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본문

p11.png 김시민(金時敏)

p05.png 3. 주요 자료 소개

 9) 전공비(戰功碑)-일명 진주전성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 소개

(2002. 4. 18. 정보미(문), 2005. 6. 19. 태서(익)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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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장군 전공비> (2003. 6. 16. 태서(익), 항용(제) 제공)

 

  *<김시민장군 전공비> 소개.    출전 : 문화재청 홈페이지

   1)명칭 :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일명 <진주전성각적비>(晉州全成却敵碑)’

   2)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1호

   3)지정일 : 1972.02.12    4)소재지 : 경남 진주시 본성동 499-1 (현 지주성내)

   4)해설 :  이 비는 임진왜란(壬辰倭亂) 3대첩(三大捷)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장(主將)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것이다.

당시 김시민장군은 진주목사(晋州牧使)로서 판관(判官) 성수경(成守慶),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등과 함께 주도면밀한 작전을 펼쳐 왜적을 격퇴하였다. 비문에는 1천명도 되지 않은 병력으로 10만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김시민장군은 적은 군사로서,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려오던 왜적의 예기(銳氣)를 꺾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死守)함으로써 왜병의 호남진출을 봉쇄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우리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고을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광해군(光海君) 11년(1619) 7월에 세워졌는데, 성균관 진사 성여신(成汝信)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韓夢寅)이 글씨를 썼다.

 

  *--높이 2.7m, 폭 0.99m. --일명 김시민장군전공비(金時敏將軍戰功碑).

   --광해군 11년(1619)에 건립되었으며 이암(泥岩) 계통의 석재로 만들어진 것으로 비의 아래쪽 및 뒷면은 박락이 심하다.

       비문은 『조선금석총람』에 실려 있다.

 

<진주전성각적비문>

 

晋州 金時敏全城郤敵碑

故牧使金侯時敏全城郤敵碑(篆 題)

銘幷 序

嗚呼急病攘夷忠所激也死守不去義所決也出奇郤敵勇所奮也能是三者而轟轟烈烈至今□□□□□」

故牧使 金侯是也萬曆壬辰夏四月倭奴傾國入寇直擣三都充斥八路 鑾輿霜露 廟社□□□□□」

列邑望風奔潰首鼠恐後獨 侯以本州通判許身殉國揮泣誓衆擊逐泗川固城之賊擒倭將□□□□□送于行在」

領兵赴金山攻破賊陣大張威聲使開寧錦山之賊皆聞風退去非忠之所激者□□□□□□」

未還之日聞倭賊乘虛直犯之報倍道疾馳入城中奮田單卽墨之臂勵張巡睢陽之志生不□□□□□」

仁非義之所決者乎月暈方急蟻援不至日夜巡城牛酒饗士雍容尊爼吹笛鳴琴軍情自牢恃以□□□□」

應會㨗出神恠 身先士卒飮血督戰賊勢大挫積屍如麻孤壘偏師實不滿千而乃能郤賊十萬之師□□□」

於勇者能若是乎忠如是義如是勇如是故大雷雨晦冥賊徒驚惑褫魄宵遁天所助也賊□□□□□□□」

意與之同仇人所愛也天助之人愛之而只恠夫命物兒多戲劇賊退之日適爲流炮所中而□□□□□□」

忽頹嗚呼痛哉嗚呼痛哉 朝廷嘉 侯之功初旣陞牧增秩繼 命擢拜摠兵終焉 特□□□馬□□□」

典其亦至矣州民追慕不己相與墮淚議欲立石庸識鴻功時南相國以興莅官于玆仍詢咨故老曰□□□」

全城之功實我 國變亂以來所未有也不可使泯滅無傳宜鑱諸金石以圖永久乃令□□□□謹□□□」

進曰嗚呼我 侯之忠與義與勇雖求諸古人未易得也 侯若在焉癸巳之賊必不以□□□□終」

□□□爲猿鶴萬卒化虫沙時耶命耶天意難諶 侯諱時敏字勉吾安東人世居京城代襲冠冕 宣祖朝□□□」

功臣封上洛君銘曰 氣銳而剛質毅而温義以爲幹忠以爲根全城郤敵如其功死於王事如其忠□□□」

峩晋水洋洋一石千秋山高水長」

皇明萬曆四十七年歲在己未七月 日立

州人成均進士成汝信□成均生員韓夢□□  

 

