松), 찬성사(贊成事) 김인연(金仁沇), 언양군(彦陽君) 김륜(金倫),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 성산군(星山君) 이조년(李兆年), 첨의평리(僉議評理) 한종유(韓宗愈),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영후(金永煦), 좌사(左使) 이몽가(李蒙哥), 판밀직사(判密直事) 이운(李雲), 개성윤(開城尹) 윤신계(尹莘係),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엄(李儼), 동지밀직(同知密直) 윤환(尹桓)ㆍ박청(朴靑), 밀직부사(密直副使) 강윤충(康允忠)ㆍ안천길(安千吉)ㆍ노영서(盧英瑞) 등을 1등 공신으로 삼고, 영창군(永昌君) 김승택(金承澤) 등 18명을 2등 공신으로 삼고, 각각 차등에 따라 공신의 부모와 아내와 그 아들에게 작위를 주고 전답과 노비를 주라." 하였다.
(2)<고려사절요 제25권 > 충혜왕. 계미 4년(1343), 원 지정 3년 (2003. 2. 2. 항용(제) 제공)
○ 12월에 언양군(彦陽君) 김륜(金倫)은 집에 있다가 왕이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창졸간에 달려갔으나 보지 못하였다. 곧 조정에 진정하자고 채하중에게 말하여, 재상과 국가의 원로들을 민천사(旻天寺)에 모으고 글을 올려 왕의 죄를 용서하여 주기를 청할 것을 의논하니, 예천군(醴泉君) 권한공(權漢功)이 말하기를, "옛날 은 나라의 태갑(太甲)이 덕(德)을 밝히지 못하여, 이윤(伊尹)이 3년 동안 동(桐 땅이름)에 추방하였다가, 뒤에 마음을 바로잡고 행실을 고치므로 왕의 자리에 복위시켰다. 또한 어떤 나라가 교통의 요충이 되는 땅에 끼어 있었는데, 조회하러 들어오는 제후와 천자의 사신을 죽이니, 천자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죽였고, 또 어떤 나라의 신하가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돌아와 보니 천자의 사신이 와서 그 왕의 머리를 베어 가므로, 그 신하가 시체놓인 곳에 나아가 제사를 차리고 곡을 하였더니, 역시 영을 내려 그를 죽였었다. 이제 왕이 무도하여 천자가 주벌(誅罰)한 것인데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전 정승(政丞) 강장(康莊)은, "황제의 뜻을 측량할 수 없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이를 어찌할 것인가." 하고, 전 정승 이능간(李凌幹)은, "이제 천자가 왕의 무도함을 듣고서 죄를 준 것인데, 만일 글을 올려서 논하여 아뢴다면 이것은 천자의 명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니 될 수 있는가." 하였다. 상락군(上洛君) ★김영돈(金永暾)은 말하기를, "왕이 욕을 당하였을 때, 신하가 죽음으로써 그것을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김륜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신하는 왕에 대해서, 자식은 아버지에 대해서,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마땅히 그 은정과 의리를 다할 뿐이다. 그 아버지가 벌을 받는데, 그 자식된 자가 차마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황제의 뜻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모든 재상들이 아무 말이 없었다. 김륜은 또 말하기를, "이제 행성(行省)에 글을 올리어, 비록 허락을 얻지 못할지라도, 왕을 구원하다가 죄를 얻는다는 일은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하였더니,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해서 드디어 상서할 것을 결의하고,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에게 그 글을 초하도록 하였다
(3)<고려사> 계미년 충혜왕 후 4년(원 순제 지정 3, 1343) 12월 (2003. 7. 19. 태서(익) 제공)
재상김륜(金倫) 등이 의논하고 왕을 위해 원(元)에 글을 올려 호소하려다가 못 이루었다. 언양군(彦陽君)김륜(金倫)은 집에 있다가, 왕이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미처 문안하지 못한 것을 통분히 여겨 대궐로 용보를 찾아가 보았으나, 의리(義理)로써 그를 감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물러나와 재상 및 국로(國老)들과 더불어 민천사(旻天寺)에 모여서, 글을 올려 왕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청할 것을 의논하였다. 예천군(醴川君) 권한공(權漢功)이 말하기를,
“이제 왕이 무도하여 천자가 주벌(誅罰)한 것인데,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는가?” 하고, 전 정승(政丞)강장(康莊)은 말하기를, “황제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가?” 하고, 이능간(李凌幹)은 말하기를, “이제 천자가 왕의 무도함을 듣고 이를 죄주는 것인데, 만약 글을 올려 논주(論奏)한다면, 이것은 천자의 명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니 될 뻔이나 하겠는가?” 하였다. 상락군(上洛君) 김영돈(金永旽)이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게 되면 신하는 죽음으로써 이를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윤(倫)이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신하는 임금에게, 자식은 아비에게, 아내는 지아비에게 마땅히 그 은정(恩情)과 의리를 다해야 할 따름이다. 그 아비가 죄를 입었는데 자식 된 자가 어찌 차마 구하지 아니하겠는가? ‘황제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다.’ 한 말은 무슨 말인가?” 하니, 여러 재상들이 모두 말없이 잠잠하였다. 윤은 또다시, “이제 행성(行省)에 글을 올려서 비록 허락을 받지 못할지라도, 왕을 구하려다 죄를 입는 일은 내 반드시 없을 것으로 안다.” 하니,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여겨, 마침내 글을 올리기로 결의하고 김해군(金海君) 이제현(李齊賢)에게 초(草)하게 하였으나 국로들의 대다수가 서명하지 않아 필경 이루어지지 못하니, 윤이 종신토록 울분함을 말씨와 얼굴빛에 나타내었다. 영돈(永旽)은 영후(永煦)의 형이다.
(4)<고려사> 갑신년 충혜왕 후 5년(원 순제 지정 4, 1344) 2월 (2003. 7. 19. 태서(익) 제공)
신예(辛裔)ㆍ노영서(盧英瑞)가 자화(紫靴)를 신고 종모(?帽)를 쓴 채 대궐 문 안에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있으면서 김영돈(金永旽)을 보고도 예를 하지 않았다. 영돈이 이들을 앞에 불러 놓고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주상께서 왕위를 계승하시고 동쪽으로 돌아오시어 삼한(三韓)을 다시 바로잡으신다기에 기쁨에 넘쳐 춤추며 나아와 축하하고자 하는데, 공(公)들은 어찌하여 전대(前代)의 불량배들이 걸치던 사치스런 관복(冠服)을 아직도 고치지 않았는가? 이것이 어찌 풍속을 개혁하는 도리라 하겠는가?”
하니, 예(裔) 등이 부끄러워하며 물러갔다.
(5)<고려사절요 제25권 > 충혜왕. 갑신 5년(1344), 원 지정 4년 (2003. 2. 2. 항용(제) 제공)
○상락군(上洛君) 김영돈(金永暾)이 대궐 뜰에 나아갔는데, 신예(辛裔)ㆍ노영서(盧英瑞)가 붉은 신[紫靴]을 신고 종모(?帽)를 쓴 채로 대궐문 안에서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거만한 태도로 예를 갖추지 않았다. 김영돈이 이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말하기를, "내가, 주상께서 왕위를 계승하시와 동쪽으로 돌아오시어 삼한을 다시 바로잡게 되셨다는 말을 듣고, 기쁨을 참지 못하여 대궐로 나와 전하를 뵈옵고자 하는데, 공들은 어찌하여 전대의 불량배들이 걸치던 사치스러운 관복을 아직도 바꾸지 않고 있는가. 이것이 어찌 풍기를 개혁하는 도리인가." 하니, 노영서 등이 부끄러워서 물러갔다.
(6)<고려사절요 제25권 > 충목왕 忠穆王 병술 2년(1346년), 원 지정 6년 (2003. 2. 2. 항용(제) 제공)
○ 9월에 찬성사 ★김영돈(金永旽)을 원 나라에 보내어, 왕이 친히 입조하여 신정을 하례하러 갈 것을 청하고, 아울러 의복과 술을 준 데 대하여 사례하였다.
(7)<고려사> 정해년 충목왕 3년(원 순제 지정 7, 1347) 2월 (2003. 7. 19. 태서(익) 제공)
○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고, 왕후(王煦)ㆍ김영돈(金永旽) 등을 판사(判事)로 삼았다. 후(煦)와 좌정승(左政丞) 김영돈(金永旽)이 원으로부터 돌아와 왕에게 아뢰기를,
“황제께서 선왕(先王 충혜왕)의 실덕(失德)을 하문하시기에, 신등은 아뢰기를 ‘선왕이 처음에는 그러하지 않았으나, 소인배들이 그릇 인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리가 아직도 있사오니, 내쳐 버리지 않다가는 또 금상(今上)을 그르칠 것입니다.’ 하였더니, 황제께서 그러하리라 하시고 신등에게 칙유(勅諭)하기를 ‘네가 돌아가서 이를 다스려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대비(大妃)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을 내려 위로하고 사례하였다. 영돈(永旽)이 원주(元主)의 밀지(密旨)를 전하고 아뢰기를,
“왕후(王煦)를 다시 정승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그때 우정승 노책(盧?)이 곁에 있다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물러가서 병들었다 칭탁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고, 후(煦)ㆍ영돈(永旽)ㆍ안축(安軸)ㆍ김광철(金光轍)을 판사(判事)로, 정인(鄭?) 등 33인을 속관(屬官)으로 삼아서 제도(諸道)에 사자를 나누어 보내어 전지(田地)를 측량하고 폐정(弊政)을 정리하게 하니 이에 뭇 소인배들이 불평하였다. 그때 최재(崔宰)가 판관(判官)으로 있다가 탄식하기를, “전왕의 실덕(失德)은 왕이 스스로 한 일이 아니요, 바로 좌우 신하들이 만든 것이었다. 전후 좌우에서 왕의 실덕을 조장하였으니, 내가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하고서,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았다.