   * 지정번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        *소 재 지 : 진주시 본성동 499-1

   *지정일자 : 1972년 2월 12일        *규 모: 비높이 277㎝, 비폭99㎝       *시 대 : 조선 광해군 11년(1619년)

 

김시민장군(金時敏將軍)의 전공을 기록한 이 석비는 일명 진주 전성각적비(晋州全城却敵碑)라고도 불려진다. 이 석비는 현재 진주성내(晋州城內)의 계사순의단 앞<옛날에 충민사(忠愍祠)가 있었던 자리>에 단층 맞배지붕의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다.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은 조선(朝鮮) 중기의 무신으로 157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시하였으며, 1591년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었다가 이듬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목사 이경(牧使 李璥)을 대신하여 목사직(牧使職)을 승계하였다.

 

먼저 공은 성안의 백성들을 위무(慰撫)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을 수축하였으며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그해 8월에는 정식으로 진주목사(晋州牧使)에 취임하여 병기를 정비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구하였다. 또 9월에는 진해(鎭海)로 출정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다하라(平小太)를 사로잡는 등 전공을 세우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6일 적은 다시 진주성(晋州城)이 전라도(全羅道)로 통하는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중요 요충이어서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주력이 이곳에 있음을 알고 다시 진주성(晋州城)을 공격하자 성중의 부녀자와 노약자까지 총동원하여 적과 대치토록 하니 적군은 2만여 대군이었으나 아군은 3,800여명에 불과하였다. 6일간 악전고투 끝에드디어 적을 물리쳤으나 이전투에서 공은 적탄에 맞아 점차 상처가 깊어 갔지만 이를 비밀로하여최후까지 국사를 근심하는 등 충절을 다하다가 수일 후 진중(陣中)에서 서거하였다.

 

그 후 1604년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追錄)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석비의 형태는 조선시대(朝鮮時代) 일반형 석비의 형태이다.

       <출처 : 진주 시청 홈페이지 >

▣ 전성극적비명(全城郤敵碑銘) pp70~72.

--아하! 급병(急病)에서 양이(攘夷 : 오랑캐를 물리침)를 한 것은 충성심이 격동했기 때문이요 죽음으로 지키면서 가지 아니한 것은 의로써 결단했기 때문이며 기이한 계책을 내어 적을 물리친 것은 용맹을 떨쳤기 때문이니 이 세가지를 능히하여 촉촉(矗矗)하고 열열(烈烈)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이목을 빛낸 이는 고목사 김후(故牧使 金候)이시다. 만력 임진년(壬辰 : 선조 25년 1592년) 4월에 왜놈들이 경국(傾國)으로 입구(入寇)하여 바로 삼도(三都)를 찌르고 팔로(八路 : 전국)에 충척(忠斥 : 꽉매움)하여 난여(임금의 수레)가 상로(霜露)에서 지내게 되어 묘사(廟社 : 종묘와 사직)가 풍진(風塵)을 입게 되었다.

--여기에서 때를 따라 열읍이 바람을 만난 듯이 분궤(奔潰)되어 앞질러 숨고 뒤질 것을 두려워 하였는데도 홀로 김후(金候)께서는 본 주의 통판(通判)으로서 몸을 순국(殉國)에 허락하고 눈물을 뿌리면서 많은 무리들을 깨우쳐서 사천(泗川)과 고성(固城)의 적을 추격하고 왜장이 진해에 웅거해 있는 자를 사로잡아 행재(行在 : 임금이 임시로 있는 것)로 보냈으며 군사를 이끌고 금산으로 달려가서 다른 적진을파하였다. 이리하여 크게 위성(威聲)을 떨침으로서 개령(開寧)과 금산의 적으로 하여금 모두 듣고 바람처럼 퇴각케 하였으니 충성의 격렬한 때문이 아니겠느냐?

--관군이 출전하여 아직 돌아오지 못한 날에 왜적들이 빈틈을 타서 바로 범한다는 보고를 듣고서는 길을 배로하여 빨리 달려서 즉시 성중으로 들어와서 전단(田單 : 중국 전국시대의 장수)과 즉묵(卽墨 : 역시 중국의 충신 이름)의 수완을 휘두르고 장순(張巡 : 송나라 때 장수)이 회양(淮陽 : 중국의 지명)에서 행한 뜻을 가다듬어 살기를 구차스럽게 취하지 아니하고 죽음을 기필코 성인(成仁)하였으니 의로서결단코 때문이 아니겠느냐?