(8)<고려사절요 제25권 > 충목왕 忠穆王 정해 3년(1347), 원 지정 7년 (2003. 2. 2. 항용(제) 제공)
○ 2월에 전 정승왕후와 좌정승 ★김영돈(金永旽)이 원 나라에서 돌아와 왕에게 고하기를, "황제께서 선왕의 실덕(失德)에 대하여 물으시어, 신들이 아뢰기를, '선왕께서 처음에는 그와 같지 않았는데 다만 소인들이 그렇게 인도하였을 뿐입니다. 그 무리들이 아직도 물러가지 않고 있으니 역시 지금의 왕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하였더니, 황제께서 그렇게 여기시어 신들에게 칙명을 내리시기를, '너희들은 가서 그들을 정리하라' 하셨습니다." 하니, 대비(大妃)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술을 주어 그들을 위로하고 황은(皇恩)에 사례하였다. 김영돈(金永旽)이 황제의 밀지(密旨)를 전하고 아뢰기를, "다시 왕후(王煦)를 정승으로 삼으시옵소서." 하였는데, 이때 우정승 노책이 옆에 있다가 부끄러워 얼?을 붉히고 물러난 뒤 병이라 칭탁하고 나오지 아니하였다. ○ 태묘에 도둑이 들었다. ○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고, 왕후ㆍ★김영돈 및 안축(安軸)ㆍ김광철(金光轍)을 그 판사(判事)에 임명하고, 속관(屬官)을 파견하여 여러 도(道)의 토지를 측량하게 하였다. ○ 원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후와 ★김영돈에게 의복ㆍ술ㆍ초(?)를 주고 정치(整治)하는 사무를 격려하였다.
○ 3월에 정승 노책을 원 나라에 보내어 성절(聖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 정치도감에서 기황후(奇皇后)의 집안 동생인 기삼만(奇三萬)이 세력을 믿고 남의 토지를 빼앗고 불법을 자행하므로 그를 곤장(棍杖) 때려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었더니 20일이 넘은 후에 죽었다. ○ 전에 이천현(利川縣)의 아전이 공전(公田)을 정승 채하중(蔡河中)과 이문(理問) 윤계종(尹繼宗)에게 뇌물로 바쳤다. 그런데 이때에 안렴(按廉) 김두(金?)가 이르러 아전의 귀를 잘라 장차 도내에 조리돌리려고 이를 도감(都監)에 통첩하여 보고하였더니, 녹사 안길상(安吉祥)이 계종의 옛 은혜를 생각하고 위에 보고하지 않았다. 왕후와 ★김영돈이 노하여 그의 뺨을 때리고 죄상을 써 붙인 북을 울리어 그를 내쫓았다.
○ 행성 이문소(行省理問所)에서 정치도감의 관원인 좌랑 서호(徐浩)와 교감(校勘) 전녹생(田祿生)을 가두었다. 일찍이 전 충주판관(忠州判官) 최순보(崔純寶)가 기삼만(奇三萬)의 사건을 고소하고, 삼만이 죽은 뒤에 그 아내가 행성에 호소하니, 행성에서 왕에게 아뢰어 서호와 녹생을 옥에 가둔 것이다. ★김영돈(金永旽)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정치관(整治官)을 가두셨습니까." 하니, 왕이 이르기를, "삼만은 남의 전지 5결(結)을 빼앗은 것뿐인데, 어째서 죽이기까지 하였는가." 하니, 영돈이, "삼만은 세력을 믿고 악한 짓을 자행하였습니다. 어찌 남의 토지 5결을 빼앗은 것뿐이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이문 하유원(河有源)을 불러 대변(對辨)하게 하니, 영돈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친히 황제의 명을 받들어 먼저 거물급의 악질을 다스리는 것인데 서호와 녹생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하고는 스스로 행성의 옥(獄)에 구속되니, 왕이 명하여 그를 내보내 주었다.
○ 5월에 왕후와 ★김영돈이 첨의부(僉議府)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 "우리들은 황제의 명을 직접 받들어 나라를 정치(整治)하는데, 이제 행성의 이문소에서는 기삼만의 죽음을 가지고 그 허물을 정치도감에 돌리어 서호와 전녹생을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이문(理問) 하유원(河有源)은 사사 감정을 품고 거짓으로 꾸며 신문하여 꼭 허위자백을 받으려 하니, 지금부터는 정치(整治)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이 뜻을 중서성에 전달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 6월에 조득구(趙得球)를 탐라(耽羅)에 유배하였다. 일찍이 왕후(王煦)가 원 나라에 입조할 때 득구가 수행하였는데, 왕후가 득구에게 정치(整治)할 일을 의논하였다. 득구가 말하기를, "찬성사 강윤충(康允忠)은 어린 왕의 측근에 있으면서 왕을 나쁜 길로 인도하려 하니, 만일 정치하려 한다면 먼저 그를 제거해야 된다." 하였었는데, 윤충이 그 말을 듣고 한을 품고 있다가 이때에 왕후와 ★영돈이 기삼만의 죽음 때문에 정치할 수 없게 되자 원 나라에 가서 황제에게 아뢰고자 하는데, 윤충은 득구가 왕후를 따라가서 자기를 제거하려고 도모할까 두려워서 왕을 달래어 그를 유배하게 하였다. ○ 참리(參理) 안자유(安子由)를 원 나라에 보내어 모시를 바쳤다. ○ 왕후와 ★김영돈이 원 나라에 가니, 이문소에서는 거듭 사람을 보내어 쫓아가 왕후와 ★영돈을 잡아가지고 와서 정치도감(整治都監)의 관원과 함께 잡아 가두고는 기삼만을 죽인 까닭을 물었다. 마침 이때 황제가 중서성 우사도사(中書省右司都事) 올리불화(兀理不花) 등을 보내어 의복과 술을 왕과 왕후와 영돈에게 주고 정치(整治)한 일로 포상하였는데, 왕후와 ★영돈은 동선역(洞仙驛)에 이르러 올리불화를 만나고 곧 돌아왔다. 불화(不花)가 황제의 명으로 정치가 얼마나 이루어졌는가를 물으니, 이문소에서는 이를 듣고 가두었던 관원들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서호(徐浩)가 허위 자백하여, 다시 정치관(整治官) 오경(吳璟)ㆍ진영서(陳永緖)ㆍ안극인(安克仁)ㆍ이원구(李元具)ㆍ전성안(全成安)을 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석방하였다.
. ○ 원 나라에서 기삼만이 죽은 일 때문에 직성사인(直省舍人) 승가노(僧家奴)를 보내어 정치관(整治官) 백문보(白文寶)ㆍ신군?(申君平)ㆍ전성안(全成安)ㆍ하즙(河楫)ㆍ남궁민(南宮敏)ㆍ조신옥(趙臣玉)ㆍ김달상(金達祥)ㆍ노중부(盧仲孚)ㆍ이천백(李天伯)ㆍ허식(許湜)ㆍ이승윤(李承閏)ㆍ안극인(安克仁)ㆍ정광도(鄭光度)ㆍ오경(吳暻)ㆍ서호(徐浩)ㆍ전녹생(全祿生)을 곤장때렸다. 안축(安軸)과 왕후(王煦)만은 황제의 명으로 용서하였으며, 전 밀직 김광철(金光轍)과 전 대호군 이원구(李元具)는 병중이었으므로 곤장 맞는 것을 면하였다. 황제는 또 친서를 내려 정치도감을 다시 두게 하고 왕후로 하여금 판사(判事)가 되게 하였다. 이때 ★김영돈(金永旽)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고, 왕후는 그와 함께 따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므로, 황제가 이를 힐문하고 왕후에게 위임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 행성낭중(行省郞中) 이수산(李壽山)을 원 나라에 보내어 동녀를 바쳤다.
(9)<고려사 절요 제25권> 忠穆王. 무자 4년(1348), 원 지정 8년. ---충목왕이 문숙공(김영돈) 댁에서 훙한 기록 내용 ( 2003. 2. 2. 항용(제) 제공) ○가을 7월 임신일에 천변이 있으므로 사면령을 내렸다. ○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旽)이 졸하였다. ○ 12월에 첨의평리(僉議評理) 손홍량(孫洪亮)과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인호(金仁浩)를 원 나라에 보내어 신정을 하례하였다. ○ 정묘일에 왕이 ★김영돈(金永旽)의 집에서 훙(薨)하였다. 이때 신예(辛裔)ㆍ전숙몽(田淑蒙) 등이 서로 이어 나라일을 전단(專斷)하였으므로 북전(北殿)의 불량배들은 비록 제거되었으나 몇 달이 안 되어 그들의 옛 친척과 친구들이 경상(卿相)의 자리에 배치되었다. 대언(代言) 정사도(鄭思度)가 아첨으로 등용되어 오래도록 정방(政房)에 있으니, 중외의 사람들이 모두 그리로 몰려들었다. 이때 사람들이 신예를 지목하여 신왕(辛王)이라 하였다. 또한 모비(母妃)는 젊은 나이로 그 사이에 있어, 강윤충(康允忠)과 배전(裵佺)이 드나들면서 총애를 받아 정권을 잡고 상벌을 마음대로 행하였으므로, 왕후(王煦)와 ★김영돈이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옛 폐정을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윤충 등의 모함에 빠져버리니 식자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 덕녕공주가 덕성부원군(德成府院君) 기철(奇轍)과 정승 왕후에게 명하여 정동성의 일을 대행하게 하였다. ○ 호군 신원보(申元甫)를 원에 보내어 국상(國喪)을 고하였다.
(10)<고려사>무자년 충목왕 4년 (원 순제 지정 8, 1348). (2003. 6. 3. 태서(익) 제공)
추7월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영돈(金永旽)이 졸하였다. 영돈은 동생 영후(永煦)와 함께 재상의 지위에 올라 당세에 유명하였다
12월 왕이 김영돈의 집에서 훙(薨)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병이 나서 김영돈의 집으로 이어(移御)했었는데, 5일(정묘)에 훙하니 재위가 5년이고 수(壽)가 12였다. 왕의 천성은 총민(聰敏)하였으나 즉위한 처음부터 모후(母后 덕녕공주(德寧公主))가 권세를 부리고, 강윤충(康允忠)ㆍ배전(裵佺)ㆍ신예(辛裔) 등이 서로 이어가면서 정권을 잡았으므로 왕후ㆍ김영돈 등이 오래된 폐단을 정리하려고 하였으나 마침내는 윤충과 예의 모함에 빠지게 되니, 식자(識者)들이 애석해 하였다. 뒤에 원에서 충목(忠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씨(李氏) 이색(李穡) 는 이렇게 적었다. 근세의 태평 시대를 말하는 사람들은 많이들 명릉(明陵 충목왕을 말한다)을 일컫는데 ‘대개 5년 간 조야(朝野)가 깨끗하고 조용하여 사류(士類)는 즐거워하였고 백성은 의지할 수 있어 이른바 조금 안정이 되었었다.’ 하였으니 역시 지나친 말은 아니다.