--월운(月暈 : 달무리)처럼 바야흐로 급한 때에 개미같은 원병도 이르지 않았지만 밤낮으로 성을 순시하며 소와 술로 군사를 먹이고 화한 얼굴로 술잔을 높이 들어 피리를 불고 거문고를 울리어 군사들의 정세를 스스로 지키고 믿게하여 두려움을 없게 하였으며 기틀을 타고 때에 응하여 갑자기 신괴(神怪)한 계책을 내어 몸소 사졸(士卒)보다 앞장섰으며 피를 마시고 싸움을 독려하여 적의 세력을 크게 좌절케하고적의 시체가 삼쓰러지듯 하였으며 외로운 보루에서 치우친 군사가 실제로 천명에도 차지 못했는데 능히 수십만의 적을 물리쳤으니 용맹의 떨침때문이 아니겠느냐?

--충이 이와 같고 의가 이와 같으며 용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큰 뇌우와 회명(晦冥)에 적도가 놀래어 미혹되고 혼을 뺏기어 밤을 타서 도망하였다.

 

--하늘이 도왔으랴? 성을 에워싼지 6주야에 민심과 천의가 더불어 함께 하였고 구인(仇人)마저 사랑한 것이다. 하늘이 도우고 사람이 사랑하였는데 또 괴부(怪夫)가 만물을 명령하고 아이들이 장난도 많고 심했던 것인가? 적이 물러가던 날에 마침 적의 류포(流砲) 때문에 마친 바가 되어 영(營)에서 별처럼 운명을 고했으니 장성(長城)이 홀연히 무너지는 듯 하였다.

--오호! 슬프고 오호! 슬프도다. 조정에서 김 후의 공을 가상히 여기어 처음에는 목사로 승진시키어 관질을 더하였고 이어서 총병을 탁배(擢拜)토록 명령하였으며 마침내는 대사마로서 추증하였으니 름숭(廩崇)한 은전 또한 지극하였다. 주민들이 추모함을 알지 못하여 서로 더불어 눈물을 떨어뜨리고 돌의 세워 홍공(鴻功)을 알게 하고자 꾀하더니 때마침 남상국(南相國), 이흥(以興)이 여기에 관으로 와서이어 고로(古老)에게 순자(詢諮)하고 이르기를 「김목사가 성을 보전한 공은 실로 우리나라에 변란이 있은 이래로 아직 있지 못했던 일이니 민멸되어 전하는 일이 없게하는 것은 불가하다. 금석에 새기어 영구토록 도모해야 한다」라 하고 곧 백성에게 기록하기를 명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삼가히 돈수(頓首)하고 나아와서 이르기를 「아하! 우리 후의 충과 의와 용은 비록 고인에게서 구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얻을 수가 없을 것이다. 후께서 만약 계셨더라면 계사(癸巳 : 임진년의 다음해)의 적은 반드시 진양을 원수로 삼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내 세분의 장수가 원학(遠鶴)이 되고 만졸(萬卒)이 사충(沙虫)으로 화했으니 때이던가? 운명이던가?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렵구나!」라 하였다. 후의 휘는 시민이요 자는 면오(勉吾)며 안동인이니 경성에 세거하여 대를 이어 관면(冠冕 : 높은 벼슬)을 살았다. 선묘(宣廟)에서 선무공신(宣務功臣)으로 기록하고 상락군(上洛君)으로 봉하였다.

--명하여 이르노니 “기상은 날카로우면서 굳세었고 바탕은 의연(毅然)하고도 온화(溫和)했네 의로써 줄기를 삼고 충으로써 뿌리를 삼았네. 성을 온전히 하고 적을 물리친 것은 그의 공이요, 왕사에서 죽은 것은 그의 의로다. 진산(晋山)이 아아(峨峨)하고 진수(晋水)가 양양(洋洋)하네.

--한덩이의 돌은 천추로 갈 것이니 산은 높고 물은 깊었도다. 신묘년(辛卯 : 효종 2년 1651년) 중춘(仲春)에 목사 김이위(金履褘)가 원의(院議)에 의지하여 처음은 간행(刊行)하였다.

-- 만력을미부사성여신찬 생원 한몽인서(萬曆乙未浮査成汝信撰 生員 韓夢寅書)

 

  <전성각적비 탁본 소개>

(2007. 3. 24. 발용(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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