(11) <고려사> (2003. 8. 27. 태서(익) 제공) 6월 찬성사 정해(鄭?)가 졸하였다. 해(?)는 의(?)의 손자로 처음에는 필도치(必?赤)가 되어 이혼(李混)ㆍ윤보(尹珤)와 이름을 나란히 드날렸다. 뒤에 전주(銓注)를 맡아서는 법을 지키고 공정하여, 비록 왕의 총애를 받고 권세를 부리는 자가 왕의 뜻이라 하여 청탁하여도 듣지 않았다. 이해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는데 장자빈(張子贇)ㆍ한종유(韓宗愈)ㆍ김영돈(金永旽)은 모두 그가 뽑은 사람들이다. 학사연(學士宴)에서 왕이 글씨 족자를 내렸는데, 해가 기뻐서 펴보니, 그 한 연구에, 모든 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몸은 문득 죽네 / 萬事不成身便死 하였다. 해는 얼굴빛이 변하고 좌객은 소스라쳐 놀랐는데, 얼마 안 있다가 졸하였다. 시호는 장경(章敬)이다
(12) 연복사종(演福寺鐘)에 새겨 있는 문숙공 이름 소개 (2005. 6. 6. 태서(익) 제공) 개성 연복사(演福寺) 종 표면에 새겨져 있는 명문(銘文). 종의 주조배경을 이야기하고 있다. 1346년(충목왕 2년)에 고려출신으로 원나라 고관이었던 강금강(姜金剛)과 신예(辛裔) 등이 원나라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장인들을 이끌고 금강산에 종을 주조하러 왔을 때 고려측에서도 황실의 안녕을 축원한다는 명분으로 원나라 장인들을 시켜 연복사의 종을 새로 만들었다. 명문은 이곡(李穀: 1298~1351)이 작성하였으며, 명문 뒤에는 종의 주조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명단에는 고려의 국왕과 모후(母后)를 비롯하여 정동행성과 고려의 주요 관원들이 망라되어 있고, 작업을 실제 담당한 원나라 장인들의 이름도 적혀 있다. 이 연복사종은 현재 북한의 보물급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시대 고려 연대 1346년(충목왕2년) 유형/재질 금구명·종명 / 청동 문화재지정 기타문화재 - 국외 크기 높이 320cm, 입지름 203cm, 글자크기 1.8cm 출토지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남본 남대문 소재지 (북한)-황해북도 개성시 북안동(北安洞) 남대문(南大門) 누각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이곡(李穀) / 성사달(成師達) / 미상
대원 지정(至正 : 원나라 順帝의 연호, 1341~1367년까지 사용) 6년(1346, 忠穆王 2) 봄 자정원사(資正院使) 강공(姜公) 금강(金剛)과 좌장고부사(左藏庫副使) 신후(辛侯) 예(裔) 등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금과 비단을 가지고 와서 금강산에 종을 주조하니 그 때 금강산 주변의 여러 군현의 굶주린 백성들이 다투어 그 작업에 참여하여 곡식을 얻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종이 완성되어 강공이 중국으로 돌아가려 하니 국왕과 공주께서 신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금강산은 우리나라에 있는데 지금 신성하신 천자께서 근신을 보내시어 불사(佛事)를 베풀어 무궁한 복을 베푸신 것이 이와 같은데 우리들은 조금도 보탬이 되지 못하였다. 무엇으로서 천자의 은혜에 보답할 것인가”라고 하니 모두 “연복사(演福寺)의 큰 종이 오래되고 부서져서 쓸 수 없습니다. 지금 대장장이들이 온 것을 인연으로 하여 다시 주조한다면 또한 천자의 뜻을 본받으면서 영원한 공덕을 쌓는 것이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강공에게 이야기하니 강공이 기쁘게 허락하여 행차를 멈추고 (연복사 종을) 만들게 하였고 왕께서는 신(臣) 곡(穀)에게 명령하여 그 명(銘)을 짓게 하셨습니다. 명(銘)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두 함께 종소리를 듣고서 삼군을 정렬하고 악기들 [팔음(八音)]을 고른다. 석가노인의 가르침은 매우 깊은데 땅 밑의 지옥은 어찌 이리 어두운가. 만 번 태어나 만 번 죽으며 고난을 당한다. 취한 듯 꿈꾼 듯 귀멀고 어둡다가 한번 종소리 들으니 다함께 마음이 깨어난다. 왕성 연복사 큰 총림에 새 종소리 한번 울리니 남염부주(南閻部洲)를 뒤흔든다. 위로는 하늘을 뚫고 아래로는 깊은 명계까지 모두 깨끗한 복에 의지하여 오묘하게 장엄되도다. 동한(東韓: 우리나라를 가리킴)의 임금과 신하가 거듭하여 중화를 축원하니 천자는 만년토록 장수하며 많은 아들을 낳으시고, 끝없는 복이 온 나라에 함께 하소서. 신(臣)에게 명하여 명(銘)을 짓고 새기라 하셨네. 병술년(1346, 충목왕 2) 6월 기망(旣望: 16일)에 봉훈대부 중서사전부 광정대부 정당문학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奉訓大夫 中瑞司典簿 匡靖大夫 政堂文學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인 신(臣) 이곡(李穀)이 지음. 고려국왕 왕흔(王昕: 충목왕) 덕령공주(德寧公主: 충목왕의 모후(母后)) 역련진반(亦憐眞班) 자선대부 자정원사(資善大夫 資正院使) 강금강(姜金剛) 장사랑 좌장고부사(將仕郞 左藏庫副使) 신예(辛裔) 정동행중서성 좌우사ꟅꟅꟅ(征東行中書省 左右司ꟅꟅꟅ) 낭중(郞中) 홍탁(洪鐸) 낭중(郞中) 이수산(李壽山) 원외랑(員外郎) 석말완탁(石抹完澤) 원외랑 강윤충(康允忠) 도사(都事) 신인적(申仁適) 도사 악우장(岳友章) 이문소관(理問所官) 상부관(相副官) 하유원(河有源) 도진무사(都鎭撫司) 부도진문사(副都鎭撫司)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정승(政丞) 노책(盧Ʂ) 찬성사(贊成事) 김영돈(金永旽) 찬성사 강윤(康允) 찬성사 안축(安軸) 찬성사 이군후(李君侯) 평리(評理) 정을보(鄭乙輔) 평리 ꟅꟅ 政ꟅꟅꟅꟅꟅꟅꟅ 삼사(三司)ꟅꟅꟅꟅꟅꟅ ꟅꟅꟅꟅꟅꟅꟅꟅꟅꟅꟅꟅ ꟅꟅꟅꟅꟅꟅꟅꟅꟅꟅꟅꟅ ꟅꟅ ꟅꟅꟅꟅꟅꟅꟅꟅ司事 최천Ʂ(崔天Ʂ) ꟅꟅꟅꟅꟅꟅ김윤장(金允莊) 부사(副使) 신좌(辛佐) ꟅꟅꟅꟅꟅ 지신사(知申事) 곽연(郭延Ʂ) 우대언(右ꟅꟅ) 左Ʂ諝 좌대언(左代言) 정사(鄭思Ʂ) 우부대언(右副代言) 김용겸(金用謙) 좌부대언(左副代言) 이정길(李筳吉) 예문검열(藝文檢閱) 성사달(成師達) 씀. 함께 발원한 사람들[同願]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김영후(金永煦)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 인승단(印承旦) 함안부원군(咸安府院君) 박충좌(朴冲佐) 태부감승(大府監丞) 이복수(李福壽) 김해부원군(金海府院君) 이제현(李齊賢) 만호 보안군(萬戶 保安君) 이숙(林淑) 전이문(前理問) 윤계종(尹繼宗) 전찬성사(前贊成事) 윤환(尹桓) 직성군(直城君) 노영서(盧英瑞) 흥해군(興海君) 배전(裴全) 대호군(大護軍) 홍계(洪繼) 문대룡(文大龍) 보안택주(保安宅主) 박씨(朴氏) 영주군부인(榮州郡夫人) 우씨(禹氏) 검교판도판서(檢校版圖判書) 달마실리(達摩室利) 도련불화(都憐不花) 색인불화(賽因不花) 호군(護軍) 황순(黃順) 박윤주(朴允柱) 강석(姜碩) 산원(散員) 노승간(盧承幹) 호군(護軍) 주영보(周永保)
정동성위원(征東省委員)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강윤충(康允忠) 연사(掾史) 장군신(張君信)
제조관(提調官) 만호(萬戶) 권겸(權謙) 판밀직사(判密直事) 이능(李能)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인승서(印承叙) 밀직부사(密直副使) 김광재(金光載)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 ꟅꟅ
감조관(監造官) 상호군(上護軍) 임만년(林萬年) 배천경(裴天慶) 호군(護軍) 배수(裴守) 전성안(全成安) 이현(李賢) 내부부령(內府副令) 하즙(河楫) 사복부정(司僕副正) 이승목(李承牧) 중랑장(中郞將) 김용진(金用珎) 박세진(朴世珎) 평양판관(平壤判官) 최록수(崔祿壽) 유비창사(有備倉使) 정인로(鄭仁老) 낭장(郞將) 정순(鄭珣) 신승무(辛承茂) 지후(祗侯) 박인점(朴仁漸)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 박윤유(朴允瑜) 국유(鞠儒) 중군녹사(中軍錄事) 김계언(金季彦) 허원의(許元義) 조성도감(造成都監) 녹사(錄事) 고충익(高冲翊) 영사(令史) 유득량(兪得良) 이휘경(李暉景) 박홍(朴洪) 서의(徐義) 노천선(盧千善) 김인Ʂ(金仁Ʂ) 최양검(崔良儉) 박천절(朴千節) 최천계(崔天啓) 이원계(李元桂) 강절행중서성 부양현(江淅行中書省 富陽縣) 적송장수(赤松匠手) 제령(提領) 하귀덕(何德貴), 제령 하방달(何邦達), 제령 조명원(趙明遠) 등 1천 인. 상고파두(上高把頭) 우덕(牛德) 장옥(張玉) 사령(使令) 都Ʂ尉金平印之兪景ꟅꟅ正ꟅꟅ白Ʂ咸松 윤원세(尹元世) 박가Ʂ(朴加Ʂ) Ʂ맹룡(Ʂ孟龍) 김화상(金和尙) 어역(譯語) 도득명(陶得明)
(13)<연복사종명(高麗國金剛山石鍾銘)>_탁본자료 (2007. 3. 13. 윤식(문) 제공)
출전 : 국립중앙도서관 사이트. 제목이 <연복사종명>이 아니라 <고려국금강산석종명(高麗國金剛山石鍾銘)>으로 돼 있음
고려국왕 왕흔(王昕: 충목왕) 덕령공주(德寧公主: 충목왕의 모후(母后)) 역련진반(亦憐眞班) 자선대부 자정원사(資善大夫 資正院使) 강금강(姜金剛) 장사랑 좌장고부사(將仕郞 左藏庫副使) 신예(辛裔) 정동행중서성 좌우사□□□(征東行中書省 左右司□□□) 낭중(郞中) 홍탁(洪鐸) 낭중(郞中) 이수산(李壽山) 원외랑(員外郎) 석말완탁(石抹完澤) 원외랑 강윤충(康允忠) 도사(都事) 신인적(申仁適) 도사 악우장(岳友章) 이문소관(理問所官) 상부관(相副官) 하유원(河有源) 도진무사(都鎭撫司) 부도진문사(副都鎭撫司)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정승(政丞) 노책(盧□) ★찬성사(贊成事) 김영돈(金永旽) 찬성사 강윤(康允) 찬성사 안축(安軸) 찬성사 이군후(李君侯) 평리(評理) 정을보(鄭乙輔) 평리 □□ 政□□□□□□□ 삼사(三司)□□□□□□ □□□□□□□□□□□□ □□□□□□□□□□□□ □□ □□□□□□□□司事 최천□(崔天□) □□□□□□김윤장(金允莊) 부사(副使) 신좌(辛佐) □□□□□ 지신사(知申事) 곽연□(郭延□) 우대언(右□□) 左□諝 좌대언(左代言) 정사□(鄭思□) 우부대언(右副代言) 김용겸(金用謙) 좌부대언(左副代言) 이정길(李筳吉) 예문검열(藝文檢閱) 성사달(成師達) 씀.
함께 발원한 사람들[同願]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준(權準)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김영후(金永煦)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 인승단(印承旦) 함안부원군(咸安府院君) 박충좌(朴冲佐) 태부감승(大府監丞) 이복수(李福壽) 김해부원군(金海府院君) 이제현(李齊賢) 만호 보안군(萬戶 保安君) 이숙(林淑) 전이문(前理問) 윤계종(尹繼宗) 전찬성사(前贊成事) 윤환(尹桓) 직성군(直城君) 노영서(盧英瑞) 흥해군(興海君) 배전(裴全) 대호군(大護軍) 홍계(洪繼) 문대룡(文大龍) 보안택주(保安宅主) 박씨(朴氏) 영주군부인(榮州郡夫人) 우씨(禹氏) 검교판도판서(檢校版圖判書) 달마실리(達摩室利) 도련불화(都憐不花) 색인불화(賽因不花) 호군(護軍) 황순(黃順) 박윤주(朴允柱) 강석(姜碩) 산원(散員) 노승간(盧承幹) 호군(護軍) 주영보(周永保)
정동성위원(征東省委員)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강윤충(康允忠) 연사(掾史) 장군신(張君信)
제조관(提調官)
만호(萬戶) 권겸(權謙) 판밀직사(判密直事) 이능(李能)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 인승서(印承叙) 밀직부사(密直副使) 김광재(金光載)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 □□
감조관(監造官)
상호군(上護軍) 임만년(林萬年) 배천경(裴天慶) 호군(護軍) 배수(裴守) 전성안(全成安) 이현(李賢) 내부부령(內府副令) 하즙(河楫) 사복부정(司僕副正) 이승목(李承牧) 중랑장(中郞將) 김용진(金用珎) 박세진(朴世珎) 평양판관(平壤判官) 최록수(崔祿壽) 유비창사(有備倉使) 정인로(鄭仁老) 낭장(郞將) 정순(鄭珣) 신승무(辛承茂) 지후(祗侯) 박인점(朴仁漸)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 박윤유(朴允瑜) 국유(鞠儒) 중군녹사(中軍錄事) 김계언(金季彦) 허원의(許元義)
조성도감(造成都監)
녹사(錄事) 고충익(高冲翊) 영사(令史) 유득량(兪得良) 이휘경(李暉景) 박홍(朴洪) 서의(徐義) 노천선(盧千善) 김인□(金仁□) 최양검(崔良儉) 박천절(朴千節) 최천계(崔天啓) 이원계(李元桂) 강절행중서성 부양현(江淅行中書省 富陽縣) 적송장수(赤松匠手) 제령(提領) 하귀덕(何德貴), 제령 하방달(何邦達), 제령 조명원(趙明遠) 등 1천 인. 상고파두(上高把頭) 우덕(牛德) 장옥(張玉) 사령(使令) 都□尉金平印之兪景□□正□□白□咸松 윤원세(尹元世) 박가□(朴加□) □맹룡(□孟龍) 김화상(金和尙) 어역(譯語) 도득명(陶得明)
<확대부분>
★찬성사(贊成事) 김영돈(金永旽) - 5쪽 끝과 6쪽 첫줄 아래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 김영후(金永煦) - 16쪽
(14) <개성 남대문의 연복사종 관련 자료 및 사진> (2005. 6. 12. 주회(안) 제공) 출전 : 개성포럼(http://www.kifez.com/) 개성 남대문(南大門)
판문점에서 개성시내로 가면 앞에 평양 가는 고속도로 입구가 보인다. 여기에서 우회전하여 통일거리로 직진하면 양 옆으로 15~20층의 고층 아파트가 도열해 있다. 그 앞에 로타리 가운데 개성의 관문인 남대문이 자남산 아래로 보인다. 남대문은 개성성중 내성의 정남으로 1391~1393년에 건설되었으며, 6.25 전쟁시 파괴된 것을 1945년복구하였고 국보급문화재 제 34호로 지정하였다.
남대문은 고려시대의 건축술을 이어받아 장식이 소박하면서도 짜임새가 있어 한국의 문루건축 중 뛰어난 작품이다. 아치식의 무지개문(높이 3.55m)과 축대 위의 단층문루로 저면 3간(길이 1.36m) 축면 2간(길이 7.96m)의 합각지붕에 3포집이 있다.
남대문 안에는 유명한 연복사(演福寺)종이 있는데, 이 종은 1346년에 제작되어 금강산의 연복사에 매달려 있다가 1563년 절이 불타자 이곳에 옮겨 20세기 초까지 타종되어 개성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던 유서 깊은 종이다. 연복사종은 청동제로 높이3.3m, 아구리 직경 1.9m, 두께 23㎝에 무게 14톤의 거대한 종으로 한국 5대명종의 하나로 꼽힌다. 종의 몸체에는 불상을 비롯해 특이하게도 용, 거북,봉황,사슴,게, 물고기 ,물결무늬들이 새겨져 있다.연복사종은 그 소리가 맑고 우렁차 한번 치면 10리 밖에서도 들린다고 한다.
(15) 김영돈선조님의 개혁정치 (2007. 3. 28. 영환(문) 제공)
출전 : <역사에게 길을 묻다> -이덕일 저. (주)이학사 간. 2002
1장 잘못된 교과서로 배운 역사 1.우리 국사교과서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2.국사교과서는 단종과 세조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가? 2장 역사드라마가 그리는 역사의 실제 역사 1.역사 드라마 열풍에 대해 생각한다.] 2.역사 드라마가 갖추어야할 두가지 필수 요건 3장 우리 역사를 망친 것들 1.조선종친과 오늘날의 친인척, 정치개입의 닮은꼴 2.부정부패, 망국으로 가는 고속도로 3.공신들이 망친 역사, 과거와 현재의 닮은꼴 4. 나라를 망친 庸君과 간신 4장 우리의 역사 어떻게 위기를 돌파하였나 1 100년에 걸친 개혁전쟁 개혁은 개혁주체와 개혁대상의투쟁이다. 생략 개혁할 수 밖에 없는 고려말 생략
개혁위원회를 설치한 충목왕과 공민왕
충선왕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끝난 50여 년 후에 즉위한 제29대 충목왕(재위 1344-1348)도 개혁 군주로 꼽힌다. 충목왕의 개혁 특징은 整治都監(정치도감)이라는 개혁의 중심 기관을 설치했다는 데 있다. 정치도감을 현대의 정치 용어로 바꾸면 일종의 개혁위원회가 될 것이다.
충목왕의 개혁은 원나라 順帝(순제)의 명에 따라 시작했다는 특징도 있다. 폐정를 바로잡으라는 순제의 명을 직접 받고 귀국한 王喣(왕후)가 金永旽(김영돈)과 함께 정치도감을 설치해 폐정개혁에 나섰던 것이다.
정치도감이 작성한 개혁안의 핵심은 권문세족들이 볼법적으로 빼앗은 토지를 조사해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백성들을 양민으로 환원시키는 것이었다. 정치도감 소속의 정치관(整治官)들이 지방에 파견될 때 그 지방의 안렴사가 존무사 등을 겸임했는데, 이는 그들에게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기 귀한 조치였다.
양광도에 정치관으로 나간 김규는 기황후의 친동생 기주를 체포해 서울(개경)으로 압송한 후 정치도감의 순군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역시 기황후의 일족으로서 양민의 토지를 탈점한 기삼만을 체포해 옥에 가두는 등 강력한 개혁을 실시했다.
이는 매우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원나라에 공물로 바쳐졌다는 순제의 제2황후가 된 기황후를 배경으로 한 기씨 일족의 위세는 당시 왕권을 능가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씨 일족의 전횡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쌍수를 흔들며 개혁작업을 환호했다,.
그러나 정치도감의 개혁 역시 2개월 만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기삼만이 옥중에서 사망하자 권문세족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권문세족은 기삼만의 사망을 빌미 삼아 개혁의 부작용을 거론하고 나섰다. 또 권문세족들은 정치도감을 원나라의 정동행성이문소에 고발하는 매국적 작태도 서슴치 않았는데, 정동행성이문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치관 徐浩등을 잡아 가두고 정치도감을 해체시켜 버렸다.
정치도감의 해체된 이후 고려 사회가 다시 개혁에 나서기 위해서는 공민왕을 기다려해 했다. 이하 생략
2.국회청문회와 조선의 국문, 어느 것이 우수한가 3 위기돌파의 지름길 인재 등용, 명군과 명재상 4. 직언에 목숨건 대간들 5. 조선의 사법부와 대한민국의 사법부 5장 21세기 우리의 역사는 앞으로 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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